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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당유고無用堂遺稿
무용집無用集 서문
찬국 옹餐菊翁은 말한다.
죽음과 이웃하기가 두려워서 다섯 번이나 땅을 옮겼으나 가는 곳마다 온갖 재앙을 만나 피하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구두초약狗竇抄藥1)구두초약狗竇抄藥 : 개구멍으로 음식을 들여오고 방 안에 틀어박혀 약방문藥方文이나 정리한다는 뜻으로, 남의 비방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접촉이나 외출을 피하는 등 철저히 몸단속을 하면서 자숙自肅하는 것을 말한다. 당 덕종德宗 때 육지陸贄가 모함을 받아 충주별가忠州別駕로 폄직貶職된 뒤에 비방을 피하기 위하여 문을 흙으로 봉쇄하고(土塞其門), 김치와 같은 음식물도 모두 개구멍으로 들여오게 하는가 하면(鹽菜之類。 皆由狗竇而入。), 오직 방에 단정히 들어앉아서 고금의 약방문을 정리하여(端坐一室抄藥方) 50권으로 만들었다는 ‘합호피방闔戶避謗’의 고사가 있다.(『山堂肆考』 권81 「抄古方」)을 하는 것도 아예 포기한 채 오직 숙세宿世의 인연으로 유희삼매遊戱三昧(無碍自在)의 경계에서 노닐며, 그동안 감추어 둔 붓에 애써 입김을 불어넣어 조계曹溪의 무용無用 선자禪子를 간파看破하는 것으로 공안公案을 삼았다.
지난해에 어떤 객客이 무용의 시문 몇 구절을 외우며 옹翁에 대하여 묻기를, “이이는 그의 스승인 백암栢巖과 비교해서 어떠한가?”라고 하기에 “혜가慧可가 정수精髓를 얻었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2)혜가慧可가 정수精髓를~있는 일이다 : 혜가가 달마達磨의 정수를 얻은 것처럼, 무용도 백암의 정수를 얻어서 의발을 전해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제자 4인의 경지를 점검하면서, 3인에게는 각각 나의 가죽(皮)과 살(肉)과 뼈(骨)를 얻었다고 한 뒤에, 마지막 혜가에 대해서는 나의 정수(髓)를 얻었다고 하며 의발衣鉢을 전수한 고사가 전한다.(『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 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어쩌면 저화비영咀華蜚英의 풍조3)저화비영咀華蜚英의 풍조 : 알찬 내용보다는 겉치레 위주로 꾸며서 명성을 드날려 보고자 하는 경박한 세태를 말한다. ‘저화咀華’는 한퇴지韓退之가 지은 「進學解」의 “향기 물씬한 미문美文에 흠뻑 젖고 그 꽃술을 입에 머금고 씹어서 문장을 짓는다.(沈浸醲郁。 含英咀華。 作爲文章。)”라는 구절에서 발췌한 것이고, ‘비영蜚英’은 『史記』 「司馬相如列傳」의 “꽃다운 명성을 드날리고 무성한 내용을 치달린다.(蜚英聲。 騰茂實。)”라는 말에서 발췌한 것이다. 에 휩쓸려 물든 것으로서, 그 집안에서 말하는 법진法塵4)법진法塵 : 불교 용어인 육진六塵의 하나로, 의식意識에 의해 생겨나는 제법諸法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제법이 정식情識을 오염시키는 까닭에 번뇌의 의미를 지닌 진塵이라는 말을 써서 법진이라고 한 것이다. 에 돌아가지 않으면 칠원漆園(莊子)의 찌꺼기 법으로 돌아간다고 비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그의 문집을 상고해 보건대, 대개 아무렇게나 지은 불협화음이 아니요, 백업白業(善業)에 마음을 정진한 뒤의 여가에 지은 아름다운 말들인데, 이 역시 금구목설金口木舌5)금구목설金口木舌 : 금 입에 나무 혀라는 뜻으로, 목탁木鐸을 가리키는데, 목탁을 쳐서 경계시키는 것처럼 성인의 가르침을 선양하여 대중을 계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한나라 양웅揚雄의 『法言』 「學行」의, 공자의 도를 세상에 알리려면, “제유諸儒의 입을 금으로 하고 혀를 목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莫若使諸儒金口而木舌)”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의 뜻에서 나와 방편으로 지은 것들이라고 하겠다.
시험 삼아 한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가령 “나의 자취만을 알 뿐, 나의 근본은 알지 못하는데, 나는 문자 없는 광대한 경을 지니고 있다.”6)나의 자취만을~지니고 있다 : 본서 하권 「백암 화상 문집 서문(栢庵和尙文序)」 말미에 나온다. 라는 『백암집栢巖集』의 서문으로 말하면, 저산杼山의 「방기필연문放棄筆硏文」에 나오는, “나는 그대를 부리느라 피곤하고, 그대는 나의 무지가 곤혹스러울 것이니, 내 장차 그대를 놓아주어 각기 본성에 돌아가게 하고자 한다.”7)저산杼山의 「방기필연문放棄筆硏文」에~하고자 한다 : 저산杼山은 당대唐代의 저명한 시승詩僧인 교연皎然을 가리킨다. 장성長城 사씨謝氏의 아들로, 이름은 주晝이며, 사영운謝靈運의 10세손이라고 하는데, 호주湖州의 저산에 거하였으므로 저산이 그의 별칭이 되었다. 저서에 『內典類聚』ㆍ『杼山集』ㆍ『儒釋交遊傳』 등이 전한다. 『宋高僧傳』 권29 「杼山皎然傳」에, “그가 서울에 유력하면 공경公卿이 존중하고, 지방에 가면 방백方伯의 흠모를 받았다. 그리하여 처음에 시구詩句를 가지고 인도하여 불타佛陀의 지혜에 들어오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의 행화行化하는 뜻이 본래 여기에 있었다.(凡所遊歷京師則公相敦重。 諸郡則邦伯所欽。 莫非始以詩句牽勸令入佛智。 行化之意。 本在乎茲。)”라는 말이 나오고, 또 붓과 벼루(筆硯)를 돌아보면서, “나는 그대를 부리느라 피곤하고, 그대는 나의 무지가 곤혹스러울 것이니, 수십 년 동안 서로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 더군다나 그대는 외물이니 사람에게 어찌 얽매이겠는가. 여기에 있어도 그만이요 여기를 떠나도 그만일 것이니, 이제 그대를 놓아주어 각기 본성에 돌아가게 하고자 한다.(我疲爾役。 爾困我愚。 數十年間。 了無所得。 況汝是外物。 何累於人哉。 住既無心。 去亦無我。 將放汝。 各歸本性。)”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제자에게 출송黜送하도록 명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본문의 “放棄筆硏文”의 ‘筆硏’은 ‘筆硯’과 같다. 라는 내용과 몸은 달라도 마음은 합치되었다고 할 것이요, “그대는 나랏일 애쓰는 북쪽에서 온 나그네요, 나는 내 한 몸 좋게 하는 남쪽에 누운 중이로세.”8)그대는 나랏일~누운 중이로세 : 본서 상권 〈방백에게 올리다(上方伯)〉에 나온다. 라는 방백方伯에게 올린 시의 구절로 말하면, 선월禪月이 월越과 촉蜀 두 지방을 나그네로 떠돌 적에 지은, “칼 하나 서릿발 위엄”이나 “점점 늙어 가기에 마음먹고 건너왔소.”9)선월禪月이 월越과~마음먹고 건너왔소 : 선월은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승려로, 저명한 시인이요 화가인 관휴貫休를 가리킨다.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建寧 초에 오월吳越 지역에 갔을 때 오월왕吳越王을 자처하며 위세를 부린 진동군절도사鎭東軍節度使 전류錢鏐에게 올린 시 중에 “마루 가득 꽃에 취한 3천 명의 식객이요, 칼 하나 서릿발 위엄이 열네 고을에 떨치네.(滿堂花醉三千客。 一劍霜寒十四州。)”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전류가 ‘十四州’를 ‘四十州’로 고쳐 주면 만나겠다고 하자, “고을도 고치기 어렵고, 시도 고치기 어렵다. 한가한 구름과 외로운 학이 어느 하늘인들 날아갈 수 없겠는가.(州亦難改。 詩亦難改。 閒雲孤鶴。 何天不可飛耶。)”라고 하고는 즉시 행장을 꾸려 소매를 떨치고 떠났다는 고사가 전한다.(『山堂肆考』 권146 「善月投詩」) 그리고 소종昭宗 천복天復 연간에 촉蜀에 들어가자 전촉前蜀의 군주인 왕건王建이 예우하여 자의紫衣를 내리며 선월 대사禪月大師라고 칭하였는데, 그에게 지어 준 시에 “물병 하나 발우 하나 점점 늙어 가기에 1만 물 1천 산 마음먹고 건너왔소.(一甁一鉢垂垂老。 萬水千山得得來。)”라는 구절이 있었으므로 득득래 화상得得來和尙이라고 불렸다는 고사가 전한다.(『宋高僧傳』 권30, 『釋氏稽古略』 권3) 저서에 『西嶽集』이 있는데, 제자 담역曇域이 그 이름을 『禪月集』으로 고쳤다. 『古文眞寶』 전집前集 7권에 〈古意〉라는 제목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라는 구절과 입은 달라도 소리는 똑같다고 할 것이니, 그러고 보면 과거가 아닌 오늘날, 중국이 아닌 이 땅에서 문사文士와 사인詞人을 인도하여 불타의 지혜에 들어오게 하고, 또 웅번雄藩의 패주覇主를 우습게 보며 세상의 영화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말을 해도 좋을 것이다.
옹翁이 바야흐로 배사하어盃蛇河魚에 시달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베개를 밀치고 생기를 되찾았으니, 이는 거연居然히 유마 거사維摩居士가 문수文殊의 문병問病을 계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