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根本薩婆多部律攝卷第一

ABC_IT_K0934_T_001
024_0001_a_01L근본살바다부율섭(根本薩婆多部律攝) 제1권
024_0001_a_01L根本薩婆多部律攝卷第一


승우(勝友) 모음[集]
024_0001_a_02L尊者勝友集
의정(義淨) 한역
심재열 번역
김형준 개역
024_0001_a_03L三藏法師義淨奉制譯


바라저목차1)경 서(序)
024_0001_a_04L初釋波羅底木叉經序

예경하오니, 온갖 번뇌 조복하여서
중생 의혹 없애주는 바른 인[正因]이여,
다함없는 이익으로 널리 비추는 태양처럼
어두움을 모두 깨뜨려 없애시네.
024_0001_a_05L敬禮調伏除煩惱
滅衆生惑爲正因
如日廣照利無邊
咸能破盡諸冥闇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광률[廣釋:廣律]2)과 건도[諸事:犍度]3),
니타나(尼陀那)4)와 목득가(目得迦)5),
증일(增一)6)에서 16문(文)까지는
오파리(鄔波離)7) 존자가 여쭌 바라네.
024_0001_a_07L佛說廣釋幷諸事
尼陁那及目得迦
增一乃至十六文
鄔波離尊之所問

마납비가(摩納毘迦)8)께서 요점을 풀어주신
『비니득가(比尼得迦)』9)와 『본모(本母)』10)여,
저희들 이제부터 차례대로 광문(廣文)을 거두어
약본(略本)을 좋아하므로써 신속히 깨우치게 하여 주소서.
024_0001_a_09L摩納毘迦申要釋
比尼得迦幷本母
我今隨次攝廣文
令樂略者速開悟

별해탈경(別解脫經:戒本)은 듣기 어려우니
한량없는 구지겁(俱胝劫) 동안
경(經)을 독송하고 받아 지님도 그와 같으며
말씀대로 행하는 이는 더욱 만나기 어렵네.
024_0001_a_11L別解脫經難得聞
經於無量俱胝劫
讀誦受持亦如是
如說行者更難遇

이 가운데 첫 번째 게송의 뜻은 가르침[敎]과 수행[行]을 얻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다.
024_0001_a_13L此中初頌意明教行難得
‘별해탈(別解脫)’이라 함은, 별해탈경(別解脫經)에 의거해서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하품 하등[下下]의 9품(品)의 모든 미혹을 점차로 끊고 제거하여 영원히 퇴전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을 얻는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별해탈이라고 이름한다.
024_0001_a_14L言別解脫由依別解脫經如說修行於下下等九品諸惑漸次斷除永不退故諸煩惱而得解脫名別解脫
또 견도위(見道位)11)와 수도위(修道位)12)에서 끊는 번뇌는 그 종류가 각각 많은데, 각각의 품(品)에서 능히 버리고 여의는 것을 별해탈이라 이름한다. 미혹으로 말미암아 삼계의 바다에서 떠다니는 유정들을 위해서 먼저 마땅히 부지런히 해탈을 구해야 한다.
024_0001_a_17L又見修煩惱其類各多於別別品而能捨離名別解脫由惑漂沒三界有情爲此先應勤求解脫
‘경(經)’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일컫는 것으로서 외도(外道)의 가르침을 가려낸 것이다. ‘듣는다’고 함은 다른 이에게 말씀한 글과 뜻을 일컫는 것으로서, 귀의 식별을 통해서 받아들인 다음에 결단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분명히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024_0001_a_20L經謂佛語簡外道教聞者於他所說謂文及義以其耳識幷後決斷心而了知故
‘듣기 어렵다’고 한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을 적에만 한 번 만나 뵙는 것인 데다가 인간이나 하늘의 몸을 얻기도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024_0001_a_22L言難得者佛出世時乃一逢又善趣等極難得
024_0001_b_02L‘한량없는 구지겁’13)이라 함은, 바로 대겁(大劫)을 이르며 비록 수많은 겁을 지나더라도 계법(戒法)은 만나기 어렵다. 설사 이 대겁을 다 지난다 해도 만나기 어려우므로, 이것은 만나기 어려운 것의 극치를 나타낸 것이다.
024_0001_b_03L言無量俱胝劫者謂是大劫雖經多數戒法難逢設過於此亦難値遇此顯難遭之極
‘독송’이라 함은, 글 혹은 뜻을 지혜로써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받아 지닌다’ 함은, 저 두 가지에 대해 자주자주 기억하고 지녀 오랫동안 잊지 않는 것을 일컬으니, 생각하고 외우는 것 등을 부지런히 함으로써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024_0001_b_05L言讀誦者若文若義以慧領受言受持者謂於彼二數數憶持長時不忘由念誦等勤相應故
‘말씀대로 행한다’고 함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업에 있어서 큰 스승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어기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 만나기 어렵네.’라고 함은, 듣고[聞], 읽고[讀], 받아 지니는 것[受持]은 오히려 쉽지만,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용맹하고 부지런히 힘써야 바야흐로 계행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니, 열등한 마음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어려움을 나타낸 것이다.
024_0001_b_07L言如說行者於所作業以身語心順大師言無違犯故更難遇者聞讀受持斯猶易得如說行者極爲難遇勵精勤方全戒行非下劣心之所能故說更言彰極難也
여기에서는 가르침과 수행, 이것은 만나기 어려움을 밝힌 것이다. ‘듣고 독송하고 지닌다’ 함은 바로 그 가르침을 쫓아 받들고 닦아 익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곧 이것이 그 ‘행하는 것’이다.
024_0001_b_12L此中明教及行是難遭遇聞讀誦持謂是其教奉修習卽是其行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니 즐거움이요
미묘한 바른 법 설하시니 즐거움이요
승가의 한마음 같은 견해[同見]도 즐거움이요
화합하여 함께 닦고 용맹정진함도 즐거움이네.
024_0001_b_14L諸佛出現於世樂
演說微妙正法樂
僧伽一心同見樂
和合俱修勇進樂

이 게송의 뜻은 3보(寶)가 세상에 일어나면 온갖 사업이 모두 즐거움의 원인이 됨을 밝히려는 까닭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니 즐거움이다’라고 함은 이른바 태에 들어간 때와 현재 세상에 태어나신 때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다’고 일컫는 것이다.
024_0001_b_16L此頌意明三寶興世所有事業皆是樂因故言諸佛出現於世樂者謂入胎時現生時名佛出世
장차 진리를 이루게 되는 것에 의거해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며, 비록 보살이라고 해도 불타의 칭호를 받으니, 혹은 정각을 이룰 때를 불타의 출세라 말한다. 이때 일체지(一切智)를 이루어 불타란 호(號)를 얻기 때문이니, 이 묘한 해탈은 기쁨과 즐거움의 원인이기에 일컬어 즐거움이라 한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불을 일컬어 ‘즐거운 것’이라고 함과 같다.
024_0001_b_19L依將成理作如是說雖曰菩薩受佛陁稱或成正覺時名佛出世由於爾時成一切智得佛陁號是妙解脫喜樂因故說名爲樂猶如世人名火爲樂
024_0001_c_02L‘미묘한 바른 법을 설하니 즐거움이다’라고 함은 12분교(分敎)14)의 계경(契經) 등을 말하며, ‘승가(僧伽)’라 함은 여덟 대인[八大人] 등을 말한다.
‘한마음 같은 견해’라 함은 계견(戒見)ㆍ위의(威儀)ㆍ바른 생활[正命]을 대중이 다 같이 받들어 따르기 때문이다. 또 일심으로 함께하는 일은 무너뜨리기 어려움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이다.
024_0001_b_23L言演說微妙正法樂者謂契經等十二分教僧伽者謂八大人等言一心同見者謂於戒見威儀正命衆同遵故又明一心同事難可壞故
‘화합해서 함께 닦는다’고 함은, 곧 이 마음을 한결같이 해서 청정한 계율[淨尸羅]15)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맹하게 정진 한다’라고 함은, 세 가지 배우는 곳[三學處]16)에서 부지런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혹은 용맹심을 채찍질해서 모든 번뇌가 끝내 다하게 하기 때문이며, 또 마음으로 용맹하게 결단하여 수행하는 데로만 나아가고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니, 모두가 바로 즐거움의 인(因)이 된다.
024_0001_c_04L言和合俱修者卽是齊心俱淨尸羅故言勇進者三學處勤修行故或勇心策勵令諸煩惱究竟盡故又心勇決於所修事進無退故竝是樂因

성스러운 사람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요
함께 머무는 일 역시 즐거움이다
만일 어리석은 이들을 만나지 않으면
이것을 곧 항상 즐거운 일이라 하네.
024_0001_c_08L若見寶人則爲樂
幷與共住亦爲樂
若不見諸愚癡人
是則名爲常受樂

이 게송의 뜻은 어진 이를 친근히 하고 나쁜 벗을 멀리 여의는 것 역시 즐거움의 원인이 됨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위의 반 구(半句)와 아래의 반 구를 이어서 알아야 한다.
‘성스러운 사람’이라 함은, 죄악의 일을 멀리하고 버린다면 곧 이것이 성스러운 사람이다.
뛰어난 덕견(德見)이 있고, 또 같이 지내는 것은 둘 다 참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만일 선품(善品)을 닦지 않으면 대개는 악행을 일삼아 바른 진리에 미혹하게 된다. 때문에 어리석다고 한 것이니, 친근해서는 안 되며 속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024_0001_c_10L此頌意明親近善人遠離惡友亦是樂因故上半下半如次應識言寶人於罪惡事遠而捨棄卽此寶人有勝善德見及同住竝能生樂若不修善品多爲惡行迷於正理故曰愚癡不應親近速當捨離

계율[尸羅]을 갖춤을 보면 즐거움 삼고
많이 듣고 아는 이 보면 이 또한 즐거움 삼으며
아라한을 보면 이는 곧 참다운 즐거움이라 여기니
이로 말미암아 몸을 받아 나지 않기 때문이어라.
024_0001_c_16L見具尸羅者爲樂
若見多聞亦名樂
見阿羅漢是眞樂
由於後有不生故

이 게송의 뜻은 선우(善友)의 차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여러 성스러운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세속적인 것이고, 둘째는 거룩한 뜻이다. 세속적인 것에 다시 둘이 있으니, 하나는 선정에 머무는 분[住定分]이고, 둘은 지혜에 머무는 분[住慧分]이다.
‘계율을 갖춘다’ 함은 선정에 머무는 분을 일컫나니, 이것이 비록 세속의 거룩한 보배이긴 하지만 또한 능히 악을 멀리한다.
이것은 계(戒)로 말미암아 능히 선정을 일으킴을 밝혔기 때문이다.
024_0001_c_18L此頌意明善友差別然諸寶人有其二種一者世俗二者勝義世俗復二住定分住慧分言具尸羅者住定分雖是俗寶亦能遠惡此明因戒能發定故
024_0002_a_02L‘많이 들었다’ 함은 말하자면 지혜에 머무는 분(分)이다. 선정을 말미암아서 지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래의 반(半)은 선정과 지혜라는 두 법으로 평등하게 마음을 쓰기 때문에 구경처(究竟處)에 머물게 됨을 밝힌 것이다. 곧 이것이 거룩한 진리의 참된 선[勝義眞善]17)의 지식이다.
‘아라한’이라 함은, [생사에] 유전하는 가운데서 불생법(不生法)을 증득한 것이니, 번뇌와 뭇 괴로움의 결박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024_0001_c_23L言多聞者謂住慧分定發慧故下半明於定慧二法平等運心住究竟處卽是勝義眞善知識言阿羅漢者於流轉中證不生法從煩惱衆苦繫縛永得脫故

강가 나루터의 묘한 계단은 즐거움이요
법으로써 원수를 굴복시키고 싸움에서 이김도 즐거움이며
바른 지혜 증득하여 과(果)가 생길 때
아만을 남김없이 제거함도 즐거움이라네.
024_0002_a_04L於河津處妙階樂
以法降怨戰勝樂
證得正慧果生時
能除我慢盡爲樂

이 게송의 위의 반 구는 지극한 즐거움의 원인을 밝힌 것이고, 아래의 반 는 지혜를 내어 미혹을 끊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강가 나루터’라 함은 이른바 해탈이니, 강은 양극단18)의 허물을 떠났기 때문이다. 8정도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획득하는 것을 일컬어 ‘묘한 계단’이라고 한 것이다.
비유컨대 강가의 나루터에 묘한 계단길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나그네에게 즐거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024_0002_a_06L此頌上半明致樂之因下半明慧生斷惑言河津者謂解脫河離二邊過由八正道方能獲得名爲妙階若河津有妙階道是行旅樂因故
‘법으로써 원수를 굴복시키고 싸움에서 이김도 즐거움’이라 함은, 바른 수행법으로써 적을 물리치는 도구로 삼아 번뇌를 항복시켜 다시는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때문에 싸움에 이긴다고 한 것이다.
이어지는 아래 반 구의 게송은 지혜의 칼로 아만의 깃대를 베어 버림을 밝힌 것이니, 마라(魔羅)의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드러냄은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024_0002_a_10L以法降怨戰勝樂者此明以正行法爲捍敵具降伏煩惱令不更生故名戰勝次下半頌明以智劍斬我慢幢破魔羅軍彰勝樂故

능히 뜻을 결정할 수 있고
감관의 욕망을 잘 조복 받고 다문(多聞)을 갖추어서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숲 속에 있으면서
난야(蘭若)19)에 고요하고 한가로이 머묾은 즐거움이라네.
024_0002_a_14L若有能爲決定意
善伏根欲具多聞
從少至老處林中
寂靜閑居蘭若樂

이 게송은 앞에서 말한 바른 행을 닦는 사람의 두다(杜多)의 공덕이 원만하게 상응함을 밝힌 것이니, 이것은 즐거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뜻을 결정한다’라고 함은, 이른바 처음 깨끗한 마음을 일으켜서 지족행(知足行)을 하고 결단코 부지런히 하되 명리(名利)를 바라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다스려서 바깥 경계로부터 막아 보호하는 것이니, 해탈의 뛰어난 과[勝果]가 이로 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024_0002_a_16L此頌述前修正行人杜多功德圓滿相應是樂因故言決意者謂初發淨心爲知足行決斷策勤不希名利攝身心防護外境解脫勝果因此成
‘감관의 욕망을 잘 조복한다’ 함은, 이것은 조반(助伴)의 청정함이 계와 함께하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문(多聞)을 갖춘다’고 함은, 뛰어난 과[勝上果]를 얻는 것은 반드시 많이 들음에 의지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잘 살펴서 바야흐로 번뇌를 끊고, 어리석지 않은 이는 조용한 도량에 머무름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필추(苾芻:비구)는 먼저 다문을 배우니, 설사 많이 듣지는 못했더라도 다만 계의 내용[戒相]을 알면 고요한 도량에 머무를 수 있다.
024_0002_a_21L言善伏根欲者此顯助伴淸淨能與戒俱故言具多聞者此明獲勝上果必藉多聞智能簡擇煩惱方斷愚癡人堪住蘭若是故苾芻先學多設非多聞但明戒相亦得住於蘭若之處
024_0002_b_02L‘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등은, 결정한 마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물러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난야(蘭若)에 고요하고 한가로이 머묾은 즐거움이라네’라고 함은 이른바 시끄럽고 잡된 것을 여의어서 바야흐로 능히 진리에 나아가 마음을 즐겁게 머물게 하는 것이다.
024_0002_b_03L言從少至老等者明決定心始終無退故言寂靜閑居蘭若樂者謂離諠雜方能趣理令心樂住
위의 여섯 게송은 나한(羅漢)20)들이 결집(結集)해 놓은 것이며, 이 아래로는 서문인데 크게 열 가지 뜻을 총괄하여 밝힌 것이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바를 밝힌 것이고, 둘째는 다 모이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며, 셋째는 모이지 않은 이들을 따라서 들어 주는 것이고, 넷째는 공양하는 법식(法式)이고, 다섯째는 경계하고 삼감을 바르게 밝히는 것이며, 여섯째는 경계하고 삼가서 이익이 있는 것이고, 일곱째는 경계하지 않아 허물이 생기는 것이고, 여덟째는 바르게 고백하는 의식[白事]을 작지[作]21)하는 것이고, 아홉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들을 것을 권하는 것이며, 열째는 저 무리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024_0002_b_05L上之六頌是諸羅漢結集所置自下序文摠開十義明佛所教呵不摠集不集隨聽供養法式正明誡誡勅利益無誡過生正作白事勸至心聽淨其徒衆
“대덕들이여, 봄철이 이만큼 지나가고 이만큼 남아 있다. 늙고 죽음이 침범하여 목숨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큰 스승[大師]의 교법(敎法) 또한 머지않아 없어질 것이니, 여러 대덕들이여 부지런히 빛내고 드러내야지 방일해서는 안 된다. 방일하지 않으면 반드시 여실한 지혜[如知]와 공양 받을 만함과[應]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正等覺]을 증득할 것이니, 하물며 나머지 다른 37조도품의 선법들[覺品善法]이겠는가.
대덕 승가(僧伽)는 먼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부처님의 성문대중은 적게 구하고 적은 일로 만족해야 하니[少求少事], 오지 않은 필추들은 욕(欲)과 청정함[淸淨]22)을 말하라.”
024_0002_b_10L諸大德春時爾許過餘有爾許在死旣侵命根漸減大師教法不久當諸大德應勤光顯莫爲放逸由不放逸必當證得如知應正等覺何況所餘覺品善法大德僧伽先作何事佛聲聞衆少求少事不來諸苾芻說欲及淸淨
‘첫째는 부처님께서 가르친 바를 밝힌 것이다’23)라고 한 것은 곧 ‘여러 대덕들이여, 봄철이 이만큼 지났다’ 등등에 해당한다. ‘지났다’는 것은 ‘이미 가버렸다[已往]는 뜻이다. ‘봄철’이라 한 것은, 세 때[三時] 가운데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지를 말한 것으로서 바라저목차를 설하면서 그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또한 봄철에 의거한 것이다.
024_0002_b_17L明佛所教者卽是諸大德春時爾許過等過者是已往義言春時者三時內隨在何時說波羅底木叉而稱其事此中且據春時也
‘세 때’란 봄ㆍ여름ㆍ겨울을 말한다.
‘이만큼’이란 그 한량을 가리키는데, 이른바 계를 설하는 날에 따라서 수를 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만큼이 남았다’고 함은 당시의 남은 날짜에 준해야 한다.
024_0002_b_21L言三時者謂春夏冬言爾許者指其限量謂隨說戒日取數而言餘有爾許在者准當時餘日而說
024_0002_c_02L‘늙고 죽음이 침범했다’고 했는데, 그 뜻은 늙고 죽음이 언제나 앞에 닥쳐 있음을 밝힌 것이니, 늙음에서 죽음까지를 일컬어 노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12유지[十二有支] 가운데 다만 이 하나만을 말한 것은 근심ㆍ슬픔 등에 비해서 그 작용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맑은 행을 닦는 수행자의 원만한 일을 잃게 됨을 [이로써]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이것이 첫 인[初因]이다.
024_0002_b_24L言老死旣侵者明老死常在現前老及於死名爲老然十二有支但言此一者爲於憂悲等此用最强故欲顯修淨行者失圓滿事此是初因
그러나 수행자의 원만한 인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른바 의지할 바[所衣]이고 둘째는 행하는 바탕[行本]이다. ‘의지할 바의 잃음[所依失]’이라 함은, 늙고 죽음의 핍박 때문에 감당해 낼 수 없으니, 목숨이 끊어지는 일도 그 차례와 같다.
024_0002_c_05L然修行者圓滿之因略有二種一謂所依二謂行本言所依失者由老死逼故無所堪能命根斷壞如其次第
‘행하는 바탕의 잃음[行本失]’이라 함은, 이른바 큰 스승의 교법이 머지않아 장차 없어질 것이니, 불법이 멸하여 수행을 잃고 물러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대비세존께서는 뒤바뀜이 없는 뜻을 가지고 유정들을 교화하기 때문에 ‘큰 스승’이라 한다.
법(法)이란 이른바 12분교(分敎)이니, 세존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유정을 이끌어 이롭게 하신다. 인연이 있음을 따라 모두 다 교화를 받으니, 이 두 일[二事]24)에 의해서 원만한 수행을 잃기 때문이다.
024_0002_c_08L言行本失者大師教法不久當滅由佛法滅退失行故大悲世尊以無倒義化諸有情故曰大師法謂十二分教世尊以此導利有情隨有緣者悉皆受化此二事失圓滿行故
‘방일하지 말라’ 한 것은, 방일하지 않음을 권하여 부지런한 마음으로 용맹하게 결단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빛내고 드날리기 때문이다.
‘다만 방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방일하지 않는 것이 모든 선품(善品)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때문이다.
024_0002_c_13L言莫放逸者不放逸勤心勇決光顯聖教故所以但言不放逸者顯不放逸諸善品中爲最勝故
‘마땅히 부지런하라’는 말은 방일하지 않을 것을 권한 것이니, 능히 출세간의 성도(聖道)에 대한 가행(加行)을 위해 의지(依止)가 되는 까닭이다. 이른바 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를 쌍으로 닦는 등을 통하여 성인의 도를 얻기 때문이다.
‘방일하지 않음을 말미암아서 반드시 증득한다’는 등으로 말한 것은, 이것이 세존께서 출가한 이들로서 해탈을 구하는 이로 하여금 도과(道果)를 증득하게 하기 위하여 두루 배워야 할 것[衆學處]25)을 제정하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024_0002_c_16L言應勤者勸不放逸能與出世聖道加行爲依止故謂於奢摩毘鉢舍那雙修等運獲聖道故不放逸必當證得等者此顯世尊令出家衆求解脫者證道果故制衆學
024_0003_a_02L‘여실한 지혜’라 한 것은, 아는 대로의 실다운 앎을 일컫기 때문이다. ‘공양 받을 만하다’ 함은 모든 유정들에게서 마땅히 공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란 이른바 전도됨이 없이 두루 알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머지 다른 깨달음의 선법이겠는가.’라고 함은, 이 또한 앞에서의 방일하지 않음을 말미암아 능히 보리에 나아가는 것에 견주어 온갖 선법을 다 깨달음의 선법[覺品善法]이라 한 것이다.
024_0002_c_21L言如知者如所了事稱實知故於諸有情應受供養故言正等覺謂是無倒遍了知故言何況所餘覺品善法者此亦配前由不放逸能趣菩提所有善法皆悉名爲覺品善法
다음에는 다 모이지 않음을 꾸짖음을 밝힌 것이다.26)
‘대덕 승가는 먼저 어떤 일을 할 것인가’라고 함은, 앞에서는 다른 일이 없으면 마땅히 바로 와서 함께 모여야 된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에 ‘율(律)의 성문대중은 적게 구하고 적은 일에만 만족한다.’고 했으니, 이미 다른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또 해석하기를 포쇄타(褒灑陀)27) 때에 물을 뿌리고 청소하여 청정히 하고 등화(燈花) 등으로 장엄해야 하나니, 이것이 미리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에 모름지기 묻기를 ‘대덕 승가는 먼저 해야 할 일을 이미 하셨습니까?’라고 하여야 한다.
024_0003_a_03L明呵不摠集言大德僧伽先作何事者此明先無別事應來共集故文云佛聲聞衆少求少事旣無餘事何故不來又釋云襃灑陁時灑掃淨嚴設燈花等是前作業故須問云大德僧伽先所作事竝已作未
‘적게 구하고 적은 일’이라 함은, 적게 구하는 것은 욕심이 적은 것이고, 적은 일이란 만족할 줄 아는 것을 일컫는다. 또 ‘적게 구함’은 의업(意業)이고, 적은 일이란 몸과 말[의 업]이다.
‘성문’이라 함은 다른 이를 따라서 듣는 것이고, 다른 이의 음성을 따라서 청문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대중을 이루기 때문에 성문의 대중이라고 한다. 대중[衆]이란 같은 마음으로 함께 모인 것이므로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024_0003_a_09L言少求少事者少求謂少欲少事謂知足又少求謂意業少事謂身語言聲聞隨他聞也隨他音聲而聽聞故斯成衆故言聲聞衆衆者同心共集不可壞故
다음에는 모이지 않고 따라서 들은 것을 밝힌 것이다.28)
‘오지 않는…… ’ 등이라고 함은, 장정시(長淨時)에는 함께 모이지 않음을 일컬어 ‘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대덕’이라 함은 서로 존경하는 말이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모든 필추 사이에서는 젊었거나 늙었거나 이름이나 성씨 등을 불러서는 안 되고 마땅히 구수(具壽)라 부르고 혹은 대덕이라 불러야 한다. 만일 불세존의 경우라면 마땅히 덕호(德號)를 불러야 하나니, 그렇지 않으면 월법죄(越法罪)를 얻는다.
024_0003_a_14L明不集隨聽言不來等者於長淨時不同集會名爲不來言大德者相敬言如世尊說於諸苾芻若少不應喚名及氏姓等應言具壽大德若佛世尊應喚德號不爾者得越法罪
‘욕과 청정을 말한다’고 함은, 필추가 몸에 병이 있어서 뛰어난 선품[勝善品]를 닦는 데도 모임에 나가지 못하면 마땅히 욕과 청정함을 주어야 한다. 혹은 몸으로 표현하여[身表業] 욕과 청정을 주되 이와 같이 준다.
024_0003_a_20L言說欲及淸淨者苾芻身有病患及修勝善品不能赴集應與欲淨或身表業而與欲淨應如是與
024_0003_b_02L곧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가죽신을 벗고 법식에 따라서 공경하게 예의를 다 마치고는 오른 무릎을 세우고 왼 무릎을 꿇어 합장한 다음 이와 같이 말한다.
“구수여, 잘 기억해 주십시오. 이제 승가가 열나흘 날에 포쇄타(褒灑陀)를 하니, 나 필추 아무개도 열나흘 날 포쇄타를 하려 합니다. 저 아무개는 두루 청정하여 모든 장애법[障法]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질병의 인연 때문에 저 여법한 승가의 행사에 제가 이제 욕과 청정[欲淸淨]을 드리오며 이렇게 고백하오니, 마땅히 저를 위해 설해 주십시오.”
024_0003_a_22L偏露右肩脫革屣隨其所應爲敬事蹲踞合掌作如是說具壽存念今僧伽十四日爲襃灑陁我苾芻某甲亦十四日爲襃灑陁我某甲自陳遍淨無諸障法爲病患因緣故彼如法僧我今與欲淸淨此所陳事當爲我
이렇게 두 번, 세 번 말하라. 만일 필추가 병이 깊어 욕을 줄 수 없을 경우, 만일 부축하여 참석할 수 있으면 마땅히 대중 가운데 들어가 참여하고, 만일 부축해 감당할 수 없으면 함께 병자들에게로 가서 포살을 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작법(作法)이 성립되지 못하고 월법죄를 얻는다. 만일 포살이 아니고 다른 갈마(羯磨)를 짓는다면, 단지 욕만 주고 청정은 말하지 않는다.
024_0003_b_06L第二第三亦如是說若苾芻病重不能與欲者若堪扶去應將入衆不堪者俱就病人爲襃灑陁若不爾者作法不成得越法罪若非襃灑陁作餘羯磨者但直與欲不說淸淨
그 욕과 청정을 위임받은 필추가 이미 대중 가운데 들어갔으면 마땅히 옆자리의 필추에 대해 이와 같이 말을 하라.
“구수이시여, 생각해 주소서. 아무 곳의 방에 있는 필추 아무개가 몸의 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승가의 열나흘 날 포살을 맞아서 저 필추 아무개 또한 열나흘 날 포살을 하오니, 저 필추 아무개는 스스로 두루 청정하여 모든 장애되는 법이 없으며, 질병의 인연 때문에 여법한 승가의 행사에 욕과 청정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저 필추가 고백할 바를 제가 이제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024_0003_b_11L其持欲淨苾芻旣入衆中應對比座苾芻作如是言具壽存念於某處房苾芻某甲身嬰疾苦今僧伽十四日爲襃灑陁彼苾芻某甲亦十四日爲襃灑陁彼苾芻某甲自說遍淨無諸障法爲病患因緣如法僧事與欲淸淨彼所陳事我今具說
만일 다시 다른 인연이 있으면 그 당시의 일을 따라서 그것을 말할 것이다. 개별적인 사람 편에 욕과 청정을 말하고, 대중에게 알리지 않는 까닭은 때를 늦추고 피로를 일으키는 등의 모든 허물을 막기 위한 때문이다.
024_0003_b_17L若更有餘緣隨當時事而稱說之所以於別人邊說欲淸淨不告大衆者爲遮延生疲勞等諸過失故
만일 필추가 해태하거나 또는 법을 더럽히기 위해서 욕을 주면 돌색흘리다죄(突色訖里多罪)29)를 얻는다.
024_0003_b_20L若苾芻懈墯及爲鄙法而與欲者得突色訖里多
만일 갈마타나(羯磨陀那)30)이거나 혹은 현재 병에 걸렸거나 혹은 병이 장차 발생할 위험이 있거나 혹은 병이 막 차도가 있을 경우거나 혹은 환자를 간호하는 중이거나 혹은 아주 피곤하거나 혹은 주리고 목마르고 춥거나 덥거나 혹은 품성이 심히 암둔하여 다른 선품(善品)의 수행을 닦아 혼침(昏沈)을 물리치려 하거나, 혹은 조용한 방에서 스스로 계본(戒本)을 외우거나
024_0003_b_22L若羯磨陁那或現有病或恐病將或遇患新差或瞻病人或復疲困或遭飢渴寒熱或可稟性多有闇睡修餘善品冀遣惛沈或於靜房自誦戒本
024_0003_c_02L 혹은 다른 이에게 계의 뜻을 들어 받거나 혹은 계의 문구를 지키는 사람으로 마음을 기울여서 그 뜻을 생각하되 그것을 잊을까 두려워해서이거나 혹은 처음으로 오묘한 관[妙觀]을 닦아 눈앞에 나타남을 얻어 마음을 항복받기 위한 때문이거나, 혹은 깨달음을 위한 선품[覺分善品]에 있어서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서나, 만일 여러 다른 인연으로 바른 생각을 잃을까 두려워할 경우이거나 혹은 때때로 진리를 보고 초과(初果)를 얻는 경우이니, 모두 욕을 주어도 어긋남은 없다.
024_0003_c_03L或可於他聽受戒義或守文句人繫心思義恐其廢忘或創修得妙觀現前爲伏心故或於覺分善品不令間雜若雜餘緣恐失正念或時見諦得初果位斯皆與欲無犯
만일 욕을 줄 사람이 많아 함께 보냈으면, 나이가 적거나 늙은 필추는 폐(廢)하고, 나머지는 선사(善事)일 경우 마땅히 모인 곳으로 가야 한다. 만일 욕을 지니는 사람이 이미 욕을 받고 나서 급히 달려오다가 물[杭]을 뛰어넘거나 혹은 울타리[欄楯]의 험한 곳에 있거나 혹은 허공을 타거나 혹은 경계 밖을 향하거나 혹은 쌍으로 밟아 오르는 길을 오르거나 또는 쌍 사다리의 계단을 밟아 오르거나 혹은 졸거나, 선정에 들거나, 몸이 죽거나 환속을 하거나, 혹은 말하기를 “나는 구적(求寂:사미)이다”라고 하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욕과 청정을 잘 지니지 못한 것이니, 응당 다시 욕을 취해야 한다.
024_0003_c_07L若與欲多同集者少年老苾芻應廢餘善當赴集處持欲之人旣受欲已急走若逃坑若在欄楯危處若乘空若向界外若登雙踏道若躡兩梯撗若睡眠入定身死歸俗或云我是求寂等竝不成善持欲淨應更取欲
만일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의 욕과 청정을 위임받았으면 그것을 다 잘 기억해서 그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마을에 있는 것을 마을과 떨어진 조용한 도량에 있는 것으로 하면 서로 모두 성립되지 못하며, 또한 욕과 청정을 전수(轉授)해서는 안 된다.
배움을 지도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욕을 위임받을 수 없으나 다른 이에게 욕을 위임할 수는 있다. 이 필추를 말미암기 때문에 경계 안에 머무는 사람은 응당 경계 안에 있는 이에게 욕을 주어야 한다. 이와 다르면 성립하지 않는다. 필추니(尼)로부터 가르침을 청해 받은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라.
024_0003_c_13L一人持多欲淨隨能憶說若在地居空互皆不成亦不應轉授欲淨授學之人不持他欲應與他欲由是苾芻在界內住人應與界內者欲異此不成尼請教授有無隨說
아울러 경계법[界法]을 밝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작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큰 것이다. 큰 경계[大界] 안에 장애나 어려운 곳이 없으면 작은 경계 터[小界場]를 안치하라. 먼저 표상(標相)을 관찰하되 동쪽을 담장ㆍ나무ㆍ목책[柵]ㆍ울타리ㆍ쌓인 흙ㆍ서 있는 돌ㆍ쇠말뚝ㆍ낭떠러지 등으로 하고, 다른 쪽도 그렇게 해야 하니, 대중은 그 표시를 보고 알아 말로 아뢸[白] 것이다.
024_0003_c_18L因明界法有其二種在大界內無妨難處安小界場先觀摽相且如東方或以牆樹柵籬聚土立石釘橛崖等餘方亦然衆知相已言白
024_0004_a_02L 또 주위에 자리를 펴고 건추(楗椎)를 쳐서 의식 방편을 짓는다. 대중이 모두 함께 모여 여욕법(與欲法)이 없으면 모든 오래 머문 필추[舊住苾芻]들이 같이 방위의 표시를 말한다.
먼저 동쪽으로부터 다음에 남쪽ㆍ북쪽ㆍ서쪽으로 하여 이미 방위의 표시를 알고 났으면 다음에 한 필추가 백갈마(白羯磨)를 짓는다. 작은 경계를 먼저 결계(結界)31)하고 뒤에 하지 않는다.
024_0003_c_22L復周敷座席鳴楗椎作前方便大衆俱集無與欲法諸舊住苾芻共稱方相先從東方次南西北旣知相已次一苾芻作白羯磨先結小界不應在後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이곳에서 오래 머문 필추와 작은 경계 사방에 예로부터 있는 표시를 들겠습니다. 동쪽은 아무 표시이며, 나아가 북쪽은 아무 표시입니다. 승가는 때가 이르렀다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십시오. 승가는 이제 이 표시의 영역 안에 있는 작은 경계 터를 지어 맺겠습니다. 이와 같이 아룁니다.”
024_0004_a_03L大德僧伽聽今於此處所有舊住苾芻共稱小界四方久住摽相東方某乃至北方某相若僧伽時至聽者僧伽應許僧伽今於此相域內結作小界場白如是
다음에 갈마를 짓는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이곳에서 오래 머문 필추와 작은 경계 사방의 오래된 표시를 함께 말하겠습니다. 동쪽은 아무 표시이고, 나아가 북쪽은 아무 표시입니다. 이제 승가는 이 표시의 영역 안의 작은 경계 터 맺는 것을 짓겠습니다. 만일 모든 구수께서 이 표시의 영역 안에 작은 경계 터를 맺어 지음을 허락하시는 분은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024_0004_a_08L次作羯磨大德僧伽今於此處所有舊住苾芻共稱小界四方久住摽相東方某相乃至北方某相今僧伽於此相域內結作小界場若諸具壽聽於此相域內結作小界場者默然若不許者說
승가는 이미 이 표시의 영역 안에서 작은 경계의 도량을 맺어 짓는 것을 마쳤습니다. 승가는 이미 허락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이 작은 경계의 도량은 글로 제정한 것이 없다. 서방의 곳곳에 있는데, 그 크기는 겨우 열 자 좀 넘을 정도로 평지를 북돋아서 둘레를 만들고 계단이 없다. 가운데에 제저(制底)를 안치하고 문은 한쪽을 향하게 한다.
024_0004_a_13L僧伽已於此相域內結作小界場竟僧伽已聽許由其默然故我今如是持此小界場文無定制西方在處皆有其量纔可丈餘平峚甎圍更無階級中安制底門向一邊
다음으로 큰 경계 맺는 법을 말하겠다.
이 가운데 큰 경계의 크기로서 가장 큰 것은 가로가 2유선나(踰繕那)32) 반(半)이며,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아래를 향함도 그렇게 하고, 만일 물이 있어서 막혔으면 물을 건너서 경계를 삼는다. 만일 경계 안에 나무가 있거나 산이 있으면 나무와 산을 따라서 위의 물과의 경계에 이르도록 하고 폭과 같게 한다.
024_0004_a_16L次結大界法此中大界量者極大撗闊兩踰膳那半若其無水向下亦然有水隔者齊水是界若界內有樹有山界隨樹山上至水界與闊量同
만일 작은 경계의 크기는 뜻에 따라 하고, 큰 경계를 맺을 때는 앞의 표상과 같게 하라.
오래 머문 모든 필추와 함께 사방의 표상을 보고 나서 좌석을 펴고 건추를 쳐 울려서 대중이 모두 모이게 해야 하며, 앞에서와 같이 알린다.
024_0004_a_20L若樂小界量事隨情結大界時同前摽相舊住諸苾芻共於四方觀摽相已敷座席鳴楗椎衆應盡集同前告知
024_0004_b_02L다음으로 한 필추가 백이갈마(百二羯磨)를 작지한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지금 이곳에서 오래 머문 필추와 함께 큰 경계 사방의 오래된 표상을 일컫겠습니다. 동쪽은 아무 표시이며, 나아가 북쪽은 아무 표시입니다.
024_0004_a_23L次一苾芻作白二羯磨大德僧伽聽今於此處所有舊住苾芻共稱大界四方久住摽相東方某相乃至北方某相
만일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聽]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십시오. 승가는 이제 이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겠습니다. 아란야로부터 이 주처(住處)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마을과 마을의 세분(勢分)은 제외합니다. 이와 같이 아룁니다.”
024_0004_b_03L僧伽時至聽者僧伽應許僧伽今於此相域內結作一襃灑陁同住處法僧伽大界從阿蘭若至斯住處於此除村及村勢分白如是
다음으로 갈마를 작지한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이곳에서 오래 머문 필추와 큰 경계 사방의 오래된 표상을 함께 일컫겠습니다.
동쪽은 아무 표시이며, 나아가 북쪽은 아무 표시입니다. 승가는 응당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겠습니다. 다만 아란야로부터 이 주처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마을과 마을의 세분은 제외합니다.
024_0004_b_07L次作羯磨德僧伽聽今於此處所有舊住苾芻共稱大界四方久住摽相東方某相乃至北方某相僧伽應許於此相域內結作一襃灑陁同住處法僧伽大從阿蘭若至斯住處於此除村及村勢分
만일 모든 구수들께서 이 표시의 영역 내에서 함께 포살을 하고, 한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되, 아란야로부터 이 주처에 이르기까지 이 안에서 마을과 마을의 세분을 제외하는 것을 허락하시면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승가가 이미 이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는 것을 마쳤습니다. 승가가 이미 허락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
024_0004_b_13L若諸具壽聽於此相域內結作一襃灑陁同住處法僧伽大界阿蘭若至斯住處於此除村及村勢分者默然若不許者說僧伽已於此相域內結作一襃灑陁同住處法僧伽大界竟僧伽已聽許由其默然故我今如是持
만일 승가가 이미 큰 경계를 맺으면 이 가운데 필추는 마땅히 한 곳에 모여서 포살과 수의(隨意)의 일33)를 하고 아울러 일체의 단백(單白)ㆍ백이(百二)ㆍ백사(白四)의 갈마를 작지한다. 만일 대중이 모이지 않았는데 작법하면 성립하지 않고 월법죄를 얻는다.
024_0004_b_19L若僧伽已結大界此中苾芻應集一處爲襃灑陁及隨意事幷作一切單白白二白四羯磨若衆不集作法不成得越法罪
만일 이 경계 안에서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不失衣界]를 짓고자 한다면 또한 큰 경계의 표시에 의해서 맺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지어야 한다. 한 필추로 하여금 백이갈마를 짓게 해야 하니, 먼저 [대중에 안건을] 고지하고[白] 나서 바야흐로 갈마를 한다.
024_0004_b_22L若欲於此界上結作不失衣界者依大界相而結如是應作令一苾芻應爲白二先作白已方爲羯磨
024_0004_c_02L“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이미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함께 맺었습니다. 만일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여 주십시오.
024_0004_c_02L大德僧伽聽於此住處和合僧伽已共結作一襃灑陁同住處法僧伽大界僧伽時至聽者僧伽應許
승가는 이제 이 큰 경계의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필추가 도량에서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짓겠습니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이미 함께 포살을 하고 한 곳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함께 맺었습니다. 승가는 이제 이 큰 경계의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필추가 도량에서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지었습니다.
024_0004_c_05L僧伽今於此大界相域內結作苾芻不失衣界白如是大德僧伽聽於此住處和合僧伽已共結作一襃灑陁同住處法僧伽大界僧伽今於此大界相域內結作苾芻不失衣界
만일 모든 구수들께서 큰 경계의 표시 영역 안에서 필추가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맺어 지었음을 허락하시면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승가는 이미 이 큰 경계 표시의 영역 안에서 필추가 도량에서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맺어 짓는 것을 마칩니다. 승가가 이미 청허(聽許)34)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
024_0004_c_10L若諸具壽聽於此大界相域內結作苾芻不失衣界者默然若不許者說僧伽已於此大界相域內結作苾芻不失衣界竟僧伽已聽許由其默然故我今如是持
만약 승가가 이미 옷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범위를 맺어 마친 뒤에는 오직 아래ㆍ위의 두 가지 옷만으로 범위 내에서 다니고 머문다면 옷을 떠난 허물은 없다. 만일 작은 경계와 큰 경계를 인연이 있어 풀고자 한다면, 마땅히 백사(白四)로써 그것을 풀어야 하니, 작은 경계 터 안에 자리를 펴고 다음에 건추를 울린다.
024_0004_c_14L僧伽已結不失衣界竟唯將上下二衣界內行住無離衣咎若小界大界有緣須解者應以白四解之於小界場中敷座席已次鳴楗椎
만일 대중이 모이지 않아도 최소한 네 사람이 되면, 작은 경계 가운데 있는 한 필추로 하여금 마땅히 먼저 안건을 아뢰게[白] 하고 바야흐로 갈마를 한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먼저 함께 작은 경계 터를 맺어 지었습니다. 만약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하면 승가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승가는 이제 함께 이 작은 경계 터를 풀겠습니다.”
024_0004_c_18L若衆不集下至四人在小界中令一苾芻應先作白方爲羯磨大德僧伽聽於此住處和合僧伽先共結作小界場若僧伽時至聽者僧伽應許僧伽今共解此小界場
024_0005_a_02L이와 같이 아룁니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먼저 함께 작은 경계 터를 맺어 지었습니다. 승가는 이제 함께 이 작은 경계 터를 푸니, 만일 구수들께서 이제 함께 이 작은 경계 푸는 것을 허락하시면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갈마이니, 두 번째 세 번째도 이와 같이 말한다.
024_0004_c_23L白如是大德僧伽聽於此住處和合僧伽先共結作小界場伽今共解此小界場若諸具壽聽解此小界場者默然若不許者說是初羯磨第二第三亦如是說
“승가는 이미 작은 경계 푸는 것을 마쳤습니다. 승가가 이미 허락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짓겠습니다.”
024_0005_a_04L僧伽已解小界場竟僧伽已聽許由其默然故我今如是持
혹 먼저 큰 경계가 있고 작은 경계가 없는 것은 괜찮다. 이제 작은 경계를 풀고자 한다면, 마땅히 백사갈마로써 먼저 그 큰 경계를 풀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풀라.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먼저 함께 포살을 하고 한 도량에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도량의 경계[大界]를 맺어 지었습니다. 만약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여 주십시오. 승가는 이제 이 큰 경계를 풀겠습니다.”
024_0005_a_06L或可先有大界無小界今欲結小界者應先以白四羯磨解其大界應如是解大德僧伽聽於此住處和合僧伽先共結作一襃灑陁同住處法僧伽大界若僧伽時至聽僧伽應許僧伽今解大界
이와 같이 아룁니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 주처에서 화합한 승가가 먼저 함께 포살을 하고 한 도량에 함께 머무는 법인 승가의 큰 경계를 맺어 지었으나 이제 승가는 이 큰 경계를 풀고자 합니다. 만일 구수들께서 이 큰 경계 푸는 것을 허락하시면 잠자코 계시고, 만일 허락하지 않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갈마 의식이니, 두 번째 세 번째도 이와 같이 말한다.
024_0005_a_11L白如是大德僧伽聽於此住處和合僧伽先共結作一襃灑陁同住處法僧伽大僧伽今解此大界若諸具壽聽解此大界者默然若不許者說是初羯第二第三亦如是說
“승가는 이미 큰 경계를 풀어서 마쳤습니다. 승가가 이미 허락하시어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
경계를 푸는 일을 마치고나서는 먼저 작은 경계를 맺고, 나중에 큰 경계를 맺는다.
아울러 옷을 잃지 않는 일[不失衣]도 이와 같이 지어야만 한다.
024_0005_a_16L僧伽已解大界竟僧伽已聽許由其默然故我今如是持旣解界已先結小界後結大界幷不失衣如上應作
만약 오래된 경계를 풀지 않고 다시 새로운 경계를 맺으면 뒤에 맺은 것은 성립하지 않으며 악작죄(惡作罪)를 얻는다.
만일 작은 경계와 큰 경계를 한 사람의 갈마인(羯磨人)이 한 번의 백이(白二)로써 동시에 맺으려 하거나 아울러 백사(白四)로써 동시에 풀고자 하면, 두 경계의 위에 두 승가를 모으고, 마땅히 자리를 두 경계에 걸쳐서 덮게 하며, 그 법을 주관하는 이는 거기에 머물면서 갈마를 지어야 한다.
024_0005_a_19L若不解舊界更結新者後結不成得惡作罪若欲小界大界一羯磨人以一白二同時結幷以白四同時解者於兩界上集二僧伽應以座席壓二界上其秉法者住此應作羯磨
024_0005_b_02L또한 응당 맺을 때는 작은 경계를 먼저 하고, 풀 때는 작은 경계를 나중에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쌍으로 풀고 쌍으로 맺고자 할 때는 문서로 만들되 작법의 일[作法事]에 준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무릇 경계를 맺을 때에는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으니, 곧 다른 경계나 현재 물이 고인 곳이면서 작은 경계 터를 겸하는 곳이다. 아울러 필추니[尼]의 주처도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024_0005_a_24L又復應知結時小界在前解時小界在後若欲雙解雙牒文作法准事應知凡結界時不應以界而入餘界及現停水處兼小界場幷尼住處亦不以界而越餘界有五處不應越
이른바 필추의 경계와 필추니의 경계와 작은 경계 터와 물이 고여 있는 곳 및 두 경계의 중간이 그것이다. 또한 이 경계를 푼다고 해서 다른 경계 역시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하나의 큰 나무를 가지고 또한 여러 경계의 표시로 삼을 수 있다. 그 경계를 맺을 때에 이미 방위의 표시를 알고 갈마의 의식을 지을 때에 이미 상당 부분을 설명했으면, 그 갈마를 주관한 이가 홀연히 사망하더라도 또한 경계 맺은 것이 성립한다.
024_0005_b_06L謂苾芻界苾芻尼界小界場停水處及二界中間亦非解此界而餘界亦解若以一大樹亦得爲多界之相其結界時旣知方相作羯磨已說多分秉羯磨者忽然身亦成結界
만일 환술이나 신통력을 드러내어 경계의 표시를 지었다면 경계 맺음이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물결[水波]ㆍ별ㆍ달 등으로 경계의 표시를 하지 말라. 만일 객(客) 필추가 공주처(空住處)에 머물며 옛 도반을 기다린 지 7〜8일이 안 됐는데 경계의 맺음을 하면 악작죄(惡作罪)를 얻나니, 마땅히 앞의 경계에 의해서 하고 뒤의 맺음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024_0005_b_11L若現幻術及神通力作界摽相不成結界亦不應以水波星月等而作界相若客苾芻至空住處不七八日待於舊人便結界者得惡作罪應依前界不依後結
만일 냇가와 개울들에 다리가 있으면 경계의 맺음을 할 수 있지만, 이와 다르면 곧 잘못이다. 냇가와 개울 위의 다리가 무너져 손질하고 고칠 경우, 7일 밤을 지나 8일 밤에 이르면 경계의 법[界法]을 잃는다.
024_0005_b_15L若諸河㵎有橋梁者得通結界異此便非河㵎之上橋梁壞者若欲修治得經七夜若至第八夜界法便失
만일 근본적으로 거듭하여 수리할 마음이 없는데, 다리가 이미 부서졌으면 경계를 또한 잃는다. 다섯 가지 큰 도량의 경계를 잃는 것이 있으니, 곧 일체의 승가가 근(根)이 바뀌었거나 일체의 승가가 결단코 버리고 가거나 일체의 승가가 아울러 다 환속하거나 일체의 승가가 동시에 죽거나 일체의 승가가 법을 지어서[作法] 경계를 풀었을 경우다.
024_0005_b_18L若本無心重修理者橋梁旣破界亦隨失有五事失大界一切僧伽皆悉轉根一切僧伽決捨而去一切僧伽竝皆歸俗切僧伽同時命過一切僧伽作法而
024_0005_c_02L아란야와 마을 사이에 있는 비결계(非結界)의 처소라면 무엇을 한계로 해서 계라고 부르는가? 아란야는 1구로사(拘盧舍)를 한계로 하며, 마을 사이는 울타리를 친 곳과 아울러 바깥의 세분(勢分)을 한정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경계라 한다. 이 두 경계 안에 필추가 함께 모여 손이 서로 미치는 곳에 있으면서 모든 갈마에 대해 수의(隨意)로 임하기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라. 만일 그 가르침을 어겨 지니면 모두 월법죄를 얻는다.
024_0005_b_23L若阿蘭若及在村中非結界處齊何名界阿蘭若齊一拘盧舍村中齊牆柵處幷外勢分名之爲界斯二界內苾芻同集在手相及處諸有羯磨咸隨意秉如上所說違教作者咸得越法罪

열 손가락 한데 모아 공경하나니
석가사자께 예경드리옵니다
별해탈 조복을
내가 설하노니 어진 이는 잘 들으라.
024_0005_c_05L合十指恭敬
禮釋迦師子
別解脫調伏
我說仁善聽

이 게송은 공양하는 법식을 밝힌 것35)이다.
‘열 손가락 한데 모아 공경 한다’ 함은, 이른바 두 손을 모아 공경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무릇 큰 스승께 공양을 드리는 데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예경함이고, 둘째는 찬탄함이다.
합장하여 공경함은 예경을 극진히 하는 거동이다.
024_0005_c_07L此頌明供養法式言合十指恭敬者謂合兩手表恭敬相凡於大師作供養者有其二種謂致禮申讚歎合掌恭敬是致禮儀釋迦師子是讚歎德言釋迦者明在俗時族姓高勝非下流故
‘석가사자’란 덕을 찬탄하는 것으로, ‘석가’란 말은 세속에 있을 때 그 종족의 성으로 아주 높고 뛰어나며 하천한 혈통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사자’라는 것은 출가한 뒤에 먼저 두려워하는 바가 됨을 나타낸 것이니, 모든 외도가 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별해탈’이라 함은 큰 스승의 법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방편을 일으켜서 때로는 능히 번뇌와 의혹 벗어나니, 지극히 뛰어난 덕이 있으므로 별해탈이라고 한다. 현재 번뇌에 물들어서 얽히고 속박된 중생을 잘 조복하기 때문에 조복한다고 한다.
‘내가 설하노니 어진 이는 잘 들으라.’는 것은 법문 들을 것을 권한 것이다.
024_0005_c_13L言師子者顯出家後先所畏憚諸外道類皆恐怖故言別解脫於大師法而生恭敬起方便時能脫煩惑有極勝德名別解脫現被染等煩惱所纏具縛有情能調伏故爲調伏我說仁善聽者勸聽法也

들은 뒤에는 마땅히 바로 행하라
대선(大仙)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온갖 작은 죄 가운데서도
용맹하고 부지런히 보호하라.
024_0005_c_18L聽已當正行
如大仙所說
於諸小罪中
勇猛亦勤護

마음[心馬]은 제지하기 어려워
용맹함이 결렬되면 항상 상속하나니
별해탈은 재갈과 같으며
백 개의 침이 있어 지극히 날카롭다네.
024_0005_c_20L心馬難制止
勇決恒相續
別解脫如銜
有百鍼極利
024_0006_a_02L
이 게송은 바르게 경계함을 밝힌 것이다.
‘들은 뒤에는 마땅히 바로 행하라’ 함은 들은 뒤에 뒤바뀜이 없이 행하되 게으르지 말고 마음으로 항상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해서 모든 그릇된 법을 버리기를 권한 것이니, 마치 대선(大仙)께서 친히 가르침을 설하시는 것과 같이 다 받들어 지니기 때문이다.
‘대선’이라 함은 박가범(薄伽梵)이니, 곧 세속에서는 그야말로 존귀하고 거룩한 분이기 때문이다. 또 성문이나 독각의 신선도 거룩하고 뛰어난 분이기 때문에 부르기를 대선이라 한다.
024_0005_c_21L此頌正明誡勅言聽已當正行等者謂聽聞已無倒而行不爲懈怠心常勤勇勸彼修行捨諸非法猶如大仙親爲說教皆奉持故大仙者謂薄伽於世俗中是尊勝故又於聲聞獨覺之仙是殊勝故號爲大仙
‘작은 죄’란 이른바 차죄(遮罪)36)이고 성죄(性罪)37)의 부류가 아니다. 작은 죄에 대해서는 용맹하게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되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이 가운데서 ‘또한[亦]’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성과(性過)를 막고 나서 작은 죄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을 쓰게 하는 것을 아는 데 준한 것이다. 어떤 경에서 말하기를, ‘용맹하여 부지런히 보호하라고 한 것은, 곧 성죄(性罪)를 막는 데 준한 것이어서 ≺또한≻이란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모든 범하는 경우에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고 지극한 마음으로 지키고 지닐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024_0006_a_04L小罪謂是遮罪非性罪類於小罪中勇猛防護心無懈怠此中亦言准知已防性於小罪處亦遣用心有本云勇猛應勤護卽准防性罪略去亦聲言爲表於諸犯處勿生緩慢至意守
‘죄’라 함은 더럽고 악한 법을 말하니, 거룩한 이들이[勝流之人] 싫어하며 부끄러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보호한다.’ 함은 착한 법 가운데 정진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용맹함이 결렬됨’이라 함은, 부지런하고 용맹함이 결렬되면 모든 경계에 탐착함이 마치 말이 달리는 것과 같나니, 실로 두렵기 때문이다.
024_0006_a_10L言罪者謂鄙惡法勝流之人所嫌恥故言勤護者於善法中起精進故言勇決者勤勇決列貪著諸境如馬奔逸實可畏故
‘항상 상속한다.’ 함은 번갈아 달려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니, 경계와 서로 가까이 하면 그것을 막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마음은 조복하기 어려운 주인이므로 조복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일 몸과 말을 잘 제어하면 정도[正]를 따르게 된다.
이 심근(心根)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내기 때문이니, 이를 위해서는 오직 부지런히 전념(專念)하고 씻어 없애서 아주 청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항상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관찰해야 하니, 나[我]라는 것이 항상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마치 허공의 본바탕이 변할 수 없고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미혹을 끊는 이치와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024_0006_a_13L恒相續者交馳不絕與境相近極難遮止此言顯心是難調主故遣調心此若善調身語隨正由此心根生煩惱故爲此唯勸專念洗除令善淸淨應常觀察無常無我執我常者猶若虛空體無變易斷惑之理不相應故
‘재갈’이라 함은, 이른바 조복되지 않는 무리가 계를 범하는 그 입에 고삐와 재갈을 물리기 때문이다.
‘같다’고 함은 이른바 이치에 순응함이니, 즐거움에 집착하거나 자신을 괴롭히는[自苦] 두 극단의 허물을 능숙하게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근(根)과 욕(欲)과 성(性) 등으로 부르는 까닭에 같다고 한다. 또한 ‘같다’는 것은 비유의 뜻이기도 하다.
024_0006_a_19L言銜者謂是不調伏類犯戒之口於其口中施轡勒故如者謂是順理善能遠離著樂自苦二邊過故又爲稱其根欲性等故名爲如又復如者是譬況義
024_0006_b_02L‘백 가지 침’이란 이른바 파계한 사람이 현법 가운데서 갖가지 뜨거운 번뇌에 시달리고 뉘우치며 마음이 괴로운 것을 침[針刺]에 비유한 것이다. 간략하게 큰 숫자를 들어서 또한 백(百)이라고 했다.
‘지극히 날카롭다’ 함은, 능히 뒷날에 이르러 범함을 일으킬 인(因)을 잘라서 끊게 하기 때문이다. 계(戒)의 재갈이란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성립하나니, 곧 이것이 마음에 뉘우침을 내게 하여 범한 죄를 말하게 하고, 또 악견(惡見)을 길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024_0006_a_23L有百鍼者謂破戒人於現法中種種熱惱悔恨傷心比於鍼刺略擧大數且言其百言極利者能於後時生犯之因割令斷故於戒銜處兩種義成卽是心生追悔說所犯罪又令惡見永不生故

어떤 이가 궤칙(軌則)을 어겼어도
가르침 들으면 곧 그칠 수 있다네
대사(大士)는 좋은 말[良馬]과 같아서
마땅히 번뇌의 진영[陣]을 벗어나리라.
024_0006_b_05L若人違軌則
聞教便能止
大士若良馬
當出煩惱陣

이 게송은 계칙(誡勅)의 이익을 밝힌 것38)이다.
‘어긴다’ 함은 어기고 범한 것을 말하고, ‘궤칙(軌則)’이라 함은 이른바 학처(學處)를 말한다.
‘가르침을 들으면 곧 그칠 수 있다’라고 함은 칼ㆍ매 등의 물건에 말미암지 않으면서 막게 되는 것을 말한다.
‘대사(大士)’라고 함은 이른바 가까이에 있는[近圓] 사람을 말한다.
024_0006_b_07L此頌明誡勅利益違者謂是違犯則者謂諸學處聞教便能止者言其不由刀杖等物而爲遮制言大士者謂近圓人
‘좋은 말과 같다’ 고 한 것은 어질고 선하고 영리한 말을 일컫는다.
‘마땅히 번뇌의 진을 벗어난다.’고 함은, 번뇌는 부수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군진(軍陣)에 비유한 것이다. 대사는 마음으로 생사를 벗어나고자 원하여 깨끗한 계를 힘써 닦음으로 번뇌의 군대를 쳐부순다. ‘마땅히 벗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마땅히 아라한과(阿羅漢果) 등을 얻게 됨을 일컫는다.
024_0006_b_11L若良馬者謂賢善智馬當出煩惱陣者煩惱難摧喩之軍陣大士要心欲出生死策修淨戒破煩惱軍言當出者謂是當獲阿羅漢果等

어떤 이가 이 재갈이 없다면
역시 기쁘고 즐겁지 못할 것이며
저 번뇌의 진영에 빠져
미혹하여 생사(生死)에 윤회한다네.
024_0006_b_15L若人無此銜
亦不曾憙樂
彼沒煩惱陣
迷轉於生死

이 게송은 경계함이 없으면 허물이 생기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이 재갈이 없으면’이라 함은, 모든 외도들은 마음이 삿된 경계로 달리고 탐욕에 빠지면 탐욕의 즐거움에 미혹되는 것을 말한다.
‘역시 기쁘고 즐겁지 못할 것이며’라고 함은, 열반의 성품이 없고 원만적정[圓寂]한 이치에 대해 애락(愛樂)하는 마음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024_0006_b_17L此頌明無誡過生若人無此銜者外道等心馳邪境及耽欲者惛於欲言亦不曾喜樂者顯無涅槃性於圓寂理無愛樂心
‘저 번뇌의 진영에 빠진다.’고 함은, 이른바 삿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번뇌와 싸울 적에 좋은 고삐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항복하게 됨을 일러 군진에 빠진다고 한 것이다.
‘미혹하여 생사에 유전 한다’고 함은, 별해탈의 재갈이 없음을 말미암아 5취(趣) 가운데서 윤회하여 구제할 수 없으며, 업을 따라서 유전하여 바른 길을 잃기 때문이다.
024_0006_b_21L彼沒煩惱陣者謂因邪教共煩惱戰爲無善轡被他降伏名爲沒陣迷轉於生死者由無別解脫銜於五趣中輪迴無救隨業而轉失正道故
024_0006_c_02L이 다음은 바로 아뢰는 의식[白事]을 지어 대중에게 고하여 알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승가의 흑월(黑月) 열나흘 날의 포살을 짓겠습니다. 만약 승가가 때에 이르러 승인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여 주십시오. 승가가 이제 포살을 짓고 바라저목차계경을 설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아룁니다.”
024_0006_c_02L次下明正作白事告衆令知大德僧伽聽今僧伽黑月十四日作襃灑陁若僧伽時至聽者僧伽應許僧伽今作襃灑陁說波羅底木叉戒經白如是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라고 한 것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마음을 오롯이 하여 듣게 하고자 한 때문이고, 들은 일을 바르게 기억하여 지니게 하고자 한 때문이다. ‘승가’라 함은 여기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네 사람, 다섯 사람, 열 사람, 스무 사람, [그 이상의] 많은 사람인 경우를 가리킨다.
024_0006_c_06L言大德僧伽聽等者欲令勿生異想專心聽故於所聽事正憶持故言僧伽者有其五種謂四五人十人二十人多人
이 가운데 ‘네 사람의 승가’는 이른바 수의(隨意)와 출죄(出罪)와 근원(近圓)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갈마는 모두 다 지을 수 있다.
‘다섯 사람의 승가’란, 이른바 중방근원(中方近圓)을 제외하고 출죄(出罪)의 나머지는 지을 수 있다.
‘열 사람의 승가’는 다만 출죄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은 다 지을 수 있으며, ‘스무 사람의 승가’와 ‘그 이상의 승가[多人僧伽]’는 모든 법을 다 지을 수 있다.
024_0006_c_09L此中四人僧伽者謂除隨意出罪近圓自餘羯磨咸悉應作五人僧伽者謂除中方近圓及以出罪餘竝應作十人僧伽但除出罪餘竝應作二十人僧伽及多人僧伽者諸法皆作
‘열나흘 날’이라고 한 것은 이것은 포살하는 때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봄ㆍ여름ㆍ겨울의 세 때 중에 의거하는데, 넉 달 안에 각각 세 번째 보름이 다할 때와 일곱 번째의 보름이 다할 때를 취하여39) 이때에는 항상 열나흘 날에 포살을 하고 나머지는 다 보름날에 한다. 이에 마땅히 알라. 1년 가운데 여섯 번은 열나흘 날이고 열여덟 번은 보름이 된다.40)
024_0006_c_14L言十四日是顯襃灑陁時此據春冬三時之中每四月內各取第三半月盡第七半月盡恒是十四日爲襃灑陁餘竝是十五日應知一年之中六是十四日十八是十五日
또 흑월과 백월에서 날마다 모름지기 이렇게 날을 헤아려서 대중에게 말해 알게 해야 한다. 혹은 상좌가 아뢰고 혹은 일을 분배하는 사람이나 혹은 다른 사람이 아뢴다.
“여러 대덕이시여, 지금이 바로 흑월과 백월의 아무 날입니다. 절을 지은 시주와 절을 보호하는 천신과 아울러 네 가지 은혜의 유(類)를 위하여, 사람마다 각각 복을 베푸는 게송을 설해야 합니다.”
024_0006_c_19L又黑白月每日之中須以日數白衆令知或上座或授事人或復餘人云諸大德今是黑白月某日可爲造寺施主及護寺天神幷四恩類人人各說施福伽
024_0007_a_02L이때에 고백함을 필요로 하는 까닭은, 첫째 포살의 때를 알리기 위한 때문이고, 둘째는 속인이 찾아옴을 막기 위한 때문이다. 또 날짜를 헤아리는 데는 별자리를 의지하기도 하거나 혹은 왕법에 의해서 날과 달의 크고 작은 것을 따르기도 한다.
024_0006_c_24L所以此時須告白者爲知襃灑陁防俗人來問又復日數或依星次或依王法日月大小應可隨之
포쇄타(褒灑陀)라고 함은, ‘포쇄’는 기른다[長養]는 뜻이고, ‘타’는 지닌다는 뜻이다. 이른바 대중이 모여서 계를 설함에 의해 능히 선법을 길러 스스로의 마음에 지닐 수 있기 때문에 포쇄타라 이름한 것이다. 또 ‘포쇄’는 앞에서와 같은 뜻이고, ‘타’는 깨끗하게 없앤다는 뜻이니, 이른바 선법을 더욱 기르고 불선을 없애어 깨끗하게 한다는 뜻을 일컫기 때문이다.
024_0007_a_03L言襃灑陁者襃灑是長養義陁是持義謂由衆集說戒便能長養善法持自心故名襃灑陁又復襃灑同前陁是淨除謂增長善法淨除不善故
‘때가 이른다[時至]’라고 함은 이른바 포살을 할 때에 다른 방해나 어려움이 없음을 뜻한다.
‘허락한다[聽]’고 함은 이른바 당시 자리에 참석한 대중이 허락할 것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다. ‘승가가 마땅히 허락한다.’라고 함은 내가 대중을 위해서 계를 설하는 것을 승가가 허락하는 것이다.
024_0007_a_07L言時至者謂是襃灑陁時無餘妨難言聽謂問當時現座徒衆爲聽許言僧伽應許者僧伽應許我爲衆說
‘이와 같이 아룁니다.’라고 함은 그 일을 가리켜서 알리는 것을 일컫는다. 온 대중이 함께 설하지 않는 까닭은 모두가 능히 계를 외우고 지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비록 외우기는 하지만 다 익숙하지 못한 이도 있고 또는 법을 들은 이라도 알고 있는 계의 뜻이 다 같지 않다.
024_0007_a_11L白如是者謂指其事而告知也以不擧衆俱說者爲皆不能誦持戒或有雖誦不能盡熟又聽法者理不應然
방안에서 따로따로 하나하나 설하지 않는 까닭은, 이것이 곧 대중의 포살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함께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따로따로 설하면 문득 정법을 듣지 못하는 허물이 생길 수 있으니, 무릇 계를 설하는 날에 훌륭한[善] 필추로서 계를 외워내는 이가 있으면 수학인(授學人)41)으로 하여금 계를 설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머무는 곳에 다만 네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 함께 모일 것이요 따로 머물러서는 안 되며, 또한 욕을 위임받을[欲取] 수도 없다.
024_0007_a_14L所以不於房內別別說者此便非大衆爲襃灑陁共集一處利益多故又別別說便有不聽正法之凡說戒日有善苾芻誦得戒者應令授學人說戒若於住處但有四皆可共集不應別住亦不取欲
만일 시끄럽고 묘탑[制底]이 있는 곳, 혹은 속인이 있는 곳, 혹은 드러난 곳, 혹은 부정한 곳, 혹은 시끄러운 곳에서 장정(長淨)을 하면 악작죄를 얻는다. 만일 다른 곳이 아주 없으면 저 네 곳에서 해도 범함이 없다. 속인을 대해서 하면 안 되고, 또는 잠잘 때, 선정에 들었을 때, 밥을 빌 때, 쉴 때, 공양할 때에 장정을 하면 악작죄를 얻는다. 다른 때에 장애가 있어서 이때에 한 것은 허물이 아니다.
024_0007_a_19L於諠雜制底之處或俗人處或露現或不淨處或憒鬧處而長淨者惡作罪必無餘處在四無犯不應對又於眠時入定時乞食時消息時供養時爲長淨者得惡作罪餘時有礙在此非過
024_0007_b_02L만일 어떤 필추가 경계 안에서 관리에게 붙들려서 오지 못했는데 함께 모여서 장정을 하였다면, 따로 머문 죄[別住罪]를 얻으며, 장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붙들린 자는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관에 가서 구해 주어 석방시켜 줘야하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작죄를 얻는다.
미친 필추에게는 미친병을 다스리는 법을 베풀어 주어야 하니, 별주(別住)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024_0007_b_02L若有苾芻在於界內官所拘不來共集爲長淨者得別住不成長淨其被拘者餘人應爲詣官求令釋放若不爾者得惡作罪狂苾芻與癲狂法防別住故
무릇 필추들은 장정하는 날이 이르면 먼저 마땅히 자세히 자신을 관찰해야 한다. 내가 이 반 달 가운데 죄를 범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하니, 만일 범한 것을 기억한다면 법답게 말해야 하며, 마땅히 청정한 이의 쪽에 갈 것이니, 그 마땅한 바에 따라서 위의를 갖춘 다음 무릎 꿇고 합장하여 먼저 죄의 이름을 기억해서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024_0007_b_06L凡苾芻等每至長淨日先應審諦觀察自身我不於此半月之中犯諸罪耶若憶所犯應如法說應往淸淨人邊隨其所應具威儀已蹲踞合掌憶先罪名作如是說
“구수이시여, 유념하소서. 나 필추 아무개는 이와 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제가 이제 구수 앞에서 청정해지는 법을 따라 모두 드러내어 죄를 말하리니, 저는 덮어 감추지 않겠습니다. 드러내어 죄를 말함을 말미암아 안락을 얻고 드러내 죄를 말하지 않으면 편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024_0007_b_11L具壽存念我苾芻某甲犯如是罪所犯罪我今於具壽前從淸淨來皆發露說罪我不覆藏由發露說罪故得安樂不發露說罪不安樂
두 번 세 번 이와 같이 말하라. 그러면 저들이 물어 말하되 “네 죄를 아는가?” 하면 대답해 말하되, “예, 압니다.”라고 하라. “장차 앞으로 모든 계를 잘 지키겠느냐?” 하면 대답해 말하기를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한다. 상대방 필추는 응당 “너는 그 죄를 말하라” 해야 하고, 대답하기를 “알겠습니다.”라고 한다.
024_0007_b_15L第二第三亦如是說彼應問言汝見罪不答言我見將來諸戒能善護不答言善護所對苾芻應云其說罪者
만일 죄에 대해서 의심이 있으면 마땅히 계율을 지키는 이[持律者]에게 가서 잘 결택해야 하며, 알고 난 후에 마땅히 드러내야 한다. 마땅히 필추를 마주 대하고 그 죄를 말해야 하며, 필추니 등을 마주 대하고 말하지 말라. 만일 필추니를 마주 대하고 말하면 월법죄를 얻는다. 저 동등한 분[同分]의 죄를 범한 사람을 마주 대해서 드러내서도 안 된다.
이를테면 바라이죄와 바라이죄는 동등한 분이 되며, 나아가 돌색흘리다(突色訖里多)42)와 돌색흘리다는 동등한 분이 된다.
024_0007_b_19L若於罪有疑應就持律者善決知已後當發露應對苾芻而說其罪不應對苾芻尼等若對尼等得越法不應對彼犯同分罪人而爲發露謂波羅市迦望波羅市迦爲同分至突色訖里多望突色訖里多爲同分
024_0007_c_02L‘동등한 분’이란 서로 같다는 뜻이니, 이른바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을 말한다. 만일 포살할 때에 범한 죄가 기억나면 그는 곧 마음에 생각하고 지키고 지니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제 승가의 열나흘 날은 장정을 하는 날입니다. 나 필추 아무개는 승가 가운데 있으면서 범한 죄를 기억하오니, 나 아무개는 범한 죄에 대해 스스로 마음에 받아 지니겠습니다.”
024_0007_b_24L言同分者是相似義謂同罪者若襃灑陁時憶所犯罪彼卽應可心念守持云今僧伽於十四日爲長淨事我苾芻某甲於僧伽中憶所犯罪我某甲於所犯罪自心守持
만일 승가에서 장정을 마친 뒤에는 청정한 필추에 대해서 여법하게 말할 것이니, 의심되는 죄도 이에 주해서 알라. 저 계를 외우는 사람이 혹은 기억하거나 의심하는 경우에도 마땅히 이것과 유사하게 지을 것이다.
만일 승가가 다 범했으면 마땅히 훌륭한 어떤 필추를 권해서 다른 주처로 가서 청정한 사람을 마주 대하고 말하여 죄를 없앤 뒤에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게 하며, 계를 어긴 모든 사람은 이 필추에게 그 죄를 말해야 한다.
024_0007_c_06L若僧伽長淨已後淨苾芻如法當說疑罪准知其誦戒人若憶若疑類此應作若僧伽咸有犯者應勸一善苾芻向餘住處對淸淨人說除罪已還來本處諸有犯人對此苾芻而說其罪
만일 그렇게 할 사람이 없으면 단백(單白)을 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하라.
“대덕 승가는 들으십시오. 이제 승가는 열나흘 날 포살을 합니다. 일체의 승가가 다 범함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능히 다른 곳에 가서 청정한 필추에 대해 여법하게 죄를 말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상대해서 여법하게 말하여 그 죄를 없애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승가가 때가 되어 승인하시면 승가는 마땅히 허락하여 주십시오.
승가가 이제 포살을 짓고 나중에 다른 곳에 가서 마땅히 죄를 없애겠습니다. 이와 같이 아룁니다.”
024_0007_c_11L若無能者可爲單白應如是作大德僧伽聽今僧伽十四日爲襃灑陁一切僧伽悉皆有犯然無一人能向餘處對淸淨苾芻如法說罪可令我等對彼如法說除其罪若僧伽時至聽者僧伽應許僧伽今作襃灑陁向餘處當如法除罪白如是
만일 다시 필추가 죄에 대해 의심이 있으면 마땅히 죄에 대해 의심이 있다고 말해야 하니, 앞에서 한 것에 준해서 하라. 만일 대중 가운데 한 필추가 청정하여 범함이 없으면 그때 청정한 필추는 마땅히 뜻이 같은 필추의 처소에 가서 좋은 마음으로 고해 말함으로써 기억하고 생각하게 하여 여러 필추 앞에서 마땅히 그 범한 바를 말하게 해야 한다.
024_0007_c_18L若復苾芻於罪有疑者應云於罪有疑准前應作若衆中有一苾芻淸淨無犯淨苾芻應詣同意苾芻處善心告語令憶念已對諸苾芻前當說其犯
024_0008_a_02L바라건대, 저 대중이 두루 다 알고 듣고 나서는 또한 그 죄를 말하게 해야 한다. 반드시 같은 뜻이 없으면 스스로 잠자코 있어야 하니, 만일 다른 필추가 뜻에 좋지 않게 여기는 줄 알면서 억지로 묻고 기억하게 하면 월법죄를 얻는다.
만일 앞사람이 죄가 있는지 죄가 없는지 알지 못하고 짐작으로 장차 청정하리라 여기고 그 죄를 설하는 데로 나아간다면 설죄(說罪)가 성립하지 않는다.
024_0007_c_22L彼衆人普知聞已亦說其罪必無同意自默而住若知他苾芻情所不樂强詰憶者得越法罪若不知前人有無罪斟酌將爲淸淨就其說罪者不成說罪
만일 별주상(別住想)을 의심하면서 장정을 한다면 월법죄를 얻는다. 만일 깨트리려는 마음으로 장정을 하면 이것은 승가를 깨트리는 방편[破僧方便]이니 솔토라죄(窣吐羅罪)43)를 범한 것이다. 마땅히 다시 화합해서 장정을 해야 한다.객으로 온 필추의 수가 적을 적에는 마땅히 은근히 대중의 화합을 구해서 다시 장정을 해야만 한다. 만일 긍정하지 않으면 작은 경계 터[小界場] 가운데로 가서 스스로 장정을 한다. 만일 객(客)이 많이 왔을 때는 본래 살던 필추는 함께 화합해서 다시 장정을 해야 한다.
024_0008_a_04L若別住想疑爲長淨者越法罪若作破壞心爲長淨者是破僧方便犯窣吐羅罪應更和合而爲長淨若長淨時舊住苾芻已爲長淨客來數少應可慇懃求衆和合更爲長淨如不肯者往小界場中自爲長若客來等多者舊住苾芻應共和合更爲長淨
만일 안거를 마쳤다면 수의를 할 때를 바로 장정이라 하니, 다시 할 필요가 없다. 저 대필추는 필추니와 한 자리에서 장정을 할 수 없다. 만일 필추니가 와서 가르침을 청하면 마땅히 함께 말해야 하며 피해서는 안 되며, 교수하는 이는 매양 장정을 하는 날에 이르면 마땅히 문옥(門屋) 아래 앉아 필추니가 와서 청하기를 기다려 때에 따라 처분할 것이다.
024_0008_a_11L若安居竟爲隨意時卽名長淨更不須作其大苾芻與苾芻尼不應同處而爲長淨若苾芻尼來請教授者當共言語不應避去授之人每至長淨日應在門屋下坐待尼來請隨時處分
유주처(有住處)라 함은 그곳에서 갈마를 아는[解] 사람이 있는 것을 말하고, 무주처(無住處)라 함은 그 도량에 갈마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유주처ㆍ무주처라 함은 이른바 어느 부분은 알아서 갈마를 했는데, 어느 부분은 알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다.
024_0008_a_16L言有住處者謂於其處有解羯磨人言無住處者謂於其處無解羯磨人言有住處住處者謂一分解爲羯磨一分不解
만일 필추가 함께 머무는 곳에 있으면서 장정을 하는 날에 이르렀으면 마땅히 그 도량에 나아가서 장정을 할 것이요. 만일 그 도량에 다투는 사람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면 악작죄(惡作罪)를 얻는다.
비록 필추가 머물지 않는 곳이더라도 동행자가 있어 즐겨 머물 만하다고 한다면 가서 지내도 범함이 없다. 만일 어려운 일이 닥치려 하면 뜻에 따라서 떠나야 하나, 만일 장정하는 날이 이르렀다면 제자ㆍ문인이 임의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024_0008_a_19L若苾芻處是堪共住至長淨日應就其處而爲長淨若處有諍人而往就得惡作罪縱無苾芻住處有同行者堪爲樂住任往無犯若難事將至情應去若至長淨日弟子門人不應隨情聽向餘處
024_0008_b_02L만일 그곳에서 계를 설하는 사람이 없으면 마땅히 다른 곳으로 가서 설계하는 이에게 나아가 장정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가지 않으면 월법죄를 얻는다.
만일 설계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면 먼저 안거한 곳에 앉아 두 번째 장정이 지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계를 설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024_0008_b_02L若當處無說戒者往餘處就說戒人而爲長淨如不往者得越法罪若於無說戒人處坐前安居不得過第二長淨應向有說戒處
모두 속인 앞에서 계를 설해서는 안 된다. 무릇 안거를 할 때에는 마땅히 뜻이 같고 청정하고 범한 것이 없으면서 같은 견해를 가진 이들과 함께 장정을 해야 한다. 만일 필추로서 귀가 먹었거나 이해[識解]가 없는 이라도 마땅히 한 처소에서 장정을 하는 경우에는 정족수[足數]가 성립되어야만 한다.
024_0008_b_05L皆不得在俗人前而爲說戒凡安居時應與同意淸淨無犯及同見者而爲長淨若苾芻耳聾及無識解者共一處爲長淨事亦成足數
만일 장정을 하는 날에 이르러서도 오직 한 몸인 자는 장정을 하는 처소에서 새로 쇠똥[新瞿摩]을 바르고 청소하며 자리를 펴고 건추(楗椎)를 울려서 미리 하는 [의식의] 방편을 마친다. 그리고 스스로 다소의 경을 독송하고는 높은 곳에 가서 객 필추가 오는가를 본다. 만일 세 사람이 오면 함께 장정을 하고, 만일 오는 사람이 없으면 저 필추는 마땅히 제자리에 와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라.
024_0008_b_09L若至長淨日唯獨一身者應於長淨之處以新瞿摩塗拭灑掃敷座席鳴楗椎作前方便竟自誦少多經已高迥處觀客苾芻若有三人來共爲長淨若無來者時彼苾芻應居本座心念口言作如是說
“오늘 열나흘 날은 승가의 장정을 하는 날입니다. 나 필추 아무개는 모든 장애되는 법에 대해 스스로 두루 청정함을 아룁니다. 제가 이제 우선 장정을 수지(守持)하는 것은 만일 이 다음에 화합대중을 만날 때 저는 실로 화합대중과 함께 장정을 하여 모든 계법을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024_0008_b_15L今十四日僧伽長淨我苾芻某甲於十四日亦爲長我苾芻某甲於諸障法自陳遍淨我今且爲守持長淨若於後時遇和合衆我當共和合衆而爲長淨滿諸戒聚故
두 번 세 번 이렇게 말하라. 만일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왔으면 마땅히 마주하여 장정을 하되, 한 사람이 할 때의 법에 준해서 하라. 만일 필추가 길을 가다가 마을[村坊]에 이르러 마을에 들어가거나 혹은 마을 밖에 머물거나 하였을 적에 이 장정하는 날이 되었으면 저들은 각각 거기서 장정을 해야 한다.
024_0008_b_20L第二第三亦如是說若有一二人來者應爲對首長淨准一人法若苾芻行路遇到村坊或有入村或住村外是長淨日彼應各各爲其長淨
024_0008_c_02L마을에 머무는 사람은 마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를 한정하여 따로 머물지[別住] 못하고, 마을 밖에 있는 이들은 마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밖에서 장정을 해야 한다.
만일 상인의 무리와 함께 갈 때는 저들이 혐오하지 않으면, 함께 머물고 함께 가면서 응당 장정을 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혐오하면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수지해야 할 것이니, 여섯 가지 일이 있어 마음에 수지하면 모두 성립되어 범함이 없다.
024_0008_b_24L住村者齊村勢分不得別住村外者村勢分外應爲長淨若與商旅同去彼不嫌者隨住隨行應爲長若彼嫌者應作心念守持長淨有其六事應心念守持皆成無犯
첫째는 3의(衣)를 지닐 것이요, 둘째는 3의를 버릴 것이요, 셋째는 여분의 옷[長衣]을 분별할 것이요. 넷째는 따로 청함[別請]을 버릴 것이요, 다섯째는 장정을 할 것이요, 여섯째는 수의(隨意)를 지어야 한다.
024_0008_c_05L持三衣捨三衣分別長衣別請作長淨作隨意
마땅히 장정을 하여야 함에도 하지 않으면 월법죄를 얻고, 장정을 해서는 안 되는데 문득 해도 역시 월법죄이나, 길상장정(吉祥長淨)은 제외한다. 이것은 대중이 파(破)하였다가 다시 화합하여 대중이 기뻐서 장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필추가 먼저 승가에서 사치법(捨置法)을 받았다가 후에 풀리게 되었으면 응당 대중에게 청하여 별시(別時)의 장정을 빌어야 한다.
024_0008_c_07L應爲長淨而不爲者得越法罪不應長淨而輒爲者亦越法罪除吉祥長淨此由衆破重得和合大衆歡喜爲長淨故有苾芻先被僧伽爲捨置法後得解應請大衆乞作別時長淨
바라저목차를 설하는데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서분을 설하고 나머지는 항상 듣던 것이라고 고하여 알게 하는 것이며, 둘째는 서분과 바라시가(波羅市迦)를 설하여 마치고 나머지는 항상 듣는 것이라고 고하여 알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승가벌시사(僧伽伐尸沙)이며, 넷째는 2부정법(不定法)까지이며, 다섯째는 더 나아가 끝까지이다.
024_0008_c_12L說波羅底木叉有其五種說序以常聞而告知之說序幷波羅市迦訖餘以常聞而告知之僧伽伐尸沙至二不定乃至終
누가 마땅히 대중을 위해서 바라저목차를 설해야 하는가? 이른바 대중의 상좌(上座)가 하되, 만일 할 수 없으면 제2좌나 제3좌로 하여금 하게하며, 혹은 차례대로 하게하며, 혹은 따로 다른 사람을 청할 수도 있다. 만일 상좌가 서분은 외울 수 있으나 나머지는 외울 수 없으면 다른 사람이 바라시가 등을 외워야 한다. 만일 미친 사람이라도 능히 외우면 또한 설계가 이루어진다.
024_0008_c_16L誰應爲說波羅底木叉謂衆中上座如不能應令第二第三或爲番次或可別請餘人若上座誦得序餘不能誦者餘人應誦波羅市迦等若癲狂人能說者亦成說戒
024_0009_a_02L“여러 대덕이여, 제가 이제 포쇄타를 지으리니 바라저목차계경을 설하겠습니다. 대덕들은 자세히 들으시고 그것을 잘 생각하십시오. 만일 범한 것이 있으면 마땅히 드러내고 범한 것이 없으면 잠자코 계십시오. 잠자코 계시므로 여러 대덕 승가가 청정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만일 나머지 다른 것을 물을 때에도 사실 그대로 대답하십시오. 제가 이제 이 거룩한 필추 대중 가운데에서 세 번에 걸쳐 물을 것이니, 또한 마땅히 사실 그대로 대답하십시오.
024_0008_c_21L諸大德我今作襃灑陁說波羅底木叉戒經仁等諦聽善思念之若有犯者當發露無犯者默然默然故知諸大德淸淨如餘問時卽如實答我今於此勝苾芻衆中乃至三問亦應如實答
만일 비구가 범한 것이 있는 줄은 알면서도 드러내지 않으면, ‘일부러 거짓말을 한 죄’를 얻게 됩니다. 여러 대덕 승가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부러 거짓말을 하면 이것은 장애하는 법’이라고 하셨으니, 그러므로 필추가 청정을 구하고자 하면 마땅히 드러내야 합니다. 드러내면 안락해지고 드러내지 않으면 안락해지지 못합니다.
024_0009_a_03L若苾芻憶知有犯不發露者得故妄語罪諸大德佛說故妄語是障礙法是故苾芻欲求淸淨者當發露發露卽安樂不發露不安樂
여러 대덕이시여, 제가 이미 계경의 서분을 말했으니, 이제 여러 대덕께 묻겠습니다. 이 가운데서 청정합니까?이렇게 세 번 말한다. 여러 대덕이시여, 이 가운데서 청정하여 잠자코 계시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지니겠습니다.”
024_0009_a_07L諸大德我已說戒經序今問諸大德是中淸淨不如是三說諸大德是中淸默然故我今如是
다음은 권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들을 것을 밝힌 것이다. ‘여러 대덕’이라고 한 것은 별해탈경을 말씀하시려 할 때에 이르렀음을 말한 것이니, 만일 공경하고 우러르지 않으면 진리의 물[法水]에 젖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거두어 잡아 산란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권한 것이다. ‘자세히 들으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온통 마음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 생각 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따로 세 가지 뜻을 밝힌 것이니, 듣는 사람에게 세 종류가 있음을 밝히고자 그것을 세 가지 그릇에 비유하였다.
이른바 우러러 온전히 청정해지면 담아두는 작용을 감당하게 되기 때문임을 말한다. 만일 엎어서 더러운 것이 흐르면 물건을 담아둘 수 없는 것이니, 순서대로 알아야 한다.
024_0009_a_09L次明勸至心聽言諸大德等者別解脫經說時欲至若不敬仰法水不霑故勸攝心勿生散亂言諦聽者摠遣用心言善思念之者別明三義欲明三類聽人喩之三器謂仰淨堪貯用故若覆穢不堪受物如次應知
다음에는 대중을 청정히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일 범한 것이 있으면’이라고 말한 것 등은, 만일 먼저 범했으면서 지금 잠자코 말하지 않으면 다시 그 죄를 부르는 것이다. ‘만일 다른 때에 남이 물으면 사실 그대로 대답하십시오.’라고 한 것도 이와 같다.
‘제가 이제 이 거룩한 필추 대중 가운데서’라고 한 것은 당시에 계를 듣는 대중을 찬미한 것이다. ‘기억해서 안다’고 말한 것은 설령 범한 것이 있다 하여도 기억하여 알지 못하면 망어죄가 없기 때문이다.
024_0009_a_15L次明淨徒衆言若有犯等者若先有犯今默不言更招其罪如餘時中他問實答此亦如是我今於此勝苾芻衆中者讚美當時聽戒徒衆言憶知設令有犯而不憶知無妄語罪故
‘거짓말[妄語]’이란 잠자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또한 거짓말이라고 이르니, 몸의 모습을 드러내어 말[語業]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오직 이것은 생각으로만 범한 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장애하는 법이다’라고 함은 두 때[二時] 가운데 능히 장애가 됨을 말한다. 곧 첫째는 현세에 모든 선법을 장애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래에 좋은 세계[善趣]에 태어남을 장애하는 것이다.
024_0009_a_20L妄語者雖默不言亦名妄語由現身相表語業故有云唯是意所犯罪障礙法者於二時中能爲障礙現世障諸善法於未來礙生善趣
024_0009_b_02L‘청정을 구하고자 하면’에서 청정이란 곧 열반이다. 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꾸짖음이나 치벌(治罰)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죄를 말한다.
024_0009_a_24L欲求淸淨者淸淨謂是涅槃爲求涅槃故不爲畏他詰責治罰而說於罪
‘드러내면 안락해지고’라 함은 여기에 다섯 가지 내용이 있으니, 하나는 부지런히 책려하여 모든 게으름을 다스리기 때문이고, 둘째는 죄가 없이 모든 허물을 다스리기 때문이며, 셋째는 공경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만식차(慢式叉)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넷째는 후회함이 없도록 모든 나쁜 짓을 다스리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고요한 선정으로 산란심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024_0009_b_03L言發露卽安樂者有五種相由勤策治諸懈怠故由無罪治諸過失由敬重治慢式叉故由無悔治諸惡作故由寂定治散亂心故
‘계경의 서분’이라 함에서 경이란 바로 그 뜻을 생략해서 푼 것이다. 계의 모양을 간략하게 말해 밝히고자 하여 그 조목을 설명한 것으로 자세히 해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序)’라고 함은 곧 실마리란 뜻이니, 이른바 계를 설할 때에 이로써 시작을 삼아 비로소 다른 설법도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024_0009_b_07L戒經序者經是略詮義欲明略陳戒詮其綱目不廣釋故言序者是由緖也謂說戒時以此爲先能令餘說得生起故
다만 세 번 묻는 까닭은 지나친 간략함과 지나친 상세함을 여의기 때문이다. 만일 지극히 자세히 한다면 긴 시간을 힘들여야 하므로 대중들로 하여금 싫증나게 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 물음에 모두 따로 죄를 얻는다. ‘지닌다’ 함은 바로 분명히 안다는 뜻이다.
024_0009_b_11L所以但爲三問者離極略極廣故若極略者闇昧之人卒難知若極廣者恐多延時令衆倦故於三問皆別得罪持者是了知義
根本薩婆多部律攝卷第一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범어로는 Pratimokṣa. 구역에서는 바라제목차(波羅除木叉). ‘몸과 입으로 범한 허물을 하나하나 따로 해탈하게 한다’는 뜻에서 처처해탈(處處解脫)ㆍ별해탈(別解脫)이라고도 한다.
  2. 2)하나하나의 계율에 대해서 계(戒)를 제정하게 된 동기, 인연, 계목(戒目) 등에 대해 낱낱이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3. 3)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여러 일[諸事]이라 되어 있는데, 약에 관한 일[藥事], 옷에 관한 일[衣事] 등에 대해서 말한 건도(犍度), 곧 편(篇)ㆍ장(章)을 의미한다.
  4. 4)범어로는 nidāna. 12부경(部經)의 하나. 인연(因緣)ㆍ연기(緣起)라 번역.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하여 그 유래부터 말하는 것으로서 세 가지의 뜻이 있다. ① 사람이 묻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 ② 죄를 범하는 이가 있을 때에 거기에 대하여 계를 제정하는 것, ③ 어떤 일로 말미암아 법을 말하는 것 등이다.
  5. 5)범어로는 Mātrika. 행모(行母)라 번역한다.
  6. 6)비니증일(毘尼增一)을 가리킨다. 곧 한 가지 법에서 열 가지 법 혹은 스물두 가지 법까지 법의 수에 따라 보충한 계율을 말한다.
  7. 7)범어 Upāli. 우바리(優婆離)라고도 한다. 곧 10대 제자 중 지계제일(持戒第一)로, 근집(近執)ㆍ근취(近取)라 번역. 석가족의 이발사로 하천한 출신이지만, 계율을 제일 잘 지켜 청정제일이었으며, 결집 시에는 계율을 외워냈다. 남방불교에서는 석존을 이은 초조(初祖)로 받든다.
  8. 8)『본생경』에서 연등불(然燈佛)에게 수기를 받은 석가불의 소년 때 이름이다.
  9. 9)유부(有部)에 4율(律) 5론(論)이 있는데 5론의 두 번째인 『마득륵가론』을 말하는 것으로 총 10권이다.
  10. 10)『비니모론(毘尼母論)』. 역자는 미상이고, 총 8권이다. 유부의 4율 5론 중 5론의 하나이다. 유부의 율장을 해석하여 다른 부와는 같지 않음을 보인 논서이다.
  11. 11)4제(諦)를 관찰하는 단계. 무루성도(無漏聖道)를 처음으로 발견하여 성자의 무리에 든 위(位)로 견제도(見諦道)라고도 한다.
  12. 12)견도(見道) 후에 견도에서 본 진리를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보는 지위이다.
  13. 13)범어 kotii-kalpa. 백억이라 번역. 일반적으로 큰 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4. 14)석존 일대의 교의(敎義)를 성질과 형식에 따라 열두 가지로 나눈 것을 말한다.
  15. 15)청정계(淸淨戒)의 뜻. 시라(尸羅, śila)는 계율을 말한다.
  16. 16)계(戒)ㆍ정(定)ㆍ혜(慧) 3학을 말한다.
  17. 17)세속적인 의미의 선. 곧 생사 세계를 뛰어넘지 못한 선이 세속 선[俗善]인데 대해 출세간의 선, 생사를 뛰어넘은 선을 일컫는 말이다.
  18. 18)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또는 유(有)ㆍ무(無) 한쪽에 치우쳐 집착하는 것이다.
  19. 19)범어로는 Ārāñyaka. 아란야(阿蘭若)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20. 20)아라한(阿羅漢)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21. 21)신구의(身口意) 3업에 드러내고 받아 지닌다는 말이다.
  22. 22)‘욕(欲)과 청정함[淸淨]’이란 여욕(與欲)ㆍ여청정(與淸淨)이라고도 한다. 여욕이라 함은 승단의 갈마작법(羯磨作法)에 병 등이 있어 결석하게 될 경우, 그 갈마의 결의에 동의할 의사가 있음을 도반을 통해 전달하는 것, 여청정은 반 달마다 설계하는 날[布薩]에 빠지게 될 때 도반을 통해서 청정함을 전하는 것, 이 양자는 승갈마(僧羯磨)에 결석할 경우, 행해야 할 필요조건으로 다 같이 욕(欲)이라고 할 때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 곧 여청정과 뜻이 같다.
  23. 23)본문의 과목으로 서문이 이하 10단으로 나누어진다.
  24. 24)노사(老死)와 불법(佛法)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다.
  25. 25)중학법(衆學法)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어기면 돌길라죄(突吉羅罪)를 범한다. 따라서 한 사람 앞에 참회하면 되는 고의로 짓는 것이 있고, 스스로 뉘우치면 되는 고의가 아닌 경우가 있다. 율에 따라서 그 수는 일정치 않지만 복장이나 위의나 식사 등에 관한 자세하고 많은 규정을 담고 있으므로 중학(衆學)이라 한 것이다.
  26. 26)제2의 과문(課文)이니, 제1 부처님의 가르침을 밝힌다[明不所敎]에 이어서 둘째 대문으로, 대중이 모이지 않음을 꾸짖는[呵不總集] 내용이다.
  27. 27)범어 poṣ̣͎adha의 음역. 구역에서는 포살(布薩)이라 번역함. 의정은 장정(長淨)으로 한역하고 있는데 구역에서는 정주(淨住)라 한역했다.
  28. 28)제3의 과문으로,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따라서 듣는 것을 밝힌 대문이다[明不集隨聽].
  29. 29)돌길라(突吉羅, duṣkṛta)와 같다. 악작죄(惡作罪)로서 중학법(衆學法), 위의법(威儀法) 및 기타 중죄가 아닌 방편 경죄는 다 이 죄에 해당한다. 그 참회법은 고의로 저질렀을 때엔 한 사람 앞에서, 고의가 아니면 스스로 진심으로 참회하면 된다.
  30. 30)범어로는 Karmadāna. 특수한 일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지사(知事)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31. 31)도량의 경계를 선정하는 것. 곧 동일한 도량, 처소, 산내(山內)에 머무는 대중이 동일한 포살에 모이게 하기 위한 범위의 결정, 이것을 일포살공주화합(一布薩共住和合)이라 한다. 범위는 승중(僧衆)의 갈마에 의해 결정된다.
  32. 32)유선나(踰繕那)는 yojana의 음역어. 유순(由旬)이라고도 한다.
  33. 33)구율(舊律)에는 자자(自恣)라 한다. 안거(安居)를 마치는 날 안거 중에 있었던 범죄에 대해서, 또는 보고[見] 듣고[聞] 의심되는[疑] 바에 따라 뜻에 따라 묻고 참회하는 의식이다.
  34. 34)어떤 일들의 법다움을 확인하고 허락한다는 뜻이다.
  35. 35)여기서부터는 네 번째 과목으로 공양하는 법식을 밝힌 것이다.
  36. 36)행위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이로 인해 죄악이 되는 것을 말한다.
  37. 37)본질적인 죄를 말한다.
  38. 38)다섯 번째 과목으로 계의 이익을 밝힌 것이다.
  39. 39)넉 달은 반월씩 8개가 되므로 세 번의 반월이 지날 때, 즉 1달 반과 7번의 반달이 다 할 때, 즉 세 달 반째이다.
  40. 40)12개월을 반월씩 나누면 24번이 되므로 그중 6번은 14일에, 18번은 15일에 한다는 것이다.
  41. 41)여기에서 수(授)란 아직 배우는 비구의 뜻으로 봐야 할 듯하다.
  42. 42)구역의 투란차(偸蘭遮)와 같다. 대죄(大罪)ㆍ추악(麤惡)ㆍ대장선도(大障善道)라 번역하며 바라이죄나 승잔죄에 이를 수 있는 죄이다.
  43. 43)범어로는 Shūlātyaya. 투란차(偸蘭遮)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