통합대장경

觀、所緣、論釋

ABC_IT_K0625_T_001
017_0728_a_01L관소연론석(觀所緣論釋)


호법(護法) 지음
의정(義淨) 한역
박상준 번역


그대의 말[若言]이 독지인(毒智人)1)으로 하여금
지혜를 지극히 명료하게 하고
죄악을 제거하게 할 수 있으므로
머리 숙여 공경하고 그 의미를 관하나이다.

논(論)에서 “안식(眼識) 등의 식(識)이 외색(外色)을 소연연(所緣緣)으로 삼는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버리는 것[所棄事]과 받아들이는 것[所收事]에 대해서 혹은 버리기도 하고 혹은 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관찰한 (지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버리는 것의 체[所捨事體]와 전도된 인[顚倒因]이 이 논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등(等)’이라는 말은 저 색근(色根)을 의지하는 다섯 가지 식[五種識]을 포함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는 저 안 등의 식은 극대ㆍ화합에 대해서 한결같이 실사(實事)를 연려(緣廬)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의식(意識)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한결같이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 등의 오식은 세속유(世俗有)를 인정해서 수레 등 실제의 것을 연려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의식은 비록 실제의 경계[實事境]을 연려한다고 해도 부분만을 연려한다. 또 식과 서로 흡사한 모습을 연려한다 해도 실제의 경계를 떠나므로 그 실제의 경계는 없다. 안 등의 식은 경계와 서로 떠나지 않음이 성취되고 나서 비로소 이치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이 의식에 대해서 은근히 미세하게 논변하지 않는다.
또 익숙하게 수행한 과지(果智)로 아는 색[定果色]은 진실로 달가(呾迦:情計)가 진행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고, 보는 것에 일치해서[如] 안립(安立)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단지 문(聞)ㆍ사(思)로부터 얻어진 지(智)의 경계만을 관하므로 이와 같은 의식의 소연경(所緣境)은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 된다. 이것은 자취(自聚)를 연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과거와 미래를 연려하는 것은 실사(實事)가 아니기 때문에 무위(無爲)와 같다. 그러므로 이 ‘등(等)’이라는 말은 오식신(五識身)을 포함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근식(根識)이 이끌어 일으켜서 존재하는 의식의 경우, 이것은 어떠한가? 이것은 그 근식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혹 또 간격이 없다해도 소연(所緣)이 되는 색(色) 등이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혹 현재를 연려한다 해도 이것은 근식이 일찍이 받아들인 것을 연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의식이 스스로 외경(外境)의 체성(體性)을 직접 연려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하다면 귀머거리와 봉사 등이 마침내 없어지게 된다.
또 비량(比量)에도 어긋나서 지각함[知]에 다른 근[別根]이 있게 된다. 이 논은 다른 이들이 있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증색(增色)을 부정해서 차단한다. 그러나 의식에 대해서는 생각을 간직하지 않는다. 안(眼) 등의 모든 식은 색(色)을 의연(依緣)으로 삼아야 비로소 있게 되는데 무표색(無表色)은 단지 부작성(不作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없다고 인정하는데, 본래 의미가 이와 같다.
이것이 소연(所緣)에 대해서 현량(現量)이 되려 하는 것은 소취성(所取性)이고 사도(邪道)를 깊이 밟는 것이기 때문에 이 올바른 의미[正意]를 위해서 소연성(所緣性)을 차단해서 부정하는 것이며, 방편을 인유해서 이 소의성(所依性)을 차단하고, 동시에 일어나는 근[同時之根]과 공능(功能)인 색(色)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외경(外境)’이라고 말한 것을 말해 보자. 저들은 이 오식을 떠나서 따로 경계[別境]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들이 전도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또 그들이 취할 만한 다른 것이 있다고 집착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임시로 ‘경(境)’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 총취(摠聚)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총취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배척한다면 실사(實事)는 이치에 합당한 것인가?
진실로 여래가 힐난하는 것은 저들이 주장하는 전후(前後)의 도리에 저절로 서로 어긋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실사를 연려하고 총취를 연려하는 것은 그들이 허망하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승가에서 그들의 다른 허물을 서술하기 위해서 여기에서는 단지 이와 같은 허물만을 말한 것이다.
혹 극미를 인정하는 경우, 비록 극미가 공취(共聚)일 뿐이어서 생멸(生滅)하는 것을 본다 해도 실체 하나하나를 모두 연려하고 총취는 연려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마치 색(色) 등이 모든 근으로부터 현전(現前)해도 경(境)이 잡되게 어지럽지 않은 것과 같다. 저 근(根)의 공능(功能)이 각각 결정되어 있어서 실사(實事)에 대해서 끊어서 분할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극미가 소연경(所緣境)이 되는 것은 저 오식의 인성(因性)이기 때문인데, 저 안식(眼識) 등의 인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 오식 등이 친지분(親支分)의 의미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소연경(所緣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식(識)이 일으키는 인(因)이다. 왜냐하면 모든 연[諸緣:因緣ㆍ等無間緣ㆍ所緣緣ㆍ增上緣)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 그 소연연에 대하여 총취라고 집착하는 경우를 말해 보자. 저 모든 논자들은 많은 극미가 합쳐서 모인 것이 소연(所緣)이 된다고 집착한다. 왜냐하면 총취의 모습은 식이 일으킨 것인데, 저 총취로 말미암아서 그 지(智)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저 총취가 소연이 됨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만약 식에 저 모습이 있으면 저 모습이 이 식의 경계가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를 의론하는 사람들은 모두 저 모습이 이 이치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因)을 말하지 않으면서 이 인에는 유(喩)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비유하면 마치 인(因) 등이 인성(因性) 등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극미(極微)의 총상(摠想)은 소연성(所緣性)으로 성립된다.
또 만약에 식(識) 밖에서 실사(實事)를 연려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인정하면 바로 서로 어긋나는 잘못된 유법(有法)이 있게 된다. 그러나 법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칭한다. 이것이 바로 다른 것에 대해서도 모두가 함께 인정하는 것이다. 곧장 이것으로 유(喩)를 삼으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립의(所立義)에 소속되도록 해당시켜야 한다.
전량자(前量者)는 의도해서 말한다.
“논(論)에 본래 두 가지 인[二因]이 있는데 단지 인(因)의 소이(所以)를 밝힌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인(因)은 아니기 때문에 모두 유(喩)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저 상응인(相應因)이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를 나타내야 하고, 또 자기가 논하는 이치에 오류나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내서 다른 사람이 함께 인정하는 것을 밝혀야만 한다.
제5성(第五聲)2)으로 두고서 설령 인(因)이 되는 것이 있다고 인정한다 해도 비유하면 마치 있지 않은 것[非有事:토끼의 뿔 등]을 모두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으니, 자성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미가 인이 아니고 모든 극미의 체(體)가 인성(因性)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소연성(所緣性)에 합치되지 않는 말일 뿐이다. 왜냐하면 저 상(相)은 극미상(極微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근식(根識)은 저 극진(極塵)이 경계가 아니다. 가령 근(根)이라고 말하는 경우, 비유하면 마치 근에 대해서 실제로 이 식(識)이 직접 의지하는 인(因)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근상(根相)이 없기 때문에 저것의 경계가 아닌 것과 같다. 극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 상(相)이 없으면 그것이 이것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경(境)이라고 이름 붙여서 말하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자성(自性)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요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어서 분명하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다시 ‘요별한다[了]’고 이름을 붙이는가? 저 상(相)처럼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미를 말해 보자. 저 상(相)과 같이 식(識)이 일어나 그 체(體)를 따르기 때문에 여기에서 저 경계를 요별한다고 이름 붙였지만 실제로 식(識)이 일어나 그 체(體)를 따르기 때문에 여기에서 저 경계를 요별한다고 이름 붙였지만 실제로 식(識)을 떠나서 따로 요별하는 것은 없다. 어떻게 식(識)이 인성(因性)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기 앞에 경계의 모습이 있기만 하면 거울 속의 형상[鏡像]이 있는 것과 같으므로 모두가 이 경계를 요별하는 것이라고 이름 붙여서 인정할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식(識)이 극미 하나하나 자체의 모습을 따르지는 않고, 이 극미로 말미암아 인성(因性)이 소연이 된다고 인정한다면 근(根)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저 소연(所緣)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저 상응하는 이치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인(因)은 허물이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의미는 인성(因性)뿐만 아니라 식이 연려하는 대상인 모습[所緣之相]도 나타낸다.
만약 여기에서 말하는 것과 같아서 인(因)이 능립(能立)이 된다면 저 인성(因性)은 소연성(所緣性)이 되는가? 그렇다면 근(根)에 대해서도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이와 같다면 저 상(相)이 아닌 것으로 말미암는다. 그 의미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자기(自己)의 종(宗)에서 주장하는 것이 성립됨을 밝히기 위해서 다른 종의 허물을 서술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가 주장하는 의미만이 성립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식(自識)의 모습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극미는 경계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비유하면 안(眼) 등의 경우와 같다.
가령 저 인성(因性)이라는 말은 논주(論主)가 앞에서 다른 종을 수립해 놓고 다른 종도 함께 인정함을 밝힌 것이다. 이때 사용한 의미는 다른 종을 차단해서 부정하고 자기가 주장하는 능파(能破)의 의미가 성립됨을 나타내는 데 있으므로 이 말을 버린 것이다. 자기 종에서 결정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저쪽에서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여 다른 종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앞에서 다른 종과 함께 결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 곧 능파이다. 어느 겨를에 자기의 종[自宗]이 다시 비량(比量)으로 말미암겠는가? 일반적으로 부정(不定)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의혹을 불러들일까 염려된다. 이 때문에 반드시 다시금 인식논리[量]를 수립해야 한다.
혹 이로 말미암아 저 상(相)이 아니라면 모든 극미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요별하는 성품[了性]이 아닌 경우가 있다. 가령 상(相)을 식(識)이 일으키는 경우, 이것을 결정적으로 요별하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요별하는 성품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에 오직 이 인(因)이 소연(所緣)이 아니라는 것만을 나타낼 뿐이다. 가령 근(根)과 극미의 경우와 같다.
여타의 사람들은 모든 식(識)의 차별을 일으켜서 이것이 성립함을 나타낸다. 안식(眼識)은 극미색(極微色)을 요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저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나머지 근식(根識)과 같다. 여타의 식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근과 같다[如根]고 한 말은 반드시 바꾸어서 진실로 수레와 같다고 말해야 한다. 비유는 반드시 의미에 기준해서 따로 나타내야 한다.
또 이것이 인성(因性)이라고 말한다 해도 쓸모가 없다. 저 인이 비록 작용한다 해도 소연성(所緣性)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실제로 작용한다 해도 소리[聲] 등의 극미는 나머지 근(根)의 식(識)이 인(因)을 생기하게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識) 자체는 취현(聚現)함이 없기 때문에 인(因)의 소연(所緣)이 아니다[종(宗)]. 비유하면 근의 중미(衆微)와 같다[유(喩)]. 경(境)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식에 안포(安布)되는 것이므로 저 상의 본성은 실제로 없다. 그러므로 이치로 말하면 취현함이 없다고 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발라마노(鉢囉摩怒:極微)라고 말하는 것도 소연이 아니다. 저 능립(能立)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경성(境性)의 인식[量]이 잘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총취(摠聚)가 경(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모든 능립(能立)을 모아종(謨阿宗:大乘)에 대비시키면 모두 성품[性]이 성립되지 못하는데, 이치가 실제로 이와 같다. 그런데 총취는 실제로 저 상(相)이 있다. 소연은 인성(因性)이 없기 때문에 저 상(相)으로 말미암아 식이 총취상(摠聚相)을 일으킬 수 없다. 총취를 일으키지 못하는데, 이미 일으킬 수 없다면 이 식이 어떻게 이것으로 하여금 저것을 연려하게 할 수 있겠는가? 소연의 모습이 서로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소연(所緣)의 의미가 아니다. 앞에서 저 경우 이치와 상응한다고 말한 것을 따르면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것을 소연의 모습[所緣之相]이라고 하는가? 일반적으로 경(境)은 이치로 볼 때 반드시 자신의 모습과 흡사한 식(識)을 일으켜야 한다. 경(境)을 따라서 식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능생(能生)이면서 소연(所緣)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경(境)은 이치로 볼 때 반드시 심(心)과 심(心)을 일으키는 인(因)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일어나 경을 따라서 받아들여 언론(言論)을 일으키면 이 때 이것을 소연경(所緣境)이라고 한다. 만약 의미에 이 두 가지 상(相)을 갖추고 있으면 이것을 이에 비로소 합하여 소연(所緣)이라고 하는데, 두 가지는 능생성(能生性)과 소연(所緣)인 경(境)이다.
아급마(阿笈摩:阿含, 敎)를 인용한다면 이것을 곧바로 생연성(生緣性)이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因)을 일으키고 저 식이 연(緣)을 일으키면 모두 소연경 자체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익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다.
능생(能生)은 총취가 아니다. 이 능생자(能生者)는 실사(實事)가 아니기 때문이다. 총취는 실사가 아닌데 이는 (극미의) 유(有)와 화합의 취(聚)가 하나[一]이거나 다르거나[異] 하는 두 가지 본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실사가 아닌 것이 과(果)의 작용[用]과 공능(功能)을 일으키는 경우는 없다. 비유하면 마치 두 개의 달[月]과 같다. 가령 두 번째 달의 경우 식으로 하여금 두 번째 달의 모습을 일으키게 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는가? 근(根)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안근(眼根)이 흐려지는 경우 등으로 말미암아 그 밝은 덕성[明德]이 손상되는 경우, 곧바로 이 손상을 입은 근처(根處)로부터 두 개의 달[二月]이 나타난다. 이것은 실제의 경이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개의 달을 인유해서 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 소연경(所緣境)은 아니다.
가령 두 번째 달의 경우에도 이 식으로 하여금 비록 저 모습을 갖게 할 수 있다 해도 식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경(境)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실성[性] 등이 있는 실사(實事)가 아닌 것으로 말미암는다. 총취도 식을 일으키는 인(因)이 아니다. 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두 번째 달과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성립된다 해도 인성(因性)이 아니기 때문에 소연(所緣)이 아니다. 또한 두 개의 달의 경우와 같다.
또 이 두 번째 달의 비유로써 저 상(相)의 인(因)에 대비시키면 부정(不定)의 잘못을 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도 식(識)의 의리(義理)를 따라서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는 잘못이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연려하는 것을 말해 보자. 안식(眼識)은 청색(靑色) 등이 모여서 된 극미를 연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체(體)가 능생성(能生性)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여타의 근식(根識)의 경우와 같다. 이 비유는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달의 비유는 실사(實事)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인성(因性)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록 상성(相性)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저 경(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 두 번째 달에 인의 의미[因義]가 없음을 다시 말한 것이다.
만약 두 번째 달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두 가지 모습[二相]이 일어나는 것을 현견(現見)할 수 있는가? 식내(識內)에 안포되어 있는 공능의 균등한 차례에 손상을 입혀서 차별이 일어나게 하기 때문에 그 모습과 흡사한 식이 곧바로 일어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꿈을 꿀 때 경계가 일어남을 보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비슷한 것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허망한 견해를 일으키게 해서 달이 있는 곳에서 또다시 다른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안식(眼識)이 쌍으로 나타날 때 이 두 가지가 차례로 안식에 찍히는 것[印定]은 어렵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일으킨 후에 의식(意識)이 곧바로 ‘나는 달의 두 번째 달을 보았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모두가 달의 숫자에 착란을 일으킨 것이다. 왜냐하면 근(根)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만약 외경(外境)을 인정하지 않는 종(宗)에 대비시키면 이와 같은 모든 견해는 단지 허망한 집착일 뿐이다.
안식(眼識)의 소연(所緣)이 의식(意識)을 간격 없이 이끌어서 일으키는 것이 일시에 두 가지 모습을 쌍으로 연려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켜 두 개의 달을 볼 수 있겠는가? 또 소리 등을 연려하는 저 식(識)은 그 차제를 알지 못한다. 응당 두 가지 소리 등의 견해가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가? 눈이 좋은 사람의 경우에도 의식의 차제가 너무 많아서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색(色)을 의지하는 근의 식이 그 차별을 헤아려서 곧 바로 많은 두 가지 모습[二相] 등의 견해를 이루겠는가?
하나의 전달라(旃達羅:天上의 一月)가 식을 떠나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고 허망하게 두 개의 달로 늘려 놓고서 숫자에 착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는가?
여타의 사람들은 식을 떠나서 외부에 극미와 총취의 두 가지가 있다고 집착한다. 이것은 모두 한 부분의 의미를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또 앞에서 능립(能立)을 설명한 것처럼 배척할 수 있는 도리의 힘이 있기 때문에 경(境)이 된다고 여긴다면 서로 상응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 부분의 의미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체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과 능생성(能生性)의 두 부분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소연(所緣)이 되는데, 극미에는 첫 번째 경우가 빠져 있고 두 번째 치우친 경우에는 두 번째 것이 없다. 만약 이와 같다면, 앞에서 논의한 두 가지 과실(過失)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과 같으므로 다시 거듭 거두어 들여서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집상(集相)의 경우 모든 극미에 각각 자신의 집상이 있다”고 말하였다. 즉, 미진이 모여서 극미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는 모두 실제로 있다는 것이다. 극미가 있는 곳에는 총취상이 있어서 자기 모습의 식[自相識]을 일으키는 데 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응당 소연이 되는데 여기에 반드시 두 부분[雙支]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앞에서 성립된 것에서 더 나아가려 해도 말미암을 것이 없게 된다. 집취상(集聚相)이 곧 극미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약 모든 경(境)의 의미에 많은 모습이 있다면 이러한 모든 극미에 극미의 모습도 있고 집상(集相)도 있게 된다. 어떻게 두 가지 모습이 한 가지 일[一事]에 함께 있도록 할 수 있겠는가? 많은 모습이 있다는 것이 어찌 이치에 상응하는 것이겠는가?
무릇 색(色)이 취합한 모든 사물은 모두가 지대(地大) 등의 사대(四大)로 자성(自性)을 삼는데, 저 모든 자성에는 뛰어난 공능(功能)이 있어서 푸르거나 노랗거나 등은 사물과 근(根)을 따라서 요별(了別)한다. 이 많은 모습과 극미가 있는 곳에는 각각 총집상(摠集相)이 있다. 이 모습이 바로 안식(眼識) 등의 식이 진행하는 경계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현량성(現量性)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모든 극미가 있는 곳의 식(識)에는 취상(聚相)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진(塵)에 취상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식에 있는 취상은 말하지 않는가?
그 때문에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극미가 있는 곳에 총취상이 있다는 것은 방편으로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니, 또한 식에도 극미와 총상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만약 하나하나의 극미에 이와 같은 모습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총집상을 말하는가?
색취(色聚)는 많은 것이고 극미는 분별(分別)이라는 것은 이 논에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총취성(摠聚性)이기 때문에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앞에서 진술한 것과 같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또다시 다른 의취(意趣)가 있다고 진술하는가?
비록 실사(實事)에 서로 다른 따로따로의 체(體)가 있다 해도 이 모습은 단지 모여 있는 곳에서 서로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요별해서 알 수 있으므로 집상(集相)을 관한다고 설한 것이며 다른 여타의 것이 또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설사 모든 극미가 취합하여 총취성이 있다 해도 하나의 사물에 뛰어남[勝]과 하열함[劣]이 있으므로 사물에 따라 관하는 것이다.
또 가령 “창색(蒼色)은 지계(地界)이다”라고 설하는 경우, 이와 같은 등등의 설명은 진실로 이치와 상응한다.
비록 이와 같다고 인정한다 해도, 가령 극적(極赤)의 사물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많은 것이 모두 강해서 수용하지 못하는데, 수용할 수 있는 곳에서 이와 같은 의론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모든 극미는 근(根)으로 볼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고 설하고, 또 오직 지(智)3)의 경우에만 극미를 볼 수 있다고 설하는가?
왜냐하면 그 진상(塵相)은 식의 소연의(所緣義)가 아니고 근을 의지하는 식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근의 소연의가 아니며 오직 지(智)의 경우에만 관찰할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 어떠한 이치 때문에 극미는 현견(現見)하면 진형(塵形)은 보지 못하는가?
가령 견성(堅性) 등과 견고하고 윤택한 것 등은 비록 그 청색 등의 사물에 있다고 해도 안식 등 식의 경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근(根)의 공능(功能)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塵)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함께 인정해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것이) 어떻게 극미에 견성(堅性)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법(宗法)에 상대되는 것이므로 십처(十處)를 인정한다 해도 단지 대종(大種)일 뿐이다. 이 말에는 허물이 없지만 앞에서 이미 진술한 것이다.
그대가 병과 사발 등을 지각하는 경우와 그대가 병과 사발에 대해서 이와 같이 증득하는 경우에 곧바로 근의 지각과 서로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관하므로 경(境)과 식(識)은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근의 지각을 인유하고 나타나는 경을 따라서 서로 일으키기 때문에 식과 경은 다르지 않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병과 사발 등의 중미(衆微)는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극미는 총취상으로 그 경계를 삼는다. 저 병 등의 자체를 요별할 때에 저 많은 취(聚)의 체에 조각조각[片別]이 있는 것은 진실로 아니다. 저 실사(實事)의 모습[相貌] 밖에서 다른 적취의 체를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근식을 연려하는 경우에 곧바로 만드는 모습과 전혀 차이가 없다. 이것으로 말미암아야 비로소 진(塵)의 자체가 소연성(所緣性)이 된다. 또 저 다른 모습이 없는 곳에서 덮고 찾는 것은 이해성(異解性)을 연려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연성이 된다.
가령 청색 등을 연려할 때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상(相)은 형상(形狀)이다. 배치에 차이가 있으면 병ㆍ사발ㆍ목구멍ㆍ배 등에 다른 형상이 있게 되는데, 경(境)에 다름이 있으면 지각에도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진실로 이치에 상응하는데 이와 같은 일은 없다. 근식(根識)의 소관경(所觀境)인 극미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총취는 삼불률지(三佛栗底:假有)일 뿐이며, 이 총취는 근식의 경계[根識境]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척파하였다. 또 경이 다르지 않은 경우에 식의 모습[識相]에 다름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와 상응할 수 있다.
또 어떻게 모든 극미에는 다른 모습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가? 극미의 형상에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릇 지분(支分)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물은 방처(方處)가 바뀌는 곳에 반드시 다른 형상이 있다. 그러나 모든 극미의 체는 궁극에 이르기까지 방분(方分)이 없다. 이와 같다면 어떻게 다른 형상을 얻을 수 있겠는가? 병과 사발 등의 사물을 다르게 할 수 있다 해도 극미성(極微性)4)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것은 일체(一體)여서 증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취에는 실제의 사물이 있지 않음을 단정적으로 알 수 있다.
무릇 모서리를 네모나게 배열한 모든 형상은 모두 근식이 진행하는 경계가 아니다. 옛날부터 이와 같이 많이 힐책하였는데, 그 의미는 그 식에 다른 모습이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과 사발 등을 지각함에는 다른 사물로 소연경(所緣境)을 삼지 않는다. 비유하면 마치 소거(蘇佉:樂)와 독거(毒佉:苦)의 실정과 같다. 그러나 극미는 다른 경이 아니다. 곧 이는 그것이 경성(境性)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가령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하는 경우를 말해 보자. 이와 같이 말하는 의미는 앞에서 “다르지 않은 사물로 경을 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미 성립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저들이 의도하고 말하는 것은, 극미가 경이 되는 것은 실제로 다름이 없는데 형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이다.
극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나도 함께 인정해서 이미 성립된 것이다. 왜냐하면 극미의 양(量)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물이 다른 경(境)임을 나타낸 것이므로 이미 성립된 것이 아니라고 답한다.
혹 모든 근의 식에 대해서 병과 사발 등은 극미의 상상성(相狀性)이 없기 때문에 소연(所緣)이 아님을 밝힐 수 있다. 비유하면 여타의 식과 같다. 여타의 식은 의식을 말한다. 혹 나머지 근식은 청색만을 연려할 때에는 노란 모습[黃相]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극미의 체는 많지만 차별이 없는데 모든 근식은 차별상이 있기 때문에 진상성(塵狀性)이 없다는 것이 모두 성립된다.
극미의 차별에 대해서 게송으로 말한 것은 앞에서 문답한 것과 같다. 만약 총취가 잠복된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형상은 실제의 경계가 아니라는 이치가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뛰어난 이치는 성립되어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은 등등의 극미를 떠난다고 말한다면 저 병과 사발 등을 떠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저 지각이 곧바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군(軍) 등과 같다. 여기에서는 병 등이 실제의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병 등은 실사(實事)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여타의 종에서 모든 것이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가 서로 어긋나는 것을 버리지 못한 것임을 나타낼 수 있다.
가령 소리 등에는 푸르다는 지각이 있지 않다. 이 형상은 따로 잠복된 모습이고 저 병 등이 경성(境性)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해가 다른 도리를 많이 인용한다 해도 끝내 극미실사의 체에 차별이 있음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내경(內境)의 체를 들어서 자종(自宗)에서 수립한 소연사(所緣事)라고 말하면서 소연경이 없다고 폐지해 버리면 곧 세속과 어긋나게 되고 자종(自宗)에서 인정한 것과 어긋나는 잘못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네 가지 연성(緣性)을 경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성(內聲)이라고 한 것은 식을 떠나지 않은 소연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경의 체[境體]라고 한 것은 소취분(所取分)인데 이 식이 전변해서 경상(境相)의 의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식 밖에 별도의 부분이 있어서 이것을 경이라고 하고자 하면 어긋나는 것이니, 세속의 잘못이 여전히 많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세속에서는 경(境)이 밖에 있다고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령 밖에 있어도 이것은 식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가령 저 소취분이 밖에 나타나는 경우에 어리석은 사람은 “나는 경(境)을 보았다”고 하면서 만상(慢想)을 일으킨다. 실제로는 이것은 인(因)이 될 뿐인데, 가령 안식에 머리카락 등이 나타나는 경우에 외경(外境)은 없는데도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외부에 존재하는 경계는 없다. 왜냐하면 요성(了性)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치로 궁구하고 찾아보아도 외부에 존재하는 자체는 요별할 수 없다.
비록 저 실제로 있는 외상(外相)을 인정한다 해도 이것은 식으로 연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것은 식의 상성(相性)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미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외상(外相)과 비슷한 것이 나타나는 경우, 이것이 바로 그 소연연(所緣緣)이다. 저 상(相)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치와 서로 상응하기 때문이다”고 한 것은 이것이 인성(因性)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고, “자상(自相)이 이치와 상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또 소연의 체상(體相)에 차별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식에 저 상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경우 등은 외사(外事)에 의지해서 경으로 삼는 것을 빌리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가령 정(情)으로 헤아리는 경우에는 경상(境相)이 따라서 생기한다. 또 정(情)으로 헤아리는 것은 식을 떠나서 밖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상(境相)은 원래 식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내경상(內境相)이라고 이름 붙였다. 여기에서 내성(內聲)이라고 한 것은 식을 떠나 있지 않음을 말했을 뿐이다. 본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떤 것을 내부[內]에 대비시키겠는가?
또 이것으로부터 생기하는 경우 이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생기한다. 혹 이것을 따르는 경우, 제칠식(第七識)과 오식(五識)의 뜻에 차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을 떠나서는 식을 얻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이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식이 일어난다. 제오식을 말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법[二法]이 합치하기 때문이고, 소연을 밝힌 것은 도리가 합치하기 때문이다.
능립(能立)을 나타내는 경우를 말해 보자. 이것은 단지 공상(共相)의 경계로 능립을 삼는 것일 뿐이다.
차별을 따르는 경우, 비야남(仳若南:第六識)은 외사(外事)를 연려하지 않고 꿈에서 나타낸다.
가령 “두 가지가 한 가지의 능립이 된다”고 설하는 경우, 첫째는 식에 저 상(相)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이것이 다시 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작용을 연려해서 비로소 한 가지 인식[一量]이 성립되는 것이다.
또 내상(內相)이 있다고 인정한다 해도 단지 외경(外境)이 허망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관하기 때문에 다른 모습이 없다고 말한다.
만약 정(情)으로 경(境)이 그 받아들이는 수(受)의 작용을 일으켜서 경의 모습을 거울처럼 안에 배열한다고 헤아리면서 이치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저 식의 한 부분이 동시에 식의 연(緣)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 소취분은 식을 떠나서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식의 한 부분이 다시 식을 일으키는 것이 되어 자체가 서로 어긋나는 잘못이 있게 된다. 또 이는 저것의 한 부분의 성품이기 때문에 비유하면 마치 능취분(能取分)과 같게 된다. 이와 같다면 곧바로 능생성(能生性)이 아닌 것이 된다.
단지 외상(外相)으로 말미암아 염식(染識)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이 경우에는 상분(相分)과 식(識)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되는데 소의 두 뿔처럼 인과성(因果性)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 일시(一時)에 함께 있는 것은 아니므로 함께 하는 소리[同伴聲]로 합쳐서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역시 식 밖에 다른 경(境)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다면 어떻게 동반성(同伴性)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치는 실제로 이와 같지만 모습[相狀]의 차별력(差別力)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다르다고 헤아려서 나타내는 것이니,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 다른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마침내 이 식(識)에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연성(緣性)은 단지 집착하는 것일 뿐이고 분별하는 것에 자성(自性)의 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다면 참된 연성(緣性)이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서로 어긋남이 없다.5) 연(緣)의 뜻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차별이 나는 경에 집착하는 여타의 것도 함께 인정한다. 가령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멸하고 동분(同分)인 식이 단절되어 끊어지는 경우, 이 식(識)도 네 가지 많은 연(緣)으로 연(緣)을 삼는다.
017_0728_a_01L所緣論釋護法菩薩造大唐三藏法師義淨奉 制譯若言能令毒智人 爲令其慧極明了及爲消除於罪惡 稽首敬已觀其義論曰諸許眼等識者於所棄事及所收事或捨或取是觀察果故所捨事體及顚倒因是所顯示此中等言謂攝他許依其色根五種之識由他彼一向執爲緣實事故意識不然非向故許世俗有緣車等故縱許識緣實事境有其片分亦能將識相似之相離無其境於眼等識境不相離得成就已方爲成立是故於此不致慇懃又復於串修果智所了色誠非呾迦所行境故及如所見而安立故今此但觀聞思生得智之境也如斯意識所緣之境全成非有此於自聚不能緣故復緣過未非實事故猶若無爲爲此等言攝識身若爾根識引生所有意識斯乃如何非此共其根識同時或復無閒皆滅色等爲所緣故或緣現在此非根識曾所領故斯乃意識自能親緣外境體性此則遂成無聾盲等復違比量知有別根此遮增色是所欲故然於意識不復存懷眼等諸識色爲依緣而方有故無表但是不作性故自許是無本意如此此於所緣將爲現量是所取性故深履邪途故爲此正意遮所緣性因便方遮斯所依性同時之根功能之色將設許之言外境者彼執離斯而有別境此顯其倒顯彼執有異事可取故言境也如何當說或緣摠聚由非摠聚實事應理誠如來難自前後道理相違余復何失緣其實事及緣摠聚是所許故將欲敍其別過爲此且放斯愆或許極微雖復極微唯共聚已而見生滅然而實體一一皆緣不緣摠聚猶如色等設自諸根悉皆現前境不雜亂彼根功能各決定故而於實事斷割有能一一極微成所緣境彼因性故彼眼等識之因性故是彼生起親支分義然而有說其所緣境是識生因在諸緣故或復於彼爲摠聚者彼諸論者執衆極微所有合聚爲此所緣相識生故由於摠聚而生其智是故定知彼爲所緣如有說云若識有彼相彼是此之境此二論者咸言彼相應斯理故若不言因此因無喩猶如因等成因等性極微摠相是所緣性而成立之又若自許不於識外緣其實事應有有法自相違過然法稱不許斯乃於他亦皆共許卽以爲喩若但如所說應於所立義而屬當之前量意云本二因但是明因所以不卽是因無共成之喩爲此須出彼相應因以如此次復顯己所論之理是無謬妄明他共許置第五聲設許爲因猶如共諸非有事非有性故非因極微且縱許諸極微體是其因性但說不是所緣性由非彼相極微相故云根識極塵非境如根者言猶如於縱實是識親依之因無根相故彼之境極微亦爾諸無其相彼非斯境者何謂也爲此說其名境者等言自性者謂自共相了者定也如何復名爲了耶如彼相生故此言意者同彼相貌而識生起由隨彼體故則說名了彼境也而實離識無別所可與其識爲因性耶然而但有前境相狀於其自己猶如鏡像而安布共許名斯爲了其境然非極微一自體識隨彼狀由此極微而爲境縱有因性由非因義所緣如根雖是因性不爲所緣若由因性許作所緣根亦同斯應成彼也斯言前說相應理故因有不成過然而意顯非唯因性卽是其根所緣之相若如所說因將爲能立者則彼因性故爲所緣性耶於根亦有成不定過若如是由非彼相其義何也爲明成立自己之宗由非但述他宗過故已義便此言爲彰非卽能生自識相故非極微猶如眼等若其是彼因性之言將爲論主前立他宗明他共許此時意在遮他顯己能破義成置斯言矣宗許定彼不定他宗恐其不許向者與他出不定成卽是能破何假自宗更由比量凡言不定未必決定不成恐致疑惑是故更須立量或可由斯非彼相者於諸極微非定了性如相識是謂決了旣彼非故明知決了亦無由應可說非決了性故惟出此不是所緣如根極微有餘復作諸識差別顯其成立眼識不能了極微無彼相故如餘根識如是餘識此應言如根之言誠爲乘也其喩別須義准而出又復縱是因性之言爲無用矣彼雖因用非所緣性此亦如是實爲有用然非聲等所有極微可是餘根之識生因有說於識自體無聚現故非是所緣如根衆微由境相狀安布於識是彼相性此非有故理卽說其無有聚現如是且述鉢囉摩怒不是所緣彼之能立不相應故及非境性量善成故若爾摠聚是境然由所說諸有能立若望謨阿宗皆有不成性理實如此然而摠聚實有彼相可是所緣無因性故由彼相識不能生其摠聚相識摠聚不生彼旣不生此識如何令此緣彼所緣之相不相應故非所緣義由此前云彼相應理斯乃不成若爾何謂所緣之相凡是境者理須生其似自相識隨境之識彼是能生彼是所緣有說凡爲境者理必須是及心生起之因也此旣生已隨境領受而與言論于時名此爲所緣境若義具斯二種相者此乃方合名爲所緣是能生性所緣之境引阿笈摩卽便是說生緣性由是生因彼識生緣共許是其所緣之境自體相現此中無益故不言之能非摠聚是能生者非實事故由其摠聚不是實事此於有聚一二性不可說故又復無有不實之事能有生起果用功能猶如二月如第二月不能生識第二月相若爾何因有斯相現根損害故若時眼根由瞖等害損其明德遂卽從斯損害根處見二月生非實境故由此二月縱有彼相然非斯境如第二月縱令此識有彼相狀由不生故不名斯境此由非實事有性等摠聚不是識之生因非實性故如第二月由斯方立非因性故不是所緣還如二月又復將此第二月喩於彼相因應知說其不定之過復由識義理就故過是相違復緣眼識不緣靑等聚集極微爲由彼體非生性故如餘根識此喩共許故不別言第二月喩非實事故應知此是於非因性而成立之如所說之縱有相性然非彼境斯言復是非彼因義若言無有第二月者如何現見有二相生謂從內布功能差別均其次已似相之識而便轉生猶如夢時見有境起由此令似妄作斯解於其月處乘更睹餘諸有說云而於眼識雙現之時此二次第難印定故將作同時於斯二種相貌之後意識便云我見月之第二月也或復有云於共許曰數有錯亂由根損故若望不許外境之宗如斯衆見但是妄執由非眼識所緣無閒引生意識能於一時雙緣兩相作如斯解見二月耶又於聲等緣彼之識不知其次應有二聲見同時起耶好眼之人意識次第尚多難解何況依於色根之識測其差別便成多有二相等見一旃達羅若時離識許實有者斯乃何勞妄增二月而言於數有其錯亂離識之外執有二種極微摠聚此皆闕其一分義故又如所說能立能斥道理力故以之爲境成不相應闕一分故自體相現及能生性具斯二分方是所緣於極微處卽闕初支於第二邊便亡第二若如是者如向所論二種過失重更收攝令使無差有說集相者諸極微處各有集相卽此集塵而有相現隨其所有多少極微此皆實有在極微處有摠聚相生自相識實有性故應是所緣斯乃雙支皆是有故此卽於前所有成立求進無由爲聚集相卽是極微爲不爾耶由諸境義有衆多相卽此諸微許有微狀亦有集相如何得令兩相共居一事爲應理乎有衆多相凡諸有色合聚之物皆以地等四大爲性彼皆自性有勝功能靑黃等相隨事隨根而爲了別卽此於其衆多相處極微之處有摠集相卽將此相爲眼等識所行境故是現量性若如是者於諸微處識有聚相何不言之塵有聚相何不言識有聚相耶所以復云然於微處有摠聚相卽以此言爲其方便亦顯識有極微摠相若爾一一極微有此相者何故復云摠集相也色聚衆多極微分別是論所許此卽是其摠聚性故不是實有如前已陳何勞重述有別意趣縱令實事別別體殊然此相狀但於集處更相藉故而可了知說觀集相更無餘矣又復設使諸有極微合聚爲性然而一事有其勝劣隨事觀之且如蒼色是其地界如是等說誠爲應理縱許如是如極赤物初生起時多事皆强遂無容矣依容有處作此譸議若爾如何說諸極微非根所見又復如何唯有如知能見極微由其塵相非是識義非是依根識之境界故曰非根非根之義獨是如知之所觀察復如何理現見極微塵不睹如堅性等如堅潤等於彼靑等縱有其事非是眼等識之境界根之功能各決定故塵亦如是無違共許豈非顯微無其堅性由別體故此對宗法許其十處但是大種斯言無過然此已陳汝瓨甌等覺者汝如是證於瓨及甌便成根覺相似而觀於其自境識不差故復由根覺隨現有而相生故識境不別如何得知匪於其瓨甌等處衆微有別而此言然諸極微以摠聚相而爲其境非於彼瓨等自體了別之時於衆多聚體有片別彼之實事相貌之外無別積聚體可得故緣彼根識便成相無有差殊由此方成於塵自體所緣性復非於彼無別相處覆審之異解性故如緣靑等若相殊故言殊者相謂形狀布置有殊於其瓨甌咽腹底等殊異狀故由境有別覺乃遂殊誠爲應理無如是事非於根識所觀境處極微有殊然此摠聚三佛栗底而此摠聚非根識境此已㡰破復非非境有別而令識相有殊可爲應理復如何知諸極微處別狀非有極微形相無別異故凡諸事物有支分者必有別狀於方處轉然諸極微體無方分至窮極處斯卽何曾得有形別於瓨甌等縱令事別而極圓性曾無有殊斯乃一體無增減故是故定知於摠聚處非實物有凡有方隅布列形狀皆非根識所行之境上來如此衆多詰責意欲顯其有別相故瓨甌等覺非以別事爲所緣境猶若蘇佉毒佉情矣然而極微是不別境卽是彰其非彼境性若相殊故方言殊者此言意顯向云非以不別之事而爲境者是立已成彼意說言極微爲境其實無殊然爲形相別故別也極微無殊我亦共許是立已成由諸極微量無別故此顯殊事是其別境答非已成或可此明諸根之於瓨甌等無有極微相狀性故非是所緣猶如餘識餘識謂意或餘根識但緣靑時無黃相故於諸極微雖體衆多無差別故而諸根識差別相故斯乃共成非塵狀性頌於極微差別之言同前問答若其摠聚許覆相已形非實境理方可成如斯勝理是應成立若言離極微如是等如離彼者彼覺便無故猶如軍等此言瓨等非實義由非實事此顯餘宗諸非不皆非捨彼相違事也如於聲等覺非有此形相別是覆相有以其瓨等爲境性故雖引衆多異見道理不能顯其極微實事之體有其差據內境體謂立自宗所緣之事也摠撥無所緣境便有違世自許宗過四種緣性於經說故此中內聲顯不離於識而有所緣言境體者是所取分是識變爲境相之義然在識外別分而住將以爲境違世之過如前尚在由諸世俗共許於境在外而住應云如外此不離識其所取分如外而現云我見境生其慢想寔此爲因如於眼識現其髮等外境雖無謂實無其在外之境非了性故以理究尋不可了其自體定在於外縱令許實有外相然非識緣非彼相性故非極微相現如似外相顯現之時此卽其所緣緣也彼相相應故由若與相理相應故者此卽是此如因性等由與自相理相應故復顯所緣差別體相如云識有彼相故等明不假藉外事爲境如情所計境相隨生又情所計若離於識非外有故此之境相元不離識由此名爲內境相也此中內聲言不離識本無其外望誰爲內及從此生有此方生或可從此由第五義有別故由非離境得有其識是故有此方乃識生不言第五二法合故明其所緣道理合故顯能立也此卽但以共相之境爲其能立若差別者其仳若南不緣外事於其夢位以爲顯示如說二種爲一能立識有彼相復是識生緣此二用方成一量且復縱許有其內相但觀外境妄有相故言無地相如情計境生其領受境之相狀列在於內將爲應理如何是彼一分得作同生之緣其所取分離識無故斯之一分復還生識便成自體相違之過復還是彼一分性故如能取分斯乃便成匪能生性但由外相染識而生此卽相分與識同起非二同時有因果性如牛兩角又匪於其不異之事同在一時以同伴聲而合說之亦非於識別說有境斯乃如何名同伴性理實如是然由相狀差別力故猜卜爲異而表宣之由有見分相分之殊遂將此識而有差別若如是者緣性亦應但是所執非分別事有自性體斯乃應成非眞緣性此因相違由其緣義於餘所執差別之境亦共許之如等無閒滅同分之爲斷割時此識亦以四種多緣爲緣也觀所緣論釋一卷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잘못된 견해를 가진 이를 말한다. 외도의 아(我)ㆍ법(法)에 집착하는 것은 견사독(見思毒)이고, 불교 내 법(法)에 집착하는 것은 무명독(無明毒)이다. 이러한 독과 상응하므로 독지(毒智)라고 한다. 문장이 생략된 부분이 많아[《관소연연론석직해(觀所緣緣論釋直解)》(속장경 83)]를 참조하여 풀이하였다.
  2. 2)산스크리뜨 문법에 대한 내용이다. 산스크리뜨에서는 명사ㆍ형용사에 여덟 가지 격변화가 있다. 그 가운데 다섯 번째 종격(Ablative:~로부터, ~때문에)을 말한다.
  3. 3)고려대장경에는 ‘지(知)’로 되어 있으나,《관소연연론석직해》에 의하여 ‘지(智)’로 풀이한다.
  4. 4)고려대장경에는 ‘극원성(極圓性)’으로 되어 있으나, 많이 다른 판본(신수대장경 참조)과《관소연연론석직해》에 의하여 ‘극미성(極微性)’으로 한다.
  5. 5)고려대장경에는 ‘인(因)’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판본(신수대장경)과《관소연연론석직해》에 의하여 ‘망(罔)’으로 풀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