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 / 四經持驗紀卷一

ABC_BJ_H0175_T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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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
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 권1
백암 성총 모음(栢庵性聰集)
총목차總目次
사경지험기 권1
역조화엄경지험기歷朝華嚴經持驗紀
사경지험기 권2
금강경지험기金剛經持驗紀
사경지험기 권3
법화경지험기法華經持驗紀
사경지험기 권4
관세음지험기觀世音持驗紀
역조화엄경지험기歷朝華嚴經持驗紀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아주 유명하고 덕망 있는 비구인 용수보살龍樹菩薩1)은 범지梵志 종족의 매우 부유하고 귀한 집안 출신이었다. 처음 태어난 장소가 나무 아래였고, 용 덕분에 도를 이룬 까닭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강보에 싸인 어린 시절에 사위다四韋陀(베다)2)를 염송하고 수록된 4만 게송을 모두 즉시 조감하였으며, 약관弱冠의 나이에는 여러 나라에 이름을 드날리고 천문天文과 별자리 및 그 밖의 도술까지 충분히 연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산에 들어갔고 어느 불탑에 이르러 출가하여 도를 닦았는데, 90일 만에 염부제閻浮提에 존재하는 경론을 암송하고 모두 통달하였다. 그래서 다시 다른 전적을 찾아 설산雪山으로 향하다가 한 비구를 만났는데, 그가 마하연摩訶衍(대승)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을 좋아해 독송하자 변재辨才가 다함이 없게 되어 듣는 이들이 모두 추앙하고 복종하면서 스승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곧 일체지인一切智人3)을 자처하고는 교만한 마음을 일으켜 구담문瞿曇門4)을 통과해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때 문을 지키던 신이 용수에게 말하였다.
“지금 그대의 지혜로는 자유자재로 변론할 수 없으니, 여래와 비교하자면 반딧불이 해나 달과 함께 빛나는 것과 다름없다. 내 보기에 그대는 일체지를 갖춘 사람이 아닌데,

008_0518_b_01L[四經持驗紀]

008_0518_b_02L1)四經持驗紀卷一

008_0518_b_03L

008_0518_b_04L栢庵性聰集

008_0518_b_05L2)總目次

008_0518_b_06L
卷一歷朝華嚴經持驗紀

008_0518_b_07L卷二金剛經持驗紀

008_0518_b_08L卷三法華經持驗紀

008_0518_b_09L卷四觀世音持驗紀

008_0518_b_10L
008_0518_b_11L

008_0518_b_12L歷朝華嚴經持驗紀

008_0518_b_13L
南天竺國大名德比丘號龍樹菩薩
008_0518_b_14L出梵志種大豪貴家始生時在樹下
008_0518_b_15L由龍成道因以爲號襁褓時誦四韋
008_0518_b_16L有四萬偈皆即照了弱冠擅名諸
008_0518_b_17L天文星緯及餘道術無不綜練
008_0518_b_18L友三人入山至一佛墖出家爲道
008_0518_b_19L十日誦閻浮提所有經論皆悉通達
008_0518_b_20L更求異典向雪山見一比丘以摩訶
008_0518_b_21L衍授之愛樂讀誦辨才無盡聞者悉
008_0518_b_22L推伏請爲師範便自謂一切智人
008_0518_b_23L生驕慢欲徃從瞿曇門入時門神謂龍
008_0518_b_24L樹曰今汝智慧未云能辯比于如來
008_0518_b_25L無異螢火齊輝日月我觀仁者非一切

008_0518_c_01L왜 이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가?”
용수가 이 말을 듣고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계법世界法5) 가운데도 나루와 길은 한량이 없다. 부처님 경이 오묘하긴 하지만 그 표현과 논리는 미진하다. 내가 이제 다시 이를 자세히 연설하여 후학들을 깨우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해야 마땅하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홀로 조용한 건물의 수정방水精房에 머물렀다. 그러자 대룡보살大龍菩薩이 이런 그를 불쌍히 여겨 신통력으로 큰 바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궁전으로 가서 칠보 상자를 열어 여러 방등方等의 심오한 경전과 한량없는 오묘한 법을 용수에게 주었다. 이에 90일 만에 모조리 통달하고 깊이 깨달아 들어가자 용이 그가 도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궁에서 돌려보냈다. 당초 『화엄경』은 문수사리文殊師利가 결집한 것인데, 부처님께서 처음 세상을 떠나신 후에 서로 다른 도가 앞다퉈 일어나 대승의 근기를 폄하하기에 이 경을 거두어 용왕의 궁에 들였던 것이다. 600여 년 후 용수가 용궁으로 가서 이 경이 유독 심오하고 오묘한 것을 보고는 염송하여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비로소 세상에 전하여 유포하게 된 것이다. 『부법장인연경付法藏因緣經』6) 및 『서역기西域記』7)의 설명이다. 현수賢首의 『화엄전華嚴傳』8) 등 여러 전적에도 이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세친보살世親菩薩9)은 천축 사람으로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명민하였다. 처음에는 소승을 업으로 삼았는데 빼어난 변론과 자세한 분석으로 그 날카로움이 번뜩이는 칼날 같았다. 형인 무착보살無着菩薩10)이 병을 핑계로 세친을 불러서 대승의 가르침을 열어 보여주면서 “내가 죽기 전에 내가 익혔던 경전들을 읽어 달라.”라고 말하였다. 세친이 곧 『화엄경』을 읽다가 비로자나부처님의 법계와 바다처럼 드넓은 보현보살의 대행을 보고는 믿음을 일으키고 깨닫게 되어 탄식하였다.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 내 혀를 잘라 소승을 찬탄했던 잘못을 밝혀야 하리라.”
그러자 형이 말리며 말하였다.
“사람이 땅으로 인하여 넘어졌으면 역시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008_0518_c_01L云何欲從此門而入龍樹聞之
008_0518_c_02L然有愧自念世界法中津途無量
008_0518_c_03L經雖妙句義未盡我今宜更敷演之
008_0518_c_04L開悟後學饒益衆生作是念已獨處
008_0518_c_05L靜室水精房中大龍菩薩愍其若此
008_0518_c_06L以神力接入大海至宮殿開七寶凾
008_0518_c_07L以諸方等深奧經典無量妙法授龍樹
008_0518_c_08L九旬中通解深入龍知其悟道送還出
008_0518_c_09L初華嚴經是文殊師利所集佛初
008_0518_c_10L去世異道競興乏大乘器攝此經入
008_0518_c_11L龍王宮六百餘年龍樹徃龍宮見此
008_0518_c_12L經獨爲淵妙誦之在心始得傳布于世
008_0518_c_13L付法藏因緣經及西域記說賢首華嚴
008_0518_c_14L傳諸本具誌其事

008_0518_c_15L
世親菩薩天竺人性負聰敏初以小
008_0518_c_16L乘爲業峻辨橫分利如星3) [1] 兄無着
008_0518_c_17L菩薩托病令召世親因開示大敎云
008_0518_c_18L及吾未死之前讀吾所習經典世親即
008_0518_c_19L讀華嚴乃見毘盧法界普賢行海
008_0518_c_20L生信悟嘆曰可取利*釰斷吾舌根
008_0518_c_21L明已讃小乘之失兄止之曰如人因地
008_0518_c_22L{1}{底}康熈二十五全羅道樂安郡澄光寺開刊本
008_0518_c_23L(東國大學校所藏)題名及撰者名補入{編}

008_0518_c_24L目次編者作成補入
「釰」通用「釖」{編}次同

008_0519_a_01L이처럼 지난날 혀로 대승을 헐뜯었으니 이제 그 혀로 대승을 찬양해야 하리라.”
드디어 산에 들어가 대승 경전을 두루 열람하고 『십지론十地論』을 지었다. 논이 완성되던 날 온 대지가 진동하고 광명이 환하게 비추었다. 『서역기』를 보라.
동진東晋의 사문 지법령支法領11)은 대승에 뜻을 두고 좋아하여 몸 바쳐 법을 구하다가 이런 소문을 들었다.
“우전于闐12) 동남쪽 2천여 리에 구차반국拘遮盤國13)이 있는데, 그 나라 임금들은 대대로 대승을 존경하고 예배한다. 왕궁에는 『화엄경』ㆍ『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ㆍ『대집경大集經』 등 모두 10만 게송이 있으며, 왕이 직접 수지하고 장엄하게 공양한다.”
이에 양식을 싸 들고 말을 달려 온갖 험난한 길을 지나 구반국拘盤國에 이르렀고, 정성을 다해 간청하고 기도하여 결국 『화엄경』의 전분前分 3만 6천 게송을 얻어서 이를 가지고 돌아왔으니, 곧 동진 때 번역된 『화엄경』14)이다. 이것이 『화엄경』이 동토에 들어오게 된 시초이다.
진晋나라 때 북천축北天竺에서 온 삼장 불도발다라佛度跋陀羅15)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며 감로반왕甘露飯王16)의 후예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는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많은 경전을 두루 익히고 선禪과 율律을 깊이 통달하였다. 그는 여러 곳을 편력하며 널리 교화하기를 늘 소원하고 있었다. 마침 요진姚秦의 사문 지엄智嚴17)이 계빈국罽賓國18)에 이르러 그 나라 스님들에게 “누가 동토로 가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다들 “각현이면 가능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스님은 일찍이 불대선佛大仙에게서 선업禪業을 전수받은 적이 있었다. 불대선도 당시 계빈국에 있었는데 그도 지엄에게 “승도들에게 기강을 떨치고 정법을 널리 전수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각현이다.”라고 말하였다. 지엄이 이로 인해 함께 동토인 중국으로 가자고 간절히 청하자 스님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 여정은 3년이나 걸렸으니, 낮에는 숨었다가 밤길을 걸어 온갖 위험을 겪고서야 동래군東萊郡에 도달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흔연히 찾아뵈었으며, 그와 서로 논의를 주고받았고, 선법을 연설해 전수하였다. 그 뒤 동진東晋을 유행하였는데, 의희義熙 14년(418)에 오군吳郡의 내사內史 맹의孟顗와

008_0519_a_01L而倒亦因地起昔日以舌毁大乘
008_0519_a_02L可將舌以讃大乘遂入山披覽大乘
008_0519_a_03L十地論論成之日大地徧震光明洞
008_0519_a_04L見西域記

008_0519_a_05L
東晋沙門支法領志樂大乘求法
008_0519_a_06L聞于闐東南二千餘里有拘遮盤國
008_0519_a_07L君相傳敬禮大乘王宮內有華嚴摩訶
008_0519_a_08L般若大集等經並十萬偈王躬受持
008_0519_a_09L莊嚴供養於是裏糧抗策備歷艱途
008_0519_a_10L至拘盤國竭誠請禱遂得華嚴前分三
008_0519_a_11L萬六千偈賷還即東晋朝所譯經也
008_0519_a_12L此華嚴入東土之始

008_0519_a_13L
晋北天竺三藏佛度跋陀羅華云覺賢
008_0519_a_14L甘露飯王之苗裔幼失怙恃度爲沙彌
008_0519_a_15L性聰敏愽綜羣經深達禪律常願遊
008_0519_a_16L諸方以弘至化適姚秦沙門智嚴
008_0519_a_17L罽賓國問彼國僧誰可流化東土
008_0519_a_18L云賢可師嘗受禪業於佛大仙大仙時
008_0519_a_19L亦在罽賓國謂嚴曰可以振維僧徒
008_0519_a_20L宣授正法賢其人也嚴因懇請偕來
008_0519_a_21L東夏師許之途歷三載晝伏宵行
008_0519_a_22L經危險方達東萊郡聞羅什在長安
008_0519_a_23L欣然詣焉與之上下論議演授禪法
008_0519_a_24L後遊東晋義熙十四年吳郡內史孟顗

008_0519_b_01L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가 따로 깨끗한 방사를 짓고는 『화엄경』을 번역해 달라고 청하였다. 스님이 이에 양주揚州 사사공사謝司空寺도량사道場寺라고도 하였으니, 곧 지금의 윤주潤州 흥엄사興嚴寺가 그곳이다. 화엄을 흥성시킨 것에서 절 이름이 유래하였다.에서 손에 범문梵文을 들고 100여 명의 사문과 함께 범본 3만 6천 송을 번역하여 진경晋經 60권34품 8회을 완성하였는데, 지시한 문장은 이치에 맞았으며 번역한 말은 적절하고 오묘하였다. 사문 법업法業이 필수하고, 혜엄慧嚴과 혜관慧觀이 윤색하였다.
옛 도량사道場寺에는 화엄당華嚴堂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처음 경을 번역할 당시 화엄당 앞 연못에서 매일 푸른 옷을 입은 두 동자가 나와 향과 꽃을 바쳤으며, 화로를 덥히고 물을 길어 오며 자리를 떠나지 않다가 날이 저물면 다시 연못으로 사라지고는 하였다. 온 대중이 이를 목격하였으니, 이 경이 용궁에 오래 있었기에 용왕이 널리 유통되는 것을 기뻐하여 용의 아들들에게 물자를 공급하고 시중들게 한 것이었다. 또 어떤 선신善神도 그를 좌우에서 보호했다고 한다. 그 뒤 여산廬山에 들어가 원遠 공19)의 백련사白蓮社에 참여하여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등을 번역하였다. 원가元嘉 6년(429)에 71세로 돌아가셨는데, 손가락 세 개를 구부려20)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었음을 표명하였다.
업業 공21)은 풍모와 격식이 빼어나고 단정하였다. 그는 여러 교학을 두루 열람하고도 스스로 “미세한 부분까지 탐색해 끝까지 조명하지는 못했다.”고 하며 항상 침울해 하고 부족하게 여기다 뒤에 각현을 만나 『화엄경』을 번역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 뜻과 이치를 헤아리고 묻기를 수년에 확연히 통달해 깨닫고는 벗을 돌아보며 “성스러운 가르침의 사남司南22)이 여기에 있었구나.”라고 하였다. 드디어 오묘한 종지를 널리 펼치고 수많은 종도들의 수장이 되었으며, 『화엄지귀華嚴旨歸』 두 권을 저술하였다.
혜엄과 혜관은 필격筆格이 고매하고 간결하였으며 경론에 깊고 해박하였으니, 곧 집什 공23) 회하의 여덟 준걸 중 두 사람이다.
우전국于闐國 사미 반야미가박般若彌伽薄은 계행戒行을 견고히 지키며 오로지 『화엄경』만을 염송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합장하고 말하였다.
“여러 천신들이 스님을 모셔 오라고 제자에게 명하였으니, 스님께서는 눈을 감으십시오.”
잠깐 사이에 천상에 이르렀고, 천주天主가 무릎을 꿇고 청하였다.
“지금 여러 천신들이 아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여러 차례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008_0519_b_01L右衛將軍褚叔度別造淨室請譯華嚴
008_0519_b_02L師乃於揚州謝司空寺亦名道塲寺即今
潤州興嚴寺是也
008_0519_b_03L由興華
嚴故
手執梵文共沙門百餘人翻譯
008_0519_b_04L梵本三萬六千頌成晋經六十卷三十四
品八會

008_0519_b_05L指文會理通言適妙沙門法業筆受
008_0519_b_06L慧嚴慧觀潤色故道場寺猶有華嚴堂
008_0519_b_07L初譯經時堂前池內每有二靑衣
008_0519_b_08L童子從池中出捧以香花爇爐注水
008_0519_b_09L不離几席將夕還潜沼中擧衆皆見
008_0519_b_10L以此經久在龍宮龍王慶感流通故令
008_0519_b_11L龍子給侍又有善神護諸左右云
008_0519_b_12L入廬山預遠公蓮社譯觀佛三昧諸經
008_0519_b_13L永嘉 [1] 六年卒年七十有一手屈三指
008_0519_b_14L明得阿那含果業公風格秀整徧閱羣
008_0519_b_15L自謂未能探微照極常怏然不足
008_0519_b_16L後遇覺賢請譯華嚴籌諮義理數歲
008_0519_b_17L廓然通悟顧友人曰聖敎司南於是
008_0519_b_18L乎在遂敷弘奧旨欝爲宗首著旨歸
008_0519_b_19L兩卷慧嚴慧觀筆格高簡經論深愽
008_0519_b_20L即什公八俊之二也

008_0519_b_21L
于闐國沙彌般若彌伽薄堅持戒行
008_0519_b_22L誦華嚴忽有人合掌謂曰諸天令弟子
008_0519_b_23L請師願師閉目俄至天上天主跪而
008_0519_b_24L請曰今諸天方與修羅戰屢被摧衂

008_0519_c_01L스님께서 『화엄경』을 염송해 법력으로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그들의 청대로 하늘나라 보배 수레에 올라 하늘나라 깃발을 잡고 마음속으로 『화엄경』을 염송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여러 하늘나라 대중들이 그들의 강력한 적을 향해 진군하자 아수라가 그것을 보고는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몸에 하늘나라의 향기가 배어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송宋의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24)는 중국말로 공덕현功德賢이며 중천축中天竺 사람이다. 처음에는 오명五明25)의 여러 논에 통달하였다가 후에 삼장三藏에 깊이 들어갔으며, 더욱 나아가 대승을 배웠다. 그의 스승이 경전을 넣어 둔 상자를 골라잡게 하자 곧바로 『화엄경』을 선택하였고, 스승이 이를 기뻐하며 더욱 열심히 강설하도록 명하였다. 원가元嘉 연중26)에 광주廣州에 도착하자 자사 차랑車朗이 조정에 알려 문제文帝가 사신을 보내 영접하였으며, 남초왕南譙王 의선義宣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다. 왕이 의학義學 사문 700여 명을 소집해 『화엄경』을 강설하고자 했지만 스님은 중국말을 익히지 못해 속으로 깊이 부끄러워하며 한탄하였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관음보살에게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서 그윽한 감응을 구하였다. 그러자 꿈에 칼을 든 신이 어떤 한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와서 바꿔 주었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뒤로는 모르는 중국말이 없게 되었다. 드디어 『화엄경』을 십여 차례에 걸쳐 강설하게 되었고, 듣는 사람 모두 절복하였다. 스님이 처음 건업建業에 도착했을 때 황제가 물었다.
“과인이 계를 지켜 살생하지 않고 싶지만 이 몸이 국정을 주관하고 있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제왕께서 닦아야 할 바는 필부와 다릅니다. 필부는 신분이 천하고 명예 또한 보잘것없으니, 모름지기 자신을 이겨 내고 애써 직접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왕은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는 분이십니다. 한마디 아름다운 말씀을 하면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한 가지 선정을 베풀면 사람과 신들이 화합하게 되며, 형벌을 내리더라도 젊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노역을 시키더라도 백성을 고단하게 하지 않으면 바람과 비가 때를 맞추고 추위와 더위가 순조로워 백곡이 풍성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재계齋戒를 지키셔야 재계가 또한 큰 것이며, 이와 같이 살생하지 않으셔야 지계가 또한 지극한 것입니다. 어찌 한 끼 식사에서 고기반찬을 빼고 한 마리 짐승의 목숨을 살려 주어야만 널리 구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이에 제왕이 안석을 치며 칭찬하고

008_0519_c_01L師誦華嚴經望法力加護師如其所
008_0519_c_02L乘天寶輅執天幢旛心念華嚴
008_0519_c_03L諸天衆對彼勍敵修羅見之忽然潰
008_0519_c_04L須臾送歸身染天香終身不滅

008_0519_c_05L
宋求那跋陀羅華言功德賢中天竺人
008_0519_c_06L初通五明諸論後深入三藏進學大乘
008_0519_c_07L其師令探取經匣即得華嚴師喜之
008_0519_c_08L命加講說元嘉中至廣州刺史車朗
008_0519_c_09L奏聞文帝遣使迎接南譙王義宣等
008_0519_c_10L並師事之王集義學沙門七百餘衆
008_0519_c_11L講華嚴經師以未通華言深懷媿歎
008_0519_c_12L因朝夕禮懴虔禱觀音以求冥應
008_0519_c_13L夢神人執*釰持一人首而爲易之
008_0519_c_14L然便覺自後華言無不通曉遂講華嚴
008_0519_c_15L至十數遍聽者傾服師初達建業
008_0519_c_16L問曰寡人欲持戒不殺而身主國政
008_0519_c_17L不獲從志奈何師曰帝王所修與匹夫
008_0519_c_18L匹夫身賤名劣須克己苦躬帝王
008_0519_c_19L以四海爲家萬民爲子出一嘉言
008_0519_c_20L士庶咸悅布一善政則人神以和
008_0519_c_21L不夭命役不勞力則風雨時寒暑調
008_0519_c_22L百糓茂如此持齋齋亦大矣如此不
008_0519_c_23L戒亦至矣安在缺一時之膳全一
008_0519_c_24L禽之命然後爲弘濟耶帝撫几稱嘆

008_0520_a_01L사령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도록 명하였으며, 온 나라가 존중하고 받들었다.
제齊의 석혜광釋慧光27)은 낙양洛陽에 거처하며 『화엄경』ㆍ『열반경』ㆍ『십지론』 등에 소를 지어 방편과 진실의 종지를 오묘하게 끝까지 밝혔다. 어느 날 병이 들자 하늘나라 대중이 찾아와 영접하였다. 그것을 보고 혜광이 말하였다.
“내 소원은 안양安養28)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러자 정토의 화신불이 온 허공에 가득 찼다. 혜광이 “원하옵건대 우리 부처님께서 거두어 주시어 저의 본래 소원을 이뤄 주소서.”라고 말하자, 곧 손가락을 튕기거나 기침할 정도의 짧은 시간에 말과 호흡이 함께 끊어졌다. 『운서왕생집雲棲徃生集』을 보라.
위魏의 늑나마제勒那摩提는 중국말로 보의寶意이며 중천축中天竺 사람이다. 문장과 학문을 널리 섭렵하고 선의 이치를 밝게 깨우쳤으며, 정시正始 초년(504)에 낙양에 도착해 『십지론』 등 24권을 번역하였다. 스님은 중국말을 명확히 이해하고 지혜와 깨달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해 황제가 『화엄경』을 강의하게 할 때마다 정밀한 뜻을 훌륭히 밝혔다. 한번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홀을 들고 편지를 가진 자가 나타났다. 높은 관리의 형상을 한 그가 “법사께서 오셔서 『화엄경』을 강설해 주기를 천제께서 청하십니다.”라고 하자, 도강都講과 유나維那 등의 스님들이 모두 따라가기를 원하였다. 당시 강석에 있던 대중 스님들이 똑같이 이를 목격하였다. 스님은 기뻐하며 미소를 짓고는 대중에게 이별의 말을 남기고 법좌에서 천화하였으며, 도강 등의 스님들 역시 동시에 입멸하였다. 이로 볼 때 비장秘藏인 화엄은 하늘이건 사람이건 받들고 존중하지 않는 이가 없음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魏나라 때 촉蜀의 승려 법건法建은 선행禪行이 높고 빼어났으며, 평소 『화엄경』을 수지하였다. 당시 무릉왕武陵王이 동쪽으로 내려가면서 동생 규規에게 익주益州를 지키게 하였는데, 위魏에서 장군 위지형尉遲逈을 파견해 촉을 정벌하였다. 규가 항복하자 성안의 명승들도 모두 구금되었는데 밤이 되자 갑자기 하늘을 밝히는 광명이 나타났다. 위지형이 사람을 보내 그 빛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조사관은 다른 스님들은 다 잠들고 법건만 단정히 앉아 경을 염송하고 있는 가운데 빛이 그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위지형은 이 소식을 듣고 스님이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는 앉아서 들었는데,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났다. 이에 물었다.
“법사께서 밤에 염송하신 것이 무슨 경입니까?”

008_0520_a_01L敕有司供給擧國宗奉焉

008_0520_a_02L
齊釋慧光居洛陽著華嚴涅槃十地等
008_0520_a_03L妙盡權實之旨一日有疾見天衆
008_0520_a_04L來迎光曰我所願歸安養耳已而淨
008_0520_a_05L土化佛充滿虛空光曰惟願我佛攝受
008_0520_a_06L遂我本願即彈指謦咳言氣俱盡
008_0520_a_07L雲棲徃生集

008_0520_a_08L
魏勒那摩提華言寶意中天竺人
008_0520_a_09L文贍學明悟禪理以正始初至洛陽
008_0520_a_10L譯十地等論二十四卷師領受華音
008_0520_a_11L悟絶倫帝每令講華嚴精義頴發
008_0520_a_12L處高座忽有持笏執柬者形如尊官
008_0520_a_13L云天帝來請法師講華嚴經都講維那
008_0520_a_14L咸祈相赴時講席衆僧同見之師怡
008_0520_a_15L然微笑告衆辭訣化於法座其都講
008_0520_a_16L等僧亦同時入滅觀此知華嚴秘藏
008_0520_a_17L天人無不宗重如是

008_0520_a_18L
魏蜀僧法建禪行高特素持華嚴
008_0520_a_19L武陵王東下令弟規守益州魏遣將
008_0520_a_20L軍尉遲逈來伐蜀規旣降款城內名
008_0520_a_21L僧皆被拘禁至夜忽有光明燭天
008_0520_a_22L遣人尋光乃見諸僧並睡惟師端坐誦
008_0520_a_23L光從口出逈聞自到師所頂禮坐
008_0520_a_24L達旦始休因問法師夜誦何經

008_0520_b_01L
스님이 말하였다.
“『화엄경』입니다.”
위지형이 물었다.
“얼마나 염송할 수 있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빈도가 발심하여 대장경 전체를 염송하려 했으나 마음에 게으름이 많아 이제 겨우 천 권 정도입니다.”
위지형은 깜짝 놀랐다. 의심스럽고 믿기지 않아 시험해 보고 싶어 말했다.
“뜻을 굽혀 한 차례 염송해 주어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경을 염송하는 것은 사문의 일상적인 일입니다. 어찌 수고롭다며 꺼리겠습니까?”
이에 높은 자리를 마련하고는 모든 스님들에게 다들 경본經本을 들고 듣게 하였다. 스님은 자리에 올라 염송하였는데, 이레 밤만에 그 권수가 찼다. 이에 위지형이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고 아울러 모든 스님들을 석방하였다. 그러고 나서 감탄하였다.
“여래께서 입멸하신 후 아난이 부처님의 법문을 모두 암기해서 이보다 나은 이가 없었는데, 촉 땅에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항상 편안하고 안락할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속고승전續高僧傳』을 보라.
후위後魏의 사문 영변靈辨은 진양晋陽 사람이다. 전생부터 수승한 선업을 심었고, 항상 대승大乘을 읽었는데 『화엄경』을 보고는 받듦이 배나 더하였다. 이에 이 경을 머리에 이고 청량산淸凉山의 절로 들어가 문수사리文殊師利께서 남몰래 옹호하시기를 바라며 예배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발이 갈라져 피가 흐르고 살이 말라 뼈가 뚫고 나올 지경이 되었을 때 별안간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는 일단 멈추고 그저 지극한 마음으로 이 경을 사유하라. 그러면 저절로 깨달아 들어갈 곳을 얻으리라.”
스님은 그제야 책을 펼쳤고,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희평熙平 원년(516) 정월에 『화엄론華嚴論』을 지어 뜻을 설명하고 문장을 해석하였는데, 그윽한 곳을 끝까지 밝히고 심오한 곳을 꿰뚫었다. 모두 100권이며, 세상에 유통되어 전해지고 있다.
승려 덕원德圓은 천수天水 사람이며, 항상 『화엄경』을 학업으로 삼아 독송하고 수지하였다. 드디어 깨끗한 동산 하나를 마련하여 닥나무를 심고, 향기로운 풀과 사이사이 고운 꽃도 심었다. 매일 한 차례씩 동산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깨끗이 씻었으며, 정갈한 옷을 몸에 걸치고 향기로운 물을 주었다. 그리고 닥나무가 3년을 자라 향기가 사방에 풍기자 따로 집 한 채를 짓고 향긋한 진흙으로 땅을 골랐다. 그리고는 장인들에게 재계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혔으며, 들어가고 나갈 때 반드시 손 씻고 양치하고 향을 쬐게 하고는 닥나무 껍질을 벗겨 물에 가라앉히고

008_0520_b_01L曰華嚴經逈問誦得幾許師曰貧道發
008_0520_b_02L欲誦一藏情多懈怠今始得千卷
008_0520_b_03L逈驚疑不信將欲試之曰屈誦一
008_0520_b_04L應不勞損否師曰誦經沙門常事
008_0520_b_05L豈憚勞苦乃設高座令諸僧衆並執
008_0520_b_06L經本聽師登座宣誦七日夜數乃滿
008_0520_b_07L逈起謝別因並釋放諸僧旣而嘆
008_0520_b_08L如來滅後阿難是爲總持未能過
008_0520_b_09L蜀中乃有此人所以常保安樂
008_0520_b_10L偶然哉見續高僧傳

008_0520_b_11L
後魏沙門靈辨晋陽人宿植勝善
008_0520_b_12L讀大乘見華嚴經倍加鑚仰乃頂戴
008_0520_b_13L此經入淸凉山寺求文殊師利潜護
008_0520_b_14L拜禮歷歲足破血流肉盡骨穿忽聞
008_0520_b_15L空中云汝且止但至心思維此經
008_0520_b_16L得入處師于是披卷豁然大悟熙平
008_0520_b_17L元年正月造華嚴論演義釋文窮幽
008_0520_b_18L洞奧共百卷流傳於世

008_0520_b_19L
僧德圓天水人常以華嚴爲業讀誦
008_0520_b_20L受持遂修一淨園樹諸糓楮並種香
008_0520_b_21L雜以鮮花每一入園必加洗擢
008_0520_b_22L著淨衣漑以香水楮生三載香氣四
008_0520_b_23L別造一室香泥塗地令匠人齋戒
008_0520_b_24L易服出入必盥漱薰香剝楮取皮

008_0520_c_01L정갈한 것만 삶아 종이를 만들었는데, 꼬박 한 해가 다 가고야 완성되었다. 따로 정갈한 기단을 쌓아 새 집을 짓고는 방 안에 반듯한 백아좌栢牙座를 설치하여 꽃과 향으로 덮었고, 위에는 보배 일산을 달아 갖가지 구슬과 옥을 늘어뜨렸으며, 하얀 단향목과 자줏빛 침향목으로 경안經案을 만들고 아울러 붓대를 만드는 데 충당하였다. 사경하는 서생은 매일같이 재계하고 향탕에 세 번 목욕하였으며, 화관華冠을 쓰고 깨끗한 옷을 입었다. 사경하는 방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길 양쪽에서 향을 사르고 앞에서 범패를 하면서 그를 인도하였다. 스님 역시 몸과 옷을 매우 청결히 하고서 화로를 들고 공손히 인도하였다. 꽃을 뿌려 공양하고 비로소 사경을 시작하자 스님은 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직접 쓴다고 상상하면서 주목하고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자 겨우 몇 줄 사경하자마자 글자마다 모두 광명을 놓아 온 사원을 환하게 비췄으며, 한참을 그러고서야 비로소 멈췄다. 그리고 어떤 신인神人이 창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 경호하였는데, 그것을 덕원과 서생이 똑같이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또 푸른 옷을 입은 범천의 동자가 손에 하늘나라 꽃을 들고 공양하였다. 2년에 걸쳐 사경이 끝나자 향나무 함에 담아 보배 휘장에 안치하고는 매일같이 정례하였다. 그 후에 전독轉讀할 때마다 함에서 기이한 광채가 빛났다. 이 경전은 차례로 전수되었고 지금까지 5대째이다. 청정하게 전독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역시 신령스러운 감응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지금도 서태원西太原의 현수賢首 법사 처소에 여전히 남아 있다. 『회현기會玄記』를 보라.
후위後魏의 안풍왕安豊王 연명延明과 중산왕中山王 원희元熙 두 사람은 모두 종실의 빼어난 현군이다. 그들은 위없는 도에 마음을 두고 원종圓宗에 머리를 조아려 일찍이 향을 먹에다 섞어 『화엄경』 100부를 사경하고 금자金字 『화엄경』 한 부를 사경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모두 다섯 가지 향나무로 만든 장경각과 일곱 가지 보배로 만든 함에 보관하였다. 조용한 밤 맑은 날에 깨끗이 재계하고 행도行道29)하자 곧 신비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오색이 찬란하게 건물을 비추었다. 대중들이 모두 그것을 목격하였다.
후위後魏 문명文明 원년30)에 경조京兆 사람 왕명간王明幹이 병으로 절명하여 두 사람에게 잡혀 지옥地獄으로 끌려갔다. 문에 다다라 자기를 지장보살이라 칭하는 스님을 보았는데,

008_0520_c_01L以沉水濩淨造紙畢歲方成別築淨
008_0520_c_02L造新室堂中施方栢牙座用布香
008_0520_c_03L上懸寶盖垂諸玲珮白檀紫沉
008_0520_c_04L爲經案並充筆管書經生日受齋戒
008_0520_c_05L香湯三浴華冠淨服將入經室必來
008_0520_c_06L路焚香唄先引之師亦體服嚴潔
008_0520_c_07L爐恭導散花供養方乃書寫師又胡
008_0520_c_08L跪運想注目傾心纔寫數行每字皆
008_0520_c_09L放光明照徹一院久之方歇復有神
008_0520_c_10L執戟現形警衛圓與書生同見
008_0520_c_11L人則不覩焉又有靑衣梵童手執天花
008_0520_c_12L供養經二載書寫畢盛以香凾置諸
008_0520_c_13L寶帳每申頂禮後因轉讀凾發異光
008_0520_c_14L此經遞授於今五代有淸淨轉讀者
008_0520_c_15L時亦靈應昭然今尙在西太原賢首法
008_0520_c_16L師處見會玄記

008_0520_c_17L
後魏安豊王延明中山王元熙並以宗
008_0520_c_18L室英賢處心無上稽首圓宗嘗用香
008_0520_c_19L和墨寫華嚴經一百部金字華嚴經一
008_0520_c_20L皆五香爲藏七寶爲凾靜夜良辰
008_0520_c_21L淸齋行道即放神光五色照耀臺宇
008_0520_c_22L衆共親之

008_0520_c_23L
後魏文明元年京兆人王明幹因病
008_0520_c_24L致絶被二人引至地獄及門見一僧

008_0521_a_01L그가 “3세 모든 부처님을 분명히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하라.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드느니라.이는 진경晋經31)의 게송이다.”라는 게송을 가르쳐 주면서 말하였다.
“이 게송을 염송하는 자는 지옥의 온갖 고통을 물리칠 수 있다.”
왕명간이 그 말에 따라 염송하고는 지옥으로 들어가 대왕을 만났다. 왕이 물었다.
“너는 어떤 공덕을 지었느냐?”
“4구의 게송 하나를 수지했을 뿐입니다.”
곧 앞에서 들었던 그대로 낭송하자 대왕이 그를 방면하였다. 게송을 낭송하였을 때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지옥에서 고초를 겪던 사람들이 모두 해탈할 수 있었다. 왕명간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 이 게송을 기억해 내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때서야 그것이 『화엄경』에서 야마천궁夜摩天宮에 한량없는 보살들이 운집했을 때 설해진 것으로서 곧 각림覺林보살의 게송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당경唐經32)에는 아래 두 구절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일 뿐이다.”로 되어 있는데, 말은 비록 조금 다르지만 큰 뜻은 역시 동일하다. 이처럼 한 게송의 공으로도 지옥을 파괴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한 권 한 부의 심오하고 미묘함이겠는가. 『찬영기纂靈記』를 보라.
북제北齊의 중관中官33) 유겸지劉謙之는 고자인 것을 스스로 탄식하고 마음으로 불교에 귀의한 자였다. 태화太和34) 연간에 셋째 왕자가 청량산淸凉山에서 문수사리보살을 구하며 소신공양하였다. 유겸지가 그 일을 목격하고는 입산수도를 허락해 주십사 주청하게 되었다. 그는 『화엄경』 한 부를 지니고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예참하고 독송하였으며, 오묘한 깨달음을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음식과 물을 끊었다. 그렇게 하기 21일에 형상과 기운은 비록 시들어 갔지만 뜨거운 정성은 더욱 간절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감응하여 구레나룻과 콧수염이 자라면서 장부의 모습을 회복하였으며, 신비로운 광채가 빛나고 통달해 깨달아 심오한 뜻을 확연히 밝혔다. 드디어 정기를 모두 쏟아 이 경에 대한 논을 지었는데 모두 600권이었다. 이를 고조高祖에게 아뢰자 더욱 공경하고 믿게 되었으며, 화엄의 한 가르침이 이로 인해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수隋 선정도량禪定道場의 승려 혜오慧悟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일찍이 도상道祥이라는 한 스님과 종남산終南山에서 함께 은거하였는데, 스님은 『화엄경』을 수지하였고, 도상은 『열반경』을 수지하였다.

008_0521_a_01L稱是地藏菩薩敎之誦偈云若人欲了
008_0521_a_02L三世一切佛應當如是觀心造諸
008_0521_a_03L如來此晋
經偈
誦此偈者能排地獄諸苦
008_0521_a_04L因誦之入見王王問曰汝有何功德
008_0521_a_05L荅云惟受持一四句偈即朗誦如前
008_0521_a_06L遂放免當誦偈時聲所到處獄中受
008_0521_a_07L苦之人皆得解脫幹三日方甦憶持
008_0521_a_08L此偈向人說之方知是華嚴經夜摩
008_0521_a_09L天宮無量菩薩雲集所說即覺林菩薩
008_0521_a_10L偈也今唐經下二句云應觀法界性
008_0521_a_11L一切惟心造語雖稍別大意亦同
008_0521_a_12L一偈之功能破地獄况一卷一部之玄
008_0521_a_13L微哉見纂靈記

008_0521_a_14L
北齊中官劉謙之自嘆刑餘皈心佛乘
008_0521_a_15L太和中第三王子於淸凉山求文殊
008_0521_a_16L師利菩薩焚身供養謙之覩其事
008_0521_a_17L奏乞入山修道齎華嚴經一部晝夜精
008_0521_a_18L禮懴讀誦心祈妙悟絶粒飮水
008_0521_a_19L三七日形氣雖微丹懇彌切忽感髯
008_0521_a_20L髭盡生復丈夫相神彩通悟洞曉幽
008_0521_a_21L遂殫精造此經論共六百卷奏聞
008_0521_a_22L高祖倍加敬信華嚴一敎於斯轉盛

008_0521_a_23L
隋禪定道場僧慧悟京兆人嘗與一僧
008_0521_a_24L道祥同隱終南師受持華嚴祥受持

008_0521_b_01L나무 열매를 따먹고 바위에 깃들어 살면서 각자 한 가지 학업에 매진하였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안부를 묻고 말하였다.
“스님 한 분만 저희 집으로 오셔서 재齋에 참석해 주십시오.”
두 스님이 서로 추천하자 그가 말했다.
“『화엄경』을 염송하는 법사께 부탁드립니다.”
혜오가 이로 인해 따라갔는데 바로 산신山神의 처소였다. 천 명의 아라한을 초대하였지만 모두 스님을 상좌上座로 추대하였고, 식사를 마치고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산신이 한 동자를 불러 시중을 들게 하자 동자가 곧 명에 따라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께서는 입을 벌려 주십시오.”
그리고 입속을 살피고는 말하였다.
“스님은 큰 병이 있군요.”
동자는 손톱의 때를 긁어모아 스님의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깐 있다가 다시 스님에게 입을 벌리게 하고 살펴보면서 말하였다.
“병이 거의 나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펄쩍 뛰어 입속으로 날아 들어갔으니, 동자는 과연 약藥의 정령이었다. 스님은 드디어 신통을 얻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와 경을 집어 들고는 도상과 이별하고 아득히 허공을 밟고 떠나갔다.
수隋의 석령간釋靈幹은 성이 이李씨며 적도狄道 사람이다. 연衍 법사를 의지해 출가하였고, 나이 열여덟에 『화엄경』을 강의할 수 있었으며, 흥선사興善寺로 찾아가 역경하고 증의證義하는 사문이 되었다. 그 뒤 병에 걸려 죽었는데 며칠 뒤에 다시 살아나 말하였다.
“도솔천兜率天으로 가서 휴休와 원遠 두 법사35)를 보았는데 두 분 모두 연화대에 앉아 계셨으며 그 광채가 이 세상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나를 위해 모든 제자들에게 뒷날 다들 이곳에 태어날 것이라고 알려 달라’라고 말하였다.”
스님은 『화엄경』에 뜻을 두고 받들었으며, 항상 경에 의지해 화장관華藏觀과 미륵천궁관彌勒天宮觀을 익혔다. 병이 심해졌을 때, 눈을 위로 치켜뜨고 마치 뭔가를 보는 듯해 승려 동진童眞이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보이는데 도솔천으로 데려가려 하는구나. 하지만 천상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해 결국 윤회하는 세계로 떨어지고 말 것이니,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가 바로 내가 원하는 곳이다.”
그러고는 기력이 다했다가 잠시 뒤 다시 살아났다. 동진이 다시 물었다.
“지금은 뭐가 보입니까?”
“거대한 물이 사방에 가득하고 꽃이 수레바퀴만 한데,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말을 마치고는 서거하였다.
당唐의 원苑 율사는 경조 연흥사延興寺 승려이다. 정관貞觀 초(627)에

008_0521_b_01L涅槃木食巖栖各專一業忽一人來
008_0521_b_02L拜跪問訊云請一師就宅赴齋二僧相
008_0521_b_03L人云請讀華嚴法師悟因隨徃
008_0521_b_04L山神處也請千羅漢皆推師上座
008_0521_b_05L訖皆飛空去神呼一童子令侍童即依
008_0521_b_06L命謂師曰請師開口旣視口中乃云
008_0521_b_07L師大有病童取手爪上垢投師口內
008_0521_b_08L須臾復令師開口視之曰病已略盡
008_0521_b_09L躍身飛入口中童果是藥精師遂獲神
008_0521_b_10L還室取經辭道祥渺然履空而去

008_0521_b_11L
隋釋靈幹姓李狄道人依衍法師出
008_0521_b_12L年十八能講華嚴徃興善寺爲譯
008_0521_b_13L經證義沙門後遇疾死數日乃甦云
008_0521_b_14L徃兠率天見休遠二法師並坐華臺
008_0521_b_15L光輝絶世謂幹曰爲我報諸弟子
008_0521_b_16L皆生此師志奉華嚴常依經作華藏觀
008_0521_b_17L及彌勒天宮觀至於疾甚目上視
008_0521_b_18L有所見僧童眞問之荅曰向見靑衣童
008_0521_b_19L引至兠率而天樂非久終墜輪廻
008_0521_b_20L蓮花藏是所願也旣而氣盡須臾復甦
008_0521_b_21L眞又問今何所見荅曰見大水徧滿
008_0521_b_22L華如車輪而坐其上吾願足矣言畢
008_0521_b_23L而逝

008_0521_b_24L
唐苑律師京兆延興寺僧以貞觀初

008_0521_c_01L파교灞橋를 지나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서 머물게 되었다. 조금 있다가 위의와 복장이 추하고 지저분한 기이한 승려가 찾아와 주인이 따로 마련한 방에서 자고 가게 되었는데, 그는 결국 독한 술과 기름진 고기를 가져다 거리낌 없이 먹고 마셨다. 이에 계율을 엄격히 지키던 율사는 울컥하며 그를 더럽게 여겼다. 그 스님은 다 먹고 나서 물로 입을 헹구고는 방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화엄경』을 염송하기 시작했다. 먼저 품의 제목을 밝힌 다음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제국摩竭提國에 계시는데”라는 구절을 염송하자 그 스님의 양쪽 입 꼬리에서 동시에 금빛 광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3경에 이르러 제4질이 거의 끝날 무렵엔 입에서 나오는 광명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으며, 제5질 다음부터는 그 광명이 점점 사그라져 그 스님의 입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5경이 채 되기 전에 여섯 질즉 60권이니 진경晋經 전부이다.의 염송을 마치고서야 그 스님은 자리에 누웠다. 곁에서 현묘한 음성을 들은 율사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부끄러워하였으며, 슬픔과 후회가 교차하였다. 날이 밝자 그의 방으로 들어가 예배하고 참회하면서 그의 이름을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고, 그렇게 헤어진 뒤로는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감응전感應傳』에서 말하였다.
“감응을 기록할 때 마침 어떤 미치광이가 곁에 있다가 물었다.
‘저도 술과 고기를 끊지 못하는데 그 신비한 스님을 본받아 『화엄경』을 염송하면 될까요?’
대답하였다.
‘그대는 하룻밤에 『화엄경』을 염송하며 5경이 채 되기 전에 여섯 질을 완전히 끝낼 수 있는가? 그대는 밤에 경을 염송하며 입에서 광명을 놓아 등촉을 대신할 수 있는가? 그대는 새우를 먹었던 주선酒仙처럼, 비둘기를 먹었던 지誌 공처럼 토하여 다시 살려 낼 수 있는가? 그대가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신승神僧의 행동을 흉내 내어 성현을 기만한다면 그 죄가 창해보다 깊으리니 그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는가?’
이에 미치광이가 참회하고 사죄하며 물러갔다.”
당唐의 해탈解脫 화상은 성이 형邢씨며 대주代州 오대현五臺縣 사람이다. 일곱 살에 출가하였고, 처음부터 혜초慧超 선사를 따르며 정업定業에 대해 물었다. 혜초가 그를 그릇으로 여겨 대중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해탈의 조화로운 수습은 일체와 혼융하고 밝으니, 너희들이 벗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오래지 않아 크게 깨달을 것이다.”
후에 오대산五臺山36) 서남쪽 불광사佛光寺에 정사를 짓고 오로지 『화엄경』만 염송하였다. 또 경에 의지해

008_0521_c_01L途經灞橋日夕舍于逆旅俄有異僧至
008_0521_c_02L儀服麁敞止宿主人別房遂取醇酒良
008_0521_c_03L快意飮噉律師持潔勃然穢之
008_0521_c_04L僧食已乃索水漱口閉戶端坐而誦華
008_0521_c_05L初標品題次誦如是我聞一時佛在
008_0521_c_06L摩竭提國僧兩口角俱放光明如金
008_0521_c_07L比至三更四帙欲滿口中光明更
008_0521_c_08L至五帙已上其光漸收却入僧口
008_0521_c_09L未及五更誦終六帙即六十卷
晋經全部
僧乃却臥
008_0521_c_10L律師側聽玄音束身抱愧悲悔交懷
008_0521_c_11L天明入房禮懴詢其名字不荅分袂後
008_0521_c_12L莫知所之感應傳云錄感應時適有
008_0521_c_13L狂者在傍問曰某不斷酒肉効彼神僧
008_0521_c_14L持誦華嚴可乎荅曰汝一夜誦經未至
008_0521_c_15L五更能滿六帙乎汝夜誦經能放口
008_0521_c_16L以代燈燭乎汝能若酒仙之食蝦
008_0521_c_17L誌公之噉鴿吐而復活乎汝皆不能
008_0521_c_18L妄效神僧行事欺誑聖賢罪深滄海
008_0521_c_19L其何能逃於是狂者慙謝而退

008_0521_c_20L
唐解脫和尙姓邢氏代州五臺縣人
008_0521_c_21L七歲出家初從慧起 [2] 禪師詢定業
008_0521_c_22L器之告衆曰解脫調習融明非爾軰
008_0521_c_23L所隣也未幾大獲啓悟後于五臺西南
008_0521_c_24L佛光寺立精舍專誦華嚴復依經作

008_0522_a_01L불광관佛光觀을 행하면서 여러 해 대부사大孚寺에 머물며 문수를 친견코자 하였다. 그러자 문수가 나타나 가르침을 주었다.
“그대는 이제 예배하고 우러러볼 필요가 없다. 스스로 깨우치고 다그친다면 분명 크게 깨달을 것이다.”
그 후 이로 인하여 돌이켜 구해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아울러 법의 희열을 얻게 되었다. 드디어 널리 제도하려는 비원을 품고서 대각大覺께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이 마음을 증명해 주십사 청하였다. 그러자 이에 감응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나타나 게송을 설하셨다.

諸佛寂滅甚深法  모든 부처님의 적멸하고 너무도 깊은 법
曠刼修行今乃得  오랜 겁에 수행하여 지금에야 얻었구나.
若能開曉此法眼  만약 이 법안을 뜨고 깨달을 수 있다면
一切諸佛皆隨喜  일체 모든 부처님 다들 따라 기뻐하리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공 가운데의 적멸한 법을 사람들에게 설하여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모든 부처님께서 곧 모습을 감추고 소리로만 말씀하셨다.

方便智爲燈    방편의 지혜를 등불로 삼아
照見心境界    마음의 경계를 환히 비춰 보라.
欲究眞實法    진실한 법을 궁구하고 싶은가.
一切無所見    보아야 할 것이 일체 없느니라.

또 본주도독本州都督이 향기를 전하고 계를 주십사 청해 법으로 교화하기를 마치고 동쪽으로 돌아갈 즈음이었다. 도독과 대중이 전송하며 성 동쪽에 다다랐는데 해가 저물어 향을 사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성 위쪽 허공에서 소리가 들렸다.

合掌以爲花    합장을 꽃으로 삼고
身爲供養具    몸을 공양구로 삼으라.
善心眞實香    착한 마음이 진실한 향이니
讃歎香烟布    찬탄의 향 연기 가득 퍼지네.
諸佛聞此香    모든 부처님 이 향기 맡으시고
尋聲來相度    소리 듣고 찾아와 서로 제도하나니
衆等勤精進    대중이여,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終不相疑誤    끝내 의심하거나 잘못 알지 말라.

옛 전적37)에서는 제목을 ‘공을 배격한 것을 게송으로 찬탄하다(偈讃排空)’라고 하였다.
당의 석법성釋法誠은 성이 번樊씨며 옹주雍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화엄경』 염송으로 과업을 삼았으며, 혜초 선사를 만난 인연으로 남곡藍谷에 은거하였다. 그 뒤 남령南嶺에 화엄당華嚴堂을 지어 갖가지를 빠짐없이 갖추고 매우 청결히 하고는 『화엄경』 7처 9회의 도상을 그렸으며, 홍문관弘文舘 서생 장정張靜을 초청하여 경 전체를 공경히 사경하였다. 스님이 직접 향로를 받들고 오로지 정진하며 예배하고 정대하자 형체와 빛깔이 기묘한 상서로운 새가 홀연히 나타나 꽃을 물고 방으로 들어와서는 주위를 돌며 공양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오롯한 마음의 감응이라 하였다.
당의 승려 변재辨才는 어려서 유裕 법사를 모시며 매일 오로지 『화엄경』만 익히면서 과업으로 삼았지만

008_0522_a_01L佛光觀屢住大孚寺求見文殊文殊
008_0522_a_02L現身誨云汝今不須禮覲可自誨責
008_0522_a_03L必當大悟後因反求乃悟無生兼得
008_0522_a_04L法喜遂慨思弘濟祈誠大覺請證此
008_0522_a_05L感諸佛現爲說偈曰諸佛寂滅甚
008_0522_a_06L深法曠刼修行今乃得若能開曉此法
008_0522_a_07L一切諸佛皆隨喜師更問空中寂
008_0522_a_08L滅之法可說得敎人耶諸佛即隱
008_0522_a_09L有聲告曰方便智爲燈照見心境界
008_0522_a_10L欲究眞實法一切無所見又本州都督
008_0522_a_11L請傳香受戒法化旣畢將東皈都督
008_0522_a_12L及衆送至城東日暮思欲焚香忽聞
008_0522_a_13L城上空中聲曰合掌以爲花身爲供養
008_0522_a_14L善心眞實香讃歎香烟布諸佛聞
008_0522_a_15L此香尋聲來相度衆等勤精進終不
008_0522_a_16L相疑誤故舊傳題云偈讃排空也

008_0522_a_17L
唐釋法誠姓樊雍州人幼出家以誦
008_0522_a_18L華嚴爲課因遇慧超禪師隱居藍谷
008_0522_a_19L後於南嶺造華嚴堂備致嚴潔乃啚
008_0522_a_20L畫本經七處九會之像延弘文舘書生
008_0522_a_21L張靜敬寫全經師親捧香爐專精禮
008_0522_a_22L忽見有瑞鳥形色殊異啣花入室
008_0522_a_23L旋繞供養時以爲精心所感

008_0522_a_24L
唐僧辨才幼事裕法師日惟課習華嚴

008_0522_b_01L오래도록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정성을 다해 향나무로 함을 만들어 경을 담고는 정수리에 이고 행도하였다. 이렇게 3년을 경과하자 꿈에 보현보살이 현묘한 뜻을 지적해 주어 한순간에 염송할 수 있게 되었고, 거울을 보듯 확연해졌다.
당의 석법공釋法空은 수隋나라 말엽 안문雁門의 낭장朗將이었다. 그는 가정을 버리고 청량산 깊은 골짜기에 이르러 “오직 마음이 부처를 만든다.”는 『화엄경』 게송을 항상 염송하였다. 그러다 후에 기이한 스님을 만나 반야의 현묘한 종지를 전수받고는 활연히 마음이 공해졌고, 임종 때도 앉아서 서거하였다. 『운서감응략기雲栖感應略記』38)를 보라.
당의 승가미다라僧伽彌多羅는 사자국師子國39) 사람이다. 제3과를 증득하고 인덕麟德 초(664)에 진단震旦으로 오자 고종高宗이 극진히 공경하고 예를 갖췄다. 뒤에 문수보살을 공경하고 예배하고자 청량산으로 찾아갔고, 이로 인해 서태원사西太原寺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그곳 스님들이 모두 『화엄경』을 염송하자 스님이 물었다.
“그건 무슨 경입니까?”
“『화엄경』입니다.”
스님은 숙연히 태도를 고치고 말하였다.
“이 땅에도 이 경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래도록 합장 찬탄하고는 말하였다.
“이 대방광불의 공덕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저 서쪽 나라에서는 ‘이 경을 읽은 사람이 손을 물로 씻고 그 물을 벌레나 개미에게 뿌리면 그것들 가운데 목숨을 버리는 것들이 모두 천상에 태어난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물며 수지 독송하고, 정진하며 사유하는 자들이겠습니까.”
당의 두순杜順 화상은 성이 두杜씨고 휘는 법순法順이며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지조와 행실이 고결하고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으며, 오로지 『화엄경』으로써 학업을 삼았다. 어린 시절에 집 뒤 무덤 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였고 들은 사람이 모두 대승을 깨달았는데, 설법했던 그 무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또 종남산終南山에서 『화엄경』에 담긴 뜻을 모두 모아 『법계관문法界觀文』를 지을 당시에는 바다처럼 드넓은 회상의 보살들이 몸을 나타내어 찬탄하는 감응이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후 불더미에 태웠는데도 성인의 마음에 계합하여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다. 산중에 거처하면서 아욱을 심으려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땅에 벌레와 개미들이 많았다. 스님이 이에 밭두둑을 돌며 자리를 정하자 벌레들이 곧바로 밖으로 옮겨 갔다.

008_0522_b_01L久而不悟乃虔造香凾盛經頂戴行道
008_0522_b_02L凡經三載夢普賢指授玄義忽爾成誦
008_0522_b_03L煥若臨鏡

008_0522_b_04L
唐釋法空隋末雁門朗將也棄家詣淸
008_0522_b_05L凉深谷常誦華嚴唯心作佛之偈後遇
008_0522_b_06L異僧授以般若玄旨豁爾心空臨終
008_0522_b_07L坐逝見雲栖感應略記

008_0522_b_08L
唐僧伽彌多羅師子國人證第三果
008_0522_b_09L麟德初來震旦高宗甚加敬禮後徃淸
008_0522_b_10L凉敬禮文殊因至西太原寺時屬諸
008_0522_b_11L僧誦華嚴經師問是何經荅曰華嚴
008_0522_b_12L師肅然改容曰不謂此地亦有是經
008_0522_b_13L合掌讃歎久之曰此大方廣佛功德難
008_0522_b_14L西國相傳有人讀此經以水盥掌
008_0522_b_15L水霑蟲蟻其捨命者皆得生天何況
008_0522_b_16L受持讀誦精進思惟者歟

008_0522_b_17L
唐杜順和尙姓杜氏諱法順京兆杜
008_0522_b_18L陵人操行高潔學無常師專以華嚴
008_0522_b_19L爲業童子時於宅後塚上爲衆說法
008_0522_b_20L聞者皆悟大乘至今說法塚存焉又於
008_0522_b_21L終南山集華嚴所詮之義作法界觀文
008_0522_b_22L時感海會菩薩現身讃嘆旣成聚火焚
008_0522_b_23L契合聖心一字無損居山中甞欲
008_0522_b_24L種葵地多蟲蟻師乃巡疆定封蟲即

008_0522_c_01L그래서 한 생명도 손상시키는 일 없이 밭을 개간할 수 있었다. 삼원현三原縣에 태어나면서부터 농아인 백성이 있었는데, 스님이 그를 불러 말을 건네자 대꾸하여 곧바로 치유되었다.
한번은 남산으로 가는 길에 가로지르는 도랑을 만났는데 그 물결이 아득히 넘실거렸다. 그러자 그는 물살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느린 걸음으로 건너갔다. 돌아가시던 날 인연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음성과 얼굴빛에 별반 변화가 없이 담담하게 입적하였다. 번천樊川 북원北原에 장사지냈으며, 지금은 전신탑全身塔이 장안長安 남화엄사南華嚴寺에 있다. 별전에서는 그를 문수보살의 화신이라 하였다.
당나라 때 우전국 삼장 실차난타實叉難陀는 중국말로 희학喜學이다. 그는 증성證聖 원년(695) 3월 14일 신유辛酉에 동도東都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화엄경』을 재차 번역하기 시작하여 성력聖曆 2년(699) 10월 8일에 경전의 새 번역을 마쳤다. 『지도론智度論』을 살펴보면 이를 『부사의경不思議經』이라 하고 10만 게송이라 하였으며, 『양섭론梁攝論』40)에서도 역시 『백천41)경百千經』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전 진晋나라 때 번역된 것은 3만 6천 게송에 그쳤으니, 이른바 반쪽짜리 구슬과 같은 법령法領이었다. 그래서 그때 우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범본을 맞이해서는 스님에게 드려 재차 번역하게 하였고, 아울러 예전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게 하였다. 이에 더해진 부분을 계산해 보니 9천 송이었고, 구본과 합하면 총 4만 5천 송이었다. 이것이 당본唐本 80권 39품 9회이다. 전傳에서는 “법장法藏42)이 열 종류의 경經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약본경略本經이니, 곧 지금 두 가지 번역의 저본이다. 총 10만 게송을 요약한 것으로서 완전히 다 번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회상의 화장세계華藏世界에 대한 설명이 진본晋本에서는 빠지고 축약된 문장이 많았는데, 80권본에 이르러 비로소 문맥이 환히 통하고 또 찬란히 정비되었다. 당시 대덕이었던 의정義淨 삼장ㆍ홍경弘景 선사ㆍ원측圓測ㆍ신영神英ㆍ법보法寶ㆍ현수賢首 등 여러 법사가 함께 번역하였고, 복례復禮 법사가 문장을 지었다. 신유일辛酉日에 번역을 시작하였고, 하루 다음인 임술일壬戌日에 하늘에서 감로가 내리는 서응이 있었다.

008_0522_c_01L外徙由是耕墾一無所損三原縣有
008_0522_c_02L生而聾啞師召之與語應言便愈
008_0522_c_03L因詣南山値橫渠張溢止之斷流
008_0522_c_04L步而過將終之日普會有緣聲色不
008_0522_c_05L泊焉入寂葬樊川北原今全身塔
008_0522_c_06L在長安南華嚴寺別傳云是文殊化身
008_0522_c_07L

008_0522_c_08L
唐于闐國三藏實叉難陀華云喜學
008_0522_c_09L聖元年三月十四日辛酉於東都佛授
008_0522_c_10L記寺重譯華嚴至聖曆二年十月八日
008_0522_c_11L譯新經訖按智度論名此爲不思議經
008_0522_c_12L有十萬偈梁攝論亦名百千經前晋
008_0522_c_13L譯止三萬六千偈所謂法領半珠者也
008_0522_c_14L是時遣使之于闐迎梵本至師再加翻
008_0522_c_15L兼補前闕計益九千頌合舊總四
008_0522_c_16L萬五千頌爲唐本八十卷三十九
品九會
傳云
008_0522_c_17L法藏有十類經其一略本經即今兩譯
008_0522_c_18L本也皆十萬偈中之略以譯未盡故
008_0522_c_19L然第一會所說華藏世界晋本文多闕略
008_0522_c_20L至八十卷始獲通曉亦燐然備矣
008_0522_c_21L有大德義淨三藏弘景禪師圓測神英
008_0522_c_22L法寶賢首諸法師同譯復禮法師
008_0522_c_23L自辛酉初譯越一日壬戌有天降
008_0522_c_24L甘露之應

008_0523_a_01L
당의 법장法藏 화상은 자字가 현수賢首이고 속성이 강康씨며 강거국康居國43) 사람이다. 처음 어머니가 꿈에 기이한 빛을 보고서 잉태하였고, 태어나서는 위없는 도를 사모하였다. 그 후 운화사雲華寺에서 『화엄경』을 강설하는 엄儼 화상44)이란 이가 있었다. 스님은 한밤중에 문득 신비한 빛이 다가와 집과 마당을 환히 비추는 것을 보고 “분명 대교大敎를 널리 드날리는 기이한 사람이 있으리라.”라고 찬탄하였는데, 다음날 엄 화상을 만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가슴으로 절복하고 다함이 없는 법문에 깊이 들어갔다. 성력聖曆 2년(699) 10월에 신역 『화엄경』이 완성되자 스님에게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강석을 열라는 칙명이 내렸다. 12월 12일 강의가 「화장지계품華藏地界品」에 이르자 강당과 사원의 땅이 갑자기 모두 진동하였고, 스님과 속인 수천 명이 함께 이를 목격하고는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찬탄하였다. 또 운화사에서 강석을 열었을 때에는 하얀빛이 입에서 나와 잠깐 사이 일산이 되어 온갖 만상이 뛸 듯이 기뻐한 일이 있었다. 이에 앞서 총장總章 원년(668)에 서역에서 삼장인 어떤 범승梵僧이 수도 낙양에 이르러 고종高宗이 공경히 섬긴 일이 있었다. 스님이 당시 동자童子로서 삼장에게 정례하고 보살계 받기를 청하자 대중이 삼장에게 말하였다.
“이 동자는 『화엄대경華嚴大經』을 염송할 수 있고 아울러 그 뜻까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삼장은 깜짝 놀라며 감탄하였다.
“일승一乘인 화엄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비장秘藏으로서 만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그 뜻까지 통하였단 말인가. 만약 『화엄경』 「정행품淨行品」 한 품을 염송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보살의 청정한 계율을 구족한 것이니, 다시 보살계를 받지 않아도 된다.”
천수天授 연간(690~692)에 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하는데 삿됨과 올바름을 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도사道士가 거친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세수를 하자 그의 눈썹과 머리카락이 몽땅 빠졌고, 그때서야 마음으로 뉘우치고 삼보에 귀의하여 공경하였다. 그는 『화엄경』을 수지하며 백 번을 염송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그런데 열 번도 채 마치기 전에 홀연히 눈썹과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는 감응이 있었다.
당의 정주定州 중산中山의 수덕修德 선사는 힘든 상황에서도 절개를 지키는 성품이었다. 그는 산림에서 도를 지키며 오로지 화엄으로 학업을 삼았다. 영휘永徽 4년(653)에 사경하려는 마음을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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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法藏和尙字賢首俗姓康氏康居
008_0523_a_02L國人初母夢異光而孕及生而慕無上
008_0523_a_03L後有儼和尙講華嚴於雲華寺師至中
008_0523_a_04L忽見神光來燭庭宇歎曰當有異
008_0523_a_05L發弘大敎及明乃遇儼和尙自是
008_0523_a_06L伏膺深入無盡聖曆二年十月新譯
008_0523_a_07L華嚴經成敕師於佛授記寺開講十二
008_0523_a_08L月十二日講至華藏地界品講堂及寺
008_0523_a_09L院中地忽皆震動道俗數千共覩
008_0523_a_10L未曾有又於雲花寺開講有白光自口
008_0523_a_11L須臾成盖萬象歡躍先是總章元
008_0523_a_12L西域有三蔣梵僧來至京洛高宗
008_0523_a_13L敬事師時爲童子頂禮三藏請受菩
008_0523_a_14L薩戒衆白三藏曰此童子能誦華嚴大
008_0523_a_15L兼解其義三藏驚嘆曰華嚴一乘
008_0523_a_16L是諸佛秘藏難可遭遇况通其義
008_0523_a_17L有人誦得華嚴凈行一品其人已得菩
008_0523_a_18L薩凈戒具足不復更受菩薩戒矣天授
008_0523_a_19L師講華嚴經因論邪正有道士
008_0523_a_20L發粗言明朝洗面眉髮俱落方生悔
008_0523_a_21L皈敬三寶發誓受持華嚴經一百遍
008_0523_a_22L尙十遍未畢忽感眉髮重生

008_0523_a_23L
唐定州中山修德禪師苦節成性守道
008_0523_a_24L山林專以華嚴爲業永徽四年發心

008_0523_b_01L따로 깨끗한 동산을 지었으며, 닥나무를 심어 향수로 3년을 길러서는 정갈하게 종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깨끗한 대臺를 따로 신축하고 글씨를 잘 썼던 위주潙州의 왕공王恭을 불렀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는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고 온갖 번기와 일산을 달았으며, 경에 예배하고 참회한 다음에야 자리에 올랐다. 붓으로 글씨를 쓸 때는 향을 머금었다가 붓을 뗀 다음에야 호흡을 토하면서 매일같이 항상 이렇게 하였다. 스님도 그 방에 들어가 그를 따라 생각을 움직였으며, 한 권 사경할 때마다 비단 열 필을 주었지만 왕공은 모두 받지 않았다. 사경이 끝나 대중을 모아 재를 지내고 축하하는 자리에서였다. 스님이 대중 앞에서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드넓은 서원을 일으킨 다음 비로소 경장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큰 광명이 쏟아져 나와 정주성定州城 70여 리를 두루 비췄다. 이에 산중에서 재를 지내던 대중과 모든 신남 신녀들이 온몸을 던지면서 슬피 참회하였으며, 받들어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회현기』를 보라.
당 성력聖曆 연간(698~700)에 삼장법사 실차난타가 말하였다.
“구자국龜玆國45)에서는 소승만 익혀 석가모니께서 백억으로 분화해 갖가지 몸을 구름처럼 나타내신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다 어떤 범승梵僧이 천축에서 『화엄경』 범본을 가지고 그 나라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소승을 신봉하던 스님들은 어느 누구도 믿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범승은 결국 그 경을 남겨 두고 돌아갔고, 소승을 신봉하던 스님들은 이에 그 경을 우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우물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불덩이처럼 찬란했다. 그날 밤 그것을 목격한 스님들은 금덩이가 아닐까 생각하였는데, 날이 밝아서 우물에 들어가 건져 오게 하자 바로 전날 버렸던 『화엄경』이었다. 모든 스님들은 그 이적에 깜짝 놀라 결국 경장經藏에 포함시키고 중단의 감실龕室 안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다른 날 문득 이 경이 경장 중 가장 높은 단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여러 스님들이 ‘이것 역시 우리 석가모니께서 설하신 것이긴 하다. 우리가 약간의 이적을 보았기에 경장에 포함시키고 중단의 감실에 두었는데, 누가 재빨리 이 상단으로 옮겼을까?’ 하고는 다시 하단의 감실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장경각 문을 잠그고는 열쇠를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문을 열고 살펴보자 또 상단에 있었다. 이에 모든 스님들이 비로소 일승 대교의 위의와 영험이 이와 같음을 깨닫고는 지난 일을 후회하며 믿고 사모하였으며,

008_0523_b_01L抄寫別爲淨院植楮樹歷三年灌以
008_0523_b_02L香水潔淨造紙復別築淨臺召善書
008_0523_b_03L人潙州王恭齋沐淨衣焚香布花
008_0523_b_04L諸旛盖禮經懴悔方升座焉下筆含
008_0523_b_05L擧筆吐氣每日恒然師因入室運
008_0523_b_06L每寫一卷施縑十疋恭皆不受
008_0523_b_07L畢集衆設齋慶之師於衆前燒香散
008_0523_b_08L發弘誓願纔開經藏放大光明
008_0523_b_09L七十餘里照定州城山中齋衆及諸
008_0523_b_10L士女投身悲悔無不敬仰見會玄記

008_0523_b_11L
唐聖曆中三藏法師實叉難陀云龜玆
008_0523_b_12L國惟習小乘不知釋迦分化百億
008_0523_b_13L種種身雲有梵僧從天竺持華嚴梵本
008_0523_b_14L至其國中小乘師等皆無信受梵僧
008_0523_b_15L遂留經而歸小乘諸師乃以經投棄於
008_0523_b_16L旣而井中發光赫如火聚其夜諸
008_0523_b_17L師覩之疑謂金寶至明使入漉取
008_0523_b_18L前所棄華嚴經也諸師驚異遂收歸經
008_0523_b_19L置中龕內他日忽見此經在藏中
008_0523_b_20L最上隔諸師自言此亦我釋迦所說
008_0523_b_21L吾見有小異乃收入藏中龕何人輒移
008_0523_b_22L此上隔乃更置下龕鎻藏門嚴掌鎻
008_0523_b_23L明日開視則仍在上隔矣諸師方
008_0523_b_24L悟一乘大敎威靈如此追悔信慕

008_0523_c_01L화엄이라는 하나의 경이 드디어 여러 나라에 성행하게 되었다.”
『영사감응전英師感應傳』을 보라.
당 숭복사崇福寺의 승려 혜우慧祐는 계행이 정밀하고 엄격했으며, 엄儼 화상을 모시고 오로지 화엄만 학습하였다. 매일 청명한 새벽과 상큼한 밤이면 향을 사르고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을 열심히 염송하였는데, 홀연히 10여 명의 보살이 땅에서 솟아올라 금색의 몸을 나타내고 모두들 광명을 놓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연화좌에 앉아 합장하고 염송을 듣다가 경이 끝나면 사라지곤 하였다.
당의 석도영釋道英은 포주蒲州 진陳씨이다. 나이 열여덟에 양친이 결혼을 시켰지만 5년을 함께 살면서도 맹세코 서로를 범하지 않았다. 그 후 병주并州 거炬 법사로부터 『화엄경』을 듣고 곧바로 머리를 깎고는 태항산大行山 백제사栢梯寺로 들어가 지관止觀을 수행하였다. 한번은 지독한 가뭄으로 『화엄경』을 강의해 감로의 은택이 있기를 기원한 적이 있었다. 이때 어떤 두 노인이 각자 두 동자의 시중을 받으며 때맞춰 찾아와 강의를 듣고는 하였다. 도영이 이상해 그들에게 묻자 대답하였다.
“제자들은 둘 다 해신海神입니다. 이 경을 좋아해 일부러 들으러 온 것입니다.”
스님이 말했다.
“지금 단월檀越들께 경을 강설해 주었으니 가랑비라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노인이 두 동자에게 명을 내리자 동자는 곧 창문 구멍으로 나갔고, 잠깐 사이에 큰비가 퍼부어 원근이 모두 혜택을 입었다. 두 노인은 절하고 물러나 홀연히 사라졌다.
당의 청량淸凉 국사는 휘가 징관澄觀이고 자는 대휴大休며 회계會稽 하후씨夏侯氏이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무인戊寅(738)에 태어났는데 신장이 9척 4촌에 손을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고, 치아가 40개에 눈빛이 밤에도 번쩍이고 낮에는 깜빡이지도 않았다. 건중建中 2년(781)에 오대五臺에 머물며 『화엄소華嚴䟽』를 저술하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금용산金容山 마루에 빛이 환한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그것이 광명변조의 징후임을 알았다. 이때부터 붓을 놓고 생각하는 일이 없어졌고, 그렇게 4년이 경과하자 글이 완성되었다. 또 몸이 용으로 변화하여 남대南臺에 머리를 세우고 북대北臺에 꼬리를 서리고는 허공에서 구불구불 요동치더니 잠깐 사이에 10만 마리로 변해

008_0523_c_01L嚴一經遂盛行諸國見英師感應傳

008_0523_c_02L
唐崇福寺僧慧祐戒行精苦事儼和尙
008_0523_c_03L專業華嚴每淸晨良宵焚香虔誦如來
008_0523_c_04L出現品忽見十餘菩薩從地涌出
008_0523_c_05L金色身皆放光明坐蓮華座合掌聽
008_0523_c_06L經訖乃隱

008_0523_c_07L
唐釋道英蒲州陳氏年十八二親爲之
008_0523_c_08L五載同居誓不相犯後從并州炬
008_0523_c_09L法師聽華嚴經便落髮入大 [3] 行山栢
008_0523_c_10L梯寺修行止觀甞因亢旱講華嚴經
008_0523_c_11L以祈甘澤有二老翁各二童子侍
008_0523_c_12L來聽講英異而問之荅云弟子並是海
008_0523_c_13L愛此經故來聽受師曰今爲檀越
008_0523_c_14L講經請下微雨翁敕二童童即從窗
008_0523_c_15L孔中出須臾大雨霶霈遠近咸賴焉
008_0523_c_16L二翁拜謝倐然而滅

008_0523_c_17L
唐淸凉國師諱澄觀字大休會稽夏
008_0523_c_18L侯氏生於玄宗開元戊寅身長九尺四
008_0523_c_19L垂手過膝口四十齒目光夜發
008_0523_c_20L乃不瞬建中二年栖止五臺下筆著
008_0523_c_21L華嚴䟽一日夢金容山峙光相瑩然
008_0523_c_22L旣覺知是光明徧照之徵自是筆無停
008_0523_c_23L歷四年而文成又夢化身爲龍
008_0523_c_24L首南臺尾蟠北臺宛轉凌虛須臾變

008_0524_a_01L푸른 하늘에서 꿈틀거리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꿈을 꾸었다. 식자들은 이를 널리 유통될 징조라 하였다. 처음 대중에게 강의할 때, 아름다운 구름이 하늘에 맺혀 빙빙 돌면서 그늘을 드리운 감응이 있었다. 『소초疏鈔』 외에 다시 『수경手鏡』 100권ㆍ『화엄강요華嚴綱要』 3권ㆍ『정요正要』 1권ㆍ『법계관현경法界觀玄鏡』 1권ㆍ『경등설문鏡燈說文』 1권ㆍ『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 1권ㆍ『칠처구회화장세계도七處九會華藏世界圖』ㆍ『심경설문心鏡說文』 10권을 찬술하였다.
정원貞元 연간(785~805)에 자리를 마련하고 초청하자 내전內殿에 들어가 법좌에 올라 화엄의 종지를 널리 드날렸다. 이에 담당자에게 칙령을 내려 도장을 주조하고 국사로 천거하였으며, 호를 청량이라 하였다. 개성開成 3년(838) 3월에 입적하였으니, 살아서 아홉 왕조를 겪었으며 일곱 황제의 스승이었으며 춘추 102세에 승랍 88세였다. 종남산에 탑을 세워 전신을 모셨는데, 얼마 후 어떤 범승이 대궐로 찾아와 표를 올렸다.
“총령葱嶺에서 허공을 날아가는 두 사신을 보고는 주문을 외워 세우고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북인도 문수당文殊堂의 신인데 동방에서 화엄 보살華嚴菩薩의 어금니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공양하려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교지를 내려 탑을 열어보았더니 과연 이빨 하나가 사라져 서른아홉 개뿐이었다. 드디어 다비를 하자 사리가 영롱한 빛을 뿜고 혀가 붉은 연꽃 같았다. 이에 청량국사묘각지탑淸凉國師妙覺之塔이라는 시호를 더하였다. 『소초疏鈔』의 「연기행적緣起行蹟」을 보라.
당의 석성혜釋城慧는 영구靈丘 이李씨의 아들로서 그의 부모가 오대산에 기도해 낳았다. 장성해 부모와 이별하고는 오대산 진용원眞容院으로 찾아가 법순法順 화상을 따라 법복을 입고 머리를 깎았다. 일찍이 이우곡李牛谷에서 『화엄경』을 염송하며 풀과 나무 열매로 음식을 삼은 적이 있었는데, 매번 경을 염송할 때마다 유생 복장을 한 자들이 다섯이나 일곱 정도가 앉아서 듣곤 하였다. 그들이 여러 차례 기이한 꽃과 신선한 과일을 가져와 바치자 스님이 이상하게 여겨 그들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희는 산신山神입니다. 스님의 법력을 입고 갚을 길이 없으니 스님의 시종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스님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결국 그곳을 떠났다. 『운서감응략기雲栖感應略記』를 보라.

008_0524_a_01L百千數蜿蜒靑冥分散四方而去
008_0524_a_02L者以爲流通之象初爲衆講感景雲凝
008_0524_a_03L盤旋成盖䟽鈔外復撰手鏡一百
008_0524_a_04L華嚴綱要三卷正要一卷法界觀
008_0524_a_05L玄鏡一卷鏡燈說文一卷三聖圓融觀
008_0524_a_06L一卷七處九會華藏世界啚心鏡說文
008_0524_a_07L十卷貞元間詔延入內殿升座闡揚華
008_0524_a_08L嚴宗旨乃敕有司鑄印遷國師號淸
008_0524_a_09L開成三年三月示寂生歷九朝
008_0524_a_10L七帝門師春秋一百有二僧臘八十有
008_0524_a_11L全身塔終南山未幾有梵僧至闕
008_0524_a_12L表稱於葱嶺見二使者凌空而過
008_0524_a_13L呪止而問之荅曰北印度文殊堂神也
008_0524_a_14L東取華嚴菩薩大牙皈國供養有旨啓
008_0524_a_15L果失一牙惟三十九存焉遂闍維
008_0524_a_16L舍利光瑩舌如紅蓮仍謚號淸凉國師
008_0524_a_17L妙覺之塔見䟽鈔緣起行蹟

008_0524_a_18L
唐釋城慧靈丘李氏子其親禱五臺山
008_0524_a_19L而生旣長辭親詣五臺眞容院從法
008_0524_a_20L順和尙披剃甞誦華嚴于李牛谷草木
008_0524_a_21L爲食每誦經時有五七儒服者坐聽
008_0524_a_22L數持异華鮮菓以獻師怪問之荅曰某
008_0524_a_23L山神也蒙師法力無以爲報願充執
008_0524_a_24L師不樂遂捨其處見雲栖感應略

008_0524_b_01L
당 의봉儀鳳 연중(676~679)에 서역의 두 범승梵僧이 오대산에 이르러 꽃을 받들고 향로를 들고서 산꼭대기를 향해 무릎과 팔꿈치로 걸으며 문수에게 예배하다가 한 비구니 스님을 만났다. 그녀는 바위틈에서 지내면서 소나무 아래 노끈으로 엮은 평상에서 단정히 홀로 앉아 『화엄경』을 소리 내어 염송하고 있었다. 마침 해가 저물녘이라 비구니가 범승에게 물었다.
“비구니가 대승大僧46)과 함께 묵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 대덕께서는 일단 가셨다가 내일 다시 오십시오.”
범승이 말하였다.
“산은 깊고 길은 멀어 기숙할 만한 곳이 없는 걸 어쩝니까?”
비구니가 말하였다.
“가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머물 수 없으니 깊은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범승이 배회하면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였지만 어디서 묵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자 비구니가 말하였다.
“앞 골짜기로 내려가기만 하면 그곳에 선굴禪窟이 있을 것입니다.”
범승이 가서 찾아보자 과연 굴이 있었고, 서로의 거리가 몇 리 남짓 되었다. 두 범승은 합장하며 향로를 받들고 북쪽을 향해 멀리서 예배하고는 마음을 기울여 경을 들었다. 그러자 맑은 소리가 귀에 들렸다. 먼저 경의 제목을 밝히고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라고 할 때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비구니가 노끈으로 엮은 평상에서 남쪽을 향해 앉았는데 입에서 쏟아진 빛이 금빛처럼 찬란히 앞 봉우리에서 빛나고 있다. 제2질을 염송하고부터는 그 빛이 골짜기 남쪽까지 가득해 사방 10리가 낮과 다름없었고, 제4질부터는 그 빛이 점점 거두어지더니 여섯 질의 염송을 모두 마치자 빛이 모조리 비구니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은 이를 문수보살이 화현해 범승에게 보인 것이라 하였다. 『영사감응전英師感應傳』을 보라.
당 상원上元 연중(674~676)의 일이다. 손사막孫思邈은 유주단流珠丹과 운모분雲母粉을 복용하여 나이 150세에도 얼굴이 동자와 같았다. 장안에 이르러 제齊나라와 위魏나라 때 일을 말하였는데 마치 직접 목도한 것 같았다. 그는 일찍이 『화엄경』을 750부나 사경한 적이 있었다. 당시 태종太宗47)이 그를 불러 만나보고 물었다.
“불경 가운데 어느 경이 위대합니까?”
손사막이 말하였다.
“『화엄경』이 불교에서 위대한 경으로 우러르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근래 현장玄奘 삼장이 번역한 『대반야경』 600권은 왜 위대하지 않고,

008_0524_b_01L

008_0524_b_02L
唐儀鳳年中西域有二梵僧至五臺山
008_0524_b_03L捧花執爐肘膝行步向山頂禮文殊
008_0524_b_04L遇一尼師在巖石間松下繩床端然
008_0524_b_05L獨坐口誦華嚴時日方暮尼謂梵僧
008_0524_b_06L尼不合與大僧同止大德且去
008_0524_b_07L日更來僧曰山深路遙無所投寄奈何
008_0524_b_08L尼曰若不去我不可住當入深山
008_0524_b_09L徘徊慙懼莫知所止尼曰但下前谷
008_0524_b_10L彼有禪窟耳僧徃尋果得窟相去數
008_0524_b_11L里許二僧合掌捧香爐面北遙禮
008_0524_b_12L心聽經冷冷於耳初啓經題稱如是
008_0524_b_13L我聞乃遙見尼身處繩床面南而坐
008_0524_b_14L口中放光赫如金色皎在前峯誦兩
008_0524_b_15L帙已上其光盛于谷南方圓可十里
008_0524_b_16L與晝不異至四帙其光漸收六帙都
008_0524_b_17L光並收入尼口人以爲此文殊分化
008_0524_b_18L以示梵僧也見英師感應傳

008_0524_b_19L
唐上元中孫思邈服流珠丹雲母粉
008_0524_b_20L百五十歲顏如童子至長安說齊魏
008_0524_b_21L間事有如目覩甞書寫華嚴經七百五
008_0524_b_22L十部時太宗召見問佛經何經爲大
008_0524_b_23L孫曰華嚴經佛所尊大者帝曰近玄奘
008_0524_b_24L三藏譯大般若六百卷何不爲大

008_0524_c_01L80권 『화엄경』만 유독 위대할 수 있습니까?”
손사막이 말하였다.
“화엄법계華嚴法界는 일체의 문門을 갖추고 있고, 하나의 문에서 대천세계만큼이나 되는 권수의 경을 연출할 수 있으니, 『반야경』도 『화엄경』 가운데 하나의 문일 뿐입니다.”
태종이 비로소 깨닫고 이에 『화엄경』을 수지하였다. 『영사감응전英師感應傳』를 보라.
당의 이 장자李長者는 휘가 통현通玄이다. 처음 태원太原에 이르러 고산노高山奴 집에 기숙하였는데 매일 아침 대추 열 개와 잣나무 잎 떡 한 개만 먹었다. 뒤에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는데 순종하는 것이 마치 명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장자가 호랑이에게 말하였다.
“내가 논을 지어 『화엄경』을 해석하려 하니 네가 나를 위해 머물 곳을 하나 골라다오.”
그러자 호랑이가 장자의 바랑과 발우를 지고 30여 리를 가서 한 토굴에 다다라 웅크리고 앉았다. 장자가 그 토굴로 들어가자 호랑이는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사라졌다. 토굴에는 원래 물이 없었는데, 그날 저녁 바람과 천둥에 노송 한 그루가 뿌리째 뽑혔고, 그 소나무 아래에서 샘이 솟았다. 그 샘은 맑고 시원하며 달콤했으며, 당시 사람들이 ‘장자의 샘’이라 불렀다. 장자는 논을 저술하는 저녁이면 마음으로 현묘하고 오묘한 뜻을 궁구하였다. 그러면 입에서 하얀빛이 나와 토굴을 환히 비추어 등불을 대신하였다. 당시 두 절세미인이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장자를 위해 물을 긷고 향을 사르며 종이와 붓을 공급하였고, 묘시나 진시쯤이면 곧 정갈한 찬을 준비하였는데 온갖 진미가 빠짐없이 구비되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그릇을 거두었는데 어디서 오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5년이 지나 논이 마무리되자 곧 그들도 종적을 끊었다. 『장자화엄론사적長者華嚴論事跡』을 보라.
당 영휘永徽 연중(650~655)의 일이다. 번현지樊玄智는 안정安定 사람인데 약관의 나이에 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순 화상에게 귀의하였다. 그러자 두순은 『화엄경』 염송을 업으로 삼게 하고, 아울러 이 경에 의지해 보현행普賢行을 닦게 하였다. 경을 염송할 때마다 입에서 여러 차례 사리가 나왔으며, 전후로 도합 수백 과나 되었다. 혜영慧英 법사의 『감응전感應傳』48)에서 말하였다.
“거사가 밤에 염송할 때면 입에서 금색 광명이 쏟아져 나와 40여 리를 비췄기에

008_0524_c_01L八十卷華嚴經獨得大乎孫曰華嚴法
008_0524_c_02L具一切門於一門中可演出大千
008_0524_c_03L經卷般若經乃華嚴中一門耳太宗方
008_0524_c_04L乃受持華嚴見英師感應傳

008_0524_c_05L
唐李長者諱通玄初至太原寓高山
008_0524_c_06L奴家每旦唯食棗十顆栢葉餅一枚
008_0524_c_07L後捨去路逢一虎馴伏如有所待
008_0524_c_08L者語之曰吾將著論釋華嚴經汝當
008_0524_c_09L爲吾擇一栖止虎負長者囊鉢行三
008_0524_c_10L十餘里至一土龕蹲住長者入龕
008_0524_c_11L便妥尾而去龕素無水是夕風雷
008_0524_c_12L一老松松下出泉淸洌甘美時人號
008_0524_c_13L爲長者泉長者著論之夕心窮玄奧
008_0524_c_14L口出白光照耀龕中以代燈燭時有
008_0524_c_15L二女容華絕世以白巾幪首爲長者
008_0524_c_16L汲水焚香供給紙筆卯辰之際輒具
008_0524_c_17L淨饌甘珎畢備齋罷徹器莫知去來
008_0524_c_18L歷五載著論將終便爾絕跡見長者華
008_0524_c_19L嚴論事跡

008_0524_c_20L
唐永徽中樊玄智安定人弱歲即知修
008_0524_c_21L歸依杜順和尙順令誦華嚴爲業
008_0524_c_22L仍依此經修普賢行每誦經口中頻獲
008_0524_c_23L舍利前後數百粒慧英法師感應傳
008_0524_c_24L居士有時夜誦口放金光明照及

008_0525_a_01L원근에서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92세에 병 없이 목숨을 마쳤고, 다비할 때 어금니와 이빨이 사리로 변해 100여 과를 얻었는데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모두 빛을 뿜었다. 이에 승속이 탑을 세워 공양하였다.”
당의 등원상鄧元爽은 화음華陰 사람이다. 증성證聖 연중(695)에 친구가 갑자기 죽었다가 7일 만에 다시 살아나 “명부冥府에서 등원상을 추포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등원상이 두려워하자 그 사람이 『화엄경』을 사경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사경이 끝나자 등원상의 어머니 묘 곁에 심어 두었던 철쭉이 겨울이라 이미 시들었다가 갑자기 찬란하고 무성하게 꽃을 피웠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조정에 알리자 깃발을 세워 효문孝門을 삼았다.
또 『화엄지華嚴志』에서 말하였다.
“추극선鄒極繕은 『화엄경』을 사경하였는데, 반쯤 사경하자 홀연히 향나무 책상 앞에 한 비구가 나타났다. 추극선이 물었다.
‘당신은 누군데 이곳에 오셨습니까?’
‘저는 화엄華嚴 시자입니다. 당신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해 특별히 벼루와 먹을 가져왔습니다.’
추극선이 예배하며 감사하자 사라졌으니, 사경의 신령한 감응이 이와 같았다.”
당 영륭永隆(680~681) 연간에 장안 사람 곽신량郭神亮이 범행梵行을 청정히 지키다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어떤 천인의 인도로 도솔천궁兜率天宮에 이르러 미륵보살에게 공경히 예배하게 되었다. 한 보살이 곽신량에게 말하였다.
“왜 『화엄경』을 수지하지 않았습니까?”
“강설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말하였다.
“현재 강설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없다 하십니까?”
그러고 나서 곽신량은 다시 살아났고, 박진薄塵 법사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러고서야 현수 법사가 법륜을 널리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으니, 그 감통의 신비하고 기이함이 이와 같았다. 『회현기會玄記』를 보라.
송宋나라 때 미주眉州 중암中巖의 화엄 조각華嚴祖覺 선사는 어려서 눈에 스치기만 해도 외울 정도로 총명했다. 불교를 배척하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러다 홀연히 지독한 경계를 보고는 잘못을 뉘우치고 출가해 혜목 능慧目能 선사를 의지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종기가 무릎에 생겼고 5년이 지나도록 의사도 치료하지 못했다. 그래서 『화엄합론華嚴合論』을 서사하게 되었는데, 서사를 끝내던 밤 기이한 꿈을 꾸었고,

008_0525_a_01L四十餘里遠近驚異年九十二無疾
008_0525_a_02L而終茶毘時牙齒變爲舍利得百餘
008_0525_a_03L粒悉放光明數日不歇於是僧俗
008_0525_a_04L塔供養

008_0525_a_05L
唐鄧元爽華陰人證聖中有親故暴
008_0525_a_06L經七日復甦說冥中欲追爽爽懼
008_0525_a_07L其人敎寫華嚴經寫竟爽母墓側先種
008_0525_a_08L蜀葵至冬已瘁忽花發燦然榮茂
008_0525_a_09L閭異之聞於朝旌爲孝門
又華嚴志
008_0525_a_10L鄒極繕寫華嚴經至半部忽香案
008_0525_a_11L見一比丘鄒問汝何人至此荅曰
008_0525_a_12L吾乃華嚴侍者感君至誠特來硏墨耳
008_0525_a_13L鄒方禮謝遂不見寫經之靈應如此

008_0525_a_14L
唐永隆中長安人郭神亮梵行淸淨
008_0525_a_15L忽一日暴卒有天人引至兠率天宮
008_0525_a_16L敬禮彌勒一菩薩謂郭曰何不受持華
008_0525_a_17L對曰以無人講演故菩薩曰有人
008_0525_a_18L現講何以言無旣而郭甦向薄塵法師
008_0525_a_19L述其事始知賢首之弘轉法輪其感通
008_0525_a_20L神異若此見會玄記

008_0525_a_21L
宋眉州中巖華嚴祖覺禪師幼過目成
008_0525_a_22L著書排釋氏忽見惡境悔過出家
008_0525_a_23L依慧目能禪師未幾疽發膝上五年醫
008_0525_a_24L莫愈因書華嚴合論畢夜感異夢

008_0525_b_01L아침에는 곧 지팡이를 버리고 편안히 걷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염송하다가 「현상품現相品」의 “부처님 몸은 생긴 일 없지만 능히 출생하는 모습을 보이시네. 법성은 허공과 같아 모든 부처님 그 가운데 머무시니, 머묾도 없고 감도 없어 곳곳에서 모두 부처님을 보네.”49)라는 구절에 이르러 비로소 화엄의 종지를 깨달았다. 부府의 통솔자가 천부당千部堂에서 강설해 줄 것을 청해 그 말씀과 뜻을 널리 펼치자 대중이 모두 탄복하였다. 『오등회원五燈會元』을 보라.
송宋의 원정圓淨 법사는 이름이 성상省常이고 전당錢塘 안顔씨이다. 17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계행이 근엄하였으며 천태天台의 지관법문止觀法門을 익혔다. 순화淳化 연중(990~994)에 소경昭慶에 주석하면서 여산廬山의 풍모50)를 흠모하여 서호西湖에서 결사하였고, 『화엄경』 「정행품淨行品」으로 성과聖果를 이룰 종요宗要로 삼았다. 스스로 손가락을 찔러 그 피를 먹과 섞어 사경하였는데, 한 글자 쓸 때마다 세 번을 절하고 세 바퀴를 돌고 부처님 명호를 세 번 불렀으며, 또 판각하고 인쇄하여 천 권을 보시하였다. 연사蓮社를 정행사淨行社로 바꾸고 그 모임에 참여한 자들을 모두 정행제자淨行弟子라 칭하였으며, 문정공文正公 왕단王旦과 상국相國인 향민중向敏中이 결사의 수장이 되자 일시에 사대부 120인과 비구 천 명이 결성되었다. 한림翰林 소이간蘇易簡은 「정행품」의 서문을 지으며 “저는 머리카락을 펼쳐 그 발을 받들고 살을 도려내어 그 법을 청하라 해도 거절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비루한 글에 천박한 학문을 아끼겠습니까?”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천희天禧 4년(1020) 정월에 단정히 앉아 염불하면서 입적하였으니, 연사蓮社의 7조라고들 한다.
송의 석선본釋善本은 『화엄경』을 시험보고 승려가 되었고, 거처하는 곳마다 항상 지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조칙을 받들어 법운사法雲寺에 머물면서 대통선사大通禪師라는 호를 하사받았고, 뒤에 항주杭州 상오사象塢寺로 돌아가 정토의 업을 닦았다. 그러다가 선정 중에 금빛 몸을 나타낸 아미타부처님을 보았다. 어느 날 아침 문인들에게 “나는 3일 뒤에 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기약한 날이 되자 과연 가부좌하고 염불하다가 서쪽을 향해 천화하였다.
송의 문충文忠 구양수歐陽修 공이 임종할 무렵 자제들을 부르고 훈계하였다.

008_0525_b_01L即捨杖安步一旦誦至現相品曰
008_0525_b_02L身無有生而能示出生法性如虛空
008_0525_b_03L諸佛於中住無住亦無去處處皆見佛
008_0525_b_04L遂悟華嚴宗旨府帥請講於千部堂
008_0525_b_05L旨宏放衆咸嘆服見五燈會元

008_0525_b_06L
宋圓淨法師名省常錢塘顏氏十七
008_0525_b_07L歲出家受具戒行謹嚴習天台止觀法
008_0525_b_08L淳化中住錫昭慶慕廬山之風
008_0525_b_09L社西湖以華嚴淨行品乃成聖之宗要
008_0525_b_10L自剌指血和墨書之每書一字三拜
008_0525_b_11L三圍繞三稱佛名又刊板印施千卷
008_0525_b_12L易蓮社爲淨行社預會者皆稱淨行弟
008_0525_b_13L王文正公旦及相國向公敏中爲社
008_0525_b_14L一時士大夫百二十人比丘千人焉
008_0525_b_15L翰林蘇易簡作淨行品序至謂予當布
008_0525_b_16L髮以承其足剜身以請其法猶尙不
008_0525_b_17L况陋文淺學而吝惜哉天禧四年正
008_0525_b_18L端坐念佛而寂爲蓮社七祖云

008_0525_b_19L
宋釋善本試華嚴得度居恒誦持不輟
008_0525_b_20L奉詔住法雲賜號大通禪師後歸杭州
008_0525_b_21L象塢寺修淨業㝎中見彌陀佛示金
008_0525_b_22L色身一旦告門人曰吾三日後行矣
008_0525_b_23L至期果趺坐念佛西向而化

008_0525_b_24L
宋文忠歐陽公將易簀時呼子弟誡曰

008_0525_c_01L
“나는 젊은 시절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는 부도浮圖(불교)를 한껏 비난했었다. 그러다 근래 여러 경에서 문득 오묘한 뜻을 듣고는 비로소 바른 과보를 연구해 보려 했으나 뜻을 지녀 볼 겨를도 없이 죽게 되었다. 너희는 삼교三敎51)의 같고 다름을 가볍게 말했던 나의 전철을 밟지 말라.”
그리고는 노병老兵을 시켜 가까운 절에서 『화엄경』을 빌려오게 하여 장엄하게 염송하다가 8권에 이르렀을 때 편안히 앉은 채 서거하였다.
송의 손량孫良은 전당錢塘 사람이다. 은거하며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화엄의 종지를 얻어 일생 거처하는 곳마다 항상 지송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뒤에 대지大智 율사에게 보살계를 받았고, 매일같이 부처님을 만 번이나 염송하기를 거의 20년이나 하였다. 하루는 집안사람들에게 명하여 스님을 초청해 염불하게 하였고, 반 식경 정도 지나자 허공을 보며 합장하고 말하였다.
“여러 부처님들께서 이미 강림하셨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물러나 천화하였다.
송의 진秦씨 정견淨堅은 송강松江으로 시집갔는데 스스로 여자의 몸임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남편과 각방을 쓰며 재계齋戒를 꼼꼼히 지키고, 항상 『화엄경』ㆍ『법화경』ㆍ『금광명경』ㆍ『반야경』 등을 펼쳐 독송하면서 헛되이 보내는 날이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예배하고 미타참彌陀懺을 닦았다. 그렇게 오래 하자 광명이 방으로 들어왔고, 서쪽을 향해 편안히 앉아 천화하였다.
금金의 선타실리蘚陀室利는 중인도 나란다사那蘭陀寺의 승려로 『화엄경』을 지송하였다. 나이 85세에 바다를 항해하여 오대산五臺山을 찾아와 예배하였고, 하나의 대臺 정상마다에서 『화엄경』 10부를 염송하고 7일 동안 선정에 들었다. 선정에서 황금의 성과 푸른 전각, 보배 연꽃에 향기로운 물, 구슬을 꿴 그물이 서로를 비추는 가운데 모든 하늘과 동자들이 그곳에서 즐겁게 노니는 것을 보았다. 뒤에 영취봉靈鷲峯에서 천화하였으며, 사리를 8홉이나 얻었는데 구슬처럼 찬란하였다. 『운서감응략기雲栖感應略記』를 보라.
원元의 화엄 보살華嚴菩薩은 휘가 정순正順이며 위주尉州 고高씨 자손이다. 오대산의 수녕용壽寧用 공에게서 삭발하고는 깊은 숲에 초가를 짓고 오로지 『화엄경』만 열람하여 그 횟수가 천 부를 채웠다. 화장관華藏觀에 들어갈 때마다 15일 만에야 선정에서 깨어났기에 세상에서 그를 화엄 보살이라 불렀다. 입적할 무렵 문인이 게송을 청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008_0525_c_01L吾少以文章名世力詆浮圖邇來於諸
008_0525_c_02L忽聞奧義方將硏究正果不料賫
008_0525_c_03L志以沒汝等毋蹈吾轍輕言三敎異同
008_0525_c_04L令老兵于近寺借華嚴經莊誦至
008_0525_c_05L八卷安然坐逝

008_0525_c_06L
宋孫良錢塘人隱居閱大藏尤得華
008_0525_c_07L嚴之旨居恒誦持不廢後依大智律師
008_0525_c_08L受菩薩戒日誦佛萬聲幾二十年
008_0525_c_09L日命家人請僧念佛方半餉望空合
008_0525_c_10L掌云諸佛已荷降臨退坐而化

008_0525_c_11L
宋秦氏淨堅家松江自厭女身與未各
008_0525_c_12L精持齋戒常披誦華嚴及法華光明
008_0525_c_13L般若等經無虛日晨昏禮佛修彌陀
008_0525_c_14L久之有光明入室面西安坐而化

008_0525_c_15L
金蘇陀室利中印度那蘭陀寺僧誦持
008_0525_c_16L華嚴年八十五航海來禮五臺每一
008_0525_c_17L臺頂誦華嚴十部禪寂七日㝎中見
008_0525_c_18L金城紺殿寶蓮香水珠網交輝諸天童
008_0525_c_19L遊戱其中後於靈鷲峯化去得舍
008_0525_c_20L利八合璀爛如珠見雲栖感應略記

008_0525_c_21L
元華嚴菩薩諱正順尉州高氏子
008_0525_c_22L五臺壽寧用公祝髮結廬深樹惟閱華
008_0525_c_23L數盈千部每入華藏觀三五日方
008_0525_c_24L世號華嚴菩薩將示寂門人乞偈

008_0526_a_01L
歷劫本無去住   오랜 겁 지내도록 본래 가고 머문 적 없으니
應用何思何慮   응하여 활용함에 무얼 짐작하고 무얼 염려할까.
轉身踏破虛空   온몸을 굴려 허공마저 밟아 버리고
一切是非莫顧   일체의 옳고 그름을 돌아보지 말라.

말을 마치고 서거하였다. 그날 영가를 모신 제단 위에 다섯 빛깔의 용이 나타났으며 날아다니는 광명이 뜰을 밝혔다. 『운서감응략기雲栖感應略記』를 보라.
명明 만력萬曆 연간(1573~1620)에 변융辨融 선사가 유언비어로 하옥되었는데, 옥졸이 ‘변辨 공은 명성이 높으니 분명 금전이 많을 것이다’라고 여겨 그에게 두둑한 뇌물을 요구하였다. 스님이 “절집에 무슨 돈이 있겠는가?” 하고 한 푼도 주지 않자 옥졸은 스님을 큰 상자에 가두어 괴롭혔다. 갇힌 뒤에 스님이 허공을 향해 “대방광불화엄경 화엄회상의 불보살이여.” 하고 큰소리로 외치자 홀연히 상자 가득 요란하게 메아리치더니 자물쇠가 끊어지고 상자가 부서졌다. 이 이야기가 감옥의 담당자에게 알려졌고, 결국 어전까지 전해져 조칙을 받들어 풀려났다. 운서雲栖52)의 『죽창이필竹窓二筆』에서 말하였다.
“내가 경사京師로 들어가 동료들과 함께 변융 스님을 찾아가 참례하고 가르침을 청하자 변융 스님께서는 ‘이익을 탐하지 말고, 명예도 구하지 말고, 귀하고 요긴한 문을 붙잡지도 말고 오로지 일심으로 도를 갖춰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물러나 몇몇 나이 어린 자들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뭐 특별한 말씀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어찌 이리 평범합니까?’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이 어른을 공경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분이 비록 말씀은 어눌하다지만 어찌 선덕들의 문답과 기연機緣 한두 개쯤 엮어 자신의 문호門戶를 가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분이니, 그 말씀은 그가 실천한 것이고 자기의 행을 들어 남을 가르친 것이다. 진정 참된 선화禪和(禪僧)이니,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명의 과이안戈以安은 법명이 광태廣泰이고 전당錢塘 사람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순하였으며 평소 선행을 쌓고도 스스로 깊이 감추었다. 만년에 정성을 다해 부처님을 받들어 영지사靈芝寺의 승려 현소玄素와 봄가을로 두 번 결사를 맺고는 염불하였으며, 『화엄경』 등 다섯 가지 경을 염송하였다. 그렇게 계속하다가 갑자기 사람들에게 “내 마지막 날이 가까웠으니 서방정토로 돌아갈 양식을 마련해야겠다.” 하고는 드디어 문을 닫아걸고 염송으로 일과를 삼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지 않았다.

008_0526_a_01L師曰歷劫本無去住應用何思何慮
008_0526_a_02L身踏破虛空一切是非莫顧言訖而逝
008_0526_a_03L是日靈几上現龍五彩飛光燭於庭宇
008_0526_a_04L見雲栖感應略記

008_0526_a_05L
明萬曆間辨融禪師以蜚語下獄
008_0526_a_06L卒以辨公名重必多金索其厚賄
008_0526_a_07L云僧家那得有錢一無所與獄卒置師
008_0526_a_08L大匣床中以困之匣竟師向空唱云
008_0526_a_09L方廣佛華嚴經華嚴會上佛菩薩忽滿
008_0526_a_10L匣床聒聒作響鎻斷牀碎事聞提牢
008_0526_a_11L遂達御前奉詔請出雲栖竹窗二筆云
008_0526_a_12L予入京師與同軰詣辨融師叅禮請益
008_0526_a_13L融敎以無貪利無求名無攀援貴要
008_0526_a_14L之門惟一心辨道旣出數年少笑曰
008_0526_a_15L吾以爲有異聞何寬泛乃爾予謂此老
008_0526_a_16L可敬處正在此耳渠縱吶言豈不能
008_0526_a_17L掇拾先德問荅機緣一二以遮盖門戶
008_0526_a_18L而不爾者其言是其所實踐擧自行以
008_0526_a_19L敎人正眞實禪和不可輕也

008_0526_a_20L
明戈以安法名廣泰錢塘人性至孝
008_0526_a_21L素積善行而深自韜晦晩歲精誠奉佛
008_0526_a_22L與靈芝僧玄素結春秋二社念佛
008_0526_a_23L華嚴五經繼忽謂人曰吾大限將至
008_0526_a_24L當爲西皈資糧遂掩關課誦昕夕不輟

008_0526_b_01L서방으로 돌아갈 날을 섣달 21일로 예정하였는데, 그 이틀 전 저녁에 아내와 자식이 둘러앉아 지켜보면서 슬픔으로 목이 메자 과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어찌 슬퍼하는가. 내 정신을 깨끗한 세계에 모으고자 하니, 너희들은 절대로 인정과 애착으로 나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기약한 날이 되자 고요히 서거하였다. 얼마 후 어떤 스님이 명부에 들어갔다가 손孫을 보았다.53) 조용한 방에 고요히 앉아 있었는데 경전이 책상에 수북이 쌓여 있고, 뜰에는 붉은 대나무와 괴석이 무성하며, 너무도 깨끗한 것이 신선 세계 같았다고 한다. 『운서왕생집雲栖徃生集』을 보라.
명의 공부工部54) 담정묵譚貞默의 어머니 태부인 엄嚴씨는 일생을 항상 집안 살림과 자녀양육으로 과업을 삼았다. 아울러 법도가 있어 비록 남편이 존귀하고 아들이 존귀했지만 베옷과 나물밥으로 지내며 사치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좋아하는 성품이라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며 『금강경』과 『법화경』 염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만년에는 특히 『화엄경』을 존중하고 받들어 매일 한 권씩 가지加持하였으며, 또 며느리에게 능히 대의大義까지 강의하였다. 평생 병 없이 지내다 숭정崇禎 임신년(1632) 여름에 갑자기 병을 얻었다. 그는 곧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고 일어나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부처님께 예배하며 말하였다.
“저는 일생 부처님을 존경하였습니다. 정말 불연佛緣이 있다면 남은 육신이 기운이 사라져도 더러워지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는 가부좌하고 단정히 앉아 합장하고 서거하였다. 7일이 지나도록 미소를 머금은 얼굴빛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고 향기가 때때로 풍겼으며, 상을 치르는 동안 파리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았다. 이에 보는 이들이 그 기이함을 찬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부工部가 직접 전기傳記를 남겼다.

008_0526_b_01L預定皈期於臘月二十一日前二夕
008_0526_b_02L子環視悲哽戈笑曰生必有滅奚悲
008_0526_b_03L吾方凝神淨域若等愼勿以情愛亂
008_0526_b_04L至期寂然而逝未幾有僧入冥
008_0526_b_05L孫晏坐靜室經籍盈几庭多紫竹石峯
008_0526_b_06L淸絕如洞天云見雲栖徃生集

008_0526_b_07L
明譚工部貞默母嚴太夫人居恒治家
008_0526_b_08L課子俱有法度雖夫貴子貴而布衣
008_0526_b_09L蔬食不樂華侈性好浮啚言晨夕禮
008_0526_b_10L誦金剛法華不輟晩年尤尊崇華嚴經
008_0526_b_11L每日加持一卷又能爲子婦講解大義
008_0526_b_12L生平無疾崇禎壬申暑月忽得疾
008_0526_b_13L知垂歿起沐浴更衣禮佛曰我一生敬
008_0526_b_14L果有佛緣當令遺體氣患不穢
008_0526_b_15L跏趺端坐合掌而逝七日顏色含笑如
008_0526_b_16L香氣時時飄拂喪次無一飛蠅
008_0526_b_17L者莫不嘆異工部自有傳記

008_0526_b_18L
華嚴持驗紀終

008_0526_b_19L
  1. 1)용수보살龍樹菩薩 : 용맹龍猛ㆍ용승龍勝이라고도 한다. 불멸 후 600~700년경(2~3세기)에 출현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선양하였고, 『大智度論』ㆍ『十住毘婆沙論』ㆍ『中論』ㆍ『十二門論』 등을 저술하여 공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비하였다.
  2. 2) 사위다四韋陀 : 위다韋陀는 veda의 음역이다. 위다圍陀ㆍ폐타吠陀ㆍ폐다吠駄ㆍ비다毘陀ㆍ피다皮陀 등으로 음역하기도 하며, 지론智論ㆍ명론明論ㆍ무대無對로 의역하기도 한다. 인도 바라문교의 근본 성전인 리그베다ㆍ사마베다ㆍ야주르베다ㆍ아타르바베다의 네 가지를 말한다.
  3. 3) 일체지인一切智人 :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를 갖춘 자, 즉 부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4. 4) 구담문瞿曇門 :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마지막 유행길에 통과하셨던 마가다 빠딸리에 있는 성문을 말한다. 이후 부처님을 지극히 사모한 마가다의 왕 아자따삿뚜와 백성들이 그 문을 고타마의 문이라 부르며 기념하고 출입을 삼갔다.
  5. 5)세계법世界法 : 세간법世間法과 같은 의미이다.
  6. 6) 『부법장인연경付法藏因緣經』 : 길가야吉迦夜와 담요曇曜가 번역한 『付法藏因緣傳』을 말한다.
  7. 7) 『서역기西域記』 : 현장玄奘이 번역하고 변기辯機가 찬집한 『大唐西域記』를 말한다.
  8. 8) 『화엄전華嚴傳』 : 현수 법장賢首法藏이 지은 『華嚴經傳記』를 말한다.
  9. 9)세친보살世親菩薩 : 천친天親이라고도 하며, 바수반두婆藪槃豆ㆍ벌소반도伐蘇畔度로 음역하기도 한다. 4~5세기경 북인도 간다라 부루사부라(지금의 Peshawar) 사람이다. 『俱舍論』을 지어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선양하다가 형 무착의 권유로 대승에 귀의하였다. 이후 『十地經論』ㆍ『唯識論頌』ㆍ『攝大乘論釋』ㆍ『佛性論』 등 수많은 논저로 대승의 교의를 선양하였다.
  10. 10) 무착보살無着菩薩 : 세친의 형으로 처음엔 화지부化地部에 출가하여 소승의 공관空觀을 닦다가 뒤에 미륵보살의 설법을 듣고 대승에 귀의하였다. 미륵보살의 법문을 엮어 『瑜伽師地論』ㆍ『大乘莊嚴論』 등을 편찬하고, 『顯揚聖敎論』ㆍ『大乘阿毘達磨集論』ㆍ『攝大乘論』 등을 지었다.
  11. 11) 지법령支法領 : 동진 효무제(376~396) 때 서역 우전국으로 가서 『四分律』 범본과 『華嚴經』 전분前分의 범본을 얻어 의희 4년(408)에 돌아왔다. 60권본 『華嚴經』은 이 범본을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것이다.
  12. 12)우전于闐 : 우전于塡ㆍ우치于寘ㆍ우둔于遁ㆍ계단谿丹ㆍ굴단屈丹ㆍ구살단나瞿薩旦那ㆍ홀탄忽炭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중국 신강성 화전 지방이다. 남방 곤륜산에서 발원한 백옥하白玉河와 예옥하翳玉河가 시가의 동서로 흘러서 토지가 비옥하고, 두 하수에서 진귀한 옥이 생산된다. 서쪽으로는 대하ㆍ안식국 등으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중국 본토로 연결되는 통로였으며, 대승불교가 일찍 전래되었다.
  13. 13) 구차반국拘遮盤國 : 구반국拘盤國.
  14. 14)동진 때 번역된 『화엄경』 : 불타발다라가 번역한 60권본 『華嚴經』을 말한다.
  15. 15)불도발다라佛度跋陀羅 :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359~429)라고도 한다. 인도에 법을 구하러 갔던 지엄智嚴의 청으로 장안長安에 왔다.
  16. 16)감로반왕甘露飯王 : 사자협왕師子頰王의 아들로서 정반왕의 아우이자 석존의 숙부이다. 감로정甘露淨이라고도 한다. 불도발다라가 석가족의 후예임을 의미한다.
  17. 17)지엄智嚴 : 서량西凉 사람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이름난 스승을 찾아 편력하였다. 불경을 구하러 인도로 가다가 계빈국에서 불타발다라를 만나 함께 장안으로 돌아왔다. 427년 보운寶雲과 함께 『普曜經』ㆍ『廣博嚴淨經』ㆍ『四天王經』 등 14부 36권을 번역하였다. 다시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계빈국에서 7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18. 18)계빈국罽賓國 : 가습미라迦濕彌羅ㆍ갈습미라羯濕弭羅ㆍ가섭미라迦葉彌羅라고도 한다. 북인도 간다라 동북의 산중에 있던 왕국으로 지금의 카슈미르(Cashmir) 지역에 해당한다. 2세기경 카니시카 왕 당시 『大毘婆沙論』을 편찬한 곳이다.
  19. 19)원遠 공 : 혜원慧遠 스님을 지칭한다.
  20. 20) 손가락 세 개를 구부려 : 아나함은 성문사과 중 세 번째이다.
  21. 21)업業 공 : 필수를 담당했던 법업法業 스님을 지칭한다.
  22. 22)사남司南 : 지남指南과 같은 의미로서 정확한 지침을 말한다.
  23. 23)집什 공 : 구마라집을 지칭한다.
  24. 24)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393~468) : 『阿毘曇雜心論』을 읽고 불교에 귀의하여 삼장을 통달한 후 대승을 배웠다. 송 문제의 후원으로 기원사祇洹寺에서 역경에 종사해 『雜阿含經』ㆍ『大法鼓經』ㆍ『勝鬘經』ㆍ『小無量壽經』ㆍ『楞伽阿跋多羅經』ㆍ『華嚴經』 등 52부 134권을 번역하였다. 세상에서 그를 마하연摩訶衍이라 일컬었다.
  25. 25)오명五明 : 인도에서 사용한 학문과 기예의 분류법이다. 명明이란 배운 것을 분명히 한다는 뜻이다. 다섯 가지는 성명聲明(언어ㆍ문학ㆍ문법), 인명因明(논리학), 주술명呪術明(주문ㆍ부적ㆍ의례), 의방명醫方明(의학ㆍ약학), 공교명工巧明(공예ㆍ기술)이다.
  26. 26) 원가元嘉 연중 :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는 원가 12년(435)에 해로로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27. 27)석혜광釋慧光 : 남북조南北朝 때 정주定州 장로長盧 사람으로 속성은 양楊씨며, 13세에 불타 삼장에게 출가하여 계율을 배웠다. 『四分律』을 널리 보급하여 후에 중국 율종의 시조始祖로 추존되었다. 북위 영평 1년(508)에 늑나마제勒那摩提와 보리류지菩提流支가 『十地論』을 함께 번역하다가 도중에 견해가 달라 각기 따로 번역하였는데, 혜광이 두 가지 번역을 비교 검토하여 하나로 만들고, 이에 대한 주석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수많은 경론에 주석서를 지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광통光統 율사라 불렀다.
  28. 28) 안양安養 : 아미타불의 정토인 극락세계의 별칭이다.
  29. 29)행도行道 : 요불遶佛 또는 요당遶堂이라고도 한다. 여러 스님들이 경을 읽으면서 줄지어 부처님의 주위를 도는 것을 말한다. 이때 오른쪽 방향으로 돈다.
  30. 30)문명文明 원년 : 위魏의 역대 연호에 ‘문명文明’은 없다. 문명은 당 예종睿宗의 연호로 684년에 해당한다. 이 책에 편집된 내용들이 비교적 연대순으로 기술된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당나라 때 기사가 아니라 후위後魏의 기사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연호는 오기이다.
  31. 31)진경晋經 : 동진 때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가 번역한 60권본 『華嚴經』을 말한다.
  32. 32)당경唐經 : 실차난타實叉難陀 등이 번역한 80권본 『華嚴經』을 말한다.
  33. 33) 중관中官 : 내시內侍를 말한다.
  34. 34) 태화太和 : 북제北齊의 역대 연호에 태화는 없다. 태화(477~499)는 북위 효문제孝文帝의 연호이다. 이 책에 편집된 내용들이 비교적 연대순으로 기술된 점을 감안할 때, 이것 역시 연호의 오기로 추측된다.
  35. 35)휴休와 원遠 두 법사 : 승휴僧休와 혜원慧遠을 지칭한다. 『續高僧傳』 권12(T50, 518c)에 보다 상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36. 36)오대산五臺山 :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옛날부터 화엄성지華嚴聖地로 여겨졌다.
  37. 37)옛 전적 : 『華嚴感應緣起傳』(X77, 638c)에서 이 기사의 소제목을 ‘무생입증無生入證’ 또는 ‘게찬배공偈讚排空’이라 하였다.
  38. 38) 운서 주굉雲棲袾宏이 편록한 『華嚴經感應略記』(X77, n.1532)를 말한다.
  39. 39)사자국師子國 : 지금의 스리랑카이다.
  40. 40)『양섭론梁攝論』 : 『攝大乘論』의 여러 역본 가운데 양나라 때 진제眞諦 삼장이 번역한 것을 지칭한다.
  41. 41) 백천 : 100×1,000으로 곧 10만을 말한다.
  42. 42)법장法藏 : 실차난타의 역장에 참여했던 현수賢首(643~712)를 말한다.
  43. 43)강거국康居國 : 월지국 북쪽에 있던 서역의 나라이다.
  44. 44) 엄儼 화상 : 지엄智儼(600~668) 화상을 말한다.
  45. 45)구자국龜玆國 : 구자丘茲ㆍ굴지屈支ㆍ굴자屈茨ㆍ구이拘夷라고도 한다.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신강성新彊省 북쪽에 있던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고차庫車에 해당한다. 북쪽으로는 천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타림 하河를 사이에 두고 타클라마칸 사막과 접하고 있다.
  46. 46) 대승大僧 : 구족계를 받은 비구승을 말한다.
  47. 47)태종太宗 : ‘상원上元’은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華嚴經傳記』 권5(T51, 717b)에도 이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상원上元과 의봉儀鳳(676~679) 연간에 있었던 일이라 하였다.
  48. 48) 혜영慧英 법사의 『감응전感應傳』 : 당唐의 혜영慧英이 찬집한 『大方廣佛華嚴經感應傳』(T51, 173b)을 말한다.
  49. 49) 『新華嚴經合論』 권19 「如來現相品」(X4, 130a).
  50. 50)여산廬山의 풍모 : 여산 동림사東林寺에서 유ㆍ불ㆍ선을 가리지 않고 123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했던 혜원慧遠의 풍모를 말한다.
  51. 51)삼교三敎 : 불교ㆍ유교ㆍ도교를 말한다.
  52. 52)운서雲栖 : 중국 명나라 스님으로 법명은 주굉袾宏(1536~1615), 자는 불혜佛慧, 호는 연지蓮池, 운서雲棲는 주석 산명이다. 유교를 배우다 30세에 출가하였다. 항주 운서산에 선림禪林을 세우고, 또 염불을 권하였다. 32종의 저서를 남겼다.
  53. 53)손孫을 보았다 : 원문은 ‘견손見孫’이다. ‘손孫’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운서사雲棲寺 주굉袾宏이 편집한 『往生集』(T51, 149b)에는 이 부분이 ‘견거사見居士’, 즉 “거사를 보았다.”로 되어 있다. 문맥으로 보아 ‘견거사見居士’라야 적당하다. 후대 주극부周克復가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54. 54)공부工部 : 관직명이다.
  1. 1){1}{底}康熈二十五全羅道樂安郡澄光寺開刊本(東國大學校所藏)。題名及撰者名補入{編}。
  2. 2)目次。編者作成補入。
  3. 3)「釰」通用「釖」{編}次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