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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078_c_01L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紓難錄분충서난록 소서小序지난 6월에 영남 밀주密州(밀양)의 승려로서, 고故 송운 대사松雲大師1)의 법손인 남붕南鵬2)이 글을 보내어 하나의 문자를 청하였는데, 그때 나는 병이 심해서 답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5개월이 지난 동짓날에 남붕이 또 내 집을 찾아와서는 소매 속에서 두 책을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하나는 송운 대사의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이었고, 하나는 『표충사제영록表忠祠題詠錄』3)이었다. 이 글들을 펼쳐 놓고 거듭 읽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차탄嗟歎하였다.아, 송운 대사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위난의 즈음에 의병을 일으켜서 온 힘을 다 바쳤다. 그 정충精忠4)과 장렬한 기상이 중봉重峰5)과 건재健齋6) 등 제공諸公과 함께 우뚝 치솟은 가운데 성취한 바가 더욱 기특하였으므로 국가에서 극진하게 포장襃獎하고 보답하였다.내가 구구하게 글로 기록한다 한들 대사의 경중輕重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가 없을 것인데, 더군다나 한 시대의 거장 명인들과 학사 문인들이 가영歌詠하고 찬술贊述하여 거의 빠짐없이 상세하게 드러내었음에야. 나를 돌아보면 병들고 졸렬하기만 하니, 어찌 여기에 또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겠는가.지금 남붕이 지성으로 애쓰는 것은 반드시 오래도록 전할 목적으로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이처럼 열심히 하니 장차 귀신이 보호하는 가운데 자운慈雲과 혜월慧月 사이에 은밀히 보관되어 억겁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기에 그가 떠나매 애오라지 이렇게 써서 주게 되었다.기미년(1739, 영조 15) 12월 상순에 긍재兢齋7) 병옹病翁은 쓰다.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이다. -
008_0078_c_01L[松雲大師奮忠紓難錄]
008_0078_c_02L1)題 [1] 奮忠紓難錄小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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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078_c_04L曩季夏。嶺南密州僧古松雲大師之法孫
008_0078_c_05L南鵬。書乞一文字。其時余病甚。未有
008_0078_c_06L復。越五月南至之日。鵬又來叩門。而袖
008_0078_c_07L出二册以進之。一則松雲師奮忠紓難
008_0078_c_08L錄也。一則表忠祠題詠錄也。披來三復。
008_0078_c_09L不覺擊節而嗟歎也。噫。雲師當壬辰亂。
008_0078_c_10L倡義效力於危難之際。其精忠壯烈。與
008_0078_c_11L重峰健齋諸公。屹然並峙。而所成就
008_0078_c_12L尤奇。國家之寵獎崇報備矣。區區篇章
008_0078_c_13L本不足爲師輕重。而況一代之鴻匠鉅
008_0078_c_14L工學士文人。歌詠而賛述者。頗詳悉無
008_0078_c_15L遺。顧余病拙。何庸疊床爲哉。今鵬之
008_0078_c_16L至誠表揭。必欲壽其傳。而托剞劂廣布
008_0078_c_17L者。若是其勤摯。其將鬼禁神呵。秘護
008_0078_c_18L於慈雲慧月之間。而歷浩劫而不泐。吁。
008_0078_c_19L亦可嘉也已。於其行。聊書此贈之。
008_0078_c_20L己未臘月。上澣。兢齋病翁識。
008_0078_c_21L咸原府院君魚有龜。
008_0078_c_22L{底}乾隆三年刊本(東國大學校所藏) {甲}乾隆
008_0078_c_23L四十三年毅旻跋文本(金敏榮所藏。版型與底本
008_0078_c_24L同一){乙}精神文化硏究院圖書館所藏刊年未詳
008_0078_c_25L本(版型與底本同一)。
- 1)송운 대사松雲大師 : 의승대장 사명당이 가등청정加藤淸正과 회담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호이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에게는 사명당이 주로 송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2)남붕南鵬 : 당호는 태허당泰虛堂이다. 송운 대사의 5대 법손으로 기미년인 1739년(영조 15)에 유고로 전해져 오던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신유한申維翰에게 편찬을 의뢰하여 새로 간행하였다. 1738년에는 밀양 표충서원表忠書院을 크게 중창하였고, 1742년에는 송운 대사의 비와 비각을 세웠다.
- 3)『표충사제영록表忠祠題詠錄』 : 표충사를 건립하게 된 이유, 위치 등 표충사에 대한 사적과 여러 글들을 모은 것으로 사명 대사의 비문과 행적을 부록으로 더하여 중간하였다.
- 4)정충精忠 : 티 없이 순결한 충성심이란 뜻으로, 옛날 송 고종宋高宗이 충신인 악비岳飛에게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네 글자를 친히 써서 깃발에 달게 한 뒤로부터 자기를 돌보지 않는 순수한 충의를 표현할 때 흔히 쓰이게 되었다.
- 5)중봉重峰 : 조헌趙憲(1544~1592)의 호이다. 관직을 물러난 뒤에 옥천군沃川郡 안읍安邑 밤티(栗峙)로 들어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淸州城을 수복한 뒤에, 다시 7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규靈圭의 승군과 합세하여 금산錦山으로 진격하던 도중, 8월 18일 소조천(小早川隆景)의 왜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 6)건재健齋 : 김천일金千鎰(1537~1593)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晉州城에서 관군과 의병의 주장主將인 도절제度節制가 되어 10만 가까운 왜군과 싸우며 성을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 江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 7)긍재兢齋 : 어유귀魚有龜(1675~1740)의 호이다. 경종景宗의 장인으로,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 1){底}乾隆三年刊本(東國大學校所藏) {甲}乾隆四十三年毅旻跋文本(金敏榮所藏。版型與底本同一){乙}精神文化硏究院圖書館所藏刊年未詳本(版型與底本同一)。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이상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