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 法界圖記叢髓錄 卷上之一

ABC_BJ_H0107_T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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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법계도기총수록 상권 1(法界圖記叢髓錄 卷上之一)
『일승법계도』 원문 一
일승법계도 합시일인 오십사각 이백일십자1)

무릇 위대한 성인의 훌륭한 가르침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 근기에 응하고 병病에 따라서 하나가 아니다. 미혹한 자는 자취를 고수하여 본체를 잃는 줄 알지 못해서 부지런히 하여도 근본(宗)으로 돌아갈 날이 없다. 그러므로 이법(理)에 의거하고 가르침(敎)에 근거하여 간략히 「반시槃詩」를 지어서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가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시를 읽는 법은 마땅히 가운데 ‘법法’으로부터 시작하여 구불구불 돌고 돌아(盤廻) 구부러지고 굽어져서(屈曲) ‘불佛’에 이르러 마치니 도인圖印의 길을 따라서 읽도록 한다.2)


法性圓融無二相  ①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 없고
法性圓融無二相  ①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 없고
諸法不動本來寂  ②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
諸法不動本來寂  ②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
無名無相絶一切  ③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일체가 끊어져
訂智所知非餘境  ④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眞性甚深極微妙  ⑤ 진성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
不守自性隨緣成  ⑥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一中一切多中一  ⑦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며,
一卽一切多卽一  ⑧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一微塵中含十方  ⑨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을 머금고
一切塵中亦如是  ⑩ 일체 티끌 중에도 또한 이와 같다.
無量遠劫卽一念  ⑪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순간이고,
一念卽是無量劫  ⑫ 한 순간이 곧 한량없는 먼 겁이다.
九世十世互相卽  ⑬ 구세와 십세가 서로 상즉하면서도
仍不雜亂隔別成  ⑭ 그로 인해 혼잡하지 않고 나뉘어 따로 이룬다.
初發心時便正覺  ⑮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며
生死涅槃常共和  ⑯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
理事冥然無分別  ⑰ 이법과 현상이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
十佛普賢大人境  ⑱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
能入海印三昧中  ⑲ 능히 해인삼매 가운데 들어가
繁出如意不思議  ⑳ 여의를 번다하게 나타냄이 불가사의하다.3)
雨寶益生滿虛空  ㉑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
衆生隨器得利益  ㉒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
是故行者還本際  ㉓ 그러므로 수행자는 본래 자리에 돌아와
叵息妄想必不得  ㉔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않을 수 없고
無緣善巧捉如意  ㉕ 무연無緣의 선교로 여의를 잡아서
歸家隨分得資糧  ㉖ 집으로 돌아가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
以陀羅尼無盡寶  ㉗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莊嚴法界實寶殿  ㉘ 법계의 진실한 보배궁전을 장엄하여
窮坐實際中道床  ㉙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으니
舊來不動名爲佛  ㉚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부처라 이름한다.  

006_0768_a_01L[法界圖記叢髓錄]

006_0768_a_02L1)法界圖記叢髓錄
006_0768_a_03L卷上之一

006_0768_a_04L

006_0768_a_05L[一乘法界圖原文一]
2) [1] 乘法界圖 3)合詩一印 [2] 五十四角
006_0768_a_06L二百一十字 [1]

006_0768_a_07L
夫大聖善敎無方應機隨病非一
006_0768_a_08L4) [3] [2] 5) [4] 6) [5] 不知失體 7) [6] 而歸宗
006_0768_a_09L8) [7] 日故依理據敎略制9) [8] 10) [9] [3]
006_0768_a_10L執名之徒還歸無名眞源讀詩之法
006_0768_a_11L冝從中法爲始 11) [10] [4] 廻屈曲乃至佛爲
006_0768_a_12L隨印道讀 [5]

006_0768_a_13L法性圓融無二相諸法不動本來寂無名無相絶一切訂 [6] 智所知非餘境眞性甚深極微妙不守自性隨緣成一中一切多中一一卽一切多卽一一微塵中含十方一切塵中亦如是無量遠劫卽一念一念卽是無量劫九世十世互相卽仍不雜亂隔別成初發心時便正覺生死涅槃常共和理事冥然無分別十佛普 [7] 賢大人境能人 [8] 海印三昧中繁出如意不思議雨寶益生滿虛空衆生隨器得利益是故行者還本際叵息妄想必不得無緣善巧捉如意歸家隨分得資量以陁 [9] 羅尼無盡寶莊嚴法界實寶殿窮坐實際中道床舊來不動名爲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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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제목
‘일승법계도’부터 ‘이백일십자’까지4)

대기
『대기大記』5)에 이른다. 이 ‘일승법계도’ 등으로 지엄智儼6) 스님의 오중해인五重海印7)에 분배한다. 말하자면 ‘일승법계一乘法界’는 ‘모습을 잊은 해인(忘像海印)’에 분배한다.(대)기의 파손된 첫 폭幅은 이 분배의 해석을 말한 것이다.

‘도圖’의 한 글자는 ‘모습을 나타내는 해인(現像海印)’에 분배하니, 말하자면 도란 형상이다. 경에 이르기를, “곧 그 형상대로 신통력을 나타내셨다.”8)라고 하였다. 법장法藏9) 스님은 주석하여 이르기를, “그 (보살들이) 생각한 바와 같이 저 위의 124질문10)과 아래 제6회에 이르기까지 설하신 법문으로 이 질문에 답한 것11)이 모두 여래의 법계의 몸 가운데 두렷이 밝아서 단박에 그 형상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다. 운운.12) 하고, “아래에 경에 이르기를, ‘청정한 법신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형상이 없다.’13) 이상.14)라고 하였다. 이 글은 안으로 증득함과 밖으로 교화함에 통하나 지금은 안으로 증득함을 기준으로 분배한 것이다.

‘합시일인合詩一印’은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시는 해인’에 분배하니, 말하자면 시詩는 보현普賢15)의 기틀을 나타내고 인印은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시는 마음을 나타낸다.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시는 마음의 인이 보현의 큰 기틀이 안으로 향하는 마음 첫머리와 그윽이 합하기 때문이다.

‘오십사각五十四角’은 ‘보현이 삼매에 들어가 관하는 해인’에 분배하니, 말하자면 보현의 안으로 증득함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만약 부처님과 보현의 문을 기준으로 하면, 보현이 삼매에 들어감은 다만 밖으로 향하는 마음의 인을 궁극적으로 증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처음과 두 번째 해인16)도 통틀어 증득한다. 보현이 안으로 향하면 곧 열 부처님(十佛)17)이고 열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면 곧 보현이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근기에 나아가 구분을 짓는 문을 기준으로 하면, 곧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심에는 오직 일부분만을 증득하니 원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뒤의 뜻을 기준으로 한다. 이 정장삼매(淨藏定)18) 가운데 오교五敎19) 내지 무량승의 근기와 성품의 덜익음(生)과 성숙함, 그리고 법계 모든 법의 모습(頭角)이 단박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백일십자二百一十字’는 ‘보현이 삼매에서 나와 마음에 있음과 언어를 나타내는 해인’에 분배하니, 말하자면 이 해인에 오주인과五周因果20) 등의 법을 나누어 보이며

006_0768_b_01L[註釋]
[題目]
一乘法界圖二百一十字大記云
006_0768_b_02L此一乘法界圖等分配儼師五重海
006_0768_b_03L謂一乘法界配忘像海印記破初幅
云此配釋

006_0768_b_04L圖之一字配現像海印謂圖者像也
006_0768_b_05L經云即如其像現神通力藏師釋云
006_0768_b_06L如其所念如上一百二十四問及
006_0768_b_07L下至15) [14] [10] 六會來所說法門答此問者
006_0768_b_08L皆於如來法界身中無不圓明頓現
006_0768_b_09L其像云云 下經云淸淨法身中
006_0768_b_10L像而不現故也已上 此文通於內訂
006_0768_b_11L外化今約內訂配也合詩一印
006_0768_b_12L佛外餉 [11] 海印謂詩表普賢機印表佛
006_0768_b_13L外向心佛外向心印冥合普賢大機
006_0768_b_14L內向心頭故也五十四角配普賢入
006_0768_b_15L定觀海印謂普賢內訂有二義
006_0768_b_16L若約佛普賢門則普賢入定非但窮
006_0768_b_17L訂外向心印亦乃通訂初二海印
006_0768_b_18L普賢向內則十佛十佛向外則普賢
006_0768_b_19L二若約就機作區門則於佛外向
006_0768_b_20L唯訂一分以未滿故今約後義
006_0768_b_21L此淨藏定中五敎乃至無量乘根性
006_0768_b_22L生熟及法界諸法頭角頓現故也
006_0768_b_23L百一十字配普賢出定在心中及現
006_0768_b_24L語言海印謂於此海印分示五周因

006_0768_c_01L문자언어를 시설하기 때문이다.
신림神琳21)의 뜻은 (다음과 같다.) 즉 ‘일승법계도’에서 법계의 법은 증득의 대상(所證)이고 오늘의 내 마음은 증득의 주체(能證)이니 곧 이 주체와 대상을 얻을 수 없는 곳이 ‘일一’이다. 수행하는 사람의 행과 지위를 ‘승乘’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이 움직이지 않는 법칙의 분제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법계’라고 한다. 법계의 법의 본래 자리는 나의 오척 되는 몸이다. 이 뜻을 나타내고자 법계 전체를 한 몸의 형상으로 그린 까닭에 ‘도圖’라고 한다.

말하자면 도인에서 ‘구불구불(盤)’은 삼승三乘22)이다. 말하자면 일승一乘23)의 평등한 길의 가르침 중 머무름 없는 본체를 등지고 한 생각도 나지 않고 둘이 아닌 곳에 구불구불 고집하고, 내지 한 모습, 한 자취 중 과보로서의 부처님의 과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廻)’는 소승이다. 말하자면 법공法空의 진여가 있는 줄 알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 인공人空의 이치에 돌고 돌아 집착하기 때문이다. ‘구부러지고(屈)’는 인천人天이다. 말하자면 세간을 벗어나는 수행의 공덕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오계五戒24)와 팔계八戒25)의 인천의 업에 구부러져서 집착하기 때문이다. ‘굽어져서(曲)’는 삼도三途26)이다. 말하자면 인천의 수행과 업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삿된 견해에 굽어져서 집착하여 삼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승과 삼도의 모습을 다 그리는 까닭에 “법계 전체를 한 몸의 모습으로 그린다.”라고 한다.

006_0768_c_01L果等法施設文字語言故也祖琳之
006_0768_c_02L則一乘法界圖者法界之法是所
006_0768_c_03L今日我心是能訂即此能所不可
006_0768_c_04L得處是一能修之人行位名乘
006_0768_c_05L是不動之軌則分齊成故云法界也
006_0768_c_06L法界法之本位是吾五尺身欲示
006_0768_c_07L此義畫作全法界一身之像故云圖
006_0768_c_08L謂圖印中盤者是三乘也
006_0768_c_09L背一乘平道敎中第上之一第二張
006_0768_c_10L住本體盤蟄一念不生不二之處
006_0768_c_11L16) [15] [12] 於一相一跡之中報佛果故
006_0768_c_12L廻者是小乘也謂不知有法空眞如
006_0768_c_13L但自廻着人空理故屈者是人天也
006_0768_c_14L謂不知有出世行德屈執五戒八戒
006_0768_c_15L人天業故曲者是三途也謂不知有
006_0768_c_16L人天行業曲執邪見墮三途故如是
006_0768_c_17L畫盡三乘三途之相故云畫作全法
006_0768_c_18L{底}高麗大藏經卷四四(補遺版庭凾) {甲}續藏經
006_0768_c_19L第二編八套四册義湘撰華嚴一乘法界圖 {乙}
006_0768_c_20L新修大藏經第四十五卷法界圖記叢髓錄

006_0768_c_21L「一」上有「華嚴」{甲}
「合詩一印」無有{甲}
006_0768_c_22L「之」無有{甲}
「守」作「字」又冠註曰字疑守
006_0768_c_23L{甲}
「跡」作「迹」{甲}「勤」作「懃」{甲}「未」
006_0768_c_24L作「末」又冠註曰未一作末{甲}
「盤」作「槃」
006_0768_c_25L{甲}
「異」作「冀」{甲}{乙}「盤」作「繁」{甲}
006_0768_c_26L「人」作「入」{甲}
「妄」作「忘」{甲}「訂」通「證」
006_0768_c_27L於此書編次同
「弟」作「第」{乙}「着」作「著」
006_0768_c_28L{乙}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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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융기
『법융대덕기法融大德記』27)에 이른다. 『일승법계도』에는 두 종류의 가려내고 취함이 있다. 첫째는 교분敎分을 가려내고 오직 증분證分만을 취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승의 법은 증분과 교분에 통하지만 ‘계’라고 말한 것은 교분을 가려낸 것이니, 증분은 일승법의 구경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오직 삼승을 가려내고 일승의 증분과 교분 둘을 통틀어 취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승으로써 삼승을 가려내기 때문이다.

이 일승의 ‘일一’과 이 아래 처음과 끝을 여읜 ‘하나의 붉은 도인(一朱印)’은 지엄 스님의 본말상생문本末相生門28) 가운데 일자의 도장(一字印)29)과 더불어 나란히 한 뜻이다. 『(화엄)대경』의 첫머리에 일자로 된 도장을 찍어 놓은 것은 (『화엄경』) 한 부의 처음부터 끝까지 설해진 문장과 문장, 구절과 구절이 오직 ‘일’을 나타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또 오권소五卷疏30)에서 삿됨을 대치하고 올바름을 나타내는 곳(對邪現正之處)31)에 일자로 된 도장을 찍어 놓은 것은, 모든 법 가운데 만약 두 가지 알음알이를 내면 곧 삿된 것이고, 법이 하나임을 알면 곧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보살이 한 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60문의 보행(六十門普行)32)이 백만 장애를 이룬다.33) 진실로 성내는 마음은 자신과 남이 다르다고 집착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두 가지 알음알이를 내면 곧 삿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보살이 동체대비를 일으키면 곧 백만 장애문이 육십 보행普行을 이룬다. 말하자면 삼세간三世間34)의 법이 자신의 몸과 마음인 것을 보고 동체대비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법이 하나임을 알면 곧 올바른 것”이라고 한 것이다.

또 『입법계품초入法界品抄』35)에 일자의 도장을 찍어 놓은 것은 모든 법이 둘이나 셋이라고 보면 곧 여덟 가지의 근본죄36)를 범하여 일승의 법계에 들어갈 수 없고, 모든 법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를 내지 않으면 곧 일승의 법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도록 둘을 설하고 셋을 설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를 나타내고자 한 것일 뿐이다.

006_0769_a_01L界一身之像也

006_0769_a_02L
法融大德記云一乘法界圖有二重
006_0769_a_03L簡取一簡敎分唯取訂分謂一乘之
006_0769_a_04L通於訂敎而言界者簡敎分也
006_0769_a_05L以訂分者一乘法之究竟際故二唯
006_0769_a_06L簡三乘通取一乘訂敎二分謂以一
006_0769_a_07L乘簡三乘故此一乘之一及此下離
006_0769_a_08L始終之一朱印與儼師本末相生門
006_0769_a_09L中一字印並一義也大經之首按一
006_0769_a_10L字印者欲明一部始終所說文文句
006_0769_a_11L句唯現一也又五卷䟽對邪現正
006_0769_a_12L之處按一字印者於諸法中若生二
006_0769_a_13L則是邪知法是一即是正也謂若
006_0769_a_14L菩薩起一嗔心則六十門普行成百
006_0769_a_15L萬障也良以嗔心起於自他別執之
006_0769_a_16L故云若生二解即是邪也若菩薩
006_0769_a_17L起同體大悲則百萬障門成六十普
006_0769_a_18L行也謂見三世間法是自身心
006_0769_a_19L起同體大悲故云知法是一即是正
006_0769_a_20L又入法界品抄按一字印者
006_0769_a_21L見諸法爲二爲三即犯八根本罪
006_0769_a_22L得入於一乘法界若於諸法不生
006_0769_a_23L二解即得入於一乘法界故也此中
006_0769_a_24L亦尒從始至終非是詮二詮三 [13]

006_0769_b_01L
‘일’이라고 말한 것은 주체와 대상이 없는 가운데 우선 굳이 그것을 나누니 관의 주체(能觀)로서의 하나가 있으며 관의 대상(所觀)으로서의 하나가 있다. 말하자면 만약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든 법을 다 거두어서 곁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주체와 대상이 끊어진 것을 알면 곧 관의 주체로서의 하나가 된다. 이 몸과 마음이 머무는 곳에 즉함이 관의 대상으로서의 하나가 된다.

이 ‘일一’ 가운데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지관止觀을 닦는다.
무엇이 지관인가?
일승에 의거하여 지관을 닦으면 육상六相37)의 도장으로써 열 보법(十普法)38)에 도장 찍어 각각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서 융섭하여 하나가 되어 알고 알아서 분명한 것이 관觀이다. 도장으로 사물에 도장 찍음에 들지도 않고 굴리지도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관하는 지혜가 법에 꼭 맞아서 주체를 여의고 대상을 끊어서 하나로서 무분별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지止이다.

‘승乘’이란 위의 일一의 자리에서 능히 결정코 믿는 것(決定信)을 승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믿지 않는 것은 승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만약 삼승이라면 진여의 법을 듣고서 단박 믿지 못하고 점차 믿는 까닭에 십신十信이 있으며, 단박 이해하지 못하고 점차 이해하는 까닭에 십해十解가 있으며, 내지 단박 깨닫지 못하고 점차 깨닫는 까닭에 십증十證이 있으니, 이와 같이 점차로 부처님의 과위에 이르기 때문에 승이라고 이름한다. 여실한 길을 타고 와서 정각을 이루는 것이 그 뜻이다. 만약 일승이라면 위 일의 자리에서 원만한 믿음을 일으키면 곧 원만한 깨달음인 까닭에 승이라고 이름한다. 하나가 움직이면 일체가 움직이는 것이 곧 그 뜻이다.

‘법法’이란 나의 몸과 마음이다. ‘계界’란 곧 이 몸과 마음이 모두 포섭하여 상대가 끊어져서 앞과 뒤의 분제가 끊어진 것이니 곧 법의 궁극적인 가장자리의 뜻이다.
‘도圖’란 형상이다. 코끼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코끼리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그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이 법계의 부처님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006_0769_b_01L要現一故耳第上之一第三張 所言
006_0769_b_02L一者無能所中且强分之有能觀一
006_0769_b_03L有所觀一謂若了自身心摠攝諸法
006_0769_b_04L無側無遺絶能所則爲能觀一即此
006_0769_b_05L身心住處爲所觀一也於此一中
006_0769_b_06L云何得入修止觀也云何止觀
006_0769_b_07L若依一乘修止觀者以六相印
006_0769_b_08L印十普法不動各位融而爲一
006_0769_b_09L了分明者觀也如印印物不擧不轉
006_0769_b_10L如是觀智稱契於法離能絕所
006_0769_b_11L無分別而不動者止也乘者於上一
006_0769_b_12L能決定信名爲乘也不如是信
006_0769_b_13L不名乘也若三乘則聞眞如之法
006_0769_b_14L能頓信漸次信故有十信不能頓
006_0769_b_15L解漸次解故有十解乃至不能頓訂
006_0769_b_16L漸次訂故有十訂如是漸次至佛果
006_0769_b_17L名爲乘也乘如實道來成正覺者
006_0769_b_18L是其義也若一乘則於上一處若起
006_0769_b_19L圓信即是圓訂故名乘也一運即
006_0769_b_20L一切運者即此義也法者是我身
006_0769_b_21L心也界者即此身心統包絕待
006_0769_b_22L後際斷即是法之究竟邊際義也
006_0769_b_23L像也如爲不知象人畫作象像
006_0769_b_24L而示之如是行者不知自之身心

006_0769_c_01L법계의 부처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가리켜 보여주는 것이다.

입법계품초

『입법계품초』에 이른다. 이제 법계에 들어감에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법의 분제를 이루되 먼저 그 허물을 여의어야 한다. 처음 발심한 보살이 대승을 향해 나아감에 여덟 가지 근본죄가 있어서 일체의 선근을 태워 다하고 악취惡趣에 떨어지며 편안한 곳을 여의고 인천人天의 즐거움을 잃고 또한 대승경계의 즐거움을 잃는다.39)

한번 오탁의 세상(五濁世)40)에 태어남에 남은 선근이 있어서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깊은 법으로 되돌아 나아가 위없는 마음을 일으키며 매우 깊은 법을 듣고 독송하고 받아 지닌다. 지혜가 적은 사람을 향해 (이 매우 깊은 법을) 독송하고 해설하면 다른 사람이 듣고서는 놀라고 의심하며 두려워하고 겁을 내서 보리심으로부터 물러나 성문승을 좋아하게 되니 이것이 첫 번째 무거운 죄이다. 오직 근기를 헤아리고 마음을 알아서 차례로 위하여 설하되 낮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어떻게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일찍이 성문ㆍ연각을 향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면 이것이 두 번째 무거운 죄이다.

또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당신은 계와 위의威儀를 배워서 어디에 쓸 것인가? 빨리 대승의 마음을 일으켜서 대승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면 몸과 입과 마음의 업이 청정해지고 또한 나쁜 과보를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 이것이 세 번째 무거운 죄이다.

또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당신은 성문의 경전을 독송해서는 안 되며 성문의 경전을 덮어야 한다. 성문의 법에서는 번뇌와 미혹을 끊지 못하니 청정한 대승의 매우 깊은 경전을 듣고 지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악을 멸하고 깨달음(菩提)의 선을 낸다.”라고 해서

006_0769_c_01L是法界佛故畫作法界佛像而指示
006_0769_c_02L

006_0769_c_03L
入法界品抄云今入法界隨所相
006_0769_c_04L成法分齊先離其過初發心菩
006_0769_c_05L薩趣向大乘有八根本罪燒盡
006_0769_c_06L一切善根墮於惡趣離安隱處
006_0769_c_07L失人天樂亦失大乘境界之樂也
006_0769_c_08L一生五濁世有餘善根近善知識
006_0769_c_09L歸趣深法發無上心聞甚深法
006_0769_c_10L讀誦受持向小智人讀誦解說
006_0769_c_11L他人聞已第上之一第四張 驚疑
006_0769_c_12L怖畏於菩提心而生退沒樂聲
006_0769_c_13L聞乘1)弟一重罪唯須知根了
006_0769_c_14L弟爲說從淺至深又語人
006_0769_c_15L汝何能發大乘心不如早向聲
006_0769_c_16L聞緣覺入於涅槃弟二重罪
006_0769_c_17L又語人言汝何用學戒威儀當速
006_0769_c_18L發大乘心受持讀誦大乘經典
006_0769_c_19L口意業當得淸淨亦不受惡報
006_0769_c_20L弟三重罪又語人言汝不應
006_0769_c_21L讀誦聲聞經典當覆聲聞經典
006_0769_c_22L聞法中不能斷結使惑當聽受淸
006_0769_c_23L淨大乘甚深經典此能滅惡生菩
006_0769_c_24L「弟」作「第」{乙}次同

006_0770_a_01L믿고 받아들이는 이가 있으면 (말하고 듣는) 두 사람 모두 네 번째 무거운 죄를 얻게 된다.

또 이익을 구하기 위한 까닭에 대승의 법을 설하여 (다른 이가) 대승을 설하여 이익 얻는 것을 보고 미워하고 비방하며 경시하고 질투하면 이것이 다섯 번째 무거운 죄이다.

또 이익을 구하기 위한 까닭에 “나는 깊은 법을 이해한다.”라고 하고 다른 이로부터 들어서 얻었다고 말하지 않아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어기고 등지면 이것이 여섯 번째 무거운 죄이다.

또 전다라旃陀羅41)의 행을 짓고 다른 선한 비구의 물건과 삼보三寶의 물건을 취하여 높은 관리와 대왕에게 주어서 왕과 관가의 힘에 의거하여 선한 비구를 경시하며 화내고 싫어하고 미워하며 질투하면 이것이 일곱 번째 무거운 죄이다.

또 악행을 짓고 왕과 관가의 뛰어난 힘을 스스로 믿고 재물 준 것을 믿어서 선한 비구를 경시하며 희롱하고 욕보이며 싸워서 어지럽게 한다. 법이 아닌 것으로 법을 설하며 바른 경과 율을 버리고 법을 어기고 제도를 세운다. 선을 행하는 비구와 좌선하고 경전을 독송하는 이들에게 번뇌가 없는 이는 번뇌를 생기게 하고 이미 번뇌가 있는 이는 늘어나게 하면 이것이 여덟 번째 무거운 죄이다.

이미 (위의 죄를) 범하였다면 마땅히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42)에 의거하여 죄를 뉘우쳐 그것을 없애야 할 것이다. 처음 발심한 보살이 큰 법을 널리 유통시켜서 자기와 남을 이익되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앞의 허물을 여의고 후에 아홉 번째 지地43)의 법사의 법문에 의거하면 곧 법계에 응할 것이다.

진수기
『진수대덕기眞秀大德記』44)에 이른다. ‘일一’이란 다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삼승에서는 성性이 하나라고 하고, 일승에서는 연緣이 하나라고 한다. 연緣이 하나란 중도와 진여를 기준으로 한 것을 따른 것이다. 이것은 「십회향품」의 백구의 진여(百句如)45)이다. 말하자면 해의 진여, 달의 진여 등이다. 비록 곧 진여이지만 해의 이름, 해의 모습, 달의 이름, 달의 모습이 있어서 이름과 모습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현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하면 이 이름과 모습이 없다. 다만 삼승을 인도하고자 이름과 모습에 의지한 것일 뿐이다.

006_0770_a_01L提善有信受者二人俱得 弟四
006_0770_a_02L重罪又爲求利故說大乘法
006_0770_a_03L說大乘得利憎毁輕嫉弟五重
006_0770_a_04L又爲求利故我解深法不言
006_0770_a_05L從他聞得違負諸佛菩薩弟六
006_0770_a_06L重罪又作旃陁羅行取他善比丘
006_0770_a_07L物及三寶物賞上官人及與大王
006_0770_a_08L依王官力輕善比丘嗔嫌憎嫉
006_0770_a_09L弟七重罪又作惡行自恃王
006_0770_a_10L官勝力及恃財施輕善比丘
006_0770_a_11L辱鬪亂非法說法捨正經律違法
006_0770_a_12L立制於善行比丘及坐禪讀誦經
006_0770_a_13L無惱生惱已惱增長弟八
006_0770_a_14L重罪若已犯者當依虛空藏菩薩
006_0770_a_15L懺罪滅之初發心菩薩若欲弘通
006_0770_a_16L大法利益自他者先離前過後依
006_0770_a_17L弟九地法師法門即應法界

006_0770_a_18L
眞秀大德記云 [14] 一者無他之義三乘
006_0770_a_19L云性一也一乘云綠一也緣一者
006_0770_a_20L隨約是中道及如也此是廻向品百
006_0770_a_21L第上之一第五張謂日如月如
006_0770_a_22L等也雖即是如而有日名日相月
006_0770_a_23L名月相不無名相然約普賢1)訂者
006_0770_a_24L無此名相但爲引三乘依名相耳

006_0770_b_01L이것은 보현의 교분을 기준으로 하여 변별한 것이다.

중도를 기준으로 한 것을 따른 것이 이미 매우 깊은데 다시 무슨 뜻을 기준으로 하여 보현의 증분으로 삼는가?
중도와 진여를 기준으로 한 것을 따른 것은 삼승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해의 이름과 해의 모습 등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과 상응한다고 한다. 이 증분이란 언어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름을 끊은 것이고 마음이 행해지는 자리가 멸했기 때문에 모습을 여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자리가 정명의 침묵(淨名默)46)과 어떻게 다른가?
정명의 침묵은 이름과 모습이 전도되었으므로 이 이름과 모습을 여의어야 바야흐로 침묵이 된다. 아홉 법회에서의 부처님의 침묵47)은 이름과 모습 가운데에서의 침묵이다. 그래서 현격하게 다르다. 말하자면 이름과 모습을 버리지 않고서 이 이름과 모습에 즉한 가운데 침묵하는 것이니 허공에 도무지 사물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것은 보현의 증분을 기준으로 하여 변별한 것일 뿐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것과 마음 가는 곳이 없는 것 또한 극히 매우 깊은데 다시 무슨 뜻을 기준으로 하여 열 부처님의 경계로 삼는가?
앞은 비록 침묵이지만 이름과 모습 중의 침묵이다. 만약 과분이라면 처음부터 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 자리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자리(과분)는 법도 없고 사물도 없는가?
앞의 지위 중에서 논한 것과 같은 법은 처음부터 없다.
그러하다면 이 중에는 실로 법이 없는가?
모두 있다.
어떤 사물이 있는가?
이것이 옛 스님이 말씀하신 바이니 망정을 돌이켜 보는 자리(反情見處)48)이다.

‘승乘’은 실어 나른다는 뜻이다.
위의 ‘일’ 자에 이미 세 가지 뜻이 있었으니49) ‘승’도 또한 그러한가?
그렇다. 결과와 다른 원인으로부터 원인과 다른 결과에 이르는 것은 삼승에서의 승의 뜻이다. 지금은 원인이 결과에 즉하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실어 나른다고 이름한다. 이것은 보현의 교분이다. 원인과 결과의 이름과 모습을 떠나서 언어의 길이 끊어짐과 마음 가는 곳이 없음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곧 보현증분의 실어 나른다는 뜻이다. 성해의 과분(性海果分)50)은 곧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불가사의한 승이라고 하니,

006_0770_b_01L約普賢敎分辨也隨約是中道
006_0770_b_02L是甚深更約何義爲普賢訂耶
006_0770_b_03L隨約是中道及如者依三乘敎用日
006_0770_b_04L名日相等故云與敎相應也此訂
006_0770_b_05L分者言語道斷故絶名也心行處滅
006_0770_b_06L故離相也若爾此處與淨名默何
006_0770_b_07L答淨名默者以名相倒離此名
006_0770_b_08L方爲默也九會佛默名相中默
006_0770_b_09L故玄別也謂不捨名相即此名相中
006_0770_b_10L非如虛空都無物也此約普賢訂
006_0770_b_11L分辨耳問言語道斷心行處滅亦極
006_0770_b_12L甚深更約何義爲十佛境界耶
006_0770_b_13L前雖是默名相中默若果分則初初
006_0770_b_14L不見名相處也問若爾此處無法無
006_0770_b_15L物耶如前位中所論之法初初無
006_0770_b_16L然則此中實無法耶具有也
006_0770_b_17L有何物耶此是古德所云反情
006_0770_b_18L見處也乘是運載義上一字中
006_0770_b_19L旣有三義乘亦爾耶爾也從異
006_0770_b_20L果之因至異因之果者三乘乘義
006_0770_b_21L約因即果義名運載也此是普賢敎
006_0770_b_22L分也背因果名相約言語道斷心行
006_0770_b_23L處滅之義則是普賢訂分運載義也
006_0770_b_24L性海果分則不可說故唯云不思議

006_0770_c_01L이것은 움직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여 승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법法’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자체를 법이라고 이름한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소 자체 외에 말이 있고 말 자체 외에 소가 있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이 법 곁에 저 법이 없으며 저 법 곁에 이 법이 없다. 그래서 자체라고 말한다. 둘째는 의식에 상대함을 법이라고 이름한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제6의식의 상대하는 바를 법진法塵이라고 이름한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끝없는 의식의 상대하는 바를 법이라고 이름한다. 셋째는 법칙의 뜻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계界’ 또한 세 가지 뜻이다. 첫째는 성품이 다름의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선과 악과 무기無記51)의 세 성품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세 성품 중에 의거함을 따라서 온전히 다하여 각각 서로 곁이 없다. 그래서 성품이 다르다고 한다. 둘째는 원인의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오직 안식을 낳는 것을 안식의 명언종자名言種子52)라고 이름한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육식을 통틀어 낳는 것을 안식의 명언종자로 삼는다. 셋째는 지님의 뜻이다.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결과와 다른 원인이 원인과 다른 결과를 지닌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온전히 결과인 원인이 온전히 원인인 결과를 지닌다. 그래서 지님이라고 한다.

‘도圖’는 즉 해인의 형상에 의거하여 일승과 삼승의 가르침 및 근기와 욕구를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붉은 도인의 앞과 뒤의 차별은 삼승의 가르침이다. 붉은 도인의 원만함은 일승의 가르침이다. 도인의 앞과 뒤의 차별 가운데 글자는 즉 삼승의 근기와 욕구이다. 도인의 원만함 가운데 글자는 즉 일승의 근기이다.

법융기
『법융덕기法融德記』에 이른다. ‘합시일인合詩一印’이란 (다음과 같다.) 한 길의 붉은 줄이 여러 검은 글자와 합하여 바야흐로 원만한 도인을 이룬다. 그래서 ‘합시’라고 한다.

006_0770_c_01L此約不動名爲乘也法有三義
006_0770_c_02L自體名法約三乘云牛自體外有馬
006_0770_c_03L馬自體2) [16] [15] 牛也約一乘云此法側
006_0770_c_04L無彼法彼法側無此法故云自體也
006_0770_c_05L二對意名法約三乘云弟六意識所
006_0770_c_06L對名爲法塵第上之一第六張 約一
006_0770_c_07L則無盡意識所對名爲法也
006_0770_c_08L軌則義可知界亦三義一性別義
006_0770_c_09L約三乘云善惡無記三性各別故也
006_0770_c_10L約一乘則於三性中隨擧全盡
006_0770_c_11L互無側故云性別二因義約三乘
006_0770_c_12L唯生眼識名爲眼識名言種子
006_0770_c_13L約一乘則通生六識爲眼識名言種
006_0770_c_14L子也 3) [17] [16] 持義約三乘云異果之因
006_0770_c_15L持異因之果約一乘則全果之因
006_0770_c_16L持全因之果故云持也圖則依海印
006_0770_c_17L表一乘三乘敎及根欲謂朱印之
006_0770_c_18L前後差別者三乘敎也朱印之圓者
006_0770_c_19L一乘敎也印之前後差別中字則三
006_0770_c_20L乘根欲也印之圓滿中字則一乘根
006_0770_c_21L器也

006_0770_c_22L
法融德記云合詩一印者一道朱畫
006_0770_c_23L合諸黑字方成圓印故云合詩
006_0770_c_24L「訂」通「證」於此書{編}次同「有」上疑脫
006_0770_c_25L「外」{編}
▣作「二」{乙}ㆍ疑「三」{編}

006_0771_a_01L
검은 글자를 쓴 후에 붉은 줄을 그렸는가, 붉은 줄을 그린 후에 검은 글자를 썼는가?
두 가지 모두 옳다. 먼저 쓰고 나중에 그린 것은 이치로써 현상을 따른 뜻이고, 먼저 그리고 나중에 쓴 것은 현상으로써 이치를 따른 뜻이다.
지엄 스님이 비록 73개의 도인을 지었지만 다만 그 하나의 인印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니, 의상 화상이 (지엄) 스님의 뜻을 깊이 얻었기 때문에 오직 이 하나의 근본인을 지은 것이다.53)

진수기
『진수덕기眞秀德記』에 이른다. ‘시詩’란 그림(圖文)에 칠언 삼십 구가 있는 까닭에 ‘시’라고 한 것일 뿐이고, 운율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일인一印’이란 하나의 큰 연기를 나타내고자 한 까닭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오십사각五十四角’이란 (다음과 같다.) 아래 글에 이르기를, “어째서 도인에 오직 한 길만 있는가? 답한다. 여래의 일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운운.54)라고 하였다. 「성기품性起品」의 열 가지 음성(十種音)55)을 가지고 오승五乘56)의 근기에 차례로 배대하면 곧 오십을 이룬다. 이 응화應化의 주체인 부처님이 사섭四攝ㆍ사무량四無量을 갖추어 가지신 까닭에 사각이라고 한 것이다.

진수기
『진수기』에 이른다. ‘오십사각五十四角’이란 사람 선지식(人知識)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55선지식57)이나 처음과 뒤의 두 문수보살58)을 합한 까닭에 오직 54이다. 처음과 뒤를 합하여 들고 중간을 통틀어 취하여 하나의 원명한 지혜가 되고 보현보살 선지식은 깨달은 바 이치이니, 법계의 모든 법이 이치와 지혜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백일십자二百一十字’란 법 선지식(法知識)이다. 말하자면 「이세간품」59)에서 보혜보살普惠菩薩60)이 이백 구의 질문을 구름같이 일으키고, 보현보살이 이천 구의 답을 병으로 물 쏟듯 하니 매 한 구의 질문마다 다 십 구로써 답하는 까닭에 ‘일십’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이백일십자二百一十字’란 (다음과 같다.) 오주인과五周因果에서

006_0771_a_01L書黑字後畫朱畫耶畫朱畫後書黑
006_0771_a_02L字耶二俱是也先書後畫者
006_0771_a_03L理從事之義先畫後書者以事從理
006_0771_a_04L之義也儼師雖作七十三印但欲現
006_0771_a_05L其一印之義而相和尙深得師意故
006_0771_a_06L唯作此一根本印也

006_0771_a_07L
眞秀德記云詩者圖文有七言三
006_0771_a_08L十句故云詩耳非約韵言也一印
006_0771_a_09L欲現一大緣起故也

006_0771_a_10L
大記云五十四角者下文云何故
006_0771_a_11L印文唯有一道答表如來一音故
006_0771_a_12L將性起品十種音歷對五乘機
006_0771_a_13L即成五十此能應佛具將四攝四無
006_0771_a_14L故云四角也

006_0771_a_15L
眞秀記云五十四角者表人知識
006_0771_a_16L謂五十五知識也以合初後二文殊
006_0771_a_17L第上之一第七張唯五十四合擧
006_0771_a_18L初後通取中間爲一圓智普賢知
006_0771_a_19L是所訂理法界諸法不出理智
006_0771_a_20L故也二百一十字者法知識也
006_0771_a_21L離世間品普惠雲興二百句問普賢
006_0771_a_22L瓶瀉二千句答每一句問皆以十句
006_0771_a_23L故云一十也

006_0771_a_24L
大記云二百一十字者五周因果

006_0771_b_01L첫 인과를 제하고 뒤의 사주四周에서 과분果分을 가려내고 인분因分을 취하면 사주四周의 인분에 각각 오십 개의 지위가 있으므로 ‘이백’을 이룬다. 그 사주에 있는 과분의 지위 넷을 합하여 ‘일’로 삼는다. 이 과분이 열 부처님의 과분과 같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일십’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째서 처음의 인과를 제하는가?
다만 믿을 바이고 이룰 바 행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째서 과분의 지위(果位)를 합하여 하나로 삼는가?
인분의 지위(因位)에 이미 차별과 평등이 있으니 말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果 또한 그러하나, 열 부처님의 과果와 같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에 총합하여 하나로 한 것일 뿐이다.

또 말한다. 이 해인 가운데 나타난 삼세간의 십문十門과 십법十法이다. 말하자면 아래 본문의 열 개의 동전 비유(十錢喩)61) 및 열 보법(十普法)62)이 이십이 되고, 이십에 각각 십현十玄63)을 논하여 합해서 이백이 되고, 본 십현을 아우른 까닭에 ‘이백일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 인印이 총摠이 되고 칠십삼 인印이 별이 된다. 별인別印 중에 나아가 칠십 인印을 가져 삼세의 인(三際印)을 거치니 한 세(一際)가 각각 칠십인 까닭에 합하여 ‘이백일십’이 된다. 그러므로 이백일십 개의 인印을 합하여 하나의 해인삼매인 총상인을 이루는 것이다.

칠언 삼십 구란 (다음과 같다.) 앞의 (십보)법과 (십전)유가 각각 열이고 본 십현을 함께 합해서 삼십이 된다. 이 삼십 구가 『(화엄)경』의 제목 일곱 자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일곱 자로써 시를 지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법계의 법이 비록 다함없다고 하여도 이백일십자를 벗어나지 않으며 이를 총합하면 곧 삼십 구를 이룬다. 또 이를 총합하면 일곱 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 이를 총합하면 이치와 지혜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 이를 총합하면 하나의 가장 청정한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승법계도’라고 제목하여 이른 것이다.

청량소

『청량소淸涼䟽』64)의 「제목을 총괄하여 해석함」65)에 이른다.66) ‘여섯 번째, 말아서 거두어 모습이 다한다’란,

006_0771_b_01L除初因果於後四周簡果取因於四
006_0771_b_02L周因各有五十位故成二百其四
006_0771_b_03L周中所有果位合四爲一欲現此果
006_0771_b_04L同是十佛果故言一十也何故除
006_0771_b_05L初因果耶但是所信非所成行故
006_0771_b_06L何故果位合爲一耶因位旣有
006_0771_b_07L差別平等詮相別故果應亦爾
006_0771_b_08L欲現同是十佛果故摠爲一耳
006_0771_b_09L此海印中所現三世間十門十法也
006_0771_b_10L謂下文十錢喩及十普法爲二十
006_0771_b_11L十各論十玄合爲二百并本十玄
006_0771_b_12L故云二百一十也又此印爲摠七十
006_0771_b_13L三印爲別就別印中將七十印
006_0771_b_14L三際印一際各七十故合爲二百一
006_0771_b_15L十也故合二百一十印成一海印三
006_0771_b_16L昧摠相印也七言三十句者前之法
006_0771_b_17L喩各十并本十玄合爲三十此三
006_0771_b_18L十句不出經題七字故以七言造詩
006_0771_b_19L是故法界之法雖云無盡不出
006_0771_b_20L二百一十字摠此即成三十句又摠
006_0771_b_21L此不出七字又摠此不出理智又摠
006_0771_b_22L此不出一最淸淨法界是故題云一
006_0771_b_23L乘法界圖也

006_0771_b_24L
淸凉䟽摠釋題名中云 1)弟六卷攝

006_0771_c_01L말하자면 뒤에서부터 점차 말아서 내지 9회를 벗어나지 않으며67) 9회는 초회를 여의지 않는다. 초회는 전체 제목(摠題, 대방광불화엄경)을 여의지 않으며 전체 제목은 이치와 지혜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치가 아니면 지혜가 아닌 까닭에 이치 밖에 지혜가 없으며 지혜가 아니면 이치가 아닌 까닭에 지혜 밖에 이치가 없으니 곧 이치와 지혜가 둘이 아니다. 또한 지혜를 거두어 이치를 따르니 체를 여의고는 작용이 없다. 작용을 거두어 체로 돌아가니 체성이 스스로 여의므로 체는 곧 체가 아니다. 본래 청정함을 굳이 이름하여 청정법계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다함없음으로부터 한 글자나 글자 없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화엄의 성해性海를 거두어 남음이 없다.
〔2〕 자서自敍
1. 시詩를 짓는 목적
‘위대한 성인의 훌륭한 가르침은’부터 ‘병에 따라서 하나가 아니다’까지68)

법융기
『법융기』에 이른다. ‘위대한 성인’이란 모든 가르침 가운데 지금 이 교주敎主가 가장 존귀하고 수승하기 때문이다.

아래 사교(下四敎)69)에서는 교화의 주체와 교화의 대상이 다 미치지 못하는가?
그렇다.
삼승의 교화의 주체인 삼신三身70)은 다만 일승의 십신十身71)의 큰 작용인데 왜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이미 이르기를, 다만 십신의 작용이라고 한 까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열 부처님이 곧 자수용自受用72)의 부처님이고 곧 (보리)수 아래의 부처님이다. 왜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한다면 미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의 품류를 분별하고자 하기 때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일 뿐이다.

청량소

『청량소』의 「가르침이 일어난 인연」73)에 이른다.74) 지금 이 경을 설하시는 부처님은 진신(眞)인가, 응신(應)인가? 한 (부처님)인가, 여러 (부처님)인가? 만약 진신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바세계娑婆世界75)에 계셔서 사람과 천신(人天)이 함께 본다고 이름하는가?

006_0771_c_01L相盡者謂從後漸卷乃至不出九
006_0771_c_02L九會不離初會初會不離摠題
006_0771_c_03L第上之一第八張 摠題不出理智
006_0771_c_04L非理不智故理外無智非智不理
006_0771_c_05L智外無理則理智不二亦攝
006_0771_c_06L智從理離體無用攝用歸體
006_0771_c_07L性自離故體即非體本來淸淨
006_0771_c_08L强名之淸淨法界是以極從無盡
006_0771_c_09L乃至一字無字皆攝花嚴性海
006_0771_c_10L有遺餘

006_0771_c_11L[自敍]
大聖善敎至隨病非一法融記云
006_0771_c_12L聖者於諸敎中今此敎主最尊勝故
006_0771_c_13L下四敎中能化所化皆不及
006_0771_c_14L爾也三乘能化三身但是
006_0771_c_15L一乘十身之大用何云不及耶
006_0771_c_16L云但是十身之用故不及也十佛
006_0771_c_17L即自受用佛即樹下佛也何云不及
006_0771_c_18L若約此義可云及2) [18] 然欲辨
006_0771_c_19L敎品云不及耳

006_0771_c_20L
淸凉䟽敎起因綠中云今說此經
006_0771_c_21L爲眞爲應爲一爲多若言眞者
006_0771_c_22L何名釋迦居娑3) [19] [17] 人天同見
006_0771_c_23L「弟」作「第」{乙}「矣」作「焉」{乙}「娑」作
006_0771_c_24L「婆」{乙}

006_0772_a_01L만약 응신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비로자나부처님76)이 연화장蓮華藏세계77)에 거처하여 대보살의 견해로 부처님의 법신을 보신다고 말하는가? 만약 하나라고 한다면 어떻게 여러 장소에 다르게 나타나는가? 만약 다르다고 한다면 어떻게 다시 말하기를 “몸을 나누지 않는다.”78)고 하는가? 그러므로 이 경을 설하시는 부처님은 앞에서 말한 것 모두 아니다. 곧 법계의 다함없는, 구름 같은 몸으로서 진신과 응신이 서로 융통하며 하나와 여럿이 걸림이 없다. 운운.

먼저 십신十身을 밝히고 뒤에 걸림 없음(無碍)을 드러내겠다. 십신이라고 말한 것은 스스로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삼세간의 융섭을 기준으로 하여 십신으로 한다. 첫째는 중생신衆生身이고, 둘째는 국토신國土身이고, 셋째는 업보신業報身이고, 넷째는 성문신聲聞身이고, 다섯째는 연각신緣覺身이고, 여섯째는 보살신菩薩身이고, 일곱째는 여래신如來身이고, 여덟째는 지신智身이고, 아홉째는 법신法身이고, 열째는 허공신虛空身이다.79)

둘째, 부처님에게 나아가 스스로 십신이 있다. 첫째는 보리신菩提身이고, 둘째는 원신願身이고, 셋째는 화신化身이고, 넷째는 역지신力持身이고, 다섯째는 상호장엄신相好莊嚴身이고, 여섯째는 위세신威勢身이고, 일곱째는 의생신意生身이고, 여덟째는 복덕신福德身이고, 아홉째는 법신法身이고, 열째는 지신智身이다.80) 운운.

‘걸림 없다(無碍)’고 말한 것은 간략히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작용이 두루함이 걸림 없다. 운운. 열째는 원통圓通이 걸림 없으니, 말하자면 이 부처님의 몸이 이치에 즉하고 현상에 즉하며, 하나에 즉하고 여럿에 즉하며, 의보(依)에 즉하고 정보(正)에 즉하며, 사람에 즉하고 법에 즉하며, 이것에 즉하고 저것에 즉하며, 유정물에 즉하고 무정물(非情)에 즉하며, 깊음에 즉하고 넓음에 즉하며, 원인에 즉하고 결과에 즉하며, 삼신三身에 즉하고 십신十身에 즉하니, 동일하게 걸림 없는 법계의 구름 같은 몸이다.

법융기
『법융기』에 이른다. ‘훌륭한 가르침(善敎)’이란 (다음과 같다.)
삼승에 근거하면 곧 이 생生과 저 세상에 수순하는 이익이 선善이며, 이 생과 저 세상에 거스르는 손해가 악惡이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특별히 표기할 것이 없는 것이 무기無記이다.81)

006_0772_a_01L云應者那言遮那處蓮花藏大菩
006_0772_a_02L薩見見佛法身若云一者何以多
006_0772_a_03L處別現若云異者何以復言而不
006_0772_a_04L分身故說此經佛並非前說
006_0772_a_05L是法界無盡身雲眞應相融一多無
006_0772_a_06L云云 先明十身後彰無碍
006_0772_a_07L十身者自有二義一約融三世間
006_0772_a_08L1)▣▣ [20] [18] 身者一衆生身二國土身
006_0772_a_09L三業報身四聲聞身五緣覺身
006_0772_a_10L六菩薩身七如來身八智身
006_0772_a_11L法身十虛空身二就佛上自有
006_0772_a_12L十身第上之一第九張 一菩提身
006_0772_a_13L二願身三化身四力持身五相
006_0772_a_14L好莊嚴身六威勢身七意生身
006_0772_a_15L八福德身九法身十智身云云
006_0772_a_16L言無碍者略有十義一用周無碍
006_0772_a_17L云云 十圓通無碍謂此佛身
006_0772_a_18L理即事即一即多即依即正
006_0772_a_19L人即法即此即彼即情即非情
006_0772_a_20L即深即廣即因即果即三身即十
006_0772_a_21L同一無碍法界身雲

006_0772_a_22L
法融記云善敎者約三乘則此生
006_0772_a_23L他世順益者善也此生他世違損者
006_0772_a_24L惡也於此二中無可記別者無記也

006_0772_b_01L
일승에 근거하면 곧 다만 선일 뿐이다. 무엇인가? 말하자면 지엄 스님이 이르기를, “원통圓通의 지극함은 선하지 않음이 없음에 자리하니, 연緣을 만나서 이에 수순하며 사물을 가리지 않고 베푼다. 이상.82)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승은 오직 하나의 선善일 뿐임을 안다.

만약 그렇다면 무기와 악이 다만 하나의 선일 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악을 들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은가?
그렇다. 그러나 선이라고 말한 것은 듦을 따라서 곁이 없는 뜻에 근거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

‘(일정한) 방법이 없다’란 (다음과 같다.) 만약 삼승이라면 곧 (근기에) 따라서 하나, 둘을 설하여 이에 무량에 이르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삼승의 가르침은 다른 근기에 따라서 설하기 때문에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일승의 가르침은 (근기에) 따라서 사성제(諦)ㆍ십이인연(緣)ㆍ육바라밀(度) 등을 설하나, 해인삼매의 구경의 경계에 사무쳐서 자재로이 설하기 때문에 (일정한) 방법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근기에 응하고 병病에 따라서 하나가 아니다’란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일반 의사(小醫)는 각각 달리 약을 주지만 만약 위대한 의사(大醫王)라면 천하의 갖가지 여러 약물을 널리 모아서 하나의 알약을 만들어 병의 약간의 차별을 묻지 아니하고 평등하게 널리 주되 병이 낫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일승의 부처님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가르침의 근기의 병에 널리 응하여 오직 한 종류의 해인정의 법으로써 근기에 맞추어 설한다. 성문의 사람에게는 온전한 해인의 사성제 법을 주며, 독각의 사람에게는 온전한 해인의 연생緣生 법을 주고, 보살의 사람에게는 온전한 해인인 육바라밀의 법을 주고, 내지 숙교熟敎83)와 돈교頓敎84)의 사람에게도 또한 온전하고 온전한 그것을 줄 뿐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아래 사교의 사람은 다 병든 근기이다. 원교圓敎85)의 근기는 곧 그렇지 않다. 또는 원교의 근기는 큰 병이 있다. 한 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 백천의 장애문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진수기
『진수기』에 이른다. ‘위대한 성인’이란 아래 삼승의 작은 성인에 대하여 ‘위대한 성인’이라고 한 것이다.

006_0772_b_01L約一乘則只是善也何者謂儼師
006_0772_b_02L圓通之致處無不善觸緣斯順
006_0772_b_03L不擇物而施已上 故知一乘唯一善
006_0772_b_04L若爾無記與惡只一善耶
006_0772_b_05L爾也爾則擧惡時亦如是耶
006_0772_b_06L爾也然云善者約隨擧無側義云耳
006_0772_b_07L無方者若三乘則隨說一二乃至無
006_0772_b_08L非是無方何者三乘之敎隨別
006_0772_b_09L機說故非無方一乘之敎隨說諦
006_0772_b_10L綠度等徹於海印究竟之際自在而
006_0772_b_11L故云無方也應機隨病非一者
006_0772_b_12L猶如小醫各別與藥若大醫王
006_0772_b_13L集天下種種諸物作一圑藥無問病
006_0772_b_14L之若2) [21] [19] 差別平等普與病無不治
006_0772_b_15L一乘之佛亦復如是普應諸敎3) [22] [20]
006_0772_b_16L根之病唯以一種海印定法稱根而
006_0772_b_17L聲聞人中與全海印四諦之法
006_0772_b_18L覺人中與全海印緣生之法菩薩人
006_0772_b_19L中與全海印六度之法乃至熟頓人
006_0772_b_20L中亦全全與之耳第上之一第一○張
006_0772_b_21L大記云4) [23] 四敎人皆病機也圓機
006_0772_b_22L則不爾也又圓敎之機有大病也
006_0772_b_23L起一嗔心即有百千障碍門故

006_0772_b_24L
眞秀記云大聖者對下三乘小聖云

006_0772_c_01L‘훌륭한 가르침’이란 언어로 지니는 가르침(文持敎)86)이다. 이 언어로 지니는 가르침은 해인삼매로 좇아 전체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의 물(水)을 부르는 말에 불과 나무 등의 법이 모두 함께 온다. 하나의 말에 모든 법이 함께 오기 때문에 가르침(敎)이 구족되어 있다고 한다. 이 ‘물’이라는 말에 물의 습한 뜻이 있으며, 물의 습한 뜻 가운데 불의 뜨거움 등 법계의 모든 뜻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뜻(義)이 구족되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모든 뜻이 ‘물’이라는 말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런 까닭에 합해서 하나의 큰 연기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을 사용하고자 할 때 물을 부를 때의 말 가운데 도달하는 불을 사용하는가?
이것은 다만 물의 연緣인 까닭에 만약 불을 사용할 때는 ‘불’이라는 말에 도달해 이르는 불을 사용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물이 오는 중의 불은 불이 오는 중의 불과 다른가?
도달하기 때문에 같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 다시 불을 일으켜 오게 하는 말이 필요한가?
이미 불을 필요로 하는 곳이므로 불을 일으키는 말이 필요하다.
만약 불이 오는 중의 불이라야 비로소 쓸 수 있다면 물이 오는 중의 불은 실제의 불이 아닌가?
실제의 불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을 이루는 불이기 때문에 불 중의 불과는 문이 다름이 된다.

‘(일정한) 방법이 없어 근기에 응하고’란 위와 같은 훌륭한 가르침이 법계에 들어맞아서 따로 취하고 버리는 곳(方所)이 없는 까닭에 ‘(일정한) 방법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다함없는 원만한 총상摠相의 가르침을 일컫는 것이니 보현의 근기에 응하는 것이다.
‘병病에 따라서 하나가 아니다’란 아래 사교이다.

지귀장

『지귀장旨歸章』87)에 이른다.88) 주된 가르침(主敎 : 화엄교)은 원만히 통달하여 허공을 티끌 세계에서 다하고, 인드라(그물)의 구슬은 반듯하고 넓어서 법계를 털끝에서 잡는다. 걸림이 없으며 녹여 융섭함은 노사나불盧舍那佛89)의 현묘한 경계이고 어떠한 한계도 이에 없으니

006_0772_c_01L大聖也善敎者文持敎也此文指
006_0772_c_02L從海印定全體而起故於一喚水
006_0772_c_03L言中火木等法皆具來也於一言
006_0772_c_04L諸法具來故云敎具足此水言
006_0772_c_05L中有水濕義水濕義中具火熱等
006_0772_c_06L法界諸義故云義具足如是諸義
006_0772_c_07L於水言具是故合云一大綠起敎也
006_0772_c_08L欲用火時用喚水言中所至之火耶
006_0772_c_09L此但水綠故若用火時用火言中
006_0772_c_10L來至之火也若爾水來中火
006_0772_c_11L火來中火別耶至故同也
006_0772_c_12L何須更起火來辭耶旣須火
006_0772_c_13L須起火辭若火來中火方得
006_0772_c_14L用者水來中火非實火耶是實火
006_0772_c_15L然而是成水之火故與火中之
006_0772_c_16L爲門別也

006_0772_c_17L
無方應機者如上善敎稱法界無別
006_0772_c_18L取捨之方所故云無方此謂無盡圓
006_0772_c_19L滿摠相敎也應普賢機也隨病非一
006_0772_c_20L下四敎也

006_0772_c_21L
旨歸章云夫以主敎圓通盡虛空
006_0772_c_22L於塵刹帝珠方廣攬法界於毫端
006_0772_c_23L無碍鎔融盧舍那之妙境有涯 [21]
006_0772_c_24L▣▣作「爲十」{乙}「于」疑「干」{編}「禨」
006_0772_c_25L作「機」{乙}
「下」作「不」{乙}

006_0773_a_01L보현의 눈의 현묘한 거울이다. 넓고 넓은 미묘한 말은 실로 그 뜻의 방향(旨趣)을 찾을 수가 없으며, 크고 깊은 법의 바다는 종지(宗)의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이제 간략히 큰 줄기(大綱)를 들어서 이 열 가지 뜻을 열어 그 핵심(機要)을 취하여 ‘지귀旨歸’라고 일컬으니, 현묘함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그 취지를 대략이나마 알기 바란다.

첫 번째, 『(화엄)경』을 설하는 장소이다. 무릇 원만한 가르침이 일어남에 반드시 티끌(수와 같은) 세상에 두루하니 이미 법계를 다한 말씀이라 어찌 그 장소의 다름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제 좁음에서 넓음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열 장소를 연다. 처음은 염부제閻浮提90)이다. 둘째는 백억 (염부제)에 두루함이다.91) 셋째는 시방을 다함이다. 넷째는 티끌길92)에 두루함이다.93) 다섯째는 다른 세계에 통함이다.94) 여섯째는 개별적인 티끌을 모두 갖춤이다.95) 일곱째는 연화장세계에 돌아감이다.96) 여덟째는 국토를 거듭 거둠이다.97) 아홉째는 인드라그물과 유사함이다.98) 열째는 다른 부처님과 같다.99) 운운.

두 번째, 『(화엄)경』을 연설하는 때이다. 무릇 항상恒常한 말씀이 앞과 뒤의 때에 두루하여 걸림이 없으며 하물며 찰나와 겁이 원융하니 어찌 그때의 나눔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제 길고 짧음의 구분을 간략히 들어서 열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는 오직 한 찰나이다. 둘째는 칠일을 다함이다.100) 셋째는 삼세에 두루함이다. 넷째는 동류同類를 거둠이다.101) 다섯째는 다른 겁을 거둠이다.102) 여섯째는 찰나가 겁을 거둠이다. 일곱째는 다시 거듭 거둠이다.103) 여덟째는 다른 세계의 때이다.104) 아홉째는 그것(異界)의 상입이다.105) 열째는 근본이 지말을 거두어들임이다.106) 운운.

세 번째, 『(화엄)경』을 설하시는 부처님이다.
이 경을 설하시는 부처님인 노사나(부처님)의 몸이 이미 앞과 같이 다함없는 때와 장소에 계시니 그 부처님은 한 몸인가, 여러 몸인가? 운운.
() 이제 이 뜻을 드러냄에 간략히 열 가지로 변별한다. 첫째는 작용이 두루함이 걸림이 없다. 둘째는 모습이 변만함이 걸림이 없다. 셋째는 고요함과 작용함이 걸림이 없다.107) 넷째는 의거하여 일어남이 걸림이 없다. 다섯째는 진신眞身과 응신應身이 걸림이 없다. 여섯째는 부분과 원만이 걸림이 없다. 일곱째는 원인과 결과가 걸림이 없다.

006_0773_a_01L普賢眼之玄鑒浩汗微言
006_0773_a_02L叵尋其旨趣宏深法海1) [24] [22]
006_0773_a_03L於宗源今略擧大綱開玆十義
006_0773_a_04L撮其機要稱曰旨歸庶探玄之士
006_0773_a_05L粗識其致焉第上之一第一一張
006_0773_a_06L經處2)弟一夫圓滿敎起必周側
006_0773_a_07L於塵方旣爲盡法界之談詎可
006_0773_a_08L分其處別今從3) [25] [23] 至寛略開十
006_0773_a_09L初此閻浮二周百億三盡
006_0773_a_10L十方四遍塵道五通異界六談 [24]
006_0773_a_11L別塵七歸花藏八重攝刹九猶
006_0773_a_12L帝網十餘佛同云云演經時
006_0773_a_13L夫以常恒之說 [25] 前後際而無涯
006_0773_a_14L況念劫圓融豈可辨其時分今略
006_0773_a_15L擧脩短分齊 [26] 爲十重初唯一念
006_0773_a_16L二盡七日三遍三際四攝同類
006_0773_a_17L五收異劫六念攝劫七復重收
006_0773_a_18L異界時九彼相入十本收末云云
006_0773_a_19L說經佛弟三說此經佛盧舍那
006_0773_a_20L旣在如前無盡時處其佛爲是
006_0773_a_21L一身爲是多身云云今現此義
006_0773_a_22L辨十重一用周無碍二相遍無㝵
006_0773_a_23L三寂用無㝵四依起無㝵五眞應
006_0773_a_24L無㝵六分圓無㝵七因果無㝵

006_0773_b_01L여덟째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걸림이 없다. 아홉째는 은밀히 들어감(潛入)이 걸림이 없다.108) 열째는 원만히 통달함이 걸림이 없다.

네 번째, 『(화엄)경』을 설해 주는 대중이다. 무릇 바다와 같이 대중이 많고 크니 어찌 티끌로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109) 이제 큰 줄기(大綱)를 간략히 통틀어서 또한 열 가지 지위를 나타낸다. 첫째는 과덕果德의 대중이다. 둘째는 항상 따르는 대중이다. 셋째는 법회를 장엄하는 대중이다. 넷째는 공양을 올리는 대중이다. 다섯째는 기이하고 특이한 대중이다.110) 여섯째는 영향 대중이다.111) 일곱째는 법을 표시하는 대중이다.112) 여덟째는 법을 증명하는 대중이다.113) 아홉째는 이익을 얻는 대중이다.114) 열째는 법을 나타내는 대중이다.115)

다섯 번째, 『(화엄)경』을 설하는 방식(儀)이다. 무릇 한량없는 대비大悲로 중생계에 두루하시니 모든 부류에게 교화를 베푸심에 의식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이제 전체와 개별에 나아가 각각 열 가지 예를 연다. 통틀어 논하면 혹은 음성으로써 하며, 혹은 오묘한 모습(色)을 나타내며, 혹은 기묘한 향으로써, 혹은 뛰어난 맛으로써, 혹은 오묘한 감촉으로써, 혹은 법으로서의 대상(法境)으로써 하며, 혹은 내부의 육근(內六根), 혹은 사위의四威儀,116) 혹은 제자의 인물, 혹은 일체의 짓는 바로 다 중생들을 능히 거둔다.

다음에 개별적으로 말소리를 나타내는 데 또한 열 가지 예가 있다. 첫째는 여래 어업語業의 원만한 소리가 스스로 설하는 것이다. 둘째는 여래의 털구멍이 소리를 내어 법을 설하는 것이다. 셋째는 여래의 광명이 소리를 펼쳐 법을 연설하는 것이다. 넷째는 보살의 구업口業으로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보살의 털구멍에서 소리를 내어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보살의 광명에서 또한 소리를 내어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바다와 같은 국토가 소리를 내어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일체중생이 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삼세의 음성으로써 법을 설하는 것이다. 열째는 일체의 법이 모두 소리를 내어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화엄)경』의 가르침(敎)을 보인다. 원만한 가르침(圓敎)의 미묘한 말씀은 반드시 법계를 끝까지 다하니 이미 여래의 다함없는 변재辯才의 힘을 다하여 각각 허공과 털끝의 바다와 같은 국토에 두루하며, 다시 각각 미래의 때를 끝까지 다하도록 몰록 설하며

006_0773_b_01L八依正無㝵九潜入無㝵十圓
006_0773_b_02L通無㝵說經衆弟四夫衆海繁
006_0773_b_03L豈塵4) [26] 能知今統略大綱
006_0773_b_04L亦現十位一果德衆二常隨衆
006_0773_b_05L三嚴會衆四供養衆五奇特衆
006_0773_b_06L六影響 [27] 七表法衆八訂法衆
006_0773_b_07L所益衆十現法衆說經儀弟五
006_0773_b_08L夫以無限大悲周衆生界施化萬
006_0773_b_09L儀式難量今就通別各開十例
006_0773_b_10L通而論之或以音聲或現妙色
006_0773_b_11L或以奇香或以上味或以妙觸
006_0773_b_12L或以法境或內六根或四威儀
006_0773_b_13L弟子人物或一切所作皆堪攝物
006_0773_b_14L次別現言聲亦有十例一如來語
006_0773_b_15L業圓音自說二如來毛孔出聲說
006_0773_b_16L三如來光明舒音演法四令菩
006_0773_b_17L薩口業說法五令菩薩毛孔出聲
006_0773_b_18L說法第上之一第一二張 六令菩薩
006_0773_b_19L光明亦出聲說法七令刹海出聲
006_0773_b_20L說法八令一切衆生說法九以三
006_0773_b_21L世音聲說法十以一切法皆出聲
006_0773_b_22L說法 [28] 經敎弟六圓敎微言
006_0773_b_23L窮法界旣盡如來無盡辯力各遍
006_0773_b_24L虛空毛端刹海復各盡窮未來際

006_0773_c_01L항상 설하여 때와 장소가 끝이 없다. 만약 이러한 가르침이라면 어찌 그 책의 권수를 한정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제 경문에 준함을 기준으로 하여 열 종류로 분석한다. 첫째는 다른 (세계에서) 설해지는 경전이다.117) 둘째는 같은 (세계에서) 설해지는 경전이다.118) 셋째는 보안普眼의 경전이다.119) 넷째는 상본上本의 경전이다.120) 다섯째는 중본中本의 경전이다.121) 여섯째는 하본下本의 경전이다.122) 일곱째는 약본略本의 경전이다.123) 여덟째는 주主와 반伴의 경전이다.124) 아홉째는 권속眷屬의 경전이다.125) 열째는 원만한 경전이다.126)

일곱 번째, 『(화엄)경』의 의미(義)를 나타낸다. 무릇 뜻의 바다는 광대하고 깊으며 참된 근원은 아득하고 아득하나 두 종류로 간략히 열어서 각각 열 가지 문으로 변별한다. 먼저 표시하는 바의 법을 밝힌다. (이 법이) 넓고 넓어서 끝이 없으나 열 쌍(十對)으로 모음으로써 통틀어 거두어들인다. 첫째는 가르침(敎)과 뜻(義)의 한 쌍이다. 둘째는 이법(理)과 현상(事)의 한 쌍이다. 셋째는 경계(境)와 지혜(智)의 한 쌍이다. 넷째는 수행과 계위의 한 쌍이다. 다섯째는 원인과 결과의 한 쌍이다. 여섯째는 의보(依)와 정보(正)의 한 쌍이다. 일곱째는 체體와 작용(用)의 한 쌍이다. 여덟째는 사람과 법의 한 쌍이다. 아홉째는 거스름(逆)과 수순함(順)의 한 쌍이다.127) 열째는 응應과 감感의 한 쌍이다.128)

다음으로 나타내는 바의 이치(理趣)를 밝힌다는 것은, 교묘한 변재辯才가 자재하여 형세의 변화가 매우 많으나 또한 열 가지 예를 들어서 걸림 없음을 나타낸다. 첫째는 본성(性)과 모습(相)이 걸림 없음이다. 둘째는 넓음과 좁음이 걸림 없음이다. 셋째는 하나와 많음이 걸림 없음이다. 넷째는 상입相入이 걸림 없음이다. 다섯째는 상즉(相是)이 걸림 없음이다. 여섯째는 숨음과 드러남이 걸림 없음이다. 일곱째는 미세함이 걸림 없음이다. 여덟째는 인드라그물이 걸림 없음이다. 아홉째는 십세十世가 걸림 없음이다. 열째는 주主와 반伴이 걸림 없음이다.

여덟 번째, 『(화엄)경』의 의도(意)를 풀이한다. 무릇 법의 모습(法相)이 원융한 것이 진실로 인한 바(所因)가 있으니, 인연이 한량없으나 간략히 열 종류로 변별한다. 첫째는 모든 법이 고정된 모습이 없음을 밝히기 위한 까닭이다. 둘째는 오직 마음이 나타낸 까닭이다. 셋째는 환幻의 현상과 같기 때문이다. 넷째는 꿈에 나타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06_0773_c_01L頓說常說時處無邊若斯之敎
006_0773_c_02L可限其部秩今約准經文析爲十
006_0773_c_03L一異5) [27] [29] 二同說經三普眼
006_0773_c_04L四上本經五中本經六下本
006_0773_c_05L七略本經八主伴經九眷屬
006_0773_c_06L十圓滿經現經義弟七夫以
006_0773_c_07L義海宏深直源眇 [30] 略開二類
006_0773_c_08L辨十門先明所摽 [31] 之法浩汗無涯
006_0773_c_09L撮爲十對用以統收一敎義一對
006_0773_c_10L二理事一對三境智一對四行
006_0773_c_11L位一對五因果一對六依正一對
006_0773_c_12L七體用一對八人法一對九逆順
006_0773_c_13L一對十應感一對次明所現理趣
006_0773_c_14L巧辯自在勢變多端亦擧十
006_0773_c_15L以現無㝵一性相無㝵二廣
006_0773_c_16L*俠無㝵三一多無㝵四相入無
006_0773_c_17L五相是無㝵六隱現無㝵
006_0773_c_18L微細無㝵八帝網無㝵九十世無
006_0773_c_19L十主伴無㝵釋經意*弟八
006_0773_c_20L以法相圓融寔有所因因緣無量
006_0773_c_21L略辨十種一爲明諸法無定相故
006_0773_c_22L二唯心現故三如幻事故四如夢
006_0773_c_23L▣字形未詳{底}ㆍ作「穿」{乙}「弟」作「第」{乙}
006_0773_c_24L次同
「俠」作「狹」{乙}次同「笇」作「算」{乙}
006_0773_c_25L
「設」作「說」{乙}

006_0774_a_01L다섯째는 수승한 신통력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깊은 선정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해탈의 힘이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원인이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연기하여 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열째는 법성이 융통하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화엄)경』의 이익을 밝힌다. 무릇 이 보현의 법을 믿고 향하며 나아가 들어감으로써 원만하게 통하고 단박 이익됨이 광대하여 가이없으나, 간략히 경문을 거두어서 그 열 종류를 나타낸다. 첫째는 보고 듣는 이익이다. 둘째는 발심의 이익이다. 셋째는 행을 일으키는 이익이다. 넷째는 계위를 거두는 이익이다. 다섯째는 속히 증득하는 이익이다. 여섯째는 장애를 멸하는 이익이다. 일곱째는 가벼워지는 이익이다. 여덟째는 수행을 짓는 이익이다. 아홉째는 단박에 얻는 이익이다. 열째는 성품(性)에 칭합하는 이익이다.

열 번째, 『(화엄)경』의 원만함을 나타낸다. 무릇 법계는 원통하여 연緣이 계합하지 않음이 없다. 말하자면 위의 아홉 문이 나타내는 법이 모두 합하여 하나의 큰 연기법이 된다. 한 곳이 있음을 따라서 곧 일체가 있으니 걸림 없고 원융하며 다함없고 자재하다. 만약 뜻에 따라서 나누어 열면 또한 열 문이 있다. 첫째는 장소의 원만이다. 둘째는 때의 원만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원만이다. 넷째는 대중의 원만이다. 다섯째는 위의의 원만이다. 여섯째는 가르침의 원만이다. 일곱째는 의미(義)의 원만이다. 여덟째는 의도(意)의 원만이다. 아홉째는 이익의 원만이다. 열째는 두루함의 원만이다. 동일하게 걸림 없는 대연기인 까닭이며, 자재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불가사의한 까닭이다. 이는 말하자면 화엄의 다함없는 바다와 같은 법이 법계를 끝까지 다하고 허공계를 뛰어넘으니, 오직 보현의 지혜라야 바야흐로 그 바닥을 끝까지 다한다.

‘미혹한 자는’부터 ‘근본으로 돌아갈 날이 없다’까지129)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미혹한 자’란 아래 사교의 사람이다. 일승의 머무름 없는 본래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취를 고수하여 본체를 잃는 줄 알지 못해서’란 비유하면 사냥꾼이 헛되이 토끼의 자취를 고수하고 토끼의 몸이 멀리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006_0774_a_01L現故五勝通力故六深定用故
006_0774_a_02L七解脫力故八因無限故九綠起
006_0774_a_03L1) [28] [32] 十法性融通故明經益
006_0774_a_04L*弟九夫以信向趣入此普賢法
006_0774_a_05L通頓益廣大無邊略攝經文現其
006_0774_a_06L十種2) [29] [33] 見聞益二發心益三起
006_0774_a_07L行益四攝位益五速3)訂益六滅
006_0774_a_08L障益七輕利益第上之一第一三張
006_0774_a_09L八造修益九頓得益十稱性益
006_0774_a_10L [34] 經圓弟十夫以法界圓通綠無
006_0774_a_11L不契謂上九門所現之法摠合爲
006_0774_a_12L一大緣起法隨有一處即有一切
006_0774_a_13L無㝵圓融無盡自在若隨義分開
006_0774_a_14L亦有十門一處圓二時圓三佛圓
006_0774_a_15L四衆圓五儀圓六敎圓七義圓
006_0774_a_16L八意圓九益圓十普圓以同一
006_0774_a_17L無㝵大綠起故自在難量不思議
006_0774_a_18L是謂花嚴無盡法海窮盡法
006_0774_a_19L越虛空界唯普賢智方窮
006_0774_a_20L其底

006_0774_a_21L
迷之者 歸宗未日法記云迷之者
006_0774_a_22L下四敎人也以不知一乘無住本
006_0774_a_23L法故也守跡不知失體者比如獵人
006_0774_a_24L空守4) [30] 不知*免身之遠也如是

006_0774_b_01L이와 같이 삼승의 사람이 세 무수한 겁 동안에 설하심과 같이 수행하되 얻은 과보는 다만 자취일 뿐이나, 고수하여 궁극으로 삼고서 그 일승의 실체를 잃는 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하여도 근본으로 돌아갈 날이 없다’란 한량없는 억 나유타那由他130) 겁 동안 육바라밀을 행하고 갖가지 보리분법을 닦아 익히므로 ‘부지런히 한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일승의 집에 돌아갈 날이 없기 때문에 ‘근본으로 돌아갈 날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법(理)에 의거하고 가르침(敎)에 근거하여’부터 ‘이름 없는 참된 근원’까지131)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이법(理)에 의거하고 가르침(敎)에 근거하여’란 (다음과 같다.) ‘이법’은 곧 모습을 잊은 해인(忘像海印)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마음 가운데 삼세간을 증득하지만 부처님의 증득하는 마음은 하나로서 분별이 없다. ‘가르침’은 곧 모습을 나타낸 해인(現像海印)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증득하신 바 삼세간의 법이 각자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으며 성性이 중도에 있어서 분명하고 분명하게 나타나고 드러난다. 이런 까닭에 모습을 잊은 이법에 의거하여 하나의 붉은 줄을 그리고, 모습을 나타낸 가르침에 의거하여 여러 검은 글자를 배열하여 원만한 도인을 지은 것이다.

‘간략히 반시盤詩를 지어서’란 (다음과 같다.) 검은 글자가 붉은 줄에 서리고 붉은 그림이 검은 글자에 서리기 때문에 ‘반盤’이라고 한 것이다. 검은 (글자)가 붉은 (줄)에 서리는 것은 곧 현상이 이법에 두루한 것이고, 붉은 (줄)이 검은 (글자)에 서리는 것은 곧 이법이 현상에 두루한 것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가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란 (다음과 같다.) 혹은 밖으로 교화함으로써 이름과 모습이 있을 때를 모두 ‘이름에 집착한다’라고 하고, 곧바로 안으로 증득함을 기준으로 하는 것을 ‘이름 없는 참된 근원’이라 한다. 그래서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는 다만 아래 사교이며, ‘이름 없는 참된 근원’이란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안으로 증득함과 밖으로 교화함이 하나로서 분별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아래 글에 이르기를, “만약 이법(理)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예부터 중도이고 하나로서 무분별이다.”132)라고 한 것이다.

006_0774_b_01L三乘之人三無數劫如說修行所得
006_0774_b_02L之果只是迹耳守爲究竟不知
006_0774_b_03L失其一乘實體故也勤而歸宗未日
006_0774_b_04L無量億那由他劫行六5) [31] 羅密
006_0774_b_05L修習種種菩提分法故云勤也然而
006_0774_b_06L還於一乘之家無日故云歸宗未日
006_0774_b_07L

006_0774_b_08L
依理據敎無名眞源法記云依理
006_0774_b_09L據敎者理則忘像海印謂佛心中
006_0774_b_10L訂三世間而佛訂心一無分別也
006_0774_b_11L則現像海印謂佛所訂三世間法
006_0774_b_12L動各位性在中道了了現現也
006_0774_b_13L故依忘像理6)導一 [32] 朱畫據現像敎
006_0774_b_14L列多黑字作圓印也略制盤詩者
006_0774_b_15L黑字盤於朱畫朱畫盤於黑字故云
006_0774_b_16L盤也黑盤於朱則事遍於理朱盤
006_0774_b_17L於黑則理遍於事也第上之一第一四
006_0774_b_18L

006_0774_b_19L
大記云冀以執名之徒還歸無名眞
006_0774_b_20L源者有以外化有名相際並爲執
006_0774_b_21L直約內訂爲無名眞源然執名
006_0774_b_22L之徒但下四敎無名眞源者若約實
006_0774_b_23L則內訂外化一無分別之處故下文
006_0774_b_24L若約理云訂敎兩法舊來中道

006_0774_c_01L또 증득한 바를 기준으로 하면 부처님의 증득을 곧 증분이라 이름하고 보살의 증득을 교분이라고 이름하는 것일 뿐이다.

자취를 고수하는 사람이 참된 근원으로 돌아갈 때 앞서 고수하던 가르침의 흔적을 버리고 나서 돌아가는가, 고수하던 자취가 곧 돌아가는 근원인가?
뒤와 같다.
만약 그렇다면 연기의 실체인 일승을 깨닫는 사람이 또한 사제四諦, 연생緣生 등을 깨닫는 것인가?
그 움직이지 않는 (사)제, 연(생)을 보는 것의 이름이 곧 다함없는 원통의 법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자취를 고수하는 사람도 또한 다함없는 원통의 법을 깨닫는 것인가?
나(일승의 사람)를 기준으로 하면 곧 다름이 아니지만 그(자취를 지키는 사람)를 기준으로 하면 관계되지 않는다.
2. 시詩를 읽는 법
‘가운데 법法으로부터 시작해서’부터 ‘도인의 길(印道)을 따라서 읽도록 한다’까지133)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가운데 법法으로부터 시작해서 구불구불 돌고 돌아 구부러지고 굽어져서 불佛에 이르러 마치니’란 (다음과 같다.) ‘구불구불 돌고 돌아(盤廻)’는 곧 도인이 원만함을 바로 보는 것이고, ‘구부러지고 굽어져서(屈曲)’는 곧 모든 모서리(角曲)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만약 도인의 길을 기준으로 하면 곧 처음과 끝을 여의는데 무슨 까닭에 글자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처음으로 하고 ‘불’을 끝으로 하는가?
만약 바로 이법(理)을 기준으로 하면 비록 처음과 끝이 없지만 만약 처음과 끝을 보이지 않으면 법에 들어가는 방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인의 길을 따라서’란 (다음과 같다.) 만약 오직 글자만을 기준으로 하면 곧 삼승별교이다. 만약 오직 도인만을 기준으로 하면 곧 일승별교이다. 도인으로써 글자를 따르고 글자로써 도인을 따르면 곧 일승동교이다. 만약 이 셋을 갖추면 곧 일승원교이다. 도인으로써 글자를 따르는 것은 일승이 삼승에 드리우는 것이고 글자로써 도인을 따르는 것은 삼승이 일승에 참예하는 것이다. 위로 참예하고 아래로 드리우니 모두 동교이다.

화엄일승교분기

『교분기敎分記』134)에 이른다.135) 동교란 (다음과 같다.) 운운. 첫째, 법의 모습이 서로 뒤섞이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일승을 밝힌다.

006_0774_c_01L一無分別也且約所訂佛訂則名爲
006_0774_c_02L訂分菩薩訂則名爲敎分耳守迹
006_0774_c_03L之人歸眞源時捨前所守敎迹而後
006_0774_c_04L歸耶所守之迹即所歸之源耶
006_0774_c_05L如後若尒解綠起實體一乘之人
006_0774_c_06L亦解四諦綠生等耶見其動諦
006_0774_c_07L綠之名即是無盡圓通之法也
006_0774_c_08L守迹之人亦解無盡圓通之法耶
006_0774_c_09L約我則非他約其則不7) [33] [35]

006_0774_c_10L
中法爲始 隨印道讀法記云中法
006_0774_c_11L爲始盤廻屈曲乃至佛爲終者盤廻
006_0774_c_12L則直見印圓屈曲則約諸角曲也
006_0774_c_13L若約印道即離始終何故約字
006_0774_c_14L始佛終耶若直約理則雖無始終
006_0774_c_15L如其不示始終則不得入法方便故
006_0774_c_16L隨印道者若唯約字則三乘別敎
006_0774_c_17L若唯約印則一乘別敎以印隨字以
006_0774_c_18L字隨印則一乘同敎若具此三
006_0774_c_19L一乘圓敎也以印隨字者一乘垂於
006_0774_c_20L三乘以字隨印者三乘叅於一乘
006_0774_c_21L上叅下垂並同敎

006_0774_c_22L
敎分記云同敎者云云初約法相
006_0774_c_23L「田」旨歸章作「由」{編}「一」殘存點劃{底}ㆍ
006_0774_c_24L無有{乙}
「訂」通「證」於此書{編}次同「免」
006_0774_c_25L作「兎」{乙}次同
「婆」作「波」{乙}「導一」作
006_0774_c_26L「道二」{乙}
「關」作「開」{乙}

006_0775_a_01L말하자면 삼승에도 또한 인드라그물과 미세 등의 일을 설함이 있으나 주主와 반半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과 같다. 혹은 또한 화장세계를 설하기도 하지만 열(十) 등을 설하지 않는다. 혹은 일승에도 또한 삼승의 법의 모습 등이 있다. 말하자면 십안十眼136) 가운데 또한 오안五眼137)을 갖추고 십통十通138) 중에도 육통六通139)이 있으나 뜻과 이치가 전혀 다른 것과 같다. 이는 곧 일승이 삼승에 드리우고 삼승이 일승에 참예한 것이다. 이는 곧 두 종지가 맞닿아 연이어 이끌고 거두어서 근기와 욕망과 성품을 이루어 별교일승에 들어가게 하는 까닭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도인의 문장에 나아가 많은 뜻의 풀이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른다. 지엄 스님의 오중해인으로 배대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첫 네 가지 해인은 곧 문구를 나누지 않는다. 따라서 모두 통틀어 배대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해인을 기준으로 하면 또한 오중을 갖춘다.

이 다섯 번째 해인이 갖춘 오중으로서 모든 문구를 배대하면 (다음과 같다.) 곧 첫 증분의 4구는 처음 두 가지 해인이다. 다음 ‘진성’ 이하 연기분 14구는 곧 세 번째 해인이다. 다음 ‘능인能人’ 이하 이타행 4구는 곧 네 번째 해인이다. 다음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하 수행방편 4구는 곧 다섯 번째 해인이다. 뒤의 4구는 수행(자)가 얻는 이익이다. 첫 4구 가운데 처음 1구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은 해인(影不現海印)이다. 다음 1구는 모습이 나타난 해인(影現海印)이다. 다음 1구는 앞의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 없고’를 풀이한 것이다. 뒤의 1구는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를 풀이한 것이다.140)

제목에서 법을 기준으로 하면 ‘법계도’이고, 비유를 기준으로 하면 ‘해인도’이니 이 가운데 법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연기분 중에

006_0775_a_01L交叅以明一乘謂如三乘中亦
006_0775_a_02L有說因陁羅 [36] 微細等 [37] 而主伴不具
006_0775_a_03L或亦說花藏世界而不說十等
006_0775_a_04L一乘中亦有三乘法相等謂如十
006_0775_a_05L眼中亦具五眼第上之一第一五張
006_0775_a_06L十通中亦有六通而義理全別
006_0775_a_07L此即一乘垂於三乘三乘叅於一
006_0775_a_08L是即兩宗交接連綴引攝成
006_0775_a_09L根欲性令入別敎一乘故也

006_0775_a_10L
大記云就圖印文有多義釋有云
006_0775_a_11L以儼師五重海印配釋者初四重
006_0775_a_12L不分文句故皆通配也1)弟五重
006_0775_a_13L亦具五重以此*弟五重所具五重
006_0775_a_14L分配諸句則初訂分四句初二重海
006_0775_a_15L印也次眞性下緣起分十四句
006_0775_a_16L*弟三重海印也次能人下利他行四
006_0775_a_17L則*弟四重海印也次是故行者
006_0775_a_18L下修行方便四句則*弟五重海印
006_0775_a_19L後四句是修行所得之益也
006_0775_a_20L四句中初一句影不現海印次一句
006_0775_a_21L影現海印次一句釋前法性無二相
006_0775_a_22L後一句釋前諸法本來寂也
006_0775_a_23L題中約法則法界圖約喩則海印圖
006_0775_a_24L與此中法性何別耶綠起分中分

006_0775_b_01L계界와 종種과 해海141)를 나누어 각각 달리 분배한 것은 수행자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만약 증분이라면 본래 계와 종과 해를 구분하여 보이지 않으니, 따라서 다만 한 맛인 법계의 자리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법계와 해인과 법성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초회에서는 계와 종과 해를 구분하며,142) 제2회에서는 셋의 다름을 말하지 않고 다만 “부처님의 국토가 불가사의하다.”143)라고 통틀어 이르는 것이다.

이 (도)인에 의거하면, 만약 상근기이면 바로 증분에 들어가고, 만약 중근기이면 ‘진성은’ 이하의 교분 가운데에서 들어갈 수 있으며, 만약 하근기이면 뒤의 ‘행자’ 이하의 수행방편 가운데에서 비로소 처음 들어갈 수 있다.

표훈表訓144)과 진정眞定145) 등 십여 대덕이 (의상) 화상이 계신 곳에서 이 도인을 배울 때, “움직이지 아니한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인 뜻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이에 화상이 곧 사구게로써 답하여 이르셨다.

모든 연緣의 근본은 나이며,
일체법의 근원은 마음이며,
말(語言)은 매우 중요한 근본이니,
진실한 선지식이다.

이어 이르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한다.”라고 하셨다.

표훈 대덕이 다섯 가지 관법으로 해석함(五觀釋)을 지으니, 첫째는 실상관, 둘째는 무주관, 셋째는 성기관, 넷째는 연기관, 다섯째는 인연관이다. 처음의 관은 ‘법의 근원은 마음이며’와 ‘매우 중요한 근본이니’이고, 뒤의 네 관은 ‘근본은 나이며’이다.

인하여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였다. 나(我)는 모든 연으로 이루어진 법이며, 모든 연은 나로써 연을 이룬다는 것이 인연관이다. 연으로써 나를 이루니 나는 체가 없고, 나로써 연을 이루니 연은 체성이 없다는 것이 연기관이다. 모든 법의 있음과 없음이 원래 하나이고, 있음과 없음의 모든 법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이 성기관이다. 있을 때는 있음이 아니니 오히려 없음과 같고, 없을 때는 없음이 아니니 오히려 있음과 같다는 것이 무주관이다.

006_0775_b_01L界種海各別配者以隨行者之心故
006_0775_b_02L若訂分則本不分示界種海故但
006_0775_b_03L是一味法界之處是故法界海印法
006_0775_b_04L性同一量也是故初會中分界種海
006_0775_b_05L*弟二會中不言三別而但摠云佛
006_0775_b_06L刹不可思議也依於此印若是上根
006_0775_b_07L直入訂分若是中根眞性下敎分
006_0775_b_08L之中而能得入若是下根於後行
006_0775_b_09L者下修行方便之中方始得入也
006_0775_b_10L訓眞定等十餘德從和尙所學此
006_0775_b_11L印時問云不動吾身即是法身自體
006_0775_b_12L之義云何得見於是和尙即以四
006_0775_b_13L句偈子而答之云諸綠根本我一切
006_0775_b_14L法源心語言大要宗眞實善知識
006_0775_b_15L仍云汝等當善用心耳表訓德作五
006_0775_b_16L觀釋一實相觀2)▣▣▣ [34] [38] 三性起
006_0775_b_17L第上之一第一六張 四綠起觀
006_0775_b_18L因綠觀也初觀者法源心與大要宗
006_0775_b_19L後四觀者根本我也因說頌曰
006_0775_b_20L我是諸綠所成法諸緣以我得成綠
006_0775_b_21L是因綠觀以綠成我我無體以我成
006_0775_b_22L綠無性是綠起觀諸法有無元來
006_0775_b_23L有無諸法本無二是性起觀
006_0775_b_24L時非有還同無無時非無還同有

006_0775_c_01L모든 법이 본래 옮겨 움직이지 않으며 관하는 마음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실상관이다.

이 다섯 가지 관법을 지어서 화상에게 바치니 화상이 이르기를, “옳다.”라고 하셨다. 이 다섯 가지 관법으로 30구에 준하면, 곧 증분 4구는 실상관이고, 다음 14구는 무주관이며, 다음 4구는 성기관과 연기관이고, 뒤의 모든 구는 연기관과 인연관이다.

진정 대덕은 세 가지 문으로 해석함(三門釋)을 지으니, 첫째는 이법과 현상이 덕을 갖춘 문(理事具德門)이고, 둘째는 현상이 융통하여 이법을 드러내는 문(事融現理門)이고, 셋째는 수행을 증장하는 문(修行增長門)이다. 이 3문에 표훈 대덕이 움직임 없이 건립하는 문(不動建立門)을 더하여 4문으로 하였다. 이로써 30구에 준하면 증분 4구는 움직임 없이 건립하는 문이고, 다음 14구는 이법과 현상이 덕을 갖춘 문과 현상이 융통하여 이법을 드러내는 문이며, 뒤의 모든 구는 수행을 증장하는 문이다.

말하자면 14구 가운데 처음 4구는 이법과 현상이 덕을 갖춘 문이다. 이 중에서 처음 1구는 머무름 없는 체이므로 이법이며, 다음 1구는 머무름 없는 모습이므로 현상이고, 뒤의 2구는 머무름 없는 작용이다. ‘덕을 갖춤’이란 진성의 이법 가운데 육도인과와 소승인과 내지 원교인과 등의 보현 22위146)를 갖춘 것이다. 22위 가운데 진성의 체를 갖추기 때문이다. 뒤의 10구는 곧 현상을 융통하여 이법을 드러내는 문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티끌이 시방을 녹여 포함하는 도리가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행증장문修行增長門이란 만약 모든 구에 분배한다면 비록 이타행 4구에 속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의 뜻은 처음에 증분으로부터 혹은 묻고 혹은 해석하여 자기의 몸이 곧 법성임을 알게 하는 것일 뿐이다.

006_0775_c_01L無住觀諸法本來不移動能觀之心
006_0775_c_02L亦不起是實相觀作此五觀以呈
006_0775_c_03L和尙和尙曰是也以此五觀准三
006_0775_c_04L十句則訂分四句實相3) [35] 次十四
006_0775_c_05L句無住* 次四句性起*綠起*
006_0775_c_06L後諸句緣起*因綠*眞定德
006_0775_c_07L作三門釋一理事具德門二事融現
006_0775_c_08L理門三修行增長門於此三門
006_0775_c_09L訓德加不動建立門爲四門也
006_0775_c_10L此准三十句者訂分四句不動建立
006_0775_c_11L次十四句理事具德及事融現理
006_0775_c_12L後諸句修行增長門也謂十四
006_0775_c_13L句中初四句理事具德門此中初一
006_0775_c_14L句無住體故理次一句無住相故事
006_0775_c_15L後二句無住用也具德者眞性理
006_0775_c_16L中具六道因果小乘因果乃至圓
006_0775_c_17L敎因果等普賢二十二位二十二位
006_0775_c_18L中具眞性體故也後十句則事融
006_0775_c_19L現理門也謂一4) [36] [39] 鎔融含十方之道
006_0775_c_20L理現前故也修行增長門者若分
006_0775_c_21L配諸句雖屬利他四句然此中意
006_0775_c_22L始從訂分或徵或釋令知自身即
006_0775_c_23L「弟」作「第」{乙}次同▣▣▣作「二無住」{乙}
006_0775_c_24L
」作「觀」{乙}次同▣作「塵」{乙}

006_0776_a_01L
또 네 가지 원만함의 뜻(四滿義)으로 분과하면 곧 증분의 4구는 행실만行實滿의 뜻이고, ‘진성은 매우 깊고’ 이하는 증만證滿의 뜻이며, ‘처음 발심할 때가’ 이하는 법만法滿의 뜻이고,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하는 인만人滿의 뜻이다. 이 말 또한 표훈 대덕의 뜻이니 상원上元 원년(674) 황복사에서 설한 것이다.147)

행만은 단지 행이 만족되면 곧 증분이기 때문이다. 증만은 증분이 만족한 법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 가운데 일체이며 하나가 곧 일체인 등 걸림 없이 자재함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법만은 처음 발심할 때 곧 정각을 이룬다는 것이 법이 만족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만은 범부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곧 부처님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 도인 가운데 이 네 가지 뜻으로써 문구를 분과한 것과 같이 또한 일부 대경 가운데에도 이 네 가지 뜻으로 분과한다. 말하자면 행만行滿이란 일부(『화엄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만 십불의 안으로 증득한 것이다. 증만證滿이란 일부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와 많음, 크고 작음이 걸림이 없는 뜻이다. 법만法滿이란 일부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처음 발심하면 곧 법을 만족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뜻이다. 인만人滿이란 일부의 처음부터 끝까지 곧 이 범부의 몸이 자체불인 뜻이다. 도인은 모든 문구에 분배한 것이고 경은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통틀어 분배하여 자재로이 분과한 것이다.

십구장

『십구장十句章』148)에 이른다.149) ‘열 번째, 과문을 뛰어넘어 뜻을 이룸이 자재하다’란 첫 모임(初會)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다. 만약 다른 모든 모임과 처소의 법의 문구 등이 이 초회에 있어서 자재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초회에서의 뜻과 같이 다른 모임에서도 또한 그러하니 이에 준한다. 그 모습은 어떠한가? 만약 초회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도리천의 법회라고 답한다.150)

006_0776_a_01L是法性耳又以四滿義科1)訂分
006_0776_a_02L四句行實滿義眞性甚深下訂滿
006_0776_a_03L初發心時下法滿義是故行者下
006_0776_a_04L人滿義此辭亦是訓德之義上元元
006_0776_a_05L在皇福寺說也第上之一第一七張
006_0776_a_06L行滿者但行滿則是訂分故訂滿者
006_0776_a_07L爲是訂分滿足之法方得一中一切
006_0776_a_08L一即一切等無㝵自在故法滿者
006_0776_a_09L發心時便成正覺者以法滿足方得
006_0776_a_10L成故人滿者不動凡身 [40] 即滿足
006_0776_a_11L佛故如此印中以此四義科文
006_0776_a_12L於一部大經之中以此四義科也
006_0776_a_13L行滿者一部始終只是十佛內訂也
006_0776_a_14L訂滿者一部始終一多大小無障
006_0776_a_15L㝵義也法滿者一部始終唯初發
006_0776_a_16L心即滿足法成正覺義也人滿者
006_0776_a_17L一部始終即此凡身是自體佛義也
006_0776_a_18L印則分配諸句經則亦通配始終自
006_0776_a_19L在科也

006_0776_a_20L
十句章云十隔越科文成義自在
006_0776_a_21L欲成初會義若餘諸會處法文
006_0776_a_22L句等在於此初自在能成如初
006_0776_a_23L會義餘亦爾准之其相云何
006_0776_a_24L問初會名何耶答是忉利天會

006_0776_b_01L만약 무슨 법을 설하느냐고 묻는다면 십주의 법이라고 답한다. 이러한 언설이 능히 (초회의) 뜻을 이룸에 어긋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초회를 논할 때가 모든 모임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모든 모임을 거둘 수 있으며, 초회에서와 같이 다른 모임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이 근본을 기준으로 함을 따라서 앞과 뒤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3〕 법성게法性偈
1. 자리행自利行
1) 증분

‘법성은 원융하여’부터 ‘다른 경계가 아니다’까지151)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무엇이 법法인가? 인분因分152)의 말을 빌려서 만약 굳이 가리킨다면 그대의 몸과 마음이 그것이다. 무엇이 성性인가? 곧 원융한 것이 그것이다. 어째서 원융한가? 두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인 까닭에 둘이 없는가, 둘이면서 둘이 없는가? 하나인 까닭에 둘이 없는 것이 아니니, 곧 그 두 모습을 바로 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법인가? 법성이 그것이다.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가? 원융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본래 고요한가? 두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고요한 곳을 이름할 수 있는가? 이름해서 지목할 수 없으니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름이 없는가?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모습이 없는가?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중에는 닦아서 증득함도 또한 끊어졌는가? 끊어졌다. 실제로 닦아서 증득함이 없는가? 실제로 없다. 그러나 성인도 또한 닦아서 증득한다. 닦아서 증득하기를 구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닦아서 증득하는가? 만약 가르칠 수 있다면 이는 교분이다. 그러므로 오직 대장부의 마음을 잘 쓰는 곳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이 증분 가운데 일체 모든 법이 갖추어져 있는가, 빠져 있는가? 갖추어져 있다. 만약 그렇다면 또한 변계遍計의 비법非法도 갖추어져 있는가? 어찌 갖추어져 있겠는가? 그렇다면 빠져 있는가? 어찌 빠져 있겠는가? 말하자면 한 물건도 보법 아님이 없는 까닭에 어찌 갖추어져 있으며, 변계의 비법을 움직이지 않고 곧 법을 만족하니 어찌 빠져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엄 스님이 이르기를, “일승 가운데 어떤 법이 없는가? 비법이 없다. 어떤 법이 없지 않은가? 비법이 없지 않다.”라고 하였다.

006_0776_b_01L問說何法答是十住法如是言說
006_0776_b_02L不違能成義何以故初會論時
006_0776_b_03L爲諸會本故能攝諸會如初會
006_0776_b_04L餘會亦尓隨約是本能攝前後也

006_0776_b_05L[法性偈]
法性圓融至非餘境法記云何者是
006_0776_b_06L借因分詮若强指者汝身心是
006_0776_b_07L何是性即圓融是也云何圓融
006_0776_b_08L二相故一故無二二而無二耶
006_0776_b_09L是一故無二即其二相直云無二
006_0776_b_10L何是諸法法性是也何故不動圓融
006_0776_b_11L何故本來寂無二相故本來寂
006_0776_b_12L處可得名耶不可名目以無名故
006_0776_b_13L何故無名以無相故何故無相
006_0776_b_14L一切故若爾此中修訂亦絶耶絶也
006_0776_b_15L實無修訂耶第上之一第一八張 實無
006_0776_b_16L然而聖亦修訂要須修訂如何
006_0776_b_17L修訂若可誨者是敎分故唯大2) [37]
006_0776_b_18L夫善用心處非餘境也此訂分中
006_0776_b_19L切諸法具耶闕耶具也若爾亦具
006_0776_b_20L遍計非法耶何得具耶爾則闕耶
006_0776_b_21L何得闕耶謂無有一物非普法故
006_0776_b_22L何得具耶不動遍計非法即滿足法
006_0776_b_23L何得闕耶故儼師云一乘中何法缺
006_0776_b_24L非法缺何法不缺非法不缺也

006_0776_c_01L
진수기
『진기眞記』에 이른다. ‘법성’이란 미세한 티끌법성ㆍ수미산須彌山153)법성ㆍ일척법성一尺法性ㆍ오척법성五尺法性이다. 만약 금일의 오척법성에 근거하여 논한다면, 미세한 티끌법성과 수미산법성 등이 자신의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오척에 알맞게 이루어지니, 작은 지위를 늘리지도 않고 큰 지위를 줄이지도 않으면서 능히 이룬다. ‘원융’이란 미세한 티끌의 법이 오척에 만족하고 수미산의 법이 오척에 계합하기 때문이다. ‘두 모습이 없다’란 미세한 티끌이 비록 만족하고 수미산이 비록 계합하지만 다만 오직 오척인 때문이다.

‘모든 법’이란 앞의 ‘법’을 가리킨다. ‘움직이지 아니하여’란 앞의 ‘성’을 가리키니, 성이란 머무름 없는 법성(無住法性)이다. 그러므로 이 (의상) 화상이 “금일 오척의 몸이 움직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여 머무름이 없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본래 고요하다’란 앞의 ‘두 모습이 없다’를 가리킨다. 다만 오척법성일 뿐 곁에 다른 물건이 없는 까닭에 ‘본래 고요하다’라고 한 것이다.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일체가 끊어져’란 위에서 처음부터 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 곳과 같다.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이시라야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기

‘고기古記’154)에 이른다. 표훈 대덕이 의상 화상에게 여쭈어 말씀드렸다. “무엇이 머무름이 없는 것입니까?”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곧 내 범부의 오척 되는 몸이 삼제三際155)에 들어맞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만약 삼제를 기준으로 하여 이를 나누면 여러 종류의 오척인 것입니까?” 화상이 말씀하였다. “이는 연緣의 오척인 까닭에 하나를 구하면 곧 하나이고 많은 것을 구하면 곧 많다.”
“만약 삼제에 들어맞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곧 머무름이 있는 것입니까?” 화상이 말씀하였다. “만약 오척이 머무르는 곳을 보지 않는다면 앞으로 머무름 있음과 머무름 없음을 내가 마땅히 설하겠다.”

006_0776_c_01L
眞記云法性者微塵法性須彌山
006_0776_c_02L法性一尺法性五尺法性若約今
006_0776_c_03L日五尺法性論者微塵法性須彌山
006_0776_c_04L法性等不動自位稱成五尺不增小
006_0776_c_05L位不減大位而能成也圓融者
006_0776_c_06L塵法滿五尺須彌山法契五尺故也
006_0776_c_07L無二相者微塵雖滿須彌雖契
006_0776_c_08L唯五尺故也諸法者指前法也
006_0776_c_09L動者指前性也性者無住法性也
006_0776_c_10L故此和尙云約今日五尺身之不動
006_0776_c_11L爲無住也本來寂者指前無二相也
006_0776_c_12L只是五尺法性側無餘物故云本來
006_0776_c_13L寂也無名無相絶一切者如上初初
006_0776_c_14L不見名相處也訂智所知非餘境者
006_0776_c_15L唯佛與佛乃可能知故也

006_0776_c_16L
古記云表訓德問相和尙言云何
006_0776_c_17L無住和尙曰即我凡夫五尺身
006_0776_c_18L稱於三際而不動者是無住也
006_0776_c_19L若約三際分之則多種五尺耶
006_0776_c_20L尙云以是緣之五尺故須一即一
006_0776_c_21L須多即多也若稱三際而不動
006_0776_c_22L即有住耶和尙曰若不見五
006_0776_c_23L尺住處將來有住無住我當說也
006_0776_c_24L「訂」通「證」於此書{編}次同「丈」作「文」{乙}

006_0777_a_01L
또 월유사 법회에서 신림 대덕이 말씀하였다. “옛적에 상원相元156) 스님이 진정 스님에게 물어 말씀하였다.
()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습니까, 머무름이 있으면서 머무름이 없습니까?
둘 다 맞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머무름이 없는 것입니까?
오직 머무르게 하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머무름 없음을 머무르게 합니까, 머무름 있음을 머무르게 합니까?
또한 둘 다 맞지 않습니다. 이상.

이것은 곧 질문이 비록 질문은 감당하지만 답은 감당하지 못하고, 답이 비록 답은 감당하지만 질문은 감당하지 못하는 자리이다. 만약 말을 빌린다면 유위법이 찰나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다는 것과는 같지 않고, 무위법이 삼제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다는 것과도 같지 않다.

또 신림 대덕이 법을 설할 때, 대운 법사 군大雲法師君157)이 아뢰었다. “연기분의 설법은 이와 같으나 증분의 설법은 어떻습니까?” 신림 대덕이 묵묵히 얼마쯤 있다가 말씀하였다. “답해 마쳤다.” 대운 법사 군이 아직 깨닫지 못하자 신림 대덕이 말씀하였다. “군이 이 질문을 일으킬 때 앉은 자리와 일체 법계의 모든 법이 동시에 질문을 일으키는 것이 이것(증분)일 뿐이다. 단지 군이 묻고 다른 일체의 법이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운 법사 군이 아뢰었다. “법계의 목구멍과 다함없는 혀가 동시에 질문을 일으키는 것은 연기분의 질문입니까?” 신림 대덕이 말씀하였다. “삼세간의 법이 동시에 질문을 일으키는 것은 증분의 질문이고,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것에 들어맞는 것은 증분의 설이며, 삼세간의 법이 각각 자기 자리에 머물러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증분의 들음이다.”

2) 연기분

(1) 연기의 체體

‘진성은 매우 깊고’부터 ‘연을 따라 이룬다’까지158)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위 증분 중에 그 몸과 마음을 가리켜 바로 법성을 보였으나 이름과 모습이 없음을 말미암아

006_0777_a_01L又月瑜寺會神琳德云昔相元師
006_0777_a_02L問眞定師云無住故無住耶有住
006_0777_a_03L而無住耶第上之一第一九張
006_0777_a_04L並不是若爾云何無住耶
006_0777_a_05L唯是令住故云無住耳無住令
006_0777_a_06L住耶有住令住耶亦並不是
006_0777_a_07L已上此則問雖堪問不堪答答雖
006_0777_a_08L堪答不堪問處也若假言者非如
006_0777_a_09L有爲法刹那不住故云無住
006_0777_a_10L如無爲法三際不住故云無住也
006_0777_a_11L又林德說法之時大雲法師君白
006_0777_a_12L綠起分說法如是訂分說法云
006_0777_a_13L林德默然有頃云答之已了也
006_0777_a_14L雲法師君未會林德云君之起此
006_0777_a_15L問時所坐之床及一切法界諸法
006_0777_a_16L同時發問者是耳但君問而餘一
006_0777_a_17L切法不起問者非也法師君白1) [38]
006_0777_a_18L法界咽喉無盡舌端同時發問者
006_0777_a_19L綠起分之問乎林德云三世間法
006_0777_a_20L同時發問者訂分之問稱於默然
006_0777_a_21L不動者訂分之說三世間 [41]
006_0777_a_22L住自位本來不動者訂分之聞也

006_0777_a_23L
眞性2) [39] 至隨緣成法記云上訂
006_0777_a_24L分中指其身心直示法性由無名相

006_0777_b_01L중생(機)이 들어가기 어려운 까닭에, 법성을 ‘진성’이라 바꾸어 이름해서 그들이 익히게 한 것이다. 비유하면 눈먼 사람이 비단 짜는 것을 배우고자 하니 장인匠人이 가르쳐 말하기를, “마땅히 모아 갖추어서 가지고 오라.”고 하니 저 맹인이 풀로 만든 끈을 가지고 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증분은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오직 증득한 이만 알 바이다. 그러나 팔식八識159)의 허망한 마음으로 깨달아 들어가고자 하니 그런 까닭에 이 사람에게 증분의 자리를 바로 가리키지 못하고 이에 한 걸음 내려와서 임시로 진성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우 깊고’란 진성에 들어가는 문이다. 말하자면 화장세계의 매우 깊음과 미륵누각의 매우 깊음이다. 화장세계의 매우 깊음이란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서 법계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미세한 티끌을 기준으로 그 안과 밖을 구하나 모두 얻을 수 없다.160) 미륵누각의 매우 깊음이란 말하자면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튕겨 누각의 문을 열고 선재동자가 들어가자 단박에 삼세의 자기 몸과 법, 그리고 모든 선우善友들을 보기 때문이다.161)

‘극히 미묘하여’란 중도이다. 두 변을 떠난 까닭에 중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곧 모든 변을 기준으로 하여 중도라고 하는 것이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등은 자기에게 자성이 없으므로 남(他)으로 자성을 삼고, 남(他)이 자성이 없으므로 자기로 자성을 삼는 것이다. 그래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라고 한 것이다.

진수기
『진기眞記』에 이른다.
진성眞性이 위의 법성法性과 어떻게 다른가?
어떤 이는 ‘다르다’고 한다. 말하자면 법성은 곧 진眞과 망妄에 통하여 원융을 취하고 또 유정과 유정 아닌 것에 통한다. 이 (진성)은 곧 오직 진이며 또 오직 유정의 문이다. 이하 진성을 풀이하는 단락에서 중생의 12지支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162)
그러나 지금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진성이 곧 법성이다. 이른바 진성의 체가 매우 깊고 미묘하다는 것은

006_0777_b_01L機難得入故以法性轉名眞性
006_0777_b_02L其習也比如盲人欲學織錦匠者
006_0777_b_03L敎云當集具來而彼盲人執草繩
006_0777_b_04L如是訂分絕一切故唯訂所知
006_0777_b_05L然以八識妄心而欲訂入故於此人
006_0777_b_06L不能直指訂分之處乃下一步假作
006_0777_b_07L眞性之名以示之也甚深者入眞
006_0777_b_08L性之門謂花藏世界之甚深與彌勒
006_0777_b_09L樓閣之甚深也花藏世界甚深者
006_0777_b_10L一一塵中見法界故是故約一微塵
006_0777_b_11L求其內外並不可得彌勒樓閣甚深
006_0777_b_12L第上之一第二○張 謂彌勒彈指開
006_0777_b_13L樓閣門善財入已頓見三世自身及
006_0777_b_14L法與諸善友故也極微妙者中道
006_0777_b_15L非謂離二邊故以爲中道即約
006_0777_b_16L諸邊云中道也不守自性等者
006_0777_b_17L自無性以他爲性由他無性以自
006_0777_b_18L爲性故云不守自性隨緣成也

006_0777_b_19L
眞記云眞性與上法性何別
006_0777_b_20L云別也謂法性則通眞妄取圓融
006_0777_b_21L通情非情也此則唯是眞而又唯是
006_0777_b_22L有情門以下釋眞性段約衆生十二
006_0777_b_23L支故也然而今約實云眞性即是法
006_0777_b_24L性也所謂眞性之體甚深微妙者

006_0777_c_01L다만 자성을 두지 않고 모든 연을 모아서 이루기 때문이다. 만약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163)이 무명의 바람인 연을 따라서 차별된 만법을 이룬다. 만약 일승의 뜻으로부터라면 연 이전에 법이 없기 때문에 먼저 진성이 있어서 연을 따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오늘 혹 물의 작용이 되고 혹 돌의 작용이 되니, 연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남김없이 몰록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법 가운데 물의 이름과 물의 모습, 돌의 이름과 돌의 모습 등이 있기 때문에 이름과 모습이 없지 아니하나, 이 이름과 모습은 곧 이름과 모습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중생의 첫 번째 무명의 지支를 기준으로 열 번의 관(十番觀)164)을 거치면 무명의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곧 매우 깊은 법이니, 취하고 버릴 바가 없기 때문에 ‘미묘하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곧 곁이 없는 이름과 모습을 이룬다.

만약 보현의 증득을 기준으로 하면 곁이 없는 이름과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서 곧 바로 이름을 여의고 모습을 끊는다. 만약 열 부처님의 증득을 기준으로 하면 처음부터 이름과 모습 등을 보지 않는다. 무명의 지支가 이미 그러한 것처럼, 내지 노사老死의 지支도 다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부처님의 법을 설하신 것이 없으니, 그 응해서 교화할 바를 따라서 법을 연설하신다.”165)라고 하였다. 설함이 없는 것은 증분이고 설하면 교분이다.

도신장

『도신장道身章』166)에 이른다. 만약 고정적으로 예로부터라면 연기가 자성이 있어서 자재할 수 없다. 이른바 연기란 자성이 없음이고, 자성이 없음이란 머무름 없음이며, 머무름 없음이란 하나에 치우치지 않음이고, 하나에 치우치지 않음이란 마땅하지 않은 바가 없음이다.
이러한 등의 이법이 어찌 예로부터가 아닌가?

006_0777_c_01L以不存自性攬諸緣成故也若約三
006_0777_c_02L乘論者自性淸淨心隨無明之風
006_0777_c_03L成差別萬法也若自一乘義則以
006_0777_c_04L綠前無法故非先有眞性而隨緣成
006_0777_c_05L且吾今日或爲水用或爲石用
006_0777_c_06L中法界諸法無遺頓起故也如是法
006_0777_c_07L而有水名水相石名石相等故
006_0777_c_08L不無名相而此名相即無名相
006_0777_c_09L故且約衆生一無明支歷十番觀
006_0777_c_10L不動無明名相即甚深法無所取
006_0777_c_11L捨故云微妙是故不動名相即成
006_0777_c_12L無側名相若約普賢訂則不動無側
006_0777_c_13L名相即正離名絕相若約十佛訂
006_0777_c_14L則初初不見名相等也如無明支旣
006_0777_c_15L乃至老死支皆亦如是是故經
006_0777_c_16L一切諸如來無有說佛法隨其
006_0777_c_17L所應化而爲演說法無有說者證
006_0777_c_18L說則敎分

006_0777_c_19L
道身章云若定自古則緣起有性
006_0777_c_20L不得自在所謂綠起者無性
006_0777_c_21L性者無住無住者不偏於一
006_0777_c_22L偏於一者第上之一第二一張 無所
006_0777_c_23L不當如是等理豈不自古
006_0777_c_24L「云」作「六」{乙}「甚」作「其」{乙}

006_0778_a_01L
삼승에서는 먼저 하나의 법을 두고 이 법이 연緣을 따르나 일승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연이 곧 법이고 연 외에 연을 따르는 법이 없다. 이미 ‘예로부터’라고 말한 것은 곧 이것이 지금 연기한 까닭에 그러함을 알 것이다. 만약 고정적으로 예전에 머물러 있고 또 고정적으로 지금에 머무른다면 연기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연기법이 자성이 없음으로써 진성을 삼는다.”라고 할 수 있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표훈 대덕의 뜻은 곧 ‘진眞’은 머무름 없는 본래의 법이고 ‘성性’은 본분의 종자(本分種)이다. 본분의 종자란 만약 경문의 출처를 가리킨다면 초회初會167) 과지果地의 다섯 바다(五海)168)이다. 이 다섯 바다로써 본식本識의 체를 삼는다. 이 본식을 기준으로 하여 뒤의 여러 모임 가운데 혹은 ‘종성’을 말하며 혹은 ‘행업行業’을 말하며 혹은 ‘서원은 잘 결정되어 있다(願善決定)’169) 등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상근기의 사람이라면 바로 증분에 의거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이 바로 곧 법성임을 증득한다. 그러나 이 증득한 곳은 이름과 모습이 끊어진 까닭에 중ㆍ하 근기의 사람은 믿지 못한다. 따라서 다섯 바다가 너의 본식의 근원이라고 설하니, 이로 말미암아 앞의 (중ㆍ하) 근기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법성임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성에 의거하여야 비로소 본식의 뜻을 건립하는 까닭에, 모든 가르침 가운데 혹은 구분뢰야具分賴耶170)를 설하고 혹은 일부분인 생멸뢰야(一分生滅賴耶)171) 등을 설하나, 오직 보현의 근기만이 자기의 본식이 다섯 바다의 근원임을 증득한다. 그러므로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172)라고 하였다.

진성이 이미 이와 같이 매우 깊고 미묘한데 무슨 뜻에서 22위二十二位173)를 나누는가?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필요로 하는 바의 지옥 내지는 부처님의 과위 등의 연을 따라서 22위를 이룬다. 이러한 22위를 ‘보普’ 자로 된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다 보현 자체인 까닭에 제삼중해인第三重海印174)이 바로 보현보살 대인의 경계이다.

006_0778_a_01L三乘中先置一法此法隨緣
006_0778_a_02L乘不尒綠即是法綠外無隨緣之
006_0778_a_03L旣云自古即知是今綠起故尒
006_0778_a_04L若定住古又定住今非緣起
006_0778_a_05L可云綠起法以無性爲眞性矣

006_0778_a_06L
大記云訓德意則眞者無住本法
006_0778_a_07L性者本分種也本分種者若指
006_0778_a_08L文處初會果地1) [40] 海也以此五海
006_0778_a_09L爲本識體約此本識後諸會中
006_0778_a_10L云種性或云行業或云願善決定等
006_0778_a_11L謂若上根人直依2)訂分得自身
006_0778_a_12L心正即法性然此訂處絶名相故
006_0778_a_13L下之人未能信得故說五海是汝
006_0778_a_14L本識之源由是前機得自身心即
006_0778_a_15L是法性是故依此眞性方始建立本
006_0778_a_16L識義故於諸敎中或說具分賴耶
006_0778_a_17L說一分生滅賴耶等唯普賢機得自
006_0778_a_18L本識是五海之源故云十佛普賢大
006_0778_a_19L人境眞性旣如是甚深微妙於何
006_0778_a_20L義中分二十二位耶以不守自性
006_0778_a_21L隨我所須地獄乃至佛果等綠
006_0778_a_22L成二十二位也如是二十二位以普
006_0778_a_23L字印印則皆普賢自體故3)弟三重
006_0778_a_24L海印正是普賢大人之境也

006_0778_b_01L
관석

숭업崇業175) 스님의 『관석觀釋』176) 중에서 「보살명란품菩薩明難品」의 “마음의 성품은 하나이다.(心性是一)”177)라는 글을 풀이하여 이른다. 법장 스님은 계위에 의거함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한 까닭에 구한 것을 막아 거듭 힐난함을 세웠고,178) 지엄 스님은 바로 일승의 갖가지 마음(種種心)179)이 습기를 지나는 바다(濕過海)180)라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한 까닭에 “마음은 무분별로써 하나의 성품을 삼는데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이룰 수 있는가?”181)라고 하였다. 이 질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앞의 「광명각품」 중에서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법계에 두루 칭합하여 오직 하나의 부처님 지혜만을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그 가운데 육도의 인과와 소승의 인과 내지 원교의 인과 등 보현 22위가 나열된 것은 일승에서 보현보살은 교분의 궤칙이 되고 열 부처님은 증분의 궤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분의 궤칙을 보이고자 하는 까닭에 나열한 것일 뿐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한 물건이라도 제외하면 반드시 온전한 법계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육도의 인과와 소승의 인과 등으로 보현보살의 아함위를 삼고 그 마음을 원융하게 단련하여 하나의 부처님 지혜를 이루고자 해서 부처님 지혜로 보현보살의 증득을 삼는다. 이로 인해 묻기를, “부처님의 지혜가 하나인데 어떻게 능히 육도 내지 부처님 등의 갖가지 몸과 마음의 과보 등을 생하는가?”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답하여 말씀하였다.

모든 법은 자재하지 아니하여 실제를 구해도 얻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일체법은 둘이 함께 서로 알지 못한다.182)

눈ㆍ귀ㆍ코ㆍ혀ㆍ몸, 마음과 의식, 모든 중생의 감각기관이
이로 인해서 뭇 괴로움에 유전하나 실제로는 유전하는 바가 없다.
법성은 유전하는 바가 없으나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유전함이 있다.
거기에 나타내 보임이 없으며 나타내 보임에 있는 바가 없다.183)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법’이란 하나의 성품과 여러 가지 과보에 통하니, 말하자면 하나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써 하나를 삼고,

006_0778_b_01L
崇業師觀釋中釋明難品心性是
006_0778_b_02L一之文云藏師約寄位釋故立遮
006_0778_b_03L救重難儼師直約一乘種種心濕
006_0778_b_04L過海義釋故云心以無分別爲一
006_0778_b_05L云何能成種種事耶此問意者
006_0778_b_06L前光明覺品中佛之智光稱周法
006_0778_b_07L第上之一第二二張 只一佛智
006_0778_b_08L所以其中列六道因果及小
006_0778_b_09L乘因果乃至圓敎因果等普賢二
006_0778_b_10L十二位者以一乘中普賢爲敎分
006_0778_b_11L之軌十佛爲訂分之軌故也是故
006_0778_b_12L欲示敎分之軌故列之耳欲得佛
006_0778_b_13L若除一物必不得全法界之
006_0778_b_14L是故要以六道因果小乘因果
006_0778_b_15L等爲普賢阿含位融鍊其心
006_0778_b_16L成一佛智故以佛智爲普賢訂也
006_0778_b_17L因此問云佛智是一云何能生六
006_0778_b_18L道乃至佛等種種身心果報等耶
006_0778_b_19L故經答云諸法不自在求實不可
006_0778_b_20L是故一切法二俱不相知眼耳
006_0778_b_21L鼻舌身心意諸淸根因此轉衆苦
006_0778_b_22L而實無所轉法性無所轉示現故 [42]
006_0778_b_23L於彼無示現示現無所有釋曰諸
006_0778_b_24L法者通於一性及種種果也謂一

006_0778_c_01L여러 가지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로써 여러 가지를 삼는다. 그러므로 선악의 갈래(善惡趣)184)에서 여러 가지 몸과 마음이 다 서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한 까닭에 ‘자재하지 아니하여’라고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엄 스님은 “분별이 없어서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여러 일을 이룰 수 있다. 이상.185)라고 한 것이다.

자재하지 않음은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고, 머무르지 않음의 뜻은 움직이지 않음의 뜻이다. 소에서 이르기를, “짓되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186)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그 몸과 마음이 주재主宰가 있으면 모든 업을 짓는 자가 갖가지 과보를 받겠지만, 만약 몸과 마음이 주재가 없으면 업을 짓는 자가 허공에서 동작하는 것과 같아서 갖가지 과보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허공의 인因을 좇아 허공의 과보를 내기 때문에 인과의 뜻 또한 걸리지 않는다.

소에서 이르기를, “경문에 ‘서로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망정(情)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힘(力)ㆍ성품(性)ㆍ지음(作)이다.”187)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힘(力)은 곧 티끌 수의 연緣의 힘이니 중문中門이다. 성품(性)은 곧 머무름 없는 법성이니 즉문이다. 지음(作)이란 불가사의한 지음이니 이것은 중문과 즉문의 결과이다. 일체 모든 법은 반드시 중문과 즉문을 갖추어야 비로소 짓는 바가 있다. 이것은 자성법의 가고 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문은 허공에 건립하는 문이고 즉문은 허공에서 동작하는 문이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지엄 스님이 이르기를, “연이란 곁이 없다는 뜻이고, 곁이 없다란 힘ㆍ성품ㆍ지음이다.”라고 한 것이다.

옛적에 신림 대덕이 이르기를, “「보살명란품」의 한마음(一心)의 바다는 습기를 지나며, 『대승기신론』의 한마음의 바다는 습기에 머무른다. 만약 습기에 머무르는 바다에 서서 답한다면 뜻에 걸리는 바가 있고,

006_0778_c_01L無自故以種種爲一種種無自故
006_0778_c_02L以一爲種種也是故善惡趣中種
006_0778_c_03L種身心皆不相知自位不動
006_0778_c_04L云不自在也是故儼師云無分
006_0778_c_05L別不住故能成衆事也已上 不自
006_0778_c_06L在者不住義不住義者不動義
006_0778_c_07L䟽云作無主故者若其身心有主
006_0778_c_08L宰而造諸業者受種種果若身
006_0778_c_09L心無主而造業者如虛空動作故
006_0778_c_10L不受種種果也然而從虛空之因
006_0778_c_11L生虛空之果故因果之義亦不㝵
006_0778_c_12L䟽云文云不相知者非謂情
006_0778_c_13L今言知者力性作也者力則
006_0778_c_14L塵數緣力是中門也性則無住法
006_0778_c_15L是即門也作者不思議作
006_0778_c_16L中即門之果也一切諸法要具中
006_0778_c_17L第上之一第二三張方有所作也
006_0778_c_18L非是有自性法去來之義故云中
006_0778_c_19L門者虛空建立門即門者虛空
006_0778_c_20L動作門也故儼師云綠者無側義
006_0778_c_21L無側者力性作也昔林德云明難
006_0778_c_22L一心海者過於濕起信一心海者
006_0778_c_23L留於濕也若立在濕留海中答者
006_0778_c_24L「五」作「玉」{乙}「訂」通「證」於此書編次同
006_0778_c_25L
「弟」作「第」{乙}

006_0779_a_01L만약 습기를 지나는 바다에 서서 답한다면 뜻에 걸리는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질응 대덕이 태백산大白山의 지오智悟 스님의 절에서 하안거를 할 때 『(화엄)대경』 가운데 “법성은 유전하는 바가 없다.”188)라는 글과 『공목장』189) 가운데 “성종성은 본래 있고 습종성은 닦아서 생긴다는 것은 부처님 법에서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내지 “법성 외에 닦아서 일어남이 있다는 것은 연기가 증가할 수 있다는 잘못이다.”190) 등의 글을 얻어서 신림 대덕에게 드리고, “이것은 습기를 지나는 바다의 증득입니까?”라고 여쭈니, 신림 대덕이 “그렇다.”라고 하였다. 풀이하면 ‘연기가 증가할 수 있다는 잘못’이란 만약 증득하는 바의 이법은 예로부터 있고 증득하는 지혜는 지금 마침 비로소 일어난다고 한다면, 곧 지혜로써 이법을 증득할 때 아직 증득하지 못한 때를 바라보면 증가하여 수승한 뜻이 있게 되니, 그런 까닭에 ‘연기가 증가할 수 있다는 잘못’이라고 한 것이다. 지혜는 연기이다. 이 중에 눈과 귀 등을 기준으로 하여 법성이라 한 것이다.

어째서 위에서 이르기를 “눈과 귀 등을 말미암은 까닭에 뭇 괴로움에 유전한다.”라고 하고, 다음에 다시 이르기를 “법성인 까닭에 유전하는 바가 없다.”라고 하는가?
일체법이 보현의 몸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눈과 귀 등이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하여 모든 업과를 일으켜 뭇 괴로움에 유전하는 것이다. 이제 일체가 보현의 몸인 줄 알기 때문에 눈과 귀 등의 물건이 바로 곧 법성이니 유전하는 바가 없다. 만약 눈과 귀 등이 법성이 아니라면 연기가 증가할 수 있다는 잘못이다.
어떻게 보현보살의 몸인 줄 아는가?
『화엄경』에서 보현보살이 이르기를, “이 구경에 삼세에 평등한 청정법신을 얻고, 다시 청정한 위없는 색신을 얻는다.”191)라고 하니 곧 어찌 한 물건도 보현보살 아님이 있겠는가?

이 보현보살의 몸을 어떻게 보는가?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보현보살의 몸 모습이 허공과 같아서,

006_0779_a_01L義有所㝵若立在濕過海中答者
006_0779_a_02L義無所㝵也質應大德在大白山
006_0779_a_03L智悟師藪結夏之次得大經中法
006_0779_a_04L性無所轉文及孔目中性種性本
006_0779_a_05L有習種性修生者非佛法所樂乃
006_0779_a_06L至云法性外有修生起者綠起可
006_0779_a_07L增失等文呈於林德云此是濕過
006_0779_a_08L海之訂耶林德曰是也解云綠起
006_0779_a_09L可增失者若謂所訂之理從古而
006_0779_a_10L有能訂之智今適始起者則以智
006_0779_a_11L訂理之際望其未訂之時有增勝
006_0779_a_12L故云綠起可增之失也智是綠
006_0779_a_13L起也此中約眼耳等爲法性也
006_0779_a_14L何故上云由眼耳等故衆苦轉也
006_0779_a_15L而次復云是法性故無所轉耶
006_0779_a_16L不知一切法是普賢身故此眼耳
006_0779_a_17L對善惡境起諸業果轉衆苦也
006_0779_a_18L今知一切是普賢身故眼耳等物
006_0779_a_19L正即法性無所轉也若眼耳等非
006_0779_a_20L法性者綠起可增失也何知是
006_0779_a_21L普賢身耶經中普賢云得此究
006_0779_a_22L竟三世平等淸淨法身復得淸淨
006_0779_a_23L無上色身則何有一物非普賢耶
006_0779_a_24L此普賢身如何見耶經云

006_0779_b_01L진실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국토가 아니다.”192)라고 하니 이와 같이 본다.
또 무엇이 나의 몸인가? 허공이 그것이다. 무엇이 허공인가? 나의 몸이 그것이니 곁이 없기 때문이다. 또 육도가 곧 허공이고 허공이 곧 육도이다.
송하여 이른다.

허공법계로 몸과 마음을 삼으니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누움에 생각이 계속 이어져
보이는 모든 물건 또한 몸과 마음이니
생각생각 계속 이어져 끊어짐이 없다

『공삼인空三印』193)의 글에서 이른다. 마음의 성품이란 세 가지 세간으로 습기를 지나는 바다의 마음을 삼는 것이다. 바다에 의거하여 파도를 일으키나 두 파도와 바다가 다 삼세간이기 때문에 습기를 지나는 바다의 마음이다. 바다에 의거하여 파도를 일으키면 바다는 원인이고 파도는 결과이며, 파도에 의거하여 바다를 일으키면 파도가 원인이고 바다가 결과이니 동시에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연기 속제의 법이다.

(2) 다라니의 이용理用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부터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까지194)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무엇 때문에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다음에 이 구句를 밝히는가?
무릇 연기법은 낱낱에 다른 자성이 없어서 서로서로 남(他)으로써 자성을 삼아 비로소 능히 연緣을 따라 곁이 없이 일어나는 까닭에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다음에 ‘하나 가운데 일체’ 등의 뜻을 밝힌 것이다.

만약 연기법이 (연을) 따라 일어남에 곁이 없다면, 오직 연 이전에는 법이 없다는 뜻인가?
연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 법이 없으나, 성性에 나아가 논하면 연 이전에 법이 있다. 무엇인가? 연에 나아가 논할 때에는 오늘의 연 가운데 오척이 연기의 본법이고 곁이 없이 성립됨을 나타내는 까닭에 연 이전에 한 법도 없다. 성에 나아가 논할 때에는 성기법의 체가 본래 있다.

006_0779_b_01L賢身相如虛空依眞而住非國土
006_0779_b_02L如是見也第上之一第二四張 又何
006_0779_b_03L者吾身虛空是也何者虛空吾身
006_0779_b_04L是也以無側故又六道即是虛空
006_0779_b_05L虛空即是六道也頌曰虛空法界
006_0779_b_06L爲身心行住坐臥念相續所見諸
006_0779_b_07L物亦身心念念相續無絶已 1) [41] [43]
006_0779_b_08L三印文云心性者 2) [42] [44] 種世間爲
006_0779_b_09L濕過海 [45] 3) [43] 依海起波二波波 [46]
006_0779_b_10L三世間故是濕過海心依海起
006_0779_b_11L4) [44] 則海因波果依波 [47] 起海
006_0779_b_12L5)▣▣▣ [45] 同時互爲6) [46] [48] 果也
006_0779_b_13L是大綠起▣俗諦7)▣▣ [47] [49]

006_0779_b_14L
一中一切8) [48] 多即9) [49] [50] 法記10) [50] [51]
006_0779_b_15L何故不守自性隨綠成之次明此句耶
006_0779_b_16L凡綠起法11)一一 [51] 無別自性互相
006_0779_b_17L他而爲自性方能隨綠無側而起故
006_0779_b_18L不守自性之次明一中一切等義也
006_0779_b_19L若綠起法隨起無側者唯是綠
006_0779_b_20L無法之義耶就綠論之緣前無法
006_0779_b_21L就性論之綠前有法何者就綠論
006_0779_b_22L現於今日綠中之五尺是緣起本
006_0779_b_23L無側而立故綠以前無一法也
006_0779_b_24L性論時本有性起法體也

006_0779_c_01L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하나 가운데 일체’ 등의 두 구절은, 연기의 체가 연을 따라 이루는 뜻을 거듭 드러내어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 1구는 인과도리문因果道理門이다. 말하자면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열을 얻고, 열을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얻는다. 원인을 얻으면 곧 결과를 얻고, 결과를 얻으면 곧 원인을 얻는다. 열 연緣은 원인이고 이루어지는 하나는 결과이다. 이 원인과 결과는 곧 일시에 두 자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도리문이라고 한다. 다음 1구는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곧 저것이고 저것이 곧 이것이니, 걸림이 없는 까닭에 덕용자재문 및 자리가 움직이는 문(位動門)이라고 한다.

앞의 것은 중문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힘이 없는 문(有力無力門)이고, 이것은 즉문이기 때문에 체가 있고 체가 없는 문(有體無體門)인데 어째서 용用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곧 인연의 당체로서 원인에 즉하고 결과에 즉하는 뜻을 이름하여 용이라고 한 것뿐이고 역용力用의 용은 아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란 열의 연이 원인이고 이루어지는 하나가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루는 주체와 이루어지는 대상을 합하여 열하나가 되는가?
하나의 연 가운데서 다른 것(他)을 바라보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이루는 주체로서의 원인이 되고, 상대를 끊은 뜻으로는 이루어지는 대상으로서의 결과가 된다. 그러나 이 두 뜻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열하나가 아니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하나 가운데 일체’ 이하는 대연기 중의 인과도리와 덕용자재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므로 이 두 구절이 있다.

006_0779_c_01L
眞記云一中一切等二句重現綠起
006_0779_c_02L體之隨緣成義令明了也初一句
006_0779_c_03L因果道理門謂得一而定得十得十
006_0779_c_04L定得一得因而即得果得果即得因
006_0779_c_05L十綠是因所成之一是果此因果
006_0779_c_06L即一時中二位不動故云因果道
006_0779_c_07L理門次一句德用自在門謂此即
006_0779_c_08L彼即此無㝵無側故云德用自
006_0779_c_09L在門及位動門也前是中門故
006_0779_c_10L有力無力門此是即門故有體無體
006_0779_c_11L何云用耶第上之一第二五張
006_0779_c_12L此則因綠當體即因即果之義名爲
006_0779_c_13L用耳非力用之用一中一切者
006_0779_c_14L十綠是因所成之一是果然則合能
006_0779_c_15L所成爲十一耶於一綠中約望他
006_0779_c_16L之義爲能成因絶待之義爲所成果
006_0779_c_17L然此二義無二故非十一也

006_0779_c_18L
大記云一中一切下欲現大緣起中
006_0779_c_19L因果道理及德用自在之義故有此
006_0779_c_20L▣字形未詳{底}ㆍ作「空」{乙}▣字體未詳{底}ㆍ
006_0779_c_21L作「三」{乙}
▣字體磨滅{底}ㆍ作「心」{乙}
006_0779_c_22L字體磨滅{底}ㆍ作「波」{乙}
▣▣▣字體磨滅{底}ㆍ
006_0779_c_23L作「波因海」{乙}
▣字體磨滅{底}ㆍ作「因」{乙}
006_0779_c_24L
▣▣字體磨滅{底}ㆍ作「大法」{乙}▣字體磨滅
006_0779_c_25L{底}ㆍ作「至」{乙}
▣字體磨滅{底}ㆍ作「一」{乙}
006_0779_c_26L字體磨滅{底}ㆍ作「云」{乙}
「一一」作「二」{乙}

006_0780_a_01L숭업 스님이 이르기를, “삼승에도 또한 이 뜻이 있다. 말하자면 만약 초교初敎195)라면 아뢰야식 가운데 삼성三性196)의 종자가 본식本識과 체가 동일하니 무기無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풀이하면 본식의 체 가운데 훈습하여 이루는 뜻은 체의 문이고 또 덕용자재의 뜻이다. 삼성의 종자가 능히 훈습함을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역力의 문이니 인과도리의 뜻이다. 만약 숙교에서라면 여래장의 체는 덕용자재의 뜻이고, 혹 생겨나고 혹 없어지는 것은 용用이기 때문에 인과도리의 뜻이다. 만약 일승에서라면 법을 따라 원인을 변별하기 때문에 열 보법(十普法) 가운데 하나의 법을 듦에 따라서 체를 갖추고 용을 갖추니 체는 곧 덕용자재이고 용은 곧 인과도리이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서풍의 파도(西風波)는 동풍의 파도(東風波)가 아니고 동풍의 파도는 서풍의 파도가 아니나, 다만 두 파도의 물이 체가 둘이 아닌 뜻을 기준으로 하여 즉문을 말할 수 있으니, 두 파도를 기준으로 해서는 즉문을 얻을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단지 이 현상과 저 현상의 이理의 체가 둘이 없음을 기준으로 해서 즉문을 말할 수 있으니, 어찌 두 현상을 없애지 않고 상즉문을 논할 수 있겠는가?
혹 두 바람이 불어도 물은 두 파도가 없다. 이미 두 파도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무엇에 즉하겠는가? 이미 이것으로써 저것에 즉하는 까닭에 두 파도를 없애지 아니하고 상즉을 논할 뿐임을 알 수 있다. 이理의 체에 근거하여 상즉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이 파도의 물이 저 파도의 물과 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파도가 비록 다함이 없으나 체로 말하면 곧 하나라는 것은 삼승의 뜻일 뿐이다. 만약 이 파도가 아니면 곧 저 파도가 없고 만약 저 파도가 아니면 곧 이 파도가 없는 것이 중문이고, 이 파도는 자성(의 파도가) 아니기 때문에 저 파도에 있고 저 파도는 자성 (의 파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파도에 있는 것이 즉문인 것은 일승이다.

006_0780_a_01L二句也崇業師云三乘亦有此義也
006_0780_a_02L謂若初敎賴耶識中三性種子與本
006_0780_a_03L識體同無記性故也解云本識體中
006_0780_a_04L薰成之義是體門又德用自在義也
006_0780_a_05L三性種子隨能薰別者是力門因果
006_0780_a_06L道理義也若熟敎中如來藏體是德
006_0780_a_07L用自在之義若生若滅者以是用故
006_0780_a_08L因果道理之義也若一乘中隨法辨
006_0780_a_09L因故十普法中隨擧一法具體具
006_0780_a_10L體則德用自在用則因果道理也

006_0780_a_11L
道身章云問西風波非東風波
006_0780_a_12L風波非西風波但約二波之水體
006_0780_a_13L不二義得言即門則約二波不得
006_0780_a_14L即門若爾但約此事彼事理體無
006_0780_a_15L得言即門何得二事不除論相
006_0780_a_16L即門耶若放二風水無二波
006_0780_a_17L無二波以何即何乎旣以此即彼
006_0780_a_18L可知不除二波論相即耳非約
006_0780_a_19L理體論相即矣此中此波之水與
006_0780_a_20L1) [52] 波之水▣體 [52] 是一故波雖無盡
006_0780_a_21L體言即一者三乘義耳若非2) [53]
006_0780_a_22L波即無彼波若非 [53] 彼波 3) [54] 無此
006_0780_a_23L波是中門此波非自性故
006_0780_a_24L於彼波彼波非自性故在於此

006_0780_b_01L
고기

‘고기’에 이른다. 입入과 즉卽에 제가諸家가 이름을 지은 것이 하나가 아니다. 말하자면 혹은 중문中門과 즉문卽門이라 하고, 혹은 상입相入과 상즉相卽이라 하고, 혹은 상재相在와 상시相是라 하고, 혹은 상자相資와 상섭相攝이라 하고, 혹은 서로 의지함은 힘과 힘 없음의 뜻이고, 서로 형체를 빼앗음은 체와 체 없음의 뜻이라 한다.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중문은 등빛이 서로 들어감(相入)과 같은 까닭에 다만 모든 등불의 작용이 서로 들어갈 뿐이다. 즉문은 파도와 물이 서로 거둠과 같은 까닭에 파도의 체와 물의 체가 둘이 없어서 서로 즉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3) 사법事法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부터 ‘또한 이와 같다’까지197)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란 초교에서는 극히 미세한 티끌(極微塵)을 말하고, 숙교에서는 공에 가까운 티끌(空鄰塵)을 말하고, 일승에서는 총상인 티끌(摠相塵)을 말한다. 이 총상인 티끌이란 작음을 필요로 하면 곧 작고 큼을 필요로 하면 곧 크기 때문에 하나의 티끌 중에 단박에 시방을 나타낸다.

아래 가르침(下敎)198)의 분한이 있는(方分) 티끌은 일승의 티끌과 어떻게 다른가?
일승의 티끌은 분한을 필요로 하면 곧 분한이 있고, 분한 없음을 필요로 하면 곧 분한이 없으니, 필요함을 따르는 것이 자재하기 때문에 다르다.
분한이 없는 티끌은 다시 부서지지 않는가?
또한 부서짐을 필요로 하면 다한다. 무엇인가? 만약 그 망정으로 헤아려지는 바의 분한(方分)이 없는 것이면 곧 육상을 사용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을 머금고’란, 시방세계를 거두어서 하나의 티끌을 이루기 때문에 시방을 머금는다고 하는가, 시방세계를 모아 하나의 티끌을 이루고 나서 새록새록 다시 시방을 머금는가?
두 가지 뜻을 다 갖추고 있다.
하나의 티끌을 이룰 때 시방을 거두어 다해서 다시 남음이 없는데 어떻게 새록새록 머금음을 얻는가?

006_0780_b_01L是即門者一乘也第上之一第
006_0780_b_02L二六張

006_0780_b_03L
古記云入即之中諸家立名非一
006_0780_b_04L謂或4) [55] [54] 中門即門或云相入相即
006_0780_b_05L或云相在相是或云相資相攝
006_0780_b_06L云互相依持力無力義互相形奪
006_0780_b_07L體無體義又古人云中門如燈光
006_0780_b_08L相入故但諸燈用相入耳即門
006_0780_b_09L波水相收故波體水體無一相即
006_0780_b_10L

006_0780_b_11L
[55] 微塵中至亦如是法記云 [56] 塵者
006_0780_b_12L初敎云極微塵熟敎云空隣塵
006_0780_b_13L乘云摠相塵此摠相塵者須小即
006_0780_b_14L須大即大故5) [56] [57] 塵中頓現十方
006_0780_b_15L下敎有方分之塵者與一乘塵
006_0780_b_16L何別一乘塵須方分即有方分
006_0780_b_17L須無方分即無方分隨須自在故別
006_0780_b_18L無方分之塵非更碎耶
006_0780_b_19L須碎盡何者若其情謂所計之無方
006_0780_b_20L則要須用六相分析也

006_0780_b_21L
眞記云一微塵中含十方者攝十方
006_0780_b_22L界成一塵故云含十方耶攬十方界
006_0780_b_23L成一塵已新新更含十方耶二義
006_0780_b_24L俱得成一塵時攝十方盡更無

006_0780_c_01L
이는 구하는 곳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티끌을 이룰 때에 시방을 구하면 다하고 새록새록 머금음을 구할 때에도 또한 뒤에 뒤에 일어남을 장애하지 않는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란,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겁 중에 익혀야 할 바를 부지런히 닦은 까닭에 비로소 시방세계를 머금어 받아들일 수 있어서 걸림 없이 자재하다. 이것은 현상의 법에서 가장 미세함의 첫 자리이다. 진정 대덕이 이르기를, “현상을 융섭하여 이법을 나타내는 문(事融現理門)199)이란 티끌이 시방을 머금는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이고, 하나의 티끌이 녹아 없어져 이법(理)과 같아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셨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를 머금고’란 한가지로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상원 스님이 여쭈었다.
() 미세한 티끌의 머무름 없음은 작고 시방세계의 머무름 없음은 큽니까?
똑같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티끌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말합니까?
미세한 티끌이 시방세계와 더불어 각각 자성이 없어서 오직 머무름이 없을 뿐이다. 말한 바 티끌이 작고 세계가 크다는 것은 구하는 곳에서 구한 것일 뿐이다. 작기 때문에 작다고 말하고 크기 때문에 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티끌이 작고 세계가 크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근기에게 티끌이 작고 세계가 크다는 것을 알게 하는 까닭에, 우선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고 설하는 것일 뿐이고, 한결같이 티끌은 작은 자성이고 세계는 큰 자성인 것이 아니다. 또한 티끌이 크고 세계가 작다고도 말할 수 있다. 도리는 가지런히 하나이니 머무름 없는 실상實相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더 부수면 더 작아지는 티끌이 있고,

006_0780_c_01L有餘何得新新含耶是須處須故
006_0780_c_02L成一塵時須十方盡須新新含時
006_0780_c_03L不㝵後後起也

006_0780_c_04L
大記云一微塵者佛刹塵數劫中
006_0780_c_05L勤修所鍊故方能含受十方世界
006_0780_c_06L㝵自在此是事法最細之初位
006_0780_c_07L定德云事融現理門者約塵含十方
006_0780_c_08L之道理云耳非謂一塵泯融同理也

006_0780_c_09L
道身章云相和尙曰一微塵中
006_0780_c_10L十方世界者同是無住故爾元師
006_0780_c_11L問云微塵無住小十方世界無住
006_0780_c_12L大耶一量也第上之一第二七張
006_0780_c_13L若爾何言塵小十方世界大耶
006_0780_c_14L微塵與十方世界各無自性
006_0780_c_15L無住耳所言塵小世界大者是須
006_0780_c_16L處須耳非是小故云小大故云大
006_0780_c_17L所謂不知塵小世界大機中令知塵
006_0780_c_18L小世界大故且說塵小世界大耳
006_0780_c_19L非是一向塵小自性世界大自性
006_0780_c_20L亦得云塵大世界小道理
006_0780_c_21L齊一無住實相也

006_0780_c_22L
古記云有彌碎彌小之塵有彌
006_0780_c_23L▣字體磨滅{底}ㆍ作「彼」{乙}▣字體磨滅{底}ㆍ
006_0780_c_24L作「此」{乙}
▣字體磨滅{底}ㆍ作「即」{乙}
006_0780_c_25L字體磨滅{底}ㆍ作「云」{乙}
「一」殘存点劃{底}ㆍ
006_0780_c_26L無有{乙}

006_0781_a_01L더 부수면 더 커지는 티끌이 있으며, 더 부수어도 본래와 같은 티끌이 있다. 『아비달마구사론』의 송頌에 이르기를, “극히 미세함(極微)ㆍ미세함(微)ㆍ금金ㆍ물(水), 토끼(兔)ㆍ양羊ㆍ소(牛)ㆍ극진隙塵, 서캐(蟣)ㆍ이(蝨)ㆍ보리(麥)ㆍ손가락마디(指節)이니, 뒤로 계속해서 일곱 배씩 늘어난다. 이상.200)라고 하였다.

극진隙塵은 창틈의 햇빛에서 떠다니는 티끌이니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른 것은 천인天人의 눈(天眼)으로 보는 것이다. 이 위의 두 티끌은 창틈의 티끌이다. 이 천인의 눈으로 보는 것을 쪼개어 7분의 1의 부분에 이른 것은 철 티끌(鐵塵)이니 첫 과위(初果)201)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구리 티끌(銅塵)이니 두 번째 과위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은 티끌(銀塵)이니 세 번째 과위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금 티끌이니 네 번째 과위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물 티끌이니 대독각大獨覺이 보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미세한 티끌이니 34념三十四念202)에 번뇌를 끊고 보리를 얻은 부처님이 보시는 것이다. 풀이하면 이상은 아울러 변계소집분遍計所執分203)에 거두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극히 미세한 티끌이니 초교의 보살이 보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사진似塵이니 자수용自受用의 부처님이 보시는 것이다. 풀이하면 이상은 의타기분(依他分)204)에 거두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법진法塵이니 종교終敎의 부처님이 보시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공진空塵이니 돈교頓敎의 부처님이 보시는 것이다. 풀이하면 종교 이후는 원성실성분(圓成分)205)에 거두어지는 것이다. 이 가운데 색色과 마음(心) 두 법이 모두 진여가 이루는 것이다.

이 종교의 법진法塵은 의식이 반연攀緣하는 대상이다. 초교에서도 의식이 반연하는 대상을 시설하지만 그러나 종교에서는 하나의 의식을 세우는 까닭에

006_0781_a_01L碎彌大之塵有彌碎如本之塵也
006_0781_a_02L俱舍頌曰極微微金水1)免羊牛
006_0781_a_03L隙塵蟣虱2) [57] [58] 指節後後增七
006_0781_a_04L已上 隙塵者遊於窓隙日光
006_0781_a_05L之塵人眼所見也3) [58] 此至七分
006_0781_a_06L之一分者天眼所見也此上二
006_0781_a_07L塵窓隙塵也析此天眼所見至七
006_0781_a_08L分之一分者4) [59] [59] 初果所見
006_0781_a_09L此至七之一銅塵5)弟二果所見
006_0781_a_10L析此至七之一銀塵 *弟三果所
006_0781_a_11L析此至七之一金塵 *弟四果
006_0781_a_12L所見析此至七之一水塵大獨
006_0781_a_13L覺所見析此至七之一微塵
006_0781_a_14L十四念斷結得菩提之佛所見
006_0781_a_15L此上並是遍計分所攝析此至
006_0781_a_16L七之一極微塵初敎菩薩所見
006_0781_a_17L此至七之一似塵自受用佛所見
006_0781_a_18L解云此上依他分所攝析此至七
006_0781_a_19L之一法塵終敎佛所見析此至
006_0781_a_20L七之一空塵頓敎佛所見解云
006_0781_a_21L終敎以後圓成分所攝此中色心
006_0781_a_22L二法皆是眞如所成也此終敎
006_0781_a_23L法塵者意識所緣也初敎6) [60]
006_0781_a_24L意識所緣然終敎中立一意識

006_0781_b_01L제일의第一義인 한마음(一心)의 눈이 보는 것에 근거하여 법진을 삼는 것이다. 이것을 쪼개어 7분의 1에 이르면 총상진摠相塵이니 보현보살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 보현보살의 눈으로 보는 바 티끌은 삼승의 오안五眼으로는 끝내 볼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이 경 가운데 함께 하지 않는 별교의 뜻을 보이고자 미세한 티끌과 허공을 기준으로 하여 첫 지위를 삼은 것이다.

이 일승의 티끌이 삼승의 이법(理)과 어떻게 다른가?
삼승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이법이다. 보현보살의 눈으로 보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가장 미세한 현상의 법이다. 이상 말한 것은 처음에 비록 『아비달마구사론』을 인용하였지만 실제는 저 논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신림 대덕이 융수206) 스님에게 준 뜻이니, 마음을 관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또 『(고)기』에 이른다. 일곱 가지 미세한 (티끌)이란 창에서 떠다니는 티끌, 양털의 티끌, 토끼털의 티끌, 소털의 티끌, 금 티끌, 물 티끌, 극히 미세한 티끌이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창에서 떠다니는 티끌이란 창틈의 햇빛에서 떠다닌다. 양털의 티끌이란 창에서 떠다니는 티끌을 쪼개어 일곱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오직 양털 끝에만 머무른다. 토끼털의 티끌이란 양털의 티끌을 쪼개어 일곱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양털에는 머무르지 못하고 오직 토끼털 끝에만 머무른다. 소털의 티끌이란 토끼털의 티끌을 쪼개어 일곱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오직 소의 배 아랫털 끝에만 머무른다. 이것을 쪼개어 일곱으로 만든 것은 금을 뚫고 금에서 나가는 데 걸림이 없다. 이것을 쪼개어 일곱으로 만든 것은 물을 투과해도 물이 적시지 못한다. 이것을 쪼개어 일곱으로 만든 것은 극히 미세한 (티끌)이다. 이 낱낱 티끌이 모두 더욱 작은 티끌을 만들어 내기(生子) 때문에 일곱 어미티끌이라고 이름한다.

이 극히 미세한 티끌을 초교에서는 세 무수한 겁 동안 그것을 나누고 쪼갠다.

006_0781_b_01L約*弟一義一心眼所見爲法
006_0781_b_02L塵也析此至七之一摠相塵
006_0781_b_03L賢眼所見此普眼所見之塵
006_0781_b_04L三乘五眼第上之一第二八張 終不
006_0781_b_05L能得見也故此經中欲示不共
006_0781_b_06L別敎之義約微塵虛空爲初位也
006_0781_b_07L此一乘之塵與三乘理何別
006_0781_b_08L約三乘云則是理也約普眼所見
006_0781_b_09L則是最細事法也此上所說初雖
006_0781_b_10L引俱舍實非彼論義此是林德授
006_0781_b_11L融秀之義約觀心體 [60] [61] 敎而說也
006_0781_b_12L又記云七微者窓遊塵羊毛塵
006_0781_b_13L*免毛塵牛毛塵金塵水塵
006_0781_b_14L微塵也解云窓遊塵者遊於窓隙
006_0781_b_15L [62] 光也羊毛塵者析窓遊塵
006_0781_b_16L七分故唯止羊毛末也 *免毛塵
006_0781_b_17L析羊毛塵爲七故不止羊毛
006_0781_b_18L唯止*免毛末也牛毛塵者析*免
006_0781_b_19L毛塵爲七故唯止牛腹下毛末也
006_0781_b_20L析此爲七者透金而出金不㝵也
006_0781_b_21L析此爲七者透過於水水不能潤
006_0781_b_22L析此爲七者是極微也此一一
006_0781_b_23L皆生子故名七母塵也此極微
006_0781_b_24L於初敎中三無數劫分而析之

006_0781_c_01L이 초교의 티끌을 기준으로 종교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그것을 나누고 쪼갠다. 일승에 이르러서는 두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겁 동안 그것을 나누고 쪼개어 가장 미세한 지경에 이르러야 비로소 일승의 극히 미세한 티끌이 된다.

(4) 시간(世時)

‘한량없는 먼 겁이’부터 ‘나뉘어 따로 이룬다’까지207)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순간(一念)이고’는 하나의 터럭을 세로로 쪼개어 열로 나누고, 내지 백으로 나누고 천으로 나누어, 그 하나를 옥판 위에 놓고 날카로운 칼을 들어 끊되 그 날카로운 칼이 판에 이르는 때를 기준으로 하여 ‘한 순간’이라 한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십세十世란 혹은 제십세第十世라고 하니 말하자면 총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혹은 십세十世라고 하니, 말하자면 총상과 별상을 합하여 들기 때문이다.
총상의 일세一世가 현재의 한 순간을 취한다면 별상의 세世는 오직 여덟인가?
현재의 한 순간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의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면 앞과 뒤가 상대하여 별상 중에 세워지는 까닭에 별상의 세世는 아홉이고 여덟이 아니다. 앞과 뒤를 바라보지 않고 총괄적으로 포함하여 상대를 끊으면 총상인 제십세가 된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 구세九世가 즉卽ㆍ입入하여 십세十世를 이루는가, 십세를 기준으로 하여 다시 즉ㆍ입을 논하는가?
두 가지 뜻을 다 얻는다. 그러므로 강장(법장) 스님이 이르기를, “그러나 이 구세가 번갈아 서로 즉ㆍ입하기 때문에 하나의 총체로서의 구句를 이루고, 총체와 개별을 합하여 십세를 이룬다. 이 십세가 다름을 구족하면서 동시에 나타나 연기를 이루므로 즉ㆍ입한다.”208)라고 하였다.

006_0781_c_01L約此初敎之塵於終敎中不可計
006_0781_c_02L分而析之至一乘中二佛世界
006_0781_c_03L塵數刧中分而析之至最細際
006_0781_c_04L爲一乘極微塵也

006_0781_c_05L
無量遠劫 隔別成法記云無量遠
006_0781_c_06L劫即一念者竪析一髮爲十分乃至
006_0781_c_07L百分千分以其一分置玉板上
006_0781_c_08L利刄斷約其利刄至板之時爲一
006_0781_c_09L念也

006_0781_c_10L
眞記云十世者一云*弟十世也
006_0781_c_11L摠相念故一云十世也謂摠別合擧
006_0781_c_12L摠相一世取現在一念者
006_0781_c_13L相之世第上之一第二九張 唯是八耶
006_0781_c_14L約現在一念望現在之過未則前
006_0781_c_15L後相對而立別相之中故別相之世
006_0781_c_16L是九非八不望前後統包絕待則爲
006_0781_c_17L摠相*弟十世也

006_0781_c_18L
大記云九世即入成十世耶爲約十
006_0781_c_19L世更論即入耶二義並得故康藏
006_0781_c_20L然此九世迭相即入故成一摠句
006_0781_c_21L總別合成十世也此十世具足別異
006_0781_c_22L同時現現成綠起故得相入 [63]
006_0781_c_23L「免」作「免」{乙}次同「菱」作「麥」{乙}「析」
006_0781_c_24L作「折」{乙}
「鑯」作「鐵」{乙}「弟」作「第」{乙}
006_0781_c_25L次同
「示」作「亦」{乙}

006_0782_a_01L풀이하면, 처음은 구세가 즉ㆍ입하여 십세를 이루는 것을 해석한 것이고, 뒤는 십세를 기준으로 하여 지금 서로 즉ㆍ입하는 것을 해석한 것이다.

지귀장원통초

『지귀장원통초旨歸章圓通鈔』209)에 이른다.210) 삼승에서는 법이 홀로임을 세우는 까닭에 시간이 법과 나뉘어 있으니 법이 이미 흘러간 까닭에 시간도 흘러간다. 일승에서는 법이 원만함을 세우는 까닭에 시간이 법과 나뉘어 있으나 법이 흘러가지 않으므로 시간도 흘러가지 않는다. 따라서 『영락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범마달왕에게 일러 설하셨다. 그대 앞에 누워 있는 개는 그대의 과거의 몸이고, 장차 나는 그대의 미래의 부처이다. 운운.211)라고 하였다.

또 신라국의 승려 지통智通212)은 곧 의상 화상의 열 명의 훌륭한 제자(十聖弟子)213) 중 하나이다. 태백산 미리암 동굴에 거처하여 화엄관을 닦았는데, 홀연히 하루는 큰 멧돼지가 동굴문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지통은 평상시대로 나무로 빚어진 존상尊像에 예배하기를 정성을 다하였다. 존상이 지통에게 말씀하시기를, “동굴을 지나간 멧돼지는 그대의 과거 몸이고 나는 곧 그대의 당래 과보의 부처이다.”라고 하였다. 지통은 이 말을 듣고서 바로 삼세가 한때(三世一際)라는 뜻을 깨달았다. 후에 의상 화상에게 나아가 이를 말씀드리니, 화상이 그 그릇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마침내 법계도인을 주셨다. 이상.

곧 범마달왕의 일과 비록 때(時)에 정법正法과 상법像法214)의 차이가 있고, 장소(處) 또한 중심과 주변의 다름이 있으나 그러나 그 인연은 또한 서로 유사하다. 운운. 삼승 중에는 과거는 오직 개의 지위이고, 현재는 오직 사람의 지위이며, 미래는 오직 부처님의 지위이다. 따라서 과거의 개로부터 현재의 사람에 이르고, 현재의 사람으로부터 미래의 부처님에 이른다. 그러므로 삼승에서는 법이 홀로임을 세우는 까닭에 시간이 법과 나뉘어 있어서 법이 항상함이 없으므로 시간도 항상함이 없다고 한 것이다.

006_0782_a_01L初釋九世即入成十世也後釋
006_0782_a_02L約十世今 [64] 相即入也

006_0782_a_03L
旨歸圓通鈔云三乘中立法孤單
006_0782_a_04L時隔於法法旣流轉故時流
006_0782_a_05L轉也一乘中立法圓滿故時隔於
006_0782_a_06L法不流轉故時不流轉也故纓
006_0782_a_07L絡經 [65] 佛告梵摩達王說汝前臥
006_0782_a_08L是汝過去身 1) [61] [66] 我是汝未來
006_0782_a_09L云云 又羅國僧智通乃相和尙
006_0782_a_10L十聖弟子之一也居大白山彌理
006_0782_a_11L嵓穴修花嚴觀忽一日見大猪過
006_0782_a_12L穴門及通依常2) [62] [67] 木刻尊像
006_0782_a_13L具誠懇像語通曰過穴之猪
006_0782_a_14L汝過去之身我即是汝當果之佛
006_0782_a_15L通聞此語即悟三世一際之旨 [68]
006_0782_a_16L後詣相和尙叙之和尙知其成器
006_0782_a_17L遂以法界圖印授之也已上則與
006_0782_a_18L梵摩達王事雖時有正像之異
006_0782_a_19L [69] 中邊之殊然其因綠亦相類也
006_0782_a_20L云云 [70] 三乘中過去唯狗位現在
006_0782_a_21L唯人位未來唯佛位故從過去狗
006_0782_a_22L [71] 現在人從現在人 [72] 未來佛
006_0782_a_23L故云三乘中立法孤單故以時隔
006_0782_a_24L第上之一第三○張 法是 [73] 無常

006_0782_b_01L일승에서는 과거의 개에 사람과 부처님을 갖추고, 현재의 사람에 개와 부처님을 갖추고, 미래의 부처님에 개와 사람을 갖춘다. 따라서 과거의 개로부터 현재의 사람으로 옮겨 이르지 않으며, 현재의 사람으로부터 미래의 부처님으로 바뀌어 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승에서는 법이 사귀어 사무침을 세우는 까닭에 시간이 법과 나뉘어 있으나, 법이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시간도 또한 항상 머무른다고 하는 것이다.

법이 비록 하나이나 서로 바라보아 구세를 이루는가, 구세가 다른 것같이 법 또한 다른가?
뒤의 뜻과 같다. 말하자면 우선 내 몸을 기준으로 하면, 일년 중에 달(月)을 기준으로 하면 곧 일년이 열두 달인 까닭에 나의 몸 또한 열둘이다. 한 달이 30일인 까닭에 몸 또한 서른이다. 하루가 열두 시時이기 때문에 몸 또한 열둘이다. 한 시가 여덟 각刻이기 때문에 몸 또한 여덟이다. 이와 같이 일년은 360일이며 하루는 100각刻이기 때문에 몸 또한 3만 6천이다. 그러므로 구세가 다른 것같이 법 또한 다르다.

다섯 지위를 기준으로 구세를 논하면 그제는 과거의 과거인 까닭에 오직 하나이다. 어제는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의 현재이고, 오늘을 바라보면 현재의 과거인 까닭에 둘을 갖춘다. 오늘은 어제를 바라보면 과거의 미래이고,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의 현재이고, 내일을 바라보면 미래의 과거인 까닭에 셋을 갖춘다. 내일은 오늘을 바라보면 현재의 미래이고,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미래의 현재인 까닭에 둘을 갖춘다. 모레는 미래의 미래인 까닭에 오직 하나이다. 그러므로 오직 다섯 지위이나 서로 바라보아 논하는 까닭에 구세를 이룬다. 즉 법은 오직 하나이나 서로 바라보아 논하는 까닭에 또한 구세의 법을 이룬다.

006_0782_b_01L時亦無常一乘中過去狗中具人
006_0782_b_02L現在人中具狗佛未來佛中具
006_0782_b_03L狗人故不從過去狗迁到現在人
006_0782_b_04L不從現在人轉至未來佛也故云
006_0782_b_05L一乘中立法交徹故以時隔法
006_0782_b_06L法是 [74] 常住故時亦常住也法雖 [75]
006_0782_b_07L是一互望而成九世耶如九世別
006_0782_b_08L法亦別耶如後義謂且約吾身
006_0782_b_09L於一年中 [76] 約月則一年十二月故
006_0782_b_10L吾身亦十二也一月三十日故
006_0782_b_11L亦三十也一日十二時故身亦十
006_0782_b_12L二也一時八刻故身亦八也 [77]
006_0782_b_13L是一年三百六十日一日百刻故
006_0782_b_14L身亦三萬六千也故如九世別
006_0782_b_15L亦別也約五位論九世 [78] [79] 昨昨
006_0782_b_16L是過去過去故唯一也昨日者
006_0782_b_17L約當體則過去現在望今日則現
006_0782_b_18L在過去故具二也今日者望昨
006_0782_b_19L日則過去未來約當體則現在現
006_0782_b_20L望明日則未來過去故具三也
006_0782_b_21L明日者望今日則現在未來約當
006_0782_b_22L體則未來現在故具二也明明日
006_0782_b_23L是未來未來故唯一也是故唯是
006_0782_b_24L五位互望論故成九世則法唯是

006_0782_c_01L무엇 때문에 구세가 다른 것같이 법 또한 다르다고 하는 것인가?
강장 스님이 이르기를, “시간이 법과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215)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러함을 아는 것이다. 삼승에는 색色과 마음 등이 법이다. 이 법에서 앞뒤로 바뀌어 흐르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시간이 됨을 세우기 때문에 시간은 곧 거짓(假)이다. 그러므로 이 뜻을 논하지 않는다. 일승에서는 시간이 법과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시간 또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다른 것같이 법 또한 다르다.

『도신장』에 이르기를, “어느 날 밤중 꿈에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이 각각 셋이어서 아홉이 있었으나, 깨어났을 때 이를 보니 다만 한 순간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이 마음 가운데 한쪽을 나누어 아버지로 하고, 한쪽을 나누어 나로 하고, 한쪽을 나누어 아들로 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한마음(一心)에 있다. 의거함을 따라서 곧 아홉 사람을 거두니 서로 아는 바가 없으나 아홉 사람의 다름이 끊어져 없는 것은 아니다. 또 한 순간 외에 셋을 세워 있음으로 하고 여섯을 세워 없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이 같은 자리로서 한 순간이며 있음과 없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상.”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그 무아無我의 보심報心216)이면 전체가 아버지이고 전체가 나이며 전체가 아들이다. 그러므로 구세가 다른 것같이 법 또한 다르다.

현재의 한 순간이 나머지 팔세八世를 가려내는 별別의 뜻이 구세 가운데 치우쳐 해당함이 없는 총摠의 뜻과 어떻게 다른가?
지엄 존자가 비유로 의상 화상에게 보여 말씀하였다.
“어떤 사람이 꿈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위에 올라가 지붕을 덮고, 아들과 손자는 아래에서 기와를 나르며, 자기는 중간에 있으면서 차례로 전해 주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할아버지는 과거의 과거이기 때문에 오직 한 지위이고,

006_0782_c_01L互望論故亦成九世法也
006_0782_c_02L故云如九世別法亦別耶康藏
006_0782_c_03L [80] 以時與法不相離故 [81] 故知尒也
006_0782_c_04L三乘中色心等是法約此法上前
006_0782_c_05L後迁流之義立爲時故時即假也
006_0782_c_06L是故不論此義 [82] 一乘中以時與法
006_0782_c_07L [83] 相離故時亦是實也 [84] 是故如時
006_0782_c_08L之別法亦別也第上之一第三一張
006_0782_c_09L道身章 [85] 如一夜中夢 [86] 過父及
006_0782_c_10L未生子各三有九覺時見之
006_0782_c_11L在一念心中非此心中片分爲父
006_0782_c_12L片分爲我片分爲子 [87] 在一心
006_0782_c_13L隨擧即攝九人無所相知而非絶
006_0782_c_14L無九人之別又非一念之外立三
006_0782_c_15L爲有立六爲無有無同處一念
006_0782_c_16L而非有無之別已上 是故但其 [88]
006_0782_c_17L我報心全爲父全爲我全爲子
006_0782_c_18L如九世別法亦別也 [89] 現在一念
006_0782_c_19L餘八世之別義與於九世中無
006_0782_c_20L偏當之惣義何別 [90] 儼尊者
006_0782_c_21L喩示相和尙云如人夢見父及祖
006_0782_c_22L登上蓋屋子與孫子在下輸瓦
006_0782_c_23L自處中間傳次而授也祖父是過
006_0782_c_24L「捋」作「將」{乙}▣字形未詳{底}ㆍ作「禮」{乙}

006_0783_a_01L아버지는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과거이기 때문에 두 지위를 갖추며, 중간의 자신은 곧 과거의 미래와 현재의 현재와 미래의 과거이기 때문에 세 지위를 갖추며, 아들은 현재의 미래와 미래의 현재이기 때문에 두 지위를 갖추며, 손자는 미래(의 미래)이기 때문에 오직 한 지위이다. 그 중간에서 기와를 전하는 사람은 당체를 기준으로 하면 나머지 팔세를 가려내기 때문에 현재의 현재이다. 꿈의 다섯 사람을 통틀으면 구세 가운데 치우쳐 해당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 두 가지 뜻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총摠과 별別로 시간이 법과 나뉘어 있는 것이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지엄 스님이 돌아가시기 열흘 전에 제자들이 물을 바를 말씀올리니, (지엄) 스님이 대중에게 물어 이르기를, “경 가운데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를 머금는다’와 ‘한량없는 겁이 곧 한 순간이다’라는 등의 말씀을 그대들은 어떻게 보는가?”라고 하셨다. 대중이 말씀드리기를, “연기법은 자성이 없어서 작은 것은 작은 것에 머무르지 않고 큰 것은 큰 것에 머무르지 않으며, 짧은 것은 짧은 것에 머무르지 않고 긴 것은 긴 것에 머무르지 않는 까닭에 그러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이르기를, “그렇긴 그렇지만 아직 설었다.”라고 하셨다. (대중이) 말씀드리기를,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하니, 스님이 이르기를,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단지 하나를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5) 계위(位)

‘처음 발심할 때가’부터 ‘항상 함께이다’까지217)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무슨 까닭에 구세와 십세의 상즉 다음에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라는 뜻을 설하는가?
증분의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혹 어떤 수행인이 이에 능력이 없으므로 이 사람을 위하여 증분의 법성을 거듭 보여 말하기를, “하나가 자성이 없으니 일체로써 자성을 삼고,

006_0783_a_01L去過去故唯一位父是過去現在
006_0783_a_02L現在過去故具二位中間身則是
006_0783_a_03L過去未來現在現在未來過去
006_0783_a_04L具三位子是現在未來未來現
006_0783_a_05L在故具二位孫子是未來 [91]
006_0783_a_06L一位也其在中間傳瓦之人約當
006_0783_a_07L體則簡餘八 [92] 世故現在現在也
006_0783_a_08L通夢五人 [93] 則於九世中無偏當也
006_0783_a_09L故此人上具有二義是故以總別
006_0783_a_10L時隔法 [94]

006_0783_a_11L
道身章云儼師迁神十个日前
006_0783_a_12L徒進所問訊師問大衆曰經中
006_0783_a_13L微塵中含十方世界與無量劫即
006_0783_a_14L一念等言汝等作何物看衆人白
006_0783_a_15L綠起法無自性小不住小
006_0783_a_16L不住大短不住短長不住長故尒
006_0783_a_17L師曰然之然矣而猶生白云
006_0783_a_18L師曰莫須多噵只言一故
006_0783_a_19L上之一第三二張

006_0783_a_20L
初發心時常共和法記云何故
006_0783_a_21L九世十世相即之次說初發心時便
006_0783_a_22L成正覺之義耶訂分之法不可得
006_0783_a_23L或有行人於此無分故爲此人
006_0783_a_24L以訂分之法性轉示之云一無自性

006_0783_b_01L하나의 티끌이 자성이 없으니 시방세계로써 자성을 삼고, 한량없는 겁이 자성이 없으니 한 찰나로써 자성을 삼고, 한 찰나가 자성이 없으니 한량없는 겁으로써 자성을 삼는다.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매우 깊은 진성’이라 한다.”라고 한다.

수행인이 생각하여 이르기를, “이미 진성을 알았으니 어떻게 증득합니까?”라고 하므로 다시 가르쳐서 이르기를, “요컨대 마땅히 이 진성으로 마음을 삼아서 일으켜야 한다.”라고 한다. 이에 수행인이 이와 같이 일으키기 때문에 마음을 일으킨 것이 곧 불과를 원만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에 머무는 때에 항상 생사에 떠돌고, 생사에 떠도는 때에 항상 열반에 머문다. 그래서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라고 하였다.

화엄일승교분기

「소전장所詮章」218)의 ‘불종성佛種性’ 구절에 이른다.219) 세 번째,220)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앞의 모든 교敎가 밝힌바 종성을 거두어 함께 다 구족하니, 주主와 반伴이 종宗을 이룬다. 동교인 까닭이며 방편을 거두는 까닭이다. 둘째는 별교에 의거하니 종성은 매우 깊어 원인과 결과가 둘이 아니며 의보依報와 정보正報221)에 통한다. 삼세간을 다하여 일체 이법(理)과 현상(事), 해解와 행行의 모든 법문을 다 거두어들이며 본래 원만히 구족해서 이미 성숙해 마쳤다. 그러므로 『대경』에서 설하기를, “보살의 종성은 매우 깊고 광대해서 법계허공과 더불어 같다.”222)라고 하니 이것을 이르는 것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처음 발심할 때가 문득 정각이다’란 (다음과 같다.)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이르면, 삼현三賢과 십지十地223) 가운데 십해十解224)의 초발심주初發心住225)에서 부처를 원만히 이루고 다시 치지주治地住226) 등에서 부처를 원만히 이루니, 이것은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는 없으나 (지위에) 의거해서 나타낸 것이다. 만약 별교에서라면 곧 나의 몸과 마음을 바른 깨달음이라고 이름할 뿐이니 십해의 지위에 의거함이 없다.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란 (다음과 같다.) 만약 지위에 의거하여 말하면 적멸한 열반의 체體가 연緣을 좇아 생사를 이루니,

006_0783_b_01L以一切爲性一塵無自性以十方爲
006_0783_b_02L無量劫無自性以一念爲性
006_0783_b_03L念無自性以無量劫爲性如是名爲
006_0783_b_04L甚深眞性也行人意謂已知眞性
006_0783_b_05L何得訂故復誨云要當以此眞性爲
006_0783_b_06L心而發於是行人如是而發故發心
006_0783_b_07L即滿果也是故住涅槃時常遊生死
006_0783_b_08L遊生死時常住涅槃故云生死涅槃
006_0783_b_09L常共和也

006_0783_b_10L
所詮章佛種性文云 1)第三約一乘
006_0783_b_11L有二說一攝前諸敎所明種性
006_0783_b_12L並皆具足主伴成宗以同敎故
006_0783_b_13L方便故二據別敎種性甚深因果
006_0783_b_14L無二通依及正盡三世間該收
006_0783_b_15L一切理事解行諸法門本來滿足
006_0783_b_16L已成熟訖故大經云菩薩種性
006_0783_b_17L甚深廣大與法界虛空等此之
006_0783_b_18L謂也

006_0783_b_19L
眞記云初發心時便正覺者約同敎
006_0783_b_20L三賢十地中十解初發心住成滿
006_0783_b_21L復治地住等成滿佛此無明昧之
006_0783_b_22L然寄現也若自別敎即吾身心
006_0783_b_23L名正覺耳無寄十解位也生死涅槃
006_0783_b_24L常共和者若寄位云寂滅涅槃之體

006_0783_c_01L생사를 이루는 때가 곧 성품이 청정한 열반의 체이기 때문이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곧 생사와 열반이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연에 있다. 무엇인가? 생사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열반을 갖추고, 열반의 연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곧 생사를 갖추기 때문이다.
무엇이 생사이고, 무엇이 열반인가?
생사가 곧 그대의 몸이고, 열반이 곧 그대의 몸이다.

화엄경탐현기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227)에서 『화엄경』 중의 “처음 발심한 보살이 곧 부처님이다”라는 글을 풀이하여 이른다.228) 혹은 원인 중에 결과를 설한 것이라고 하고, 혹은 해解(의 계위)가 부처님의 경계와 같은 것이라고 하고, 혹은 이치를 기준으로 하면 평등한 것이라고 한다. 만약 삼승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한다면 위와 같이 설할 수 있다. 지금 위아래의 글을 살펴보니, 일승원교를 기준으로 하면 처음과 끝이 서로 거두어서 원융무애하니, 처음을 얻음에 곧 끝을 얻고 끝을 끝까지 다함에 비로소 원래의 처음인 것이다. 첫째는 다라니문에서 연기가 서로 거두기 때문이다. 둘째는 보현보살의 보리심이 6위六位229)를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곧 원인이 결과이다. 셋째는 법성이 처음과 끝이 없기 때문에 발심하여 처음에 들어감에 곧바로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위 문장에서 이르기를, “처음 발심한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지혜의 몸을 구족하여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230)라고 한 것이다.

묘리원성관

『묘리원성관妙理圓成觀』231)에 이른다. 이제 이 뜻을 변별함에 간략히 네 가지 구별로 나눈다. 첫째는 오직 원인인 문이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제가 다하도록 항상 보살로서 만행萬行을 닦기 때문이다. 혹은 순일하고 혹은 잡다하여 쉼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하나의 행에 끝이 없기 때문이며 중생계가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기를,

006_0783_c_01L從緣成生死成生死時即性淨涅槃
006_0783_c_02L之體故也約一乘則生死涅槃
006_0783_c_03L本自有在吾須綠何者須生死綠
006_0783_c_04L第上之一第三三張即具涅槃
006_0783_c_05L涅槃綠中即具生死故也何者生
006_0783_c_06L何者涅槃生死即汝身涅槃
006_0783_c_07L即汝身

006_0783_c_08L
探玄釋經中初發心菩薩即是佛
006_0783_c_09L之文云或云因中說果或云解同
006_0783_c_10L佛境或云約理平等若約三乘敎
006_0783_c_11L亦得如上說今尋上下文約一
006_0783_c_12L乘圓敎始終相攝圓融無㝵得始
006_0783_c_13L即得終窮終方原始一由陁羅尼
006_0783_c_14L門綠起相攝故二由普賢菩提心
006_0783_c_15L遍該六位故即因是果也三由法
006_0783_c_16L性無始終故發心入始即正是
006_0783_c_17L終故是故上文云初發心時便成
006_0783_c_18L正覺具足惠身2) [63] [95] 他悟也

006_0783_c_19L
妙理圓成觀云今辨此義略分四
006_0783_c_20L一唯因門從無始時盡未來
006_0783_c_21L恒是菩薩修萬行故或純或
006_0783_c_22L無有休息何以故於一一行
006_0783_c_23L無究竟故衆生界不可盡故經云
006_0783_c_24L「弟」作「第」{乙}「田」作「由」{乙}

006_0784_a_01L“나는 항상 시방의 국토에서 보살행을 행한다.”232)라고 하니, 말하자면 허공이 다할 수 없고, 중생이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이룸이 없는 것이다. 마치 문수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 되며, 마야부인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모두 원인인 문에 머물러서 거두어 교화하는 것이다.

둘째는 오직 결과인 문이다. 과거와 미래를 다하도록 항상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덕의 모습(德相)이 온전히 참되어 시간으로 헤아림에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233) 셋째는 원인이면서 결과인 문이다. 말하자면 발심과 바른 깨달음을 이룸이 있으니, 모든 때에 찰나찰나 발심하고 찰나찰나 부처님을 이루기 때문이다. 넷째는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문이다. 말하자면 일으킬 마음도 없고 이룰 부처님도 없기 때문이며, 참된 법계 가운데 두 성품이 없는 까닭이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삼세간이 부처님의 몸과 마음이 된다’란 부처님의 몸이 크고 넓기 때문에 중생 등이 부처님의 몸과 마음에 있는 것인가, 중생의 업과業果가 곧 부처님인 것인가?
두 가지 뜻을 함께 얻는다. 「노사나품」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한 털구멍 가운데 한량없는 중생이 머물러 각자 고통과 즐거움을 받지만 오고 감을 알지 못한다.”234)라고 한다. 또한 중생의 업과 등이 곧바로 부처님인 것도 가능하다.
중생의 업과가 곧 부처님이라면 예로부터 곧 부처님인데 어째서 처음 발심할 때 비로소 부처님을 이룬다고 말하는가?
예로부터 부처님이나 발심할 때에야 비로소 부처님임을 알기 때문이다. 꿈에서 달림에 자기의 꿈은 곧 적정하나 깨어난 아침이라야 비로소 달린 것이 곧 누워 있던 것뿐임을 아는 것과 같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처음 발심할 때’ 등이란 22위235) 중 어느 한 지위를 따라 선악善惡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처음 발심發心함이 되니 곧 이것이 바로 정각正覺’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발심과 정각을 삼는 것은 가능하나

006_0784_a_01L我常於十方國土中行菩薩行
006_0784_a_02L虛空不可盡衆生不可盡故無成
006_0784_a_03L [96] 如文殊爲諸佛師摩耶爲諸佛
006_0784_a_04L此並住因門攝化也二唯果門
006_0784_a_05L盡前後際恒是佛故何以故德相
006_0784_a_06L全眞不墮時數無盡極故三亦因
006_0784_a_07L亦果門謂有發心及成正覺於一
006_0784_a_08L切時念念發心念念成佛故 1)
006_0784_a_09L [64] 因非果門謂無心可發無佛可
006_0784_a_10L成故眞法界中無二性故

006_0784_a_11L
道身章云三世間爲佛身心者
006_0784_a_12L佛身大寛故衆生等在佛身心耶
006_0784_a_13L衆生業果即是佛耶二義共得
006_0784_a_14L第上之一第三四張 舍那品云
006_0784_a_15L一毛孔中無量衆生住各自受苦
006_0784_a_16L而不知去來等又亦得衆生業
006_0784_a_17L果等即正是佛衆生業果即是
006_0784_a_18L佛者從古即佛何言初發心時方
006_0784_a_19L成佛耶從古是佛而發心時
006_0784_a_20L方知是佛耳如夢走馳自夢即寂
006_0784_a_21L而悟朝方知走即臥耳

006_0784_a_22L
大記云初發心時等者二十二位之
006_0784_a_23L隨何一位起善惡心爲初發心
006_0784_a_24L即是便正覺也以起善心爲發心

006_0784_b_01L어찌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처음 발심을 삼으며 또한 정각이라고 하는 것인가?
머무름 없는 별교를 기준으로 하면 22위가 다 머무름 없는 지위이다. 그러므로 처음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때 미래의 부처님의 과위를 거둠에 이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머무름 없는 별교 중에도 또한 이와 같은 발심과 정각의 뜻이 있는가?
어떤 지위를 따라서 선악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문득 정각이라는 것은 앞서 미혹했다가 뒤에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본래 깨달음이기 때문에 정각이라고 할 뿐이다.

‘생사와 열반’ 등은 (다음과 같다.) 22위 가운데 삼도三途와 오승 등에 있는 분단分段236)과 변역變易,237) 그리고 원교 중의 분단과 변역238)을 합하여 취해서 생사의 측면으로 삼고 그중에 있는 두 가지의 네 열반(四涅槃)239)과 열 열반(十涅槃)240)을 합하여 취해서 열반의 측면으로 삼는다. 이 둘은 함께 서로 알지 못하며 하나로서 무분별이다. 그러므로 ‘항상 함께이다’라고 한다.

그러하니 생사가 싫어할 바가 아닌데 어째서 지상(지엄) 스님은 “육도의 인과는 싫어함을 의지하여 벗어남을 구한다.”241)라고 했는가?
이승 등의 모든 유정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한 것일 뿐이다. 만약 보현문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다면 모두 실제로 스스로의 덕이며 다시 다른 일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삼(악)도의 원인인 십악 등의 업이 닦아야 할 대상이 되는가?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그러므로 만족왕 선지식(滿足王知識)242)의 일 등이 실제의 법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만족왕 선지식의 법문을) ‘환幻과 같은 법문(如幻法門)’243) 등이라고 했는가?
다만 삼승의 모습을 따라서 이와 같이 말한 것뿐이다. 또 죄와 복이라 말한 것은 나와 남을 실제로 집착하는 지위를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다. 만약 이 집착을 여읜다면 일체의 죄와 복이 환幻과 같고 공空과 같으니 이와 같은 법 가운데 무슨 죄와 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환’이라고 한 것이다.

006_0784_b_01L正覺者可也何以起惡心爲初發心
006_0784_b_02L亦正覺耶約無住別敎則二十二
006_0784_b_03L皆是無住之位故始起惡心之時
006_0784_b_04L乃至攝於後際佛果故也若爾
006_0784_b_05L住別敎中亦有如是發心正覺之義
006_0784_b_06L隨於何位起善惡心便正覺者
006_0784_b_07L非謂先迷後覺但本來覺故云正覺
006_0784_b_08L生死涅槃等者二十二位中三途
006_0784_b_09L五乘等所有分段變易及圓敎中分
006_0784_b_10L段變易合取爲生死邊其中所有二
006_0784_b_11L四涅槃及十涅槃合取爲涅槃邊
006_0784_b_12L互不相知一無分別故云常共和
006_0784_b_13L2) [65] 生死非所猒何故至相
006_0784_b_14L六道因果依猒求脫耶望二乘
006_0784_b_15L等諸有淸故作是說耳若約普賢
006_0784_b_16L門云皆實自德更無異事也
006_0784_b_17L三途之因十惡等業爲所修耶
006_0784_b_18L約實則爾是故滿足王知識事等是
006_0784_b_19L實法門也若爾者何故云如幻法
006_0784_b_20L門等耶第上之一第三五張但隨三
006_0784_b_21L乘相如是云耳又言罪福者約我人
006_0784_b_22L實執位云耳若離此執一切罪福
006_0784_b_23L如幻如空如是法中有何罪福故云
006_0784_b_24L幻也

006_0784_c_01L
정원신역화엄경소

징관 스님이 만족왕의 법문을 풀이하여 이른다.244)
() 이 가르침이 설하는 바 일체는 다 실제인데 어째서 ‘환화(化)’라고 말하는가?
스스로의 힘으로 중생을 섭수하면 일체가 다 실제이나, 역행이나 괴로운 일은 반드시 방편의 환화라고 해야 한다. 이 가운데 뜻을 얻으면 환화 또한 실제이니, 실제의 체가 두루한 까닭이며 실제 또한 환화인 까닭이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일승의 연이란 한 법을 듦에 따라서 나머지 법을 모두 거두어 남음이 없어서 이 한 법의 연이 될 뿐이다. 사연四緣 등 모든 연의 실제가 다 일승에 녹아 있다.
만약 이 문으로 하면 또한 십악을 지어 하늘에 태어나고 십선을 닦아 지옥에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의미를 얻는 데 이른다면 이 뜻을 말할 수 있으나, 이 의미를 얻지 못했다면 대강 전할 바가 아니다. 지엄 스님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질문의 얕고 깊음을 알아야 비로소 대답의 뜻이 필요하다. 운운.”라고 하였다.

일승에서 저 생명을 죽일 때에 죽이는 주체와 죽은 이도 또한 죄가 있는가?
해행解行245) 이상의 자재한 계위에서는 역행과 순행을 함께 닦으나, 견문見聞246) 이하의 열등한 범부라면 근기를 보지 못하고 함부로 중생의 목숨을 없애니 중생에게도 이익이 없고 또한 자신은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마치 저 쥐가 사자가 달리는 것을 따라 하다가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것 등과 같다. 운운.
삼세간이 다 부처님이라면 풀과 나무를 갖다 쓰는 것은 곧 부처님의 몸을 해하는 것이니 죄를 짓는 것인가?
부처님으로 말하면 비록 다 부처님이나 중생으로 말하면 모두 부처님이 아니니, 꺾어도 무슨 죄가 있겠는가? 운운. 중생과 풀과 나무는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필요한 바이니, 비록 내 안과 같더라도 중생이란 죽이면 죄가 있는 필요한 바이고,

006_0784_c_01L
觀師釋滿足王法門云此敎所說
006_0784_c_02L一切皆實何以言化自力攝生
006_0784_c_03L一切皆實逆行苦事須云權化
006_0784_c_04L此中意化亦是實實體遍故實亦
006_0784_c_05L化故也

006_0784_c_06L
道身云一乘綠者隨擧一法 [66] [97]
006_0784_c_07L攝餘法無餘爲此一法之緣耳
006_0784_c_08L綠等諸綠之實皆消於一乘
006_0784_c_09L以此門亦得云作十惡生天修十
006_0784_c_10L善墮獄至得此意得云此義
006_0784_c_11L3) [67] [98] 得此意非粗所傳儼師恒噵
006_0784_c_12L了問淺深方須答義云云一乘
006_0784_c_13L殺彼生時能殺亦死亦有罪耶
006_0784_c_14L解行以上自在位中逆順並修
006_0784_c_15L聞以下劣凡夫者4)▣▣ [68] [99]
006_0784_c_16L殺物命於物無益亦自墮獄如彼
006_0784_c_17L鼠子效5) [69] [100] 跳墮火坑等云云
006_0784_c_18L三世間皆是佛者草木取用則害
006_0784_c_19L佛身得罪耶以佛言雖皆是佛
006_0784_c_20L以衆生云都非是佛斷有何罪
006_0784_c_21L云云 衆生與草木是須處所須
006_0784_c_22L同我內衆生者殺而有罪之所須
006_0784_c_23L「四非」作「罪」{乙}「則」作「財」{乙}「未」
006_0784_c_24L作「末」{乙}
▣▣字體磨滅{底}ㆍ作「能見」{乙}
006_0784_c_25L▣字體磨滅{底}ㆍ作「師」{乙}

006_0785_a_01L풀과 나무란 꺾어 취해도 죄가 없는 필요한 바이다.

(6) 총론總論

‘이법과 현상이 그윽하여’부터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까지247)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이 중에 ‘이법과 현상’이란 (다음과 같다.) 생사가 성품이 없으니 열반으로 성품을 삼고, 열반이 성품이 없으니 생사로 성품을 삼는다. 생사와 열반이 성품이 없는 것은 이법이 되고, 성품이 없는 생사와 열반은 현상이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연기는 성품이 없으며, 성품이 없는 연기이다.”라고 하였다. 연기가 성품이 없는 것은 이법이며, 성품이 없는 연기는 현상이다. 이법 또한 진성의 이법이며, 현상 또한 진성의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라고 하니, 이것이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경계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이법과 현상이 그윽하다’ 등은 총체적으로 위의 뜻을 밝힌 것이다. 위에서부터 나타난 바가 비록 많은 법이 있으나 이법과 현상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경계’란 (다음과 같다.)
연기분은 오직 보현보살의 경계인데 어째서 열 부처님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는 마음이 보현보살의 마음과 그윽이 합하여 나뉘지 않기 때문에 바로 보현보살을 취하고, 나뉘지 않는 뜻 가운데서 아울러 열 부처님을 들었을 뿐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 ‘이법과 현상이 그윽하여’ 등은, 증분과 교분의 대의를 통틀어 결론짓는 것인가, 오직 교분만인가?
혹은 통틀어 결론짓는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래 구절에서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혹은 오직 교분만을 결론짓는다고 한다. 말하자면 증분을 결론지으면서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처음의 뜻 가운데 무엇이 이법이고 무엇이 현상인가?
증분은 이법이고 연기분은 현상이니, 곧 증분과 교분이 무분별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에서 이르기를,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예부터 중도이며, 하나로서 무분별이다.”248)라고 한 것이다. 또 증분을 기준으로 하면 부처님의 증득한 마음으로 이법을 삼고,

006_0785_a_01L草木者斷取無罪之所須矣

006_0785_a_02L
理事冥然 大人境法記云此中理
006_0785_a_03L事者生死無性以涅槃爲性涅槃
006_0785_a_04L無性以生死爲性則生死涅槃之無
006_0785_a_05L性爲理無性之生死涅槃爲事故古
006_0785_a_06L人云綠起無性無性緣起也綠起無
006_0785_a_07L性是理無性緣起是事也理亦眞性
006_0785_a_08L之理第上之一第三六張 事亦眞性之
006_0785_a_09L故云冥然無分別此是十佛普賢
006_0785_a_10L境也

006_0785_a_11L
眞記云理事冥然等者摠明上意
006_0785_a_12L上來所現雖有多法而不出理事故
006_0785_a_13L十佛普賢境者緣起分唯普賢
006_0785_a_14L何云十佛耶佛外向心與普
006_0785_a_15L賢心冥合不分故正取普賢而不分
006_0785_a_16L義中并擧十佛耳

006_0785_a_17L
大記云理事冥然等者通結訂敎二
006_0785_a_18L分大意耶唯敎分耶一云通結也
006_0785_a_19L謂下句云十佛普賢大人境故一云
006_0785_a_20L唯結敎分謂訂分結云訂智所知非
006_0785_a_21L餘境故初意中何理何事耶
006_0785_a_22L分理綠起分事也則訂敎無分別也
006_0785_a_23L故下文云訂敎兩法舊來中道
006_0785_a_24L無分別也又約訂分以佛訂心爲理

006_0785_b_01L나타나는 삼세간의 법으로 현상을 삼는다. 또 연기분 가운데 머무름 없는 본법은 이법이 되고 22위는 현상이 된다. 그러므로 증분의 이법과 현상이 무분별한 것은 열 부처님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며, 교분의 이법과 현상이 무분별한 것은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 이 뜻은 곧 증분은 오직 열 부처님의 경계이고 교분 중에서는 열 부처님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안으로 향하면 열 부처님이고 밖으로 향하면 보현보살이니, 그러므로 지금 안과 밖을 통틀어 결론짓는 때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일 뿐이다.

뒤의 뜻은 (다음과 같다.)
이미 이르기를, “열 부처님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라고 했는데, 어찌하여 “오직 교분만을 결론짓는다.”라고 하는가?
연기분 가운데도 또한 열 부처님이 있으니, 이 교분도 또한 열 부처님이 밖으로 향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처님과 보현보살이 서로 이어지면서도 각기 다른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간의장

『간의장簡義章』249)에 이른다. 팔척八尺 되는 기둥의 모습이 현상이 되고, 기둥의 생겨남이 없음이 이법이 되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만약 일승이라면 곧 이 팔척 되는 기둥의 모습이 이법이 되고 기둥의 생겨남이 없음이 현상이 된다. 또 이법이 평등하면 현상 또한 평등하고, 현상이 차별이면 이법 또한 차별이다. 만약 큰 도道를 체득하여 깨닫는다면 자신의 현상 이외에 어느 곳에서 이법을 얻겠는가?250) 그러므로 지상 스님이 이르기를, “텅 빈 종지宗旨는 현묘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원융한 도는 비롯되는 문을 가려내지 않는다.”251)라고 한 것이 대개 여기에 있다. 삼승은 평등한 한마음(一心)을 설하고, 일승은 갖가지 마음252)을 설하니 곧 또한 삼승은 이법이 평등하고 일승은 이법이 차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그 이름만 다를 뿐이고 말해지는 것은 마땅히 다름이 없는 것인가?
이법을 필요로 하면 곧 이법이고 현상을 필요로 하면 곧 현상이다. 필요로 하는 바의 연緣이 달라서 이법과 현상이 다름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기둥이 필요로 함에 따라서 서기 때문에 (기둥이) 전체로서 둘이 아니다.

006_0785_b_01L所現三世間1) [70] 爲事又綠起分中
006_0785_b_02L無住本法爲理二十二位爲事是故
006_0785_b_03L訂分理事無分別者十佛大人境
006_0785_b_04L分理事無分別者普賢大人境也
006_0785_b_05L意則訂分唯是十佛之境敎分之中
006_0785_b_06L不言十佛也謂內向則十佛外向則
006_0785_b_07L普賢故今通結內外之時如是言耳
006_0785_b_08L後意則旣云十佛大人境也何云
006_0785_b_09L唯結敎分耶綠起分中亦有十佛
006_0785_b_10L以此敎分亦是十佛外向門故也
006_0785_b_11L約佛與普賢相續各別之義

006_0785_b_12L
簡義章云八尺柱相爲事柱之無
006_0785_b_13L生爲理者三乘之義若一乘中
006_0785_b_14L即此八尺柱相爲理柱之無生爲
006_0785_b_15L又理平等則事亦平等事差
006_0785_b_16L別則理亦差別也若體解大道
006_0785_b_17L自事以外第上之一第三七張 何處
006_0785_b_18L得理故至相云冲宗不遺於玄想
006_0785_b_19L圓道莫簡於始門蓋在此矣三乘
006_0785_b_20L說平等一心一乘說種種心則亦
006_0785_b_21L得言三乘理平等一乘理差別
006_0785_b_22L只其名異所詮則應無別耶
006_0785_b_23L理即理須事即事所須綠別理事
006_0785_b_24L有殊然以一柱隨須立故全體無

006_0785_c_01L
이법과 현상의 평등과 차별의 4구는 어떠한가?
동교에 서 있는다면 마땅히 4구를 지어야 하나 이 별교 중에는 4구를 짓지 아니하니, 법은 깊고 말은 얕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의 기둥이라는 말에 이법을 필요로 하면 곧 이법이고, 현상을 필요로 하면 곧 현상이니, 평등과 차별이 필요로 함에 따라서 다 가능하다. 그러므로 구하면 곧 원만하고, 말하면 곧 이것이니, 곁이 없고 그늘이 없다. 의거하면 중도이고 기준으로 하면 원만한 종지宗旨이니,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다. 일승의 그윽한 도리(幽致)가 이러하니, 청컨대 생각을 비우고 취하라.
2. 이타행利他行
‘능인能人의 해인海印’부터 ‘이익을 얻는다’까지253)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해인 가운데 자리와 이타를 구족하니, 말하자면 삼세간의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자리이고, 삼세간의 법을 나타내는 것은 이타이다. 그러나 일승 중에는 이타가 없다. 왜인가? 교화되는 중생이 바로 스스로 안으로 증득한 다섯 바다(五海) 가운데의 중생이기 때문에 근기에 응하여 일어나는, 능히 (교화를) 입히는 가르침도 스스로의 해인삼매로부터 일어난 바이기 때문이다.

‘여의를 번다하게 나타냄’이란 해인삼매로부터 일어나는 가르침이 ‘여의’가 된다. 이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뜻에 알맞기 때문이고, 둘째는 중생의 뜻에 알맞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의’라 한다. 비유하면 전륜왕이 갖고 있는 여의(주)가 왕의 창고 안에 있으면 온갖 보배를 비 내리지 않지만, 만약 전륜왕이 이 여의(주)로써 깃대 위에 내다 걸어두고서 빈궁한 사람들을 위하여 온갖 보배를 비 내려 주길 청하면 그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 갖가지 물건을 비 내려서 뜻과 같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물건들은 본래 여의주 안과 전륜왕의 몸과 허공 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중생의 지극함(感)254)과 왕의 세력으로써 이 여의주가 보배를 비 내려 다함이 없다.

006_0785_c_01L理事平等差別四句云何
006_0785_c_02L立在同敎應作四句此別敎中
006_0785_c_03L作四句以法深言淺故但一柱言
006_0785_c_04L須理即理須事即事平等差
006_0785_c_05L隨須皆得是故須而即圓
006_0785_c_06L而即是無側無陰據而中道
006_0785_c_07L而滿宗非前非後一乘幽致厥爾
006_0785_c_08L請虛襟而取焉

006_0785_c_09L
能人海印至得利益法記云海印中
006_0785_c_10L2) [71] 自利利他謂攝入三世間法是
006_0785_c_11L自利現現三世間法是利他然一乘
006_0785_c_12L中無利他也何者所化衆生是自
006_0785_c_13L內訂五海之中衆生故應機而起能
006_0785_c_14L被之敎從自海印定中所起故也
006_0785_c_15L出如意者從海印定所起之敎爲如
006_0785_c_16L意也此有二義一稱於佛意故二稱
006_0785_c_17L於衆生之意故名爲如意比如輪王
006_0785_c_18L所有如意在王藏內不雨衆寶若轉
006_0785_c_19L輪王以此如意出置幢上爲貧窮人
006_0785_c_20L請雨衆寶隨其所須雨種種物無不
006_0785_c_21L如意然此物等本不在於如意珠內
006_0785_c_22L及輪王身而 [101] 虛空中但以衆生之感
006_0785_c_23L及王勢力此如意珠雨寶無盡也
006_0785_c_24L「法」作「注」{乙}「具」作「眞」{乙}

006_0786_a_01L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서원과 중생의 지극함으로써 해인의 가르침이 중생에게 응한다. 창고 안에 있을 때는 부처님의 안으로 증득하심을 비유하는 것이고, 깃대 위에 내다 걸어 보배를 비 내리는 때는 부처님의 밖으로 교화하심을 비유한 것이다.
‘불가사의하다’란 불가사의한 안으로 증득함으로부터 일어나고 말할 수 없는 중생의 수에 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란 허공이 가없으므로 세계가 가없고, 세계가 가없으므로 중생이 가없으니, 이 가없는 중생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이 입히지 못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란 이 여의如意의 가르침이 삼승ㆍ오승ㆍ무량승無量乘 등 일체의 중생 가운데서 각각 근기에 칭합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화엄에서 삼승의 별도의 과보를 얻는가?
없다. 말하자면 이 『대경』 중에 무량승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에 이 경전이 갖추고 있는 무량승 가운데 『대품경大品經』255) 등에서 별도의 과보를 얻을 뿐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 ‘해인삼매’란 스스로 증득하여 말을 여읜 것인데 무슨 까닭에 이타利他의 처음에서 밝히는가?
이타의 연기는 별도의 자체가 없고 다만 열 부처님의 안으로 증득하신 해인(삼매)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도道에 사사로이 숨기는 것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번다하게 나타냄’ 등이란 순간순간마다 여의如意의 가르침을 일으켜 미래제가 다하도록 휴식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만 한 순간에 법계를 온전히 거두어 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하다’고 말한다.
‘보배를 비 내려’란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보배’라고 한다. 또 중생이 받아 쓰는 갖가지 보물이다.
‘허공을 채운다’란 중생이 불가사의한 가르침을 입으면

006_0786_a_01L第上之一第三八張 如是以佛誓願
006_0786_a_02L及衆生感海印之敎應衆生也
006_0786_a_03L藏內時喩佛內訂出置幢上雨寶之
006_0786_a_04L喩佛外化也不思議者從不思
006_0786_a_05L議內訂而起應不可說衆生數起故
006_0786_a_06L雨寶益生滿虛空者虛空無邊
006_0786_a_07L世界無邊世界無邊故衆生
006_0786_a_08L無邊於此無邊衆生如是之敎
006_0786_a_09L所不被故也衆生隨器得利益者
006_0786_a_10L如意敎於三乘五乘無量乘等一切
006_0786_a_11L衆生中各各稱根令得利益故也
006_0786_a_12L若爾於此花嚴得三乘別果耶
006_0786_a_13L無也謂此大經中具無量乘故
006_0786_a_14L於此經所具無量乘中大品經等
006_0786_a_15L別果耳

006_0786_a_16L
眞記云海印三昧者自訂離言
006_0786_a_17L利他之初明耶表利他綠起無
006_0786_a_18L別自體但依十佛內訂海印所起故
006_0786_a_19L若不爾者道有私隱故繁出等
006_0786_a_20L於念念中起如意敎盡未來際
006_0786_a_21L無休息故又但一念全攝法界無
006_0786_a_22L側故也是故云不思議也雨寶者
006_0786_a_23L約敎云寶也又是衆生受用種種寶
006_0786_a_24L物也滿虛空者衆生蒙不思議敎

006_0786_b_01L곧 그 움직이지 않는 범부의 마음이 법성 허공과 더불어 단지 이 한 물건이라 본래 스스로 원만함을 알기 때문이다.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란 산왕山王256)의 두루한 근기(普機)는 총상의 가르침을 얻고 차별 있는 작은 근기(小機)는 차별 있는 가르침을 얻어서 각각 스스로 이익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해인은 증분과 교분에 통하기 때문에 교분에서 밝힐 뿐이다. 또 이 4구257)는 제사중해인第四重海印258)이기 때문이다.
제사중해인은 선정의 안이기 때문에 이타의 모습이 숨어 있는데 어째서 이타에 배대하는가?

제사중(해인) 안에 동교와 별교의 두 가르침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곧바로 한 길의 붉은 도인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곧 차별이 없기 때문에 별교이고, 만약 굴곡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차별이기 때문에 곧 동교 중의 근기를 따르는 뜻이다. 그러므로 근기를 따르는 굴곡의 붉은 도인이기 때문에 ‘여의의 가르침’이라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법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근거하여’라고 한 것은, 제삼중(해인)259)을 기준으로 하면 머무름 없는 이법ㆍ머무름 없는 가르침이고, 제사중(해인)260)을 기준으로 하면 머무름 없는 이법ㆍ여의의 가르침이다. 이 제사중(해인)을 기준으로 하여 4구를 다시 오중해인으로써 분배하면,261) 처음 2구는 차례대로 처음 두 해인에 배대하고,262) 다음 1구는 제삼(중)해인,263) 그 다음 1구는 뒤의 두 해인이다.264) 말하자면 아래 본문에서 이 해인을 해석하여 이르기를, “끝까지 청정하며 맑고 밝아서,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265) 등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의상 화상의 뜻은 이 가운데의 해인이 오직 한결같이 제사중(해인)266)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이 중에서 다시 분배하였다. 처음 구267)는 모양을 여읜 해인(影離海印)이고, 다음 구268)는 모양을 나타내는 해인(影現海印)이다. 그러므로 ‘여의를 번다하게 나타낸다’ 등이라 말한다.

006_0786_b_01L則知其不動凡心與法性虛空只是
006_0786_b_02L一物本自圓滿故也隨器得利者
006_0786_b_03L王普機得摠相敎差別小機得差
006_0786_b_04L別敎各自成益故也

006_0786_b_05L
大記云海印者通訂敎二分故
006_0786_b_06L於敎分耳又此四句1)弟四重海
006_0786_b_07L印故也*弟四重海印是定內故
006_0786_b_08L利他相隱何故以配利他耶*弟
006_0786_b_09L四重內具同別二敎故若直約一道
006_0786_b_10L朱印而論第上之一第三九張 即無差
006_0786_b_11L別故是別敎若約屈曲而言是差
006_0786_b_12L別故即同敎中逐機之義也是故逐
006_0786_b_13L機屈曲之朱印故云如意敎也是故
006_0786_b_14L前云依理據敎者約*弟三重則無
006_0786_b_15L住理無住敎也約*弟四重則無住
006_0786_b_16L理如意敎也約此*弟四重四句
006_0786_b_17L以五重海印分配則初二句如次配
006_0786_b_18L初二海印2) [72] 句*弟三海印
006_0786_b_19L一句後二海印也謂下文釋此海印
006_0786_b_20L究竟淸淨湛然明白三種世
006_0786_b_21L於中現現等故和尙之意此中
006_0786_b_22L海印非唯一向當*弟四重是以此
006_0786_b_23L中更分配也初句影離海印次句影
006_0786_b_24L現海印故云繁出如意等次句*弟

006_0786_c_01L다음 구269)는 제삼중(해인)이니 교화하시는 부처님이 열 보법(十普法)270)의 보배를 비 내려서 보현보살의 근기를 이익되게 하신다. 뒤의 구271)는 제사중(해인)에서 여의의 가르침의 붉은 도인이 근기의 굴곡에 알맞기 때문에 ‘중생이 근기 따라’라고 말한다. 제오중(해인)에서 언설의 법을 일으켜 중생(機)이 믿고 알며 행하고 증득하게 하는 까닭에 ‘이익을 얻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제사중(해인)272)으로써 올바른 뜻을 해석하면 ‘능인能人’이란 교화하시는 부처님이며, ‘해인’은 정장정淨藏定273)이다. ‘여의를 번다하게 나타냄’이란 여의의 가르침의 붉은 도인이 근기에 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운다’란 열 보법을 비 내려 정위正爲274) 가운데 온전하고 온전하게 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줄의 붉은 도인이 원만히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란 겸위兼爲ㆍ전위轉爲ㆍ인위引爲ㆍ원위遠爲275) 중에 부분부분 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 근기의 마땅함을 따라서 각각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 큰 모서리에서는 크게 굽어지고 작은 모서리에서는 작게 굽어지며 글자 따라 구부러지는 것과 같다.

관석

『관석』에서 『(화엄)경』의 “비유하면 밝고 깨끗한 거울이 그 대면함을 따라 모습을 나타내지만 안팎에 있는 바가 없는 것처럼 업業의 본성 또한 이와 같다.”276)라는 문장을 풀이하여 이른다.
거울에 세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여래장 거울, 정광파리 거울,277) 해인 거울이다.

여래장 거울은 나타난 모습과 한 몸이기 때문에 나눌 수 없다. 만약 모습을 버릴 것을 취하면 거울 또한 따라 부서진다. 이런 까닭에 내 몸이 곧 여래장이니 따로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약 업의 과보가 여래장 거울 중의 모습인 줄 안다면 육도의 원인과 결과가 곧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거울을 얻는 때라면 나타났던 모습은 얼음처럼 사라진다. 숙교 중에 근본과 지말이 둘이 아니니

006_0786_c_01L三重能化之佛雨十普法之寶益普
006_0786_c_02L賢機也後句於*弟四重如意敎之
006_0786_c_03L朱印稱機屈曲故云衆生隨器也
006_0786_c_04L於*弟五重起言說法令機信解行
006_0786_c_05L故云得利益也然以*弟四重正
006_0786_c_06L義釋者能人者能化佛也海印者
006_0786_c_07L淨藏定也繁出如意者如意敎之朱
006_0786_c_08L應機現現也雨寶益生滿虛空者
006_0786_c_09L雨十普法於正爲中全全而應
006_0786_c_10L一道朱印圓滿現現也衆生隨器得
006_0786_c_11L利益者於兼轉引遠爲之中分分而
006_0786_c_12L謂隨彼機宜各令得益如大角
006_0786_c_13L則大曲小角則小曲隨字而屈曲也

006_0786_c_14L
觀釋中釋經猶如明淨鏡隨其面
006_0786_c_15L像現內外無所有業性亦如是之
006_0786_c_16L文云鏡有三種謂如來藏鏡
006_0786_c_17L海印鏡也如來藏鏡
006_0786_c_18L與所現像是一體故不可分也
006_0786_c_19L第上之一第四○張 若取去像鏡亦
006_0786_c_20L隨破是故吾身即如來藏不可別
006_0786_c_21L取故若知業果是如來藏鏡中之
006_0786_c_22L則六道因果即不生也然若得
006_0786_c_23L鏡時所現之像如氷泯也以熟敎
006_0786_c_24L「弟」作「第」{乙}次同「一」作「十」{乙}

006_0787_a_01L물이 파도와 다름이 없으나 그러나 파도는 의거하는 주체이고 물은 의지되는 대상이므로 물을 얻을 때 파도가 쉬고 물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해인 거울 가운데 나타나는 모습은 나의 오척 되는 몸이 삼세간을 갖추어 달리 머무는 곳이 없는 까닭에 머무름이 없음(無住)이라고 한다. 곧 이 머무름 없음을 또한 움직임 없음(不動)이라고 한다. 이미 움직임이 없고 곁이 없는 나의 몸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부터 어느 곳으로 옮겨갈 것인가? 이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곧 거울의 체體이기 때문에 거울을 얻을 때 모습이 없어지지 않는다.

심륜초

『심륜초心輪鈔』278)에 이른다.
처음 바른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의 마음을 어째서 해인이라고 이름하는가?
하나의 ‘해海’ 자로써 삼세간에 도장을 찍어 셋이라는 분별을 여의고 합하여 하나가 된 부처님의 명백한 마음을 이름하여 해인이라 한다. 그 가운데 보현보살이나 문수보살 등이 아홉 모임에서 교화를 도움도 없으며 또한 아홉 모임의 처소도 없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부처님 법을 설하심이 없다.”279)라고 한 것이다. 근기 인연을 향하여 스스로 깨달은 법을 설하고자 한다. 운운.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그 응하여 교화할 바를 따라서 법을 연설하시는 것이다.”280)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법을 설함에 다섯이 있으니, 부처님의 설ㆍ보살의 설ㆍ국토의 설ㆍ중생의 설ㆍ삼세 일체의 설이다.281)
3. 수행자방편급득이익修行者方便及得利益
1 ) 수행자의 방편

‘그러므로 수행자는’부터 ‘자량을 얻는다’까지282)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행자行者’란 곧 모든 보법을 믿고 향하는 사람이고, ‘본래 자리(本際)’는 안으로 증득한 해인이다.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않을 수 없고’란 두 가지 아집283)으로 망상을 삼으니, 위의 안으로 증득한 해인의 경지와 같아서 무아의 사람이라야 이에 능히 이를 수 있다. 만약 아我가 있다면 반드시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바닷가의 풀은 바닷물이 있기 때문에 마르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006_0787_a_01L之中本末無二如水與波無別
006_0787_a_02L而波是能依水是所依故得水之
006_0787_a_03L波息水現故也海印鏡中所現
006_0787_a_04L像者吾五尺身具三世間無別住
006_0787_a_05L故云無住即此無住亦云不動
006_0787_a_06L旣不動無側之吾身故從何處轉
006_0787_a_07L何處耶此所現像正即鏡體故
006_0787_a_08L鏡之時像不泯也

006_0787_a_09L
心輪鈔云始成正覺佛心何故
006_0787_a_10L名海印耶以一海字印三世間
006_0787_a_11L離分別三合爲一佛明白之心
006_0787_a_12L名曰海印於中無普賢文殊等九
006_0787_a_13L會助化亦無九會處所故經偈云
006_0787_a_14L一切諸如來無有說佛法也欲向
006_0787_a_15L機綠說自所訂之法云云 故經偈云
006_0787_a_16L隨其所應化而爲演說法然說
006_0787_a_17L法有五佛說菩薩說刹說衆生說
006_0787_a_18L三世一切說

006_0787_a_19L
是故行者 得資糧法記云行者
006_0787_a_20L則凡諸信向普法之人也本際則內
006_0787_a_21L訂海印也 1) [73] [102] 息妄想必不得者
006_0787_a_22L二我執爲妄想也如上內訂海印之
006_0787_a_23L無我之人乃能得至若存我則
006_0787_a_24L必不得至故也如海邊2) [74] [103] 有海水故

006_0787_b_01L이와 같이 의식의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두 가지 아我가 저 말나식(末那)284) 및 아려야식(黎耶)285)의 바다(와 같은) 몸을 말미암아서 다시 일어난다. 무엇인가? 아려야본식은 아我의 뿌리이고, 그 말나식은 아我의 줄기이며, 제6의식(六識) 및 전5식前五識286)은 모두 두 가지 아我가 출입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수미산을 오르고자 한다면, 여덟 바다(八海)287)를 다 말려서 육지에 의지해 가면 수미산에 오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만약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점차 팔식의 망상의 바다를 쉬어 마치고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삼승의 뜻이다. 일승에서는 만약 첫 번째 바다를 건너면 곧 모든 바다를 건너고 수미산 정상을 밟는 것이기 때문에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래 자리에 돌아갈 수 있다.

‘무연無緣의 선교善巧’ 등은 (다음과 같다.)
무엇 때문에 ‘망상을 쉰다’는 것 다음에 이 구절이 있는가?
본래 자리에 돌아가고자 하면 반드시 망상을 쉬어야 하고, 망상을 쉬고자 하면 반드시 연緣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이 없다(無緣)라는 것은 무엇인가?
오식五識이 오진五塵의 경계를 반연(緣)하는 때에 의식이 함께 반연하고, 그 말나는 곧 안으로 향하여 아我에 집착하고, 아려야본식은 세 종류의 경계288)를 반연하니, 그러므로 여의를 잡을 수 없다. 연이 없기 때문에 성자의 뜻을 얻음을 이름하여 ‘잘 여의를 잡는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간다’란 법성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량을 얻는다’란 수행자의 가행방편加行方便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망상을 쉰다’란 지위에 의거함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처음의 지혜로 끊음을 구하여도 끊을 수 없고, 중간과 나중의 지혜로 끊음을 구해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이르기를, “처음도 아니고 중간과 나중도 아니다.”289)라고 하였다. 그러나 끊을 수 없음으로써 끊음을 삼기 때문에 끊음의 뜻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논에서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한다.”290)라고 하였다.

만약 곧바로 일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장애의 체를 듦에 양이 법계와 같고 지혜를 들어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지상 스님이 이르기를,

006_0787_b_01L3)▣▣ [75] [104] 令渴如是意識人法二我
006_0787_b_02L彼末那及黎耶海4)▣▣▣ [76] [105] 何者
006_0787_b_03L黎耶本識是我5) [77] [106] 其末那識
006_0787_b_04L6) [78] [107] 我之7)▣▣ [79] [108] 第上之一第四一張
006_0787_b_05L前五皆是二我出入之門故也比如
006_0787_b_06L有人欲上須彌乾八海竟依陸而行
006_0787_b_07L得上須彌如是行者若欲返本
006_0787_b_08L息八識妄想海已而得至者三乘義
006_0787_b_09L一乘之中若履初海即履諸海
006_0787_b_10L踐須彌頂故不移一步得還本際也
006_0787_b_11L無綠善巧等者何故息妄想次
006_0787_b_12L此句耶欲還本際要息妄想欲息
006_0787_b_13L妄想要須無綠故也無綠者何
006_0787_b_14L五識綠於五塵境時意識同緣其末
006_0787_b_15L那則向內執我黎耶本識緣三類境
006_0787_b_16L是以不能捉如意也以無緣故得聖
006_0787_b_17L者意名爲善捉如意也歸家者歸法
006_0787_b_18L性家也得資糧者行者加行方便也
006_0787_b_19L眞記云息妄想者約寄位云初智
006_0787_b_20L求斷不可得斷以中後智求斷亦
006_0787_b_21L故論云非初非中後然以不可得
006_0787_b_22L斷而爲斷故斷義得成故論云
006_0787_b_23L中後取也若直約一乘則擧其障體
006_0787_b_24L量等法界擧智亦尒故至相云

006_0787_c_01L“연기의 성품과 같다.”291)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끊는다. 만약 장애와 다른 지혜로써 지혜와 다른 장애를 끊고자 한다면 망상을 쉬지 않은 까닭에 반드시 (끊음을) 얻을 수 없다. 계戒를 지님도 또한 그러하다. 만약 별도로 선善을 취하여 막음의 주체로 삼고 그 불선을 취하여 막음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와 같이 지니는 자는 오히려 계를 깨뜨리는 사람이라고 이름한다.
‘무연의 선교’ 등이란 분별이 없는 것이다. ‘여의’란 가르침이다. ‘집으로 돌아가다’란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량’이란 2천 가지 도道의 품목(二千道品)292) 등이다.

관석

『관석』에 이른다. 소승 중의 계는 받음도 있고 버림도 있으며, 대승 중의 계는 받음은 있으나 버림은 없으며, 일승 중의 계는 받음도 없고 버림도 없다.
말하자면 숙교에서는 근본을 등지고 지말을 좇는 사람이 스스로의 본각 여래장을 알게 하기 때문에 그 받는 바가 있다. 본각을 얻고 나서는 항상 스스로 깨닫는 까닭에 버리는 바가 없다.
일승의 계는 본래 받고 버림이 없어서 막음의 주체와 대상을 여의었다. 제2지에서 부처님이 행하시는 것이 일승의 계가 되나, 일승 중에는 모든 범부와 소승 및 보살이 없고 오직 만족되어 있는 부처님만이 계시기 때문이다.

십선 가운데 처음 셋293)은 「여래명호품」의 신업身業의 행하는 바이고, 다음 넷294)은 「사제품」의 구업口業의 행하는 바이고, 다음 셋295)은 「광명각품」의 의업意業의 행하는 바이다. 이러한 삼업은

006_0787_c_01L綠起性如是斷也若以別障之智
006_0787_c_02L欲斷別智之障者以不息妄想故
006_0787_c_03L不得也持戒亦尒若別取善以爲
006_0787_c_04L能防取其不善以爲所防如是持
006_0787_c_05L猶名破戒人也無綠善巧等者
006_0787_c_06L無分別也如意者敎也歸家者
006_0787_c_07L眞源也資糧者二千道品等也

006_0787_c_08L
觀釋云小乘中戒有受有捨大乘
006_0787_c_09L中戒有受無捨一乘中戒無受無
006_0787_c_10L謂熟敎中敎其背本逐末之人
006_0787_c_11L知自本覺如來藏故有其所受
006_0787_c_12L本覺已恒自覺故8)▣▣ [80] [109] 捨也
006_0787_c_13L乘之戒第上之一第四二張 本無受
006_0787_c_14L離能所防9)弟二地佛▣▣
006_0787_c_15L爲一乘戒而一乘中無諸凡小及
006_0787_c_16L與菩薩唯有滿足之 [110] 佛故也於十
006_0787_c_17L善中初三是名號品身業所行
006_0787_c_18L10) [81] [111] 四諦品口業所行次三是光
006_0787_c_19L明覺品意業所行如是三業示現
006_0787_c_20L「匹」作「叵」{乙}▣字體磨滅{底}ㆍ作「井」{乙}
006_0787_c_21L
▣▣字體磨滅{底}ㆍ作「不得」{乙}▣▣▣字
006_0787_c_22L體磨滅{底}ㆍ作「藏而還」{乙}
▣字體磨滅{底}ㆍ
006_0787_c_23L作「之」{乙}
▣字體磨滅{底}ㆍ作「是」{乙}▣▣
006_0787_c_24L字體磨滅{底}ㆍ作「莖六」{乙}
▣▣字體磨滅{底}ㆍ
006_0787_c_25L作「無所」{乙}
「弟」作「第」{乙}次同▣字體
006_0787_c_26L磨滅{底}ㆍ作「是」{乙}

006_0788_a_01L법계의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부처님의 삼업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지금 이 나의 몸은 부처님의 십선에 감응하여 얻은 바이다. 그러므로 본래 미혹한 때가 없고 다시 법을 받음도 없어서 삼세의 때가 다하도록 항상 스스로 움직이지 아니하며 또한 법을 버림도 없다. 몸 밖에 경계가 없으며 경계 밖에 몸이 없어서 막음의 주체와 대상을 여의었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앞의 제사중(해인)296) 안에서 이익을 얻는 근기를 어떻게 보는가?
보현(보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 여덟 번 모임(八會)에서 교화를 돕는(助化) 뜻을 기준으로 하면 근기라 하지 않는다. 제삼중(해인)297)에서야 비로소 근기가 된다. 만약 제사중(해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위광威光298)과 선재善財299)가 모두 정장정淨藏定300) 가운데서 이익을 얻는 근기이다. 다만 삼매(定) 안에서 얻는 바 이익을 선정 밖에서 설하여 보일 뿐이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 이 제오중(해인)301) 안에서는 흘러나오는 것(所流)ㆍ목표로 하는 것(所目)의 근기로써 비로소 교화의 대상을 삼는다.

만약 위광과 선재가 바로 삼매 안에서 이익을 얻는 근기라면 오직 처음과 마지막의 두 모임만 삼매 안인가?
만약 제사중(해인)을 기준으로 하면 여덟 번 모임의 법이 모두 삼매 안이다. 그러나 우선 위광과 선재를 들어 말하였을 뿐이다. 말하자면 『입법계품초』에서 이르기를, “일승에서 선지식을 구하는 것은 오직 이 삼매 안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삼매 안의 일로써 그것을 보였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제삼중(해인) 안에서는 위광과 선재 등으로써 근기를 삼지 않는가?
저 제삼중(해인)은 함께하지 않는 별교이기 때문에 다만 보현(보살)로 비로소 근기를 삼는다. 제사중(해인)에는 동교와 별교를 갖추고 있으므로 위광과 선재로 근기를 삼는다. 그러므로 『입법계품초』에서 이르기를, “만약 삼승에 의거하여 경문을 분과하면 다섯 가지 모습302) 등이 있다. 그러므로 견문見聞ㆍ해행解行 등의 삼생三生303)

006_0788_a_01L法界一切諸法皆是佛之三業
006_0788_a_02L今此吾身是佛十善之所感得
006_0788_a_03L故本無迷時更無受法竟三世際
006_0788_a_04L恒自不動亦無捨法身外無境
006_0788_a_05L境外無身離能所防

006_0788_a_06L
大記云前*弟四重內得益之機
006_0788_a_07L如何見耶普賢有二義若約八會
006_0788_a_08L助化之義不云機也於*弟三重
006_0788_a_09L爲機也若約*弟四重則威光善財
006_0788_a_10L皆是淨藏定中得益之機也但是定
006_0788_a_11L內所得之益於定外說示耳約是義
006_0788_a_12L云得利益也於此*弟五重內
006_0788_a_13L所流所目之機方爲所化也若威
006_0788_a_14L光善財正是定內得益之機則唯初
006_0788_a_15L後二會是定內耶若約*弟四重
006_0788_a_16L則八會之法皆是定內然且擧威光
006_0788_a_17L善財云耳謂法界品抄云一乘求知
006_0788_a_18L唯是定內故知以定內事示之耳
006_0788_a_19L何故*弟三重內不以威光善財等
006_0788_a_20L爲機耶彼*弟三重則是不共別
006_0788_a_21L敎故但以普賢方爲機也於*弟四
006_0788_a_22L具同別敎故以威光善財而爲機
006_0788_a_23L故法界品抄云若依三乘科文者
006_0788_a_24L有五相等是以見聞解行等三生

006_0788_b_01L삼승의 지위(三乘位)에 의거하여 일승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삼생의 지위는 제사중(해인) 안에서는 깊고 얕음이 없고 제오중(해인)에서는 깊고 얕음이 있다.

‘행자’라고 말한 것은 제오중(해인)을 기준으로 하면 흘러나오는 것(所流)ㆍ목표로 하는 것(所目)의 근기이다. 만약 제사중(해인)이라면 위광과 선재이다. 그러나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무릇 모든 뛰어난 이로서 이 화엄을 향하는 사람이 모두 이 가운데의 ‘행자’이나, 위광과 선재가 수행하여 인因이 나타나기 때문에 치우쳐 든 것이다.304) 이 ‘행자’ 등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비로자나불의 체體임을 알기 때문에 ‘본래 자리에 돌아와’라고 한다.

제사중(해인)의 안에는 무엇으로 본제本際를 삼는가?
위광과 선재가 얻는 화장세계의 과果와 티끌 수의 법문 등이 이것이다.

‘망상’이라고 말한 것은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목표로 하는 것(所目) 등에 통한다. 말하자면 아래 가르침(下敎)의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의 자취를 고수하여 집착해서 구경을 삼기 때문에, 이 미혹한 집착을 기준으로 하여 총체적으로 망상을 삼는다. 만약 이 집착을 끊으려면 요컨대 육상六相의 칼을 사용해야 한다.

또 숙교에서는 삼아승지겁(三祗劫)305)에 사상四相306)의 꿈을 깨어서 진여가 있다고 헤아려서 구경이 된다고 말하니,307) 자취를 지켜서 머무르기 때문이다. 육상 가운데 이상異相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곧 그 끊어지는 대상이 결국 앞의 20가지 꿈308)이라 각각의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고 분명하게 다르다. 이런 까닭에 만약 일승에 들어가면 요컨대 삼승에서 말하는 망상을 끊는다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만약 그 망상 끊는다는 망상을 쉬지 않는다면 곧 망상을 쉬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즉 망상을 끊는다는 마음을 끊어 없애서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여기에서 ‘망상을 쉰다’라고 이름한다.

또 말하기를, “이른바 망상이란 무릇 자기의 몸과 마음 외에 부처를 바라고 법을 구하는 마음이 총체적으로 망상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별교의 뜻으로써 이 문장을 해석하면

006_0788_b_01L三乘位現一乘耳此三生位於*弟
006_0788_b_02L四重內無淺深第上之一第四三張
006_0788_b_03L*弟五重有淺深也言行者者約*弟
006_0788_b_04L五重則所1)▣▣▣ [82] [112] 機也若*弟四重
006_0788_b_05L則威光善財也然約實則▣諸體▣
006_0788_b_06L▣嚴 [113] 之人皆是此中行者而威光
006_0788_b_07L善財修行▣▣ [114] 2) [83] [115] 3)▣▣ [84] [116] 此行者
006_0788_b_08L等知自身心4) [85] 舍那體故云還本
006_0788_b_09L際也 5) [86] [117] 於*弟四重內以何爲本際
006_0788_b_10L威光善財所得花藏世界果
006_0788_b_11L塵數法門等是也言妄想者通所流
006_0788_b_12L所目等也謂下敎之人守自敎跡
006_0788_b_13L執爲究竟故約此迷執惣爲妄想
006_0788_b_14L若斷此執要須用六相刄也且熟敎
006_0788_b_15L於三祗劫覺四相夢計有眞如謂
006_0788_b_16L爲究竟守迹而住故以六相中異相
006_0788_b_17L印印之則其所斷竟前二十夢各位
006_0788_b_18L不動而歷然差別也是故若入一乘
006_0788_b_19L要息三乘謂斷妄想之心若不息其
006_0788_b_20L謂斷妄想之妄想則以不息妄想故
006_0788_b_21L必不得入也然則斷妄想之心斷除
006_0788_b_22L不起是名此中息妄想也又云所謂
006_0788_b_23L妄想者凡自身心之外希佛求法之
006_0788_b_24L惣爲妄想也一云以別敎義

006_0788_c_01L마땅히 ‘망상을 쉬지 않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니, 만약 망상을 쉰다면 반드시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래 구절에서 이미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고 한 까닭에 동교를 기준으로 하여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그 인연관309)이기 때문이다.

아래 본문에서 행자行者를 해석해 말하기를, “행자行者란 일승의 보법普法을 보고 들은 이후, 내지 이것은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310)라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여기서는 동교라고 하는가?
이것은 목표로 하는 바(所目)인 별교를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 함께하지 않는(不共) 머무름 없는 별교가 아니다. ‘일승의 보법을 보고 듣는다’고 말한 것은 제오중해인에 서 있어서 선정 외의 견문을 기준으로 하여 말했을 뿐이다.

‘선교善巧로 여의를 잡아서’ 등이라 말한 것은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장님이 그 눈먼 까닭에 자신의 보배 있는 곳을 미혹하여 오랫동안 빈곤해서 멀리 타향에서 걸식하니, 어떤 눈을 갖춘 사람이 마음에 불쌍히 여김을 일으켜서 (그 장님을) 위하여 끈 하나를 가지고 그 보배가 있는 곳에 매고, 그 한 끝을 장님의 손에 쥐어 주고서 가리켜 일러주기를, “그대가 만약 잃어버리지 않고 끈을 찾아가면 그대의 보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님이 듣고 나서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가 보배 있는 곳에 이르고, 그 보배가 있는 곳에 또한 신령스런 약도 있어서 약 기운의 힘으로 눈이 떠져 밝게 되어 있는 바 온갖 보배를 자재하게 취하여 썼다.

행자도 또한 그러하다. 지혜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으로 증득한 법성의 보배 있는 곳을 미혹하여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궁핍해서 다른 이에게 구걸한다. 큰 성자가 있어 대비의 원願을 일으켜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 등의 다라니끈을 드리워서 행자의 신심信心의 손에 쥐어 주고

006_0788_c_01L此文者應云不息妄想若息妄想
006_0788_c_02L必不得故也然而下句旣云隨分得
006_0788_c_03L資糧故約同敎釋者冝也以此是其
006_0788_c_04L因綠觀故下文釋行者云行者者
006_0788_c_05L見聞一乘普法已去乃至此約別敎
006_0788_c_06L一乘說也何故此云同敎耶此約
006_0788_c_07L所目別敎云耳非是不共6) [87] 住別敎
006_0788_c_08L所云見聞一乘普法者立在7)弟五重
006_0788_c_09L海印約定外見聞云耳言善巧捉如
006_0788_c_10L意等者第上之一第四四張 比如盲人
006_0788_c_11L由其盲故迷自寶所長年貧困
006_0788_c_12L乞他鄕有具眼人心生哀憫爲持
006_0788_c_13L一索繫彼寶所以其一末授盲人
006_0788_c_14L而指誨云汝若不失尋索而行
006_0788_c_15L返汝寶所盲人聞已不失尋行
006_0788_c_16L至寶所其寶所中亦有靈藥以藥
006_0788_c_17L氣力眼得開明所有衆寶自在取用
006_0788_c_18L行者亦尒智眼盲故迷自內8)訂法
006_0788_c_19L性寶所無始時來窮乞於他有大聖
006_0788_c_20L起大悲願垂一中一切多中一等
006_0788_c_21L▣▣▣字體磨滅{底}ㆍ作「流所目」{乙}▣字體
006_0788_c_22L磨滅{底}ㆍ作「故」{乙}
▣▣字體磨滅{底}ㆍ上一字
006_0788_c_23L作「擧」{乙}
「即」無有{乙}▣字體磨滅{底}ㆍ
006_0788_c_24L作「問」{乙}
「无」作「先」{乙}「弟」作「第」{乙}
006_0788_c_25L
「訂」通「證」於此書{編}次同

006_0789_a_01L‘진성이 매우 깊다’는 (다른) 한 끝을 저 증분의 보배 있는 곳에 매고 가르쳐서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잃어버리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면 반드시 곧바로 그대의 법성보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행자가 믿고 받아서 성자의 뜻을 얻어 여의의 가르침을 잡으면 처음 발심하는 때에 문득 십안十眼311)을 열어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증득한 법성의 보배 있는 곳에 들어가서 다함없는 자기 집의 진귀한 보배를 받아 쓸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법성의 집에 돌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다라니의 끈을 잘 잡아서 지녀 잃어버리지 말고 자량으로 삼아야 한다.

도신장

『도신장』에 이른다.
닦음이 닦지 않음과 다른데 어떻게 부처님으로 말하면 모두 깨달았다고 함을 얻는가?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겁 동안 닦으신 뜻이 옛이 아니며 새롭게 얻음도 없으며 또한 끊을 바 번뇌가 있기 때문에 끊으려는 것도 아니다. 번뇌가 본래 끊을 바가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을 끊음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또 법의 실상은 삼세간을 비추면 하나의 큰 연기가 된다. 예부터 이와 같으니, 한량없는 겁 동안 닦아 법을 증득하는 것이 어찌 오직 나만 깨닫고 다른 사람과 나무와 돌은 가려 배제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증익과 감손에 떨어진 큰 사견이고 정도正道가 아니다.

또 『도신장』에 이른다. 어떤 글에서는 하나를 끊으면 일체가 끊어진다고 하고, 어떤 글에서는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고 한다. 저것이 옳으면 이것이 그르고 이것이 옳으면 저것이 그르니 어떻게 회통하는가?
덕으로써 말하면 처음부터 걸림이 없고, 미혹으로써 바라보면 다함없는 덕을 덮는 것이다. 만약 진실로 끊을 바가 없다면 어째서 미혹한 사람이 아직 얻지 못했으며, 만약 끊을 바가 있다면 끊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글에서 이르기를,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나,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312)라고 하니,

006_0789_a_01L陁羅尼索授於行者信心之手以眞
006_0789_a_02L性甚深之一末繫彼訂分寶所而敎
006_0789_a_03L誡云汝若不失勤行精進則必直返
006_0789_a_04L汝法性寶宅行者信受得聖者意
006_0789_a_05L捉如意敎初發心時便開十眼
006_0789_a_06L動一步直入內訂法性寶所受用無
006_0789_a_07L盡自家珍寶是故行人若欲還歸法
006_0789_a_08L性家者要須善捉陁羅尼索持而如
006_0789_a_09L失爲資糧也

006_0789_a_10L
道身云修與不修別何得以佛
006_0789_a_11L言皆覺乎佛無量劫修意非爲
006_0789_a_12L古無新得亦非有所斷煩惱故欲
006_0789_a_13L知煩惱本無所斷名爲斷耳
006_0789_a_14L又法之實者三世間照矚爲一大
006_0789_a_15L綠起舊來如是無量劫修訂得法
006_0789_a_16L豈但我覺簡除他人及與不 [118]
006_0789_a_17L若爾是增減邊大邪見非正道
006_0789_a_18L又道身云有文云一斷一切斷
006_0789_a_19L文云實無所斷彼是則此非此是
006_0789_a_20L則彼非第上之一第四五張 云何會
006_0789_a_21L以德言之從始無障以惑望
006_0789_a_22L覆無盡德若實無所斷者何故
006_0789_a_23L迷人未得若有所斷者所斷者何
006_0789_a_24L文云非初非中後前中後取故

006_0789_b_01L(과거ㆍ현재ㆍ미래의) 세 때(三時) 중에서는 끊는 모습을 얻을 수 없으나 깨달은 이후에는 세 때에 걸림이 없다. 도리가 끊음과 끊지 않음 중에 있지 않으나 근기에 따라 끊음을 말하나 또 끊을 바가 없다. 근기를 위하여 가르침을 살펴서 깨달아 들어가게 하고자 하니 끊음과 끊음 없음의 걸림 없는 실상을 이와 같이 시설하는 것일 뿐이다.

의상 화상이 이르기를, “번뇌(惑)는 오직 용用일 뿐이고 체體가 없으나, 지혜는 체와 용을 갖춘다.”라고 하였다.
체가 없으면 어떻게 작용이 있을 수 있는가?
체는 머무름 없는 실상實相이며 미迷의 작용이 번뇌(惑)가 되니, 미迷의 작용을 쉴 뿐이고 끊을 수 있는 체가 없다.
‘하나를 끊으면 일체가 끊어진다’란 이미 체가 없으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 및 일체로 삼는가?
장애 되는 법문을 기준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하나와 일체를 말하는 것은 하나가 곧 일체인 법문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큰 바다는 독약에 무너지는 바가 아니고, 큰 허공은 날카로운 검에 다치는 바가 아니다. 연기의 세 가지 독313)은 세 때(三際)에 뻗치나 바로 분별없음을 얻을 뿐이고, 다시 (세 가지 독을) 쉬어 없애야 비로소 끊어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2) 이익 얻음

‘다라니의’부터 ‘부처라 이름한다’까지314)

법융기
『법기』에 이른다. ‘다라니’란 법계 법이 다함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법이기 때문에 다함없다고 하는가, 다만 하나의 법을 기준으로 하여 또한 다함없다고 하는가?
두 가지 뜻을 다 얻는다.

‘진실한 보배궁전’이란 증분을 기준으로 하면 법성의 자리이고, 연기분을 기준으로 하면 곧 화장세계의 염오를 여읜 진성이다.
만약 다라니로써 법성의 진실한 보배궁전을 장엄한다면 증분의 처소에서 중중重重의 중中ㆍ즉卽과 미세微細315) 등의 뜻을 인정하는 것인가?
만약 저 증분이라면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을 설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법은 남음이나 결여됨이 없어서 일체를 만족하기 때문에

006_0789_b_01L時之中不得斷相而覺以去三時
006_0789_b_02L無障道理不在斷不斷中隨機言
006_0789_b_03L斷又無所斷欲爲機者尋敎訂
006_0789_b_04L斷與無斷無㝵實相如是設
006_0789_b_05L相和尙曰惑者但用無體
006_0789_b_06L具體用無體何得有用體是
006_0789_b_07L無住實相迷用爲惑迷用息耳
006_0789_b_08L體可斷一斷一切斷者旣無體
006_0789_b_09L約何爲一及一切耶可約所障
006_0789_b_10L法門故云一與一切以障一即一
006_0789_b_11L切法門故

006_0789_b_12L
古記云大海非是毒藥所壞大空
006_0789_b_13L非是利劒所傷綠起三毒亘三際
006_0789_b_14L直得無分別耳非更息滅方爲
006_0789_b_15L斷也

006_0789_b_16L
以陁羅尼至名爲佛法記云陁羅尼
006_0789_b_17L法界法之無盡義也衆多法
006_0789_b_18L故云無盡耶但約一法亦云無盡耶
006_0789_b_19L二義皆得實寶殿者約訂分則法
006_0789_b_20L性處也約綠起分則花藏世界離染
006_0789_b_21L眞性也若以陁羅尼莊嚴法性實
006_0789_b_22L寶殿者訂分之處可許重重中即微
006_0789_b_23L細等義耶若以彼訂分不可說故
006_0789_b_24L說如是義耳然法無遺1) [88] 滿足一

006_0789_c_01L인다라(因陀羅)316) 등의 구경의 궁극이라야 이에 증분인 것이다.
화장세계의 염오를 여읜 진성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밖으로 향하시는 문이 이것이다. 화장정토華藏淨土317)는 삼승이 함께 배우는 곳이기 때문에 삼승의 근기를 따라서 계界를 나누고 바다를 나눈다. 만약 자종自宗을 기준으로 하면 오직 하나의 바다(一海)318)일 뿐이고 세 품류(三品)319)가 없다.

‘마침내 앉으니(窮坐)’란 십세에 상응하고 법계에 응하여 들어맞는320) 까닭이다. ‘중도’란 세 가지 세간이 자기의 몸과 마음이 되어서, 한 물건도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부터(舊來)’란 위의 증분 가운데 ‘본래 고요하다’이다. ‘움직이지 아니함(不動)’이란 위의 증분 가운데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서 30여 역驛을 돌아다녔으나 깨고 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이지 않고 침상에 있었던 줄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도 또한 그러하여 본래의 법성으로부터 30구절을 지나서 다시 법성에 이르렀으나 단지 하나일 뿐 움직이지 않은 까닭에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이라고 한다.

이 뜻은 숙교 중의 ‘한마음(一心)을 미혹하여 육도六道에 유전하다가 깨달아서 한마음으로 돌아온다’는 뜻과 무슨 다름이 있는가?
저 숙교 가운데서는 20가지 꿈321)을 없애야 비로소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 종宗에서는 꿈속의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곧 법성이기 때문에 버릴 것도 없고 달리 돌아갈 바도 없는 까닭에 매우 다르다.

진수기
『진기』에 이른다. ‘다라니’란 총지이다. ‘진실한 보배궁전’이란 세계 바다(世界海)이다.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으니’란 일승의 구경인 참된 근원에 완전히 도달하는 것이다.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부처라 이름한다’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어째서 번뇌에 묶인 유정有情이 예부터 성불하였는가?
만약 그 아직 닦음의 연을 일으키지 않은 때라면 ‘예부터 성불하였다’고 이름할 수 없다.

006_0789_c_01L切故因陁羅等究竟之極乃訂分也
006_0789_c_02L花藏世界離染眞性是何佛外
006_0789_c_03L向門是也花藏淨土三乘共學處故
006_0789_c_04L隨三乘機分界離海若約自宗
006_0789_c_05L一海耳無三品也第上之一第四六張
006_0789_c_06L窮坐者十世相應應稱法界故也
006_0789_c_07L中道者以三世間爲自身心無有
006_0789_c_08L一物非身心者故也舊來者上訂
006_0789_c_09L分中本來寂也不動者上訂分中
006_0789_c_10L法不動也比如有人在床入睡
006_0789_c_11L中廻行三十餘驛覺後方知不動在
006_0789_c_12L此中亦爾從本法性經三十句
006_0789_c_13L還至法性只一不動故云舊來不動
006_0789_c_14L此義與熟敎中迷於一心
006_0789_c_15L轉六道悟復一心之義有何異乎
006_0789_c_16L彼熟敎中泯二十夢方歸一心
006_0789_c_17L此宗之中不動夢念即法性故
006_0789_c_18L所棄捨無別所歸故逈異也

006_0789_c_19L
眞記云陁羅尼者摠持也實寶殿
006_0789_c_20L世界海也窮坐實際中道床者
006_0789_c_21L徹到一乘究竟眞源也舊來不動名
006_0789_c_22L爲佛者何故具縛有情舊來成佛
006_0789_c_23L如其未起修綠之時不得名爲
006_0789_c_24L「缺」作「鈌」{乙}

006_0790_a_01L무슨 까닭인가? 오늘 발심하는 연緣 가운데 법계의 모든 법이 비로소 단박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혜의 연緣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번뇌 등의 법도 또한 지혜를 이루는 연이 되어 일어나고, 번뇌의 연緣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에서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요컨대 오늘 발심하는 연緣을 기다려서 곁이 없이 일어나는 때에 비로소 예부터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연緣 이전에는 한 법도 없기 때문에 ‘예부터’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삼승이라면 존중해야 할 정해진 근본이 있기 때문에 오직 시각始覺322)이 곧 본각本覺323)과 같은 뜻을 취하여 논한다. 일승은 그렇지 아니하여 존중해야 할 정해진 근본이 없어서 근본과 지말이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에 필요로 함을 따라서 모두 하나를 얻는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진실한 보배궁전’이란 혹은 ‘국토 바다’라 하며, 혹은 ‘성기과性起果와 세 덕이 차별 있는 과보(三德差別果)’라 한다. 그러나 세 덕(三德)324)은 구경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성기과이다.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으니’란 인위因位에서 배움이 다하여 과위果位에 이르기 때문이다.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부처라 이름한다’란 처음에 ‘법法’ 자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불’ 자에 이르나 처음의 시작과 마지막의 이름이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상) 화상이 말씀하신 바,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자리이다.”라는 것이 대개 이 뜻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일승 가운데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수행하지 않은 중생이 이미 부처님을 이루었다는 뜻이고, 둘째는 이미 이룬 모든 부처님이 본래 수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육상六相을 쓰면 이 뜻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총상이 되고 중생은 별상이 된다. 일체중생이 부처님인 뜻이 같음을 동상同相이라 하고, 일체중생이 각각 상즉(相是)하지 않음을 이상異相이라 한다. 일체중생이 연기의 구경이니 바로 곧 부처님인 것을 성상成相이라 하고,

006_0790_a_01L舊來成佛何者今日發心綠中
006_0790_a_02L界諸法方頓起故須智綠中煩惱
006_0790_a_03L1)▣▣ [89] [119] 2) [90] 爲成智之緣而起須煩惱
006_0790_a_04L綠中亦如是也是故要待今日發心
006_0790_a_05L之綠無側起時方舊來成耳緣以
006_0790_a_06L前無一法故不云舊來也若三乘則
006_0790_a_07L有所尊定本故唯取始覺即同本
006_0790_a_08L覺之義論也一乘不爾無所尊定本
006_0790_a_09L本末不定故隨須皆得一

006_0790_a_10L
大記云實寶殿者或云國土海
006_0790_a_11L云性起果與三德差別果也然三德
006_0790_a_12L非究竟故正是性起果也窮坐實際
006_0790_a_13L中道床者因位學窮至於果位故也
006_0790_a_14L第上之一第四七張 舊來不動名爲佛
006_0790_a_15L初起法字終至佛字初起終至
006_0790_a_16L是一處故也是以和尙所云行行本
006_0790_a_17L至至發處盖此意也

006_0790_a_18L
古記云一乘之中舊來成佛有二
006_0790_a_19L義也一不修衆生已成佛義二已
006_0790_a_20L成諸佛本不修義若須六相可得
006_0790_a_21L此旨謂佛爲摠相衆生爲別相
006_0790_a_22L一切衆生是佛義齊以爲同相
006_0790_a_23L切衆生各不相是以爲異相一切
006_0790_a_24L衆生綠起究竟正即是佛以爲成

006_0790_b_01L일체중생이 각각 자기의 자리에 머물러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 것을 괴상壞相이라 한다.

대기
『대기』에 이른다. 이 도인(印)의 대의大意는 (다음과 같다.)
그 하얀 종이로 기세간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하얀 종이는 본래 색에 물들어 있지 않아서 검은 것(墨)을 찍으면 곧 검고, 붉은 것을 찍으면 곧 붉은 것과 같이, 기세간 또한 그러하여 깨끗함과 더러움에 국한되지 않아서 중생이 주처하면 곧 물들어 더럽고, 현인과 성인(賢聖)이 주처하면 곧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 검은 글자로 중생세간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검은 글자는 한가지로 모두 검지만 낱낱은 같지 않은 것과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번뇌 무명이 모두 스스로 어두워서 갖가지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 붉은 줄로 지정각세간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붉은 줄이 한 길로서 끊어지지 않고 처음과 끝이 둥글게 이어져서 모든 글자 가운데를 꿰뚫어 빛깔이 분명한 것과 같이, 부처님의 지혜도 또한 그러하여 평등하고 광대하게 중생의 마음에 두루하며 십세에 상응하여 두렷이 밝게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도인이 세 가지 세간을 갖추고 있다.

만약 관觀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325) 곧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만약 흰 종이를 취하면 검은 글자와 붉은 줄이 모두 제거되므로 글자와 붉은 줄이 종이를 여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약 기세간을 여의면 부처님과 중생이 없기 때문에 기세간 중에 중생과 부처님을 갖춘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삼악도ㆍ사람ㆍ하늘ㆍ아수라阿修羅가 있어 각각 업보 받음을 나타낸다.”,326)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각각 나유타那由他 무수한 억의 모든 부처님이 그 가운데서 법을 설하심을 나타내 보인다.”,327) “하나의 티끌 가운데 티끌 수의 세계가 있고, 낱낱 세계에 생각하기 어려운 부처님이 계시며, 낱낱 부처님 처소의 뭇 모임 가운데서 나는 항상 보리행을 연설하시는 것을 본다.”328)라고 한다. 또 이르기를,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일을 널리 나타낸다.”329)라고 한다.

둘째, 검은 글자를 기준으로 해도 또한 그러하므로, 중생 중에 기세간과 부처님을 갖춘다.

006_0790_b_01L一切衆生各住自位舊來不
006_0790_b_02L以爲壞相也

006_0790_b_03L
大記云此印大意以其白紙表器
006_0790_b_04L世間謂如白紙本不染色點墨即
006_0790_b_05L點朱即赤器界亦爾不局淨穢
006_0790_b_06L衆生處則染穢賢聖處則淸淨故
006_0790_b_07L其黑字表衆生世間謂如黑字一等
006_0790_b_08L皆黑箇箇不同衆生亦爾煩惱無
006_0790_b_09L皆自暗覆種種差別故以其朱
006_0790_b_10L表智正覺世間謂如朱畫一道不
006_0790_b_11L始終連環貫諸字中光色分明
006_0790_b_12L佛智亦爾平等廣大遍衆生心
006_0790_b_13L世相應圓明照矚故是故此印具三
006_0790_b_14L世間若約觀釋即有四義一若取
006_0790_b_15L白說則黑字朱畫皆去故字與朱畫
006_0790_b_16L不離於紙如是若離器界無佛衆生
006_0790_b_17L於器中具生及佛也是故經云
006_0790_b_18L一微塵中現有三惡道人天阿修羅
006_0790_b_19L各各受業報於一微塵中各示那
006_0790_b_20L由他無數億諸佛於中而說法一塵
006_0790_b_21L中有塵數刹 3)一一 [91] [120] 刹有難思佛
006_0790_b_22L一佛處衆會中我見恒演菩提行
006_0790_b_23L一微塵中第上之一第四八張 普現
006_0790_b_24L三世一切佛佛事二約黑字亦爾故

006_0790_c_01L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하나의 모공 가운데 널리 시방세계를 보니 그 세계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모임을 미묘하게 장엄한다.”,330) “낱낱 털구멍에 수억 세계가 부사의한 갖가지 모양으로 장엄되어도 일찍이 비좁거나 궁색함이 없었다.”,331) “일체 세계 국토와 모든 부처님이 내 몸 안에 계시되 걸리는 바가 없으니 내가 일체 털구멍 가운데서 부처님의 경계를 나타냄을 자세히 관찰하였다.”332)라고 한다. 또 이르기를, “보살은 자기 마음의 생각생각마다 항상 부처님이 정각 이루심이 있음을 안다.”333)라고 하며, 내지 이르기를, “자기의 마음과 같아서 일체중생의 마음도 또한 다시 그러하여, 모두 여래가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심이 있다.”334)라고 한다.

셋째, 붉은 줄을 기준으로 해도 또한 그러하므로, 부처님 중에 기세간과 중생을 갖춘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겁과 부처님 세계 및 모든 법과 모든 감각기관(根)과 심心과 심법心法과 일체의 허망한 법이 한 부처님 몸 가운데 이 법이 모두 다 나타난다.”,335) “시방의 모든 국토 바다의 있는 바 일체중생 바다를 널리 다하도록, 부처님의 지혜가 평등하여 허공과 같아서 털구멍 가운데 모두 능히 나타낸다.”336)라고 한다. 또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한 찰나에 능히 한량없는 세계와 한량없고 수없는 청정한 중생을 다 나타내 보이신다.”337)라고 한다.

넷째, 흰 종이와 검은 글자와 붉은 줄이 다 온전히 서로 거두어서 따로 취할 수 없지만 세 가지 물건이 각기 다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세간이 융통하여 서로 거두어 섞여서 한 덩어리가 되지만 문은 각기 달라서 역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도인은 만약 기세간의 문으로써 관觀하면 곧 기세간의 해인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화장세계에 있는 티끌의 낱낱 티끌 가운데에서 법계를 보는데,

006_0790_c_01L於生中具器及佛也是故經云
006_0790_c_02L一毛孔中普見十方刹彼刹妙莊嚴
006_0790_c_03L諸佛菩薩會一一毛孔中億刹不思
006_0790_c_04L種種相莊嚴未曾有迫隘一切刹
006_0790_c_05L土及諸佛在我身內無所㝵我於一
006_0790_c_06L切毛孔中現佛境界諦觀察又云
006_0790_c_07L薩知自心念念常有佛成正覺乃至
006_0790_c_08L如自心一切衆生心亦復如是
006_0790_c_09L有如來成等正覺三約朱畫亦爾
006_0790_c_10L於佛中具器及生也是故經云
006_0790_c_11L世一切劫佛刹及諸法諸根心心法
006_0790_c_12L切虛妄法於一佛身中此法皆悉
006_0790_c_13L普盡十方諸刹海所有一切衆生
006_0790_c_14L佛智平等如虛空悉能現現毛孔
006_0790_c_15L又云一切諸佛於一念中悉能示
006_0790_c_16L現無量世界無量無數淸淨衆生
006_0790_c_17L白紙黑字朱畫皆全相收不可別取
006_0790_c_18L而三物各異如是三種世間融通相
006_0790_c_19L混爲一團而爲門各別歷然不
006_0790_c_20L動也故此一印若以器門觀則是
006_0790_c_21L器海印是故經云花藏世界所有塵
006_0790_c_22L▣▣字體磨滅{底}ㆍ上一字作「等」{乙}ㆍ下一字
006_0790_c_23L或可讀「法」{編}ㆍ高麗大藏經作「善法」{編}
「亦」
006_0790_c_24L無有{乙}
「一一」作「三」{乙}

006_0791_a_01L널리 광명이 부처님을 나타냄이 구름이 모인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여래 세계의 자재함이다.”338)라고 한다. 중생의 문으로써 취하면 곧 중생해인衆生海印이며, 부처님의 문으로써 취하면 곧 불해인佛海印이다. 그러므로 소䟽에서 이르기를, “중생 마음속의 부처님이 부처님 마음속의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고, 부처님 마음속의 중생이 중생 마음속의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것을 듣는다.”339)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단지 국한하여 말하기를 ‘능인해인’이라고만 하는가?
실제를 기준으로 하면 이와 같아서 부처님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망상이 다하여 마음이 맑아지는 뜻을 따라서 임시로 ‘능인해인’이라 이름하였을 뿐이다.

『법계도기총수록』 상권 1

006_0791_a_01L一一塵中見法界普光現佛如雲集
006_0791_a_02L此是如來刹自在以衆生門取則是
006_0791_a_03L衆生海印以佛門取則是佛海印
006_0791_a_04L故䟽云衆生心中佛爲佛心內衆生
006_0791_a_05L說法佛心內衆生聽衆生心中佛說
006_0791_a_06L法也若爾何但局云能人海印
006_0791_a_07L約實如是非局於佛且從妄
006_0791_a_08L盡心澄之義假名能人海印耳第上
006_0791_a_09L之一第四九張

006_0791_a_10L
法界圖記叢髓錄卷上之一
  1. 1)『총수록』에 수록된 『일승법계도』 원문과 상권 1의 「법성게」 30구 해석 번역에서 내용 각주는 ‘일러두기’에서 밝힌 것처럼 해주 외 역주, 한국전통사상서 04, 『정선 화엄 Ⅰ』(대한불교조계종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출판부, 2010)의 각주를 참고하기 바란다. 아래에서는 이와 다르거나 새로 추가한 부분만을 다루고자 하나, 그 중요성이나 난이도에 따라 간혹 중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2)「槃詩」 아래의 「법성게」는 역자가 임의로 번역과 함께 번호를 붙여 이 독서법에 따라 읽어서 이루어지는 30구 210자의 시를 역자가 다시 소개한 것이다. 「법성게」의 주요 용어는 『총수록』 해당 부분에서 주석하기로 한다.
  3. 3)여의를 번다하게 나타냄이 불가사의하다 : 이 구절은 ‘번다하게 나타냄의 여의함이 불가사의하다’ 또는 ‘번다하게 나타냄이 여의하여 불가사의하다’로 해석될 수도 있다.
  4. 4)『총수록』(H6, 768b1).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H6, 768a3~4.
  5. 5)『大記』 : 『총수록』 중 『일승법계도』의 문장에 따라 해석한 이른바 삼대기三大記 가운데 하나로서 『총수록』에 50여 회 인용되어 있다. 『대기』가 저자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는 불확실하다. 단지 인용 문헌 등을 통해 볼 때 대략 9세기 중엽 이후 신라 하대의 의상계 화엄학승이 저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6. 6)지엄智儼 : 602~668. 중국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 출신으로 속성은 조趙이며 12세 때 두순杜順(557~640)에게 출가했다. 지상 대사至相大師, 운화 존자雲華尊者라고도 한다. 두순에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 일컬어지며 화엄종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로는 총 20여 부가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것은 60권 『大方廣佛華嚴經』의 주석서인 『大方廣佛華嚴經蒐玄分齊通智方軌』(이하 『搜玄記』)와 강요서인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이하 『孔目章』) 등 7부이다. 제자로는 의상義湘과 법장法藏 등이 있다. 『총수록』은 지엄의 현존 저술뿐만 아니라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저술을 인용하고 더불어 지엄과 의상과의 문답 등을 전하는 등 지엄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지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기 자료는 법장이 지은 『華嚴經傳記』 중 「智儼傳」(T51, 163b18~164b13)이며, 이외에 부분적으로 지엄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로는 도선道宣(596~667)의 『續高僧傳』 중 「杜順傳」(T50, 653b15~13)과 최치원崔致遠(857~904?)의 『法藏和尙傳』(T50, 280c19~286b7)과 염조은閻朝隱(?~713)의 『大唐大薦福寺故大德康藏法師之碑』(T50, 280b2~c16) 등이 있다. 후대의 자료로는 속법續法(1641~1728)의 『法界宗五祖略記』 등이 있다.
  7. 7)오중해인五重海印 : 화엄교학 전적 가운데 『총수록』에만 보이는 해인설이다. 『대기』에서는 지엄이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지엄은 물론 중국 화엄교학에 그 내용이 보이지 않고 의상계 화엄에서만 전해진다. 의상 또는 의상계 화엄학승이 지엄에게 가탁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기』는 『일승법계도』의 제목, 즉 ‘일승법계’ㆍ‘도’ㆍ‘합시일인’ㆍ‘오십사각’ㆍ‘이백일십자’를 오중해인에 배대시키고 있다. 『대기』는 아래에서 ‘이백일십자’ 「법성게」 내용을 다시 오중해인에 배대시키고, 「법성게」 중 이타행利他行 4구를 또다시 오중해인에 배대시켜서 삼중의 오중해인으로 『일승법계도』 전체를 거두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8. 8)60권 『대방광불화엄경』, 「如來名號品」(K8, 27a5~6; T9, 418b18~19)의 도입 부분으로서, 부처님이 적멸도량寂滅道場 가운데 정각을 이루어서 보광법당普光法堂에 계실 때 보살들이 부처님께 부처님의 나라 등을 보여주시기를 마음속으로 생각하자, 부처님이 그 생각에 따라서 신통력을 나타내시는 구절이다. ※ 이하 60권 『대방광불화엄경』은 『육십화엄』으로, 80권 『대방광불화엄경』은 『팔십화엄』으로, 40권 『대방광불화엄경』은 『사십화엄』으로 약칭한다. 화엄대경을 총칭할 때는 『화엄경』으로 약칭한다.
  9. 9)법장法藏 : 643~712. 속성은 강康으로서 선조는 강거국康居國 출신이다. 호는 현수賢首이며 향상 대사香象大師, 강장 국사康藏國師라고도 한다. 지엄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지엄 입적 후 출가하였다.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로 일컬어진다. 지엄에게서 문지文持라는 호를 받았으며 이를 반영하듯 약 30부 100여 권의 많은 화엄 관계 저술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육십화엄』의 주석서인 『華嚴經探玄記』와 화엄학 입문서로 유명한 『華嚴一乘敎分記』 등이 있다. 『총수록』에서는 법장의 저술을 총 4부 6회 인용하며 『일승법계도』 해석에 보충자료로서 이용하고 있다.
  10. 10)124질문(一百二十四問) : 『육십화엄』 「여래명호품」(K8, 26c17~27a4; T9, 418b5~17)에서 보살들이 부처님께 청한 물음을 가리킨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에서 유裕와 범梵 법사 등이 이 물음을 124가지로 나누었다고 소개한다.(K47, 515b21~24; T35, 168b7~10) 그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화엄경탐현기』『육십화엄』 「여래명호품」질문 수(총 124)
    初十問법신의 자체 행示現佛刹。 示佛所住。 示佛國莊嚴。 示諸佛法。 示佛土淸淨。 示佛所說法。 示佛刹體。 示佛功德勢力。 示隨佛刹起。 示成正覺。10
    中間一百問보신의 수행을 일으키는 행開示十方一切如來所可分別菩薩。 十住。 十行。 十迴向。 十藏。 十地。 十願。 十定。 十自在。 十頂菩薩。90
    隨喜心。 不斷如來性。 救衆生。 滅煩惱。 知衆行。 解諸法。 離垢穢。 拔衆難。 決疑網。 竭愛欲。10
    後十四問방편신의 평등한 행佛無上地。 佛境界。 佛住壽。 佛行。 佛力。 佛無所畏。 佛定。 佛神足。 佛勝法。 佛不動轉。 佛六情根。 佛光。 佛智。佛無上功德一切具足。14
  11. 11)『육십화엄』 중 제2회부터 제6회까지의 법문을 일컫는다.(K8, 26c8~253c10; T9, 418a25~631b5)
  12. 12)법장, 『화엄경탐현기』(K47, 516b16~18; T35, 169b8~10).
  13. 13)『육십화엄』 「입법계품」의 마지막에서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한 설법을 게송으로 다시 설하는 부분 중 일부이다.(K8, 424c2; T9, 788a7) 해당 게송 전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깊은 대해에 진귀한 보배가 끝이 없으며 그중에 중생 부류의 형상을 모두 나타내는 것과 같이, 매우 깊은 인연의 바다에 공덕의 보배가 끝이 없으며 청정한 법신에 나타나지 않는 형상이 없다.(譬如深大海。 珍寶不可盡。 於中悉顯現。 衆生形類像。 甚深因緣海。 功德寶無盡。 淸淨法身中。 無像而不現。)”(K8, 424b25~c2; T9, 788a4~7)
  14. 14)법장, 『화엄경탐현기』(K47, 516b21~22; T35, 169b14~15).
  15. 15)보현普賢 : ⓢ Samantabhadra. 여기서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나타낸다. 보현은 문수文殊(ⓢ Mañjuśri)와 함께 『화엄경』의 양대 보살이다. 행원行願을 상징하며, 『화엄경』의 보살도를 대표해서 보현행이라고도 한다. 의상 또한 「법성게」에서 법계의 연기분을 총설하면서 열 부처님과 함께 보현보살을 들고 있다. 『총수록』에서도 의상이 보현을 중시하는 경향을 계승하고 있다.
  16. 16)처음과 두 번째 해인 : 모습을 잊은 해인(妄想海印)과 모습을 나타낸 해인(現像海印)을 가리킨다.
  17. 17)열 부처님(十佛) : 『화엄경』의 여러 곳〔『육십화엄』(K8, 292a21; T9, 663b18; K8, 185b15; T9, 565b16 등)〕에 보이며, 지엄은 「離世間品」을 근거로 하는 행경십불行境十佛과 「십지품」 제8지에 기반을 둔 해경십불解境十佛의 두 가지 십불설을 확립하였다.〔『공목장』(T45, 559c29 등)〕 의상은 이 가운데 행경십불을 통해 십불을 드러내면서도 융삼세간불融三世間佛을 상징하는 「반시」를 통해 해경십불의 의미 또한 나타냄으로써 이종십불 모두를 거두고 있다. 『총수록』(H6, 834b11~835a22)에서는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일승법계도』에서 언급한 무착불無着佛ㆍ원불願佛ㆍ업보불業報佛ㆍ지불持佛ㆍ화불化佛ㆍ법계불法界佛ㆍ심불心佛ㆍ삼매불三昧佛ㆍ성불性佛ㆍ여의불如意佛 등 십불에 대한 의상의 자세한 설을 소개하고 있다.
  18. 18)정장삼매(淨藏定) : 『육십화엄』 「盧舍那佛品」(K8, 16c19~22; T9, 408b13~16)에서 보현보살이 들어가는 삼매의 이름이 ‘일체여래정장삼매一切如來淨藏三昧’이다. 해당 경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 보현보살이 여래의 앞에서 연화장사자자리에 앉으니 곧 일체여래정장삼매에 들어가 바르게 받아서, 일체 법계의 모든 여래의 몸을 두루 비춤에 걸리는 바가 없으며 허물을 여의어 만족되어서 허공과 같았다.(爾時。 普賢菩薩。 於如來前。 坐蓮華藏師子之座。 卽入一切如來淨藏三昧正受。 普照一切法界諸如來身。 無所障礙。 離垢滿足。 猶如虛空。)”
  19. 19)오교五敎 : 화엄교학의 교판 중 하나이다. 오교의 구체적인 항목은 여러 가지이니, 인천(人天, 혹은 世間), 소승小乘, 대승大乘(始敎ㆍ終敎ㆍ頓敎), 일승一乘을 어떻게 거두는가에 따른 차이이다. 『대기』에서는 오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후에 사섭四攝ㆍ사무량四無量을 소승ㆍ시교ㆍ종교ㆍ돈교ㆍ일승의 분제를 통해 풀이하는 구절〔『총수록』(H6, 794b16~795a6)〕 등을 볼 때 『대기』의 오교는 ① 소승교, ② 대승시교, ③ 대승종교, ④ 돈교, ⑤ 일승교임을 추정할 수 있다.
  20. 20)오주인과五周因果 : 중국 화엄종에서 『화엄경』의 근본종지로 내세운 ‘인과연기이실법계因果緣起理實法界’를 다섯 가지 인과로 구분한 것이다. 법장의 『화엄경탐현기』(K47, 470b13~24; T35, 120a28~b12)에 의거하여 『육십화엄』의 34품을 오주인과에 배대하면 다음 표와 같다.
    오주인과『육십화엄』
    所信因果盧舍那佛品(蓮華藏世界分 : 果, 普莊嚴童子分 : 因)
    成解因果差別因果如來名號品~佛小相光明功德品(如來名號品~菩薩住處品 : 因, 佛不思議法品~佛小相光明功德品 : 果)
    平等因果普賢菩薩行品 : 因, 寶王如來性起品 : 果
    成行因果離世間品(先分 : 因, 後分 : 果)
    證入因果入法界品(祇樹給孤獨園分 : 果, 善財童子分 : 因)
  21. 21)신림神琳 : 8세기 중엽 활약한 대표적인 의상계 화엄학승이다. 자세한 전기는 전하지 않지만 의상―상원相元―신림으로 이어지는 의상의 제3세 부석적손으로 추정된다. 의상의 직제자들과는 달리 입당入唐하여 융순融順과 문답을 나눈 기록이 있다. 『총수록』(H6, 798c23~799a2). 신림의 교설은 균여均如(923~973)의 저술에 20여 회, 『총수록』에 10여 회나 인용되는 등 후대 화엄사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자로는 법융法融ㆍ숭업崇業ㆍ융수融秀ㆍ질응質應ㆍ대운 법사 군大雲法師君 등이 알려져 있다.
  22. 22)삼승三乘 : 일반적으로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을 통틀어 가리키지만 소승, 일승과 대비되어 함께 사용되는 이 구절에서는 대승시교大乘始敎, 대승종교大乘終敎, 돈교頓敎를 가리킨다. 지엄, 『공목장』(T45, 537b13~19) 등.
  23. 23)일승一乘 : ⓢ ekayāna. 오직 하나의 수레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하나라는 의미이다. 화엄교학에서는 이 일승을 삼승과 일승이 융회해서 같다는 상대적 견지의 동교일승同敎一乘과 삼승과 다르다는 의미, 즉 삼승을 초월한다는 절대적 견지의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 구별하여, 화엄교학을 별교일승에 해당시킨다.
  24. 24)오계五戒 : ⓢ pañcaśīlāni. 재가남녀가 평소에 지니는 다섯 가지 계이다. 구체적으로는 ①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不殺生), ② 도둑질하지 않는 것(不偸盜), ③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不邪婬), ④ 올바르지 않은 말을 하지 않는 것(不妄語), ⑤ 음주를 하지 않는 것(不飮酒)이다. 『長阿含經』(K17, 831b12~21; T1, 14c2~10), 『四分律』(K23, 49b7~9; T22, 601b11~12),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K22, 3c2~5; T23, 628a17~20 등).
  25. 25)팔계八戒 : ⓢ aṣṭāṅgasamanvāgatopavāsa. 재가 남녀가 정해진 날(六齋日)에 세속의 집을 떠나 승원에 하루 낮밤을 머물면서 출가생활을 가까이 하며 지키는 여덟 가지의 계로서 팔관재계八關齋戒ㆍ팔계재八戒齋ㆍ팔재계八齋戒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는 오계의 항목에 ⑥ 꽃 등으로 장식하고 가무를 즐기지 않음(不著華香瓔珞不歌舞倡伎亦不往觀聽), ⑦ 화려하고 고급스런 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눕지 않음(不高廣床上坐), ⑧ 때 아닌 공양을 하지 않음(非時不食)을 더한 것이다. 『中阿含經』 「持齋經」(K18, 256a6~260a16; T1, 770a16~773a1 등). 이것은 출가자 가운데 사미ㆍ사미니가 지니는 십계 중 돈이나 보물 등에 손을 대지 않는 계(不著金銀珍寶)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 계를 여덟 가지로 구성한 것이다.
  26. 26)삼도三途 : 중생이 자신의 악업으로 인해 가게 되는 세 갈래 길을 의미하며 삼도三塗ㆍ삼악도三惡道ㆍ삼악취三惡趣와 같은 뜻이다. 즉 지옥중생과 아귀와 축생, 또는 그 장소를 일컫는다.
  27. 27)『法融大德記』 : 법융이 지은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으로 『총수록』 삼대기 중 하나이며 총 48회가 인용되어 있다. 법융은 의상―상원相元―신림神琳―법융으로 이어지는 의상의 적손嫡孫으로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엄학승이다. 고려시대 균여는 『十句章圓通記』(H4, 40a10~18)에서 지엄의 십구에 주석을 가한 『십구장』이 법융의 저술이라는 일설을 전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일승법계도』의 문장을 따라서 해석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증분證分과 법성法性에 대한 언급이 대단히 많아서 법융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28. 28)본말상생문本末相生門 : 현존하는 지엄의 저술 중에는 ‘본말상생문’으로 명명된 구절이 보이지 않는다. 『법기』가 현존하지 않는 지엄의 저술 중에 있던 ‘본말상생문’을 가리킨 것인지 아니면 ‘본말상생문’으로 명명되어 있지 않지만 뜻을 취하여 그렇게 지칭한 것인지 확정하기 어렵다.
  29. 29)일자의 도장(一字印) : 법융 당시에 『화엄경』이나 지엄의 저술, 또는 다른 화엄교학 문헌에 ‘一’ 자 모양의 도장을 찍어 놓은 것을 가리킨다.
  30. 30)오권소五卷疏 : 지엄의 저술 중 5권으로 된 『수현기』를 일컫는다.
  31. 31)삿됨을 대치하고 올바름을 나타내는 곳(對邪現正之處) : 『수현기』에 ‘對邪現正’이라는 명목의 장이나 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삿됨을 대치하고 올바름을 나타내는 곳이 『육십화엄』 「보현보살행품」 중 60문의 보행과 백만의 장애 등을 통해 설명되는 것을 볼 때 「보현보살행품」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32. 32)60문의 보행(六十門普行) : 『육십화엄』 「보현보살행품」(K8, 231a3~c4; T9, 607b25~608a19)에서 보살이 닦고 얻는 여섯 가지의 10종 행을 일컫는다. 여섯 가지는 ① 바른 법(正法), ② 청정한 법(淸淨之法), ③ 바른 지혜(正智), ④ 교묘히 수순하여 들어감(巧隨順入), ⑤ 올곧은 마음(直心), ⑥ 모든 부처님의 교묘한 방편법(諸佛巧方便法)이다. 지엄은 『공목장』(T45, 580b27~c1)에서 이를 「보현품」의 60행이라고 설한다. 또 『수현기』(K47, 59c5~13; T35, 79b2~11)에서는 오주인과의 평등인과 중 인因에 해당하는 「보현보살행품」 가운데 앞의 50행을 인행, 뒤의 10행을 인因 중의 과果라고 풀이한 후 전자는 십신十信부터 십지十地까지의 지위에 배대하고, 후자는 법法ㆍ보報ㆍ화化의 삼신과三身果에 배대하고 있다.
  33. 33)보살이 한 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백만의 장애를 이룬다는 내용은 『육십화엄』 「보현보살행품」(K8, 230b10~12; T9, 607a12~15)에서 다음 구절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불자야! 보살마하살이 한 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일체의 악 중에 이 악보다 더한 것이 없다. 왜 그런가? 불자야! 보살마하살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 백천의 장애되는 법문을 받는다.(佛子。 若菩薩摩訶薩起一瞋恚心者。 一切惡中無過此惡。 何以故。 佛子。 菩薩摩訶薩起瞋恚心。 則受百千障礙法門。)”
  34. 34)삼세간三世間 : 온 법계를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의보依報에 해당하는 기세간器世間과 정보正報의 중생세간衆生世間과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을 가리킨다. 『일승법계도』(H2, 1b4~7).
  35. 35)『入法界品抄』 : 1권. 지엄의 저술로서 현재는 전해지지 않으나 그 명목은 균여의 『一乘法界圖圓通記』(H4, 38a14~16)와 의천義天의 『新編諸宗敎藏總錄』(T55, 1167b3) 등에 보인다. 의천의 기록(T55, 1167b4)에 의하면 의상은 이 저술에 대한 주석인 『入法界品鈔記』를 남겼다고 한다.
  36. 36)여덟 가지의 근본죄 : 이에 대해서는 아래 본문의 『입법계품초』 인용문 참조.
  37. 37)육상六相 : 총상總相(ⓢ sāṅga)ㆍ별상別相(ⓢ upāṅga)ㆍ동상同相(ⓢ salakṣaṇa)ㆍ이상異相(ⓢ vilakṣaṇa)ㆍ성상成相(ⓢ vivarta)ㆍ괴상壞相(ⓢ saṃvarta)을 가리키며, 화엄교학에서는 이 육상이 원융하다는 육상원융이 십현연기와 함께 법계연기를 드러내는 주요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이 육상의 명목은 『십지경』과 『팔십화엄』에 보이며, 『육십화엄』에서는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유상有相ㆍ무상無相ㆍ유성有成ㆍ유괴有壞로 번역되어 있다. 세친世親, 『十地經論』(K15, 23c20~24a4; T26, 139a14~20), 『팔십화엄』(K8, 636c20~25; T10, 181c23~28), 『육십화엄』(K8, 165c22~166a5; T9, 545b25~c3). 세친은 『십지경론』(K15, 3a22~3c13; T26, 124c3~125a6)에서 육상의 의미를 자세하게 밝히고, 경에서 설해진 모든 열 구절에 이 육상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도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사事는 제외시킨다. 이후 지론종의 정영사淨影寺 혜원慧遠(523~592)은 세친의 육상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사상事相을 따르면 육상에서 사事는 제외되지만, 체의 뜻(體義)을 따르면 모든 사법에 육상의 문門을 갖춘다고 설하여 육상의 범주를 모든 법으로 확장시킨다. 『大乘義章』(T44, 524a1~b16). 이후 지엄은 세친의 육상설을 혜원의 입장에서 받아들인다. 『수현기』(K47, 48a15~22; T35, 66b9~19). 의상은 『일승법계도』(H2, 7c9~10)에서 도인圖印의 비유를 통해 육상의 뜻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세친과 혜원과 지엄의 설에 의거하고 있으나, 이 육상설을 무분별無分別 부주不住의 중도의中道義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38. 38)열 보법(十普法) : 보법은 두루하여 원만하지 않음이 없는 법으로 『화엄경』 곳곳에서 설해진다.(K8, 346b21~c3; T9, 713c20~26 등) 화엄종에서는 화엄교 전체를 보법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보법 내지 열 보법의 용례는 『총수록』 전 부분에 걸쳐서 보인다. 『법기』(H6, 793c6~12)는 열 보법을 「普法章」에 의거해서 설명하는데, 이 「보법장」은 지엄의 『공목장』 중 「初會十門料簡一經意」(T45, 536c20~537a17)를 가리킨다. 『대기』는 열 보법을 「보법장」에서는 5대五對 10법十法으로, 법장의 『화엄경탐현기』(H6, 842a13~843b19)에서는 10대 20법으로 나누는 등 논서에 따라서 구체적인 항목이 다르지만 두 가지 모두 열고 합함(開合)의 차이일 뿐 뜻에 증감은 없다고 한다. 이들 열 보법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에서 (6)~(10)은 10대인 경우 후 5대를 가리킨다.(*卍은 CBETA에서는 R로 표기된 것임. 이하 동일)
    구분12345
    (6)(7)(8)(9)(10)
    『수현기』T35, 15a29~b24敎義理事解行因果人法
    分齊境位師弟法智主伴依正逆順體用自在隨生根欲示現
    『공목장』T45, 536c20~537a17人法理事義文解行因果
    『일승법계도』H2, 8a9~b5人法理事敎義解行因果
    『일승십현문』T45, 515b17~c26敎義理事解行因果人法
    分齊境位法智師弟主伴依正逆順體用隨生根欲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c22~505a10敎義理事解行因果人法
    分齊境位師弟法智主伴依正隨生根欲示現逆順體用自在
    『화엄경탐현기』K47, 473a24~b6T35, 123a27~b8敎義理事境智行位因果
    依正體用人法逆順應感
    『속화엄경약소간정기』* 卍5, 41b11~42a12人法理事境智行位因果
    『대방광불화엄경소』T35,514a16~24敎義理事境智行位因果
    依正體用人法逆順應感
  39. 39)이 여덟 가지 근본죄에 대한 내용은 『虛空藏菩薩經』(K7, 806a15~808b17; T13, 652c5~654a24)에서 일부 구절의 뜻을 취한 것이다.
  40. 40)오탁의 세상(五濁世) : 말법의 시기로서 다섯 가지 혼탁함(五濁, ⓢ pañcakaṣāyāḥ)이 가득 찬 시대를 가리킨다. ① 겁탁劫濁은 뒤의 네 가지 혼탁함에 의해 시대가 혼탁한 것을 총칭하고, ② 견탁見濁은 삿된 견해가 만연하는 것이고, ③ 번뇌탁煩惱濁은 탐진치貪瞋癡 등의 각종 번뇌가 가득 차는 것이고, ④ 중생탁衆生濁은 견탁과 번뇌탁 등에 의해 중생의 근기가 저열해져서 마음과 신체의 복덕 등이 감소하는 것이고, ⑤ 명탁命濁은 견탁과 번뇌탁 등에 의해 중생의 수명이 100세 이하로 줄어드는 것이다. 지엄은 『공목장』 「五濁章』(T45, 551a14~24)에서 오탁이 소승에는 있지만 초교初敎에서는 공이며 종교終敎는 진여이고 일승에 의하면 곧 법계라고 설한다.
  41. 41)전다라旃陀羅 : ⓢ caṇḍāla. ‘旃茶羅’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의 사성제도 바깥에 있는 천한 계급으로 불가촉천민을 일컬으며, 도살 즉 살생을 업으로 삼는 부류와 옥졸 등을 가리킨다. 혜림慧琳, 『一切經音義』(K42, 17b2~4; T54, 315b16~18 등).
  42. 42)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 ⓢ Ākāśagarbha, Gaganagañja. 법보法寶를 보시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함이 광대하고 무량하여 허공과 같으므로 이를 허공에 비유한 것이다. 『大方等大集經』(K7, 158c4~20; T13, 108a13~26), 징관澄觀(738~839)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이하 『청량소초』)(T36, 145c13~15) 등. 『허공장보살경』에 의하면 사바세계의 서쪽에 있는 ‘일체향집一切香集’이라는 국토에 ‘승화부장勝華敷藏’이라는 여래가 계시고 그곳에 허공장보살이 머물다가 이곳 사바세계에 석가모니부처님이 출현하여 설법을 하시자 그것을 들으러 사바세계에 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육십화엄』 「입법계품」(K8, 303b4~13; T9, 676a6~15)에서는 근본법회에 참여하는 보살로서 등장한다. 또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역참하는 제40번째 선지식인 묘덕원만천妙德圓滿天은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나게 되는 열 가지 방법 중 세 번째로 방편을 현전시켜서 적멸寂滅을 관찰하는 허공장보살이 태어나는 법(現前方便觀察寂滅虛空藏菩薩受生法)을 설하고 있다.(K8, 385b19~386a14; T9, 751a1~b17)
  43. 43)아홉 번째 지地 : 아홉 번째 지地는 선혜지善慧地로서 사무애지四無礙智(法無礙ㆍ義無礙ㆍ辭無礙ㆍ樂說無礙)를 얻어 대법사가 되는 지위이다. 『육십화엄』(K8, 189a9~18; T9, 569a28~b8).
  44. 44)『眞秀大德記』 : 『일승법계도』에 대해 진수眞秀가 지은 주석으로서 『총수록』의 삼대기 중 하나이다. 『眞秀德記』, 『眞秀記』, 『眞記』라고도 하며, 『총수록』에 총 24회 수록되어 있다. 『진수기』에는 지엄, 법장, 그리고 고덕古德의 설이 인용되어 있으며 대체로 신라 하대의 저술로 추정된다. 다른 삼대기와 마찬가지로 『일승법계도』 전체를 법성성기法性性起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어서 의상계 화엄의 법맥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5. 45)백구의 진여(百句如) : 『육십화엄』 「金剛幢菩薩迴向品」(K8, 142a4~146a10; T9, 524b19~528b4) 가운데 여덟 번째, 진여의 모습인 회향(如相迴向)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엄은 이를 해석하여 ‘일백구문一百句文’ 또는 ‘백구여百句如’라고 풀이한다. 『수현기』(K47, 30a26~28; T35, 46a17~18), 『공목장』(T45, 558c16~559a24).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611a7~8; T35, 270b13~14)에서 이에 대해 ‘백구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 경문을 검토해 보면 99구라고 밝히고 있다. 참고로 이에 해당하는 『팔십화엄』(K8, 611a4~616a25; T10, 160c25~165a28)의 구절은 105구이다.
  46. 46)정명의 침묵(淨名默) : 『維摩經』 「入不二法門品」에서 정명 거사가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이 무엇인가에 대한 31보살과 문수보살의 설명에 대해 본인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한 것을 가리킨다. 정명은 유마힐維摩詰(ⓢ Vimalakīrti)의 의역어이다. 『유마경』은 범본이 현존한다. 한역본으로는 오吳의 지겸支謙(3세기 중반 활동)이 번역한 『佛說維摩詰經』과 요진姚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406년 역출한 『維摩詰所說經』과 당唐의 현장玄奘이 한역한 『說無垢稱經』 등 3종이 있으며 티베트역본도 2종이 남아 있다.
  47. 47)아홉 법회에서의 부처님의 침묵 : 일곱 장소 아홉 법회에서 설해진 『팔십화엄』의 교주인 부처님의 침묵을 가리킨다. 『팔십화엄』에서 부처님은 광명으로만 설법하시고 각 회나 품마다 대표되는 보살이 설주가 되어 다시 한번 언설로 법을 설한다.(단 「阿僧祇品」과 「如來隨好光明功德品」의 두 품은 부처님께서 직접 언설로 설하신다.)
  48. 48)망정을 돌이켜 보는 자리(反情見處) : 이와 관련하여 도신 스님이 의상의 강의를 받아 적은 「道身章」의 다음 구절들이 참조된다. “도신장에 이른다. 일승의 연기법은 망정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 비록 망정으로 미치지는 않지만 멀리서 구할 것도 아니다. 망정을 돌이키면 곧 이것이다. 문 망정을 돌이키는 방편은 무엇입니까? 답 방편은 한량없지만 그 요긴한 것은 보는 자리를 따라서 마음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고, 듣는 법을 따라서 문장대로 취하지 않으면 곧 그 말미암은 바를 깨달을 수 있으며, 또 법의 실상을 깨닫는다.(道身章云。 一乘緣起法。 非情所及。 雖非情及。 而不遠求。 反情卽是。 問。 反情方便云何。 答。 方便無量。 而其要者。 隨所見處不着心爲是。 隨所聞法不取如文。 卽能解其所由。 又解法實相。)”(H6, 827b8~13); “신림 대덕이 네 개의 생멸로써 (십중 십이인연관을) 풀이하였다. 말하자면 앞의 (여덟은) 인연생멸이고, 아홉 번째는 연기생멸이고, 열 번째는 성기생멸이고, 망정을 뛰어넘어 보는 자리는 무주생멸이다.(林德以四生滅釋也。 謂前因緣生滅。 第九緣起生滅。 第十性起生滅。 越情見處。 無住生滅也。)”(H6, 818a17~20)
  49. 49)일一이란 다른 것이 없다(無他)는 의미로서 일一 자의 세 가지 뜻은 ① 보현교분, ② 보현증분, ③ 성해과분의 세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①은 연緣이 하나이니 중도와 진여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이름과 모습이 없지 않다. ②는 보현의 깨달음을 기준으로 하면 이름과 모습이 없다. 이름과 모습 가운데 이름과 모습이 없는 것이다. ③은 처음부터 이름과 모습을 보지 않는다. 망정을 돌이켜 보는 진리이다.
  50. 50)성해의 과분(性海果分) : 법장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77a13~19)에서 일승을 별교와 동교로 나눈 후 별교를 다시 성해의 과분과 연기의 인분(緣起因分)으로 구분한다. 성해의 과분에 대해서 법장은 말로 할 수 없으니 가르침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곧 열 부처님의 경계라고 설명한다. 의상계에서 열 부처님은 「법성게」 제30구에 보이듯이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 경계(舊來不動)이므로 열 부처님의 경계인 성해의 과분은 곧 움직이지 않음을 승의 뜻으로 삼는다.
  51. 51)무기無記 : ⓢ avyākṛta. 선善, 불선不善(또는 惡)과 함께 일체법의 성품을 구별하는 삼성三性의 하나이다.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니기 때문에, 또는 선과 악의 과보인 이숙과異熟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무기라고 한다. 세친, 『阿毘達磨俱舍論』(K27, 462a5~6; T29, 7b16~17). 『총수록』 『법융기』(H6, 772a23~b6)에서는 삼승에 따르면 선ㆍ악ㆍ무기이지만 일승에서는 오직 선일 뿐이며, 이것은 곁이 없는 뜻(無側義)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52. 52)명언종자名言種子 : 명언에 의해 훈습되어 이루어진 종자를 가리킨다. 마음이 대상을 인식할 때 언어를 연상하면서 행동함으로써 훈습된 종자를 가리킨다.
  53. 53)지엄이 73개의 도인을 지었고 의상이 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근본인을 만들었다는 설은 현존 자료 가운데 이곳 『법융기』에서만 보인다. 그러나 『총수록』 『대기』(H6, 771b12~16; H6, 794b18~19)에서도 73개의 도인과 하나의 근본인의 관계를 두 번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의상계에 73개의 도인과 하나의 근본인에 대한 전승이 있었던 것은 확인할 수 있다.
  54. 54)『일승법계도』(H2, 1b10~11; H6, 791b11~12).
  55. 55)열 가지 음성(十種音) : 『육십화엄』 「보왕여래성기품」(K8, 241a3~244c9; T9, 618c16~622b11)에서 여래가 출현하는 열 가지 법 가운데 세 번째 여래의 음성 열 가지를 가리킨다.
  56. 56)오승五乘 : 화엄 문헌에서 오승과 그에 포함되는 삼승은 문맥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을 달리 하지만 여기에서 오승은 삼승三乘ㆍ소승小乘ㆍ인천승人天乘을 가리킨다. 『총수록』 「대기」(H6, 824c20~21 등). 삼승은 대승시교大乘始敎ㆍ대승종교大乘終敎ㆍ돈교頓敎이다. 상권 1 각주 19) 참조.
  57. 57)55선지식 :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로부터 보현보살에 이르기까지 만나서 가르침을 얻는 선지식들을 가리킨다. 보통은 53선지식이라고 하나 문수보살을 두 번 만나고 덕생동자德生童子와 유덕동녀有德童女를 한 곳에서 함께 만나므로 55선지식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58. 58)두 문수보살 :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만나는 선지식 중 문수보살은 두 번, 즉 맨 처음과 52번째의 미륵보살 다음에 다시 만난다. 『육십화엄』(K8, 315c14~ 317c9; T9, 687c7~689c16; K8, 420b23~420c15; T9, 783b27~783c15).
  59. 59)『화엄경』 「이세간품」은 『육십화엄』의 경우, 세존께서 마갈제국 아란야법보리장의 보광명전에서 연화장사자좌에 앉아 계실 때 한량없는 보살들과 함께하셨는데 그 가운데 보혜보살普慧菩薩이 2백 가지의 물음을 보현보살에게 하자 보현보살이 그 2백 가지의 물음에 열 개씩 총 2천 개의 답을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60. 60)보혜보살普惠菩薩 : 『화엄경』 「이세간품」에서는 보혜보살普慧菩薩이다. 『육십화엄』(K8, 254b5; T9, 631c22), 『팔십화엄』(K8, 754a23; T10, 279b19).
  61. 61)열 개의 동전 비유(十錢喩) :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비유(數十錢喩)를 가리킨다. 의상이 연기실상다라니법을 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일승법계도』(H2, 6a22~7a9).
  62. 62)열 보법(十普法) : 상권 1 각주 38) 참조.
  63. 63)십현十玄 : 십현문十玄門을 일컫는다. 의상이 일승과 삼승의 분제를 구분할 때 의거하였다. 『일승법계도』(H2, 8a9~b7).
  64. 64)『淸涼䟽』 : 청량 징관淸涼澄觀이 80권 『화엄경』을 주석(784~787)한 『大方廣佛華嚴經疏』 60권을 가리킨다. 이 『청량소』에 대한 주석서로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가 있다. 징관은 속성이 하후夏候이고 자는 대휴大休이며, 청량은 당唐 덕종德宗으로부터 받은 호이다. 11세에 보림사寶林寺 패선사霈禪師에게 출가한 이래 여러 스승에게서 사사하였다. 『사십화엄』의 번역에 참여하였고, 이에 대한 주석서인 『貞元新譯華嚴經疏』를 지었다. 저술은 400여 권 이상이었다고 전하나 현존하는 것은 40여 종이다. 『총수록』에서는 징관의 저술 가운데 『청량소』 4회, 『貞元新譯華嚴經疏』 2회, 『十二因緣觀』 1회, 『華嚴略策』 1회를 인용하고 있다. 징관은 당의 현종玄宗에서 문종文宗까지 9조朝를 거치면서 일곱 왕의 왕사, 국사로서 존숭받았다. 징관의 전기 자료로는 배휴裵休(787?~860?)가 왕의 명령으로 지은 「妙覺塔記」(『華嚴玄談會玄記』 수록본, 卍12, 7a15~9a13)와 『송고승전』 「唐代州五臺山淸涼寺澄觀傳」(T50, 737a4~c20) 등이 있다.
  65. 65)『청량소』가 『화엄경』을 총 십문十門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가운데 아홉 번째 『화엄경』의 제목을 다시 열 가지로 풀이하는 부분이다.
  66. 66)징관, 『청량소』(T35, 526a19~26).
  67. 67)여기에 생략된 부분에 대해서는 『청량소초』(T36, 122c26~123a4)의 다음 구절이 참조된다. “言乃至不出九會者。 乃至二字略後五重。 不出九會。 是第四節耳。 若具應云。 一卷無盡時處。 歸異類界塵。 二卷異類界塵。 歸異類界。 三卷異類界。 不出同類界塵。 四卷同類界塵。 不出同類刹主伴經。 五卷主伴不出主經。 結遍十方。 六卷遍十方不出九會。 七歸初會。 八歸總題。 九歸理智。 十歸淸淨法界。”
  68. 68)『총수록』(H6, 771c11).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5; H6, 768a5.
  69. 69)아래 사교(下四敎) : 화엄교학의 교판敎判 가운데 하나인 오교五敎 중에서 마지막 일승교一乘敎 아래의 네 가르침인 ① 소승교小乘敎, ② 대승시교大乘始敎, ③ 대승종교大乘終敎, ④ 돈교頓敎를 가리킨다.
  70. 70)삼신三身 : ⓢ trayaḥ kāyāḥ. 불신佛身을 세 종류로 나눈 것으로 삼신불三身佛, 삼불三佛이라고도 한다. 이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항목과 내용은 경론에 따라서 다양하다. 『총수록』 『법융기』는 바로 아래에 ‘자수용’을 언급하고 있는 점과 전반적인 문헌 인용 경향을 볼 때 무착無著(ⓢ Asaṅga 4, 5세기경)의 『攝大乘論』에 의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섭대승론』(K16, 1076c10~24; T31, 129c2~10)은 모든 한역본에 삼신이 자성신自性身(ⓢ svābhāvikakāya)ㆍ수용신受用身(ⓢ sāmbhogikakāya)ㆍ변화신變化身(ⓢ nairmāṇikakāya)으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자성신은 여래의 법신으로서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함의 의지처가 된다. 수용신은 여러 부처님의 갖가지 설법의 모임에 나타나는 불신으로서 법신을 의지처로 하며 청정한 불국토와 대승의 법락을 받아들이기에 수용신이라고 일컫는다. 변화신은 법신을 의지처로 삼으며, 도솔천으로부터 이 세계에 태어나 여러 모습을 보이는 불신을 가리킨다.
  71. 71)십신十身 : 열 부처님(十佛)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상권 1 각주{열 부처님(十佛) : 『화엄경』의 여러 곳〔『육십화엄』(K8, 292a21; T9, 663b18; K8, 185b15; T9, 565b16 등)〕에 보이며, 지엄은 「離世間品」을 근거로 하는 행경십불行境十佛과 「십지품」 제8지에 기반을 둔 해경십불解境十佛의 두 가지 십불설을 확립하였다.〔『공목장』(T45, 559c29 등)〕 의상은 이 가운데 행경십불을 통해 십불을 드러내면서도 융삼세간불融三世間佛을 상징하는 「반시」를 통해 해경십불의 의미 또한 나타냄으로써 이종십불 모두를 거두고 있다. 『총수록』(H6, 834b11~835a22)에서는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일승법계도』에서 언급한 무착불無着佛ㆍ원불願佛ㆍ업보불業報佛ㆍ지불持佛ㆍ화불化佛ㆍ법계불法界佛ㆍ심불心佛ㆍ삼매불三昧佛ㆍ성불性佛ㆍ여의불如意佛 등 십불에 대한 의상의 자세한 설을 소개하고 있다.}과 아래의 『청량소』 인용문 참조.
  72. 72)자수용自受用 : 상권 1 각주 70) 참조.
  73. 73)『청량소』에서 『화엄경』을 총 십문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가운데 첫 번째 『화엄경』이 일어난 인연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74. 74)징관, 『청량소』(T35, 505c17~506a22).
  75. 75)사바세계娑婆世界 : ⓢ sahālokadhātu. 사바娑婆는 사하沙訶, 삭하索訶 등이라고도 한다. 감인堪忍, 능인能忍 등으로 의역하며, 참고 견디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세계라는 뜻이다. 예토穢土의 하나이며 현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중생교화를 펼치는 세계이다.
  76. 76)비로자나부처님(遮那) : ⓢ Vairocanabuddha. ‘Vairocana’는 ‘vi-√ruc’에서 변화한 것으로 ‘널리 비춤’, ‘두루 빛남’ 등을 의미한다. 징관은 『청량소』(T35, 535c24~536a1)에서 ‘毘盧遮那’의 ‘毘’를 두루함(遍)으로, ‘盧遮那’를 광명을 비춤(光明照)의 뜻으로 풀이하여 전체로는 광명을 두루 비춤(光明遍照)으로 해석하였다. 이때의 빛(光)에는 몸의 빛(身光)과 지혜의 빛(智光)이 있어서 이 둘을 합하여 비로자나의 한 몸을 이룬다고 설한다. 십불十佛을 『화엄경』의 주불主佛로 본 지엄이나 법장과는 달리 징관은 비로자나부처님을 『화엄경』의 주불로 보았다. 또한 징관은 『청량소초』(T36, 28b24~c17)에서 이 구절에 대해 화엄교 이외의 교敎에서는 비로자나부처님이 진법신眞法身이고 석가모니부처님이 응화신應化身이지만 화엄교에서는 진법신인 비로자나부처님과 응화신인 석가모니부처님이 상즉상융한다고 한다.
  77. 77)연화장蓮華藏세계 : ⓢ Kuṣmatalagarbhavyūhālaṃkāralokadhātusamudra, Padmagarbhalo kadhātu. 화장장엄세계해華藏莊嚴世界海를 가리킨다. 『팔십화엄』 「華藏世界品』(K8, 470c4~8; T10, 39a16~20)에서는 이 세계에 대해 비로자나부처님이 예전에 보살행을 닦을 때 무수한 겁 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가까이 모신 곳이며 무수한 행원行願으로 장엄한 곳이라고 설한다. 징관은 『청량소』(T35, 505b7~16)에서 『화엄경』이 설해지는 장소(說處)를 마갈제국 등의 예토穢土라고 하는 설과 화장장엄세계해의 정토淨土라고 하는 설을 소개한 후 『화엄경』의 근본 종지에 따라서 두 종류의 4구四句로 설명한다. 즉 『화엄경』의 설처는 혹은 예토이며, 혹은 정토이며, 혹은 예토이면서 정토이며, 혹은 예토와 정토 모두 아니라고 하여 정토와 예토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설한다.
  78. 78)『팔십화엄』 「如來出現品」(K8, 740a8~9; T10, 268a3~4), “모든 부처님께서 몸을 나투시는 것 또한 이와 같으니, 일체 시방에 두루하시지 않음이 없다. 그 몸이 무수하여 일컬을 수 없으나 또한 몸을 나눈 것도 아니고 나누어 달리한 것도 아니다.(諸佛現身亦如是。 一切十方無不遍。 其身無數不可稱。 亦不分身不分別。)”
  79. 79)이 첫 번째 십신十身은 『팔십화엄』 「십지품」(K8, 659a13~15; T10, 200a20~22)에 나온다.
  80. 80)이 두 번째 십신十身도 『팔십화엄』 「십지품」(K8, 659b3~5; T10, 200b5~7)에 나온다. 위 첫 번째 십신 가운데 일곱째 여래신을 다시 열 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81. 81)『八識規矩略說』 권1(卍55, 412a15~16), “三性者。 善性惡性無記性。 無記者。 於善惡二性無可記別。” 지욱, 『楞伽經義疏』 권4(卍17, 594b24~c2), “疏曰。 能爲此世他世順益。 名爲善法。 通於有漏無漏。 能爲此世他世違損名不善法。 唯是有漏。 於善不善無可記別。 名無記法。” 등이 참조된다.
  82. 82)『수현기』(K47, 2a15~17; T35, 14c23~25)에서 『화엄경』의 제목 가운데 ‘方’을 풀이하는 부분이다. “言方者。 圓通之致。 處無不善。 觸緣斯順。 不擇物而施。 故曰方。”
  83. 83)숙교熟敎 : 종교終敎라고도 한다. 종교는 화엄종에서 내세우는 오교의 하나이며, 대승 종극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경론으로는 주로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능가경』ㆍ『승만경』ㆍ『究竟一乘寶性論』ㆍ『大乘起信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84. 84)돈교頓敎 : 점차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언어와 사유분별을 떠나 단박에 깨닫는 가르침 또는 그것을 종지로 하는 교파敎派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점교는 낮은 경지에서 차례로 순서를 따라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가르침 또는 교파를 가리킨다. 돈교와 점교에 해당하는 경론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각 종파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 지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점교漸敎ㆍ돈교頓敎ㆍ원교圓敎로 나눈 후, 『화엄경』을 돈교와 원교에 해당시킨다. 『수현기』(K47, 1a20~c25; T35, 13c16~14c3), 『공목장』(T45, 558c16~559a24). 한편 법장은 『화엄경』을 원교에만 배대시켰다. 『화엄경탐현기』(K47, 466a13~28; T35, 115c4~20). 의상은 『일승법계도』(H2, 8b2~5)에서 지엄의 『수현기』를 인용하여, 십현문十玄門에 완전히 상응하는 가르침을 원교 또는 돈교에 해당한다고 설한다.
  85. 85)원교圓敎 : 부족함이 없는 원만한 가르침을 뜻한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어느 종파의 교판敎判이냐에 따라 구체적인 경론은 다르더라도 자종의 소의경론을 가장 훌륭한 가르침인 원교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지엄은 화엄을 일승원교라 일컬었으며, 의상은 화엄의 가르침을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에 해당시킨다.
  86. 86)언어로 지니는 가르침(文持敎) :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498a26~27; T35, 149c20~22)에서 장항長行(산문)은 풀어서 해설하여 바른 이해를 내기 때문에 뜻을 지님(義持)이 성취되고, 게송은 총섭하여 받아 지니기 쉬우므로 언어로 지님(文持)이 성취된다고 하며 의지義持와 문지文持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87. 87)『旨歸章』 : 법장이 『화엄경』의 개요를 열 문으로 나누어 설명한 『華嚴經旨歸』(1권)를 일컫는다. 이에 대한 주석서로는 균여의 『釋華嚴旨歸章圓通鈔』(2권)(이하 『지귀장원통초』)가 대표적이다.
  88. 88)『화엄경지귀』(T45, 589c6~596c24) 전체 열 문 가운데 여기에서는 각 문의 대의와 각 문을 다시 열 문으로 나눈 항목만을 소개하고 있다.
  89. 89)노사나불盧舍那佛 :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가리킨다. 상권 1 각주 76) 참조.
  90. 90)염부제閻浮提 : ⓢ Jambudvīpa. 고대 인도인의 우주관에서 수미산須彌山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땅 가운데 남쪽의 땅을 일컬으며 이곳에만 인간이 산다고 한다. jambu는 나무 이름 또는 금金의 이름으로서 jambu 나무 또는 금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다. 『화엄경지귀』(T45, 589c21~22)는 이에 대해 이 염부제의 보리수 아래를 비롯한 7처 8회에서 이 경을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91. 91)『화엄경지귀』(T45, 589c22~23)는 이에 대해 이 사바세계에 있는 백억 염부제의 보리수 아래 등에서 동시에 모두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92. 92)티끌길(塵道) : 『지귀장원통초』는 『육십화엄』 「寶王如來性起品」의 ‘毛道’를 『화엄경탐현기』에서 허공에 털끝 하나 놓일 만한 장소를 ‘毛道’라고 풀이하는 예를 통해 ‘塵道’를 허공에 티끌 하나 놓일 만한 장소라고 풀이한다. 『육십화엄』(T9, 627a26, 법장), 『화엄경탐현기』(K47, 745a3; T35, 414a24~25), 균여, 『지귀장원통초』(K47, 106c25~26).
  93. 93)『화엄경지귀』(T45, 589c25~27)는 이에 대해 시방의 허공계 가운데 하나하나의 티끌에 모두 저 국토가 있으니 그곳에서 모두 이 경을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94. 94)『화엄경지귀』(T45, 589c27~590a1)는 이에 대해 나무 모양 등 다른 부류의 세계에 한량없는 티끌 등이 있으니 하나하나의 부류가 모두 시방의 허공법계를 두루하여 앞의 수미산세계 등과 서로 걸림 없이 각각 그곳에서 법륜을 굴리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95. 95)『화엄경지귀』(T45, 590a1~3)는 이에 대해 허공계 하나하나의 티끌의 길을 다하도록 각각 또한 앞과 같이 자신과 같은 부류의 한량없는 국토를 거두어 그중에서 이 경을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96. 96)『화엄경지귀』(T45, 590a3~6)는 이에 대해 앞의 모든 물든 세계가 다 연화장장엄세계해로 돌아가서 그 연화장세계해의 하나하나 티끌이 법계에 두루하여 서로 걸림 없이 그중에서 이 법을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97. 97)『화엄경지귀』(T45, 590a6~8)는 이에 대해 이 연화장세계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가없는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다 거두어 그중에서 모두 이 경을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98. 98)『화엄경지귀』(T45, 590a8~25)는 이에 대해 저 하나하나의 티끌에 이미 각각 이 다함없는 국토를 거두니 곧 이 국토 등이 다시 티끌이 있으며 그 모든 티끌에 다시 국토가 있으니 이는 곧 이 티끌이 끝이 없으며 국토 또한 끝이 없어서 마치 인드라그물이 중중무진하여 그 분량을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풀이한다.
  99. 99)『화엄경지귀』(T45, 590a25~b11)는 이에 대해 이 (사바세계의) 한 부처님이 화엄을 설하는 자리가 앞의 아홉 문처럼 같지 않듯이, 시방 일체의 다른 부처님도 각각 화엄을 설하는 자리가 각각 다른 것이라고 풀이한다.
  100. 100)『화엄경지귀』(T45, 590b19~20)는 이에 대해 부처님이 처음 도를 이루시고 두 번째 7일간에 앞과 같은 곳을 널리 두루하여 이 경의 법을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01. 101)『화엄경지귀』(T45, 590b22~24)는 이에 대해 저 일체의 가없는 겁 가운데 하나하나의 겁 안에서 한량없는 바다와 같은 부류(同類)의 겁을 거두어 항상 이 법을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02. 102)『화엄경지귀』(T45, 590b24~25)는 이에 대해 하나하나의 겁에서 한량없는 바다와 같은 다른 부류(異類)의 겁을 거두어(예를 들면 긴 겁에서 짧은 겁을 거두는 등과 같이) 이 경을 항상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03. 103)『화엄경지귀』(T45, 590b28~c3)는 이에 대해 이 한 찰나에 거둔 겁 안에 다시 여러 찰나가 있어서 그 여러 찰나가 다시 여러 겁을 거두니 마치 인드라그물이 중중으로 다함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풀이한다.
  104. 104)『화엄경지귀』(T45, 590c3~5)는 이에 대해 나무 모양의 세계 등이 한량없이 다양하듯이 다른 세계의 때도 같지 않아서 분제가 각각 다르니 그 다른 세계의 때의 구분도 또한 다하여 이 경을 항상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05. 105)『화엄경지귀』(T45, 590c5~7)는 이에 대해 그 다른 세계의 때가 또한 각각 개별적으로 서로 거두거나 혹은 서로 거두니 찰나나 겁이나 다함이 없음이 앞과 같아서 그때에 모두 이 법을 항상 설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06. 106)『화엄경지귀』(T45, 590c7~11)는 이에 대해 화장세계에서 겁이 아닌 것으로 겁을 삼아 겁이 곧 겁이 아니라, 찰나도 또한 그러하여 때가 길고 짧음이 없어서 구분을 여의었기 때문에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때에 화엄을 항상 설하여 처음 설하면 쉬는 때가 없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07. 107)『화엄경지귀』(T45, 591a27~29)는 이에 대해 부처님이 나타내는 바가 비록 애써서 지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해인삼매의 힘에 의거하여 나타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08. 108)『화엄경지귀』(T45, 591b26~c2)는 이에 대해 앞의 여덟 번째까지는 기세간과 지정각세간만을 다루었지만 아홉 번째는 중생세간에도 걸림 없이 자재하니 마치 부처님의 몸이 일체 중생계에 두루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풀이한다.
  109. 109)『지귀장원통초』(K47, 115a7~8)는 이에 대해 한량없는 세계를 모두 부수어 티끌로 만들어서 그 티끌로 이 『화엄경』을 듣는 대중을 헤아려도 세기 어려운 까닭이라고 풀이한다.
  110. 110)『화엄경지귀』(T45, 592a11~16)는 이에 대해 부처님이 사자좌의 모든 장엄구와 부처님의 미간으로부터 내는 보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전자는 의보와 정보가 걸림 없으며 사람과 사법이 둘이 아님을 나타내고, 후자는 원인과 결과가 걸림 없으며 깨달음으로부터 가르침을 일으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111. 111)『화엄경지귀』(T45, 592a16~b7)는 이에 대해 시방에서 오는 한량없는 보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보살들은 본래 자신이 있던 곳의 여래의 그림자이고 메아리와 같다고 풀이한다.
  112. 112)『화엄경지귀』(T45, 592b7~11)는 이에 대해 보살들에 의거하여 수행의 지위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각수보살覺首菩薩 등의 ‘수首’ 자 돌림 보살菩薩은 믿음의 법을 표시하니 믿음이 수행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고, 법혜보살法慧菩薩 등의 ‘혜慧’ 자 돌림 보살菩薩은 십해十解의 법을 표시하니 지혜로써 이해하기 때문이고, 공덕림보살功德林菩薩 등의 ‘림’ 보살林菩薩은 십회향을 표시하고,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등의 ‘장’ 보살藏菩薩은 십지를 표시하는 것 등이다.
  113. 113)『화엄경지귀』(T45, 592b11~14)는 이에 대해 『화엄경』 모든 법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른 세계에서 온 같은 이름을 지닌 보살 대중이라고 한다. 즉 지금 이곳에서 설해진 『화엄경』의 이 법이 확고하고 구경의 법으로서 한량없는 다른 모든 세계에도 이와 같은 법이 있다고 함으로써 그 법을 증명하는 것이다.
  114. 114)『화엄경지귀』(T45, 592b14~21)는 이에 대해 『화엄경』이 설해지는 모임에서 이 법을 들음으로써 이익을 얻는 대중이라고 풀이한다.
  115. 115)『화엄경지귀』(T45, 592b21~26)는 이에 대해 사리불이나 수보리 등의 오백 성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 성문은 『화엄경』이 설해지는 모임에서 귀머거리와 같으니 이를 통해 오히려 이 경이 일승법계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16. 116)사위의四威儀 : 다니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네 가지 행위(行住坐臥)를 가리키며, 나아가서는 일체의 행동을 상징한다.
  117. 117)『화엄경지귀』(T45, 592c27~593a8)는 이에 대해 나무모습세계나 수미산세계 등 여러 다른 세계의 각각 다른 중생에게 색色이나 음성, 향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래가 세운 가르침이라고 풀이한다. 중생의 부류가 서로 다르므로 여래가 세운 가르침 또한 그 색이나 음성 등을 한정할 수 없어서 두 번째 이하의 가르침이 거둘 수 없으며 오직 여래만이 알 바라고 한다.
  118. 118)『화엄경지귀』(T45, 593a8~b4)는 이에 대해 나무모습세계 등의 다른 세계가 아니라 오직 이 수미산세계에서 허공과 털끝 등의 곳에 두루하여 다만 음성으로써 설하는 다함없는 가르침이라고 풀이한다. 오직 이 수미산세계에서 음성으로써만 설한 동일한 부류의 가르침이지만 그 품을 헤아릴 수 없으며 세 번째 이하의 가르침이 거둘 수 없다고 한다.
  119. 119)『화엄경지귀』(T45, 593b4~8)는 이에 대해 「입법계품」에서 해운 비구가 수지하는 경과 같이 수미산을 붓으로 하고 사대해四大海로써 먹을 삼아 쓴 한 품의 경이라고 풀이한다. 이 경 또한 한량없으며 그 품수도 티끌 수보다 많으니 오직 대보살이 다라니의 힘으로써 수지할 수 있지, 종이나 나뭇잎 등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120. 120)『화엄경지귀』(T45, 593b8~12)는 이에 대해 글로 쓰여진 것 가운데 가장 최고의 본이라고 풀이한다. 즉 용수보살이 용궁에 가서 본 『大不思議解脫經』 가운데 상본으로서 열 삼천대천세계 티끌 수의 게송과 사천하 티끌 수의 품수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121. 121)『화엄경지귀』(T45, 593b12~14)는 이에 대해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본 『대부사의해탈경』 가운데 중본으로서 49만 8천8백 개의 게송과 1천1백 개의 품으로 이루어졌다고 풀이한다. 상본과 중본은 용궁에 비밀스럽게 보관되어 있으며 염부제 사람의 힘으로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122. 122)『화엄경지귀』(T45, 593b15~18)는 이에 대해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본 『대부사의해탈경』 가운데 하본으로서 10만 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졌으며 천축에 있다고 풀이한다.
  123. 123)『화엄경지귀』(T45, 593b18~24)는 이에 대해 중국에 전래된 60권본 『화엄경』으로서 범본은 3만 6천 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곧 앞의 하본 10만 게송 가운데 간략히 뽑아낸 것이다.
  124. 124)『화엄경지귀』(T45, 593b24~c7)는 이에 대해 노사나불이 설하는 『화엄경』이 비록 법계를 두루하지만 다른 부처님이 설하는 경전과 더불어 서로 주主와 반伴을 이루어, 하나하나의 주主 경전은 반드시 한량없는 같은 부류의 반伴 경전을 갖춘다고 풀이한다.
  125. 125)『화엄경지귀』(T45, 593c5~26)는 이에 대해 『화엄경』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여래께서 방편으로 근기에 맞추어 설한 경전으로서 일체의 권교權敎를 가리킨다고 한다. 하나하나의 주主 경전은 한량없는 권속의 경전을 갖추는데, 이때 권속의 경전은 주가 될 수 없으며 오직 권속일 뿐이기 때문에 앞의 주반경主伴經과는 다르다.
  126. 126)『화엄경지귀』(T45, 593c26~594a5)는 이에 대해 이상 위의 모든 본을 통틀어서 바다와 같은 하나의 다함없는 경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중의 한 법회, 한 품, 한 문장, 한 구절이 모두 일체를 거두고, 하나하나의 문구가 일체에 두루 들어가니 보법普法에는 구분이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127. 127)『화엄경지귀』(T45, 594a20~21)는 이에 대해 역逆은 다섯 개의 열(五熱)과 (아)중비(阿衆鞞)와 한 왕이 학살을 보임(一王形虐)으로, 순順은 보시와 지계이니 이치에 따라 바로 닦는 것으로 풀이한다. 『지귀장원통초』(K47, 121b12~19)는 역의 항목에 대해서 다섯 개의 열은 승열勝熱 바라문의 법문, 아중비는 바수밀다녀婆須蜜多女의 법문, 한 왕이 학살을 보임은 만족왕滿足王의 법문으로 주석한다. 아중비阿衆鞞는 『육십화엄』(K8, 350c2; T9, 717b7)에 보이는 음사어로서 입맞춤을 뜻한다. 범본에는 ‘paricumba’로 되어 있다. 『팔십화엄』(K8, 855a18; T366a3)과 『사십화엄』(K36, 86c6; T10, 731c7~8)에는 ‘잡아순문咂我脣吻’으로 의역되어 있다.
  128. 128)『화엄경지귀』(T45, 594a21~23)는 이에 대해 중생과 성현이 감응하는 것에 있어서 중생의 입장을 감感으로, 불보살의 측면을 응應이라고 풀이한다.
  129. 129)『총수록』(H6, 774a21).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3~4; H6, 768a 5~7.
  130. 130)나유타那由他 : ⓢ nayuta, niyuta. 인도의 수량 단위 중 하나이다. 나유타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경론마다 일정하지 않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721c5; T35, 389b8)에서 천억千億을 1나유타라고 밝히고 있다.(『고려대장경』본에는 천만억千萬億이 1나유타라고 되어 있으나 문맥상 천억이라고 생각된다.) 혜원慧苑은 『新譯大方廣佛花嚴經音義』에서 나유타를 1억으로 풀이한다. 혜림慧琳, 『일체경음의』(K42, 463b2; T54, 452a18; H6, 768a7~8).
  131. 131)『총수록』(H6, 774b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5~6; H6, 768a 7~8.
  132. 132)『일승법계도』(H2, 4b3~4; H6, 812a9~10).
  133. 133)『총수록』(H6, 774c10).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6~7; H6, 768a 9~10.
  134. 134)『敎分記』 : 4권(혹은 3권). 당唐의 법장法藏이 42세 이전(혹은 35세 전후)에 화엄일승의 교敎와 의義를 설한 것으로 전체 열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華嚴一乘敎分記』, 『華嚴一乘敎義分齊章』, 『華嚴五敎章』이라고도 한다. 예부터 화엄종에 있어서 입교개종立敎開宗의 서書로 중시되어 왔으며, 균여의 『釋華嚴敎分記圓通鈔』를 비롯해 수많은 주석서가 저술된 사실을 통해서도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135. 135)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78c11~20).
  136. 136)십안十眼 : 『화엄경』 「이세간품」에서 설하는 보살이 지니는 열 가지의 눈으로, 반야부 등에서 설하는 오안五眼을 새롭게 해석하고 여기에 새로 오안을 더하여 설한 것이다. 구체적인 항목은 『육십화엄』(T9, 657c10~19)을 기준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육안肉眼, ② 천안天眼, ③ 혜안慧眼, ④ 법안法眼, ⑤ 불안佛眼, ⑥ 지안智眼, ⑦ 명안明眼〔『팔십화엄』(T10, 302c17~25)에는 광명안光明眼〕, ⑧ 출생사안出生死眼, ⑨ 무애안無礙眼, ⑩ 보안普眼. 『화엄경』은 보살이 이 십안을 얻으면 일체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큰 지혜의 눈을 얻는 것이라고 설한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K47, 763c6~13; T35, 434a27~b6)에서 보살의 행덕이 청정하고 수승하여 연緣을 모조리 비추기 때문에 ‘눈’이라 한다고 해설한다.
  137. 137)오안五眼 : 반야부 경전과 『대지도론』, 『유가사지론』 등 여러 대승경론에 보이며, 보살이 육바라밀 수행을 통해서 얻는 청정한 눈으로 설해진다. 『大般若波羅蜜多經』(T5, 42c26~45a12 등). 항목의 명칭은 위의 십안 중 앞의 다섯과 동일하다.
  138. 138)십통十通 : ‘열 가지 신통神通’이라는 뜻으로 징관은 이에 대해 ‘신神’은 오묘한 작용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고 ‘통通’은 자재하여 막힘이 없는 것으로 오묘한 작용이 끝이 없어 ‘열(十)’에 의거하여 원만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풀이한다.(T35, 850a8~9) 『화엄경』에서는 「十通品」(『육십화엄』에서는 「十明品」)과 「이세간품」에서 설해지는 십통이 대표적이다. 지엄, 법장, 징관은 십통을 육신통과 상응시키고 있다. 『수현기』(K47, 54b18~24; T35, 73c9~16). 『화엄경탐현기』(K47, 713a3~c16; 757b21~26; T35, 380a5~c23; 427c1~7), 『청량소』(T35, 850a18~b4; 895a17~19).
  139. 139)육통六通 : ⓢ ṣaḍabhijñāḥ. ‘육신통六神通’이라고도 하며 여섯 가지 신통력을 가리킨다. 구체적인 항목이나 이름은 경론에 따라서 다르나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신족통神足通 : 마음에 따라서 자유롭게 어디든 몸을 나타내는 능력이다. ② 천안통天眼通 : 중생의 생사고락이나 세간 일체의 모습을 보는 능력이다. ③ 천이통天耳通 : 중생의 온갖 음성과 세간 일체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다. ④ 타심통他心通 : 중생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는 능력이다. ⑤ 숙명통宿命通 : 자신과 중생이 숙세에 지은 일을 아는 능력이다. ⑥ 누진통漏盡通 : 삼계 일체의 번뇌를 끊고 다시는 삼계의 생사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 가운데 천안통ㆍ숙명통ㆍ누진통은 삼명三明이라고 하며 석가모니부처님이 성불 당시에 획득한 지혜로서 자주 언급된다.
  140. 140)오중해인을 통한 『일승법계도』 전체의 포섭에 관해서는 상권 1 각주 7) 참조.
  141. 141)뒤의 문맥을 살펴볼 때 계界는 법계, 종種은 법성, 해海는 해인으로 추정된다.
  142. 142)『팔십화엄』 제1회 가운데 「華藏世界品」(K8, 473c25~474a8; T10, 41c22~29)에서 연화장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며 향수해香水海와 세계종世界種과 세계世界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육십화엄』(K8, 23b12~24a25; T9, 414a27~415a3)에는 세계종이 세계성世界性으로 되어 있다.
  143. 143)『육십화엄』 「如來名號品」(K8, 27b22; T9, 419a3). 『팔십화엄』(K8, 492c24; T10, 58c5)에는 ‘佛國土不可思議’로 되어 있다.
  144. 144)표훈表訓 : 의상의 대표적인 직제자. 『三國遺事』 「義湘傳敎」(H6, 349b9~12)에서 칭송하고 있는 십대제자, 최치원崔致遠의 『法藏和尙傳』(H3, 775c13)에서 밝힌 사영四英, 『宋高僧傳』(T50, 729b19~20)의 ‘당에 올라 오묘함을 본 자(登堂覩奧者)’에 모두 속하는 유일한 제자이자, 의상과 나란히 흥륜사興輪寺 금당金堂에 모셔졌던 십성十聖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불국사와 황복사에 주석했으며, 금강산 만폭동 어귀에 표훈사表訓寺를 창건하기도 하였고, 신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의 탄생설화와도 관련이 깊다. 이처럼 표훈의 화엄사상은 『총수록』(4회), 균여의 『십구장원통기』(4회)ㆍ『旨歸章圓通鈔』(1회)ㆍ『화엄경삼보장원통기』(2회) 등에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145. 145)진정眞定 : 의상의 십대제자(『三國遺事』 「義湘傳敎」)이자 사영(『法藏和尙傳』) 중 한 사람이다.(출전은 위 각주 참조) 진정을 출가하도록 이끈 진정의 어머니를 위해 의상이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3천 명을 대상으로 90일간 『華嚴經』 강의를 했다고 한다. 이때의 강의를 제자 지통智通과 도신道身이 정리한 것이 각각 『錐洞記』(또는 『智通記』), 『道身章』이다. 진정의 화엄사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존하지 않지만, 『총수록』에는 위 본문의 삼문석 외에도 의상의 또 다른 제자 상원相元과의 대화(H6, 777a1~10)와 삼생멸설三生滅說(H6, 818a15~17) 등이 인용되어 있어 그 일부를 살펴볼 수 있다.
  146. 146)보현 22위 : 지엄의 『수현기』(K47, 13b19~c1; T35, 27b29~c11)에서는 모든 지위를 22위로 나누고 있다. 즉 육도六道의 인과因果가 6문,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의 인과를 통틀어서 2문, 성문과 벽지불이 의거하는 부처님이 인과에 통함을 나누어 2문, 성문과 연각이 회심迴心하여 들어간 대승초교大乘初敎에서의 인과를 통틀어 2문, 바로 진입한 초심初心 보살의 인과를 통틀어서 1문, 바로 진입한 숙교熟敎와 회심한 숙교의 인과를 통틀어서 2문, 돈교頓敎의 인과가 1문, 우법성문愚法聲聞으로부터 간혜지乾慧地 이상 보살과 부처님의 모든 지위를 거두어서 1문, 보현위普賢位에서 신信 이상으로부터 십지까지 인과의 보살과 부처님을 모두 통틀어서 5문이다.
  147. 147)이상의 배대를 종합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法性偈」 30句五觀釋(表訓)三門釋(眞定)四門釋(表訓)四滿義科
    證分 4句1. 實相觀③ 修行增長門④ 不動建立門行(實)滿
    緣起分14句眞性 以下 4句2. 無住觀① 理事具德門① 理事具德門證滿
    一微 以下 6句② 事融現理門② 事融現理門
    初發心 以下 4句法滿
    利他行 4句(能入 以下)3. 性起觀③ 修行增長門③ 修行增長門
    4. 緣起觀
    修行方便得益 8句(是故 以下)4. 緣起觀人滿
    5. 因緣觀
  148. 148)『十句章』 : 지엄이 요의要意 5권을 짓고 나서 첫 쪽에 써 놓은 십구에 대한 주석이다. 균여, 『십구장원통기』(K47, 84a2). 『십구장』의 저자는 『총수록』의 삼대기 중 『법융기』를 지은 법융이라는 설이 대표적이지만 법융의 제자인 융불融昢 또는 범체梵體, 혹은 법융의 스승인 신림神琳이라는 이설도 있다. 『십구장』 자체는 현존하지 않지만 이에 대한 균여의 주석서인 『십구장원통기』에 원문이 실려 있다.
  149. 149)균여, 『십구장원통기』(K47, 102b11~16) 참조.
  150. 150)초회의 처소는 『육십화엄』을 기준으로 하면 적멸도량寂滅道場인데 도리천이라고 답하며, 초회 설법의 내용은 「世間淨眼品」과 「盧舍那佛品」인데 십주의 법이라고 답하는 것은, 초회에 『화엄경』의 여타 모든 법회의 설법이 구족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균여는 육상원융을 통해 그 이법을 설명하고 있다. 『십구장원통기』(K47, 102b24~103a1).
  151. 151)『총수록』(H6, 776b5).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9 「반시」; H6, 768a11.
  152. 152)인분因分 : 인因의 분제, 즉 원인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인분은 말로 설할 수 없는 과분果分에 대응하는 개념이면서 또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의상은 『일승법계도』에서 인분을 교분敎分, 또는 연기분과 동일한 범주로 파악한다.
  153. 153)수미산須彌山 : 수미는 산스크리트 sumeru의 음역이며, 뜻으로는 묘고妙高라 번역한다. 고대 인도에서 세계의 중앙에 있다고 생각한 산이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수미산은 대해大海 안의 금륜金輪 위에 있으며 그 높이는 수면에서 8만 유순由旬이다. 그 주위를 해와 달이 돌고 육도六道ㆍ제천諸天은 측면 또는 위쪽에 있으며, 그 정상에 제석천帝釋天이 사는 궁전이 있다고 한다. 『화엄경』에서는 제3회 설법이 수미산정의 제석천 궁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54. 154)‘고기古記’ : 『총수록』에는 ‘古記云’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인용문이 총 20회 수록되어 있다. 이 ‘고기’가 『총수록』이 편찬될 당시에 독립된 문헌의 형태로 존재했는지, 아니면 의상계 화엄에 전해 내려오던 ‘옛 기록’인지 불명확하다. 또한 ‘고기’가 문헌이라고 해도 20회 인용 구절 모두가 『고기』라 불리던 하나의 문헌에 실려 있던 것인지도 확정하기 어렵다.
  155. 155)삼제三際 : 시간을 셋으로 구분한 것으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가리킨다.
  156. 156)상원相元 : 이름의 한자 표기에는 약간의 혼동이 있지만(相源ㆍ相圓ㆍ常元)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한다. 상원이 부석사 40일회에서 의상으로부터 일승십지一乘十地 법문을 듣거나〔『총수록』(H6, 809a2~8)〕, 의상에게 진부진盡不盡에 대해 물은 것〔『십구장원통기』(H4, 49a18)〕 등을 볼 때 그가 의상의 직제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림의 질문에 대해 상원이 스승 의상의 성불의成佛義에 따라서 풀이해 주는 것〔『총수록』(H6, 805a20~b1)〕을 통해서 의상→상원→신림으로 이어지는 부석적손의 사자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157. 157)대운 법사 군大雲法師君 : 의상의 제3세손인 신림의 제자인 것으로 추정되나 위 신림과의 문답이 균여의 『십구장원통기』(K47, 94c17~24)에 한 차례 더 인용되는 것 외에는 관련 자료가 현존하지 않는다.
  158. 158)『총수록』(H6, 777a23).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H6, 768a 「반시」.
  159. 159)팔식八識 : 유식학파에서 인간의 마음을 여덟 가지로 나눈 것으로,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육식과 제7말나식末那識(ⓢ manasvijñāna), 제8알라야식(ⓢ ālayavijñāna)을 가리킨다.
  160. 160)『화엄경』 「華藏世界品」(K8, 471a21~22; T10, 39b28~c1)의 다음 게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화장세계에 있는 티끌의 낱낱 티끌에서 법계를 본다. 보배광명이 부처님을 나타냄이 구름이 모인 것 같으니 이것이 여래국토의 자재함이다.(華藏世界所有塵。 一一塵中見法界。 寶光現佛如雲集。 此是如來刹自在。)” 『육십화엄』 「盧舍那佛品」(K8, 21b4~5; T9, 412c7~10)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於此蓮華藏。 世界海之內。 一一微塵中。 見一切法界。 一切諸佛雲。 放寶光明照。 是盧舍那刹。 有無量自在。”
  161. 161)『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역참하는 중 52번째로 미륵보살을 만나 비로자나장엄장毘盧遮那莊嚴藏(『팔십화엄』 기준)이라는 이름의 누각에 들어간 때의 일을 가리킨다. 『팔십화엄』(K8, 931c4~935a10; T10, 434c29~437c16), 『육십화엄』(K8, 416c6~419a20; T9, 780b10~782b11).
  162. 162)『일승법계도』(H2, 3a4~b16; H6, 810b16~811a13)에서 연기분 가운데 첫 2구인 연기의 체를 설명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이를 위해 초환희지의 십이연기 구절에 대한 세친의 『십지경론』의 해석을 지엄의 『공목장』을 통해 인용하고, 또한 제6현전지의 십중 십이연기 구절에 대한 『십지경론』과 『공목장』의 주석에 의거하고 있다.
  163. 163)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 여래장계 경론에서 설하는 중생들이 본래 갖추고 있는 평등하여 분별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구경일승보성론』(K17, 377c23; T31, 832b12~13). 자성은 본래 청정하다는 뜻으로, 진여가 비록 중생의 마음에 부착된 번뇌에 의해 물들어 있어도 본래 청정하다는 점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화엄교학에서는 고십현 중 유심회전선성문唯心迴轉善成門의 유심을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 또는 여래성기구덕심如來性起具德心으로 설명한다. 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7a8~15), 『총수록』(H6, 843b14~16).
  164. 164)열 번의 관(十番觀) : 『화엄경』 「십지품」 제6현전지現前地에서 보살이 십이연기를 십중으로 관찰하는 것을 가리킨다. 세친, 『십지경론』(K15, 70b15~19; T26, 170c4~8), 『육십화엄』(K8, 179b16~19; T9, 559a24~28), 『팔십화엄』(K8, 652b2~6; T10, 194b24~28).
  165. 165)『육십화엄』 「夜摩天宮菩薩說偈品」(K8, 74c10; T9, 466a27~28).
  166. 166)『道身章』 : 의상의 제자 도신이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고 단편만 전해진다. ‘道身’은 ‘道申’으로도 표기된다. 도신은 『宋高僧傳』(T50, 729b19~20)에서 ‘당에 올라 오묘함을 본 자(登堂覩奧者)’로 칭송한 의상의 직제자이다. 『송고승전』에서 “뜻을 풀이한 책들은 혹은 제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는데 『도신장』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도신장』의 저자는 도신임을 알 수 있다. 의천의 『新編諸宗敎藏總錄』(T55, 1167b24~c2)은 『도신장』을 『一乘問答』(2권)이라는 서명書名으로 소개하고 있다. 『도신장』은 『총수록』에 10회, 균여의 저술에 47회 인용되는 등 이후 화엄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67. 167)초회初會 : 『화엄경』의 초회를 뜻한다. 『육십화엄』의 8회 가운데 첫 회인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가리킨다. 『팔십화엄』에서는 9회 중 처음인 법보리장회法菩提場會에 해당한다. 법장, 『華嚴經文義綱目』(T35, 498b26), 징관, 『청량소』(T35, 527b22~23 등).
  168. 168)다섯 바다(五海) : 『육십화엄』 「盧舍那佛品」(K8, 17b17~19; T9, 409a3~5)에서 보현보살이 관찰하는, 바다와 같이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다섯 가지 경계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① 일체 모든 세계바다(一切諸世界海), ② 일체 중생바다(一切衆生海), ③ 법계의 업바다(法界業海), ④ 일체중생의 욕락과 모든 근성바다(一切衆生欲樂諸根海), ⑤ 일체 삼세 모든 부처님바다(一切三世諸佛海)이다. 『팔십화엄』(K10, 465a13~17; T10, 34b10~14)에서 대응하는 곳은 「世界成就品」에 보이며 다섯 바다가 아니라 열 바다(十海)로 되어 있다. 지엄은 『수현기』(K47, 9a3~4; T35, 22b15~16)에서 이 다섯 바다를 가리켜 『화엄경』 정종분의 본분本分을 밝히는 구절이라고 풀이하고, 『공목장』(T45, 539a2~22)에서는 다섯 바다에 대한 장을 별도로 둘 정도로 중요시했다.
  169. 169)서원은 잘 결정되어 있다(願善決定) : 『팔십화엄』 「십지품」(K8, 634b7~8; T10, 179b16~17)에서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삼매에 들어갔다 나와서 처음 설하는 다음 구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 불자여! 모든 보살의 서원은 잘 결정되어 있어서 잡스럽지 않으며 볼 수가 없다.(諸佛子。 諸菩薩願善決定。 無雜不可見。)”
  170. 170)구분뢰야具分賴耶 : 대승종교大乘終敎에서 설하는 진眞과 망妄을 모두 갖춘 아뢰야식을 말한다. 법장은 『화엄일승교의분제장』 「所詮差別章」(T45, 484c25~485b2)에서 5교판을 심식설로써 풀이하는 가운데 종교의 아뢰야식에는 이법과 현상이 융통하여 두 개의 뜻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며, 『대승기신론』에서 “불생불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함을 아뢰야식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구분뢰야’라는 명칭은 『주대승입능가경』(T39, 445b23)에 보인다. cf. 아뢰야식(賴耶) : ⓢ ālayavijñāna. 구역舊譯은 아리야식阿梨耶識, 아려야식阿黎耶識이다. 아뢰야식은 현장에 의한 신역新譯이다. 이것은 저장의 식(藏識)이란 뜻으로 유식학파에서 인간의 마음을 여덟 가지로 분석한 가운데 하나이다. 아뢰야식은 세 가지의 의미와 기능을 지니는데, 첫째는 일체중생의 모든 염오된 법이 현행現行한 결과가 이 식에 저장되고(果相), 둘째는 이 식이 일체중생의 모든 염오된 법에 저장되어 뒷날 현행의 원인으로 작용하며(因相), 셋째는 모든 중생이 이 식을 자기 자신으로 삼는 것(自相, 我愛執藏)이다. 무착, 『섭대승론』(K16, 1054a20; T31, 114a6), 『成唯識論』(K17, 519c17~a9; T31, 7c20~8a4).
  171. 171)일부분인 생멸뢰야(一分生滅賴耶) : 대승시교大乘始敎에서 설하는 생멸의 뜻만 있는 아뢰야식을 말한다.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84c13~25)에 의하면 시교에서 진眞은 생멸과 불생멸에 융통하지 못하고 다만 응연凝然하여 모든 법을 생겨나게 하지 못하므로 연기하는 사법에 대해 생멸의 뜻을 갖춘 아뢰야식을 건립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소승에게 공의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172. 172)『일승법계도』(H2, 1a 「반시」). 「법성게」 중 자리행自利行―연기분緣起分에서 가장 마지막 구절(제18구)이다.
  173. 173)22위二十二位 : 상권 1 각주 146) 참조.
  174. 174)제삼중해인第三重海印 : 『대기』에서 『일승법계도』의 제목을 삼중의 오중해인으로 풀이한 가운데 여기의 제삼중해인은 「법성게」 중 연기분에 해당하니, 제이중의 오중해인 가운데 세 번째 해인을 가리킨다. 삼중의 오중해인에 대해서는 상권 1 각주 7) 참조.
  175. 175)숭업崇業 : 의상의 제4세 법손으로서 신림神琳의 제자이다. 신림이 부석사에서 천 여 명의 대중에게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을 강의할 때 숭업이 겨우 7세의 나이에 사미로서 참석했다. 또 숭업이 범체梵體(9세기 중엽 활동)를 만나 중국 신수神秀의 말을 전했다는 균여의 기록을 통해 숭업이 의상계의 적손으로 9세기 전반에서 중엽에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석화엄교분기원통초』(H4, 506a11~20; H4, 308b12~17). 그의 저서는 현존하는 것이 없지만 『총수록』과 균여의 『십구장원통기』 등에 숭업의 저서로서 『觀釋』이라는 이름의 저술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176. 176)『觀釋』 : 숭업의 저서로서 현존하지는 않는다. 『총수록』 외에도 『십구장원통기』 등 균여의 저술에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177. 177)마음의 성품은 하나이다.(心性是一) : 『육십화엄』 「보살명란품」(K8, 35c8~13; T9, 427a3~9)에서 문수보살이 각수보살覺首菩薩에게 “마음의 성품은 하나인데 어떻게 갖가지 과보를 내는가?”라고 묻는 질문의 첫 부분이다.
  178. 178)법장, 『화엄경탐현기』(K47, 523b6~526a23; T35, 176c15~179c21).
  179. 179)갖가지 마음(種種心) : 지엄은 『공목장』(T45, 569b7~9)에서 일승의 마음을 ‘갖가지(種種)’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총수록』 『법융기』(T45, 757b18~28)와 『華嚴經問答』(T45, 599c26~29)은 열 부처님 가운데 심불心佛을 풀이하면서 일승 중에서 마음은 ‘갖가지’라는 뜻이라고 하고, 『법융기』는 일승의 이 ‘갖가지’라는 의미의 마음을 일법계의 성기심, 조림심稠林心으로 설한다. 『총수록』에 인용되어 있는 의상계 문헌으로 추정되는 『簡義章』(H6, 785b19~21)에서는 삼승은 평등한 한마음(一心)을 설하고 일승은 갖가지 마음을 설한다고 풀이한다.
  180. 180)습기를 지나는 바다(濕過海) : ‘습기를 지나는 바다’는 『총수록』과 『총수록』의 인용 문헌에만 보인다.(『관석』 5회, 『대기』 1회, 『간의장』 1회) 의상계 화엄에서 삼승과 대비하면서 일승의 마음을 드러낼 때 사용했던 말이다. 즉 삼승에서는 바다가 습기를 자성으로 하는 물(진성)을 본체로 하므로 바다가 습기에 머무르지만, 일승에서는 바다의 체성이 무성無性이므로 바다가 습기를 지난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181. 181)지엄, 『수현기』(K47, 14a20~21; T35, 28b9~10).
  182. 182)『육십화엄』 「菩薩明難品」(K8, 35c16; T9, 427a13~15).
  183. 183)『육십화엄』 「보살명란품」(K8, 35c21~22; T9, 427a23~26).
  184. 184)선악의 갈래(善惡趣) : 중생이 윤회할 때 가는 길, 갈래로서 육도六道, 육취六趣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은 악취이고(아수라) 인간, 천은 선취이다.
  185. 185)지엄, 『수현기』(K47, 14a23~243; T35, 28b13~14).
  186. 186)지엄, 『수현기』(K47, 14a25; T35, 28b15).
  187. 187)지엄, 『수현기』(K47, 14b7~8; T35, 28b26~27).
  188. 188)상권 1 각주 183) 참조.
  189. 189)『공목장』 :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章』(T45, 536~589)을 가리킨다. 지엄이 62세 이후 만년에 저술한 것으로, 『육십화엄』에 대해 144장으로 나누어 주제별로 소승과 삼승에 대비하여 무진일승無盡一乘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190. 190)여기에 인용된 『공목장』에서 ‘실失’은 현존하는 『공목장』에는 보이지 않는다. 『공목장』(T45, 549c28~550a4), “性種性者。 是本有性。 習種性者。 是修生性。 此非佛法所樂。 〈中略〉 若法性外有修生者。 緣起可增。”
  191. 191)『팔십화엄』 「入法界品」(K8, 940a4~5; T10, 441c22~23).
  192. 192)『팔십화엄』 「보현삼매품」(K8, 464c2; T10, 34a4).
  193. 193)『空三印』 : 본문에서는 저술의 제목으로 보이지만 이외에는 전혀 기록이 없어서 저자나 관련 사항을 알 수 없다. 단 ‘습과해濕過海’라는 표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의상계 화엄의 문헌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석문의범』 하권(1972, pp.154~155)에서는 공삼인을 ‘이자삼점伊字三點’을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194. 194)『총수록』(H6, 779b14).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반시」; H6, 768a.
  195. 195)초교初敎 : 대승시교라고도 한다. 화엄교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승교小乘敎ㆍ대승시교大乘始敎ㆍ대승종교大乘終敎ㆍ돈교頓敎ㆍ원교圓敎의 다섯으로 나누어서 중관(空始敎)과 유식(相始敎)의 가르침을 시교, 즉 초교에 배속시키고 있다. 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81b5~482a11).
  196. 196)삼성三性 : 여기서는 종자가 갖추는 세 가지 성품, 즉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를 가리킨다. 『成唯識論』(T31, 40a23~25)에서는 종자를 본식 중의 선과 불선과 무기의 성품으로 풀이하고 있다.
  197. 197)『총수록』(H6, 780b11).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반시」; H6, 768a.
  198. 198)아래 가르침(下敎) : 화엄교판에서 마지막 원교를 제외한 나머지 아래의 4교, 즉 소승교小乘敎ㆍ대승시교大乘始敎ㆍ종교終敎ㆍ돈교頓敎를 가리킨다. 『총수록』(H6, 794b17; 822c22; 824c12 등)에는 ‘아래 네 가르침(下四敎)’이라는 말도 보인다.
  199. 199)상권 1 각주 147)과 그에 해당하는 본문 참조.
  200. 200)세친, 『아비달마구사론』(K27, 540c20~21; T29, 62a26~27).
  201. 201)첫 과위(初果) : 아비달마에서 설하는 사과四果 가운데 첫 과위를 가리킨다. 사과는 ① 예류과預流果(ⓢ srota āpanna), ② 일래과一來果(ⓢ sakṛdāgāmin), ③ 불환과不還果(ⓢ anāgāmin), ④ 아라한과阿羅漢果(ⓢ arhat)이다.
  202. 202)34념三十四念 : 『대비바사론』(K26, 1148b19~c3; T27, 780b28~c6)과 『아비달마구사론』(K27, 487c15~24; T29, 25b1~8) 등에는 보살이 34마음의 찰나(三十四心刹那)에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다는 구절이 보인다. 여기에서 34념은 아비달마 수행도의 각 단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여덟 지인智忍과 여덟 지智와 아홉 무간도와 아홉 해탈도(八忍八智九無間九解脫)’의 단계를 총칭한 것이다. 이 가운데 여덟 지인과 여덟 지는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에서 끊는 번뇌의 세계와 대상에 상대하는 것(견도위인 제15찰나, 수도위인 제16찰나)이고, 아홉 무간도와 여덟 해탈도는 수도위修道位에서 대치하는 번뇌의 세력(上上에서 下下)에 따라서 구분한 것이다.(제9해탈도, 즉 아라한과는 제외) 이상은 유학有學의 단계이고 마지막 제9해탈도는 진지盡智를 획득한 무학無學의 아라한과이다.
  203. 203)변계소집분遍計所執分 : 일체존재의 본성 또는 모습(性相)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가운데 변계소집성을 가리킨다.
  204. 204)의타기분(依他分) : 상권 1 각주 203) 참조.
  205. 205)원성실성분(圓成分) : 상권 1 각주 203) 참조.
  206. 206)융수融秀 : 여기의 기록을 통해 신림의 제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207. 207)『총수록』(H6, 781c5).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반시」; H6, 768a.
  208. 208)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6c20~22).
  209. 209)『旨歸章圓通鈔』 : 2권. 『釋華嚴旨歸章圓通鈔』라고도 한다. 균여가 법장의 『旨歸章』을 주석한 것이다.
  210. 210)『지귀장원통초』(K47, 127a2~b29). 여기의 인용 구절과 『고려대장경』의 『지귀장원통초』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른 부분 가운데 크게 차이나는 부분은 해당 개소에서 밝히도록 한다.
  211. 211)한역된 경전 가운데 ‘영락纓絡(또는 瓔珞)’이라는 말이 경명에 포함된 것은 『菩薩瓔珞經』과 『菩薩瓔珞本業經』이 있다. 두 경 모두 요진姚秦의 축불념竺佛念이 각각 376년과 376~378년에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현존하며, 몇 개의 별역경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보살영락본업경』은 중국에서 찬술된 위경僞經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영락경』을 출전으로 밝히고 있는 구절 및 ‘범마달왕’도 현존하는 두 경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212. 212)지통智通 :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법계도인을 전수받은 의상의 직제자이다. 의상의 십대제자이자 “당에 올라 오묘함을 본 자”(T50, 729b19~21)의 한 사람으로 존숭되었다. 『三國遺事』 「朗智乘雲普賢樹條」에 의하면, 지통은 7세 때 낭지朗智에게 출가할 때 이미 보현보살로부터 정계正戒를 받아, 낭지가 오히려 지통에게 예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지통은 부석사 40일회, 소백산 90일회, 태백산 대로방大盧房 등에서 의상의 강의를 들었으며, 그 가운데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간 행해진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것이 『智通記』(또는 『智通問答』, 『錐洞記』, 『錐穴記』, 『錐穴問答』 등)이다. 『지통기』는 현존하지 않고 『총수록』이나 균여의 저술에 단간이 전해져 왔다. 최근에는 법장의 저술로 알려진 『화엄경문답』이 『지통기』의 이본인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
  213. 213)열 명의 훌륭한 제자(十聖弟子) : 의상의 여러 제자 가운데 특히 뛰어난 열 명을 가리킨다. 『삼국유사』 「義湘傳敎」(H6, 349b9~12)에서는 ‘십대덕十大德’이라는 명목으로 열 명의 제자를 모두 밝히고 있으며 아성亞聖으로 모셨다. 균여의 『지귀장원통초』에서는 ‘십성제자十聖弟子’, 박인량朴寅亮의 『海東華嚴始祖浮石尊者讚幷序』(H4, 632b10)에서는 ‘십성전법十聖傳法’이라는 명목을 기록하고 있다.
  214. 214)정법正法과 상법像法 :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 머무르는 시기를 교법과 수행과 증득의 유무 등에 따라서 구분한 것이다. 이는 경론에 따라 매우 다양하며 보통 후오백세설의 다섯으로 나눈다. 『雜阿含經』(K18, 1022b16~18; T2, 226c6~8)에서는 정법正法(ⓢ saddharma)ㆍ상법像法(ⓢsaddharmapratirūpaka)의 둘로 나눈다. 『대승동성경』(K10, 655a22~23; T16, 651c12~14)에서는 여기에 말법末法(ⓢ saddharmavipralopa)을 더하여 다음 셋으로 보기도 한다. ① 정법은 여래가 열반에 든 후 교법이 세상에 유통되고 그 교법에 따라 수행이 이루어져 불과佛果를 증득할 수 있는 시기이다. ② 상법은 비록 교법과 그에 따라 수행하는 수행자가 있으나 불과를 증득할 수 없는 시기이다. ③ 말법은 교법이 유통되어도 수행과 증과가 없는 시기이다.
  215. 215)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6c18).
  216. 216)보심報心 : ⓢ vipākajaṃ cittam 또는 vipākaja 등. 보생심報生心 또는 이숙생심異熟生心 등으로도 번역된다. 삼계에 윤회하면서 과보(報)로 생겨나는(生) 무기無記의 마음(心)이다. 혜원慧遠은 『大乘義章』 「佛性義」(T44, 473b14~20)에서 중생의 오온을 망妄에 따르면 오직 망심이 지은 것으로 파도가 바람이 일으킨 것이고 꿈의 일이 꿈속의 마음이 일으키는 것과 같지만, 진眞에 따르면 모두 진심이 짓는 것으로 파도를 물이 짓고, 꿈의 일이 오직 보심이 짓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지엄은 『수현기』(K47, 45b27~c3; T35, 63b17~21)에서 십이인연이 오직 진심眞心이 지은 것임을 설명하면서 혜원의 설 가운데 파도가 물이 지은 것이고 꿈의 일이 오직 보심이 지은 것이라는 비유를 이용한다. 이후 화엄교가들이 법계연기에서 진심의 측면, 또는 성기사상을 설하는 가운데 꿈의 일이 보심이 지은 것이라는 비유가 보인다. 『화엄경문답』(T45, 609c13~22), 징관, 『청량소초』(T36, 577a11~12).
  217. 217)『총수록』(H6, 783a20).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반시」; H6, 768a.
  218. 218)「所詮章」 : 법장이 지은 『화엄일승교분기』의 「所詮差別章」을 가리킨다.
  219. 219)법장, 『화엄일승교분기』(T45, 487c29~488a6).
  220. 220)「소전장」에서 ‘불종성佛種性’을 소승과 삼승에 의거하여 설한 후 세 번째로 일승을 기준으로 밝히는 부분이다.
  221. 221)의보依報와 정보正報 : 의보는 의거하는 대상으로서의 과보로서 국토세간의 기세간을 가리킨다. 정보는 의지의 주체로서의 과보로서 중생과 불보살, 즉 중생세간과 지정각세간을 가리킨다. 종밀宗密, 『華嚴經行願品疏鈔』(卍7, 848a3~5).
  222. 222)『육십화엄』 「菩薩十住品」(T9, 444c24).
  223. 223)삼현三賢과 십지十地 : 대승보살의 수행 계위를 구분한 것이다. 삼현은 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을 말하고, 십지는 십성十聖이라고도 한다. 화엄교학에서는 여기에 등각等覺ㆍ묘각妙覺을 합하여 총 42위로 설정하며, 또는 삼현 이전에 십신十信을 따로 두어 52위로 보기도 한다.
  224. 224)십해十解 : 십주十住를 말한다. 『화엄경』에서 보살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 집에 머물며 그가 머무는 곳은 넓고 커서 법계와 허공과 같다고 하는데, 십주는 이 보살이 머무는 열 가지이다. 구체적으로는 초발심주初發心住ㆍ치지주治地住ㆍ수행주修行住ㆍ생귀주生貴住ㆍ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ㆍ정심주正心住ㆍ불퇴주不退住ㆍ동진주童眞住ㆍ법왕자주法王子住ㆍ관정주灌頂住이다. 『육십화엄』(K8, 54b13~15; T9, 444c28~445a1).
  225. 225)초발심주初發心住 : 십주의 첫 번째 계위로서, 보살이 신심을 원만구족해서 처음 발심하는 자리이다. 초발심주에서는 발심의 인因이 되는 십법과 발심의 연緣, 그리고 구체적인 수행으로서 십법이 설해지고 있다. 『육십화엄』(K8, 54b17~c7; T9, 445a3~18).
  226. 226)치지주治地住 : 십주의 두 번째 계위로서, 항상 공관空觀을 닦아 심지心地를 청정하게 다스리는 자리이다. 『육십화엄』(K8, 54c8~17; T9, 445a19~28).
  227. 227)『華嚴經探玄記』 : 20권. 당唐의 법장法藏이 『육십화엄』을 주석한 것이다. 그의 스승인 지엄의 『수현기』와 더불어 『육십화엄』에 대한 화엄종의 가장 대표적인 주석서이다. 십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육십화엄』의 대의大意를 아홉 문(① 敎起所由, ② 藏部所攝, ③ 立敎差別, ④ 敎所被機, ⑤ 能詮敎體, ⑥ 所詮宗趣, ⑦ 釋經題目, ⑧ 部類傳譯, ⑨ 文義分齊)으로 나누어 설하고, 이어 마지막 한 문(⑩ 隨文解釋)에서 경의 문구를 따라가며 풀이한다. 법장은 아직 두 권이 미완성인 『탐현기』를 의상에게 보내서 검토해 줄 것을 청하고, 이에 의상이 자신이 10일 동안 검토한 후 제자 중 뛰어난 진정眞定ㆍ상원相圓ㆍ양원亮元ㆍ표훈表訓을 불러 5권씩 나누어 강의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인 「賢首國師寄海東書」(H4, 635c4~636a13)와 최치원이 지은 법장의 전기인 『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T50, 285a16~25) 등에 남아 있다.
  228. 228)『화엄경탐현기』(K47, 550c24~551a3; T35, 206a26~b5)에서 『육십화엄』 「初發心菩薩功德品」의 ‘此初發心菩薩卽是佛故’(T9, 452c4)를 풀이하는 부분이다.
  229. 229)6위六位 : 법장의 『화엄경탐현기』(K47, 751b29~c22; T35, 421a25~b21; K47, 768c29~769a7; T35, 440a1~8 등)에서 6위는 십신十信ㆍ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ㆍ십지十地ㆍ불佛(因圓果滿究竟位)을 의미한다.
  230. 230)『육십화엄』 「梵行品」(T9, 449c14~15)의 한 구절이다. “처음 발심할 때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일체법의 진실한 본성을 알아 지혜의 몸을 구족하여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初發心時便成正覺。 知一切法眞實之性。 具足慧身不由他悟。)”
  231. 231)『妙理圓成觀』 :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66c20)에 “妙理圓成觀三卷。 神秀述。”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 『총수록』 외에 균여의 저술인 『석화엄지귀장원통초』, 『석화엄교분기원통초』 등과 체원의 『백화도량발원문약해』 등에도 다수 인용되어 있다. ‘신수神秀’는 당唐의 선승禪僧으로서 북종北宗의 개조인 신수神秀(?~706)가 아니라 화엄종의 회계 신수會稽神秀로 보이나 불분명하다. 회계 신수는 현수 법장의 법손인 법선法詵(718~778)의 제자이다. 贊寧, 『宋高僧傳』(T50, 736b10).
  232. 232)다음 경문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팔십화엄』 「십행품」(T10, 106b14~16), “我當盡虛空遍法界。 於十方國土中。 行菩薩行。 念念明達。 一切佛法正念現前。 無所取著。”
  233. 233)『묘리원성관』의 같은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 『석화엄교분기원통초』(K47, 198c28~29)에는 “또 교화하여 인도할 중생이 없기 때문이다.(又無衆生可化度故)”라는 문장이 더 있다.
  234. 234)『육십화엄』 「노사나불품」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구절은 없지만, 다음 문구(K8, 24c17~18; T9, 415c23~26)를 비롯하여 「노사나품」 전체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하나의 털구멍 속에 불가사의한 국토가, 한량없는 모습으로 장엄되어 있으니 갖가지 업으로 일어난 바이다. 자신의 업에 따라서 일어나 중생계는 생각하기 어렵다. 갖가지 모습을 취하여서는 혹은 즐거움을 받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一一毛孔中。 不思議億刹。 無量形莊嚴。 種種業所起。 隨其自業起。 衆生界難議。 取種種相已。 或受樂受苦。)”
  235. 235)22위 : 상권 1 각주 146) 참조.
  236. 236)분단分段 : 분단생사分段生死(ⓢ pariccheda cyutiḥ)의 줄임말로서, 중생이 윤회하면서 겪는 생사를 말한다. 이에 상대하여 변역생사變易生死가 있다. 분단이라고 한 이유는 중생이 겪는 생사에는 자신의 업에 따라 수명ㆍ모습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혜원慧遠의 『大乘義章』(T44, 615c4~6)에는 “분단이란 육도의 과보가 삼세로 나뉘어 다르게 되는 것을 분단이라 하며, 분단의 존재(法)가 처음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마지막 흩어지는 것을 사死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237. 237)변역變易 : 변역생사變易生死(ⓢ pārīṇamikī cyutiḥ)의 줄임말로서, 성자聖者들이 삼계의 생사윤회하는 몸을 여읜 이후 성불에 이르기 전까지 겪는 생사를 일컫는다. 분단생사의 하열한 몸을 미세하고 미묘하게 변화하여 분단생사와는 달리 몸의 형태ㆍ수명 등에 한정을 갖지 않는 몸을 지녀서 ‘변역’이라 한다. 정해진 수명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인 의미에서 생사를 거듭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경론이나 학파에 따라서 분단생사와 변역생사의 구체적 의미 및 종류와 수행 계위와의 관계 등은 많은 차이가 있다.
  238. 238)원교 중의 분단ㆍ변역은 삼도ㆍ오승 등이 가진 분단ㆍ변역과 차이가 있다. 법장의 『화엄경탐현기』(K47, 572b18~23; T35, 229b5~11)에 의하면, 일승의 경우에는 분단과 변역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방편을 거두는 입장(攝方便)에서 말한다면 십지 이전이나 십지 이상에 모두 변역이 있으니, 하나하나의 계위가 마침내 불지佛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만약 화엄교의 입장이라면 모두 분단이다. 또한 선재동자는 분단신分段身으로서 보현위普賢位에 이르렀으나 모두 법문에 즉하는 분단이기 때문에 과환過患이 아니라고 하였다.
  239. 239)네 열반(四涅槃) : 대승에서 소승의 열반을 비판하고 주장한 열반으로서, ① 본래 청정한 열반(本來清淨涅槃), ② 머무름 없는 열반(無住處涅槃), ③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 ④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이다. 소승의 열반이 오로지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데 반해, 대승의 열반은 생사와 열반 모두에 탐착하지 않음을 근본으로 한다. 세친, 『攝大乘論釋』(K16, 1230a10~19; T31, 247a27~b6).
  240. 240)열 열반(十涅槃) : 『화엄경』에서 설해지는 열반이다. 『육십화엄』 「이세간품」(K8, 299a18~b9; T9, 669a26~b12)에서는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불사佛事를 끝까지 마치시고 열 가지 뜻이 있어서 대반열반大般涅槃을 나타내 보이신다.”라고 하며 열 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① 일체의 행이 모두 무상無常함을 밝히려는 뜻, ② 일체의 유위법이 편안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③ 대반열반이 가장 안온함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밝히려는 뜻, ④ 대반열반이 일체 모든 두려움을 멀리 여의었음을 밝히려는 뜻, ⑤ 모든 천인天人이 색신色身에 탐착하기 때문에 색신이 무상하고 마멸법임을 밝혀 청정한 법신에 항상 머무르기를 구하게 하려는 뜻, ⑥ 무상無常의 힘은 강해서 되돌릴 수 없음을 밝히려는 뜻, ⑦ 유위법은 좋아하는 대로 행해지지 않으며 자재롭지 못함을 밝히려는 뜻, ⑧ 삼계의 법이 모두 질그릇과 같아 견고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⑨ 대반열반이 최고의 진실이며 무너지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⑩ 대반열반이 생사生死를 멀리 여의어 일어나지도 멸하지도 않음을 밝히려는 뜻이다. 「이세간품」의 이 열 가지 열반설은 이후 화엄가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었다. 지엄은 『공목장』(T45, 581b20~c1)에서 열반을 소승의 열반, 삼승의 열반, 일승의 열반으로 나눈 뒤, 『화엄경』 「이세간품」의 열 가지 열반이 일승 중 별교의 열반이라고 해석한다.
  241. 241)지엄의 『華嚴五十要問答』(T45, 522b22~26)에서 다음 구절의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문 육도의 인과는 본래 성자의 지위가 아닌데 무엇으로 인하여 보현문 중에 거두어져 있는가? 답 육도의 인과는 성자의 법에 위배되지만 보현방편으로 돌이켜 도道에 반하는 행과 역행문을 이루어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방편으로써 싫어함에 의거하여 해탈을 얻게 하는 까닭이다.(問。 六道因果本非聖位。 因何攝在普賢門中。 答。 六道因果是背聖法。 普賢方便。 迴成返道行及逆行門。 令諸有情。 方便依厭。 得解脫故。)”
  242. 242)만족왕 선지식(滿足王知識) : ⓢ Anala. 『육십화엄』 「입법계품」(K8, 339c16~340c3; T9, 708a27~709a3)의 선지식 중에서 18번째 선지식이다. 『팔십화엄』(K8, 841c24; T10, 355b1)에는 ‘무염족왕無厭足王’으로 번역되어 있고, 『사십화엄』(K36, 62c23; T10, 712b20)에는 ‘감로화왕甘露火王’이다. 만족왕은 왕법王法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는데, 왕법을 범한 사람들은 손과 발을 끊고 목을 베는 등 지독한 고통으로 다스렸다. 만족왕이 이처럼 고통스런 형벌을 통해 악을 다스려 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중생들이 열 가지 착하지 않은 길(十不善道)과 일체의 악을 버리고, 열 가지 선을 행하여 궁극의 즐거움을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 일체지一切智를 갖추게 하기 위한 방편인 것으로 설해진다.
  243. 243)환幻과 같은 법문(如幻法門) : 만족왕 선지식이 성취한 법문으로서 『육십화엄』(K8, 340b18~c1; T9, 708c23~709a2)에는 ‘보살환화법문菩薩幻化法門’이라 되어 있다. 만족왕이 행하는 갖가지 고통스런 다스림은 변화로 만든 것으로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으로 설해진다.
  244. 244)징관, 『貞元新譯華嚴經疏』(卍7, 631a10~12).
  245. 245)해행解行 : 상권 1 각주 303) 참조.
  246. 246)견문見聞 : 상권 1 각주 303) 참조.
  247. 247)『총수록』(H6, 785a2).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반시」; H6, 768a.
  248. 248)『일승법계도』(H2, 4b4; H6, 812a10).
  249. 249)『簡義章』 : 『총수록』에 2회 인용되어 있으나 저자나 저술 시기 등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다만 의상의 『일승법계도』가 인용되어 있는 것 등으로부터 의상계 화엄의 문헌인 것으로 추정된다.
  250. 250)“자신의 현상 이외에 어느 곳에서 이법을 얻겠는가?(自事以外。 何處得理。)”라는 구절은 『일승법계도』(H2, 6a8~9)에 보인다. 이를 통해서도 『간의장』이 의상계 화엄의 문헌임을 알 수 있다.
  251. 251)지엄, 『수현기』(K47, 3a2~3; T35, 15c20~21).
  252. 252)갖가지 마음에 대해서는 상권 1 각주 179) 참조.
  253. 253)『총수록』(H6, 785c9).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반시」; H6, 768a.
  254. 254)지극함(感) : 부처님과 중생 사이의 교화敎化 관계를 논할 때 ‘응應’과 ‘감感’의 두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감感은 중생이 부처님에게 다가가는 것이고, 응應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나아가시는 것이다. 법장은 『화엄경지귀』(T45, 594a21~22)에서 가르침의 뜻을 밝히는 가운데 감感과 응應을 한 쌍으로 하여, 중생의 근기와 바람 등의 감화가 여러 가지이고 성인의 응화를 나타냄 또한 끝이 없다고 한다. 또한 징관은 『청량소』(T35, 529c1~3)에서 중생의 근기가 성인에게 감화되고 성인이 능히 응화를 내린다고 하여 구분하면서도 이 둘이 동시라고 설한다.
  255. 255)『大品經』 :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27권 『大品般若經』의 줄인 이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화엄대경』의 각 품을 『대품경』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고 본다.
  256. 256)산왕山王 : 『화엄경』에는 산왕山王의 비유가 많이 나오지만 여기의 산왕은 『육십화엄』 「보왕여래성기품」(K8, 238c13~239a4; T9, 616b14~29)에서 여래의 몸을 설하는 내용 중 일출日出의 비유에 나오는 산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태양이 떠서 만물을 비추는데 대산왕大山王, 대산, 대지 등의 순서로 비추듯 여래의 지혜광명도 보살, 연각, 성문, 선근중생, 일체중생의 순서로 비춘다. 여래의 지혜에는 이러한 순서에 대한 구별이 없으나 중생의 선근에 따라서 갖가지 차별이 생긴다고 설한다.
  257. 257)4구 : 「법성게」 중 이타행 4구를 가리킨다.
  258. 258)제사중해인 : 이중의 오중해인 가운데 네 번째 해인이다. 상권 1 각주 7) 참조.
  259. 259)제삼중(해인) : 이중의 오중해인 가운데 세 번째 해인이다. 연기분 14구가 배대된다.
  260. 260)제사중(해인) : 이중의 오중해인 가운데 네 번째 해인이다. 상권 1 각주 258) 참조.
  261. 261)삼중의 오중해인으로서, 이중의 제사중해인인 이타행 4구를 다시 오중해인에 분배한 것이다.
  262. 262)이타행 4구 중 첫 구인 ‘能人海印三昧中’은 삼중 오중해인의 제일중해인인 영리해인影離海印에, 둘째 구인 ‘繁出如意不思議’는 제이중해인인 영현해인影現海印에 배대된다.
  263. 263)이타행 4구 중 제3구인 ‘雨寶益生滿虛空’은 삼중 오중해인 중 제삼중해인에 배대된다.
  264. 264)이타행 제4구인 ‘衆生隨器得利益’은 삼중 오중해인 중 제사중해인과 제오중해인에 배대된다. 이 가운데 ‘衆生隨器’는 제사중해인, ‘得利益’은 제오중해인에 배대된다.
  265. 265)『일승법계도』(H2, 3c16~17; H6, 811b13~15).
  266. 266)이타행 4구가 배대된 이중의 제사중해인이다.
  267. 267)「법성게」 이타행 4구 중 처음 구인 ‘能人海印三昧中’을 가리킨다.
  268. 268)「법성게」 이타행 4구 중 제2구인 ‘繁出如意不思議’를 가리킨다.
  269. 269)「법성게」 이타행 4구 중 제3구인 ‘雨寶益生滿虛空’을 가리킨다.
  270. 270)열 보법(十普法) : 인人ㆍ법法, 이理ㆍ사事, 교敎ㆍ의義, 해解ㆍ행行, 인因ㆍ과果 등. 상권 1 각주 38) 참조.
  271. 271)「법성게」 이타행 4구 중 제4구인 ‘衆生隨器得利益’을 가리킨다.
  272. 272)이중 오중해인 가운데 네 번째 해인이다. 즉 이타행 4구가 배대된 제사중해인이다.
  273. 273)정장정淨藏定 : 상권 1 각주 18) 참조.
  274. 274)정위正爲 : 화엄교학에서 화엄교가 위하는 근기를 다섯 가지로 나눈 가운데 첫 번째 근기이다.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정위正爲이다. 일승의 함께하지 않는 가르침(不共敎) 가운데 보현보살의 근기이며 『화엄경』이 바로 위하는 근기이다. ② 겸위兼爲이다. 이 다함없는 화엄교를 보고 듣고 믿어서 금강의 종자를 이루어 앞으로 반드시 이 원융한 보법을 얻을 근기이다. ③ 인위引爲이다. 화엄교에 대해 오랫동안 점차적으로 교의 근원을 궁구하여 앞으로 이 보현법계를 얻을 근기이지만 한량없는 겁 동안 이 경을 믿지 않았으므로 이만큼의 겁을 지나야 믿고 받을 수 있으리라고 안다. ④ 전위轉爲이다. 모든 이승二乘의 근기로서, 이승은 근기가 둔하기 때문에 먼저 함께하는 대승의 가르침(共教大乘)에 회심하여 들어와서 보살의 명칭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이 보현의 법에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은 오직 보살만을 위하는 것으로 이승은 포섭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⑤ 원위遠爲이다. 모든 범부와 외도와 일천제의 근기이다. 이들이 모두 불성이 있지만 장애가 무거워서 매우 오랜 후에야 이 법에 들어올 수 있다. 법장, 『화엄경탐현기』(K47, 467b4~468a7; T35, 117a2~c9).
  275. 275)겸위兼位ㆍ전위轉位ㆍ인위引位ㆍ원위遠位 : 위의 각주 274) 참조.
  276. 276)『육십화엄』 「菩薩明難品」(K8, 36a23; T9, 427c8~9) 중 보수보살寶首菩薩의 게송 가운데 한 구절이다.
  277. 277)정광파리 거울 : 『육십화엄』 「佛小相光明功德品」(K8, 229a5~10; T9, 606a10~16)에서는 정광금파려 거울(錠光金玻瓈鏡)이 시방세계와 같아서 그 거울에 한량없는 세계 등이 모두 나타나는 것을 보지만 그 영상이 거울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일체의 업보도 이와 같다고 한다. 『팔십화엄』 「여래수호광명공덕품」 (K8, 728a5~6; T10, 256c21~22)에는 이 ‘파려 거울’이 ‘능히 비춤’이라는 이름(玻瓈鏡名爲能照)으로 번역되어 있다. 파려는 인도 파려국에서 나는 보배라 하여 파려라 이름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지며. 파려의 한자 표기는 ‘파려’ ‘파리’ 등 다양하다.
  278. 278)『心輪鈔』 : 『총수록』에 2회 인용되어 있으나 저자나 저술 시기 등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여기서는 『화엄경』을 거론할 때 아홉 모임(九會)으로 말하여 『팔십화엄』에 의거하면서도 실제 경문은 『육십화엄』으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279. 279)『육십화엄』 「야마천궁보살설게품」(K8, 74c12; T9, 466a27).
  280. 280)『육십화엄』 「야마천궁보살설게품」(K8, 74c12; T9, 466a28).
  281. 281)『육십화엄』 「보현보살행품」(K8, 233c8; T9, 611a24~25)에 “부처님의 설ㆍ보살의 설ㆍ국토의 설ㆍ중생의 설ㆍ삼세 일체의 설을 보살이 분별하여 안다.”라는 구절이 있다. 법장은 『화엄경지귀』(T45, 592c16~18)에서 음성설법을 풀이하는 가운데 일체법이 음성을 내어 법을 설한다는 경증으로 이 경문을 들고 있다.
  282. 282)『총수록』(H6, 787a19).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반시」; H6, 768a.
  283. 283)두 가지 아집 : 인아집과 법아집을 가리킨다.
  284. 284)말나식(末那) : ⓢ manasvijñāna. 유식학파의 팔식설八識說 가운데 제7식을 가리킨다. ‘말나’는 산스크리트 manas의 음사로서 염오의染汚意ㆍ사량식思量識ㆍ의意 등으로도 한역한다. 이 말나에는 사량思量의 뜻이 있으며, 사량의 내용은 마음속의 인식 대상을 집착하면서 인식한다는 뜻이 있다. 이 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을 대상으로 그것을 자아라고 집착하여 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ㆍ아치我癡 등의 네 가지 번뇌를 항상 야기하는 역할을 한다.
  285. 285)아려야식(黎耶) : ‘려야黎耶’는 구역舊譯으로서 제8아려야식을 가리킨다. 신역新譯으로는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286. 286)전5식前五識 : 제6의식(意識) 이전의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의 다섯 가지 식을 말한다.
  287. 287)여덟 바다(八海) :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있는 여덟 바다로서, 여기에서는 팔식을 비유한 것이다. 수미산 둘레에는 차례로 거제라佉提羅(ⓢ Khadiraka)ㆍ이사타라伊沙陀羅(ⓢ Īṣādhara)ㆍ유건타라遊乾陀羅(ⓢ Yugaṃdhara)ㆍ소달리사나蘇達梨舍那(ⓢ Sudarśana)ㆍ안습박갈나安溼縛朅拏(ⓢ Aśvakarṇa)ㆍ니민타라尼民陀羅(ⓢ Nimimdhara)ㆍ비나다가毘那多迦(ⓢ Vinataka)ㆍ작가라斫迦羅(ⓢ Cakravāḍa)의 여덟 산이 있으며, 이들 산과 산 사이에 각기 하나의 바다가 있으므로 모두 여덟 바다가 된다. 『起世經』 「世住品」(K19, 331a12~b13; T1, 356b28~c18), 『長阿含經』(K17, 1009c13~1010a16; T1, 139a23~139b17) 등 참조.
  288. 288)세 종류의 경계 : 아려야식의 세 가지 대상인 종자種子, 전5근前五根, 기세간器世間을 가리킨다.
  289. 289)세친, 『십지경론』(K15, 15b4; 15a5; T26, 133a29). 이것은 『십지경』에 나오는 게송으로, 세친이 이를 주석하면서 다시 인용한 것이다. 『팔십화엄』(K8, 635c13; T10, 180c21)에는 동일하게 ‘非初非中後’로 되어 있지만, 『육십화엄』(K8, 164c7; T9, 544b10)에는 ‘無中亦無後’로 되어 있다.
  290. 290)세친, 『십지경론』(K15, 15b5; T26, 133b1).
  291. 291)지엄, 『수현기』(K47, 36c5~6; T35, 53b14).
  292. 292)2천 가지 도道의 품목(二千道品) : 『화엄경』 「이세간품」의 2천 가지 문답을 가리킨다. 상권 1 각주 59) 참조.
  293. 293)『화엄경』 「십지품」(K8, 169b14~19; T9, 548c21~27) 이구지離垢地의 항목에 의거하면 성품이 살생하지 않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294. 294)『화엄경』 「십지품」(K8, 169b19~c3; T9, 548c27~549a5) 이구지離垢地의 항목에 의거하면 성품이 거짓말하지 않는 것, 이간질하지 않는 것, 욕하지 않는 것, 번드레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295. 295)『화엄경』 「십지품」(K8, 169c3~7; T9, 549a5~9; T10, 185a21~b25) 이구지離垢地의 항목에 의거하면 성품이 탐하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삿된 견해를 여의는 것이다.
  296. 296)이 제사중해인은 이중의 제사중해인이다. 즉 앞의 『대기』에서 풀이한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오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네 번째 해인이다. 이 『대기』에서는 이하 동일.
  297. 297)이 제삼중해인은 이중의 제삼중해인이다. 즉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오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세 번째 해인이다. 이 『대기』에서는 이하 동일.
  298. 298)위광威光 : 『팔십화엄』 제1회 「비로자나품」(K8, 488c8~491c13; T10, 54c11~57c15)에 나오는 대위광大威光 태자를 가리킨다. 대위광 태자는 부처님을 뵙고 공양 올린 후 여러 겁의 수행을 통해 본래 자리에 되돌아간다고 설해진다. 『육십화엄』(K8, 25c11; T9, 417a6)에서는 ‘보장엄동자普莊嚴童子’이다.
  299. 299)선재善財 : ⓢ Sudhana.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의 「입법계품」과 『사십화엄』에 나오는 구도자를 가리킨다. 선재동자는 각성覺城(『팔십화엄』에서는 福城)에서 문수보살을 처음 만나 발심하고 53선지식을 찾아 보살도를 묻고 실천하여 해탈함을 보이고 있으니 법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는 법계로 향해 가는 점차적인 단계를 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위가 일체의 지위인(一位一切位) 일승보살 계위를 다양한 방편으로 교설하고 있는 것이다.
  300. 300)정장정淨藏定은 『육십화엄』 「노사나불품」에서 설주인 보현보살이 드는 ‘일체여래정장삼매一切如來淨藏三昧’(K8, 16c19~22; T9, 408b13~16)이다. 대위광 태자는 「노사나불품」의 보장엄동자이다. 한편 『육십화엄』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비목다라선인을 찾아가 그의 해탈법문을 듣고 정장정, 즉 ‘명정장삼매明淨藏三昧’를 얻는다. 참고로 보현보살이 들어가는 삼매가 『팔십화엄』 「보현삼매품」(K8, 463b4~6; T10, 32c26~28)에서는 ‘일체제불비로자나여래장신一切諸佛毘盧遮那如來藏身’ 삼매로 설해진다. 그리고 선재동자가 비목다라선인의 처소에서 들어가는 삼매가 『팔십화엄』(K8, 830b21~23; T10, a5~6)과 『사십화엄』(K36, 45b13~15; T10, 698b1~2)에서는 ‘비로자나장삼매광명毘盧遮那藏三昧光明’으로 되어 있다.
  301. 301)이 제오중해인은 이중의 제오중해인이다. 즉 오중해인 중 다섯째 어언해인을 다시 오중으로 배대한 가운데, 수행방편 4구가 배대된 다섯 번째 해인이다. 이 『대기』에서는 이하 동일.
  302. 302)다섯 가지 모습(五相) : 지엄의 『입법계품초』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지엄의 현존하는 다른 저술에는 「입법계품」을 다섯 가지 모습으로 분과하는 구절이 있다. 이후 법장, 징관 등도 「입법계품」을 분과할 때 다섯 가지 모습의 분과를 수용한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지엄, 『수현기』(K47, 69a18~b23; T35, 90a20~c2)
    一顯位修行相初四十一人 (① 文殊菩薩~㊶ 瞿夷釋迦女)
    二會緣入實相次摩耶一人 (㊷ 摩耶夫人)✽ 『수현기』에는 두 번째에 마야부인 1인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지엄의 후기 저작인 『공목장』(T45, 585b23~24)과 법장의 『화엄경탐현기』(T35, 451a28~b1), 그리고 징관의 『대방광불화엄경소』(T35, 918b9~10)에는 이 두 번째에 ㊷ 摩耶夫人부터 51 德生童子와 有德童女까지를 배대하고 있다.
    三攝德成因相彌勒一人 (52 彌勒菩薩)
    四智照無二相重會文殊一人 (53 文殊菩薩)
    五顯因廣大相普賢一人 (54 普賢菩薩)
  303. 303)삼생三生 : 화엄교, 즉 원교의 행위行位를 과보에 의거하여 세 가지로 구분한 것으로, 즉 견문생見聞生ㆍ해행생解行生ㆍ증입생證入生을 가리킨다. 법장의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489c4~15)에 의거하면, ① 견문생은 『화엄경』의 다함없는 법문을 보고 들어서 금강과 같은 견고한 종자 등을 이루는 지위이다. ② 해행생은 견문생의 다음 생으로, 예를 들어 도솔천자 등이 부처님의 광명을 받아서 지옥도로부터 나와서(견문생) 도솔천에 태어나 일생에 이구삼매離垢三昧가 현전하고 십지의 무생법인 등을 얻는 지위이다. 또 선재동자가 십신부터 십지에 이르기까지 선지식의 처소에서 일생에 한 몸으로 보현의 모든 행위를 구족하는 지위로도 설명된다. ③ 증입생은 증과해위證果海位라고도 하며 해행解行에 의해 구경의 과해에 들어가는 지위로서, 예를 들어 미륵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내가 미래에 바른 깨달음을 이룰 때에 네가 마땅히 이를 보리라.”라고 한 것과 같은 지위이다. 징관은 『대방광불화엄경소』(T35, 921a13~18)에서 삼생을 각각 선재동자의 전생, 현생, 미래생에 배대하기도 한다.
  304. 304)징관은 『청량소초』(T36, 12a12~23)에서 다른 보살들은 한량없는 겁 동안 수행하여야 보살의 원행願行을 만족하고 모든 불보살들을 친근親近하지만 선재와 대위광 태자의 경우 한 생(一生)에 보현행을 원만히 한다고 한다.
  305. 305)삼아승지겁(三祗劫) : ⓢ trikalpāsaṃkhyeya. 삼대아승지겁三大阿僧祇劫ㆍ삼아승기야三阿僧企耶ㆍ삼승지三僧祇라고도 하며, 보살의 수행이 성만成滿하여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경과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셋으로 나눈 것이다. 삼아승지겁 각각에 어떤 수행 계위를 배대하는가는 부파, 학파, 종파마다 일정하지 않다. 일례로 무착의 『섭대승론』(K16, 1304c8~18; T31, 146a25~b4)에서는 초아승지겁을 십지 이전에, 제2아승지겁을 제1지부터 제7지에, 제3아승지겁을 제8지부터 제10지에 배대하기도 한다.
  306. 306)사상四相 : 유위법이 변천하는 모습을 네 가지로 설명한 것으로,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말한다. 사유위四有爲ㆍ사유위상四有爲相이라고도 한다.
  307. 307)원효는 『대승기신론별기』(T44, 232c5~8)에서 무념無念을 얻지 못한 때에는 생ㆍ주ㆍ이ㆍ멸의 일체 심상心相이 모두 다 꿈임을 두루 알지 못하지만 무념을 얻은 부처님은 일체중생이 무명에서 잠자고 사상에서 꿈꾸고 있음을 두루 안다고 설한다. 법장도 『大乘起信論義記』(T44, 259a13~24)에서 원효의 설을 이어받아 풀이하고 있다.
  308. 308)『총수록』에 수록되어 있는 『대기』의 앞부분에는 ‘20가지 꿈(二十夢)’이란 말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뒤에 실려 있는 『법기』(H6, 789c16)에 ‘20가지 꿈(二十夢)’의 용례가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지엄은 『공목장』(T45, 570c20~571b5)에서 11조림의 번뇌를 설명하면서 번뇌잡염은 그 현행現行ㆍ연緣ㆍ수면隨眠ㆍ소연경所緣境ㆍ추중麁重이 모두 20가지의 모습을 지닌다고 설한다.
  309. 309)인연관 : 표훈이 의상의 사구게에 대해 지은 오관석五觀釋 중 마지막이 인연관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상권 1 각주 147)과 해당 본문 참조.
  310. 310)『일승법계도』(H2, 4a6~8; H6, 811b22~24).
  311. 311)십안十眼 : 상권 1 각주 136) 참조.
  312. 312)이 구절은 『십지경』의 “(성스러운 도는) 모든 갈래를 멀리 여의었으며 열반의 모습과 같아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 말로 설할 바가 아니다.”〔『십지경론』(K15, 15b16~17; T26, 133b11~12)〕라는 게송을 세친이 주석한 내용 중 일부분이다. 『십지경론』(K15, 15a4~b17; T26, 133a8~b12). 『일승법계도』(H2, 5c16~17)에서도 구래불舊來佛을 설명하는 가운데 번뇌의 끊음과 아직 끊지 않음을 논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한다.
  313. 313)세 가지 독(三毒) : 탐貪ㆍ진瞋ㆍ치癡를 가리킨다.
  314. 314)『총수록』(H6, 789b16).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1a 「반시」; H6, 768a.
  315. 315)미세微細 : 지엄을 비롯한 화엄교학에서는 일승교 또는 화장세계 등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을 설할 때 미세微細와 인드라그물(因陀羅)의 경계를 자주 이용한다. 미세와 인드라그물의 경계는 법계연기를 나타내는 십현연기문에 인드라그물의 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과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으로 표현된다.
  316. 316)상권 1 각주 315) 참조.
  317. 317)화장정토華藏淨土 : 화장장엄세계해華藏莊嚴世界海를 정토로 보고 이를 붙여서 줄인 말이다. 화장장엄세계해에 대해서는 상권 1 각주 77) 참조.
  318. 318)하나의 바다(一海) : 화장장엄세계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319. 319)세 품류(三品) : 『화엄경』에서 하나의 화장장엄세계해를 향수해香水海와 세계종世界種과 세계世界의 셋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상권 1 각주 142) 참조.
  320. 320)『일승법계도』(H2, 1b14; H6, 791b15)에는 ‘법계에 응하여 들어맞고 십세에 상응하여(應稱法界。 十世相應。)’의 순서로 설해져 있다.
  321. 321)20가지 꿈 : 상권 1 각주 308) 참조.
  322. 322)시각始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비로소 얻는 깨달음을 말한다. 즉 후천적인 수습修習을 통해 차례대로 비롯함 없는 미혹을 끊어 점차적으로 마음의 근원을 깨닫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본래 적정寂靜하고 부동不動하여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어서 청정하여 물듦이 없음을 본각本覺이라 하고, 후에 무명의 바람이 움직여 세속의 의식意識 활동을 일으키고, 이에 세간의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을 불각不覺이라고 한다. 이러한 불각의 상태에서 부처님 법을 받아 듣고(受聞) 본각을 계발하여 불각에 훈습되지 않고 아울러 본각과 더불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시각이라고 한다.
  323. 323)본각本覺 : 본래 갖추어져 있는 각성覺性, 또는 부처님의 본래의 깨달음을 말한다. 시각始覺과 상대되는 말이다. 중생에게 본래 구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번뇌에 오염되거나 상에 미혹되지 않는 본래 청정한 깨달음의 본체를 말한다. 『대승기신론』(K17, 703c13~19; T32, 585a7~12)에 의하면 시각인 때에 곧 본각이어서 별도의 각覺이 발생하여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324. 324)세 덕(三德) : 부처님의 과위果位에 갖추어져 있는 지덕智德ㆍ단덕斷德ㆍ은덕恩德의 세 가지 덕상德相을 말한다. ① 지덕智德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일체 모든 법을 관찰하는 지혜의 덕이다. ② 단덕斷德은 일체의 번뇌 혹업惑業을 다 없애는 덕이다. ③ 은덕恩德은 중생제도의 원력으로 중생에게 은혜를 베푸는 덕이다. 『청량소』에서는 “중생을 구호하여 은덕을 성취하고, 번뇌를 길이 끊어 단덕을 이루며, 모든 행을 밝게 알아서 지덕을 이룬다.(救護衆生成就恩德。 永斷煩惱成於斷德。 了知諸行成於智德。)”라고 하였다.(T35, 589c12~14).
  325. 325)‘약약관석若約觀釋’에서 ‘관석觀釋’을 숭업이 지은 저술로 볼 수도 있지만, 첫째, 뒤에서 관觀에 따라서 도인을 풀이하고, 둘째, 『총수록』에 인용된 『관석』의 구절을 볼 때 『관석』이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로서 도인을 직접 주석한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저술명이 아니라 관법의 관觀으로 생각된다.
  326. 326)『육십화엄』 「십지품」(K8, 184a11; T9, 564a20~21). 경문에는 ‘現’이 ‘見’으로 되어 있다.
  327. 327)『육십화엄』 「십지품」(K8, 184a9; T9, 564a16~17). 경문에는 ‘無數億’이 ‘無量數’로 되어 있다.
  328. 328)『사십화엄』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K36, 229b6~7; T10, 847b27~28).
  329. 329)『육십화엄』 「불부사의법품」(K8, 222c24~223a1; T9, 601a12~13). 경문에는 ‘一切’ 다음에 ‘諸’가 더 있다.
  330. 330)『육십화엄』 「초발심보살공덕품」(K8, 64c24; T9, 454b13~14).
  331. 331)『팔십화엄』 「화장세계품」(K8, 486b22; T10, 52b4~5).
  332. 332)『육십화엄』 「노사나불품」(K8, 18a23~24; T9, 409c6~7).
  333. 333)『팔십화엄』 「여래출현품」(K8, 749a22~23; T10, 275b23~24). 경문에는 ‘菩薩’이 ‘菩薩摩訶薩’로 되어 있다.
  334. 334)『팔십화엄』 「여래출현품」(K8, 749a24~b1; T10, 275b25~26).
  335. 335)『육십화엄』 「보왕여래성기품」(K8, 249c19; T9, 627c1~3).
  336. 336)『팔십화엄』 「세주묘엄품」(K8, 454b19~20; T10, 24c25~26). 경문에는 ‘衆生界’가 ‘衆生海’로 되어 있다.
  337. 337)『팔십화엄』 「불부사의법품」(K8, 710b4~5; T10, 242b25~27).
  338. 338)『팔십화엄』 「화장세계품」(K8, 471a20~21; T10, 39b28~29).
  339. 339)법장, 『화엄경탐현기』(K47, 469a17; T35, 118c27~28).
  1. 1){底}高麗大藏經卷四四(補遺版庭凾) {甲}續藏經第二編八套四册。義湘撰。華嚴一乘法界圖 {乙}新修大藏經。第四十五卷。法界圖記叢髓錄。
  2. 2)「一」上有「華嚴」{甲}。
  3. 3)「合詩一印」無有{甲}。
  4. 4)「之」無有{甲}。
  5. 5)「守」作「字」又冠註曰字疑守{甲}。
  6. 6)「跡」作「迹」{甲}。
  7. 7)「勤」作「懃」{甲}。
  8. 8)「未」作「末」又冠註曰未一作末{甲}。
  9. 9)「盤」作「槃」{甲}。
  10. 10)「異」作「冀」{甲}{乙}。
  11. 11)「盤」作「繁」{甲}。
  12. 12)「人」作「入」{甲}。
  13. 13)「妄」作「忘」{甲}。
  14. 14)「訂」通「證」於此書編次同。
  15. 15)「弟」作「第」{乙}。
  16. 16)「着」作「著」{乙}次同。
  17. 1)「弟」作「第」{乙}次同。
  18.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19. 2)「有」上疑脫「外」{編}。
  20. 3)▣作「二」{乙}ㆍ疑「三」{編}。
  21. 1)「弟」作「第」{乙}。
  22. 2)「矣」作「焉」{乙}。
  23. 3)「娑」作「婆」{乙}。
  24. 1)▣▣作「爲十」{乙}。
  25. 2)「于」疑「干」{編}。
  26. 3)「禨」作「機」{乙}。
  27. 4)「下」作「不」{乙}。
  28. 1)▣字形未詳{底}ㆍ作「穿」{乙}。
  29. 2)「弟」作「第」{乙}次同。
  30. 3)「俠」作「狹」{乙}次同。
  31. 4)「笇」作「算」{乙}。
  32. 5)「設」作「說」{乙}。
  33. 1)「田」旨歸章作「由」{編}。
  34. 2)「一」殘存點劃{底}ㆍ無有{乙}。
  35. 3)「訂」通「證」於此書{編}次同。
  36. 4)「免」作「兎」{乙}次同。
  37. 5)「婆」作「波」{乙}。
  38. 6)「導一」作「道二」{乙}。
  39. 7)「關」作「開」{乙}。
  40. 1)「弟」作「第」{乙}次同。
  41. 2)▣▣▣作「二無住」{乙}。
  42. 3)」作「觀」{乙}次同。
  43. 4)▣作「塵」{乙}。
  44.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45. 2)「丈」作「文」{乙}。
  46. 1)「云」作「六」{乙}。
  47. 2)「甚」作「其」{乙}。
  48. 1)「五」作「玉」{乙}。
  49. 2)「訂」通「證」於此書編次同。
  50. 3)「弟」作「第」{乙}。
  51. 1)▣字形未詳{底}ㆍ作「空」{乙}。
  52. 2)▣字體未詳{底}ㆍ作「三」{乙}。
  53. 3)▣字體磨滅{底}ㆍ作「心」{乙}。
  54. 4)▣字體磨滅{底}ㆍ作「波」{乙}。
  55. 5)▣▣▣。字體磨滅{底}ㆍ作「波因海」{乙}。
  56. 6)▣字體磨滅{底}ㆍ作「因」{乙}。
  57. 7)▣▣字體磨滅{底}ㆍ作「大法」{乙}。
  58. 8)▣字體磨滅{底}ㆍ作「至」{乙}。
  59. 9)▣字體磨滅{底}ㆍ作「一」{乙}。
  60. 10)▣字體磨滅{底}ㆍ作「云」{乙}。
  61. 11)「一一」作「二」{乙}。
  62. 1)▣字體磨滅{底}ㆍ作「彼」{乙}。
  63. 2)▣字體磨滅{底}ㆍ作「此」{乙}。
  64. 3)▣字體磨滅{底}ㆍ作「即」{乙}。
  65. 4)▣字體磨滅{底}ㆍ作「云」{乙}。
  66. 5)「一」殘存点劃{底}ㆍ無有{乙}。
  67. 1)「免」作「免」{乙}次同。
  68. 2)「菱」作「麥」{乙}。
  69. 3)「析」作「折」{乙}。
  70. 4)「鑯」作「鐵」{乙}。
  71. 5)「弟」作「第」{乙}次同。
  72. 6)「示」作「亦」{乙}。
  73. 1)「捋」作「將」{乙}。
  74. 2)▣字形未詳{底}ㆍ作「禮」{乙}。
  75. 1)「弟」作「第」{乙}。
  76. 2)「田」作「由」{乙}。
  77. 1)「四非」作「罪」{乙}。
  78. 2)「則」作「財」{乙}。
  79. 3)「未」作「末」{乙}。
  80. 4)▣▣字體磨滅{底}ㆍ作「能見」{乙}。
  81. 5)▣字體磨滅{底}ㆍ作「師」{乙}。
  82. 1)「法」作「注」{乙}。
  83. 2)「具」作「眞」{乙}。
  84. 1)「弟」作「第」{乙}次同。
  85. 2)「一」作「十」{乙}。
  86. 1)「匹」作「叵」{乙}。
  87. 2)▣字體磨滅{底}ㆍ作「井」{乙}。
  88. 3)▣▣字體磨滅{底}ㆍ作「不得」{乙}。
  89. 4)▣▣▣字體磨滅{底}ㆍ作「藏而還」{乙}。
  90. 5)▣字體磨滅{底}ㆍ作「之」{乙}。
  91. 6)▣字體磨滅{底}ㆍ作「是」{乙}。
  92. 7)▣▣字體磨滅{底}ㆍ作「莖六」{乙}。
  93. 8)▣▣字體磨滅{底}ㆍ作「無所」{乙}。
  94. 9)「弟」作「第」{乙}次同。
  95. 10)▣字體磨滅{底}ㆍ作「是」{乙}。
  96. 1)▣▣▣字體磨滅{底}ㆍ作「流所目」{乙}。
  97. 2)▣字體磨滅{底}ㆍ作「故」{乙}。
  98. 3)▣▣字體磨滅{底}ㆍ上一字作「擧」{乙}。
  99. 4)「即」無有{乙}。
  100. 5)▣字體磨滅{底}ㆍ作「問」{乙}。
  101. 6)「无」作「先」{乙}。
  102. 7)「弟」作「第」{乙}。
  103. 8)「訂」通「證」於此書{編}次同。
  104. 1)「缺」作「鈌」{乙}。
  105. 1)▣▣字體磨滅{底}ㆍ上一字作「等」{乙}ㆍ下一字或可讀「法」{編}ㆍ高麗大藏經作「善法」{編}。
  106. 2)「亦」無有{乙}。
  107. 3)「一一」作「三」{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