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 / 白花道場發願文略解

ABC_BJ_H0096_T_001

006_0570_c_01L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
체원 집해(體元集)
곽철환 (역)
총목차總目次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
제1편 제목 해석
제2편 본문을 해석함
제1장 귀경歸敬으로 관觀을 이루어 귀의의 주체와 대상을 잊음
1. 귀경의 의례를 전체적으로 나타냄
2. 관觀의 특성을 개별적으로 밝힘
제2장 귀의하여 발원을 사뢰고 일을 이어받아 과보를 이룸
1. 귀의하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표방함
2. 발원을 별도로 밝힘
제3장 마치면서 귀의하여 우러러 받들고 본사에게 회향함
발문
간기

신라 법사 의상 지음

법사의 속성은 김씨다. 당 고종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661)1)에 입당하여 종남산 지엄智儼(602~668) 존자에게 귀의하여 화엄을 전수받았는데, 현수賢首(643~712) 국사와 함께 배웠다. 그때 현수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으나, 두 분 모두 화엄의 깊은 뜻을 완벽하게 통달하였다. 지엄 존자는 법사에게 의지義持라는 호를 주었고 현수에게는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 (법사가) 이미 현묘한 관문에 이르고는 『법계도法界圖』를 지어 지엄존자에게 바치니, 존자가 자세히 살펴보고 놀라며 “그대가 법성을 완벽하게 증득하고 부처님의 뜻을 통달하였느니 해석서를 짓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법사가 붓을 들어 책을 짓고 『법계도』와 합하여 1권을 만드니,2) 지금 세상에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법사는 낙산 관음굴에 이르러 예배하고 발원한 뒤 이 글을 지었다. 법사가 당시 행한 교화와 신비로운 행적은 최치원崔致遠(857~?)이 서술한 「본전本傳」3)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세수 78세에 앉은 채 입적하니, 곧 대주大周 측천황제 장안 원년 신축(701)4) 3월이었다. 본조本朝5)에 이르러 원교국사圓敎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라고 제수하였다.

제1편 제목 해석
백화도량발원문

이 글을 크게 둘로 나눠 해석한다. 먼저 제목을 해석하고 뒤에 본문을 해석하는데, 이(백화도량발원문)는 제목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앞의

006_0570_c_01L[白花道場發願文略解]

006_0570_c_02L1)白花道場發願文略解 [1]

006_0570_c_03L

006_0570_c_04L2)體元集 [2]

006_0570_c_05L
新羅法師義相製

006_0570_c_06L
集曰法師俗姓金氏唐高宗永徽六
006_0570_c_07L年庚戌入唐投終南山智儼尊者
006_0570_c_08L華嚴與賢首國師同學時賢首尙未
006_0570_c_09L出家 皆窮通奧旨儼公號法師爲義
006_0570_c_10L號賢首爲文持旣達玄關製法
006_0570_c_11L界圖進于儼公 公覽之嗟嘆曰
006_0570_c_12L窮證法性達佛義旨冝造解釋師乃
006_0570_c_13L奮筆成編合爲一卷今行於世
006_0570_c_14L詣洛山觀音窟禮拜發願而述斯文
006_0570_c_15L師當時行化神異具於崔公致遠
006_0570_c_16L所述本傳年七十八坐脫即大周則
006_0570_c_17L天皇帝長安元年辛丑三月也至本
006_0570_c_18L朝追謚圓敎國師制爲海東華嚴初
006_0570_c_19L第一張

006_0570_c_20L
白花道塲發願文

006_0570_c_21L
集曰將解此文大分爲二先釋題
006_0570_c_22L後釋正文此即題名於中前之
006_0570_c_23L{底}元統二年鷄林府開板本(海印寺所藏第五
006_0570_c_24L~七張缺落)
撰者名補入{編}

006_0571_a_01L네 글자(백화도량)는 귀의의 대상이 되는 곳이고, 뒤의 세 글자(발원문)는 귀의의 주체가 되는 마음이다.
앞의 네 글자 가운데 (“백화白花”에 대해) 정원본貞元本 『화엄경』 제16권에서 “관자재보살은 보달락가補怛洛迦에 계신다.”6)라고 하였다. 『청량소淸凉䟽』에서 이를 해석하여 “보달락가는 여기 말로 소백화수小白花樹이다. 이 산에 소백화수가 많아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고, (사람들이) 향기를 맡거나 꽃을 보면 기뻐한다.”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도량道場”에 대해 『화엄경』에서 또한 “선남자야, 그대는 정성무이행보살正性無異行菩薩이 이 대회도량大會道場으로 오는 것을 보았느냐?”라고 하였다. 관자재보살이 이 산에 상주하니, 대비행大悲行을 설하여 일체 중생을 두루 구하고 보살도를 행하는 장소이다.
뒤의 세 글자(발원문) 가운데, 바라고 구하는 것을 ‘원願’이라 하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발發’이라 하며, 표현하여 아름다운 문채를 이루는 것을 ‘문文’이라 한다.

제2편 본문을 해석함
제1장 귀경歸敬으로 관觀을 이루어 귀의의 주체와 대상을 잊음
1. 귀경의 의례를 전체적으로 나타냄
머리 숙여 귀의하옵고

둘째 본문을 해석함에 크게 셋으로 나눈다. 첫째는 귀경歸敬으로 관觀을 이루어 귀의의 주체와 대상을 잊는 것이고, 둘째 “이제 관음대성” 이하는 귀의하여 발원을 사뢰고 일을 이어받아 과보를 이루는 것이며, 셋째 “원을 발하였으니” 이하는 마치면서 귀의하여 우러러 받들고 본사本師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첫째 귀경歸敬으로 관觀을 이루어 귀의의 주체와 대상을 잊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귀경의 의례를 전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는 관觀의 특성을 개별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 귀경의 의례를 전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받들어 모시듯 머리를 땅에 닿게 숙이고, 자식이 어버이를 가까이하듯 우러러 받드니, 임금을 존중하고 어버이를 가까이하는 것이 공경과 믿음의 도를 지극히 하는 것이다.

2. 관觀의 특성을 개별적으로 밝힘
저의 본사이신 저 관음대성의 대원경지를 관하오며

둘째 관觀의 특성을 본격적으로 밝힌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관하오며(觀)”라는 한 단어는 관하는 주체의 지혜이고, “저의 본사(彼本師)” 이하는 관해지는 객체의 대상이다.
첫째 관하는 주체의 지혜에 대해 능관能觀을 관觀이라고 하면 의주석依主釋8)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소관所觀을

006_0571_a_01L四字所歸處後之三字能歸心
006_0571_a_02L中華嚴貞本經第十六卷云觀自在
006_0571_a_03L菩薩在補怛洛迦淸凉䟽釋云
006_0571_a_04L怛洛迦者此云小白花樹山多此樹
006_0571_a_05L香氣遠聞聞見必欣故以爲名
006_0571_a_06L道塲者經亦云善男子汝見正性
006_0571_a_07L無異行菩薩來此大1) [3]
006_0571_a_08L以是觀自在菩薩常在此山
006_0571_a_09L大悲行普救一切行菩薩道之塲也
006_0571_a_10L後中希望趣求之謂願起心形外謂
006_0571_a_11L之發發而成彩謂之文

006_0571_a_12L
稽首歸依

006_0571_a_13L
集曰二正釋文中大分有二 [1] 一歸
006_0571_a_14L敬成觀亡其能所二今以觀音下
006_0571_a_15L伸發願承事成果三發願已下結歸
006_0571_a_16L投仰廻向本師第一歸敬成觀亡其
006_0571_a_17L能所中二先惣標敬儀二別明觀相
006_0571_a_18L此即惣標敬儀也屈頭至地如臣奉
006_0571_a_19L投仰憑杔如子拊親尊尊親親
006_0571_a_20L則敬信之道盡矣

006_0571_a_21L
觀彼本師觀音大聖大圓鏡智

006_0571_a_22L
二正明觀相於中二觀之一字
006_0571_a_23L觀之智彼本師下所觀之境前中能
006_0571_a_24L觀名觀可作依主第二張 所觀名

006_0571_b_01L관이라고 하면 지업석持業釋9)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관한다’라는 말은 정신을 오롯이 하고 생각을 붙들어 매어 달아나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경遺敎經』에서 “마음을 풀어 두면 착한 일을 잃고, 한곳에 두고 제어하면 하지 못할 게 없다.”10)라고 하였다. 그러나 관觀만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지止도 행해야 완성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여래출현품」에서 게송으로 설했다.

若有欲知佛境界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當淨其意如虛空  마음을 허공같이 깨끗이 하라
遠離妄想及諸趣  망상과 온갖 집착 멀리 여의면
令心所向皆無㝵  마음 가는 곳 어디나 걸림 없으리11)

『청량소淸凉䟽』에서는 이렇게 풀이했다.
“위의 두 구절은 비유를 들어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고, 아래 두 구절은 개별적으로 그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아래 구절의 첫 구절은 망상과 집착을 벗어나므로 저 맑은 허공에 가리는 구름이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 이것이 참된 지止이다. 둘째 구절은 어떤 경계를 대하더라도 걸림 없음이 저 맑은 허공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 이것이 참된 관觀이다.……이러할진대 털지도 않고 밝히지도 않았는데도 저절로 깨끗하니, 맑음 없이 맑은 것이 부처의 경계를 그윽이 밟는 것이다.”12)

둘째 관해지는 객체의 대상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성인의 지혜 자체를 관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마음 자체를 관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 두 가지가 서로 통함(交徹)을 관하는 것이다.
“저의 본사이신 저 관음대성의 대원경지를 관하오며”는 첫째 성인의 지혜 자체를 관하는 것이다.
“본사”란 번뇌를 없앤 이래 언제나 스승으로 모셔 왔음을 이르는 말이다. 또 이 생에서만 스승으로 모신 게 아니라 아주 먼 겁劫부터 스승으로 모시어 대비행문大悲行門을 잇겠다고 서원한 것이다.
“관음대성”이라는 말은 범어로는 바로기지섭벌다婆盧枳底攝伐多13)이고, 여기 말로는 관세음觀世音이라 한다. 중생들의 음성을 관하여 해탈을 얻게 한다는 뜻인데, 관의 지혜로써 비추어 보는 것이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그 지위가 높아 비교할 것이 없으므로 ‘대大’라 하고, 비원悲願이 지극히 신령하므로 ‘성聖’이라 한다. 관의 대상 중에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14)를 관하는 것도 있고, 깨달음의 경지를 관하는 것도 있다. 의보와 정보를 관하는 것은 『무량수경無量壽經』15)에서 설한 바와 같다. 여기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관하는 것이므로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하였다. 이 대원경지는 중생의 의지처인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등각等覺의 무루위無漏位에 이르러

006_0571_b_01L即持業釋所言觀者專情繫念
006_0571_b_02L不令馳散故遺敎經云縱此心者
006_0571_b_03L喪人善事制之一處無事不辨
006_0571_b_04L不唯觀要有止行方成究竟故出現
006_0571_b_05L品偈云若有欲知佛境界當淨其意
006_0571_b_06L如虛空遠離妄想及諸趣令心所
006_0571_b_07L向皆無㝵淸凉䟽云上半偈惣以喩
006_0571_b_08L下半偈別現一離於妄取如彼
006_0571_b_09L淨空無雲翳故斯則眞止二觸境無
006_0571_b_10L如彼淨空無障碍故斯則眞觀
006_0571_b_11L乃至若斯則不拂不瑩而自淨矣
006_0571_b_12L淨之淨暗蹈佛境矣二所觀中三
006_0571_b_13L先觀聖智體二觀自心體三觀其交
006_0571_b_14L此則觀聖智也言本師者自零
006_0571_b_15L染已來常師事之謂也又非謂此世
006_0571_b_16L爲師無始劫來誓爲本師和尙
006_0571_b_17L承大悲行門也言觀音大聖者梵云
006_0571_b_18L婆盧枳底攝代 [2] 此云觀世音即觀
006_0571_b_19L其音聲而得度脫也觀智照之非耳
006_0571_b_20L識聞也位高無等曰大悲願至神曰
006_0571_b_21L此中或有觀依正或有觀證境
006_0571_b_22L觀依正則如無量壽經所說今則觀
006_0571_b_23L證境即大圓鏡智也此鏡智者
006_0571_b_24L生所依第八阿賴耶識至等覺無漏

006_0571_c_01L 대원경지로 전환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유식론』에서 “대원경지大圓鏡智는 몸과 국토, 지혜의 영상을 나타내고 생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나니, 마치 둥근 거울이 갖가지 색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16)라고 하였다. 이는 비유를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고, 시교始敎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17) 아뢰야식은 아마라식阿摩羅識18)이라고도 하고, 또 여래장경如來藏鏡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기신론소』에서 “여래장심如來藏心이 부처의 경지에 있을 때는 대상과 화합하지 않으므로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같고 진여眞如와도 같다.……”19)라고 하였는데, 이는 종교終敎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원교圓敎의 입장에서 말하면 이는 해인경海印鏡이다.
여기서 시교의 이치에 의거하여 대원경지를 밝힌 이유는, 종교의 여래장은 사성四聖과 육범六凡20)에 통하기 때문이고, 원교의 해인경은 삼승三乘에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등각等覺의 증심證心’이라는 의미를 택하여 관하는 객체의 대상으로 삼았다.21)

또한 제자의 성정본각性淨本覺을 관하옵니다.

둘째는 자신의 심체心體를 관하는 것이다.
“제자”는 의상 법사 자신으로, 성인을 따르고 자신을 삼가며 법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는 이를 말한다.
“성정본각性淨本覺”은 모든 중생이 갖추고 있는 심체心體이다. 『기신론』에는 일심의 법계에 둘이 있음을 밝혔으니,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생멸문 가운데 성정본각이 있으니, 곧 번뇌 속에 있는 진여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 “생멸문에 둘이 있다. 첫째는 각覺의 측면이니, 마음 자체가 망념을 떠나 있어 그대로가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라는 뜻이다 .”22)라고 하였다. 현수賢首는 『기신론소』에서 “수류문隨流門에서는 본각本覺이라 하고, 반류문返流門에서는 시각始覺이라 한다.”23)라고 하였으니, 이는 종교終敎의 입장이다. 시교始敎에 의하면

006_0571_c_01L位中轉成大圓鏡智故唯識論云
006_0571_c_02L大圓鏡智者此智能現能生身土智
006_0571_c_03L無間無斷窮未來際如圓鏡現衆
006_0571_c_04L色像故此乃從喩得名此約始敎說
006_0571_c_05L第三張 此阿賴耶翻爲阿摩羅識
006_0571_c_06L亦即名爲如來藏鏡故起信論䟽云
006_0571_c_07L如來藏心若在佛地無和合義
006_0571_c_08L始覺同本即如等此約終敎說若約
006_0571_c_09L圓敎是海印鏡也今且約始敎之義
006_0571_c_10L明大圓鏡者終敎如來藏通於四聖
006_0571_c_11L六凡圓敎海印鏡者不通三乘
006_0571_c_12L簡擧等覺證心之義爲所觀境

006_0571_c_13L
亦觀弟子性靜 [3] 本覺

006_0571_c_14L
二觀自心體言弟子者相公自謂也
006_0571_c_15L順聖恭己從法化生之謂也言性靜
006_0571_c_16L本覺者一切衆生具有心體也起信
006_0571_c_17L論明一心法界有二一心眞如門
006_0571_c_18L心生滅門生滅門中有性靜本覺
006_0571_c_19L即在纒眞如故論云生滅門中有二
006_0571_c_20L一覺義謂心體離念即是如來平等
006_0571_c_21L法身賢首䟽云隨流門名本覺
006_0571_c_22L流門名始覺此約終敎若依始敎
006_0571_c_23L「衆」華嚴經本文作「會」{編}「海」華嚴經本
006_0571_c_24L文作「中」{編}

006_0572_a_01L아뢰야식이 근신根身과 기세계器世界와 제법의 종자種子를 변현시킨다. 그러므로 『유가瑜伽』에서 “연기하고 생멸하는 현상(事)에서 아뢰야식을 건립한다. 업 등의 종자가 식체識體에 의지하여 생길 때 이숙보식異熟報識(아뢰야식)이 제법의 의지처가 된다.……”24)라고 하였다. 원교圓敎에 의하면, (제자의 성정본각을) ‘노사나불의 지혜’라 할 수 있으니, 노사나불의 과지果智가 중생계에 두루하여 원인을 짓고 결과를 짓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래출현품」에서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으나 단지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하니, 망상을 떠나면 일체지一切智와 자연지自然智가 바로 나타나리라.……”25)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셋 중에) 종교의 자성청정심을 자기 마음 자체로 본 것이다.

[1] 이는 동일한 체體여서 청정하여 깨끗하고,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텅 비어 공적하여, 중생과 부처의 상이 없고 주체와 대상의 명칭이 사라졌습니다.

셋째는 이 두 가지가 서로 통함을 관하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일한 체體여서 조건(緣)이 사라진 것이고, 둘째는 체體에 즉한 상相이고, 셋째는 체體에 즉한 작용(用)이고, 넷째는 작용을 거두어서 체로 귀결시키는 것이다.
이 절은 곧 ‘동일한 체여서 조건이 사라진 것’에 해당한다. 관음이 증득한 마음과 제자의 심체心體는 일찍이 두 가지 바탕이 없어서 움직이건 고요하건 하나의 근원이다. 이는 현수 국사의 『환원관』에 나오는 자성청정원명체自性淸淨圓明體를 가리킨다. 저 문장에서 “성인의 몸에 있어도 늘지 않고 범부의 몸에 처하여도 줄지 않는다.”26)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동일한 체體이다.”라고 하였다. 또 “흐름을 따라 오염을 더해도 더러워지지 않고, 흐름을 거슬러 오염을 없애도 깨끗해지지 않는다.”2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청정하여 깨끗하다.”라고 하였다. 또 “성체性體가 두루 비추어 어떤 어두움도 비추지 않음이 없다.”28)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방세계에 두루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의상) 법사의 『법계도』에 나온 ‘법성法性의 증분처證分處’에 해당한다. 저 글에서 말한 “법성 원융法性圓融”이 바로 여기서 말한 “두루함(周遍)”에 해당하고, “본래 고요함(本來寂)”이 여기서 말하는 “텅 비어 공적함(廓然空寂)”에 해당하고, “이름도 없고 상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다.”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중생과 부처의 상이 없고 주체와 대상의 명칭이 사라졌다.”에 해당한다. 즉 참된 법성法性에는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고 구해야 할 깨달음도 없으며, 증득하는 주체와 증득되는 대상의 차별된 명칭도 없다는 말이다.

이미 깨끗하므로 비추는 데 어그러짐이 없어 삼라만상이 그 속에 단박에 나타납니다.

둘째는 체體에 즉한 상相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것을 매듭지어 뒤를 일으키는 것이다. 둘째 “(삼라)만상” 아래는 상대相大의 성덕性德을 곧장 밝히는 것이다.
첫째 가운데 “이미……”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청정하여 깨끗하다.”는 것을 거듭 거론한 것이고, “비추는 데……”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시방세계에 두루하다.”는 것을 거듭 거론한 것이다.
둘째 가운데 해인경海印鏡의 바탕은 그 본성이 본래 맑고 청정하여, 두루 비춘다는 의미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 체體이다. 그리고 모든 만상이 그 속에 단박에 나타나 뚜렷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은 상相이다. 그러므로 청량淸涼이 말하기를 “대략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공하지 않은 항하의 모래와 같은 본성에 의거하는 것이니, 동교同敎의 뜻에 해당한다. 둘째 사사무애事事無礙하여 십현十玄의 상이 본래 구족한 것이니, 별교의 뜻에 해당한다.……그러므로 ‘온갖 묘함을 머금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하였다.”29)라고 했다. 여기서는 뒤의 의미를 따른 것이니, 현수의 『환원관還源觀』30) 중 해인삼라상주용海印森羅常住用의 뜻이다. 그러나 『환원관』의 뜻은 바로 용用에 해당하고, 상주의 용(常住之用)도 상대相大를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체體·상相·용用 삼대三大가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삼라만상은 한 법에서 찍혀 나온(印) 것이다.”31)라고 한 『법구경』의 말씀이 바로 그 의미이다.【‘한 법’이란 체대體大를 뜻한다.】

본사의 수월장엄과 한량없는 상호는
제자의 헛된 몸과 유루32)의 형체와
의보와 정보의 청정함과 더러움, 괴로움과 즐거움이 같지 않습니다.

셋째33)는 체體에 즉한 작용(用)이니, 바로 해인삼라상주용海印森羅常住用의 뜻이다. 여기에 셋이 있다. 첫째는 성인의 상호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 “제자의 헛된 몸(亦有)” 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밝히는 것이며, 셋째 “의보와 정보” 이하는 범부와 성인이 같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다.
첫째 가운데 “수월장엄”이란, 모든 중생이 위험과 고통을 당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006_0572_a_01L賴耶藏識能變根身器界諸法種子
006_0572_a_02L故瑜伽云綠起生滅事中建立賴耶
006_0572_a_03L從業等種辨體而生異熟報識
006_0572_a_04L諸法依等若依圓敎可云舍那果智
006_0572_a_05L謂舍那果智該衆生界作因作果
006_0572_a_06L故出現品云一切衆生具有如來智
006_0572_a_07L慧德相但以妄想執著而不證得
006_0572_a_08L離妄想一切智自然智即得現前
006_0572_a_09L今取終敎自性淸淨心爲自心體
006_0572_a_10L
第五張缺落 [4]
006_0572_a_11L
006_0572_a_12L衆妙而有餘等今約後義即賢首還
006_0572_a_13L源中海印森羅常住用義也然還源
006_0572_a_14L之義正當用中而其常住之用
006_0572_a_15L不離相大此是體相用三不相捨離
006_0572_a_16L之義也經云森羅及萬像一法之所
006_0572_a_17L即其義也一法即
體大也

006_0572_a_18L
所有本師水月㽵嚴無盡相好亦有
006_0572_a_19L弟子空花身相有漏形骸依正淨穢
006_0572_a_20L苦樂不同

006_0572_a_21L
三即體之用正是海印森羅之義
006_0572_a_22L中三先明聖相好次亦有下明自身
006_0572_a_23L後依正等者凡聖不同前中水
006_0572_a_24L月㽵嚴者一切衆生危苦之時至心

006_0572_b_01L관음대성의 이름을 부르면 관음대성이 그 음성을 관하시고 갖가지 상호로써 모든 중생에게 두루 감응하심이 마치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으므로 ‘수월장엄’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보살의 청량한 달에 중생의 마음 물이 맑아진다.……”라고 하였다.
“한량없는 상호”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관음대성은 키가 80억 나유타那由他 항하사恒河沙 유순由旬이고 몸은 자금색紫金色이다. 정수리에 육계肉髻가 있고 목에는 원광圓光이 있는데, 각 면面의 원광 속에 오백 명의 화신불인 석가모니가 계신다. 하나하나의 화신불마다 오백 보살이 있는데, 백호상白毫相에서 팔만 사천 가지 광명이 흘러나오고, 하나하나의 광명마다 무량 백천 화신불과 화신보살의 팔과 손바닥이 있어서 각기 팔만 사천 광명으로 일체를 두루 비춘다.”34)라고 하였고, 또 부처님이 아난에게 이르기를 “관음대성을 관찰하는 이는 갖가지 재앙을 만나지 않고 업장이 깨끗이 소멸되며, 무수한 겁 동안 지은 생사의 죄가 소멸되나니, 이 보살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무량한 복을 얻게 되거늘 하물며 자세히 관찰함에 있어서랴.”35)라고 하였다.

둘째 “제자의(亦有弟子)” 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밝힌 것이다.
“헛된 몸(空花身相)”이란 [1] , 일체 중생이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점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여러 상을 보는 것이 마치 눈동자를 부릅뜨고 노려보다 피로해지면 허공에서 따로 헛꽃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36) 그러므로 『원각경』에서 “사대四大를 잘못 알아서 자기 몸의 상相으로 삼고, 육식六識을 반연하는 그림자를 자기 마음의 상으로 삼으니, 비유하면 저 병든 눈에 허공꽃이 보이는 것과 같다.……”37)라고 하였다.
“유루의 형체”라는 것에서, 나의 이 몸의 상相은 여러 조건을 빌려 화합한 것이므로 허망하여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 마치 배에 물이 새면 물을 건너지 못하고 곧장 가라앉는 것과 같으므로 “유루”라고 하였다. 혹은 ‘유루라고 하는 것은 번뇌의 작용이니, 탐貪 등의 불선不善이 생사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의보와 정보의 청정함과 더러움……”이라는 것은, 셋째 범부와 성인이 같지 않음이니, 본사本師와 제자弟子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두 가지 보報를 통틀어 거론하였다.
즉 본사의 의보는 서방정토 및 백화도량 등이니, 이는 화토化土이다. 대원경지大圓鏡智나 해인경지海印鏡智나 일미법계一味法界는 법성토法性土이니, 바로 자수용토自受用土이다. 그런데 자수용토는 변현의 주체(能變現)이고, 화토는 변현된 대상(所變現)이니, 앞에서는 ‘변현의 주체’에 의거하였고, 여기서는 ‘현현된 대상’에 의거하였다. 정보는 위에서 말한 ‘상호로 몸을 장엄함’ 등에 해당하니, 이는 청정하고 즐거운 것이다.
제자의 의보는 바로 사바세계의 산하 등의 기세계器世界이고, 정보는 오온五蘊으로 가립된 몸의 상이니, 이는 더럽고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대원경大圓鏡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넷째는 작용을 거두어서 체體로 귀결시키는 것이니, 앞서 말한 본사의 상호相好와 제자의 신상身相 등 의보와 정보의 차별을 거두어서 평등한 체성體性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다. 이는 『환원관』의 “성기번흥법이지性起繁興法爾止”38)에 해당한다. 『십구장』에서는 “해인경海印鏡에 현현한 영상이란, 나의 오척신五尺身이 삼세간三世間을 갖추고 있으므로 별도로 주처住處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주無住라고 하였다. 무주는 바로 움직이지 않는 것(不動)이다. 이미 머묾이 없는 나의 몸이라면 어디서부터 와서 어느 곳으로 움직이는가?”39)라고 하였으니, 그것의 의도는 이와 같다.

어째서 이 문장을 기술할 때 처음은 시교始敎에 의거하고, 다음은 종교終敎에 의거하고, 마지막은 원교圓敎에 의거했는가? 또 관음대성의 입장에서는 대원경지라 하고, 제자의 입장에서는 성정본각이라 하지만, 마지막의 ‘한 몸으로 통하는 문(同體交徹門)’에서의 의미는 해인경海印鏡을 쓰는 것이니, 그 의미는 어떠한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대원경지大圓鏡智는 범부의 단계에는 해당되지 않고 부처님의 과위에만 해당된다. 성정본각性淨本覺은 이미 생멸문에서 언급했던 대로 부처님의 과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둘이 한 몸으로 서로 융합한다는 뜻은 원교圓敎에 와서야 구경究竟이 되기 때문에 해인경의 뜻에 의거하여 결론을 맺은 것이다. 둘째, 일불승에서

006_0572_b_01L稱觀世音名者大聖觀其音聲而以
006_0572_b_02L種種相好普應一切猶如月輪普現
006_0572_b_03L衆水故云水月㽵嚴故經云菩薩
006_0572_b_04L淸凉月衆生心水淨等也無盡相好
006_0572_b_05L觀無量壽經云觀世音菩薩
006_0572_b_06L長八十億那由他恒河沙由旬身紫
006_0572_b_07L金色頂有肉髻項有圓光面各圓
006_0572_b_08L光中有五百化佛釋迦牟尼一一化
006_0572_b_09L有五百菩薩毫相流出八萬四千
006_0572_b_10L種光明一一光明有無量百千化佛
006_0572_b_11L菩薩臂及手掌各有八萬四千光明
006_0572_b_12L普照一切乃至佛告阿難若觀觀世
006_0572_b_13L音菩薩者不遇諸禍淨除業障
006_0572_b_14L無數劫生死之罪如此菩薩聞名
006_0572_b_15L無量福何況諦觀次亦有弟子下
006_0572_b_16L二明自身相言空第七張缺落 [5]

006_0572_b_17L
006_0572_b_18L
敎耶又大聖邊云大圓鏡弟子邊
006_0572_b_19L云性淨覺終於同躰交徹門中義
006_0572_b_20L海印鏡其義云何有二意一大
006_0572_b_21L圓鏡智者不通凡位唯當果位性淨
006_0572_b_22L覺者旣於生滅門中所論不屬果位
006_0572_b_23L其同體即入之義於圓敎方究竟故
006_0572_b_24L約海印鏡義而終也二所以於一佛

006_0572_c_01L삼승을 설하는 까닭은 각기 근기가 정해지지 않은 삼승을 위해 점점 걸러 내어 애써서 구경의 일승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의상 법사 또한 부처님의 뜻에 따라 하근기 중생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 깨닫게 하려는 까닭에서 차례를 정하였다. 그러므로 『법계도』 서문에서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들이 이름 없는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길 바란다.”40)라고 하셨으니, 바로 이 뜻이다.

앞에서 삼교三敎(시교·종교·원교)에 의거하여 글을 서술했는데, 왜 소승교와 돈교는 언급하지 않는가?41)
소승은 생사를 두려워하고 대승에 대해서도 겁을 먹고 있는데 어찌 일승의 큰 원願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또 돈교에서는 차별 현상이 단박에 끊어지는 것과 마음을 관찰하여 성품을 보는 것도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며,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야 부처라 한다. 그러므로 상相을 관찰하고 원을 발하는 이 글에서 어찌 돈교를 가지고 서술하겠는가? 그러나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한 몸으로 통하는 문(交徹門)의 체대體大 중에 돈교의 가르침이 약간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일승과는 총체가 완전히 다르다.

대원경지 중에도 단박에 나타난다는 뜻이 있으므로 시교와 종교에서 모두 대원경지로 밝혔다. 그러면 왜 해인경海印鏡의 삼라森羅를 구경으로 삼는가? 그렇지 않다면, 시교에서는 방편으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대원경지를 언급하여 명을 따랐으나, 무슨 뜻으로 종교에서도 대원경지를 언급하는가?
시교와 종교에서도 대원경지를 언급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융통한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다만 공空의 뜻에 주안점을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십구장十句章』42)에 “시교에서는 부처님의 대원경지 중에 모습을 나타낸다는 뜻이지, 의지하는 주체와 의지할 대상이 한 몸이라는 것은 아니다. 숙교熟敎(종교)에서는, 인훈습경因熏習鏡43) 중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성정본각심에서 생기는 것이지 새록새록 일어나는 마음에서 갖가지 대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지하는 주체와 의지할 대상이 한 몸이기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006_0572_c_01L說三乘者各爲三乘根不定者
006_0572_c_02L漸以淘汰務令引導究竟一乘也
006_0572_c_03L公亦依佛意爲令下機望上取證
006_0572_c_04L作次第也故法界圖序云冀以執名
006_0572_c_05L之徒還歸無名眞源即此義也
006_0572_c_06L旣約三敎述文何故不擧小乘及頓
006_0572_c_07L敎耶小乘則恐生死怖大乘何得
006_0572_c_08L預於一乘大願又頓敎則事相頓盡
006_0572_c_09L觀心見性亦曰生心一念不生即名
006_0572_c_10L爲佛故於此觀相發願亦何所述
006_0572_c_11L然苟得其意於交徹門體大之中
006_0572_c_12L含其敎然與一乘惣體全別也
006_0572_c_13L圓鏡智中亦有頓現之意故始終皆
006_0572_c_14L以圓鏡智明也何故要以海印鏡森
006_0572_c_15L羅爲究竟耶不然則始約方便引接
006_0572_c_16L之義擧大圓鏡聞命矣終亦擧其大
006_0572_c_17L圓鏡智其義云何始終雖大圓鏡
006_0572_c_18L然其所現未能融通但約即空之
006_0572_c_19L義耳故十句章云始敎有義佛
006_0572_c_20L圓鏡智中現像非謂能依所依一身
006_0572_c_21L熟敎因1) [4] 習鏡中現像第八張
006_0572_c_22L性淨心生非從新新心生種種境
006_0572_c_23L亦是能依所依一身然是圓成實也
006_0572_c_24L「重」疑「熏」{編}

006_0573_a_01L일승에서는 체體가 원융하므로 갖가지로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가 물 자체(水身)이다. 이러한 의미에 따르기 때문에 (스승의 대원경지와 제자의 성정본각이) 한 몸으로 통한다는 대목을 해인삼라海印森羅로 해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상 법사께서 『법계도』를 풀이한 글에서 “(사각인四角印 속에 새겨 넣은 것으로) 석가여래의 교망敎網에 포함되는 세 가지 세간이 해인삼매에서 나와서 복잡하게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하려 하였다.”44)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볼 때 이 교철문 중에 세 가지 세간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스승의 수월장엄”은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이고, “제자의 몸”은 중생세간衆生世間이며, “스승과 제자가 의지하는 국토”는 기세간器世間45)이다. 이렇게 배대하면 의혹은 없어진다. 종교에서 또한 대원경지를 언급하는 것은 이 경지가 곧 일심법계이고 무장애법계이며 노사나불의 과지果智이고 해인경이기 때문이다. 삼승의 분별된 집착을 깨뜨려 우리 법의 기쁨을 함께하여 삼승을 일승에 동참하게 하려는 것뿐이니, 바로 『오교장五敎章』 중의 법상교참동교의法相交叅同敎義이다. 그러므로 의상 법사는 『법계도』에서 “삼승의 방편교문方便敎門에 의지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일승원교一乘圓敎에 의지하므로 앞뒤가 있지 않다.”46)라고 하였다.

이미 석가여래의 해인삼매를 표현하고자 한다고 했고, 또 『오교장』에서 “여기서는 석가모니불의 해인삼매를 열고자 한다.”47)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 날 아침에 증득한 마음이라야 해인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왜 인위因位에서 증득한 지혜를 관하는 것을 해인이라 하는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지엄 화상智儼和尙이 오중해인五重海印48)을 밝혔고, 균여 법사均如法師가 인위로서의 해인(因海印)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관음대성께서 과거에 정법명왕여래正法明王如來가 된 뒤에 이제 교화의 자취(迹門)를 보이신 것이니, 어찌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아니겠는가?

인해인因海印을 논한다면 『대집경』에서

006_0573_a_01L一乘中體融故顯現種種像直是水
006_0573_a_02L約此義故要以海印森羅爲交徹
006_0573_a_03L又況相公法界圖釋文云欲表釋
006_0573_a_04L迦如來敎網所攝三種世間從海印
006_0573_a_05L三昧繁出顯現以此論之則於此
006_0573_a_06L交徹門中具三世間也謂本師水月
006_0573_a_07L㽵嚴即智正覺世間弟子身相即衆
006_0573_a_08L生世間本師及弟子依土即器世間
006_0573_a_09L以此對之尙無惑矣其終亦擧
006_0573_a_10L大圓鏡智者此鏡智即一心法界
006_0573_a_11L是無障碍法界亦舍那果智亦海印
006_0573_a_12L鏡也爲破三乘別執而生同於我法
006_0573_a_13L之欣但以三乘叅於一乘耳即五敎
006_0573_a_14L章中法相交叅同敎義也故相公法
006_0573_a_15L界圖云依三乘方便敎門高下不同
006_0573_a_16L依一乘圓敎故無有前後旣云欲
006_0573_a_17L表釋迦如來海印三昧又五敎章云
006_0573_a_18L今將開釋迦佛海印三昧則海印者
006_0573_a_19L佛始成正覺之旦證心方曰海印也
006_0573_a_20L何故觀因人證智云海印耶有二
006_0573_a_21L智儼和尙明五重海印而均如法
006_0573_a_22L又加因海印也又此大聖過去
006_0573_a_23L已成正法明王如來今示迹門豈非
006_0573_a_24L果人耶若論因海印者大集經云

006_0573_b_01L “비유하자면 염부제 일체 중생의 몸과 그 밖의 외색外色이 바닷속에 모두 상像을 갖는 것과 같다. 그것을 ‘큰 바다가 인印이 된다.’고 하듯이, 보살도 이와 같이 큰 해인삼매를 얻는다.”49)라고 했는데, (인해인因海印은) 『대집경』의 설과 어떻게 다른가?
『대집경』의 해인도 영상을 나타낸다는 뜻이 있지만, 이는 단지 의지할 바탕(依持)이 된다는 뜻이지 겹겹으로 즉입卽入한다는 뜻은 없고, 나타내 보인 대상 그대로가 나타내는 주체라는 뜻도 없다. 반면 이 일승종一乘宗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세간법은 곧 대원경大圓鏡의 체여서 거울 밖을 벗어나 나타나는 영상이 없고, 그 나타나는 바는 겹겹이 한량없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여서 원융하고 자재하며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대집경』의 해인과는 같지 않다.

제2장 귀의하여 발원을 사뢰고 일을 이어받아 과보를 이룸
1. 귀의하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표방함
이제 관음대성의 거울 속의 제자의 몸으로
제자의 거울 속의 관음대성께 목숨 바쳐 정례하옵고

둘째, 발원을 사뢰고 일을 이어받아 결과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 둘이 있다. 첫째는 귀의하는 모습을 전체적으로 표방하는 것이고, 둘째는 발원을 별도로 밝히는 것이다.
이는 귀의하는 모습이니, 여기에 둘이 있다. 첫째는 귀의하는 주체인 몸이고, 둘째는 귀의의 대상인 성인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관음대성의 대원경지와 제자의 성정본각이 동일한 체體이고, 번뇌를 떠나 청정하여 삼라만상의 본체와 영상이 단박에 나타난다. 이는 다만 막힘없는 일법계一法界의 체體여서,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과위果位로서의 해인이 되고, 보살의 증득은 인위因位로서의 해인이 되니, 분分과 만滿50)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제자가 저 관음대성의 거울 속에 나타나고 관음대성이 제자의 거울 속에 나타나므로, 미혹하면 생사이고 깨달으면 열반이다. 이렇게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다고 하나 그 체體는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기품性起品」에 “여래의 몸 가운데서 일체 중생이 보리심을 발하여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어 적멸·열반에 드는 것까지를 다 볼 수 있다.”51)라고 하고, 또 “보살이 자기의 몸속에

006_0573_b_01L喩如閻浮提一切衆生身及餘外色
006_0573_b_02L於海中皆有像第九張 以是名大海
006_0573_b_03L爲印菩薩亦如是得大海印三昧
006_0573_b_04L與此何別大集經海印亦有現像
006_0573_b_05L之義但是依持之義無有重重即
006_0573_b_06L入之義亦無所現即能現之義今此
006_0573_b_07L一乘宗中所現三世間法即是鏡體
006_0573_b_08L無有鏡外所現之像而彼所現重重
006_0573_b_09L無盡一即一切 一切即一圓融自
006_0573_b_10L無障無碍與彼不同也

006_0573_b_11L
今以觀音鏡中弟子之身歸命頂禮
006_0573_b_12L子鏡中觀音大聖

006_0573_b_13L
第二敬伸發願承事成果於中二
006_0573_b_14L惣標歸相二別明發願此則歸相
006_0573_b_15L於中二先能歸身後所歸聖可知
006_0573_b_16L如上大聖鏡智弟子本覺旣同一體
006_0573_b_17L淸淨離染萬像本影森羅頓現
006_0573_b_18L此無儻一法界體諸佛證爲果海印
006_0573_b_19L菩薩證爲因海印但分滿異可故弟
006_0573_b_20L子現彼大聖鏡中大聖現於弟子鏡
006_0573_b_21L迷之生死悟則涅盤迷悟雖殊
006_0573_b_22L其體莫二故性起品云如來身中
006_0573_b_23L悉見一切衆生發菩提心 成等正覺
006_0573_b_24L乃至寂滅涅盤又云菩薩自知身中

006_0573_c_01L부처의 보리菩提가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자기의 마음속과 같이 일체 중생의 마음속도 이와 같음을 스스로 안다.……”52)라고 하였다. 현수 국사의 주석에도 “‘여래의 몸’ 이하는 다섯째 인과를 드러내는 문(顯因果門)이다. 보리의 몸이 중생계와 같으므로 중생이 그 속에 나타나니, 저 나타나는 대상은 나타나는 주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불하지 못할 중생이 없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하니 바라건대 가벼이 여기지 말라.”53)고 하였다. 청량국사가 “세간에서 스승과 제자가 한 거울을 같이 대하고 있을 때, 스승 쪽에서 보면 스승의 거울이고 제자 쪽에서 보면 제자의 거울이다.”54)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목숨 바쳐(歸命)”란 현수의 『기신론소』에 “귀의하는 주체의 정성을 드러내는 것이니, 귀歸는 의지하고 투신하여 향해 간다는 뜻이고, 명命은 모든 기관(根)을 총괄하는 한 몸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사람이 이 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없다.”55)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들어 가장 높은 분(尊)께 바치는 것이다.

2. 발원을 별도로 밝힘
진실한 발원을 사뢰오니 가피를 내려 주소서
오로지 원하옵건대
제자는 세세생생 관세음을 부르며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보살께서 아미타불을 머리에 이고 다니시듯이56)

둘째 발원을 별도로 밝히는 것이니, 여기에 둘이 있다. 첫째는 가피를 청함을 표방하는 것이다. 둘째 “오로지 원하옵건대” 이하는 두 가지 원을 함께 밝히니, 첫째는 스승과 같아지겠다는 원이고, 둘째는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원이다.
첫째 가피를 청하는 데 있어 중생의 원력이 비록 깊다 하나 관음대성이 명훈가피를 빌려야만 대원大願을 이룰 수 있으니,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데 뱃사공의 지혜로운 방편에 의지해야만 그 뜻을 이루는 것과 같다. 『청량소』에 “위에 하얀 달이 있어도 아래의 맑은 못에 의존해야 한다. 못이 맑아야 달이 나타나듯 중생이 발원해야 보살의 감응이 생긴다. 물이 맑지 못하면 어찌 달이 밝겠으며,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면 감응이 어찌 이렇게 빠르겠는가.”57)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진실한 발원을 사뢰오니”라고 하였다.

006_0573_c_01L有佛菩提如自心一切衆生心中
006_0573_c_02L如是等賢首釋云如來身下第五
006_0573_c_03L顯因果門以菩提身等衆生界
006_0573_c_04L故衆生悉於中現以彼所現同能現
006_0573_c_05L是故衆生無不成佛第一○張
006_0573_c_06L此文是大節幸不輕之淸凉云
006_0573_c_07L世師資同對一鏡若以師取之
006_0573_c_08L師之鏡若以弟子取之即弟子鏡者
006_0573_c_09L即此義也言歸命者賢首起信䟽云
006_0573_c_10L顯能歸誠歸者依投趣向命者
006_0573_c_11L御諸根一身之要人之所重
006_0573_c_12L不爲先擧此無二之命以奉無上
006_0573_c_13L之尊

006_0573_c_14L
發誠願語冀蒙加被惟願弟子生生
006_0573_c_15L世世稱觀世音以爲本師如菩薩頂
006_0573_c_16L戴彌陁

006_0573_c_17L
二別明發願中二先標請加次惟願
006_0573_c_18L雙明兩願一願同本師二願生淨
006_0573_c_19L就請加中衆生願力雖深要借
006_0573_c_20L大聖冥如能成大願如人乘舡渡海
006_0573_c_21L要依蒿師智方方遂其志淸凉䟽云
006_0573_c_22L上有白月下資澄潭潭淸月現
006_0573_c_23L感應生水若不淸月豈分明心若
006_0573_c_24L不誠應何斯速故云發誠願語等

006_0574_a_01L『정원소貞元䟽』에서는 최적정바라문最寂靜婆羅門이 얻은 법문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진실한 발원……’이란 전체적으로 말해서 거짓이 없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별도로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진리에 계합하여 잃어버림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처음과 끝이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스스로 행함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며, 넷째는 남을 이롭게 하는 데 헛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의미를 갖추었으므로 ‘진실한 발원’이라 한다.”58)

(두 가지 원 가운데) 첫째 스승과 같아지겠다는 원에 또 둘이 있다. 먼저는 같아지겠다는 대상의 예를 드는 것이고, 나중은 같아지는 주체를 분별하는 것이다.
이는 같아지겠다는 대상의 예를 드는 것이다. 『정원소』에는 “정수리 위에 계신 화불化佛이 곧 본사本師이다.”59)라고 하였고, 『능엄경』에는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말씀하시기를, 생각건대 옛날 항하사겁恒河沙劫에 부처님이 출현하였으니 관세음이라 합니다. 저는 그 부처님께 보리심을 발하였고, 그 부처님은 저에게 문聞·사思·수修60)를 따라 삼매(三摩地)에 들게 하셨습니다.61)……그 부처님이 원통법문을 잘 얻었다고 저를 칭찬하시면서 대중들 가운데서 수기하시고 관세음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제가 듣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시방이 두루 밝아져 관세음의 이름이 시방세계에 두루하였습니다.”62)라고 하였고, 『계환소戒環䟽』에는 “스승인 부처님의 이름도 관세음인 것은 원인과 결과가 부합한다는 뜻이며, 고금古今이 한결같은 도道라는 뜻이다.”63)라고 하였다.
우리 의상 법사께서 관음대성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도 이와 같다. 어진 이를 보고 같아지려는 것64)이야말로 진정 고금이 한결같은 도라고 하는 것이다.

저 또한 관음대성을 머리에 이고 다니겠습니다.
십원·육향65)과 천수천안과 대자대비가 모두 관음대성과 같아지고
몸을 버리는 이 세상과 몸을 받는 저 세상에서 머무는 곳마다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언제나 설법을 듣고 참된 교화를 돕겠습니다.

이는 같아지는 주체이다.
『초지론初地論』66)에서는 “우열을 비교하는 데에 둘이 있다. 첫째 무량행無量行을 행하는 것은 자리自利이고, 둘째 중생과 함께하는 것은

006_0574_a_01L貞元䟽釋最寂靜婆羅門所得法門云
006_0574_a_02L誠願語者摠謂無妄別有四義
006_0574_a_03L稱理無失故二始終無違故三自行
006_0574_a_04L無違故四利他不虛故具此四義
006_0574_a_05L名誠願語一願同本師中亦二先例
006_0574_a_06L所同后辨能同此則所同貞元䟽
006_0574_a_07L頂上化佛即本師也楞嚴經
006_0574_a_08L世音菩薩白佛言憶念我昔1) [5] 河沙
006_0574_a_09L有佛出2) [6] 名觀世音我於彼
006_0574_a_10L發菩提心彼佛敎我從聞思修
006_0574_a_11L入三摩地第一一張 乃至云彼佛
006_0574_a_12L如來歎我善得圓通法門於大衆中
006_0574_a_13L授記我爲觀世音號由我觀聽十方
006_0574_a_14L圓明故觀音名遍十方界戒環䟽
006_0574_a_15L所師之佛亦名觀世音者因果相
006_0574_a_16L古今一道也我相公之師事觀音
006_0574_a_17L亦猶是也見賢思齊眞所謂古今一
006_0574_a_18L道歟

006_0574_a_19L
我亦頂戴觀音大聖十願六向千手千
006_0574_a_20L大慈大悲悉皆同等捨身受身
006_0574_a_21L界他方隨所住處如影隨形恒聞說
006_0574_a_22L助揚眞化

006_0574_a_23L
二能同中初地論云校量勝有二
006_0574_a_24L一行無量行即是自利二與衆生同

006_0574_b_01L이타利他이다.”67)라고 하였다. 『초지론』을 가지고 이 발원문 역시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십원·육향” 이하는 자리행이고, 둘째 “널리 온 누리” 이하는 이타행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이로움이 이승二乘보다 뛰어나므로 앞에서 삼교三敎만 언급하고 이승의 행은 언급하지 않았다.
(첫째 자리행 가운데) “십원 등”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 주문을 외우는 자가 큰 원·향을 발하면, 관음대성이 그것에 따라 그가 십원·육향을 모두 이루도록 하는 것이지 관음대성이 스스로 원·향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관음대성은 일찍이 부처님 계신 곳에서 그러한 원·향을 발하고서 중생에게 나와 같이 이러한 큰 원을 발하라고 가르쳤으니, 그렇다면 관음대성께서 본디 발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수천안경』에 따르면 후자의 뜻이 경에 부합하니, 그 경에 “제가 생각건대 과거겁過去劫에 천광왕정주여래千光王靜住如來라는 부처님이 출현하셨습니다. 그 부처님이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또 일체 중생을 위해 이 『대비심다라니』를 설하였습니다. 제가 이 다라니를 듣고 제8지에 올라 이렇게 서원하였습니다. ‘제가 장차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면 저의 몸으로 하여금 즉시 천수천안을 갖추게 하고,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동남童男·동녀童女 등으로 이 다라니를 지송하는 자는 모든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켜서 먼저 나를 따라 이렇게 발원하게 하여지이다.’”68)라고 하였다. 나를 따라 발원해야 한다고 했다면, 어찌 먼저 서원하지 않고 중생들만 하도록 하였겠는가. 비록 ‘나무대비관세음’이라고 했지만 ‘본사관세음여래’라고 해도 되고, 또 자신의 명호를 불러서 가피를 입게 한다고 해도 된다.

“십원十願”이라는 것은 원이 열 가지이나 구하는 것은 다섯 가지이니, 곧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이른바 다섯 쌍의 열 가지 원(五雙十願)이니, 각기 앞의 서원이

006_0574_b_01L即是利他以彼准此亦有二義
006_0574_b_02L十願六向下即自利行二普令法界
006_0574_b_03L是利他行如是二利勝於二乘
006_0574_b_04L前但擧三敎不擧二乘行也
006_0574_b_05L十願等者或云是誦呪者發大願向
006_0574_b_06L大聖應彼令彼十願六向皆遂
006_0574_b_07L謂大聖自發願向也或云大聖曾於
006_0574_b_08L佛所發其願向故令衆生敎如我
006_0574_b_09L發如是大願則觀音聖本所發願也
006_0574_b_10L准千手千眼經後意如經謂經云
006_0574_b_11L念過去劫有佛出世號千光王靜住
006_0574_b_12L如來彼佛憐愍我故及爲一切衆生
006_0574_b_13L說此大悲心陁羅尼我聞此呪超第
006_0574_b_14L八地即發誓言若我當來堪能利
006_0574_b_15L益一切衆生者令我即時第一二張
006_0574_b_16L身生千手千眼皆悉具足若有比丘
006_0574_b_17L比丘尼優婆塞優婆夷童男女等
006_0574_b_18L誦持者於諸衆生起慈悲心先當
006_0574_b_19L從我發如是願旣說從我發願
006_0574_b_20L豈自不先發誓唯敎衆生而已耶
006_0574_b_21L云南無大悲觀世音亦可云本師觀
006_0574_b_22L世音如來亦可云敎念自號使蒙加
006_0574_b_23L被也十願者願雖十種所求五種
006_0574_b_24L即四弘誓願謂五雙十願各先願其

006_0574_c_01L원인이고 뒤의 서원이 결과이다.
첫째와 둘째 (쌍)의 네 가지 원69)의 경우, 지혜안智慧眼을 얻은 뒤에 일체법을 알게 되고, 선방편善方便을 얻은 뒤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가) 그 뒤의 것들과 순서가 같지 않은 이유는, 앞의 것은 반연의 대상인 경계이고 뒤의 것은 반연의 주체인 마음이어서 대상이 있고 마음이 뒤따르는 것이 반연하는 뜻의 순차이기 때문이다. 첫째(願我速知一切法)는 알아야 할 경계이고, 둘째(願我早得智慧眼)는 아는 주체인 마음이며, 셋째(願我速度一切衆)는 제도할 대상이고, 넷째(願我早得善方便)는 제도하는 주체이다. 앞의 둘은 법문을 배우겠다는 서원이고, 뒤의 둘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이다.
그다음 한 쌍의 서원70) 가운데 반야는 지혜이니, 지혜로 생사를 벗어나는 것이 마치 배로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생사가 끝이 없으므로 고해라고 한 것이니, 곧 번뇌를 끊고자 하는 서원이다. 번뇌를 끊음으로써 생사의 바다에 결코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다음 두 쌍의 원 가운데 처음 두 가지 원(願我速得戒足道, 願我早登涅槃山)은 열반의 과보를 구하는 것이고, 그다음 두 가지 원(願我速會無爲舍, 願我早同法性身)은 자성법신自性法身의 과보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은 응화법신應化法身이고 뒤는 자성법신이니, 이들은 불과佛果를 이루고자 하는 서원이다. 계행이 만족되어 열반에 오른다는 것은 미혹을 끊고 과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응화법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본업경』에서는 “첫째는 자성법신이고, 둘째는 응화법신이다.”라고 하였고, 『양론梁論』71)에서는 “자성법신이 (응화)법신에게 의지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72)라고 하였다. ‘계족도戒足道’73)는 무루無漏의 율의도律儀道이니 삼취정계三聚淨戒74)와 십성계十性戒75) 등이다. ‘족하다(足)’라는 것은 원만히 갖추어진 것을 말한다. 열반은 원적圓寂이니, 덕이 원만한 것을 ‘원’이라 하고, 번뇌가 다한 것을 ‘적’이라 한다. 그 열반은 생사의 바다를 높이 벗어나 있으므로 ‘산’에 비유하였다. 그러므로 『청량소』의 비슬지라毗瑟底羅 거사의 법문 중에 “바다에

006_0574_c_01L後願其果唯一二四願者例如
006_0574_c_02L得智惠眼然後知一切法得善方便
006_0574_c_03L然後度衆生也然其與後不同者
006_0574_c_04L但先是所緣境後是能綠心有境後
006_0574_c_05L緣義次第故耳一是所知境二是
006_0574_c_06L能知心三是所度四是能度前二誓
006_0574_c_07L學法門後二誓度衆生也次一兩願
006_0574_c_08L般若此云智由智能越生死如因
006_0574_c_09L舡渡海故生死無際故稱苦海
006_0574_c_10L誓斷煩惱也以能斷煩惱必不沉沒
006_0574_c_11L生死海故次二兩願中先二願求涅
006_0574_c_12L槃果次二願求自性法身果然則
006_0574_c_13L前是應化法身後是自性法身此則
006_0574_c_14L誓成佛果也則戒行滿足趣登涅槃
006_0574_c_15L斷惑成果故云應化法身也故本業
006_0574_c_16L經云一自性法身二應化法身
006_0574_c_17L梁論云自性身與法身作依止故也
006_0574_c_18L戒足道者無漏律儀道也謂三聚十
006_0574_c_19L性戒等足即圓足第一三張 涅槃
006_0574_c_20L此云圓寂德滿曰圓障盡曰寂
006_0574_c_21L其涅槃高出生死海中故比山也
006_0574_c_22L故淸凉釋毗瑟底羅居士法門中
006_0574_c_23L「恒」上楞嚴經本文有「無數」{編}「現」下楞
006_0574_c_24L嚴經本文有「於世」{編}

006_0575_a_01L산이 있다.”는 말을 해석하여 “대비를 수순하여 생사의 바다에 들고 열반의 산에 머문다는 것으로 표현하였다.”76)라고 하였다. ‘무위의 집’이란 대비·법성 등의 집이다. 분별을 등지면 무분별이 되므로 무위라 한다. ‘집’이란 『법계도』를 해석한 글에서 “집이란 어떤 뜻인가? 머무는 곳을 뜻한다. 즉 법성진공法性眞空을 가리키니, 깨달은 자가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77)라고 하였다. 또 “대비의 선교방편으로 중생을 덮어 주므로 집이라 한다. 이것은 일승의 구경을 뜻한다.”78)라고 하였다. ‘법성신法性身’이란 그 진공의 집에 있는 깨달은 자를 법성신이라 말한다. 모든 부처님이 법성의 동일한 체성을 증득했으므로 ‘같다(同).’라고 한 것이다. 『양론』에서 “이 법계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곳이 없고, 이 법계로 돌아가 증득하지 않는 곳이 없다.”79)라고 한 것은 이를 일컫는 말이리라.
“천수천안”은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다.
“육향”은 사악도四惡道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 첫째와 둘째의 향(我若向刀山, 我若向火湯)은 칼날지옥과 불지옥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였으니, 이는 극심한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我若向地獄)는 여러 지옥을 총체적으로 들고, 나머지 셋은 아귀·수라·축생이다. 수라는 비천非天이니, 비록 천天에 속하긴 해도 마음이 교만하여 천天의 진실한 행이 없으므로 비천이라 한다. 악심을 많이 내므로 ‘악심을 다스린다.’고 한다. 축생은 어리석음이 깊고 무거우므로 ‘지혜를 얻는다.’라고 하였다.
앞의 십원 중에는 비록 이타가 있긴 해도 모두 자리이고, 이 육향은 모두 이타이다.
“대자대비”에서, ‘자’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니 곧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이고, ‘비’는 괴로움을 덜어 주는 것이니 곧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이다. 『능엄경』과 (『법화경』) 「보문품」의 설과 같다.

널리 온 누리의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주를 외우게 하고
관음대성의 이름을 염하게 하여
다함께 원통삼매 법성바다에 들게 하소서.

둘째 이타행이다. 『천수천안경』에 의하면 “관음대성이

006_0575_a_01L上有山之文云表大悲隨順入生死
006_0575_a_02L住涅槃山等言無爲舍者即大
006_0575_a_03L悲法性等家也背反分別得無分別
006_0575_a_04L故曰無爲也舍者法界圖釋文云
006_0575_a_05L家者何義住處義故所謂法性眞空
006_0575_a_06L覺者所住故又大悲善巧蔭覆衆生
006_0575_a_07L名曰爲舍此義在一乘究竟言法性
006_0575_a_08L身者謂其眞空宅中覺者爲法性身
006_0575_a_09L佛佛皆證法性同一體性故云同
006_0575_a_10L梁論云無不從此法界流無不
006_0575_a_11L還證此法界此之謂歟千手眼已如
006_0575_a_12L前引六向者救四惡道其一二向
006_0575_a_13L別擧刀輪火輪地獄此極苦故第三
006_0575_a_14L摠擧諸地獄餘三餓鬼修羅畜等
006_0575_a_15L此云非天雖天趣攝其心謟慢
006_0575_a_16L無天實行故云非天多生惡心
006_0575_a_17L云惡心調伏畜生愚癡深重故令得
006_0575_a_18L智惠也前十願中雖有利他全是
006_0575_a_19L自利此中全是利他言大慈悲者
006_0575_a_20L慈能與樂即三十二應悲能拔苦
006_0575_a_21L即十四無畏如楞嚴經及普門品說

006_0575_a_22L
普令法界一切衆生誦大悲呪念菩薩
006_0575_a_23L同入圓通三昧性海第一四張

006_0575_a_24L
二利他行准千手眼經觀世音菩薩

006_0575_b_01L 부처님께 사뢰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중생들이 대비신주大悲神呪를 지송하고서도 삼악도에 떨어진다면, 저는 정각을 이루지 않겠습니다.……’”80)라고 하였다. 남을 이롭게 하고자 서원을 발하는 것이 저 『천수천안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으며, 의상 법사의 이타행도 그와 같은 서원이다.
“원통삼매 법성바다”는 『능엄경』에서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사뢰기를 ‘부처님께서 원통圓通을 물으시니 저는 귀로 원조圓照하는 삼매三昧로……삼마지三摩地를 얻어서 보리를 성취하는 것이 제일이라 하겠나이다.’”81)라고 하였다. 『계환소』에서 “하나도 빠뜨림 없는 것을 ‘원’이라 하고 조금도 막힘없는 것을 ‘통’이라 한다.”82)라고 하였다. “삼매”는 여기 말로 정수正受라고 하고 또는 등지等持라고 하니, 마음을 평등하게 지녀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성품의 근원이 깊고 넓기 때문에 “바다”에 비유하였다.

또 원하옵건대, 제자
이 생의 업보가 다할 때
보살께서 빛을 놓아 인도해 주심을 몸소 받아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한 찰나에 백화도량에 왕생하여
여러 보살과 함께 정법을 듣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가
매 순간 밝아져서 여래의 큰 무생인을 발하게 하소서.

둘째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원이다.
『장자론長者論』83)에 이 보살은 “대비가 지극하여 만물을 성숙시키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보토에 머물지 않고 중생의 더러운 땅에 머문다.”84)고 했는데, 어찌 정토라 하는가?
이 백화산白花山은 화장세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사바세계가 화장세계의 열세 번째에 있으므로 백화도량은 비로자나불의 설법도량인 금강보지金剛寶地 청정찰해淸淨刹海에 있다. 그러므로 신수神秀 공의 『묘리원성관妙理圓成觀』85)에 “ 사바세계는 화장세계에 있는 국토 가운데 열세 번째 잡염토雜染土인데, 어째서 경經에서는 보리도량 중의 금강지金剛地·보수寶樹

006_0575_b_01L白佛言世尊若諸衆生誦持大悲
006_0575_b_02L神呪者墮三惡道者我誓不成正覺
006_0575_b_03L利他發誓如彼經說相德利他
006_0575_b_04L亦願同彼也圓通等者楞嚴云
006_0575_b_05L世音菩薩白佛言佛問圓通我從耳
006_0575_b_06L門圓照三昧乃至得三摩地成就菩
006_0575_b_07L斯爲第一等環䟽云無一缺減
006_0575_b_08L曰圓無小滯擁曰通三昧此云正受
006_0575_b_09L亦云等持平等持心不令外散故
006_0575_b_10L性源深廣故比海也

006_0575_b_11L
又願弟子此報盡時親承大聖放光
006_0575_b_12L接引離諸怖畏身心適悅一刹那間
006_0575_b_13L即得徃生白華道場與諸菩薩同聞正
006_0575_b_14L入法流水念念增明現發如來大
006_0575_b_15L無生忍

006_0575_b_16L
第二願生淨土長者論云此菩薩
006_0575_b_17L爲大悲至極熟物利生不就自報
006_0575_b_18L就衆生穢境而居何云淨土此白
006_0575_b_19L花山是華藏內耶外耶娑婆旣當華
006_0575_b_20L藏世界第十三重故白花在於毗盧
006_0575_b_21L遮那說法道塲金剛寶地淸淨刹海
006_0575_b_22L故神秀公妙理圓成觀問云娑婆
006_0575_b_23L旣當花藏正中刹種上第十三重雜染
006_0575_b_24L如何經說菩提塲中金剛地寶樹

006_0575_c_01L등의 경계가 온전히 화장세계의 본찰本刹이라고 설하는가? 근본은 근본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지말은 지말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바세계가 비록 열세 번째 중에 있으나, 깨끗한 근기가 보면 온전히 본찰이고, 만약 깨끗한 근기가 아니면 온전히 말찰末刹(사바세계)이다.”86)라고 하였다. 또 『대경大經』의 「화장세계품」에는 “세존이 옛날 티끌같이 많은 부처님 세계에서 청정한 행을 닦아, 갖가지 묘한 빛을 내는 광명의 화장장엄의 세계바다를 얻었느니라.”87)라고 하였다. 만약 사바세계가 청정한 보배국토라고 믿는다면, 어찌 다시 백화도량의 깨끗함과 더러움을 묻겠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장자長者가 “중생의 더러운 땅에 머문다.”라고 했는가?
현수 국사가 『사나품소舍那品䟽』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세계해世界海를 전체적으로 해석하는 데 열 가지가 있다.……일승에 둘이 있다. 첫째 과분果分에 의거하면 십불十佛 자체가 국토해國土海가 된다. 이것은 설할 수 없는 것인데 인연에 의지하여 열 가지를 말하니, 제2회 설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섭화攝化에 의거하면 세 부류의 처處가 있다. 첫째, 수미산의 세계와 나무 모양, 중생의 모양, 세계해 등이 첫째 부류이다. 둘째, 삼천대천세계 밖에 따로 있는 열 가지 세계가 둘째 부류이다. 셋째, 열 가지 연화장장엄의 세계해가 있어 제석의 그물처럼 주체와 객체를 잘 갖추었으니, 셋째 부류이다.”88)
장자는 섭화토攝化土의 첫째 부류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다. 비록 첫째 부류의 잡염토雜染土이지만 부처님 덕에 의거하면 더러운 모습이 다 소멸되어 오직 정토뿐이므로 비슬지라 거사가 선재동자에게 “바다에 온갖 보배로 된 산이 있는데, 성현이 머무는 지극히 청정한 곳이다.”89)라고 하였다.

여기에(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원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가피를 입어서 번뇌를 떠나는 것이고, 둘째 “한 찰나에” 이하는 백화도량에 왕생하여 이익을 이루는 것이다.
첫째 가운데 “이 생의 업보”란 이 한 생의 업보이니, 목숨을 버리려 할 때이다. 『대경』에서 관자재보살이 선재동자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006_0575_c_01L等境界全是花藏本刹耶本不定
006_0575_c_02L末不定末娑婆雖在第十三層中
006_0575_c_03L淨穢 [6] 所見全是本刹若非淨穢
006_0575_c_04L是末刹第一五張 又大經花藏世界
006_0575_c_05L品云世尊往昔於諸有微塵佛所
006_0575_c_06L修淨行故獲種種妙光明花藏㽵嚴
006_0575_c_07L世界海若信娑婆是淨寶刹何更問
006_0575_c_08L於白花淨穢何故長者云就衆生
006_0575_c_09L穢境而居賢首法師舍那品䟽云
006_0575_c_10L今通釋諸世界海有十
一乘有二
006_0575_c_11L一約果分十佛自體國土海此當不
006_0575_c_12L可說寄綠說十如第二會說二約攝
006_0575_c_13L化處有三類一須彌山界及樹形
006_0575_c_14L生形世界海等爲第一類二三千界
006_0575_c_15L別有十世界爲第二類三十蓮
006_0575_c_16L花藏㽵嚴世界海具足主伴如帝網
006_0575_c_17L爲第三類長者約攝化土中第一
006_0575_c_18L類云也雖第一類雜染土約佛德能
006_0575_c_19L染相皆盡唯是淨土故毗瑟底羅居
006_0575_c_20L指示善財云海上有山衆寶成
006_0575_c_21L賢聖所居極淸淨等於中二先蒙加
006_0575_c_22L離惑後一刹那下 生彼成益前中
006_0575_c_23L此報者此一期之報將捨之時也
006_0575_c_24L大經觀自在菩薩告善財偈云或在

006_0576_a_01L或在危厄多憂怖  위급에 처하여 걱정과 두려움 많을 때
日夜六時稱我名  밤낮으로 내 이름을 부르면
我時現住彼人前  나는 그때마다 그 앞에 나타나
爲作最勝歸依處  가장 좋은 귀의처가 될 것이니
彼當生我淨佛刹  그는 나의 청정한 불찰에 태어나
與我同修菩薩行  나와 함께 보살행을 닦으리라90)

이것은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데 대한 응답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或有衆生臨命終  어떤 중생이 임종할 때
死相現前諸惡色  죽음 모습 여러 가지 나쁘게 나타나
見彼種種色相已  저 갖가지 모습을 보고 나서
令心惶怖無所依  황당하고 두려워 의지할 곳 없을 때
若能至誠稱我名  지극 정성으로 나의 이름 부르면
彼諸惡相皆消滅  저 나쁜 모습이 모두 다 소멸되고
由我大悲觀自在  나의 대비와 관자재로 말미암아
令生天人善道中  천상 인간 좋은 길에 태어나리라91)

이것은 가피를 입어 미혹을 떠나는 것에 대한 응답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若人願此命終後  어떤 사람 이 목숨이 끝난 뒤에
不受三途八難身  삼도와 팔난에 몸 받지 않기 원한다면
恒處人天善趣中  언제나 인간 천상 좋은 길에 태어나
常行淸淨菩提道  청정한 보리도를 언제나 행하리
有願捨身生淨土  몸을 버리고 정토에 태어나기 원한다면
普現一切諸佛前  모든 부처 계신 곳 어디나 나타나고
普於十方佛刹中  시방의 불국토 어디에나 있으며
常爲淸淨勝薩埵  언제나 청정한 최상의 보살 되리
普見十方一切佛  시방의 모든 부처님 빠짐없이 친견하고
及聞諸佛說法音  모든 부처님의 설법 소리 들으며
若能至誠稱我名  지극 정성으로 내 이름을 부른다면
一切所願皆圓滿  일체의 소원이 모두 이뤄지리라92)

“어떤 사람 이 목숨이……” 이하의 한 게송은 가피를 입고서 번뇌를 떠남을 밝힌 것이고, “몸을 버리고 정토에……” 이하의 두 게송은 백화도량에 왕생하여 이익을 이루는 일을 밝힌 것이다. 또 『천수천안경』에 “대비신주大悲神呪를 지송하는 중생이 있다면 목숨이 다할 때,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오셔서 손을 내려 주시고 어떤 불토에 태어나길 원하더라도 원하는 대로 모두 왕생할 수 있게 하신다.”93)라고 하였다. 이는 대성大聖의 영접을 친히 받는다고 하는 말이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관음대성에 공통한다.

뒷부분(백화도량에 왕생하여 이익을 이루는 부분) 중 “한 찰나”란 마치 장사壯士가 팔과 목을 굽혔다 펴는 동안만큼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한다.
“진리의 흐름에 들어”는 『십지경론』에서 ‘팔지八地 이상 무상지無相智는 성스러운 길이고 진리의 흐름이니

006_0576_a_01L危厄多憂怖日夜六時稱我名我時
006_0576_a_02L現住彼人前爲作最勝歸依處彼當
006_0576_a_03L生我淨佛刹與我同修菩薩行此是
006_0576_a_04L願生淨土之應也又或有衆生臨命
006_0576_a_05L死相現前諸惡色見彼種種色相
006_0576_a_06L令心惶怖無所依若能至誠稱我
006_0576_a_07L彼諸惡相皆消滅由我大悲觀自
006_0576_a_08L第一六張 令生天人善道中
006_0576_a_09L當蒙加離惑之應也又云若人願此
006_0576_a_10L命終後不受三途八難身恒處人天
006_0576_a_11L善趣中常行淸淨菩提道有願捨身
006_0576_a_12L生淨土普現一切諸佛前普於十方
006_0576_a_13L佛刹中常爲淸淨勝薩埵普見十方
006_0576_a_14L一切佛及聞諸佛說法音若能至誠
006_0576_a_15L稱我名一切所願皆圓滿若人願此
006_0576_a_16L下一偈明蒙加離惑有願捨身等二
006_0576_a_17L明生彼成益也又千手千眼經云
006_0576_a_18L若諸衆生誦持大悲神呪者臨命終
006_0576_a_19L十方諸佛皆來授手欲生何等
006_0576_a_20L佛土隨願皆得往生則所謂親承大
006_0576_a_21L聖接引之言通於十方諸佛及觀音
006_0576_a_22L後中刹那者時之極促如壯士
006_0576_a_23L屈伸臂項也言入法流水者十地論
006_0576_a_24L八地已上無相智聖道法流

006_0576_b_01L 찰나찰나 자연스레 일어난다.’94)라고 한 것과 같다. 즉 능증能證의 성지聖智가 신속히 증진되어 힘쓰지 않고도 일어나는 것이 마치 빠른 물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래의 (큰 무생인을) 발하게” 이하는 원이 이제 스승과 같아져서 마침내는 구경의 과보를 이루리라는 것을 곧장 밝힌 것이다.
“여래”는 종교終敎의 입장에서는 여실如實한 도를 타고 와서 정각을 이루었기 때문이며, 돈교頓敎의 입장에서는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기 때문이며, 원교圓敎의 입장에서는 처음 발심할 때 번뇌가 다 끊어지고 복덕과 지혜가 완성되어 예부터 부동不動하기 때문에 여래라 한다.
“큰 무생인”에서 인忍이란 인해忍解하여 인가印可하는 것이니, 지혜로 비추고 관으로 통달하는 것이다. 이 인忍은 등각等覺의 최후심에서 미세한 무명의 번뇌를 끊는다. 원교에 의거하면 각 계위에서 미혹을 끊고 성불하니, 신위信位의 초심에서도 이 무생인을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종교의 지위에 기대어 설하니, 그 의미는 「십인품十忍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청량소』에서 “무생인無生忍이란, 무생無生의 이치를 체인(忍)하는 점에 의거하면 ‘무생의 인’이고, 무생의 지혜 및 번뇌의 불생不生에 의거하면 ‘무생이 곧 인’이다. 두 가지 해석이 다 통한다.”95)라고 하였다. 시교에 의거하면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하므로 무생의 이치라 하고, 종교에 의거하면 여래장이 인연 따라 육도에 생멸하면서도 여래장이 온전하므로 시각을 얻는 날에 시각과 본각이 본래 다르지 않음을 깨치므로 무생의 이치라 하며, 돈교에 의거하면 자기 마음을 직관하여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이 본래 청정하므로 무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법계체성경法界體性經』에서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에게 말씀하였다. ‘그대는 여러 선남자에게 어떻게 보리심을 발하도록 가르치느냐?’ 문수보살이 대답하셨다. ‘저는 아견심我見心을 발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아견의 경계가 바로 보리이기 때문입니다.’”96)라고 하였다.【지공指空의 계명戒名97)이 이에 의거한다.】 원교에 의거하면 예부터 부동不動함을

006_0576_b_01L那刹那任運而轉謂能證聖智速疾
006_0576_b_02L增進而無功用任運而轉如彼駛水
006_0576_b_03L流流無絶故言現發如來下正明願
006_0576_b_04L同今師終成究竟之果也言如來者
006_0576_b_05L若約終敎乘如實道來成正覺故
006_0576_b_06L若約頓敎無所從來亦無所去故
006_0576_b_07L若約圓敎初發心時煩惱斷盡
006_0576_b_08L智成竟舊來不動故曰如來言大
006_0576_b_09L無生忍者忍謂忍印可智照觀
006_0576_b_10L此忍在等覺後心爲斷微細無明
006_0576_b_11L煩惱若約圓敎位位斷1) [7] 成佛
006_0576_b_12L至信位初心亦得此忍第一七張
006_0576_b_13L寄終敎位說義如十忍品說彼䟽云
006_0576_b_14L無生忍者若約忍無生理即無生之
006_0576_b_15L [7] 若約無生之智及煩惱不生則無
006_0576_b_16L生即忍通二釋也若約始敎人法
006_0576_b_17L俱空曰無生理若約終敎如來藏隨
006_0576_b_18L綠六道生滅全如來藏故始覺之日
006_0576_b_19L本無始本之異名無生理若依頓敎
006_0576_b_20L直觀自心無修無2) [8] 本來淸淨
006_0576_b_21L曰無生故法界體性經云佛告文殊
006_0576_b_22L汝云何敎諸善男子發菩提心文殊
006_0576_b_23L我敎發我見心何以故我見際
006_0576_b_24L即是菩提指空戒
名依此
若依圓敎舊來不

006_0576_c_01L 무생의 이치라 한다. 위의 모두는 교敎에 해당하기 때문에 말로 설할 수 있다. 그러나 인분因分을 빌려 과분果分의 불가설처不可說處의 무생인을 증득하고자 하므로 ‘대무생인’이라 하였다.

이상으로 ‘귀의하여 발원을 사뢰고 일을 이어받아 과보를 이룸’을 해석하였다. 이 부분 중 환희지에 대해 『청량소』와 『행원품소』에서 열 가지 원으로 해석하고 있다. 청량은 『양섭론석梁攝論釋』을 인용해서 “첫째 공양원供養願, 둘째 수지원受持願, 셋째 전법륜원轉法輪願, 넷째 수행이리원修行二利願, 다섯째 성숙중생원成熟衆生願, 여섯째 승사원承事願, 일곱째 정토원淨土願, 여덟째 불리원不離願, 아홉째 이익원利益願, 열째 성정각원成正覺願.”98)이라고 하였다.
이 열 가지 원으로 『백화도량발원문』을 해석하면 “관음대성을 부르면서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이하는 승사원이고, “십원육향” 이하는 수행이리원이며, “몸을 버리는 이 세상과 몸을 받는” 이하는 공양원이니, “머무는 곳마다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는 어찌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언제나 정법을 듣고”는 수지원이고, “교화를 돕겠습니다.”는 전법륜원이며, “널리 온 누리” 이하는 성숙중생원이고, “이 생의 업보가 다할 때” 이하는 이익원이고, “한 찰나에” 이하는 정토원이고, “여러 보살과 함께” 이하는 불리원이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이하는 성정각원이다. 이는 모두 저것에 준한 것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열 가지 원 중에 원인과 결과가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청량淸涼이 “말로 나타내면 앞의 아홉은 원인을 구하는 것이고, 뒤의 하나는 결과를 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입장에서 말하면 일곱째도 결과를 구하는 것이 되니, 결과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째가 바로 결과이고, 나머지는 원인이다.……열 가지만 설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장엄【복福과 지智】과 두 가지 이익【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을 포함함으로써 원인과 결과의 수행 단계가 빠짐없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며,

006_0576_c_01L名無生理上皆猶是敎分可說
006_0576_c_02L然借因分願證果分不可說處無生
006_0576_c_03L故云大無生忍也此上敬伸發願
006_0576_c_04L承事成果中若准3) [9] 喜地淸凉䟽
006_0576_c_05L行願品䟽亦以十種願釋之謂淸凉
006_0576_c_06L引梁攝論釋云一供養願二受持
006_0576_c_07L三轉法輪願四修行二利願
006_0576_c_08L成熟衆生願六承事願七淨土願
006_0576_c_09L八不離願九利益願 十成正覺願
006_0576_c_10L若以彼釋此言稱觀世音以爲本師
006_0576_c_11L承事願十願六向下修行二利願
006_0576_c_12L捨身受身下供養願謂隨所住處
006_0576_c_13L如影隨形豈無供佛之行恒聞正法
006_0576_c_14L受持願助揚眞化者轉法輪願
006_0576_c_15L普令法界下成熟衆生願此報盡時
006_0576_c_16L利益願第一八張 一刹那下
006_0576_c_17L土願與諸菩薩下不離願 入法流
006_0576_c_18L水下成正覺願並准彼可知此十
006_0576_c_19L願中具因果也故淸凉云若就言現
006_0576_c_20L前九求因後一求果若約具攝
006_0576_c_21L亦求果是依果故然第十正果
006_0576_c_22L則是因乃至所以但說十者以攝二
006_0576_c_23L福智
二也
二利因果行位無不周故
006_0576_c_24L「感」通「惑」{編}「訂」疑「證」{編}「勸」疑
006_0576_c_25L「歡」{編}

006_0577_a_01L이 열 가지로 한량없는 원을 나타내기 위함이다.”99)라고 하였다.【화엄의 십수十數는 모두 한량없음을 나타낸다.】
약사여래의 12원과 아미타불의 48원이 모두 이 열 가지 원에 포함된다. 저것에 준하면 환히 드러나 숨겨진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열 가지 원을 갖추었으므로 발원이라 하나니, 도를 이루려는 자라면 누군들 본받지 않을 수 있으랴.

제3장 마치면서 귀의하여 우러러 받들고 본사에게 회향함
원을 발하였으니
관자재보살께 몸과 마음을 바쳐 정례하옵니다.

셋째는 마치면서 귀의하여 우러러 받들고 본사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이는 세 가지 회향 가운데 보리회향菩提廻向이니, 중생을 깨닫게 하고 자기도 정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또 이미 자성에 맞으므로 실제회향實際廻向이고, 자리와 이타를 갖춘 원행이므로 중생회향衆生廻向이다. 이렇게 하여 세 가지 회향이 모두 갖추어졌다.

백화도량발원문 약석 1권

나의 가형家兄 보응 대사普應大師 원공源公은 일생을 관음대성만 믿어서 『화엄경』의 관음법문을 지송하도록 권하셨다. 30여 명(의 제자들)이 내게 그 『경』(『화엄경』의 관음법문)을 주석해 달라고 청하기에, 『청량소』를 가지고 『경』 아래에 주를 붙이고 또 간략한 주해들을 모아서 2권100)을 만들었다.
또 『경』의 취지에 입각해서 『백화도량발원문』을 간략히 주해하여 형이 우러러 믿는 정성을 돕고, 아울러 같이 배우는 벗들의 뜻에 답하고자 널리 법재法財를 전하노니, 위로는 한 사람의 그윽한 복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진리의 흐름을 구류九類 중생에게 베풀고자 할 뿐이다.
치화致和 원년(1328) 무진戊辰 10월 해인사에서 집해集解하다.


후학 사미 목암 체원木庵體元이 쓰고
각화사 주지 비구 성지性之가 교감하다.

원통元統 2년(1334) 갑술 7월 일 계림부鷄林府에서 개판하다.
동원同願 각수刻手 승僧 보영甫英
색기관色記官 최변崔汴

006_0577_a_01L爲表此無盡願也華嚴十數
皆表無盡
藥師十二
006_0577_a_02L彌陁四十八大願皆攝在此十願
006_0577_a_03L中也以彼准之昭然無隱矣具此
006_0577_a_04L十願方爲發願凡爲道者可不
006_0577_a_05L倣焉

006_0577_a_06L
發願已歸命頂禮觀自在菩薩摩訶薩

006_0577_a_07L
第三結歸投仰廻向本師三處廻向
006_0577_a_08L菩提廻向也以是覺有情故亦是
006_0577_a_09L已成正覺故又旣是稱性故即是實
006_0577_a_10L際廻向又旣具二利願行故亦是衆
006_0577_a_11L生廻向如此則三處具矣第一九張
006_0577_a_12L白花道塲發願文略釋一卷

006_0577_a_13L
006_0577_a_14L
我家兄普應大師源公一生偏信觀音大
006_0577_a_15L勸誦花嚴觀音法門三十餘人倩我
006_0577_a_16L注來其經以淸凉䟽箋於經下兼集略
006_0577_a_17L因成二卷又依經旨略解白花道塲
006_0577_a_18L以助家兄崇信之誠兼答同學交于之
006_0577_a_19L廣施法財上資玄福於一人下施法
006_0577_a_20L流於九類云耳致和元年戊辰十月在海
006_0577_a_21L印山寺集解

006_0577_a_22L
後學沙彌本庵體元誌

006_0577_a_23L覺華寺住持比丘性之校勘

006_0577_a_24L元統二年甲戌七月 日雞林府開板

006_0577_a_25L同願刻手僧甫▣ [8]

006_0577_a_26L色記官崔汴

006_0577_b_01L별색전부호장別色前副戶長 이기李奇
동원同願 수재秀才 김신기金神器 서書
동원同願 동천사東泉社 도인道人 선순善珣
계림부권지윤雞林府權知尹 승봉랑承奉郞 도관좌랑都官佐郞 지울주사知蔚州事 겸 권농사勸農使 노신盧愼101)

006_0577_b_01L別色前副戶長李奇

006_0577_b_02L同願秀才金神器書

006_0577_b_03L同願東泉社道人善珣

006_0577_b_04L雞林府權知尹承奉郞都官佐郞知蔚

006_0577_b_05L州事兼勸農使盧▣ [9]
  1. 1)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661) : 원문에는 “永徽六年庚戌”로 되어 있으나 “龍朔元年辛酉”가 옳다. 의상(625~702)은 650년(영휘 원년)에 원효(617~686)와 함께 입당入唐하려다가 요동에서 고구려의 순찰병에게 붙잡혀 실패하고, 661년(용삭 원년 신유)에 귀국하는 사신의 배를 타고 입당했다.
  2. 2)『법계도』와 합하여 1권을 만드니 : 이는 『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이하에서 언급되는 『法界圖』의 서문과 석문釋文은 모두 이 『華嚴一乘法界圖』를 가리킨다.
  3. 3)「본전本傳」 : 의천의 「新編諸宗敎藏總錄』 卷1(T55, 1168a16)에 최치원이 지은 “浮石尊者傳一卷”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4. 4)『浮石本碑』에 따르면 입적한 해는 장안長安 2년 임인(702)이다. 일반적으로 이에 따른다.
  5. 5)본조本朝 : 고려를 가리킨다. 『高麗史』에 의하면 고려 숙종 6년(1101) 8월에 의상 법사에게 ‘원교국사 해동화엄초조圓敎國師海東華嚴初祖’를 추증했다.
  6. 6)40권본 『華嚴經』 卷16(T10, 732c).
  7. 7)澄觀, 『華嚴經疏』 卷35(T35, 940a), “在補怛落迦山者。 此云小白華樹。 山多此樹。 香氣遠聞。 聞見必欣。”
  8. 8)의주석依主釋 : 산스크리트의 합성어를 해석하는 육합석六合釋에서, 앞 단어가 뒤 단어를 제한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예) ⓢ rāja-prtra(왕의 아들).
  9. 9)지업석持業釋 : 육합석에서 앞 단어를 형용사 또는 부사로, 뒤 단어를 명사 또는 형용사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10. 10)『遺敎經』(T12, 1111a).
  11. 11)80권본 『華嚴經』 「如來出現品」(T10, 265b).
  12. 12)澄觀, 『華嚴經疏』 卷49(T37, 874c), “第二誡聽許說中分二。 初一誡聽勸修淨意如空。 總以喩顯。 下二句別顯。 一離妄取。 如彼淨空無雲翳故。 斯即眞止。 二觸境無滯。 如彼淨空無障礙故。 斯即眞觀。 此觀不作意以照境。 則所照無涯。 此止體性離。 而息妄故諸取皆寂。 若斯則不拂不瑩而自淨矣。 無淨之淨則闇蹈佛境矣。”
  13. 13)바로기지섭벌다婆盧枳底攝伐多 : 이는 ⓢ avalokiteśvara의 음사이다. 다만 여기에는 ‘阿(a)’가 생략되어 있다.
  14. 14)의보依報와 정보正報 : 의보는 부처나 중생의 몸이 의지하고 있는 자연 환경과 의식주 등을 말하고, 정보는 과거에 지은 행위의 과보로 받은 부처나 중생의 몸을 말한다.
  15. 15)『無量壽經』(T12, 273).
  16. 16)『成唯識論』 卷10(T31, 56a), “云何四智相應心品。 一大圓鏡智相應心品。 謂此心品離諸分別。 所緣行相微細難知。 不忘不愚一切境相。 性相淸淨離諸雜染。 純淨圓德現種依持。 能現能生身土智影。 無間無斷窮未來際。 如大圓鏡現衆色像。” 이 인용문에서 일부를 인용하였다. 인용문에 나온 몸과 국토는 자수용신과 자수용토를 가리키고, 지혜의 영상은 나머지 세 가지 지혜의 영상을 가리킨다.
  17. 17)시교始敎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 체원體元은 법장이 분류한 화엄종의 교판을 따르고 있다. 시교始敎는 『般若經』·『解深密經』의 가르침이고, 종교終敎는 『楞伽經』·『起信論』의 가르침이며, 원교圓敎는 일승一乘을 설하는 『法華經』·『華嚴經』의 가르침을 말한다.
  18. 18)아마라식阿摩羅識 : ⓢ amalavijñāna. 이는 무구식無垢識·청정식淸淨識이라고 번역하는데, 현장玄奘 계통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청정한 부분으로 간주하지만, 진제眞諦 계통의 섭론종攝論宗에서는 제9식으로 상정한다.
  19. 19)法藏, 『大乘起信論義記』(T44, 250b).
  20. 20)사성四聖과 육범六凡 : 사성은 성문聲門·연각緣覺·보살菩薩·불佛을 말하고, 육범은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人·천天의 중생을 말한다.
  21. 21)여기서 말하는 관음대성은 부처도 아니고 범부도 아닌, 등각위等覺位의 보살이다. 그런데 종교終敎에서 말하는 대원경지는 범부까지 포함하여 범위가 너무 넓고, 원교圓敎에서 말하는 대원경지는 부처에 국한되어 범위가 너무 좁기 때문에 둘 다 여기서 말하는 관음대성을 지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체원은, 아뢰야식이 등각의 지위에서 대원경지로 변환된다는 시교始敎의 설을 택하여 관음대성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22. 22)『大乘起信論』(T32, 576b).
  23. 23)이와 유사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法藏, 『大乘起信論義記』(T44, 250b22 이하), “隨流返流。 唯轉此心。 是故若隨染成於不覺。 則攝世間法。 不變之本覺及返流之始覺。 攝出世間法。”
  24. 24)이 문장과 관련하여 유가부 경론에서는 똑같은 문장을 찾을 수 없고, 법장의 『華嚴五敎章』 卷2(T45, 484c)에 같은 문장이 나온다. 즉 체원은 『五敎章』에서 소개한 유식설을 재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25. 25)80권본 『華嚴經』 「如來出現品」(T10, 272c).
  26. 26)法藏, 『修華嚴奧旨忘盡還源觀』(T45, 637b), “一顯一體者。 謂自性淸淨圓明體。 然此即是如來藏中法性之體。 從本已來性自滿足。 處染不垢。 修治不淨。 故云自性淸淨。 性體遍照無幽不燭。 故曰圓明。 又隨流加染而不垢。 返流除染而不淨。 亦可在聖體而不增。 處凡身而不減。”
  27. 27)法藏, 『修華嚴奧旨忘盡還源觀』(T45, 637b).
  28. 28)法藏, 『修華嚴奧旨忘盡還源觀』(T45, 637b).
  29. 29)澄觀, 『演義鈔』 卷1(T36, 2a29~b2), “然此相大。 略有二義。 一約不空具恒沙性德故。 此是同敎意。 二約事事無礙。 十玄之相。 本自具足。 即是別敎之意也。” 이는 澄觀의 『華嚴經疏』 서문(T35, 503a6)에 나오는 “含衆妙而有餘”를 그가 다시 『演義鈔』에서 부연 설명하는 내용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인용문 안에 “온갖 묘함을 갖추고서도 남음이 있다.(含衆妙而有餘)”가 나온다.
  30. 30)法藏, 『修華嚴奧旨忘盡還源觀』(T45, 637b).
  31. 31)『法句經』(T85, 1435a).
  32. 32)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상태를 말한다. 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는 뜻이다.
  33. 33)셋째 : 이는 관상觀相을 크게 능관지能觀智와 소관경所觀境의 둘로 나누고, 그중에 ‘소관경’을 관성지체觀聖智體·관자심체觀自心體·관기교철觀其交徹의 셋으로 나눠 설명하는 가운데 세 번째 대목인 ‘관기교철’을 다시 셋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이다.
  34. 34)『佛說觀無量壽經』(T12, 343c).
  35. 35)『佛說觀無量壽經』(T12, 344a).
  36. 36)눈동자를 부릅뜨고~것과 같다 : 이는 『楞嚴經』 卷2(T19, 114a)에 나오는 내용이다. 즉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갠 밝은 허공을 볼 때, 오직 저 멀리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맑게 갠 빈 곳만을 보다가,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게 바로 뜬눈이 피로해지면 허공에서 따로 헛꽃을 보기도 하고, 또 일체의 어지럽게 날뛰는 헛된 모양을 보기도 하는 것과 같다.(阿難。 譬如有人。 以淸淨目觀晴明空。 唯一精虛逈無所有。 其人無故不動目睛。 瞪以發勞。 則於虛空。 別見狂花。 復有一切狂亂非相。)”
  37. 37)『圓覺經』 卷1(T17, 913b).
  38. 38)法藏, 『修華嚴奧旨忘盡還源觀』(T45, 637b).
  39. 39)均如, 『十句章圓通記』(H4, 61b), “一乘中體融等者。 觀釋中云。 海印鏡中所現像者。 吾五六尺身。 具三世間故。 非別有住處。 故云无住。 如此无住。 卽云不動也。 旣无側之吾身。 從何處轉何處也。”
  40. 40)『華嚴一乘法界圖』(T45, 711a).
  41. 41)현수 국사가 분류한 화엄종의 교판은 소승교小乘敎·시교始敎·종교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의 5교판이다. 그런데 왜 소승교와 돈교는 언급하지 않는가라는 뜻이다.
  42. 42)『십구장十句章』 : 의상의 스승 지엄智儼이 『華嚴經』의 핵심 내용을 열 가지로 정리한 십구十句에 대해 신라의 화엄 학승 법융法融이 해설한 것이 『十句章』이다.
  43. 43)인훈습경因熏習鏡 :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깨달음의 성품인 본각本覺의 한없는 공덕이 성숙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인훈습因熏習이라 하고, 모든 현상이 그 가운데 나타나므로 거울에 비유한 말이다.
  44. 44)『華嚴一乘法界圖』(T45, 711a).
  45. 45)중생세간衆生世間은 중생들의 세계이고, 기세간器世間은 중생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이며,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은 불보살의 세계이다.
  46. 46)『華嚴一乘法界圖』(T45, 711c).
  47. 47)『五敎章』(T45, 477a).
  48. 48)오중해인五重海印 : 망상해인忘像海印·현상해인現像海印·외향해인外向海印·정관해인定觀海印·어언해인語言海印을 말한다.
  49. 49)『大方等大集經』 卷15(T13, 106c).
  50. 50)분分과 만滿 : 일반적으로 분分은 보살의 증득을, 만滿은 부처님의 증득을 가리킨다.
  51. 51)60권본 『華嚴經』 卷35(T9, 627a).
  52. 52)60권본 『華嚴經』 卷35(T9, 627b).
  53. 53)法藏, 『華嚴經探玄記』 卷16(T35, 413b).
  54. 54)澄觀, 『演義鈔』 卷13(T36, 97a).
  55. 55)法藏, 『大乘起信論義記』(T44, 246c).
  56. 56)보살께서 아미타불을~이고 다니시듯이 :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좌보처左補處이다. 그 보살상의 보관寶冠에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머리에 이고(頂戴)”라고 하였다.
  57. 57)澄觀, 『華嚴經疏』 卷1(T35, 504a).
  58. 58)澄觀, 『華嚴經行願品疏』 卷9(X5, 170c). 이는 『소』의 내용을 압축해서 인용한 것이다.
  59. 59)이는 징관의 『貞元疏』가 아니라 『演義鈔』 卷87(T36, 680b24)의 “頂上化佛即是彌陀故”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징관은 ‘본사本師’를 ‘아미타불’이라고 해석하였다.
  60. 60)문聞·사思·수修 : 가르침을 듣고 얻은 문혜聞慧와 이치를 사유하여 얻은 사혜思慧와 수행으로 얻은 수혜修慧의 세 가지 지혜를 말한다.
  61. 61)『楞嚴經』 卷6(T19, 128b).
  62. 62)『楞嚴經』 卷6(T19, 129c).
  63. 63)戒環, 『楞嚴經要解』 卷11(X11, 830c).
  64. 64)어진 이를~같아지려는 것 : 이는 『論語』 「里仁」에 나오는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에 나오는 문구이다.
  65. 65)십원·육향十願六向 : 체원은 『高麗大藏經』에 수록된 『千手千眼經』을 인용하였다. 이는 『大正新脩大藏經』에 수록된 『千手千眼經』(T20, 106c)과 문구의 차이가 있으므로, 고려대장경본에 의거하여 내용을 소개하고 차이가 있는 부분은 괄호 속에 표시하고자 한다. 먼저 십원十願은 “① 願我速知一切法, ② 願我早得智慧眼, ③ 願我速度一切衆, ④ 願我早得善方便, ⑤ 願我速乘般若船, ⑥ 願我早得越苦海, ⑦ 願我速得戒足道(T: 願我速得戒定道), ⑧ 願我早登涅槃山, ⑨ 願我速會無爲舍, ⑩ 願我早同法性身”이고, 육향六向은 “① 我若向刀山, 刀山自摧折, ② 我若向火湯, 火湯自消滅, ③ 我若向地獄, 地獄自枯竭, ④ 我若向餓鬼, 餓鬼自飽滿, ⑤ 我若向修羅, 惡心自調伏, ⑥ 我若向畜生, 自得大智慧”이다.
  66. 66)『초지론初地論』 : 초지初地, 곧 환희지를 논하는 『十地經論』을 가리킨다.
  67. 67)『十地經論』 卷3(T26, 141a18), “此挍量菩薩願勝有二種勝聲聞辟支佛。 一常勤修習無量行故。 二與一切衆生同行故。 同行者。 十盡句示現。”
  68. 68)『千手千眼經』(T20, 106b).
  69. 69)첫째와 둘째~가지 원 : 첫째 쌍은 願我速知一切法과 願我早得智慧眼이고, 둘째 쌍은 願我速度一切衆과 願我早得善方便이므로, 총 네 가지 원이 된다.
  70. 70)그다음 한 쌍의 서원 : 셋째 쌍으로 願我速乘般若船과 願我早得越苦海를 가리킨다.
  71. 71)『양론梁論』 : 眞諦 譯 『攝大乘論釋』을 가리킨다.
  72. 72)眞諦 譯, 『攝大乘論釋』 卷1(T31, 155c).
  73. 73)계족도戒足道 :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千手千眼經』(K11, 964b6)에는 ‘願我速得戒足道’로 되어 있는 반면, 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된 『千手千眼經』(T20, 106c)에는 “願我速得戒定道”라고 되어 있다. 체원은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千手千眼經』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74. 74)삼취정계三聚淨戒 :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녀야 할 세 가지 계율로, 섭률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섭중생계攝衆生戒를 말한다. 섭률의계는 악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한 모든 금지 조항으로, 흔히 ‘하지 마라’고 하는 계율이고, 섭선법계는 선善을 행하는 계율, 섭중생계는 선을 행하면서 중생에게 이익을 베푸는 계율이다.
  75. 75)십성계十性戒 : 십선계十善戒를 말한다. 즉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婬·불망어不妄語·불악구不惡口·불양설不兩舌·불기어不綺語·불탐욕不貪欲·불진에不瞋恚·불사견不邪見이다.
  76. 76)澄觀, 『華嚴經行願品疏』 卷6(X5, 135c14), “海上有山者。 即南印度之南。 表大悲隨順。 入生死海。 住涅槃山。 亦處大悲海。 不爲愛見之所溺故。”
  77. 77)『華嚴一乘法界圖』(T45, 714a).
  78. 78)『華嚴一乘法界圖』(T45, 714a).
  79. 79)眞諦 譯 『攝大乘論釋』 卷13(T31, 254a25~26), “後成佛時。 各觀一切法。 無不從此法身生。 無不還證此法身故。” 다만 『攝論』에는 ‘法身’으로 되어 있는 반면, 체원은 ‘法界’라고 기재하고 있다.
  80. 80)『千手千眼經』(T20, 107a).
  81. 81)『楞嚴經』 卷6(T19, 129c).
  82. 82)이 문구는 계환戒環의 『楞嚴經要解』(X11)에서는 찾을 수 없다.
  83. 83)『장자론長者論』 : 이통현李通玄의 『新華嚴經論』을 가리킨다.
  84. 84)李通玄, 『新華嚴經論』 卷37(T36, 982a3~4), “爲大悲至極。 熟物利生。 不就自報。 就衆生界穢境而居。”
  85. 85)신수神秀 공의 『묘리원성관妙理圓成觀』 : 『妙理圓成觀』을 지은 신수에 대해서는 종래 북종의 대통 신수大通神秀(606~706)로 보는 견해와 화엄종의 회계 신수會稽神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의천의 『新編諸宗敎藏總錄』(T55, 1166c20)에는 “妙理圓成觀三卷神秀述”이라고 되어 있고, “(華嚴經)疏三十卷 神秀述”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회계 신수는 현수 법장의 손제자인 법선法詵(718~778)의 제자로서 『宋高僧傳』 권5(T50, 736b10)에 그 이름이 한번 거론된다. 그는 청량 징관(738~839)과 동시대 인물이다. 『妙理圓成觀』은 고려의 균여와 체원의 저술에서 인용되는데, 특히 균여의 저술에서 저자를 ‘신수 법사神秀法師’라고 기재하고 있어, 선사인 대통 신수가 아닌 화엄종의 회계 신수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金煐泰, 「均如書에 보인 妙理원성관의 著者―北宗神秀가 아니다」, 『한국불교학』 11권, 1986 참조.
  86. 86)『妙理圓成觀』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균여均如의 『釋華嚴旨歸章圓通鈔』 卷上(H4, 89c)에 동일한 문구가 인용되어 있으므로, 소개하고자 한다. “妙理圓成觀云。 問。 沙婆旣當花藏正中刹種上。 第十三重雜染土。 如何經說。 菩提場中。 金剛地寶樹等境界。 全是華藏本刹耶。 答。 本不定本。 末不定末。 裟婆雖在第十三層中有。 淨機所見。 全是本非末。 若非淨機。 全是末非本。 餘異類刹。 應知亦爾。” 본문의 ‘淨穢所見’은 문맥이 잘 통하지 않으므로, 균여의 글에 인용된 ‘淨機所見’에 맞추어 번역하였다.
  87. 87)80권본 『華嚴經』 卷8 「華藏世界品」(T10, 39b12~13), “世尊往昔。 於諸有微塵佛所修淨業。 故獲種種寶光明。 華藏莊嚴世界海。”
  88. 88)法藏, 『華嚴經探玄記』 卷3(T35, 158a).
  89. 89)40권본 『華嚴經』 卷16(T10, 732c).
  90. 90)40권본 『華嚴經』 卷16(T10, 734b).
  91. 91)40권본 『華嚴經』 卷16(T10, 734b).
  92. 92)40권본 『華嚴經』 卷16(T10, 734b).
  93. 93)『千手千眼經』(T20, 107a).
  94. 94)이 인용문은 『十地經論』에서는 찾을 수 없다.
  95. 95)澄觀, 『華嚴經疏』 卷46(T35, 852b).
  96. 96)이는 『入法界體性經』(T12)에서는 정확히 일치하는 인용을 찾을 수 없고, 법장의 『華嚴一乘敎義分齊章』 권3(T45, 495c)에서 재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如法界體性經云。 佛告文殊師利。 汝云何敎諸善男子發菩提心。 文殊言。 我敎發我見心。 何以故。 我見除即是菩提故。” 인용문 마지막의 ‘除’는 ‘際’로 된 판본도 있다.
  97. 97)인도 출신의 승려 지공指空은 1324년경에 원元의 연경燕京에 도착하고, 충숙왕 3년(1326)에 고려에 와서 무생계無生戒를 전했다. 또한 지공이 고려에 전래한 경으로 『文殊師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이 있다. 위의 본문에서는 ‘큰 무생인’을 시교·종교·돈교·원교의 순서로 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돈교에서는 ‘자기 마음을 직관하여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이 본래 청정함’을 무생無生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체원은 지공의 무생계가 바로 이 돈교의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98. 98)澄觀, 『華嚴經疏』 卷34(T35, 761c).
  99. 99)澄觀, 『華嚴經疏』 卷34(T35, 762a).
  100. 100)체원體元이 집록集錄한 『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䟽』 2권(H6)을 말한다.
  101. 101)노신盧愼 : 채상식蔡尙植에 따르면, 『白花道場發願文略解』(1334)보다 1년 뒤인 원통 3년(1335)에 간행된 『觀心論』의 간기가 『略解』의 간기와 거의 유사한데, 그 가운데 “同願 雞林府權知尹 蔚州副使 盧愼”이라는 문구가 있어, 결락된 글자가 ‘愼’임을 알 수 있다. 蔡尙植, 『高麗後期佛敎史硏究』, 一朝閣, 1991, p.208.
  1. 1){底}元統二年鷄林府開板本(海印寺所藏。第五~七張缺落)。
  2. 2)撰者名補入{編}。
  3. 1)「衆」華嚴經本文作「會」{編}。
  4. 2)「海」華嚴經本文作「中」{編}。
  5. 1)「重」疑「熏」{編}。
  6. 1)「恒」上楞嚴經本文有「無數」{編}。
  7. 2)「現」下楞嚴經本文有「於世」{編}。
  8. 1)「感」通「惑」{編}。
  9. 2)「訂」疑「證」{編}。
  10. 3)「勸」疑「歡」{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