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송계대선사문집(松桂大禪師文集) / 松桂師遺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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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대선사문집松桂大禪師文集
송계 대사 유권 서문
송계松桂 대사 나식懶湜은 근세의 운석韻釋(詩僧)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린 시절 기산岐山1)에서 학업을 닦을 때 식湜 공과 서로 안면이 있었다. 당시 대사는 70여 세였지만 외려 매일같이 불자를 잡고 경전을 강설하였는데, 대사를 따라 법문을 듣는 자가 매우 많았다. 강설 중에 기운이 지치고 뜻이 다하면 문득 높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는데 무심한 듯(嗒然2))고상하고 꾸밈이 없었다. 시주詩酒를 질탕히 즐겨 스님과 소객騷客들을 만날 때 가끔은 계율로써 스스로를 대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마음속으로 유독 기이하다 여겼다. 식 공을 한유韓愈3)가 칭찬한 원혜元惠4)·영靈·문창文暢,5) 혹은 고한高閑6) 상인上人의 무리라 한다면 과연 어떠한가.
이제는 어느덧 60년이 흘러7) 식 공을 다시 뵐 수 없게 되었다. 근래에 대사의 법손인 위성偉性 장로가 용사龍寺8)에서 내방하여 송계松桂 대사 원고 한 권을 소매에서 꺼내 보이며 번거로운 것을 산삭刪削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한편 책머리에 서문을 써 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저의 법조사法祖師께서는 대암大菴 스님을 모셨는데 스승이 입적하자 그 시문을 엮어 돌아가신 용와慵窩 선생9)에게 서문을 부탁한바, 그 인본이 현재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감히 선생님의 손을 빌어 다시 은혜를 바라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뜻을 저버리고 싶지 않아 대략 그 내력을 적는다.
식 공은 본래 명문가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출가하였다. 유람하기를 좋아하고 시에 능하여 당대의 어진 사대부들과 수창하여 압도할 때가 많았으니, 능히 소순기蔬筍氣10)를 벗어나 간간이 전할 만한 시구가 있었다. 시문과 필법으로 또한 공문空門에서 칭찬을 들었다. 법랍 66세를 누렸고, 기산岐山에서 시적하였다. 임종할 때 차를 마시고 게송을 지었는데, ‘온전한 큰 법도 홀로 밝도다(孤明渾大閑)’라는 구절이 있어 그 문도들이 일컫곤 하니,

009_0570_a_01L[松桂大禪師文集]

009_0570_a_02L1)松桂師遺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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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桂師懶湜者近世韻釋也記余爲
009_0570_a_05L童子攻業岐山已與湜公相識
009_0570_a_06L湜公年七十餘矣猶日手麈談經
009_0570_a_07L而聽法者甚衆及其氣倦意闌輒又
009_0570_a_08L嵬峩長嘯嗒然高簡詩酒跌宕
009_0570_a_09L釋外騷𨓹𨓹不以戒律自待余時雖
009_0570_a_10L心獨奇湜公以爲韓愈氏所稱若
009_0570_a_11L惠若靈若文暢若閑上人輩果何如也
009_0570_a_12L今忽忽六十年湜公旣不可復見
009_0570_a_13L近有長老偉性者即其法孫也自龍
009_0570_a_14L寺來訪袖示所謂松桂藁者一篇
009_0570_a_15L余删煩正僞而弁其首曰法祖師事
009_0570_a_16L大菴大菴之亡法祖次其詩文
009_0570_a_17L序於先慵窩先生今印本具在敢藉
009_0570_a_18L手而更徼惠焉余不欲孤其意略叙
009_0570_a_19L其所以湜公本太支也年十六出家
009_0570_a_20L喜遊能詩多與當世賢士大夫唱酧
009_0570_a_21L槩之乃能脫蔬筍氣而間有可傳者
009_0570_a_22L詩文筆法亦見稱於空門享法臘六
009_0570_a_23L十六示寂於岐山臨行啜茶作偈
009_0570_a_24L孤明渾大閑之句其徒輒謂湜公精

009_0570_b_01L식 공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리라. 지금 진영眞影과 보주葆珠와 부도浮圖가 모두 기산에 모셔져 있다. 내가 아끼는 남파南坡 상인 또한 그 법손으로서 받들어 모신다고 한다.
신사년(1821) 가평절嘉平節11) 호곡병일壺谷病逸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안변도호부사前行安邊都護府使 겸 안변진병마첨절제사安邊鎭兵馬僉節制使 류범휴柳範休12) 지음.

009_0570_b_01L神殆不死今有眞影及葆珠浮圖
009_0570_b_02L在岐山余所善南坡上人亦以其法
009_0570_b_03L奉守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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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巳嘉平節壺谷病逸通訓大夫前行
009_0570_b_05L安邊都護府使兼安邊鎭兵馬僉節制
009_0570_b_06L使柳公範休題

009_0570_b_07L{底}崇禎紀元後一百九十五年壬午茶泉書刊本
009_0570_b_08L(成均館大學校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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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기산岐山 : 현재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는 아기산鵝岐山(또는 峨岐山)이다. 봉황사가 있어서 봉황산이라고도 한다. 산 서쪽에 전주 류씨 집성촌이 있다. 이 글을 쓴 류범휴 역시 이곳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2. 2)무심한 듯(嗒然) : 탑연嗒然의 사전적 의미는 ‘멍청한 듯, 무심한 듯’이다. 원뜻은 주객主客이 분리되지 않고 혼연히 하나가 되어 무심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첫머리에 “남곽자기가 궤안에 기대어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고 숨을 쉬니, 그 모습이 탑연하여 물아의 대립을 모두 잊은 듯하였다.(南郭子綦隱机而坐。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라는 구절이 나온다.
  3. 3)한유韓愈(768~824) : 당나라 문인. 자는 퇴지退之, 창려昌黎 사람. 육경六經의 문장을 지을 것을 제창하였으며, 벼슬이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창려백昌黎伯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불교를 배척하여 형부시랑刑部侍郞에 있을 때 헌종憲宗이 불사리를 영접하자 극렬하게 반대하는 표(「佛骨表」)를 올려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태전 선사大顚禪師의 이름을 듣고 편지글을 통해 도에 대해 질의하였으며, 이후 불교에 깊이 귀의하였다.(X88, 338a. 「名公法喜志」) 한유는 특히 태전太顚과 방외의 교분을 두터이 나누었다. 태전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었던 고사가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실려 있다. 이 고사는 이후 유불 간 교유의 상징처럼 되었다.
  4. 4)원혜元惠 : 당나라 승려. 한유는 원혜元惠와 문창文暢 두 승려의 시에 대해서 모두 문재文才가 있다고 칭찬한 바가 있다.
  5. 5)문창文暢 : 당나라 승려. 한유가 대사를 전송하며 쓴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가 『고문진보』와 『당송팔가문독본唐宋八家文讀本』에 전한다. 이 글에서 “문창은 문장을 좋아하여 천하를 주유할 때 어디를 가나 반드시 유학자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청했었는데, 시가 수백 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6. 6)고한高閑 : 당나라 승려. 한유가 쓴 「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가 있어 그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내 듣기로 부도인은 환술을 잘하고 기능도 많다고 하였는데, 한 상인도 그런 환술을 통달했는지는 내가 알 수 없다.(吾聞浮屠人。善幻多技能。閑如通其術。則吾不能知矣。)”라고 하였다.
  7. 7)나식 대사가 입적한 해는 1765년, 본 서문을 쓴 해는 1821년 섣달 그믐날이다.
  8. 8)용사龍寺 : 어느 절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지역으로 보아 대사가 주석했던 황학산의 용담사龍潭寺일 가능성이 있다.
  9. 9)용와慵窩 선생 : 서문을 쓴 류범휴의 조부인 류승현柳升鉉(1680~1746). 류범휴의 선친은 류도원柳道源이고, 용와는 류도원의 양부인 류승현의 호다. 안동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윤경允卿, 호는 용와慵窩. 류관현柳觀鉉의 아들 류도원을 후사로 삼았다. 1719년(숙종 45)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태학관을 시작으로 사헌부장령·종성부사·공조참의·영해 부사·풍기 군수 등을 지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의 반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영남인이 반역에 가담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를 토벌할 의병을 일으켰는데, 류승현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을 이끌고 출발하려 할 때 적이 괴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종성부사로 임명될 때 왕이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던 일을 칭찬하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사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4권 2책의 『용와집慵窩集』이 있다.[「디지털안동문화대전」(andong.grandculture.net) 인용]
  10. 10)소순기蔬筍氣 : 채소와 죽순 기운. 승려들의 기풍. 승려들이 지은 시문의 문체를 유자들이 폄하하여 비유하는 말.
  11. 11)가평절嘉平節 : 동지 뒤의 셋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을 명절로 이르는 말. 즉 섣달그믐.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12. 12)류범휴柳範休(1744~1823) : 조선 정조 때의 문신. 자는 천서天瑞, 호는 호곡壺谷. 본관은 전주. 1772년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공부했다. 178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785년 천거로 태릉참봉에 임명되었다. 1787년 사옹원봉사와 약방제조를 거쳐 1788년 평시서직장에 임명되었다. 1795년 고성 군수로 부임하였고, 1797년 안변 부사로 부임했다가 2년 만에 사직하고 귀향하여 학문에 주력했다. 저서에 『반촌문답泮村問答』·『사문간독師門簡牘』 외에 『호곡집壺谷集』이 있다.
  1. 1){底}崇禎紀元後一百九十五年壬午茶泉書刊本(成均館大學校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