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용담집(龍潭集) / 龍潭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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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집龍潭集
용담집龍潭集 서序
나는 용담 스님을 뵌 적은 없으나 그의 제자 국태國泰와 교류한 지 오래고, 국태를 스승으로 섬기고 있다. 또한 문도가 팔도에 거의 가득하고, 국태 스스로 “나보다 현명한 분이 또한 많지만 용담이야말로 바로 한 시대 선가의 종장이시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국태를 전송하며 지은 시에서 말하였다.

佛言淨土業    부처님은 정토의 업을 말씀하셨고
於世孝爲先    세상에서는 효를 으뜸으로 여기지
今送吾師去    이제 떠나는 우리 스님 보내자니
臨分感涕漣    헤어짐 맞아 흐르는 뜨거운 눈물

내 이 시를 매우 기이하다 여겨 전체 원고를 찾아 살펴보았더니, 충과 효에 힘쓴 것이 끝이 없었다. 시는 진실로 스님이 숭상한 바가 아니었고, 그가 성정性情을 귀하게 여겼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무릇 선가에서는 세상을 벗어나 산으로 들어가서는 생각을 가리켜 망령된 것이라 하며 선이든 악이든 가림 없이 일체를 모조리 끊어 공空으로 귀결시킨다. 공하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보면서 왜 감회에 젖었을까? 이 스님이 공에 도달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종이나 북이나 거문고나 비파의 경우, 북이 궁궁宮宮하고 울리거나 북이 각각角角하고 울리면서 오음五音과 육률六律1)에 신령스럽게 감응하며 어긋남이 없는 것은 그 속이 텅 비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 물건이 그 속에 있다고 멋대로 간주한다면 절대로 그렇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만물의 얽힘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도 참된 성품은 온전히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은 이미 공에 도달한 분일까? 종·북·거문고·비파는 그 속이 텅 빈 것은 같지만 나오는 소리는 같지 않으니, 공에도 역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불의 공함은 곧 밝음이고, 물의 공함은 곧 맑음이며, 흙과 나무의 공함은 곧 꺾이고 함몰되는 것이니, 공에도 역시 공할 수 있는 것과 공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일까?
(스님은) 감회를 그치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에 이르렀고, 눈물을 그치지 못해 한숨을 쉬며 탄식을 터트리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시를 짓게 되었다. 감응하면 눈·코·입 세 기관이 눈물을 흘리거나 콧물을 흘리거나 한숨을 내쉬고 탄식을 터트리게 된다.

009_0677_b_01L[龍潭集]

009_0677_b_02L1)龍潭集序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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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未見龍潭師而與其弟子國泰交久
009_0677_b_05L以國泰而師事之且門徒殆遍八路
009_0677_b_06L國泰自言賢於我者亦多龍潭乃一
009_0677_b_07L世禪宗也其送國泰還鄕詩云佛言
009_0677_b_08L淨土業於世孝爲先今送吾師去
009_0677_b_09L分感涕漣余甚異之索全藁以觀
009_0677_b_10L忠孝亹亹不已詩固非師所尙
009_0677_b_11L其性情之貴可見已夫禪家離世入山
009_0677_b_12L指想爲妄無擇善惡一切屏絕
009_0677_b_13L歸於空空則見人還鄕何以有感也
009_0677_b_14L是師未及於空而然耶如鍾鼓琴瑟
009_0677_b_15L宮宮動鼓角角動五音六律靈應
009_0677_b_16L不爽以其中虛也若以一物橫看
009_0677_b_17L在裡則必不爾故物累盡去而後
009_0677_b_18L性乃全然則師已至於空者耶鍾鼓
009_0677_b_19L琴瑟其中之虛同而聲出不同
009_0677_b_20L亦有異耶火空則明水空則淸
009_0677_b_21L木空則折陷空亦有可空不可空者耶
009_0677_b_22L感之不已至於垂涕垂涕之不已
009_0677_b_23L於噓唏發歎因之爲永 [1] 感則目鼻
009_0677_b_24L口三官或有泪或出涕或噓唏發

009_0677_c_01L하지만 귀만은 거기에 응하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귀만 홀로 그 공함을 얻은 것일까? 누군가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내가 그것을 들었다면 그건 귀로써 한 것일 뿐이니, 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감응하지 않는 자도 있고 감응하는 자도 있지만 감응하든 감응하지 않든 귀는 함께하지 않으니, 귀는 곧 공한 것일까? 듣는 것은 눈으로 하지 못하고 입으로도 하지 못하고 귀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데, 귀가 단지 공할 뿐일까? 귀가 들을 수 있었기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국태 사미에게 주다≻라는 시로써 어린 제자의 귀에 일러 준 것이다. 그렇다면 느끼는 바가 없는 것이 듣지 못한 것과 같아야 “귀는 공하면서 스스로 공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일까? 스님은 분명 통달하셨겠지만 이제는 허사가 되었으니 물어볼 길이 없구나.
무자년(1768) 5월에 남애기인南崖畸人 신순민申舜民 짓다.

009_0677_c_01L而惟耳無所應抑耳獨得其空耶
009_0677_c_02L人言還鄕而我之聞之者以耳耳
009_0677_c_03L謂空耶聞人還鄕而有不感者
009_0677_c_04L感者感不感耳無與焉耳即空耶
009_0677_c_05L聞之不以目不以口而耳能之
009_0677_c_06L直空而已耶耳能聞而告以還鄕於赤
009_0677_c_07L子之耳則無所感如不聞耳是空
009_0677_c_08L而自有不空者耶師應達之而今也
009_0677_c_09L已矣無以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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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仲夏南崖畸人申舜民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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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오음五音과 육률六律 : 오음五音은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이고, 육률六律은 십이율十二律 중 양음陽音에 속하는 황종黃鐘·태주太簇·고선姑洗·유빈蕤賓·이축夷則·무역無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