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決定藏論卷下

ABC_IT_K0598_T_003
017_0341_b_01L결정장론 하권
017_0341_b_01L決定藏論卷下
진제 한역
김철수 번역
017_0341_b_02L 梁天竺三藏眞諦譯
심지품 ③
017_0341_b_03L心地品之三
경에는 말하는 바에 따르면 여섯 가지의 뛰어난 지혜가 있으니, 음(陰)ㆍ입(入)ㆍ계(界)ㆍ4제(諦)ㆍ인연(因緣)ㆍ22근(根)이다.
017_0341_b_04L如經中說六種勝智謂陰四諦 因緣二十二根如是勝智云何分別 鬱陁南
모습[相]ㆍ뜻[義]ㆍ분별과
차제(次第)ㆍ섭수(攝受)ㆍ의지(依止)이다.
이 여섯 가지 법에 의지하면
음(陰), 입(入) 등을 알 수 있네.
017_0341_b_07L相義及分別
次第攝受依
依此六種法
了知陰入等
색(色)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열한 가지나 있으니, 안(眼) 등 5근(根)과 촉(觸)까지의 5경(境) 및 법입(法入) 가운데 색이 존재한다. 이 색은 4대(大)에 의지하여 존재하는데 이 4대는 모두 다 애[礙相]이다.
017_0341_b_09L 何者色相謂十一種眼等及觸法入中 有依四大有是四大皆是㝵相
수(受)의 모습은 어떠한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눈[眼] 등 6근(根)의 촉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또 세 가지의 수에는 두 가지의 의지(依止)가 있으니 색과 심을 의지하여 각각 신수(身受)와 심수(心受)라 한다. 왜냐하면 5근은 모두 색의 상(相)이기 때문이다.
017_0341_b_11L何者 受相謂有六種眼等觸生又三種受二種依謂色及心依色身受何以故根色故
【문】만약에 다섯 가지 감각기관[根]이 모두 색을 의지하여 눈 등의 수가 생기는 것을 신수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5근을 신(身)이라 하지 않습니까?
017_0341_b_14L若根有色依眼等受是名身 何故五根不名爲身
【답】5근은 각각 자상(自相)이 있어서 공용(功用)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상이 다른 경우라면 같은 신상(身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근수(根受)를 신수라 이름하지 않는다.
017_0341_b_15L答曰根自相 用各異故若異相故不同身相故根受不名身受
【문】몸[身]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눈 등의 근이 존재하고 근을 의지하여 수를 낳기 때문에 신수라고 한 것이니, 여기에 아무런 허물이 없지 않는가? 만약에 떠나지 않음을 허물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몸을 떠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심수(心受)를 또한 신수라고 할 수 있으니, 무릇 일체의 수를 다 신수라고 이름할 수 있다.
017_0341_b_17L答曰不離身故有 眼等根依根生受故名身受此說無過 若說不離言無過者心不離身是故心 受亦名身受凡一切受皆名身受
017_0341_c_01L【답】신(身)과 모든 근(根)은 서로 떠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은 이와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중생이 무색계의 처소에서 태어나면 몸을 떠나서 마음만 존재한다. 따라서 근의 수는 신수라고 할 수 있으나 마음은 몸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심수(心受)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수는 두 가지 명칭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일체의 수는 모두 상(相)의 세 가지 인연을 사용한다. 첫째는 진승력(塵勝力)이고, 둘째는 사유승력(思惟勝力)이며, 셋째는 자재승력(自在勝力)이다.
017_0341_b_20L身與諸根不得相離心不如是有衆生生無色處離身有心是故根 受得名身受心得離身故名心受一切受得有二名謂一切受皆是用 相三種因緣一者是塵勝力二者思 惟勝力三者自在勝力
상(想)의 양상[相]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여섯 가지가 있으니, 앞의 경우와 같다. 또 상(想)은 여섯 가지 모습[相]을 낳으니, 유상상(有相想)ㆍ무상상(無相想)ㆍ소상(小想)ㆍ대상(大想)ㆍ무량상(無量想)ㆍ무용상(無用想)이 있다. 이 일체의 상에는 두 가지 범주의 차이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이고, 둘째는 출세간이다.
017_0341_c_04L 何者想相六種如前又六種生有相 無相想小想大想無量想無用想 此一切想得二種異一者世閒二出 世閒
욕계를 반연하는 것을 소상이라 하고, 색계를 반연하는 것을 대상이라 하며, 공식처(空識處)를 반연하는 것을 무량상이라 하고, 무소용처(無所用處)를 반연하는 것을 무용상이라 한다.
이 욕계 등에서는 유상상(有相想)이라 하며, 비상비비상처에서는 무상상(無相想)이며, 출세간상이란 모든 학인(學人) 및 무학인(無學人)의 상(想)을 말한다. 이 상은 온갖 상(相)으로 상(想)의 양상을 분별한 내용이다.
017_0341_c_08L緣於欲界是名小想緣於色界 是名大想緣空識處名無量想緣無 所用處是無用想此欲界等是名有 相想非想非非想是無相想出世閒想 謂諸學人及無學人是一切相分別想相
행의 양상[相]은 어떠한가?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가 있고, 또한 다섯 가지 일[事]이 있다. 첫째는 모든 진경계(塵境界)와 함께하는 것이요, 둘째는 함께 갖추도록 하는 경우이고, 셋째는 유위(有爲)를 멀리 여의는 것이며, 넷째는 번뇌업을 일으키는 것이고, 다섯째는 마음이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
또 간략히 말해서 세 가지가 있으니,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이다. 또한 일체의 과(果)를 이끄는 것을 행상이라 한다.
017_0341_c_12L何者行相如前六種復五種事一者 爲與諸塵二者得共俱故三者有爲 遠離四者起煩惱業五者心得自在 略說三種不善無記一切牽果名行相
식(識)의 양상[相]은 어떠한가?
이에도 또한 여섯 가지가 있다. 이른바 안식(眼識)에서부터 의식(意識)까지이다. 또 식의 양상을 분류하면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용분(用分)이고, 둘째는 연다분경(緣多分境)이며, 셋째는 주제이분(住諸異分)이다. 응분에는 세 가지가 있고, 경분(境分)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며, 주분(住分)에도 세 가지가 있다. 이와 같은 지분들을 분별하면 총 열여덟 가지로서 진경계(塵境界)를 취하여 상(相)으로 삼는 것이며 5음(陰)의 양상[相]인 것이다.
017_0341_c_17L 何者識相亦有六種所謂眼識乃至 意識是識相分復有三種一者用分 二者緣多分境三者住諸異分用分 有三境分有六住分亦三如此等分 分別十八取塵爲相是五陰相
017_0342_a_01L음(陰)의 뜻은 무엇인가?
색이란 과거, 미래, 현재 내지 가깝거나 먼 일체의 색인데, 종합하여 음의 뜻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색(色)에서부터 식(識)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종합적으로 포함하여 모든 화합한 것을 다 음의 뜻이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화합이 음의 뜻이라고 하셨을까? 이 모든 음은 오로지 화합한 것일 뿐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화합을 음의 뜻이라고 하신 것이다.
017_0341_c_22L 何者陰義色者過去未來現在乃至 近遠一切諸色摠名陰義如是等色 乃至於識如是摠攝一切和合皆名 陰義何故佛說和合陰義以此諸陰 唯是和合無有實我是故佛說名爲陰
색음(色陰)이란 무엇인가? 분별해 보면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종류에 따름[隨類]이고, 둘째는 양상에 따름[隨相]이며, 셋째는 식(識)이 의지함과 의지하지 않음이고, 넷째는 식을 떠나거나 식을 떠나지 않음이며, 다섯째는 진경계에 대한 생각[想塵]이고, 여섯째는 색구경처(色究竟處)이다. 이 일체의 색이 소위 4대(大)이며 4대를 의지하는 것이므로 수류라고 하는 것이다.
017_0342_a_05L何者色陰分別有六一者隨類二者 隨相三者識依不依四者離識不離 五者想塵六者色究竟處此一切 所謂四大及依四大是名隨類
색의 모습[色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색(淨色)이요, 둘째는 정진(淨塵)이며, 셋째는 심진(心塵)이다. 공상(共相)이란 모든 것이 질애(質礙)인데 일체의 색은 다 공상이다.
017_0342_a_08L相三種一者淨色二者淨塵三者心 共相者皆是質㝵一切諸色皆是 共相
식(識)이 의지함과 의지하지 않음이란 무엇인가? 중생의 종류[衆生數]를 의지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색이 있는 곳에 식이 맨 처음 들어가서 마침내 수(受)를 낳는 것을 식이 의지함이라 하고, 이와 같은 색을 떠나면 식이 의지하지 않음이라 한다.
017_0342_a_11L何者識依不依是衆生數名之 爲依復有色處識初入乃至生受名識依離如是色名爲不依
식을 떠나거나 떠나지 않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색이 식을 떠나지 않는 것을 자분(自分)이라 한다. 공통적으로 식들이 색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식을 떠난 것을 부자분(不自分)이라 한다. 유사하게 상속하여 촉을 생하는 것을 자분이라 하고, 비록 유사하게 상속하더라도 촉을 생하지 아니한 것을 부자분이라 한다.
017_0342_a_13L何者離 識不離識色不離說名自分共識同 用故又復離識名不自分相似相續能 生於觸名爲自分雖相似相續不生於 名不自分
여기에는 세 가지의 상[想]이 있으니, 색진(色塵)이라 한다. 첫째는 색상(色想)이요, 둘째는 애상(礙想)이며, 셋째는 종종상(種種想)이다. 색상에는 세 가지 양상이 있으니, 첫째는 색을 현현(顯現)하는 것이고, 둘째는 색을 장애함이며, 셋째는 색을 모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양상의 진(塵)은 순서대로 청색이나 흑색 등을 취하면 색상이라 하고, 사람을 방해하며 다니는 것을 애상이라 하며, 남녀나 전답, 가옥 등의 모습을 취하는 것을 중종상이라 한다.
017_0342_a_17L有三種想名爲色塵者色想二者㝵想三者種種想色想 者三相一者顯現色二者㝵色三者 聚色此三相塵如次第故取靑黑等 名爲色想妨人遊行名爲㝵想取於 男女田宅等相名種種想
017_0342_b_01L진색색구경(塵色色究竟)이란 간략히 말해 두 가지가 있으니, 업의 증상연으로 하계인 욕계나 색계에 떨어지는 경우와 만일 네 가지 공처(空處)에 의지하면 업을 짓게 되더라도 색이 없고 자재정(自在定)에 의지하면 오묘한 광색이 있다.
017_0342_a_22L塵色色究 竟者略說有二下界墮欲界色界業 增上緣若四空處依於作業則無有 依自在定有妙光色
무엇 때문에 일체의 색종(色種)에서 자재한 지혜를 얻는가? 정(定)을 닦아 나타내기 때문에 이것은 오묘한 정(定)에서 비롯되는 색이다.
017_0342_b_02L何故一切色 種得自在智修現定故是妙定色
수음(受陰)이란 무엇인가?
분별하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受)의 품류이고, 둘째는 자상(自相)이며, 셋째는 생기는 처소[生處]이고, 넷째는 사유 분별이며, 다섯째는 소멸하는 처소[滅處]이다.
017_0342_b_03L者受陰分別有五一者受類二者自 三者生處四者思惟分別五者滅
수의 품류란 무엇인가? 수용하는 처소의 법이다. 자상이란 무엇인가? 고(苦)ㆍ낙(樂)ㆍ불고불락(不苦不樂)이다.
017_0342_b_06L何者受類用處法何者自相 不苦不樂
낙수란 태어남의 즐거움[生樂], 머무는 즐거움[住樂]이니, 괴로움이 없어져 애착하는 인연이다. 고수(苦受)란 태어나는 괴로움[生苦], 머무는 괴로움[住苦]으로서 즐거움이 없어져 애착을 여의는 인연이다. 불고불락이란 행고(行苦)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애착하는 인연이다. 이 일체의 수(受)는 모두 다 고(苦)이며 수고상(受苦相)이라 한다.
017_0342_b_07L樂受者生樂住樂壞苦愛 著因緣苦受者生苦住苦壞樂離愛 因緣不苦不樂者行苦故苦解脫愛 此一切受皆悉是苦名受共相
생기는 처소란 무엇인가? 열여섯 가지 촉을 따라 수음(受陰)이 생긴다. 열여섯 가지란 무엇들 말하는가? 육근촉(六根觸)ㆍ애촉(礙觸)ㆍ의언촉(依言觸)ㆍ고촉(苦觸)ㆍ낙촉(樂觸)ㆍ불고불락촉ㆍ욕촉(欲觸)ㆍ진촉(瞋觸)ㆍ무명촉(無明觸)ㆍ명촉(明觸)ㆍ비명무명촉(非明無明觸)이다.
017_0342_b_10L者生處從十六觸受陰得生何者十 謂六根觸礙觸依言觸苦觸樂觸 不苦不樂觸欲觸瞋觸無明觸明觸明無明觸
근을 의지하여 진경계(塵境界)를 취하는 것을 육근촉이라 한다. 진을 의지하여 사유하면 애촉을 생한다. 마음을 의지하여 말을 내는 것을 의언촉이라 한다. 세 가지 수속은 결박[縛]과 해탈[解]을 의지한다. 탐욕, 진에, 우치(즉 무명)의 촉은 번뇌의 결박을 의지한다. 명족과 비명무명족은 해탈을 의지한다.
017_0342_b_14L依根取塵名六根觸依塵思 生於㝵觸依心出言名依言觸三種 受觸依縛依解欲瞋癡觸則依於縛 明非明無明觸依於解脫
사유 분별이란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에게는 여덟 가지로 분별하셨다. “수(受)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수의 쌓임[集]이란 무엇인가? 수의 멸이란 무엇인가? 수집(受集)의 행도(行道)란 무엇인가? 수멸(受滅)의 행도란 무엇인가? 수미(受味)란 무엇인가? 수의 허물이란 무엇인가? 수가 멸하는 처소는 어디인가?
생기는 모습을 분별하면 세 가지 수가 있다. “촉(觸)의 쌓임이 있기 때문에 수(受)의 쌓임이 있으며……”라고 경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017_0342_b_17L何者思惟 分別一切諸佛八種分別幾種受者受集何者受滅何者受集行道者受滅行道何者受味何者受過者受滅處生相分別有三種受有觸 集故則有受集廣說如經
017_0342_c_01L이와 같이 여덟 가지 양상으로 수음을 분별하면 첫째는 자상분별(自相分別)이고, 둘째는 현인(現因)분별이며, 셋째는 인멸(因滅)분별이고, 넷째는 현재와 미래의 분별이며 다섯째는 수멸도(受滅道)분별이고, 여섯째는 탁용(濁用)분별이며, 일곱째는 청정(淸淨)분별이고, 여덟째는 수멸처(受滅處)분별이다. 이 상을 분별이라 한다.
017_0342_b_22L是八種相 分別受陰一者自相分別二者現因 分別三者因滅分別四者現在未來 分別五者受滅道分別六者濁用分 七者淸淨分別八者受滅處分別 名分別
멸처(滅處)란 무엇인가? 초선에서는 근심의 뿌리[憂根]를 멸하고, 2선(禪)에서는 괴로움의 뿌리[苦根]를 멸하며, 3선에서는 기쁨의 뿌리를 멸하고, 4선에서는 즐거움의 뿌리[樂根]를 멸하며, 멸진정에서는 평등의 뿌리 [捨根]를 멸하는 것을 수멸처분별(受滅處分別)이라 한다.
017_0342_c_04L何者滅處初禪滅憂根二禪 滅苦根三禪滅喜根四禪滅樂根盡定滅捨根是名受滅處分別
상음(想陰)이란 무엇인가?
분별하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종류를 따름[隨類]이고, 둘째는 양상을 따름[隨相]이며, 셋째는 전도(顚倒)이고, 넷째는 부전도(不顚倒)이며, 다섯째는 결정(決定)이다.
017_0342_c_06L 何者想陰分別有五一者隨類二者 隨相三者顚倒四者不顚倒五者決
경계의 별상(別相)을 취하여 상(想)을 생하는 법을 그 종류에 따름이라 한다. 양상에 따르는 것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전에 설명한 경우와 같다. 경계를 취함이 비록 다르더라도 모든 생각[想]이 공상(共相)인 것을 양상에 따름이라 한다. 범부는 무지(無智)와 무명이 마음을 덮어 그릇된 사유를 일으킨다. 두 가지 전도를 의지하면 네 가지 전도가 출현한다. 무상한 것을 의지하여 항상한 것으로 여기니, 이렇게 항상하다는 생각을 닦으면 견취(見取)에 의지하여 두 가지 전도를 낳는다. 말하자면 괴로움 가운데서 즐거움을 헤아리고 깨끗하지 못한 데서 깨끗함을 헤아린다. 신견(身見)에 의지하면 아(我)에 대한 전도를 일으켜 무아(無我) 가운데서 법을 취하여 나의 모습[我相]이라 한다.
017_0342_c_09L取境別相能生想法是名隨類相有六已如前釋取境雖異皆想共 名爲隨相凡夫無智無明覆心邪思惟依二見半出四顚倒依於無常 謂以爲常是修常想爲依見取出二 顚倒謂苦中計樂不淨計淨依於身 見出我顚倒於無我中取法我相
또한 재가인의 경우에서는 마음의 전도[心顚倒]라 하고 출가인이라면 견전도(見顚倒)라 한다. 분별해 보면 또한 다른 상전도(想顚倒)가 있다. 네 종류에서 그릇되게 닦는 생각을 내는 것을 생각의 전도[想顚倒]라 한다. 네 종류에서 결정적인 지혜를 냈다는 믿음을 일으켜 분별하면 이를 견전도라 한다.
017_0342_c_15L有在家名心顚倒如出家人名見顚 分別又有異想顚倒於四種類生 邪修想名想顚倒於四種類生決定 智起信分別名見顚倒
017_0343_a_01L전도되지 않은 생각이란 무엇인가? 지혜 있는 이들에게는 무명이 없어서 바른 사유를 일으켜 무상의 경계에 대해서는 무상으로 파악하고, 괴로움에 대래서는 괴로움으로 파악하며, 깨끗하지 못함에 대해서는 깨끗하지 못함으로 파악하고, 무아에 대해서는 무아로 파악하니, 바르게 닦을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전도되지 않은 생각이라 한다. 이 네 가지 종류에 대해 믿는 즐거움[信樂]을 일으키는 것을 마음이 전도되지 않음[心不顚倒]이라 한다. 이 네 가지 종류에 대해 바른 견해로 바르게 아는 것을 견해가 전도되지 않음[見不顚倒]이라 한다.
017_0342_c_19L何者不顚倒 諸有智人無有無明起正思惟無常境見於無常於苦見苦於不淨 境見於不淨於無我境見於無我正修想名不顚倒想於此四種能起 信樂是名心不顚倒於此四種正見 正知名見不顚倒是名想不顚倒
결정(決定)이란 무엇인가? 분별해 보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진경계에 대한 결정이요, 둘째는 수용(受用)의 결정이며, 셋째는 가명결정(假名決定)이며, 넷째는 부실결정(不實決定)이며, 다섯째는 실의결정(實義決定)이다.
017_0343_a_02L者決定分別有五一塵決定二用決 三者假名決定四者不實決定者實義決定
진경계에 대해 자상으로 취하거나 유사한 상[似相]으로 취하는 것을 진경계에 대한 결정이라 한다. 진경계를 수용하여 개별적으로 다르게 상을 취하는 것을 수용결정이라 한다. 자타에 의지하여 태어남이나 성씨[姓] 등의 세속의 언어를 따라 경계에 대해 생각을 짓는 것[作想]을 가명결정이라 한다. 전도되게 진경계를 취하는 것을 부실결정이라 하고, 여실하제 진경계를 취하는 것을 실의결정이라고 한다.
017_0343_a_05L取塵自相取似相是塵 決定於塵生受取別異相名用決定 依於自他是名是生是姓等相隨世 俗語作想境界是名假名決定顚倒 取塵名不實決定如實取塵是名實 義決定
행음(行陰)이란 무엇인가? 분별해 보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경계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머무름[別住]이며, 셋째는 깨끗하지 못함이고, 넷째는 깨끗함이며, 다섯째는 현상[事]이다.
여섯 가지 사유[思]가 뛰어난 힘[勝力]을 모아 과를 이끌면 이를 행의 진경계[塵]라 한다. 태어남, 늙음, 머무름 등 불상응행이 화합하여 적취(積聚)하는 것을 개별적인 머무름의 행이라 한다. 왜냐하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머무르는 행이라 한 것이다. 삼독(三毒) 등의 행을 이름하여 깨끗하지 못함이라 한다. 신(信) 등 선근을 이름하여 깨끗한 행이라 한다. 앞서와 같은 다섯 가지 경우를 같이 진경계와 함께 아는 것을 현상[事]이라 한다.
017_0343_a_10L 何者行陰分別有五一者謂塵二者 別住三者不淨四者淸淨五者事種思聚勝力牽果是名行塵生老住 等不相應行和合積聚名別住行以故各各異故名別住行三毒等行 名爲不淨信等善根名爲淨行如前 五種知與塵等是名爲事
식음(識陰)이란 무엇인가?
분별해 보면 이 또한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입처(入處)이고, 둘째는 깨끗하지 못함[不淨]이며, 셋째는 의지하는 까닭이고, 넷째는 머무는 까닭이며, 다섯째는 많은 종류이다.
017_0343_a_17L 何者識陰分別亦五一者入處二者 不淨三者依故四者住故五者多種
017_0343_b_01L욕계 가운데 식이 외색입(外色入)을 의지하면 이름하여 입처(入處)라 한다. 색계의 정천(淨天)에서 자신의 음(陰)을 의지하는 것을 색이라 한다. 식입처(識入處)에는 두 가지 입(入)이 있다. 4공처(空處)의 식(識)이 각기 사신의 음을 의지하는 것을 입처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입처의 분별이다. 이 범부의 식은 두 가지 낙(樂)에 의지하여 깨끗하지 못함을 낳는다. 즉 현재의 진경계를 의지하여 즐거움을 수용하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함이라 하고, 미래에 의지하여 늙음 들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낳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므로 깨끗하지 못함이라 한다.
017_0343_a_19L欲界中識依外色入名爲入處色界 淨天依於自陰是爲名色識入處則 有二入四空處識依自四陰說名入 是入處分別此凡夫識依二種樂 生於不淨依現塵用樂故不淨依於 未來生老等苦樂故不淨名不淨
식이 의지하는 것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것들이 식을 낳는다. 즉 눈[眼] 등의 6입(入)을 의지하면 식이 의지함이 생기기 때문에 여섯 가지의 명칭을 얻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겨[糠]를 의지한 불, 쇠똥을 의지한 불의 경우에서와 같다. 이는 명칭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017_0343_b_02L依有六種是生識依眼等六入識依 得生故得六名譬如依糠火牛糞等 火亦復如是是名依故
4식(識)의 주처(住處)를 분별해 보면 경에서는 “음(陰)이 의지하는 경계가 마음의 주처가 되니 색 가운데 식이 머무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자세한 것은 경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나아가 “나는 결코 식이 동쪽에 이른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른 방향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현세의 법에 열반을 즐기지 않고 스스로 적정(寂靜)하여 청량함에 이르면 범자재(梵自在)를 얻는다고 나는 이와 같이 말하노라”라고 하셨다. 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말씀 가운데는 4식(識)의 머무는 처소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다시 간략히 세 가지로 요약하석 설명하면 인연(因緣)과 머무름[住]과 처소이다. 궁극적으로 인연은 적정함에 머문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설하시어 4식주(識住)를 드러내셨다.
017_0343_b_05L分別四識住 如經中說陰依境界爲心住處色中識住廣說如經乃至我說識不 至東餘方亦爾於現世中不樂涅槃 自至寂靜淸涼得梵自在我說如是 此如來說經中所攝四識住處後當 廣說復略說三有緣住處究竟有緣 住靜佛說此三顯四識住
번뇌 경계의 종류와 번뇌가 의지하여 머무는 것을 번뇌 집착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경계를 집착함이라 하니, 첫째는 경계이고, 둘째는 취함[取]이다. 경계란 번뇌가 탐애를 반연하여 “이것이 내 물건이다”라고 말하면 이는 경계에 대한 집착이다. 또 나[我]라는 견해의 번뇌로 나라고 생각한다.
017_0343_b_12L煩惱境類 煩惱依住是說名爲煩惱執著以此 二種名執著境一者是境二者取煩惱緣愛言是我物卽是執境見煩惱思惟是我
또한 네 가지 탐 등의 신결(身結)이 있으니, 이 업인연(業因緣)이 곧 경계를 취하는 것이다. 위에서 집착한 바와 같은 것이 마음이 머무는 처소[心住處]이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의 경계가 마음을 의지하여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축축한 옷감에는 티끌들이 묻기 쉽고, 기름진 땅에는 종자가 잘 자라나는 것과 같다.
017_0343_b_16L又有四種貪等身 是業因緣卽是取境如上所執是 心住處何以故諸煩惱境依心得住猶如濕衣諸塵易住如肥田中種子 增長
017_0343_c_01L모든 범부인들은 아직 애욕을 싫증내 떠나 대치하지 못하여 감수함[受]이 식을 이끈다. 따라서 미래세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일을 갖추게 하고 나아가 범부의 성품을 버리지 못한다. 이곳에서 몸을 받아 태어나는 일을 갖추는 것을 능주(能住)라 하고, 이러한 상속하는 생을 생사의 처소라 한다. 그 밖의 나머지 머무르는 인연[住緣]에 관해서는 전에 말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은 일체를 인연과 머무름과 처소가 있다고 한다.
017_0343_b_20L諸凡夫人未得厭離愛欲對治 受所牽識未來世中卽得受生悉令 具足乃至未捨凡夫之性此所受生 令具足者是名能住此相續生是名 生死所餘如前說於住緣如此一切 名有緣住處
유색계(有色界)의 식들은 오고 감이 있으며 무색계(無色界)에서는 마음이 사라지거나 생기는 것이 있다고 만다. 이 세 처소에 머무름[處住] 내지 목숨을 버릴 경우에는 알의 두 처소와 마찬가지로 생겨나 증장하여 장대해진다. 이와 같이 사량하기 때문에 모든 식의 머무는 처소와 그 궁극적인 경지를 알 수 있다.
017_0343_c_02L有色界中諸識來去色界中說心沒生此三處住乃至壽 如前二處得生增長及於壯大是量故得知諸識住處究竟
만약 어떤 주장에서 이 뜻과 다르게 말한다면 이는 오로지 문자의 차이일 뿐 그 이치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문자의 뜻은 별도로 분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묻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답할 수가 없다. 그리고 곧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대답하여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한다. 만약에 답을 한다면 후에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정말로 어리석었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을 했었단 말이야’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일체의 색에서부터 행음(行陰)의 애(愛) 등 모든 번뇌에 이르기까지 단박에 항복시켰기 때문에 업의 결박을 낳지 않는다.
017_0343_c_05L若有說 言異於此義唯文字殊理則無別以故文字義別無分別故若有問者 則不能答卽便思惟我云何對脫若 有答後更思惟我實愚癡自不知解 而答他問是故智人從一切色乃至 行陰愛等諸結蹔伏故無能生業結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근본이 영원히 없어진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가 있는가? 모든 재가인들은 탐애와 성냄의 번뇌에 의하여 업진(業塵)을 짓나니 인연을 맛보고 인연을 원망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017_0343_c_11L有智慧故根本永盡何以知之諸在 家人依貪瞋結則能作業塵味因緣 恐憎因緣
출가인은 계금취견(戒禁取見)과 실결(實結)로 인해 업을 낳는다. 계금취견의 번뇌는 탐애와 똑같은 양상[同相]으로 하늘 세계에 태어나기를 구하고 실결번뇌는 성냄[瞋]과 똑같은 양상이기 때문에 열반을 비방하게 된다. 이와 같은 번뇌의 결박은 마음자리[心地]를 의지하여 생각으로부터 생기지만 이러한 모든 번뇌는 대치하면 멸하기 때문에 색 등을 취하여 경계로 삼으려는 것은 영원히 멸한다.
017_0343_c_14L於出家人戒取實結而能 生業戒取煩惱與貪同相願求生天 實結煩惱與瞋同相故謗涅槃如此 諸結依於心地從思惟生此諸煩惱 對治滅故欲取色等以爲境者卽得 永滅
이렇게 멸하기 때문에 번뇌[惑]가 있는 식들은 네 가지 주처[四住處]에서 다시는 머무르지 않게 되니, 모든 대치된 식들이 진실로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으면 머무는 처소[住處]가 고요함[寂靜]을 알 수 있다. 인연이 멸하기 때문에 미래세에 태어나 구족하며 마땅히 상속하는 일은 다시는 생기지 않으니, 이를 인연이 적정함에 머문다고 한다. 아마라식이 세간의 식을 대치하여 지극히 깊고 청정한 상태를 머무르지 않음[不住]이라 한다.
017_0343_c_19L以此滅故諸識有惑於四住處 則不復住諸對治識實淸淨故如是 得知住處寂靜以緣滅故於未來世 當生具足應得相續不復更生是名 有緣住靜阿摩羅識對治世識甚深 淸淨說名不住
017_0344_a_01L또한 이 식은 인연생이 아니고, 공해탈문(空解脫門)을 잘 닦아 익히기 때문에 업을 낳지 않으며,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을 잘 닦아 익히기 때문에 만족한 줄을 알며[知足],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을 잘 닦아 익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음[不動]에 머무를 수 있으니, 앞의 네 가지 뜻에서와 같이 바른 해탈[正解脫]을 얻을 수 있다.
또 진경계에 관행하여도 아(我)ㆍ아소(我所)에 대해 집작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색 등 모든 진경계가 파괴되어 없어지고 마음에는 갈애가 없으니, 이 모든 상(相)들에 대한 마음이 지극히 청정하다. 식이 청정하기 때문에 스스로 파괴되어 없어지지 않으며 또한 다른 인연으로 인해 없어지지도 않는다.
017_0344_a_01L復次此識不爲緣生 空解脫門善修習故不能生業無願 解脫門善修習故則能知足無相解 脫門善修習故住於不動如前四義得 正解脫觀行於塵於我我所無所取 是故色等諸塵滅壞心無渴愛此諸相心極淸淨識淸淨故不自滅 亦復不爲他緣所滅
또 상속함이 없기 때문에 시방의 처소에서 다시는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 목숨에 대해 죽음에 대해 탐욕이 없기 때문에 욕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음은 나무와 같고 수(受)는 그림자와 같다. 그 때에는 두 가지가 다 없기 때문에 나무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것이다.
세속의 마음이 멸하기 때문에 현재법이 모두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루심의 유학(有學)이 해탈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차제대로 적정(寂靜)을 얻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은 무학(無學)이 해탈하기 때문에 청정함을 얻는다. 네 가지 나머지가 멸하기 때문에 범자재(梵自在)를 얻는다.
017_0344_a_08L無相續故十方處不更入生於命於死無貪欲 故說無求欲心譬如樹受喩如影時二無是故無樹是故無影世心滅故 說現盡滅是無漏心學解脫故前次 第說得寂靜無學解脫故得淸淨餘滅故得梵自在
【문】무엇 때문에 식들의 머무는 처소를 말하지 않는가?
017_0344_a_14L何故不說識識 住處
【답】말은 자상(自相)이 아니기 때문에 식이 깨끗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마음의 자상은 깨끗하다[淸淨]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가지 처소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일체의 번뇌가 지극히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탐욕 등은 미세하여 알기가 어렵지만 색 등은 그렇지 않아서 번뇌인(煩惱因)이 아니다. 따라서 색 등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중생도 하나의 식처(識處)에서 애착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치 색 등에서와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식은 주처(住處)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를 식음주처분별(識陰住處分別)이라 한다.
017_0344_a_15L答曰言不自相故識得不淨何以 如來說心自相淸淨四處不爾切煩惱極不淨故知貪欲等微細難 色等不爾非煩惱因不如色等有衆生於一識處而起愛著如於色 是故佛說識非住處是名識陰住 處分別
017_0344_b_01L많은 종류의 분별[多種分別]이란 이를 말하면 세 가지가 있다.
먼저 탐욕 있는 마음, 탐욕 없는 마음, 성냄 있는 마음, 성냄 없는 마음 등은 경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으며, 나아가 아직 해탈하지 못한 마음과 바르게 해탈한 마음이 있으니, 여래께서는 이를 첫 번째라 하셨다. 이는 계(界)를 분별하는 것을 떠난 분별의 경우이다.
욕계 중에는 마음에 네 가지가 있다. 즉 착한 마음, 선량하지 못한 마음, 오염된 마음, 오염되지 않은 마음이다. 색계 중에는 마음에 세 가지가 있으니, 앞의 것 가운데 선량하지 못한 마음은 제외된다. 무색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무루(無漏)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학(學)과 무학(無學)이다.
017_0344_a_21L多種分別者此說有三一者 有欲心無欲心有瞋無瞋廣說如經 乃至未得解脫及正解脫此如來說 則名第一是離分別界分別故於欲 界中心有四種有善不善染污不染 於色界中心有三種除去不善色亦爾無漏有二謂學無學
욕계의 선심(善心)을 분별해 보면 두 가지가 있으니,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生得]과 배워 익혀 얻은 것[學得]이 있다. 오염되지 않은 마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과보(果報)ㆍ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변화(變化)이다. 욕계의 변화는 일종의 타고난 것인데 예컨대 천ㆍ용ㆍ귀(鬼) 등은 수혜(修慧)의 과(果)가 없다. 색계 중에서는 공교가 없으며, 무색계에서는 단지 과보만 있다. 선심(善心)은 아래에서부터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다 해당되니, 이것이 두 번째이다.
017_0344_b_04L欲界善 心分別有二生得學得不染污四威儀工巧變化欲界變化一種生 如天龍鬼無修慧果於色界中無 有工巧無色界中但有果報善心如 下登高是名第二
계(界)를 의지하여 분별해 보면 다양한 마음의 많은 종류로 분별할 수 있으니, 번뇌가 갖가지이기 때문이다. 욕계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및 수도(修道)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색계와 무색계에도 욕계의 경우에서처럼 각기 다섯 가지가 있으므로 합하면 총 열다섯 가지이다. 여기에 무루심을 합하면 다시 열여섯 가지가 된다. 이를 세 번째라고 한다. 멸하기 때문에 첫 번째를 분별한 것이며, 바로 떠남[離]인 것이다.
017_0344_b_09L依界分別又有異 多種分別煩惱種故欲界中五集滅道修道破故色無色界五種亦 則有十五及無漏心復有十六名第三滅故分別第一是離
다시 세 가지 품류의 조분(助分)을 분별하여 삼마제를 삼나니, 첫째는 사동(使動)이요, 둘째는 불사동(不使動)이며, 다시 첫째는 정(定)을 얻지 못함[不得定]이요, 둘째는 정(定)을 얻음이며, 다시 첫째는 바르고 청정하지 못함[不正淨]이요, 둘째는 바르고 청정함[正淨]이다.
017_0344_b_13L復更分 別三品助分爲三摩提一者使動不使動一不得定二者得定一不正淨 二者正淨
첫 번째 품류에서는 더럽게 물든 마음을 가진 사람이 탐욕 등 장애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선심(善心)이나 무기심(無記心)을 가진 사람이 탐욕 등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분별하면 탐욕 등의 마음이 있기도 하고 탐욕 등의 마음이 없기도 하다.
017_0344_b_16L於第一品有染心人欲等障 又於一時有善心人無記心人欲 等不起如是分別有欲等心無欲等
두 번째 품류에서는 어떤 때는 안[內]을 의지하여 마음을 한 곳에 정안(定安)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경계에 대한 생각[念]이 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섯 경계에 대해 마음이 산란하게 되면 지극히 퇴몰해지기 때문에 나태해지고 번뇌가 덮어 장애하게 된다. 나태해져 희락경계(喜樂境界)에 떨어지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일시적으로 마음이 들떠 동요한다. 바르게 경계를 취할 경우에는 마음이 들뜨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마음이 침몰하거나 들떠 요동하면 번뇌장(煩惱障)으로 인해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지만 마음이 침몰하지 않는 등의 경우를 없애면 마음이 고요하게 된다.
017_0344_b_19L於第二品或復有時依內於定安 心一處境念滅故而於五塵心生散 極令沒故懶墯覆障爲滅懶墯喜樂境不正安故一時浮動正取境 故心不浮動沈沒浮動爲煩惱障心 不寂靜沈等滅故卽得寂靜
017_0344_c_01L바르게 사유함으로써 근본적인 선정(禪定)을 얻는 경우를 심정(心定)이라고 하고, 앞의 이러한 선정의 모습을 떠난 경우를 부정심(不定心)이라고 한다. 궁극적인 도[究竟道]에 이르렀기 때문에 바르게 닦았다[正修]고 하고 궁극적인 경지마저도 멸하였기 때문에 바른 해탈[正解脫]이라 하며 앞의 두 가지 양상을 떠나면 바르게 닦아 익힐 수 없으므로 바르지 못한 해탈[不正解脫]이라 한다. 여러 정(定)의 모습을 취해 살펴보면 세 번째의 품류를 알 수 있다. 이 상을 식음분별이라 한다.
017_0344_c_01L正思惟 故得根本禪是名心定離前定相不定心至究竟道是故正修至滅究 竟故正解脫離前二相不正修習正解脫取諸定相知第三品是名識 陰分別
식음(識陰)의 차제는 어떠한가?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낳아 지음[生作]이요, 둘째는 대치의 도[治道]이며, 셋째는 잡염의 인(因)이 짓는 것[染因所作]이고, 넷째는 머물러 짓는 것[住作]이며, 다섯째는 분별로 짓는 것[分別作]이고, 여섯째는 처지에 따라 짓는 것[如處作]이며, 일곱째는 거친 것에 따라 짓는 것[如麤作]이고, 여덟째는 그릇 등과 같이하는 일[如器等作]이다.
017_0344_c_06L何者說陰次第有八種陰者生作二者治道三者染因所作者住作五者分別作六者如處作者如麤作八者如器等作
낳아 지음[生作]이란 무엇인가? 근(根)을 의지하고 색(色)을 의지하면 안식(眼識)을 낳는다. 의(意)를 의지하고 법(法)을 의지하는 것도 이와 같다. 『차제경(次第經)』에 따르면 앞에서 말한 색음(色陰)은 심수(心數)1)가 의지하는 것이고 뒤에서 말한 식음(識陰)은 수(受) 등의 심수가 그 안에 있으니, 이를 낳아 지음의 차제라 한다.
017_0344_c_09L何者生作 依根依色生於眼識依意依法亦皆 如是如次第經前說色陰心數所依 後說識陰受等心數在於中說是名 生作次第
대치의 도[治道]의 차제란 무엇인가? 네 가지 전도(顚倒)를 제거하기 위해 4념처(念處)를 말하는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색에 대하여 깨끗한 것이라고 헤아리는 이에게 신념처(身念處)를 설해 주고, 수(受)에 대해서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헤아리는 이에게 수념처(受念處)를 설해 주며, 상(想)과 행(行)에 의지하여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헤아리는 이에게 법념처(法念處)를 설해 주고, 마음에 의지하여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헤아리는 이에게 심념처(心念處)를 설해 준다.
017_0344_c_13L何者治道次第除四顚倒 說四念處於色不淨撗計爲淨說身 念處於受計樂說受念處依於想行 無我計我說法念處依心無常撗計 爲常說心念處
잡염의 인(因)이 짓는 것[染因所作]의 차제란 무엇인가? 남자가 여색을 보면 애욕의 잡염을 일으킨다. 무엇 때문인가? 애욕을 받아 맛보기 때문이다. 애욕을 받아 맛본다는 것은 상전도(想顚倒)에 의지한다. 상전도는 행(行)의 번뇌에 의지한다. 행번뇌는 식음(識陰)을 의지하고 근과 진경계를 의지한다. 진경계를 수용하여 수(受)를 낳고 많은 종류의 진경계를 취하는 것을 상(想)이라 한다. 현세의 진경계를 수용하여 온갖 번뇌를 낳는 것을 행(行)이라 한다. 온갖 번뇌에 의지하여 깨끗하지 못한 식과 선업이나 불선업을 낳아 미래에 그에 합당한 괴로움을 받기 때문에 다시 깨끗하지 못함[不淨]을 얻는다. 식(識)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것이다.
017_0344_c_17L何者染因所作次第 男見女色起於愛染何故受味愛故 受味愛者依想顚倒想顚倒者依行煩 行煩惱者依於識陰依於根塵塵用 生受取多種塵是名爲想現世塵用生 諸煩惱名之爲行依諸煩惱生不淨識 善不善業於未來處生等苦故更得不 說識在後
017_0345_a_01L머물러 짓는 것[住作]의 차제는 어떠한가? 식(識)이 네 가지 처소에 머무는 것이니, 첫째는 색이요, 둘째는 수이며, 셋째는 상이고, 넷째는 행이다. 왜냐하면 욕계 가운데 색은 색이 머무는 처소[色住處]라고 하는데, 욕계에서는 색을 원만하게 갖추기 때문이다. 색계 가운데서는 수가 머무르는 처소[受住]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수가 현현하기 때문이다. 세 무색계에서는 상이 머무는 처소[想住處]라 하는데 왜냐하면 상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제4공(第四空)에서는 행이 머무는 처소[行住處]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큰 사유[大思]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팔만대겁은 사유의 결과이기 때문에 네 곳[四處]에 머문다고 말한다. 이상을 머물러 짓는 것의 차제라 한다.
017_0345_a_01L何者住作次第識住四 一者色二者受三者想四者行以故欲界中色是色住處於欲界中 具足色故於色界中說爲受住何以 受顯現故於三無色說想住處以故想顯現故於第四空說行住處以故大思現故八萬大劫是思果故住四處是名住作次第
분별로 짓는 것의 차제[分別作次第]란 어떠한가? 색음(色陰)으로 말미암아 색을 보거나 소리를 들어 다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수음(受陰)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위와 아래가 있어 괴로움과 즐거움을 낳는다. 상음(想陰)으로 말미암아 이름과 종성(種姓)을 알 수 있다. 행음(行陰)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음과 지혜를 분별할 수 있다. 식음(識陰)으로 말미암아 음(陰) 가운데서 나[我]를 계착(計著)하게 된다. 이상을 분별로 짓는 것의 차제라 한다.
017_0345_a_08L分別作次第者 以色陰故見色聽聲則知他人以受陰 故心有高下生於苦樂以想陰故知名 生姓以行陰故分別愚智以識陰故 陰中計我是名分別作次第
처지에 따라 짓는 것의 차제란 예컨대 재가인이라면 색이나 수의 인연으로 투쟁을 일으키고 만약 출가인이라면 상이나 행의 인연으로 또한 투쟁을 낳는다. 식은 두 처지 모두에 인연이 된다.
거친 것에 따른 짓는 것의 차제란 색이 가장 거친 것인데 6식(識)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수음(受陰)을 드러내는 것은 세 가지 수(受)가 있기 때문이다. 남녀 등의 여러 가지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은 스스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수ㆍ상ㆍ행ㆍ식을 떠나서는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017_0345_a_12L如處作 次第者如在家人色受因緣起於鬪 若出家人想行因緣亦生鬪諍於二處竝爲因緣如麤作次第者最爲麤六識境故次明受陰有三受 男女等相相可知故貪瞋癡等自 可知故離受想行識難知故
그릇 등과 같이하는 일의 차제란, 색은 비유하자면 그릇과 같은데 세 가지 감수[三受]를 담기 때문이다. 수는 비유하자면 음식과 같은데 몸을 훼손하거나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상은 비유하자면 복어나 넙치와 같은데 다양한 수를 취하기 때문이다. 행은 비유하자면 음식이 이르는 것[食至]과 같은데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식은 비유하자면 음식을 먹는 사람과 같은데 수 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017_0345_a_18L如器等 作次第者色譬如器盛三受故受譬 飮食損益身故想譬鮭鰠取異受故 行喩食至與苦樂故識譬食者用受 等故
017_0345_b_01L섭수(攝受)란 무엇인가? 몇 가지 음(陰), 몇 가지 입(入), 몇 가지 계(界), 몇 가지 인연분(因緣分), 몇 가지 처와 비처[處非處], 몇 가지 근(根)을 섭수하는가? 예컨대 색음에서부터 식음에 이르기까지의 음을 섭수하는 것이다.
색음은 하나의 음(陰)과 열 가지 입(入)과 열 가지 계(界)와 법입(法入)과 법계(法界) 가운데 일부분을 말하며 여섯 인연[緣] 가운데 일부와 처와 비처 가운데 일부와 일곱 가지의 근을 포함한다.
017_0345_a_22L何者攝受幾陰幾入幾界幾因 緣分幾處非處幾根攝受如色陰等 乃至識陰色陰一陰十入十界法入 法界說於少分六緣少分於處非處 亦說少分根則有七
수음이 섭수하는 것은 하나의 음과 법입과 법계의 각각의 일부분을 말하며 하나의 인연분과 세 가지 연의 일부분과 처와 비처의 일부와 근 가운데 다섯 가지이다.
상음이 섭수하는 것은 하나의 음과 법입과 법계의 각각의 일부분을 말하며 세 가지 연의 일부분과 처와 비처의 일부를 포함하며 근은 섭수하지 않는다.
017_0345_b_03L受陰攝受者陰法入法界各說少分一因緣分三緣 少分處非處分根中有五想陰攝受者 一陰法入法界各說少分三緣少分非處分根則不攝
행음이 섭수하는 것은 하나의 음과 법입과 법계에 또한 일부분을 말하며 네 가지 인연분 및 다섯 가지 연(緣)의 일부분과 처와 비처의 일부와 근(根) 가운데는 63근 가운데 일부이다.
식음이 섭수하는 것은 하나의 음과 하나의 입(入)과 일곱 가지 계(界)와 두 가지 인연분과 세 가지 연의 일부분과 처와 비처와 근 가운데는 열세 가지 근 가운데 일부를 말한다.
이와 같이 음과 입에서부터 나아가 근에 이르기까지 서로 상호 섭수한다.
017_0345_b_07L行陰攝受者一陰 法入法界亦說少分四因緣分五緣 少分處非處分根中具六三根少分 識陰攝受者一陰一入七界二因緣分 三緣少分處非處分根中說一三根 少分如是陰入乃至於根交互相攝
또 다른 섭수가 있으니, 열 가지 음 등 모든 법이 자신의 종자를 섭수하는데 이를 이섭(異攝)이라 한다. 음(陰) 등 모든 법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섭수하면 이를 상섭(相攝)이라 한다. 음 등 모든 법이 일체의 처소에 두루하면 이를 생섭(生攝)이라 한다. 음 등 모든 법이 낙수(樂受) 등에 머무르면 이를 별주섭(別住攝)이라 안다. 예컨대 음 등이 일시에 함께 일어나면 이를 불리섭(不離攝)이라 한다.
017_0345_b_12L又異攝有十陰等諸法攝自種子名異攝陰等諸法自共相攝是名相 陰等諸法遍一切處是名生攝等諸法樂受等住名別住攝如陰等 一時俱起名不離攝
모든 음법들이 삼세에 주재하면 이를 시섭(時攝)이라 한다. 모든 음법들이 처소에 의거하여 생기면 이를 처섭(處攝)이라 한다. 모든 음법들의 다섯 가지가 원만 평등할 경우에는 이를 구족섭(具足攝)이라 한다. 모든 음법들이 분분(分分)하여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이를 소분섭(少分攝)이라 한다. 모든 음들이 여여한 모습[如如相]인 경우에는 이를 진섭(眞攝)이라 한다. 이와 같이 음으로부터 근에 이르기까지 합하면 열여섯 가지 섭(攝)이 있다. 또 세 가지가 일체의 법을 섭수하는 경우가 있으니, 예컨대 색음(色陰)ㆍ법계(法界)ㆍ의입(意入)이다.
017_0345_b_17L諸陰等法在於 三世名爲時攝諸陰等法依處得生 名爲處攝諸陰等法五種等故名具 足攝諸陰等法分分不具名少分攝 陰等諸法如如相故是名眞攝如陰 至根合十六攝又有三種攝一切法 色陰法界意入
017_0345_c_01L음(陰)이란 무엇인가? 몇 가지 색을 의지하면 색음이 생기며, 몇 가지 처소를 의지하면 명칭[名]에 포함되는 음이 생기는가? 6처(處)를 의지하면 색음이 생기나니, 첫째는 의처(依處)이며, 둘째는 주처(住處)이며, 셋째는 와구처(臥具處)이며, 넷째는 근처(根處)이며, 다섯째는 근의처(根依處)이며, 여섯째는 행(行)이 능(能)한 경우의 모든 정지처(定地處)이다.
017_0345_b_23L 何者陰依幾種色色陰得生依幾種 處名攝陰生依於六處色陰得生者依處二者住處三者臥具處四者根 五者根依處六者如行能故諸定地
식은 일곱 처를 의지하면 명칭에 포함된 음이 생긴다. 첫째는 욕(欲)이요, 둘째는 색이고, 셋째는 진경계이며, 넷째는 각(覺)이며, 다섯째는 관찰이며, 여섯째는 정행방편(淨行方便)이며, 일곱째는 청정(淸淨)이다.
욕(欲) 등 네 가지 처는 재가인을 위해 설한 것이고, 관찰의 처는 바로 출가인이 정근(精勤)하여 계를 지키는 것이다. 정행방편이란 미래선을 얻음이고 일곱번째 청정이란 근본선을 얻음이다. 이렇듯 네 종류의 사람을 위하여 일곱 가지에 다시 네 가지로 재분류하여 설하였다.
색음을 분별함에 대해서는 바로 뒤에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색을 의거해 분별하여 울다남으로 말한다.
017_0345_c_05L識依七處名攝陰生一者欲二者 三者塵四者覺五者觀察六者淨 行方便七者淸淨欲等四處說在家 觀察之處則是出家精勤持戒行方便者得未來禪七者淸淨得根 本禪爲四種人說七爲四色陰分別 後當廣說依色分別 鬱陁南
물질과 종류와 인허(隣虛)
생겨남과 형상과 상속(相續)
업(業) 등과 찰나와 단독[獨]
경계의 뒤섞임을 말하니 열 가지라.
017_0345_c_12L物種及鄰虛
生形與相續
業等剎那獨
境雜說有十
다시 몇 가지의 물질이 색음에 포함되는가? 눈은 모습[相] 하나의 물질을 섭수하는데 이는 안식이 의지하는 바이다. 이 색은 청정하다. 떠나지 않고 포섭하는[不離攝] 경우에는 일곱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말하자면 눈[眼]ㆍ몸[身]ㆍ땅[地]ㆍ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촉감[觸]이다. 여기에다 세 가지 계가 포함되면 열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잇는데, 일곱 가지는 앞의 것과 같고 여기에 물ㆍ불ㆍ바람의 계(界)가 부가된 것이다. 눈이 물질을 대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귀나 코 그리고 혀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017_0345_c_14L 復有幾物色陰攝眼攝根一物眼識 所依是色淸淨不離攝故則有七物 謂眼三界攝故說有 十物七種如前及水如眼物等 耳鼻及舌亦復如是
네 가지의 근(根)2)을 떠나기 때문에 신근(身根)에는 아홉 가지 물질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네 가지 근을 떠나는 경우에도 몸은 홀로 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리의 계[聲界]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곳에서는 소리가 있다고 별도로 설한다.
017_0345_c_19L離四種根身根 九物何以故離四根故身得獨生有聲界不久住故是故別說有處有
017_0346_a_01L열한 가지 진물(塵物)을 분별해 보면 예컨대 세(細)ㆍ활(滑)부터 건(健)에 이르기 깨끗하지 못하고 견고하지 못한 것을 의지하여 거칠거나 가벼운 것을 생하며, 깨끗함이 잘 합해지지 않으면 연촉(軟觸)을 생한다. 바람과 물이 서로 섞이는 것을 의지하면 냉촉(冷觸)을 생한다. 지탱할 인[持因]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기갈을 낳고 또한 파리하고 약하게 된다. 지탱할 인이 잘 갖추어지면 요소[大]에 의지하여 원만 평등한 힘과 포만한 촉(觸)이 생기고, 요소가 적절하지 못하면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않고 온갖 병촉(病觸)이 생긴다.
017_0345_c_22L則有十一色等塵物分別如細滑 等至健皆是觸入依四大地制於別 依四大淨說於滑觸依堅生重淨不堅生於麤輕爲淨不合生於軟 依風水雜則生冷觸持因不具生 於飢渴亦生羸劣持因具足依大平 等力飽觸生依大不適飮食難消生 諸病觸
몸이 전변하여 4대가 조화되지 않으면 노촉(老觸)을 생한다. 명근(命根)이 전변하면 4대가 조화되지 못하고 사촉(死觸)을 생한다. 피가 원만하게 갖추어지지 못하면 병환을 낳는 경우가 있고, 음식에 독한 성분이 있으면 잠시 기절하는 촉이 있게 된다. 땅과 물이 서로 섞이면 탁촉(濁觸)이 생긴다. 가고 오고 움직이고 굴러 마음이 번뇌를 일으키면 피로와 권태의 촉이 생긴다. 이상의 인연을 떠나면 모든 것이 꺼지고 쉬는 촉[消息觸]이 생긴다. 4대가 조화되면 신색(身色)이 감소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고 강건한 촉[休健]을 생하며 모든 촉을 잘 화합한다.
017_0346_a_06L依身轉變四大不調生於老 命根轉變四大不調生於死觸血不等生過患故食飮毒惡有暫死 地水相雜則生濁觸去來動轉心 起煩惱生疲惓觸離上因緣生消息 四大調和身色不減生休健觸和 合諸觸
4대가 별도로 머묾[別住]에 관해 설하자면 여섯 가지가 있으니, 깨끗한 대와 모두 깨끗하지는 않은 대, 견고한 대와 모두 견고하지는 않은 대, 섭수하지 못하는 대, 그리고 섞이지 못하는 대, 원만 평등한 대, 원만하고 평등하지 못한 대이다.
017_0346_a_12L四大別住說有六種謂淨四大 共不淨大堅共不堅不攝及雜不等 平等
일체의 진색(塵色) 등은 촉(觸)에 이른다. 두 가지 식으로 자식(自識)과 심식(心識)을 아는데, 동시에 아는 경우도 있고 동시가 아닌 경우도 있다. 색계 중에는 향(香)과 미(味)가 나타나지 않으며 종자의 근본[種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식(摶食)이라는 것도 없다. 식욕을 떠났기 때문이며, 향과 미 두 가지 진(塵)은 단식을 거두기 때문에 코와 혀 두 가지 식은 작용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종자의 근본은 존재한다.
017_0346_a_14L一切諸塵色等至觸以二識知 自識心識或同時知或不同時於色 界中現無香味非無種本無有摶食 離食欲故香味二塵摶食攝故鼻舌 二識無現用故亦有種本
색음에 포함되는 색에는 아홉 가지 물질이 있으니, 4대와 대(大)를 의지하는 5진(塵)이다. 일체 다른 색들은 가명으로 음(陰)이라 한다.
법입 가운데 색은 두 가지를 얻으니, 물유(物有)와 가유(假有)이다. 정자재(定自在)를 의지하여 정 가운데서 색을 관찰하는 것을 물유라 한다. 바로 정(定)의 과(果)인 것이다. 정을 변화시켜 식진(識塵)과 함께하면 계색(戒色)이든 계색이 아니든 모두 가명(假名)이다.
017_0346_a_18L色陰攝色 則有九物四大依大五塵一切他色假 名說陰法入中色得有二種物有假有 依定自在定中觀色名爲物有是定果 定共識塵戒非戒色皆是假名
017_0346_b_01L또 정진(定塵)은 색처(色處)의 과(果)인데 정처(定處)의 색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정대(定大)를 의지하면 세간법을 생할 수 있다. 유루정이나 무루정의 색을 의지하면 이는 세간법이며 출세간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相)이 있으면 사유하는 정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017_0346_a_22L又定 塵色處果定處色相應故依於定大得 生世法依有漏定及無漏定色是世 法非出世法何以故有相思惟定因 緣故
일체의 정인(定人)은 색을 생할 수도 있고 색을 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유하자면 화생(化生)과 같다. 만일 사유하지 않고 앞의 자재함을 의지하면 어둠과 장애가 없어 깨끗한 광명이 자연함을 얻어 현재세에 이른다. 이를 물유사유(物有思惟)라 한다. 해탈을 사유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색을 볼 수 있으나 색이 아직 현전하지 않는 것은 가명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출세간의 정, 경계의 진은 아니다. 출세간의 정색(定色)은 사유할 수가 없다.
017_0346_b_03L一切定人有能生色不能生色 猶如化生若不思惟依前自在無有 闇障得淨光明自然而至現在世生 是名物有思惟思惟解脫力故得見 諸色色未現前是假名有非出世定 境界之塵出世定色不可思惟
욕계의 색은 색계의 색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색계의 색은 청정하여 광명이 출현하며, 극히 오묘하고 미세하여 하근(下根)의 진(塵)이 아니며, 고수(苦受)가 없거나 고수를 넘어서며, 사유할 수 없어 인허진(隣虛塵)3)에 머물러 방해됨이 없으며, 심상(心想)을 따라 거칠거나 미세함[麤細]을 얻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가 욕계의 색과 다르다.
간략히 말하자면 색음에는 여섯 가지 모습이 있으니, 자상ㆍ공상ㆍ능의와 소의상[依依者相]ㆍ수용상[用相]ㆍ업상(業相)ㆍ미묘상[妙相]이다.
017_0346_b_08L欲色 界色云何爲異色界中色極大淸淨 出光明故極妙微細非下根塵無有 苦受過苦受故不可思惟住鄰虛塵 無妨㝵故隨於心想得有麤細是五 種異略說色陰有六種相自相共相 依依者相關相用相業相妙相
땅, 물 등의 요소[大]가 견고하거나 윤택하게 적시거나 움직이거나 하는 것이 사대의 자상이다. 안(眼) 등 모든 근은 깨끗함이 그 자상이다. 이를 일컬어 자상이라 한다. 모든 것에 막아 장애함이 있으면 이는 색의 공상(共相)이다. 사대가 서로 의지하여 5진(塵)이 되면 이는 상관상(相關相)이다. 내입(內入)은 색이 있으면 이를 수용하여 증상하기 때문에 외진(外塵)이 다양한 종류를 낳게 된다.
017_0346_b_14L地水 等大堅潤熱動四大自相眼等諸根 淨是自相是名自相皆有障㝵是色 共相四大是依依者五塵是相關相 內入有色用增上故外塵得生多種
어떤 한 색이 쌓이면 견촉(堅觸)이라 하고, 축축하게 적시거나 열기가 있거나 움직임이 있거나 하는 요소가 서로 섞이어 내입(內入)에 수용하면 이를 용상(用相)이라 한다. 땅 등 사대는 섭수하고 성숙시키고 이고는 것에 의존하니, 이 일이 업상(業相)이다. 또한 별도의 업이 있으니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017_0346_b_18L有一色聚得名堅觸有潤有熱有動 有雜爲內入用是名用相地等四大 依攝熟牽是事業相復有別業後當 廣說
017_0346_c_01L인허세색(隣虛細色)을 묘상(妙相)이라 한다. 이 미묘한 상에는 세 가지가 있다. 나누어 부서짐이 극히 미세하여 극히 세밀함을 낳으니 자재하게 극히 세밀히 나누어 부서지는 경우와, 인허극미가 극히 세밀함을 낳는 경우와, 바람 등 온갖 미세한 것과 중음(中陰)의 색과 색계 중의 색과 무색계의 색이 자재하게 세밀한 경우이기 때문에 극미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시길 “인간의 삶에 머물면서 평등심을 얻고 자신의 마음을 닦고 자신의 마음을 장엄하고 자재심을 지어 함께 딴 곳에서 머물되, 서로 장애하지 않으니 또한 번뇌의 해악이 없다”고 하신 바와 같다.
017_0346_b_22L鄰虛細色是名妙相妙相三種 分破極細有生極細自在極細分破 故鄰虛極微生極細故風等諸微至 中陰色色界中色無色界色自在細 得名極微如佛經說人生中住得 平等心修學自心莊嚴自心作自在 共一處住不相妨㝵亦無惱害
만약에 이 이후에 색구경천(色究竟天)의 대범자재(大梵自在)로 태어난다면 이는 그 생처(生處)가 하열한 염부제인데 법을 듣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털끝을 열여섯 부분으로 나눈다. 땅은 하나의 전체로 된 부분이다. 중천(衆天)이 함께 머물러도 서로 장애되지 않으면 이를 자재극미라 한다.
017_0346_c_05L於此後生色究竟大梵自在是其生 處下閻浮提爲聽法故破一毛頭作 十六分地如一分衆天共住無相妨 名自在極微
이와 같이 색음(色陰), 물질의 종류[物種], 사유, 인허, 색상이 몇 종인가를 분별하여 간략히 다섯 가지로 말했나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경에서 본지(本地)의 지혜에 대해서 말한 바와 같다. 즉 나누어 쪼개지기 때문에, 종류가 분별되기 때문에, 단독의 자분(自分)이기 때문에, 공동으로 동반하는 부분[共伴分]이기 때문에, 방분(方分)4)이 없기 때문이다.
색(色)의 궁극[究竟]을 분석하는 지혜가 결정적이고 이 인허분(隣虛分)은 몸[身]이 있는 것이라고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인허라는 것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여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색이 모인다고 해서 인허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인허를 분별해 보면 열다섯 가지가 있으니, 안(眼) 등 5근과 색(色) 등 5진(塵)과 4대(大)와 법색(法色)이다.
017_0346_c_09L如是色陰物種思惟 鄰虛色相幾種分別略說有五後當 廣說如經本地智分破故種分別故 獨自分故共伴分故無方分故扸色 究竟智決定故是鄰虛分非身量故 是故鄰虛不生不滅是故色聚非鄰 虛生分別鄰虛有十五種眼等五根 色等五塵四大法色
자상을 분별하여 이를 독분(獨分)이라 하고, 인허를 화합한 것을 공동으로 동반하는 부분[共伴分]이라 하는데, 왜냐하면 땅 등 인허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장애하는 법이 있는데 하나의 처소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공동으로 동반하여 머물기 때문이니, 장애함이 없지는 않으나 예컨대 마음[心]과 대지(大地)가 근(根)에 합해짐이 유사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수용하여 유사한 업을 낳는 것과 같다.
017_0346_c_16L自相分別是名 獨分和合鄰虛是共伴分何以故等鄰虛不相離故何故有障㝵法離一處共伴住故不無障㝵如心大 地合根相似故諸事用生爲相似業
017_0347_a_01L증상연이 있기 때문에 모든 색이 화합되며 공동으로 근을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게 된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모든 것이 화합된 것이라 할 수 없으니 안식(眼識) 등의 진(塵)과 근의 진[根塵]을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동으로 동반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 어떤 일종의 색이 장애를 하던 장애를 하지 않던 예컨대 중음에서부터 범색에 이르기까지를 공동으로 동반하는 부분이라고 하는데 색이 구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017_0346_c_20L增上緣故諸色和合共爲根用故得 生起若不如是非諸和合眼識等塵 根塵無用是故共伴不得相離有一 種色或㝵不㝵如中陰等乃至梵色共伴分色究竟故
모든 인허(隣虛)의 색에는 방분(方分)이 없는데 화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색을 화합하여도 인허의 방분이 한 방향의 처소를 떠난다면 인허색이 없는 것이니, 앞에서 말한 대로 다섯 가지 인허가 있는 것이다.
017_0347_a_02L諸鄰虛色無有方分 不和合故和合諸色鄰虛方分離一方 處無鄰虛色如前所說五種鄰虛
다섯 종류의 눈이 있으니 육안(肉眼)ㆍ천안(天眼)ㆍ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이다. 다섯 가지 인허는 몇 종류 눈의 경계일까? 인허는 육안이나 천안으로는 볼 수가 없고 나머지 세 종류의 눈으로는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색이 화합했을 경우에는 전안으로 안과 밖, 위와 아래, 앞과 뒤의 밝고 어두움을 볼 수 있으나 인허는 볼 수가 없다. 인허는 지혜로써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허의 색상(色相)은 체(體)로써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17_0347_a_04L有五 種眼聖慧法眼似佛眼五種鄰 幾眼境界肉天二眼所不能見三眼見何以故唯色和合天眼得見 內外上下前後明闇不見鄰虛智分 別故鄰虛色相非體別故
【문】무엇 때문에 인허가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다고 하는가?
017_0347_a_09L何故鄰虛 不生不滅可知可說
【답】온전히 갖추어져 화합하면 앞의 것이 생기기 때문이며, 아직 이르지 않았거나 나중인 때에는 별도의 체(體)를 얻을 수 없고 중간에 멸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물방울과 같다.
017_0347_a_10L具足和合前 得生故未至後時未得別體於中滅 譬如水渧
다섯 가지 양상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인허에 대한 사유가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색을 화합하면 자체(自體)가 있기 때문에 인허가 머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첫 번째 바르지 못한 사유이다. 바르게 사유하지 못하여 인허가 생멸한다고 여기는 것이 그 두 번째이다. 인허의 색이 공동으로 동반한다거나 동반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 세 번째이다. 오직 인허 중에서만 색이 화합하여 머문다고 여기는 것이 그 네 번째이다. 인허는 화합하여 다른 색을 화합할 수 있고 다른 색은 인허와는 다르게 생길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그 다섯 번째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인허에 대한 바르지 못한 사유이다.
017_0347_a_12L五種相故鄰虛思惟得 知不正於色和合以自體故鄰虛得 是爲第一不正思惟鄰虛生滅爲第二鄰虛色住共伴離伴是名第 唯鄰虛中色和合住是名第四虛和合能生他色他色得生異於鄰 如是鄰虛不正思惟
017_0347_b_01L예컨대 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상(相)을 취하더라도 앞의 다섯 가지 바르지 못한 사유를 떠나 인허에 대해 바르게 사유하므로 다섯 가지 공덕을 일으킨다. 색처(色處)를 화합하는 인허를 분석하는 까닭에 이를 잘 적용하여 수도(修道)를 행하고 모든 경계에 대해 의혹이 없어 이를 바탕으로 자재하게 되니, 이것이 첫 번째 공덕이다. 신견(身見)이 멸하고 도가 점점 늘어나 훌륭하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공덕이다. 아만(我慢)이 멸하고 도(道)의 방편이 생기니, 이것이 세 번째 공덕이다. 온갖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일어났다가 잠깐 사이에 그쳐 마음이 청정하게 되니, 이것이 네 번째 공덕이다. 공(空), 무상(無相) 두 가지 해탈문으로 수혜(修慧)를 얻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공덕이다.
017_0347_a_18L如正心人又 取諸相離前五種不正思惟鄰虛 思惟正故得起五種功德和合色處 鄰虛分故用行修道於諸境界無疑 惑因所作自在是一功德身見滅道 漸漸增勝是二功德我慢滅道方便 得生是三功德諸煩惱起起而暫止 心得淸淨是四功德爲空無相二解 脫門便得修慧是五功德
생겨나는 것에 관해서 간략히 말해 보면 색이라는 물질에는 다섯 가지의 생(生)이 있다. 말하자면 의지하여 생겨남[依生], 종자에 의해 생겨남[種生], 이끄는 세력에 의해 생겨남[牽生], 증장하여 생겨남[長生], 무너지며 생겨남[壞生]이다.
017_0347_b_03L 生者略說色物有五種生依生種生長生壞生
의지하여 생겨남이란 무엇인가? 사대(四大)가 조색(造色)에 의지하여 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대는 조색이라 이름하지 않으며 이 사대가 빌 경우에 색이 생기는 것이다. 이 색의 화합이 사대가 의지하는 것이니, 색의 자상(自相)을 알 수 있으며 화합하는 가운데 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시 인허가 있는 경우라면 그 자상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개별적인 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간략히 말해 상이 있음과 상이 없음의 경우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다.
017_0347_b_05L何者依生於四大依造 色得生是故四大不名造色是四大 造色得生此色和合是四大依色自相於和合中得知有色復更有 不見自相知無別色略說得知有 相非有相
만약에 인허가 볼 수는 없어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다. 만약에 공상(共相)에 의지하면 똑같은 물질이 되는가, 아니면 똑같지 않은 물질이 되는가? 그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분량이 있기 때문이고,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똑같은 분량이 아니라면 마땅히 조금밖에 알 수 없을 것이고 조금 아는 것조차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약에 세력이 있기 때문에 물질에 의지함이 똑같지 않다고 한다면 자상을 떠나기 때문에 별도의 세력이 없으니 세력이 똑같지 않다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를 의지하여 생겨남[依生]이라 한다.
017_0347_b_10L若虛不見而言有者譬喩 得知若有共依爲得同物爲不同物 義有二種量故力故若不同量應得 小知小知不得則無是義若有力故依 物不同離自相故則無別力此力不同 亦無是義是名依生
종자에 의해 생겨남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종자로부터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곡물의 낱알은 많은 인연이 이르면 싹이 계지(界地)나 재[灰] 등에서 생기는 것과 같다.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면 딱딱한 사물이 부드럽게 되고 부드러운 사물이 딱딱하게 된다. 열이 없던 것이 열을 내고 열이 있던 것이 열이 없어지며, 움직이지 않던 것이 움직이고 움직이던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색(色)을 좋아하거나 색을 좋아하지 않거나 자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종자가 되어 많은 종류를 낳게 된다. 이를 종자에 의해 생겨남[種生]이라 한다.
017_0347_b_15L何者種生從自種 譬如穀子至多因緣芽肉等界地灰 等生遇諸因緣堅物得軟軟物得堅熱得熱熱得不熱不動得動動得不動 如是好色及不好色有自相故爲自種 子多種得生是名種生
017_0347_c_01L이끄는 세력에 의해 생겨남이란 무엇인가? 내입(內入)의 업이 증가하면 움직이지 않는 외부의 사물이 생겨나니, 비유하자면 기세간(器世間)과 같다. 숙업이 이끌기 때문에 내입이 생겨나니, 비유하자면 업에 따라 5도(五道)에 들어가 바깥 세계의 모든 색물(色物)을 생한다. 또 세 가지 업이 이끈다. 첫째, 울단월(鬱單越)은 과보를 의지하여 스스로 생하니 사천왕천(四天王天)은 제4천에 이른다. 둘째, 업이 드러나 나타나 스스로 외색(外色)을 이끌어 생하게 되니 마치 제5천에서와 같다. 셋째, 다른 사람의 생각의 업[他念業]을 의지하면 외색이 생겨나니, 예컨대 46천에서와 같다. 이상을 이끄는 세력에 의해 생겨남이라 한다.
017_0347_b_20L何者牽生入業增不動外物而能得生譬如世 宿業牽故內入得生譬如爲業道入生外諸色物三種業牽一者如 鬱單越依報自生四天王天至第四 二者現業自牽外色得生如第五 三者依他念業外色得生如第六 是名牽生
증장하여 생겨남이란 무엇인가? 인연을 잘 갖추면 많은 종류를 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색이 증장하는 것을 말하니, 물이나 비가 잘 갖추어지고 물을 잘 대주면 싹 등이 증장하는 것과 같다. 이를 증장하여 생겨남이라 한다.
017_0347_c_04L何者增長生具足因緣 多種得生謂色增長漸漸具足水雨 漑灌芽等增長是名長生
증장하여 생겨남의 양상을 떠나면 이를 무너짐의 생겨남[壞生]이라 한다. 조색의 생함[造色生]이란 예컨대 많은 사물이 있어도 돌로 갈아 화합시키면 분별할 수가 없어서 개별적인 모습을 알 수가 없는 것과 같으니, 참깨, 콩, 보리 등의 사물이 한 곳에 쌓여 있을 때 그 종류를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경우와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생겨나는 양상[生相]이 능히 그 일의 쓰임[事用]을 낳으니, 그 생하는 인(因)이 증상의 조색으로 인해서 생하기 때문이다.
017_0347_c_06L離增長 是名壞生造色生者如多種物石 磨和合不可分別知別相故不如麻 豆麥等諸物一處積聚種別可知以故猶如生相能生事用爲因增上 造色得生
만약에 일체의 행이 자신의 종자의 근본으로부터 후에 곧 생기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사대색(四大色)을 의지하여 조색이 생한다고 말하는가?
017_0347_c_11L若一切行從自種本後便 得生何故依四大色說造色生
【답】4대가 증가하거나 감함이 있고 색을 지음도 대(大)를 따라 또한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안식(眼識)은 사대를 떠나면 별도로 생기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대지(大地)와 같다. 사대가 간직되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연지의(綖持衣)와 같다. 세 가지 인연 때문에 대지는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있으며 방편은 능히 조색을 증가하게 하거나 감소하게 할 수 있다. 공용(功用)이 있기 때문에, 엄의 인연이기 때문에, 정자재(定自在)이기 때문이다.
대지(大地)는 능히 조색을 증가하게 하거나 감소하게 할 수 있으니, 세 가지 힘 때문이다.
017_0347_c_12L大增減造色隨大亦有損益猶如眼識 離於四大不別生故譬如大地四大 持故如綖持衣三因緣故大地增減便能令造色增減工用因故業因緣 定自在故地大能造色增減三種 力故
세 가지란 무엇인가? 파괴하거나 증장시킬 수 있는 힘, 기계(器界)를 수응할 수 있는 힘, 생인(生因)이 될 수 있는 힘이다. 수대(水大)는 축축하게 적시는 힘이 있기 때문에, 불은 익히기 때문에, 바람은 건조시키기 때문이니, 이러한 공용이 있기 때문에 사대의 증감(增減)은 조색을 증감시킨다.
017_0347_c_18L何者三種能破增力能受器力 能生因力水大者能潤力故火能熟故 風能燥故是功用故四大增減能令 造色增減
017_0348_a_01L전업(前業)이 유사한 여러 사대를 생하면 유사함을 얻게 되나니, 따라서 조색은 사대와 유사하다. 이를 업인연이라고 한다. 정자재(定自在)란 앞의 것이 대지(大地)에 이르면 나중에 조색을 증감시킬 수 있으니, 예컨대 사대를 전변하여 조색하는 경우이다. 땅이 물로, 물이 땅으로 변하여 달라지게 하는 것이 정자재이다.
또한 간략히 말해서 다섯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습의 사대가 다른 결과를 낳게 하니, 사대의 힘과 공용력(功用力)ㆍ주술력ㆍ신통력ㆍ업행력 때문이다.
017_0347_c_21L前業相似諸四大生而得 相似是故造色似於四大是名業因 緣故定自在者前至大地後時能令造 色增減如能轉變四大造色以地爲 以水爲地是定自在又復略說五 種因緣異相四大使生異果四大力 功用力故呪術力故神通力故行力故
이 이후로부터 아직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은 상태의 중음(中陰)에서는 모든 색이 화합하는데 어떤 인연 때문인가?
자신의 종자를 바탕으로 생겨나는 업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는 증상연인데, 무슨 뜻이 있기에 중음 가운데서 생한다는 것이며,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017_0348_a_05L從於此後未至生處於中陰 中諸色和合何因何緣自種子因能 牽生業是增上緣以何義故有中陰 云何可信
이후로부터는 심법(心法) 및 심수법(心數法)에 의지하지 않으면 다시는 다른 처소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메아리와 같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근(根)에 어지러움이 있으면 마치 달이 두 개로 보이는 것과 같다. 만일 중음이 없다고 생각하여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고 비유한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거울의 면(面)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자의 비유는 옳지 않다.
017_0348_a_08L於後無依心心數法更 生他處不可至故若如思惟喩於聲 是義不然根亂故有如見二月如思惟無中陰者譬鏡中影是亦不 面不減故影譬不然
만일 다시 마음이 경계를 취함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중간식(中間識)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대의 비유는 옳지 않다. 마음은 나아감[去]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비유들이라면 파괴되나니 중음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믿을 만하며 이를 색음(色陰)이라 한다.
017_0348_a_12L若復思惟如 心取境無中閒識汝喩不然心不去 若是等譬破無中陰是義不然故中陰實有可信是名色陰
생분(生分)의 사유는 이미 색음을 생하였다. 그런데 무엇이 먼저 나아가 생처(生處)를 취하여 다른 색의 처소가 생기는 것인가?
017_0348_a_15L生分思 惟已生色陰何者前去取於生處他 色處生
【답】사대가 먼저 존재하여 생처(生處)를 향수(向受)하니, 사대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처소[處]에서 조색과 대가 함께 생하며 사대의 처소가 생하는 처소를 장애하기 때문에 생한다. 또한 조색(造色)의 자상(自相)이 두루하기 때문에, 그리고 대(大)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생처를 장애할 수 있다.
땅[地] 등 사대(四大)는 그것의 거칠거나 세밀함을 알 수 있으니 차례대로 말하자면 먼저 지계(地界)는 간직하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사업(事業)을 지을 수 있으니, 그 결과가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물, 불, 바람의 계(界)는 흐르고, 태우고 부는 것이 이 세 가지 대(大)의 업(業)이다.
017_0348_a_17L四大在前向受生處四大 依故於處造色與大共生四大處生 處障故生又復造色自相遍故不離 大故能障生處地等四大麤細可知 如次第說地界持故能作事業得說 有果水火風界流燒吹等是三大業
017_0348_b_01L모든 소리는 생멸(生滅)함이 있으니, 색이 화합한 상태에서 오래 이어지지[相續] 않는다. 이 소리는 내외(內外) 두 곳을 의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시에 생처에서 들을 수 있으며 모두 가득 차게 되니, 다치 불꽃의 광명이 이름[至]에는 전후(前後)가 따로 없고 느리거나 빠름이 없기 때문이다.
017_0348_a_22L 一切諸聲唯生滅於色和合不久相 於內外二處得知依一時生處處 得聞悉皆遍滿如焰光至無前後無 遲疾故
다음으로 바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움직임[動]과 움직이지 않음[不動]이다. 바퀴는 움직이지 않음이고 공중에서 나아가는 것은 움직임이다. 물건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항상 수순하거나 허깨비[幻化]를 간직하는 것인데 허깨비를 간직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음이다. 이와 다른 것은 다 움직임이다.
017_0348_b_03L此風二種謂動不動輪者不 空行則動行於物者恒爲隨順持於 幻化持幻化者則是不動異此皆動
허공계란 명암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모두 조색이니, 이를 공계(空界)라 한다. 명암 등을 떠나면 공계의 별도의 양상[別相]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움직임이 없다. 중생의 처소에는 항상 광명이 있기도 하고 항상 어둠이 있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는 움직임이 없다. 만약에 이러한 처소와 다르다면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색이 화합함에 의지하여 청정하고 허랑(虛朗)하면 광명에 소속되고 청정하거나 허랑하지 않은 것 역시 색에 포함된다.
017_0348_b_05L虛空界者明闇所攝皆是造色是名 空界離明闇等空界別相不可知故 亦是不動於衆生處有恒光明有恒 闇冥此中不動若異此處則名爲動 依色和合淸淨虛朗光明所攝不淸 朗者亦是色攝
【문】형색(形色)이란 길고 짧음 등을 말하는데 이것은 실유(實有)하는 법입니까, 아니면 가명입니까?
017_0348_b_11L形者謂長短等爲是 實法爲假名耶
【답】이것은 가명이다. 왜냐하면 모여 집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처소이다. 이것은 형색이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언어이기 때문이고, 오로지 헤아리고 분별하기[度量] 때문이며 여덟 가지 상(相) 가운데서 별도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관찰해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체성(體性)이 섞이기 때문에 마치 수레 등의 예에서와 같다. 혜(慧)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명을 설하는 것이다.
다음, 법입(法入)의 선정과(禪定果)인 색은 오로지 색상만이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나머지 향, 미, 촉 등을 생하는 원인이 없기 때문이며, 다시는 그런 공용(功用)이 없기 때문이다.
017_0348_b_12L此是假名何以故 以聚集故言此是處言此是形唯言 語故唯度量故於八相中無別義故 若以看視於可視者體性雜故猶如 車等慧有異故故說假名復於法入 禪定果色唯得有色何以故餘香味觸 生因無故無復用故
이와 같이 공중에서 지나가는 바람과 모든 향 따위의 진(塵)은 함께 생하는 것[共生]이 아니며 서로 가까이 있기 때문에 바람 속에 향이 있는 것이다. 또한 광명 속에 나오는 바퀴[輪] 이외의 것에서는 만약에 모든 대(大)의 법이나 향 따위의 진(塵)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 선정과(禪定果)의 색은 법입(法入) 속에서 선정을 의지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사대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본래의 색(色)과 유사하기 때문에 또한 조색(造色)이라 하며 이는 사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017_0348_b_18L如是於空行風 諸香等塵無共生者以相近故風中 有香復於光中出輪外者若諸大法 及香等塵不復得現禪定果色於法 入中依禪定生非四大生似本色故亦說造色不依四大
【문】색음(色陰) 가운데서 몇 가지 법이 눈으로 볼 수도 있고 그것이 공간을 장애하는 것을 알 수 있는가?
017_0348_b_23L從色陰中有幾 種法是可見者有障㝵者
017_0348_c_01L【답】첫째, 두 가지 안식(眼識)의 행처(行處)는 법입(法入)의 색은 떠나며, 그 밖의 나머지 모든 색은 모두 다 볼 수 없고 장애하는 바도 없다.
017_0348_c_01L一者二 眼識行處離法入色所餘諸色皆 不可見亦有障㝵
【문】이와 같은 분류는 색음 가운데 형태[形]에 대한 사유가 계속 이어지는[相續] 것인데 이는 색음 가운데 몇 종류가 있는가?
017_0348_c_03L如是分者於色陰 中是形思惟相續者於色陰中有幾 種流
【답】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依)이고, 둘째는 보생(報生)이며, 셋째는 장양(長養)이다.
017_0348_c_05L有三種一者依二者報生者長養
의지함[依]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보의(報依)ㆍ장양의(長養依)ㆍ부등의(不等依)ㆍ체성의(體性依)이다.
보생(報生)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품(前品)이고, 둘째는 상속(相續)이다. 전품은 이숙과보 등에 이끌어지는 경우이고, 다음의 과보가 나중에 생기면 이를 상속이라 한다.
017_0348_c_06L依者有四報依長養依不等 體性依報依者二種一者前品者相續前品是報等所牽故次報後 是名相續
장양(長養)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만처장양(滿處長養)과 상증장양(相增長養)이다. 만처란 색에 증장함이 있는 것이니 음식, 잠자리, 범행, 선정을 의지하여 증장하는 것을 말한다. 또 상증이란 음식을 의지함을 비롯한 만처를 의지하기 때문에, 항상 즐거움을 향수하기 때문에 때가 이르러 성숙하게 됨[時熟]을 의지하기 때문에 증장하게 된다. 모든 유색법(有色法)은 이 두 가지를 의지하여 증장하며 무색법(無色法)에서는 오로지 상(相)만이 늘어남으로써 증장하는 것이다.
017_0348_c_09L長養有二滿處長養增長養滿處者有色增長飮食眠 臥梵行禪定依此增長復相增者依飮食依滿處故恒受樂故依時熟 故而得增長諸有色法依此二種而 得增長於無色法唯相增故而得增長
욕계의 모든 색은 네 가지 식(食)이 장양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사(思)ㆍ식(識)ㆍ단(摶)ㆍ촉(觸)이다. 앞의 두 가지 식은 아직 이끌지 않은 것을 이끌기 때문에 생겨남[生]의 인연이 된다. 뒤의 두 가지 식은 머묾[住]의 인연이 된다. 촉식(觸食)은 수음(受陰) 등이 머무르는 연[住緣]이다. 그 밖에도 수면(睡眠) 등이 능히 색을 증장할 수 있다. 색계의 색은 단식(摶食)을 의지하지 않고, 잠자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범행(梵行)을 의지하지 않고 증장될 수 있다.
017_0348_c_14L欲界諸色四食長養何者爲四 前二種食未牽牽故是生因 後二種食是住因緣觸食是受陰 等住緣所餘眠等亦能增長於色界 不依摶食不依眠臥不依梵行而 得增長
【문】모든 유색근(有色根)은 두 가지 흐름을 따르니, 이 두 가지를 떠나면 별도의 의지해야 할 흐름이 없다. 과보는 상속하고 증장되고 장대해지며 어떤 때는 볼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 과보에 속하는 것을 장양이라 하지 않는가?
017_0348_c_20L諸有色根而隨二流離此二 種無別依流果報相續增長壯大有 時得見何故是報所攝不名長養
017_0349_a_01L【답】이 과보의 색은 예컨대 처(處)에 안치하는 것과 같아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이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양상속(長養相續)은 의보상속(依報相續)과는 어긋나기 때문에 증가함이나 감소함이 있다. 비근색(非根色)에는 모두 세 가지의 흐름이 있으니, 심심수법(心心數法)과 의류(依流)를 의지함과 보류(報流)를 의지함이다.
만약에 상(相)이 증장하는 것에 의지하면 증장함이 있으나 법입(法入)의 색에는 과보로 생겨남[報生]이 없다. 그 밖의 모든 법은 심법(心法)ㆍ심수법(心數法)에서와 같은 줄 알 수 있다.
017_0348_c_22L 此果報色如安置處不增不減而得 住故養相續者依報相續有違從故 有增有減非根色者皆有三流心心 數法依於依流依於報流若依相增 而有增長於法入色無有報生所餘 諸法如心心數而可得知
욕계 안에 있는 모든 내외(內外)의 색은 과보를 생할 수 있으며, 색계에서는 향(香)과 미(味)를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에서 과보를 생한다. 다시 욕계 안에서는 모든 근(根)이 원만하게 갖추어지지 않아도 과보가 있으나 색계에서는 모든 근이 잘 갖추어져야 과보가 있게 된다. 소리의 계[聲界] 또한 과보가 있으나 소리는 그렇지 아니하다. 이상을 색음의 상속에 대한 사유라 한다.
017_0349_a_05L於欲界中 諸內外色得果報生於色界中離於 香味餘者是報復欲界中諸根不具 亦是果報於色界中諸根具足皆是 果報是聲界者亦是果報非是聲故 是名色陰相續思惟
업은 색음 가운데 지계(地界)는 몇 가지 업이 있고 나아가 풍계(風界)에는 몇 가지 업이 있는가? 일체의 사대(四大)에는 각기 다섯 가지의 업이 있다.
이 지계(地界)에는 개발전업(開發轉業)ㆍ처소지업(處所持業)ㆍ위작의업(爲作依業)ㆍ호상위업(互相違業)ㆍ평등증업(平等增業)이 있다.
수계(水界)의 업은 흐름[流]ㆍ습기를 포함함[攝濕]ㆍ적심[潤]ㆍ거스름[違]ㆍ증장함[增長]이 있으니 이것이 다섯 가지이다.
화계(火界)의 업이란 빛[光]ㆍ익힘[熟]ㆍ파괴ㆍ거스름ㆍ증장함이 있으니 이것 또한 다섯 가지이다.
풍계(風界)의 업에는 가벼움[輕]ㆍ움직임[動]ㆍ참담하게 만드는 일[令慘]ㆍ거스름ㆍ증장함이 있으니 이를 풍업(風業)이라 한다.
017_0349_a_10L 業者色陰中攝持界幾業乃至風界 一切四大有五種業於此地界開發 轉業處所持業爲作依業互相違業 平等增業水界業者濕潤違及 增長是爲五種火界業者破壞 違及增長亦有五種風界業者 冷燥違及增長是名風業
또한 사대가 소조색이 생기는 데에도 다섯 가지 업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능생(能生), 둘째는 여의(與依), 셋째는 주처(住處), 넷째는 승지(勝持), 다섯째는 증장(增長)이다.
017_0349_a_17L 又有四大於 造色生亦有五業何者爲五一者能 二者與依三者住處四者勝持者增長
그 까닭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생하는 것을 개발하여 현전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이를 능생이라 하며, 이미 생겨난 것은 처소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의지하는 대상과 함께함[與依]이라 하며, 증가하거나 파괴하는 따위와 유사한 성품이기 때문에 주처(住處)라 하며, 양과 같이 감소하지 않고 능히 뛰어나게 지니기 때문에 승지(勝持)라 하며, 늘려 장양시키기 때문에 증장이라 한다.
017_0349_a_20L 何以故於開發生前得至故 是名能生已得生者不離處故是名 與依於增壞等相似性故是名住處 如量不減能勝持故是名勝持令增 長故是名增長
017_0349_b_01L 무엇 때문에 눈과 귀의 진색(塵色)에는 선(善)이 있고 불선(不善)이 있는데 나머지 것들의 진색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017_0349_b_01L 何故眼耳塵色有善 不善餘塵不爾
【답】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 즉 연품(軟品)의 사(思), 중품(中品)의 사, 상품(上品)의 사가 있다. 연품의 사(思)란 무엇인가? 사유할 때의 사, 결정할 때의 사, 업을 지을 때의 사이다. 이 연품의 생각은 선이나 불선의 신ㆍ구업을 짓는다. 지극한 상품의 생각을 의지하면 두 가지 색이 생하기 때문에 따라서 업색(業色)에는 선이나 불선이 있다. 그러므로 나머지 진(塵)들은 이와 같은 것을 얻지 못한다.
017_0349_b_02L略說有三何者爲軟思惟時思決定時思業時思爲善不善身口業生依極上 思二色生故是故業色有善不善故餘塵不得如此
【문】화합한 색으로부터 동요하면 다른 상[異相]이 되는가, 아니면 다르지 않은 상[不異相]이 되는가?
017_0349_b_06L 從色和合動搖異 相爲不異相
【답】다르지 않은 상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물의 처소는 이미 생긴 것[已生], 아직 생기지 않은 것[未生], 이미 파괴된 것[已壞], 아직 파괴되지 않은 것[未壞]이어서 움직인다는 뜻이 맞지 않다. 만약에 움직임이 이미 생했는데 후에 움직인다고 한다면 자상(自相)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약에 아직 생하지 않았다면 움직임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미 파괴되었다면 움직일 수 없다. 이는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017_0349_b_07L說不異相何以故此物處已生未生已壞未壞動義不 若動已生而後得動無有自相未生者則無有動若已壞者不能得 未生同故
만약 파괴되지 않았다면 그 행상(行相)이 없으므로 분명히 별도의 체로서 다른 저 인연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뜻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동요(動搖)에는 별도의 실유(實有)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색음(色陰)의 업분(業分)에 대한 사유이다.
찰나에는 이것을 구족한 까닭이고 색음이 찰나찰나에 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행법(行法)이 생했다가 멸하는 것에는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생인(生因)이 곧 멸인(滅因)이라고 한다면 이 뜻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의 인(因)에 다른 과[果果]가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미 생겨났다면 그 인(因)을 짓는 별도의 상(相)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법은 스스로 멸하며 다른 것을 연(緣)하지 않는다.
017_0349_b_11L若不壞者則無行相分 明別體至彼因緣是義不然是故動 搖無別實有是名色陰業分思惟剎 那者此具足故色陰剎那剎那滅故 何以故行法得生滅無障故此時生 因卽是滅因是義不然何以故一因 異果不得生故已生住因別相不現 是故行法自滅不緣於他
행념(行念)의 멸에는 장애가 없으니 마치 불 따위가 시물을 파괴하는 인(因)인 것과 같다. 만약에 사유(思惟)일 경우라면 이 뜻은 옳지 않다. 모든 행법과 불 따위는 똑같이 생멸하기 때문에 앞서 생긴 것과는 유사하지 않으며, 오직 인(因)만이 능히 짓는 것이므로 이 불 따위의 사물이 멸하는 것이 멸인(滅因)이라는 이치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멸이란 행법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멸이 만약에 이미 존재했었다가 행이 멸하는 가운데 있다면 모든 행[諸行]의 상속은 이미 단멸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기 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017_0349_b_18L 行念滅 無有障㝵如火等物爲破壞因若是 思惟此義不然共行火等同生滅故 不似前生唯因能造是火等事滅者 滅因是義不然何以故滅者與行不 共俱故滅若已有於行滅中諸行相 續已斷滅故以是義故不得共俱
017_0349_c_01L멸은 멸의 체성(體性)이 없으므로 멸의 인(因)을 능히 짓는다는 것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약에 멸이 멸인(滅因)이라면 일시에 멸할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멸인을 짓는 전후(前後)가 차이가 없기 때문에 모든 상속법(相續法)은 영원히 생기지 않게 되어 버린다. 만약에 멸이 다른 체(體)라면 멸은 다른 뜻이 되어 버린다. 별도의 멸상(滅相)이 존재한다면 멸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017_0349_c_01L滅無爲體能作滅因是故不然滅爲滅因不得一時滅作滅因前後 無異故諸相續法永應不生若滅異 從滅異義別有滅相卽不可得故不然
또한 만약에 불 따위가 멸하는 것과 동반하여 멸한다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심법(心法), 심수법(心數法) 등과 등불 따위의 자체에 멸함이 있게 되는 것이니,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만약에 힘[力]이 두 가지를 서로 성립시키고 능히 멸한다고 할 경우에는 이것이 멸하는 대상도 되고 멸하는 주체도 되기 때문에 분별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만약 두 가지 법이 각기 공능분[能分]을 가지고 있어 함께 멸하는 것이 갖추어질 수 있다고 하면, 이 두 가지는 각기 절반은 공능을 갖추고 절반은 공능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017_0349_c_06L復次若與火等滅伴能滅是思惟是故心心數等諸燈焰等有 自體滅卽應不有是故不然復次若 力更互相成二能滅故此是所滅是能滅則無分別是故不然復次若 二種法各有能分共滅具足而此二 種各有半能各有半不能是故不然
이와 같은 등의 분류가 색음 가운데 찰나멸에 관한 사유인 것이다. 자체가 멸하기 때문에, 모든 대(大) 따위의 법이 멸인(滅因)이라고 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에, 두 가지가 멸인이라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모든 행[諸行]은 마음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치 마음에서처럼 모두 찰나에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017_0349_c_12L如是等分於色陰中剎那思惟自體 滅故諸大等法遮滅因故遮二種滅 因故何以知之一切諸行心爲果故 如心可知皆有剎那
【문】그 다음 사대(四大) 소조색(所造色)에는 개별적인 모습[別相]이 있어서 구별할 수 있는가?
017_0349_c_16L 獨者從諸四大造色別相爲當不別
【답】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별적인 모습을 이근경(異根境)이라고 한다. 다른 나머지 근의 대경(大境)과 다른 나머지 조색(造色)의 경계가 이를[度] 수도 있고 이르지 않을[不度] 수도 있기 때문이니, 예컨대 여러 꽃향기를 참깨 가운데 옮겨 놓으면 원만하게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변하거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니. 예컨대 채소 따위는 삶거나 끓이면 색이나 맛이 변하지만 견고함 따위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모습[別相]의 조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017_0349_c_17L答曰有別何以故見別相故如此別 謂異根境餘根大境餘造色境不度故從諸花香度於麻中等不度 變不變故如蘇等中煎煮和合色味 等變堅等不然是故知有別相造色
017_0350_a_01L사대(四大)의 조색에는 개별적인 모습이 있으나 그 체는 하나이다. 비유하자면 나무그루를 보고 두 가지 인식 지혜를 일으키는 것과 같아 모습을 취함에는 다름[異]이 있어도 그 체는 하나이니, 첫째는 경계에 대한 의지(疑智)이고, 둘째는 경계에 대한 결정지(決定智)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이치에 맞지 않다. 비록 개별적인 모습이 있더라도 하나의 체를 지을 수 있으니, 사대 가운데서도 역시 이와 같다.
017_0349_c_22L四大造色有於別相而體是一譬如 見株起於二智取相有異而體是一 一者疑智境故二者決智境故是喩不 雖有別相而作一體於四大中亦 應如是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사대에는 각기 자신의 개별적인 모습이 있으니 만약에 결정적으로 이와 같은 사대가 하나의 체라면 마땅히 네 가지가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버리므로 이 뜻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색(造色)과 사대는 별도의 체이다. 이를 단독이면서 단독 아님[獨不獨]의 뜻에 관한 사유라 한다.
017_0350_a_04L何以知之是諸四大各自別 若定如是四大一體不應有四義不然是故造色與大別體是名獨 不獨義思惟
【문】경계는 모든 색법을 말하는데, 그것에는 몇 가지 근(根)과 몇 가지 진(塵)이 포함되는가?
017_0350_a_07L境者一切諸法色所攝 者幾根幾塵
【답】다섯 가지 색이 근(根)이고 여섯 가지 색이 진(塵)이다. 어떻게 근은 모든 진을 경계로 성립시키는가? 근(根)이 파괴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는 경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017_0350_a_08L五色是根六色是塵 云何根者諸塵成境根不破者廣說 如經
【문】초지(初地) 가운데서는 몇 가지의 인연이 여러 근을 파괴하거나 파괴하지 않는가?
017_0350_a_10L於初地中幾種因緣諸根破壞 不破壞者
【답】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파리하고 쇠약함이며, 둘째는 모두 다 잃음이다. 이러한 뜻과 같지 않으면 모두 다 근(根)을 이룬다.
017_0350_a_11L答有二種一者羸劣二者 皆失不如此義皆是成根
간략히 말해서 네 가지 변하여 달라지는 인연이 있다. 첫째는 외부의 조건[外緣]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모든 외진(外塵)을 이용하면 거스름[逆]과 따름[從]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손상하기도 하고 손상된 것을 치유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를 외연이라 한다. 둘째는 내부적인 조건[內緣]을 따르는 것이니, 안[內]에서 선하지 못한 것[不善]을 사유하면 탐욕 따위가 생겨 모든 근이 손감된다. 바른 사유나 삼마제로부터는 모든 근이 증익된다. 셋째는 업연(業緣)으로 생겨나는 것이니, 예컨대 지난날의 업연에 강함과 약함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애착할 만한 것이 되거나 애착할 만한 것이 아니게 된다. 넷째는 자체(自體)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일체의 근은 자상(自相)을 의지하기 때문에 때에 따라 손감되고 때에 따라 증익된다.
017_0350_a_12L略說有四 變異因緣一者從外緣生云何知之 用諸外塵有逆從故他損傷故治損 傷故是名外緣二者從於內緣如在 於內不善思惟所生欲等諸根損減 從正思惟三摩提等諸根增益三者 業緣得生如昔業緣有强弱故諸可 愛及不可愛四者從自體生一切諸 根依自相故時損時益
【문】또 다음에는 심근(心根)이 파괴되는 인연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017_0350_a_20L復次心根破 壞有幾
【답】네 가지가 있다.
答曰有四
017_0350_b_01L첫째는 개(蓋)로부터 지어진 인연 때문이니, 5개(蓋)5) 가운데 하나를 따르면 마음을 덮는다. 둘째는 산란한 마음이 짓는 인연 때문이니 산란한 마음을 짓는다는 것은 예컨대 귀신 등에 집착함이다. 셋째는 구하는 바를 아직 얻지 못한 인연 때문이니 4공정(空定)이나 6신통(神通)을 아직 얻지 못했을 때 스스로 얻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그릇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구하는 것을 아직 얻지 못함[求未得]이라고 한다. 넷째는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짓는 인연 때문이니 예컨대 다문(多聞)이나 여러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없는 경우이다. 이상 네 가지 인연의 뜻을 의지하면 마음이 파괴된다.
017_0350_a_21L一者從蓋所作五蓋中隨一覆心亂心所作亂心作 如著鬼等所求未得如四空定及 六神通未得之時自謂言得起邪心 名求未得未了所作如未多聞及 諸工巧依是四義心得破壞
또 그 다음에, 색 등의 모든 진(塵)은 어떻게 근(根)에서 명료하게 되는가?
색은 눈에 닿아 이르지 않아야 오히려 명로하며 극히 미세하지 않아야 또한 명료하다. 그리고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덮거나 막는 장애가 없어야 하며, 또한 광명이 있는 곳이어야 하며, 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눈에 의대(依對)하는 앞의 진경계(塵境界)가 눈에 명료하다. 어떤 중생들의 경우에는 어두운 실내에서도 색을 분별해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오직 한 가지 볼 수 없는 색[不可見色]은 예컨대 앞에 있는 여러 진경계를 육안으로는 볼 수 없으나 모두 다 천안(天眼)으로는 볼 수 있다.
017_0350_b_03L復次云 何色等諸塵於根明了色不至眼於 眼明了不極微細見亦明了及可見 色無覆障者有光明處又不過遠眼前塵於眼明了有諸衆生於闇室 中亦得了色唯一種不可見色如前 諸塵肉眼不見皆天眼見
소리[聲]의 경우는 이르는데 장애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이르는 경우라도 빛과 어둠 속에서 미세함을 지나지 못하여 경계의 처소에 머물게 되어 명료하게 된다.
향(香)ㆍ미(味)ㆍ촉(觸)은 자신의 근(根)에 이르러 닿아 경계의 처소에 머무는 경우이다.
모든 천안(天眼)으로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비록 미세하거나 장애함이 있거나 먼 곳에서 이르러도 경계의 처소에 머물면 다 명료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계의 처소에 머물지 못하면 인식할 수가 없다.
017_0350_b_09L聲者不至 無障若有至者若光闇中不過微細 住於境處卽得明了香味及觸至於 自根住境處者是諸天眼可見色者 雖復微細有障及遠至住境處皆得 明了不住境處不能得見
다시 모든 성인(聖人)들의 성스러운 혜안(慧眼)은 모든 종류의 색에 대해 환히 깨달아 안다.
예컨대 초지(初地)에서는 여섯 가지 경계를 설하는데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첫 번째 경계란 모든 색이 다 중생의 세간이나 기세간(器世間)에 들어갈 수 있다. 두 번째 경계는 세 가지 종성을 의지하니 모두 다 분별함이 있다. 첫째는 상분별(相分別)이요, 둘째는 사분별(事分別)이며, 셋째는 주분별(住分別)이다.
017_0350_b_14L復諸聖人 聖慧眼者一切種色皆悉明了如初 地說六種境界云何解釋第一境者 諸色皆得入衆生世及於世器二者依 三種性皆有分別一者相分別二者 事分別三者住分別
017_0350_c_01L이와 같이 청색ㆍ적색ㆍ백색 등을 분별하고 나아가 자세하게 설하는 것을 상분별이라 하며, 사분별이란 작색(作色)ㆍ무작색(無作色)ㆍ계색(戒色)ㆍ비계색(非戒色)ㆍ비계비비계색(非戒非非戒色)을 말한다. 주분별이란 여의색(如意色)이나 불여의색이며 평등한 처소[捨處]가 있는 것을 색분별(色分別)이라 한다. 성분별(聲分別)이란 중생수인(衆生數因)ㆍ비중생수인(非衆生數因)ㆍ중생비중생수인(衆生非衆生數因)이다. 사분별(事分別)이란 입으로 짓는 것이며 주분별(住分別)이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7_0350_b_19L如是分別靑赤 白等乃至廣說事分別者作無作色 戒非戒色非戒非非戒色住分別者 是如意色及不如意及有捨處名色 分別聲分別者衆生數因非衆生因 衆生非衆生因事分別者是口所作 住分別者如前說
향분별(香分別)이란 뿌리ㆍ줄기ㆍ껍질ㆍ복심ㆍ잎사귀ㆍ꽃ㆍ열매 등의 냄새를 말하니, 이것이 향분별이다. 향ㆍ미ㆍ촉 가운데는 사분별이 없다. 주분별은 앞의 색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맛[味]의 상분별은 달거나 쓴 것 등을 말한다. 주분별은 앞에서와 같다. 촉에도 많은 종류의 분별이 있으니 앞에서와 같다.
017_0350_c_02L香分別者謂根莖 皮心葉華果是香分別香味觸中無 事分別住分別者如前色說味相分 別者謂甜苦等住亦如前觸有多種 分別如前
세 번째 경계는 시방(十方) 가운데서 알 수 있다. 네 번째 경계에는 과거ㆍ미래ㆍ현재라는 삼세의 분별이 있으며, 다섯 번째 경계는 실(實)과 부실(不實)을 취하여 분별함으로써 알 수가 있다. 여섯 번째 경계는 하나의 변처(邊處)에서 취하여 갖출 수 있다. 이와 같이 자분(自分)의 모든 유색(有色)의 진(塵)을 훤히 알아 분별할 수 있다.
017_0350_c_06L第三境者於十方中卽可 得知第四境者三世分別第五者不實取分別可知第六境者於一邊 處得取具足如是自分諸有色塵明 了分別
사유란 무엇인가? 능히 식(識)을 생하는 것이니 모든 것과 모든 근(根)에 대해 파괴하지 않으며 진(塵)을 훤히 아는 것과 함께 발심(發心)하도록 돕는다. 이와 같이 사유는 모든 의식 작용[識]을 낳을 수 있다.
이상을 색음의 경계분(境界分)에 대한 사유라 한다.
잡사유는 욕계의 음입(陰入)이 이 처소에 머물며 색계의 색은 이 몸에서 생긴다.
017_0350_c_10L何者思惟能生識者於共於 諸根不破壞者與明了塵同興發心 如此思惟能生諸識是名色陰境分 思惟雜思惟者於欲界陰人住是處色界 色生於此身
어떻게 상계(上界)의 여러 색과 하계(下界)의 여러 색이 함께할 수 있으며 별도의 처소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별도의 처소가 아닌 처소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인가?
017_0350_c_15L云何上界諸色與下界 共別處而住不別處也
【답】별도의 처소가 아닌 처소에 머무는 것은 마치 모래가 섞인 물과 같다. 이를 색음의 잡분(雜分)에 대한 사유라 하니, 이는 색음을 분별하여 사유한 것은 아니다.
이상으로 『결정장론』 하권을 마친다.
017_0350_c_16L答曰不別處 住猶如沙水是名色陰雜分思非色 陰分別思惟究竟
決定藏論卷下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심소(心所)와 같은 뜻이다.
  2. 2)신근(身根)을 제외한 안, 이, 비, 설의 근(根).
  3. 3)극미(極微)와 같은 뜻이다.
  4. 4)상하사방(上下四方)의 방위를 의미한다.
  5. 5)심성(心性)을 덮어 선법(善法)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다섯 가지 번뇌, 즉 탐욕ㆍ진에ㆍ혼면(惛眠)ㆍ도거(掉擧)ㆍ의(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