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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3_c_02L금강삼매경론 중권(金剛三昧經論 卷中)
신라국 사문 원효가 서술하다(新羅國 沙門 元曉 述)2) 「무생행품無生行品」
보살이 관행을 성취할 때 스스로 마음을 관觀할 줄 알아서 이치에 따라 수행하니, 유생有生의 마음도 아니고 무생無生의 마음도 아니며 또한 유행有行도 아니고 또한 무행無行도 아니다. 다만 증익변增益邊을 벗어나기 위하여 무생無生을 가설한 것이니, 유생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지 않고 무생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손감변損減邊을 벗어나기 위하여 또한 유행有行을 가설한 것이니, 비록 유행의 행은 있지 않지만 무행의 행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무생행품無生行品」이라는 명칭을 내세운다.
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내면 여섯 가지 부분이 있다.1)첫째는 모든 경계상을 없애고 무상관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미 앞에서 마쳤다. 이하는 둘째로서 그 발생하는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니, 무생행을 설명한다.경문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본격적으로 설법한(正說) 부분이다. 둘째는 설법을 찬탄한(讚說) 부분이다. 셋째는 설법을 듣고 얻은 이익(聞說得益)을 설명한 부분이다.
(1) 본격적으로 설법함(正說)
첫째의 정설에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주고받는 문답이고, 둘째는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하는 부분이고, 넷째는 여래가 확정하여 서술하는 부분이다.
① 주고받는 문답
첫째의 주고받는 문답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묻고, 둘째는 답하며, 셋째는 따지고, 넷째는 부정하며, 다섯째는 청하고, 여섯째는 해석한다.
가. 질문
첫째의 묻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가) 경문의 서문
경 이때 심왕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이 삼계의 밖을 벗어나 불가사의함을 알아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수하고 합장하며 게송으로 여쭈었다.
논 이 대목은 그 첫째로서 경문(經家)의 서문이다. -
001_0623_c_02L金剛三昧經論卷中
001_0623_c_03L
001_0623_c_04L新羅國沙門。元曉述
001_0623_c_05L無生行品1)第三 [10]
001_0623_c_06L菩薩觀行成就之時。知自觀心。順
001_0623_c_07L理修行。非有生心。非無生心。亦非
001_0623_c_08L有行。亦非無行。但爲離增益邊故。
001_0623_c_09L假說爲無生。不於有生生心。不於無
001_0623_c_10L生生心故。爲離損減邊。亦假說爲行。
001_0623_c_11L雖非有有行之行。而非無無行之行
001_0623_c_12L故。是故立名無生行品。
001_0623_c_13L爾時。心王菩薩。聞佛說法。出三界外。
001_0623_c_14L不可思議。從座而起。叉手合掌。以偈
001_0623_c_15L問曰。
001_0623_c_16L別顯觀行有六分中。第一遣諸境相
001_0623_c_17L顯無相觀。竟在於前。此下第二泯
001_0623_c_18L其生心。明無生行。就文有三。一者
001_0623_c_19L正說。二者讃說。其第三明聞說得益。
001_0623_c_20L初正說中。有其四分。一者往復問答。
001_0623_c_21L二者反徵問答。三者菩薩領解。四者
001_0623_c_22L如來述成。初中有六。一問。二答。三難。
001_0623_c_23L四拒。五請。六釋。初中有二。先經家序。
001_0623_c_24L「第三」無{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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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4_a_01L“심왕보살”은 본체의 측면에서 내세운 명칭이다. 그러나 심왕의 뜻에도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8식의 심心으로서 모든 심수心數를 제어하므로 심왕이라 하고, 둘째는 일심의 법으로서 모든 덕을 총체적으로 제어하므로 심왕이라 한다. 지금 심왕보살이 무생행에 들어가 일심왕을 증득하기 때문에 본체의 측면에서 내세운 명칭이다. 지금 이 「무생행품」에서는 무생행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심왕보살이 질문을 한다.“삼계의 밖을 벗어나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들은 설법을 내세워 질문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심왕보살이 들은 것은 위의 「무상법품」의 설법이다. 그런데도 지금 뒤의 「무생행품」을 들어서 앞의 「무상법품」을 섭수한 것은 「무상법품」의 마지막 게송이 “초연히 삼계를 벗어남은 …… 이룬 것이라네.”이기 때문이다.
나) 질문하는 말
경
如來所說義 여래께서 말씀하신 그 뜻은
出世無有相 세간을 떠나 집착이 없으니
可有一切生 곧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이
皆得盡有漏 다 누혹을 남김없이 없애네
斷結空心我 번뇌 끊어 심아가 공적하니
是卽無有生 이것이 곧 그대로 무생이네
云何無有生 이와 같은 유생이 없을진댄
而有無生忍 무생의 법인이 어찌 있으랴
논 이 두 게송은 묻는 말이다.이 가운데 첫째 게송은 부처님께서 앞에서 말한 것을 이해하여 요약한 것이니, 제1구와 제2구는 먼저 일미의 법인法印을 요약하고, 제3구와 제4구는 다음으로 일승으로 성취된 것을 요약하였다.뒤의 둘째 게송은 본격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제1구와 제2구는 무생의 뜻을 이어받았고, 제3구와 제4구는 무생법인에 대하여 물었다. 이미 유생有生이 없으므로 마땅히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마음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답변
경 그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선남자여, 무생법인은 법이 본래 무생하다는 것이다. 제유위행은 무생이지만 무생이라는 행도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터득한다는 것도 곧 허망이다.”
논 이것은 둘째로 답한 부분이다.2) 답변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생법인의 모습을 보이고, 둘째는 무생법인을 터득했다는 것에 대하여 그 과실을 드러낸다.“무생법인”이란 제법이 본래 무생임을 통달하는 것이다. 그런즉 정과 혜의 제유위행도 또한 유생이 없다. -
001_0624_a_01L心王菩薩者。從體立名。然心王之義。
001_0624_a_02L略有二種。一者八識之心。御諸心數。
001_0624_a_03L故名心王。二者一心之法。摠御衆德。
001_0624_a_04L故名心王。今此菩薩。入無生行。證
001_0624_a_05L一心王故。從所軆以立名也。今此品
001_0624_a_06L中。明無生行。所以心王菩薩發問。
001_0624_a_07L出三界外不可思議者。是出所聞之
001_0624_a_08L法。以爲發問之本。其所聞者。謂前
001_0624_a_09L品說。今且擧後以攝其前。謂最後頌
001_0624_a_10L言。超然出三界乃至所成故。
001_0624_a_11L如來所說義。出世無有相。可有一切生。
001_0624_a_12L皆得盡有漏。斷結空心我。是卽無有生。
001_0624_a_13L云何無有生。而有無生忍。
001_0624_a_14L此二頌是問辭。於中初頌領前所
001_0624_a_15L說。上半領前一味法印。下半領次
001_0624_a_16L一乘所成。後一頌正發問。於中上
001_0624_a_17L半牒無生義。下半問無生忍。旣無
001_0624_a_18L有生。應無忍心故。
001_0624_a_19L爾時。佛告心王菩薩言。善男子。無生
001_0624_a_20L法忍。法本無生。諸行無生。非無生行。
001_0624_a_21L得無生忍。卽爲虛妄。
001_0624_a_22L是第二答。答意有二。先示無生忍相。
001_0624_a_23L後顯有得過失。無生法忍者。達法本
001_0624_a_24L無生。是則定慧諸行。亦無有生。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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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4_b_01L따라서 무생이 아니라면 그것은 능인행能忍行(무생법인을 터득했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이 있는 꼴이다. 그러므로 “무생이라는 행도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그런데 여기에 능인행이 있다면 곧 진정한 무생법인인 무주와 무행에 어그러진다.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터득한다는 것도 곧 허망이다.”라고 하였다.
다. 따짐
경 심왕보살이 여쭈었다.“존자이시여, 무생법인을 터득한다는 것이 곧 허망이라면 터득함도 없고 법인도 없어야 마땅히 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논 이것은 셋째로 따지는 부분이다.3) 따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터득함(得)과 법인(忍)이 허망하다고 말한다면 곧 터득함도 없다는 것(無得)과 법인도 없다는 것(無忍)은 마땅히 허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허망과 반대이기 때문이다.”대승의 무소득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계탁하면서도 자신들의 경우는 허망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허망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와 같이 따지는 것이다.
라. 부정함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아니다. 왜냐하면 터득함도 없고 법인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터득함도 없고 법인도 없다는) 터득함(有得)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득함이 있고(有得) 머묾이 있으면(有住) 그것이 곧 발생이다(有生). 이처럼 터득했다는 마음이 발생하면 그것은 터득한 법이 있다(有所得)는 것이 되므로 또한 허망이 된다.”
논 이것은 넷째로 부정하는 것이다.4)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가) 직접적으로 부정함
첫째로 “아니다.”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나) 부정한 이유
둘째로 “왜냐하면……”은 부정한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부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저들의 생각이 터득 없음(無得)과 법인 없음(無忍)을 일컫는 것이라면, 비록 터득 있음(有得)과 법인 있음(有忍)의 유有를 터득한 것은 아닐지라도 오히려 터득함이 없고 법인이 없다는 그 무無를 터득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미 무를 터득했다면 곧 마음이 무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이미 무에 머물면 그것은 곧 발생(有生)이다. 말하자면 터득한 것이 있다는 마음이 발생한 셈이므로 그것 또한 발생 없음(無生)과 터득 없음(無得)에 어긋난다. 이런 까닭에 허망한 것이 된다.”
마. 청함
경 심왕보살이 여쭈었다.“존자이시여, 법인도 없고 발생도 없는 그 마음은 어째서 허망이 아닙니까?”
논 이것은 다섯째로 청하는 부분이다.5) 따질 길이 막혀서 뜻을 전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따르면서 자문하여 이끌어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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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4_b_01L於無生。有能忍行。故言非無生行。
001_0624_b_02L於中有得能忍之行。則乖眞忍無住
001_0624_b_03L無行。故言卽爲虛妄。
001_0624_b_04L心王菩薩言。尊者。得無生忍。卽爲虛
001_0624_b_05L妄。無得無忍。應非虛妄。
001_0624_b_06L是第三難。難意而言。若謂有得有忍
001_0624_b_07L是虛妄者。則謂無得無忍。應非虛妄。
001_0624_b_08L反虛妄故。諸學大乘無所得者。作如
001_0624_b_09L是計。自謂非妄。爲顯彼妄。故作是
001_0624_b_10L難。
001_0624_b_11L佛言。不也。何以故。無得無忍。是則有
001_0624_b_12L得。有得有住一本住
作忍。 [23] 是則有生。有生於
001_0624_b_13L得。有所得法。幷爲虛妄。
001_0624_b_14L是第四拒。於中有二。不者直拒。何
001_0624_b_15L以故下。第二釋拒。拒意而言。若彼
001_0624_b_16L意謂無得無忍。則雖不得有得有忍
001_0624_b_17L之有。而猶得其無得無忍之無。旣得
001_0624_b_18L於無者。則心住於無。心旣有住。卽
001_0624_b_19L是有生。謂有心生於有所得故。亦違
001_0624_b_20L於無生無得。是故說言并爲虛妄。
001_0624_b_21L心王菩薩言。尊者。云何無忍無生心
001_0624_b_22L而非虛妄。
001_0624_b_23L是第五請。追難路窮。意不能詣。故
001_0624_b_24L須仰諮。請爲將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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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4_c_01L바. 해석함
이하는 여섯째로 해석하는 부분이다.6)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득의 도리를 열고, 둘째는 무생의 도리를 보이고, 셋째는 그렇지 않다(非)는 것을 언급하고, 넷째는 옳다는 것(是)을 설명한다.
가) 무득의 도리를 열어 줌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법인도 없고 발생도 없는 그 마음이란 형단形段이 없는 마음이다. 마치 불의 자성이 비록 나무속에 들어 있지만 그 소재가 없는 경우와 같다.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단지 명칭일 뿐이고 글자일 뿐으로 그 자성은 불가득이다. 그래서 그 도리를 설명하려고 명칭을 가설하지만 명칭도 불가득이다. 그리고 마음의 모습도 또한 불가득이어서 처소를 볼 수가 없다. 마음의 이런 이치를 알면 그것이 곧 발생이 없는 마음이다.
논 첫째에 세 가지가 있으니, 법法·비유(喩)·합合이다.
(가) 법法
처음에 말한 “법인도 없고 발생도 없는 그 마음”이란 바로 법인에 들어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그 다음의 “형단이 없는 마음”이란 무소득의 마음을 드러낸다. ‘형’은 자체(體)를 말하고 ‘단’은 분단(分)을 말한다. 모든 반연에서 마음의 자체와 분단을 추구해 보면 즉卽의 상태나 이離의 상태에서도 모두 무소득이다. 이런 이치를 말미암은 까닭에 형단이 없다는 것이지 색이 지니고 있는 형단의 모습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나) 비유(喩)
비유 부분에서 “마치 불의 자성이 비록 나무속에 들어 있지만”이란 법인의 마음이 이치상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그 소재가 없는 경우와 같다.”는 것은 나무속에 모든 극미가 들어 있지만 그 가운데 불의 자성이 소재하는 곳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치상으로는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법문이 있지만 그 가운데 마음을 찾아보아도 영원히 소재가 없다. 이것은 불의 자성이 소재처가 없는 이치와 같다.
(다) 합合
부처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법성은 항상 그렇기 때문에 “결정성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불의 자성이라는 명칭에 대응하는 뜻은 불가득이다. 이와 같이 불의 자성은 비록 불가득이지만 그 나무속에 불의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도리를 드러내고자 불의 자성이라는 명칭을 말하였다. 그 명칭을 분석하면 단지 글자만 있고, 여러 글자를 더욱 더 추구해도 모두 무소득이다. 법인의 마음이라는 명칭과 모습도 당연히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합合 부분에서 “그리고 마음의 모습도 또한 불가득이다.”라고 하였다.법인을 터득한 보살로서 마음이 그런 줄을 안다면 -
001_0624_c_01L佛言。無忍無生心者。心無形段。猶如
001_0624_c_02L火性。雖處木中。其在無所。決定性故。
001_0624_c_03L但名但字。性不可得。欲詮其理。假說
001_0624_c_04L爲名。名不可得。心相亦爾。不見處所。
001_0624_c_05L知心如是。則無生心。
001_0624_c_06L此下第六爲釋。於中有四。先開無得
001_0624_c_07L道理。次示無生道理。三者擧非。四
001_0624_c_08L者明是。初中有三。謂法喩合。初言
001_0624_c_09L無忍無生心者。是牒正在法忍之心。
001_0624_c_10L言心無形段者。顯心無所得。形之言
001_0624_c_11L體。段之言分。就諸緣中。求心軆分。
001_0624_c_12L若卽若離。皆無所得。由是道理。故
001_0624_c_13L無形段。非謂無色形段相也。喩中火
001_0624_c_14L性雖處木中者。喩於忍心。雖處理
001_0624_c_15L中。其在無所者。就此木中。有諸極
001_0624_c_16L微。於中都無火性所在。如是理中
001_0624_c_17L有恒沙法門。於中求心。永無所在。
001_0624_c_18L如是火性無處道理。有佛無佛。法性
001_0624_c_19L常爾。故言決定性故。火性名下。義
001_0624_c_20L不可得。如是火性。雖不可得。而其
001_0624_c_21L木中。非無火性。欲詮此理。說火性
001_0624_c_22L名。推析此名。但有諸字。轉求諸字。
001_0624_c_23L皆無所得。忍心名相。當知亦爾。故
001_0624_c_24L次合言。心相亦爾。得忍菩薩。知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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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5_a_01L어찌 거기에서 능취심이 발생할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그것이 곧 발생이 없는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나) 무생의 도리를 보임
이하는 둘째로 무생의 도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비유이고, 둘째는 합이다.
(가) 비유
경 선남자여, 이 무생심의 자성(性)과 바탕(相)은 또한 마치 아마륵의 과실처럼 본래 자생自生도 아니고, 타생他生도 아니며, 공생共生도 아니고, 인생因生도 아닌 것으로서 곧 무생이다.7) 왜냐하면 연의 대사代謝8)이기 때문에 연이 기동해도 발생이 없고, 연이 사라져도 소멸이 없으며, 숨어 있거나 나타나 있거나 모습이 없고, 뿌리를 살펴보아도 적멸하다. 그래서 처하는 곳이 없어서 머무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논 비유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불四不9)을 설명하고, 둘째는 팔불八不10)을 드러낸다.
㉮ 사불四不을 설명함
첫째의 사불四不이라는 말은 연에 의지하므로 자생自生이 아니고, 자체가 종자이므로 타생他生도 아니며, 작作이 없으므로 공생共生도 아니고, 용用이 있으므로 무생無生도 아니다. 또한 아직 발생하기 전에는 자체가 없으므로 자체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고, 이미 발행한 후에는 벌써 존재하기 때문에 자체를 기다려 발생한 것이 아니다. 자체가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무엇을 기다려 타생이 있고, 자체와 타생이 없는데 어찌 공생이 있으며, 유인有因으로 발생한 것도 이미 불가득인데 하물며 무인無因으로 발생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발생을 추구해도 모두 무소득이다.“인생도 아닌 것으로서 곧 무생이다.”라는 말은 인因 없이 발생한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인이 없이 과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11)
“왜냐하면”부터는 계속하여 감추어져 있는 의심(伏疑)을 해석한 것이다.12) 의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불 가운데 세 번째인 불공생不共生은 그렇지 않다. 세 번째가 그렇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실이 맺히는 경우 종자는 친인親因이 되고 흙과 물은 소연疏緣이 된다. 친인과 소연이 함께 합해지므로 과실이 맺힌다. 그런데 어째서 불공생이라 말하는가.”이런 까닭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물은 것이다.“연의 대사代謝이기 때문에”는 친인과 소연이 선·후를 대사하면서 잠시도 멎지 않는다. 대사가 멎은 경우는 이미 과실이 없어 곧 공용도 없다. 공용이 없으므로 친인과 소인의 과실이 맺히지 않는다. -
001_0625_a_01L如是。何得於中。能取心生。以之故
001_0625_a_02L言則無生心。
001_0625_a_03L善男子。是心性相。又如阿摩勒菓。本
001_0625_a_04L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一本有
不字。
001_0625_a_05L無生。 [24] 何以故。緣代謝故。緣起非生。緣
001_0625_a_06L謝非滅。隱顯無相。根理寂滅。在無有
001_0625_a_07L處。不見所 [25] 住。決定性故。
001_0625_a_08L此下第二明無生理。於中有二。先喩
001_0625_a_09L次合。喩中有二。先明四不。後顯八
001_0625_a_10L不。言四不者。待緣故不自生。自種
001_0625_a_11L故不他生。無作故不共生。有用故不
001_0625_a_12L無生。又復未生時無自故。不從自生。
001_0625_a_13L已生時已有故。不須自生。自旣不成。
001_0625_a_14L待誰有他。自他旣無。何得有共。有
001_0625_a_15L因而生。旣不可得。何況得有無因而
001_0625_a_16L生。如是求生皆無所得。言不因生
001_0625_a_17L無生者。明不無因而生。謂不能生因
001_0625_a_18L無而果得生也。何以故下。次釋伏疑。
001_0625_a_19L疑者意曰。三不可爾。第三云何。意
001_0625_a_20L謂菓生種子爲親因。地水爲疎緣。此
001_0625_a_21L二共合故有菓生。云何而言不共生
001_0625_a_22L耶。是故問言何以故也。緣代謝故者。
001_0625_a_23L明彼二緣先代後謝不得暫停。停
001_0625_a_24L時旣無則無功用。功用無故俱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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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5_b_01L(『유가사지론』의) 게송에서 “일체의 유위행은 모두가 찰나로다. 머묾도 없을진댄 하물며 작용이랴.”13)라고 말한 것과 같다.그러므로 또 대사를 추구해도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잠시도 머묾이 없은즉 발생도 없고, 발생이 없은즉 소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이 기동해도 발생이 없고 연이 사라져도 소멸이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아서 추구해 보아도 숨음과 나타남이 모두 없다.“숨어 있는 것”은 종자가 흙 속에 있고, “나타나 있는 것”은 싹과 줄기가 흙 위로 솟아나 있기 때문이다.“뿌리를 살펴보아도 적멸하다.”는 것은 나무의 뿌리와 나무의 줄기를 통하여 살펴보고 과실이 맺히는 원인을 찾아보아도 필경에 과실이 맺히는 도리는 기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멸하다.”고 하였다.“처하는 곳이 없어서 머무는 것을 볼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결정성의 뜻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 팔불八不을 설명함
경 이 결정성은 일一도 아니고 이異도 아니며, 단斷도 아니고 상常도 아니며, 입入도 아니고 출出도 아니며, 생生도 아니고 멸滅도 아니다. 모든 네 가지 비방14)을 떠나 있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
001_0625_b_01L生果。如偈說言。諸行皆刹那。住尙
001_0625_b_02L無況用。故又求代謝。無生無滅。所
001_0625_b_03L以然者。旣無暫住則無有生。生無有
001_0625_b_04L故。則無有滅。故言緣起非生。緣謝
001_0625_b_05L非滅。如是推求隱顯皆無。隱者。種
001_0625_b_06L子在士下故。顯者。芽莖出地上故。
001_0625_b_07L根理寂滅者。推其樹根及樹幹理求
001_0625_b_08L生菓因畢竟無起。故言寂滅。在無
001_0625_b_09L有處不見所住。所以然者。決定性故。
001_0625_b_10L決定性義。如前所說。
001_0625_b_11L是決定性。亦不一不異。不斷不常。不
001_0625_b_12L入不出。不生不滅。離諸四謗。言語道
001_0625_b_13L斷。無生心性。亦復如是。云何說生不
001_0625_b_14L生。有忍無忍。
001_0625_b_15L次明八不。非直法爾。唯前四不。亦
001_0625_b_16L乃具絕一異等八。所以然者。菓種不
001_0625_b_17L一。其相不同故。而亦不異。離種無
001_0625_b_18L菓故。又種菓不斷。菓續種生故。而
001_0625_b_19L亦不常。菓生種滅故。種不入菓。菓
001_0625_b_20L時無種故。菓不出種。種時無菓故。
001_0625_b_21L不入不出故不生。不常不斷故不滅。
001_0625_b_22L不滅故不可說無。不生故不可說有。
001_0625_b_23L遠離二邊故不可說爲亦有亦無。不
001_0625_b_24L當一中故不可說非有非無。故言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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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5_c_01L무생한 마음의 자성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떻게 생과 불생과 유인과 무인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논 위의 사불에 이어서 둘째로 팔불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비단 법이法爾하여 위의 사불의 경우뿐만 아니라 일一·이異 등 여덟 가지의 경우도 역시 모두 단절한다. 왜냐하면 과실과 종자가 동일하지 않은 것은 그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또 다르지도 않은 것은 종자를 떠나서는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또한 종자와 과실이 단절된 것이 아닌 것은 과실은 종자를 이어서 발생하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또한 불변하는 것도 아닌 것은 과실이 발생하면 종자는 소멸되기 때문이다. 또한 종자가 과실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은 과실이 되었을 때 종자가 없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과실이 종자를 벗어나는 것도 아닌 것은 종자로 있을 때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들어 있는 경우도 없고 벗어나 있는 경우도 없으므로 불생이고, 불변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므로 불멸이다. 불멸이므로 무無라 말할 수 없고, 불생이므로 유有라 말할 수 없으며, 양변을 멀리 떠나 있으므로 역유역무亦有亦無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한가운데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네 가지 비방을 떠나 있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아마륵의 과실은 이와 같이 언설을 단절해 있다. 법인의 마음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무생한 마음의 자성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나) 합合
경 만약 마음에 대하여 소득이 있고 머묾도 있으며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반야를 터득할 수가 없다. 그것은 곧 장야長夜의 상태이다.
다) 그렇지 않다(非)는 것을 언급함
논 이하는 셋째로 그렇지 않다(非)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15) 즉 어떤 사람이 무생법인심에 대하여 그 심체를 터득할 수 있고 그 무생법인에 머물 수 있으며 그 무생법인의 도리를 볼 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자성을 모르고 곧 허망한 집착으로 보리 및 그 반야를 장애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성청정한 보리 및 능증의 반야를 터득하지 못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또한 “보리”는 처음부터 기동해 있는 보리이고, “반야”는 보리의 인因이다. 깨침의 인을 터득하지 못하므로 “장야의 상태”가 되는데, 그것은 무시이래의 망상으로서 대몽大夢16)이기 때문이다.
라) 옳다(是)는 것을 설명함
경 그러나 마음의 자성을 분명하게 터득한 사람은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알고 그 자성의 작용도 역시 여여함을 아는데, 그것이 곧 무생행이다.”
논 이것은 넷째로 옳다(是)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17)“마음의 자성을 분명하게 터득한 사람”이란 자심으로써 자심의 자성을 터득한 것이니, 『경』에서 “만약 능취의 작의로써 도리어 능취의 작의에 통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이에 능연과 소연이 절대평등이 되어 무루지가 발생하여 성제에 통달한다.”18)고 한 것과 같다.“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안다.”는 것은 자기 관심의 체성이 평등함을 아는 것이다.“그 자성의 작용 역시 여여함을 안다.”는 것은 능지의 작용을 가리키는데, 그 작용하는 자성이 평등하다는 것이다.이와 같이 마음을 관찰해 보면 그 본체와 작용이 평등하여 발생이 없고 소멸이 없으며 시작이 없고 종말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무생의 행이다.”라고 하였다.위의 사불四不에서 설명한 무생이란 ‘무생의 도리’를 드러낸 것으로 -
001_0625_c_01L諸四謗言語道斷。阿摩勒菓如是
001_0625_c_02L絕言。法忍之心亦不異此。故言無
001_0625_c_03L生心性亦如是等也。
001_0625_c_04L若有說心有得有住。及以見者。卽爲不
001_0625_c_05L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般若一本無般
若二字。 [26] 是
001_0625_c_06L爲長夜。
001_0625_c_07L此是第三擧非。謂有說言無生忍心
001_0625_c_08L心體可得住於無生。及與能見無生
001_0625_c_09L理者。不了心性。直是妄執能障菩
001_0625_c_10L提及其般若。是明不得性淨菩提
001_0625_c_11L能證般若。又菩提者。始起菩提。言
001_0625_c_12L般若者。菩提之因。不得覺因故爲
001_0625_c_13L長夜。無始妄想是大夢故。
001_0625_c_14L了別心性者。知心性如。是性亦如。是
001_0625_c_15L無生行。 [27]
001_0625_c_16L此是第四顯是。言了別心性者。卽以
001_0625_c_17L自心了自心性。如經言。若能以其能
001_0625_c_18L取作意。還能通達能取作意。如是方
001_0625_c_19L乃能緣所緣平等平等。無漏智生
001_0625_c_20L通達聖諦故。知心性如者。知自觀心
001_0625_c_21L體性平等故。是性亦如者。是能知用。
001_0625_c_22L用性平等故。如是觀心軆用平等。無
001_0625_c_23L生無滅無始無終。以之故言是無生
001_0625_c_24L行。上明四不之無生者。顯無生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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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6_a_01L그 도리가 범凡과 성聖에 통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 팔불八不에서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안다는 것으로 설명한 ‘무생’이란 ‘무생의 행’을 설명한 것이다. 무생의 행은 사불의 경우에서 설명한 무생의 도리와는 달리 성聖에만 해당한다. 성聖에만 해당하는 무생의 행은 이理에 계합된 일미이고, 널리 통하는 그 일미의 도리는 곧 지智에 계합된 평등平等이다. 평등하고 일미라는 점에서는 범부와 성인이 다르지 않고 무생이 도리에는 통함이 있지만 무생의 행은 차별이 있다는 점에서는 범부와 성인이 같지 않다.‘같지 않다’는 것은 같지만 다르다는 것이고,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다르지만 같다는 것이다. ‘같다’는 것은 다른 것에서 같다는 것을 변별한 것이고, ‘다르다’는 것은 같은 것에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같은 것에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 것’은 같은 것이 나뉘어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서 같다는 것을 변별한 것’은 다른 것이 없어져 같아진다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같다는 것’은 다른 것을 없앤 것이 아니므로 같다고 말할 수 없고, ‘다르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눈 것이 아니므로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다.
②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
아래는 둘째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이다.19) 여기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을 들어 도리를 따진다. 둘째는 유증有證인가 하고 부정하여 따진다. 셋째는 무증無證이라고 사뢰어 말씀드린다. 넷째는 유득有得을 부정하여 따진다. 다섯째는 무득無得이라고 사뢰어 말씀드린다. 여섯째는 증득이 없다고 서술한다. 일곱째는 의문점을 거듭 진술한다. 여덟째는 그 의문점을 해결해 준다.
가. 행을 들어 도리를 따짐
경 심왕보살이 여쭈었다.“존자이시여, 만약 마음이 본래 여여하여 행20)이 무생이라면, 제행이 무생이므로 유생행도 불생이고 불생행도 무행으로서 곧 그대로 무생의 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논 이 부분은 첫째로 행을 들어 도리를 따진 것이다.“만약 마음이 본래 여여하여 행이 무생이라면”은 위에서 들었던 ‘행이 곧 무생이라는 뜻’을 언급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알고 그 자성의 작용도 역시 여여함을 아는데, 그것이 곧 무생행이다.”라는 것으로, 생멸의 행이 발생하지 않음을 말한다. 곧 이것은 무생행의 모습을 바로 언급한 것이다. -
001_0626_a_01L理通凡聖。今明知如之無生者。明無
001_0626_a_02L生行。行別在聖。在聖之行與理一
001_0626_a_03L味。遍通之理與智平等。平等一味
001_0626_a_04L故聖人所不能異也。有通有別故
001_0626_a_05L聖人所不能同也。不能同者卽同而
001_0626_a_06L異也。不能異者卽異而同也。同者
001_0626_a_07L辨同於異。異者明異於同。明異於
001_0626_a_08L同者非分同爲異也。辨同於異者
001_0626_a_09L非銷異爲同也。良由同非銷異故不
001_0626_a_10L可說是同。異非分同故。不可說是異。
001_0626_a_11L但以不可說異故可得說是同。不可
001_0626_a_12L說同故可得說是異耳。說與不說無
001_0626_a_13L二無別矣。
001_0626_a_14L心王菩薩言。尊者。心若本如。無生於
001_0626_a_15L行。諸行無生。生行不生。不生無行。卽
001_0626_a_16L無生行也。
001_0626_a_17L此下第二反詰問答。於中有八。一擧
001_0626_a_18L行難理。二反詰有證。三仰報無證。
001_0626_a_19L四反詰有得。五仰報無得。六述無證
001_0626_a_20L得。七更陳所疑。八決其所疑。此卽第
001_0626_a_21L一擧行難理。言心若本如無生於行
001_0626_a_22L者。擧前所說行無生義。謂卽前言
001_0626_a_23L知心性如是性亦如是無生行。謂無
001_0626_a_24L生於生滅之行。卽是正擧無生行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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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6_b_01L“제행이 무생이므로”라는 것은 도리가 무생임을 언급한 것이니, 모든 중생의 오음인 제행이 본래 무생이라는 것이다.“유생행도 불생이고”라는 것은 무생의 도리는 무생의 행과 다름을 설명한 것이니, 생기한 행이 그대로 공하여 불생이지, 도리를 증득하여 소멸된 마음의 불생을 말미암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불생행도 무행으로서”라는 것은 불생의 도리가 무생의 행과 같음을 드러낸 것이니, 불생의 문도 역시 무심의 행이라는 것이다. 곧 무생법인이 무분별행인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이 불생의 행도 무생의 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을진댄 일체의 범부도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할 것이 없다.
나. 유증有證인가 하고 부정하며 따짐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선남자여, 그대는 무생으로써 무생의 행을 증득했는가?”
논 이는 둘째로 유증有證인가 하고 부정하며 따지는 것이다. 따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무생법인의 관찰에 들어갔을 경우, 제행이 무생이라는 도리에 의하여 무생의 행을 터득하였는가.”이와 같이 부정하며 따져서 묻고 있는 까닭은, 심왕보살이 무생의 도리가 무생의 행과는 다르다고 간주하고 있지만 그 무생의 도리도 역시 무생의 행임을 따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그대가 무생법인의 관찰에 들어갔을 경우, 무생의 도리가 무생의 행과 달리 능·소가 있던가.”라고 따진 것이다.
다. 무증無證이라고 받들어 답변함
경 심왕보살이 여쭈었다.“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여한 무생행은 성과 상이 공적하기 때문에 견見도 없고 문聞도 없으며, 득得도 없고 실失도 없으며, 언言도 없고 설說도 없으며, 지知도 없고 상相도 없으며, 취取도 없고 사捨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증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곧 쟁과 논이 될 것입니다. 쟁도 없고 논도 없어야 이에 무생행이기 때문입니다.”
논 이는 셋째로 무증無證이라고 받들어 답변한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증득이 없음(無證)을 설명하고, 둘째는 그렇지 않음(非)을 언급하고, 셋째는 그렇다(是)는 것을 드러낸다.
가) 증득이 없음(無證)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대강을 드러내고, 나중에 자세하게 해석한다.“여여한 무생행은 성과 상이 공적하다.”는 것은 전체적인 대강(摠標)의 구절이다. ‘성이 공적하다.’는 말은 소위 관찰하는 심체가 생멸의 모습을 떠나 있다는 것인데, -
001_0626_b_01L言諸行無生者。擧理無生。謂諸衆生
001_0626_b_02L五陰諸行本來無生。生行不生者。
001_0626_b_03L明理無生異行無生。謂生起行。卽
001_0626_b_04L空不生。非由證理。滅心不生。言不
001_0626_b_05L生無行者。顯理不生。類行無生。謂
001_0626_b_06L不生門。亦無心行。如無生忍。無分
001_0626_b_07L別行故。應卽是無生行耶。若如是者。
001_0626_b_08L一切凡夫。莫不證得無生忍矣。
001_0626_b_09L佛言。善男子。汝以無生。而證無生行耶。
001_0626_b_10L此是第二反詰有證。詰意而言。汝於
001_0626_b_11L入觀無生忍時。以依諸行無生之理。
001_0626_b_12L而得無生行耶。所以如是反詰問者。
001_0626_b_13L彼以理無生。別異行無生。而難理無
001_0626_b_14L生。亦是行無生故。今詰言。汝入觀
001_0626_b_15L時。理行別異。有能所耶。
001_0626_b_16L心王菩薩言。不也。何以故。如無生行。
001_0626_b_17L性相空寂。無見無聞。無得無失。無言
001_0626_b_18L無說。無知無相。無取無捨。云何取證。
001_0626_b_19L若取證者。卽爲諍論。無諍無論。乃無
001_0626_b_20L生行。
001_0626_b_21L此是第三奉答無證。於中有三。初明
001_0626_b_22L無證。二者擧非。三者顯是。初中亦
001_0626_b_23L二。前標後釋。如無生行性相空寂者。
001_0626_b_24L是摠標句。言性空寂。謂觀心軆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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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6_c_01L곧 위에서 설한 “마음의 자성이 여여함을 안다.”는 것이다. ‘상이 공적하다.’는 말은 관찰하는 마음을 아는 작용은 그 작용의 상相도 역시 여여하다는 것인데, 곧 위에서 말한 “그 자성 역시 여여하다.”는 것을 가리킨다.이하는 열 가지가 없다(十無)21)는 것으로써 전체적인 대강(摠標)의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견도 없고 문도 없다.”는 것은 마음의 자성은 들을 수도 없고(希) 볼 수도 없다(夷)는 것이다. 곧 이夷이므로 색이 단절되어 형상으로 드러낼 수가 없고, 희希이므로 소리가 단절되어 설명으로 가르칠 수가 없다.
나) 그렇지 않다(非)는 것을 언급함
“득도 없고 실도 없다.”는 것은 공을 드러냈지만 무소득이고, 생을 없앴지만 소실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가 없다(四無)는 것은 자성이 공적함을 해석한 것이다.“언도 없고 설도 없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 적멸하고 언설도 기동하지 못한 것이다.“지도 없고 상도 없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 적멸하여 멀리 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취도 없고 사도 없다.”는 것은 이미 분별이 없어 취할 성이 없고 버릴 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섯 가지가 없다(六無)는 것은 상이 공적함을 해석한 것이다. 무생행은 이처럼 공적한데 어찌 거기에 증득을 취함이 있겠는가.
다) 그렇다(是)는 것을 드러냄
이렇게 답변할 때 앞에서 따졌던 것이 더 이상 따질 수 없게 되었음을 스스로 안 것이다. 잘못(非)을 언급하여 옳음(是)을 드러낸 것이므로 살펴보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라. 유득有得을 부정하여 따짐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였는가?”
논 이는 넷째로 유득有得을 부정하여 따진 것이다.
문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지 못했는데, 여래는 무슨 까닭에 “그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였는가.”라고 묻는가?해 그것은 보살이 비록 구경의 보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지 못하였지만 이미 초지의 보리는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법화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팔생 내지 일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 삼계의 분단생사를 떠나 분수에 따라서 진여불성 곧 법성을 볼 수 있으므로 보리를 터득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구경에 만족한 여래의 방편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22)생각해 보면 -
001_0626_c_01L離生滅相。卽前所說知心性如也。相
001_0626_c_02L空寂者。觀心知用。用相亦如。卽前
001_0626_c_03L是性亦如之謂也。下以十無。釋此摠
001_0626_c_04L句。無見無聞者。心性希夷。夷故絕
001_0626_c_05L色。非像所表。希故絕聲。非敎所詮
001_0626_c_06L也。無得無失者。顯空而無所得。遣
001_0626_c_07L生而無所失故。如是四無。釋性空寂
001_0626_c_08L也。無言無說者。心行旣寂。不起言
001_0626_c_09L說故。無知無相者。心行寂滅。遠離
001_0626_c_10L二分故。無取無捨者。旣無分別。無
001_0626_c_11L性可取。無相可捨故。如是六無。釋
001_0626_c_12L相空寂也。無生行中。如是空寂。云
001_0626_c_13L何於中。而有取證。作是答時。自知
001_0626_c_14L前難。不成難也。擧非顯是。攻卽可
001_0626_c_15L知。
001_0626_c_16L佛言。汝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001_0626_c_17L此是第四反詰有得。問曰。菩薩末
001_0626_c_18L得阿耨菩提。如來何故問汝得耶。
001_0626_c_19L解云。此雖未得究竟菩提。而已證得
001_0626_c_20L初地菩提。如法華論曰。八生乃至一
001_0626_c_21L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謂證
001_0626_c_22L初地菩提故。以離三界中分段生死。
001_0626_c_23L隨分能見眞如佛性 [28] 名得菩提。非謂
001_0626_c_24L究竟滿足如來方便涅槃故。案云。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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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7_a_01L이것은 진여불성(법성)에 의거하여 설하므로 “보리”라 말하는 것이고, 증득하여 보기 때문에 “보리를 터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에서 “모든 법성이 공한즉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마. 무득無得이라고 사뢰어 말씀드림
경 심왕보살이 여쭈었다.“존자이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보리의 자성에는 득得도 없고 실失도 없으며 각覺도 없고 지知도 없어 분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이 없는 것이야말로 곧 청정한 자성입니다. 그 자성에는 간間도 없고 잡雜도 없으며, 언言도 없고 설說도 없으며, 유有도 없고 무無도 없으며, 지知도 없고 부지不知도 없습니다. 본받을 만한 모든 행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본받을 만한 행에 처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결정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터득함(得)도 없고 터득하지 못함(不得)도 없는데23)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고 말하겠습니까.”
논 이는 다섯째로 무득無得이라고 사뢰어 말씀드린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강(標)이고, 둘째는 해석(釋)이며, 셋째는 결론(結)이다.
(가) 대강(標))
나) 해석(釋)
둘째, 해석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득의 보리에도 소득의 자성은 없음을 설명하고,24) 둘째는 능득의 제행에도 능득의 모습이 없음을 드러낸다.25)
(가) 소득의 보리에 소득의 자성이 없음
첫째 가운데서 말한 “보리의 자성”이란, 진여자성은 텅 비고 걸림이 없으며 그 자성이 어둠을 떠나 있으므로 보리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남겨둘 만한 진성도 본래 없고 또한 없앨 만한 망상도 본래 없으므로 “득도 없고 실도 없다.”고 하였다.이와 같이 본각은 사려분별로 아는 것도 멀리 떠나 있고, 또한 솔이심率爾心26)으로 아는 것도 없으므로 “각도 없고 지도 없다.”고 하였다.이미 분별하는 견분도 없고 또한 작용되는 상분도 떠나 있기 때문에 “분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이와 같은 까닭으로 미혹에 흐려짐이 없고 본래 자성이 염오를 떠나 있으므로 “즉 청정한 자성입니다.”라고 하였다.종으로는 생과 멸에 간극이 없고, 횡으로는 능과 소에 잡염雜染이 없으므로 “그 자성에는 간도 없고 잡도 없다.”고 하였다.“언도 없고 설도 없다.”는 것은 능언과 소언이 단절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
001_0627_a_01L約眞如佛性。說名菩提。能證見故
001_0627_a_02L名得菩提。如經言。諸法性空。卽是菩
001_0627_a_03L提。此之謂也。
001_0627_a_04L心王菩薩言。尊者。我無得阿耨多羅三
001_0627_a_05L藐三菩提。何以故。菩提性中。無得無
001_0627_a_06L失。無覺無知。無分別相。無分別中。卽
001_0627_a_07L淸淨性。性無間雜。無有言說。非有非
001_0627_a_08L無。非知非不知。諸可法行。亦復如是。
001_0627_a_09L何以故。一切法行。不見處所。決定性
001_0627_a_10L故。本無有得不得。云何得阿耨多羅三
001_0627_a_11L藐三菩提。
001_0627_a_12L此是第五仰報無得。於中有三。謂標
001_0627_a_13L釋結。釋中有二。先明所得菩提無
001_0627_a_14L所得性。後顯能得諸行。無能得相。
001_0627_a_15L初中言菩提性者。謂眞如性。虛通無
001_0627_a_16L礙。性離闇弊。故名菩提。於中本無
001_0627_a_17L眞性可存。亦乃本無妄想可亡。故言
001_0627_a_18L無得無失。如是本覺。遠離思搆之覺。
001_0627_a_19L亦亡率爾之知。故言無覺無知。旣無
001_0627_a_20L分別之見。亦離所行之相。故言無分
001_0627_a_21L別相。由如是故。非惑相濁。本性離
001_0627_a_22L染故。言卽淸淨性。縱非生滅所間。
001_0627_a_23L橫非能所所雜。故言性無閒雜。無有
001_0627_a_24L言說者。能言所言。無不絕故。非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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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7_b_01L“유도 없고 무도 없다.”는 것은 비록 진여는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또 진여는 자성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지도 없고 부지도 없습니다.”라는 것은 비록 본각도 아니지만 또 불각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의 자성도 그러하여 터득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 능득의 제행에도 능득의 모습이 없음
“본받을 만한 모든 행도” 이하는 그 다음으로 능득能得의 제행도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무상법품」에서 말한 육바라밀의 수행은 진실한 궤칙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본받을 만한 모든 행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라는 것은 앞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터득한다고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모든 본받을 만한 행”은 육바라밀 등의 수행이다.“처소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득·실·각·지 내지 유·무·지·부지 등 능득의 제행의 처소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저 보리처럼 절대평등(平等平等)하기 때문에 본래 능득能得도 없고 불능득不能得도 없다.
다) 결론(結)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고 하겠습니까.”라는 것은 터득함이 없다는 것을 총결한 것이다.
바. 여래께서 증득이 없다고 서술함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래, 그렇다. 그대의 말처럼 일체의 마음작용(心行)은 무상無相(무분별상)을 벗어나지 않아서 자체가 적멸한 무생이다.
논 이하는 여섯째로 여래께서 증득이 없다고 서술한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본격적으로 서술하고, 둘째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언급하며, 셋째 그렇다는 것을 드러낸다.
가) 본격적으로 서술함(正述)
첫째에도 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서술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서술하고, 셋째는 결론을 맺는다.
(가) 총체적으로 서술함
첫째의 총체적인 서술 가운데 “그래, 그렇다.”에서 앞의 ‘그래’는 증득함(能證得)이 없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고, 뒤의 ‘그렇다’는 것은 터득함(所得)이 없다는 것을 서술한 것이다.
(나) 개별적으로 서술함
“일체의 마음작용은 무분별상(無相)을 벗어나지 않아서 자체가 적멸한 무생이다.”라는 것은 개별적인 서술이다. 첫째는 무생을 서술하고, 둘째는 적멸을 서술한다.
㉮ 무생을 서술함
“무생”이란 무생행으로 능증能證과 능득能得이 없음을 서술한 것이다.“적멸”이란 적멸한 도리로서 소증所證이 없고 소득所得도 없음을 서술한 것이다.첫째 가운데 “일체의 마음작용”이란 출세의 무분별지에 상응하는 모든 마음작용이다.제상에 집착하지 않고 무분별상을 증득(證會)하기 때문에 “무분별상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자체가 공적하여 명연冥然한 무생이므로 “자체가 적멸한 무생이다.”라고 하였다.
㉯ 적멸을 서술함
경 모든 식들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
001_0627_b_01L非無者。雖非有如。而非無如故。非
001_0627_b_02L知非不知者。雖非本覺而非不覺故。
001_0627_b_03L菩提性然。無可得義。諸可法行已下。
001_0627_b_04L次顯無能得行。如前品說六度之行。
001_0627_b_05L無非實軌故。言可法亦如是者。同前
001_0627_b_06L無得故。一切法行者。六度等行。不
001_0627_b_07L見處所者。不見得失覺知。乃至有無
001_0627_b_08L知不知等。所可行處故。與菩提平等
001_0627_b_09L平等。所以本無有能得不能得也。云
001_0627_b_10L何已下。摠結無得。
001_0627_b_11L佛言。如是如是。如汝所言。一切心行。
001_0627_b_12L不過無相。軆寂無生。
001_0627_b_13L此下第六如來述成。於中有三。一者
001_0627_b_14L正述。二者擧非。三者顯是。初中亦
001_0627_b_15L三。摠述。別述。後還結成。初言如是
001_0627_b_16L如是者。述前無證及後無得。一切已
001_0627_b_17L下。第二別述。先述無生。後述寂滅。
001_0627_b_18L言無生者。是無生行。述無能證能得。
001_0627_b_19L言寂滅者。是寂滅理。述無所證所得。
001_0627_b_20L初言一切心行者。所有出世無分別
001_0627_b_21L智相應心行。不取諸相。證會無相故。
001_0627_b_22L言不過無相。軆於空寂。冥然無生。故
001_0627_b_23L言軆寂無生。
001_0627_b_24L可有識識一本云。所
有諸識。 [29] 亦復如是。何以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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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7_c_01L왜냐하면 안眼과 안촉眼觸(眼境)이 모두 공적하고 안식도 또한 공적하여 동상動相도 없고 부동상不動相도 없으며, 안으로 삼수三受27)가 없어 삼수도 역시 적멸하다. 이·비·설·신·심·의·의식28) 및 말나·아리야도 또한 마찬가지로서 그 모두 역시 불생으로서 적멸심이고 무생심이다.
논 이는 둘째로 적멸의 뜻을 서술한 것이니, 모든 세간의 팔식이 공적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것을 예로 들고, 둘째는 자세하게 해석한다.
a. 앞의 것을 예로 듦
처음 말한 “모든 식들”은 모든 세간의 팔식을 총섭한 것이다. 마치 ‘모든 곳’이라는 말이 일체처를 섭수하는 것과 같다.“또한 마찬가지이다.”라는 것은 공적한 도리가 위에서 출세심이 무생인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b. 적멸의 뜻을 자세하게 해석함
“왜냐하면”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해석한 부분이다. 안眼은 안근眼根이고, 안촉眼觸은 곧 변행遍行29) 가운데 촉변행이다. 세 가지 화합(三和 : 根·境·識의 화합)에 의하여 발생하지만 그 세 가지를 화합시켜서 그것이 산공散空임을 설명하려는 까닭에 촉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다.“안식도 또한 공적하다.”는 것은 안촉이 이미 공하여 안식이 불생하기 때문이다.상속됨도 없고 변하거나 움직임도 없지만 또한 찰나도 변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동상動相도 없고 부동상不動相도 없다.”고 하였다.“안으로 삼수가 없다.”는 것은 삼수가 생기하는 것도 본래 적멸하기 때문이다. 모든 심수분별(心數) 가운데 촉觸과 수受가 서로 가깝고 크고 뛰어난 공능이 있으므로 촉법과 수법만 들고 나머지 법은 모두 제쳐 둔 것이다.“이·비·설·신”은 이근耳根과 이촉耳觸과 이식耳識 등이다.30)“심·의·의식”은 곧 제6식인데, 미래를 ‘심’이라 하고, 과거를 ‘의’라 말하며, 현재를 ‘의식’이라 한다. 수전문隨轉門31)에 의하여 이 세 가지 명칭을 들어서 삼세가 모두 공적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말나·아리야”는 제7식과 제8식인데, 안식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불생이다. 자세하게 해석하는 글은 이것으로 마친다.다음으로 말한 “적멸심”이란 가까이로는 팔식이 공적하다는 것을 결론지은 경문이고, -
001_0627_c_01L眼眼觸。悉皆空寂。識亦空寂。無有動
001_0627_c_02L不動相。內無三受。三受寂滅。耳鼻舌
001_0627_c_03L身心意意識。及以末那。阿梨耶。 [30] 亦復
001_0627_c_04L如是。皆亦不生。寂滅心 [31] 及無生心。
001_0627_c_05L此是第二述寂滅義。謂諸世間八識
001_0627_c_06L空寂。於中有1)二。 [11] 一者例前。二者廣
001_0627_c_07L釋。初言可有識識。摠攝所有世間八
001_0627_c_08L識。如言處處。攝一切處故。亦如是
001_0627_c_09L者。空寂之理。同前出世心之無生故。
001_0627_c_10L何以故下。第二廣釋。眼者眼根。眼
001_0627_c_11L觸。卽是遍行中觸。依三和生。令三
001_0627_c_12L和合。欲明散空故。偏擧之。識亦空
001_0627_c_13L者。眼觸旣空。眼識不生故。無有相
001_0627_c_14L續遷動。亦無刹那不遷故。言無有動
001_0627_c_15L不動相。言內無三受者。三受生起。
001_0627_c_16L本來寂滅故。諸心數中。觸受相近。
001_0627_c_17L有大勝能。故擧此二。通遣餘法也。
001_0627_c_18L耳鼻舌身者。謂耳耳觸耳識等也。心
001_0627_c_19L意意識者。是第六識。未來名心。過
001_0627_c_20L去名意。現名意識。依隨轉門。擧此
001_0627_c_21L三名。爲顯三世皆空寂故。末那梨耶
001_0627_c_22L第七第八。皆同眼識故。亦不生也。
001_0627_c_23L廣釋文竟。次言寂滅心者。近結八識
001_0627_c_24L「二」作「一」{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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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8_a_01L“무생심이다.”라는 것은 멀리로는 자체가 적멸하여 무생임을 결론지은 경문이다.
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언급함
경 만약 적멸심이 발생하거나 만약 무생심이 발생하면 그것은 유생행이지 무생행이 아니다. 그래서 안으로 삼수三受와 삼행三行과 삼계三戒가 발생한다.
논 이는 둘째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언급한(擧非) 것이다.32)소득이 있다고 간주하는 대승의 수행자는 팔식을 비우지 못하여 그 적멸심에 어긋난다.33) 그러므로 “적멸심이 발생한다.”고 하였다.출세간심이 무생인 줄을 모르고 소위 유심생으로 무상의 도리를 증득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무생심이 발생한다.”고 하였다.이것은 곧 세간의 유전행으로 출세간의 무생법인의 수행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생행이지 무생행이 아니다. 그래서 안으로 삼수와 삼행과 삼계가 발생한다.”고 하였다.“삼행”이란 몸·입·생각으로 짓는 것으로서, 선한 행위가 되기도 하고 불선의 행위가 되기도 한다.“삼계”란 몸·입·생각으로 그치는 것으로, 오직 선한 행위만 된다. 이 삼행과 삼계가 발생시키는 것이 인이 되어 삼유三有(欲界有·色界有·無色界有)에 태어나 삼수三受(苦受·樂受·不苦不樂受)를 다 받는다. 이와 같이 유전하므로 해탈을 터득하지 못한다.
다) 그렇다는 것을 드러냄
경 그러나 만약 적멸생심조차 불생이 되면34)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공능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적멸의 증득상도 없고 또한 적멸의 증득상이 없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처소에 머묾이 없어 무상無相을 총지하면 곧 삼수가 없다. 이에 삼수 등의 세 가지가 모두 적멸하고, 청정에도 머묾이 없어 삼매에 들어가지도 않으며, 좌선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곧 무생이고 무행이다.”
논 이는 셋째로 그렇다는 것을 드러낸(顯是) 것이다.35)“만약 적멸생심조차 불생이 되면” 앞의 “만약 적멸심이 발생하거나”라는 구절에 대한 반대로서, 발생하는 모든 마음을 버리고 발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마음이 항상 적멸하면 공능도 없고 작용도 없다.”는 것은 앞의 “만약 무생심이 발생하면”이라는 구절에 대한 반대로서, 모든 생·멸·기·동의 모습을 떠나 있고, 또한 작의·분별·공능·작용도 없다는 것이다.“적멸의 증득상도 없다.”는 것은 비록 생기하는 마음을 버렸지만 적멸상조차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다.“또한 적멸의 증득상이 없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
001_0628_a_01L空寂之文。及無生心者。遠結軆寂。無
001_0628_a_02L生之文。
001_0628_a_03L若生寂滅心。若生無生心。是有生行。
001_0628_a_04L非無生行。內生 [32] 三受三行三戒。
001_0628_a_05L此是第二擧非。謂有所得大乘學者。
001_0628_a_06L不空八識。違其寂滅。故言生寂滅心。
001_0628_a_07L不知出世心之無生。謂有心生。證無
001_0628_a_08L相理。故言生無生心。直是世間流轉
001_0628_a_09L之行。而乖出世無生忍行。故言是有
001_0628_a_10L生行等也。言三行者。身口意作。通善
001_0628_a_11L不善。言三戒者。身口意止。唯取其
001_0628_a_12L善。生此三行三戒爲因。而生三有
001_0628_a_13L具受三受。如是流轉。不得解脫。
001_0628_a_14L若 [33] 寂滅生心則不生。心常寂滅。無功
001_0628_a_15L無用。不證寂滅相。亦不住於無證。可
001_0628_a_16L處無住。總持無相。卽無三受。三受等
001_0628_a_17L1)三。 [34] 悉皆寂滅。淸淨無住。不入三昧。
001_0628_a_18L不住坐禪。無生無行。
001_0628_a_19L此是第三顯是。言若寂滅生心不生
001_0628_a_20L者。反前若生寂滅心句。遣諸生心
001_0628_a_21L不取生故。心常寂滅無功無用者。反
001_0628_a_22L前若生無生句。離諸生滅起動之相
001_0628_a_23L亦無作意分別功用故。不證寂滅相
001_0628_a_24L者。雖遺生起之心。不存寂滅相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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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8_b_01L비록 적멸상에 집착이 없지만 증득이 없다는 허물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모든 처소에 머묾이 없다.”는 것은 주착住著의 허물을 떠나 있음을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모든 주처에 전혀 집착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처소라는 것은 만약 발생과 기동을 부정하면 적멸에 집착하는 꼴이 되고, 만약 증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 증득이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꼴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처소에도 모두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무상을 총지한다.”는 것은 갖추고 있는 공덕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무생심에는 모든 수행의 공덕이 보존되어 있는데 다 같이 일미이고 무차별한 모습이기 때문이다.“이에 삼수 등 세 가지가 없다.”는 것은 앞의 “안으로 삼수와 삼행과 삼계가 발생한다.”라는 구절에 대한 반대로서 유전하는 인·과의 모습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이다.“모두 적멸하다.”는 것은 삼수·삼행·삼계가 본래 공적한 줄을 통달했기 때문이다.“청정에도 머묾이 없다.”는 것은 능달심은 공에도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삼매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세간에서 선정에 들어간 마음까지도 잊는 것이다.“좌선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세간에서 선의 고요함(禪靜)에 집착하는 것까지도 부정하는 것이다.만약 이러할진댄 곧 생기심도 없고 또한 분별행도 없으므로 “이것이 곧 무생이고 무행이다.”라고 말한다.
사. 의문점을 거듭 진술함
경 심왕보살이 여쭈었다.“좌선은 들뜨고 움직이는 마음을 섭수하여 미혹하고 어지러운 모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인데, 어찌하여 좌선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논 이는 일곱째로 의문점을 거듭 진술한 것이다. 의문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모든 선정은 들뜨고 움직이는 생각을 섭수하여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출세간의 무생행과 무생심에서도 역시 선정에 들어가 머물지 말라고 하는가. 만약 좌선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요동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이 들기 때문에 앞의 부처님 말씀을 이어받아 질문한 것이다.
아. 의문점을 해결해 줌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보살이여, 좌선을 한다고 하면 곧 움직임이 된다. 그래서 움직임도 없어야 하고 좌선을 한다는 것이 없어야 곧 무생선이다. 좌선의 자성은 무생으로서 유생을 떠나 있는데, 이것이 좌선의 진정한 모습이다. 좌선의 자성은 무집착(無住)으로서 -
001_0628_b_01L亦不住於無證者。雖無取寂滅相不
001_0628_b_02L墮無證過故。可處無住者。摠明離住
001_0628_b_03L着過。諸可住處皆無所住故。可住
001_0628_b_04L處者。若遣生起則可住寂滅。若遣
001_0628_b_05L有證則可住無證。如是可處皆無
001_0628_b_06L住故。摠持無相者。摠顯具功德。謂
001_0628_b_07L無生心持諸行德而同一味無差別
001_0628_b_08L相故。則無三受等三者。反前內生三
001_0628_b_09L受等句。遠離流轉因果相故。悉皆寂
001_0628_b_10L滅者。達三受等本來空故。淸淨無
001_0628_b_11L住者。能達之心無住空故。不入三
001_0628_b_12L昧者。能亡世間入定心故。不住坐禪
001_0628_b_13L者。亦遣世間住禪靜故。若能如是
001_0628_b_14L則無生起之心亦無分別之行。故言
001_0628_b_15L無生無行也。
001_0628_b_16L心王菩薩言。禪能攝動。定諸幻亂。云
001_0628_b_17L何不禪。
001_0628_b_18L此是第七陳疑。疑意而言。凡諸禪定。
001_0628_b_19L能攝掉動之念。令定散亂之心。云何
001_0628_b_20L出世無生行心。亦不入住於禪定耶。
001_0628_b_21L如其不禪。則應是動。有如是疑故乘
001_0628_b_22L彼問也。
001_0628_b_23L佛言。菩薩。禪卽是動。不動不禪。是無
001_0628_b_24L生禪。禪性無生離生禪相。禪性無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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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8_c_01L집착(住)을 떠나 있는데, 이것이 좌선의 작동이다. 만약 좌선의 자성에는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없음을 안다면 그것이 곧 무생법인의 터득이다. 그래서 무생법인의 반야도 또한 집착에 의지하지 않고, 무생법인의 마음도 또한 움직임에 의지하지 않는다. 좌선은 바로 이러한 지혜이기 때문에 무생법인의 반야바라밀을 터득한다.”
논 이는 여덟째로 의문점을 해결해 준 것이다.“좌선을 한다면 곧 움직임이 된다.”고 한 것은 소위 세간의 좌선은 비록 산란하지는 않지만 경계상에 집착하고, 경계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발생하면 기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동이 발생되는 선을 벗어나야 이정理定(무루의 선정)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곧 무생선이다.”라고 말한다.이와 같은 이정理定의 자성은 무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좌선의 자성은 무생이다.”라고 하고, 또 그대로 무생일 뿐만 아니라 적멸에도 집착이 없으므로 “좌선의 자성은 무집착이다.”라고 한다.만약 발생이 있으면(有生) 그것은 곧 분별상이고, 집착(住著)이 있으면 그것은 곧 요동이다. 그러나 지금은 곧 그와는 반대이기 때문에 “유생을 떠나 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좌선의 모습이다. 집착을 떠나 있는 것이 좌선의 작동이다.”라고 한 것이다.지금까지의 여러 구절은 이정理定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만약 좌선의 자성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음을 안다면” 이하부터는 이지理智(무루지혜)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동일한 자체에 대하여 두 가지 뜻으로 나눈 것일 뿐이다.36)“좌선의 자성에는 움직임이 없음을 안다면”이란 좌선의 자성이 무생인 줄을 알기 때문이고, “좌선의 자성에는 고요함(靜)이 없음을 안다면”이란 좌선의 자성이 무주인 줄을 알기 때문이다.“그것이 곧 무생법인의 터득이다.”라는 것은 좌선의 도리가 무생인 줄을 터득하기 때문이다.“무생법인의 반야”라는 것은 좌선의 수행이 무생인 줄을 터득하기 때문이다.“또한 집착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생지無生智는 도리(理)에 의지하지도 않고 집착(住)에 의지하지도 않아 능과 소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무생법인의 마음도 또한 움직임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도리와 집착에 의지하지 않을지라도 유생심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무생법인의 반야를 말미암아 피안에 도달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하였다.지금까지 위의 여덟 부분의 전체는 둘째로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에 해당한다.37)
③ 보살이 이해함
경 심왕보살이 여쭈었다.“존자이시여, 무생법인의 반야는 일체처에 머묾도 없고, 일체처에서 떠나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생법인의 마음에는 머무는 처소도 없고, 처소에 머무는 마음도 없으며, -
001_0628_c_01L離住禪動。若知禪性無有動靜。卽得無
001_0628_c_02L生。無生般若。亦不依住。心亦不動。以
001_0628_c_03L是智故。故得無生般若波羅密。
001_0628_c_04L此是第八決疑。言禪卽是動者。謂世
001_0628_c_05L間禪。雖非散亂。而取境相。取相心
001_0628_c_06L生。生起動故。能離如是生動之禪。乃
001_0628_c_07L能得入理定。故言是無生禪。如是理
001_0628_c_08L定。性無生動。故言禪性無生。非直
001_0628_c_09L無生。亦無住寂。故言禪性無住。若有
001_0628_c_10L生則是相。有住着則是動。今卽反
001_0628_c_11L此。故言離生禪相。離住禪動。上來
001_0628_c_12L諸句。明理定相。知禪性下。顯理智
001_0628_c_13L相。唯就一體。義分爲二。知禪性無
001_0628_c_14L有動者。知禪性無生故。無有靜者。
001_0628_c_15L知禪性無住故。卽得無生者。得理無
001_0628_c_16L生故。無生般若者。得行無生故。亦
001_0628_c_17L不依住者。謂無生智。不依理住。離
001_0628_c_18L能所故。心亦不動者。雖不依理住。
001_0628_c_19L而非生心動故。由如是智。能到彼岸。
001_0628_c_20L故言般若波羅密也。上來八分。合爲
001_0628_c_21L第二反詰問答。
001_0628_c_22L心王菩薩言。尊者。無生般若。於一切
001_0628_c_23L處無住。於一切處無離。心無住處。無
001_0628_c_24L「三」作「二」{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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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9_a_01L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집착하는 마음도 없으므로 그 마음은 무생이고 무주입니다.38)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 곧 무생의 머묾입니다.존자이시여, 무생심과 무생행39)은 불가사의합니다. 따라서 불가사의 가운데서 가설可說이기도 하고 불가설不可說이기도 합니다.”
논 이것은 셋째로 보살이 이해하는 대목이다.40)“일체처”는 일체의 진眞·속俗·동動·적寂 등을 가리킨다.“머묾도 없다.”는 것은 이 일체처에서 무소득이기 때문이다.“떠나 있지도 않습니다.”라는 것은 이 일체처에서 터득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 일체처는 모두가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不然) 부정하는 것도 아니기(非不然) 때문이다.“그 마음에는 머무는 처소도 없다.”는 것은 주처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처소에 머무는 마음도 없다.”는 것은 머무는 주체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집착하는 마음도 없다.”는 것은 앞의 두 구절41)을 합한 것인데, 집착의 대상(有處)도 없고 집착하는 마음(有住心)도 없기 때문이다.“마음은 무생이고 무주입니다.”라는 것은 무생과 무주의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란 앞의 “일체처에 머묾도 없고 일체처에서 떠나 있지도 않습니다.”라는 대목을 결론맺은 것인데, “떠나 있지도 않다.”라는 뜻은 머묾에 의탁하여 시설(假設)한 것이다.“곧 무생의 머묾입니다.”라는 것은 앞의 “그 마음은 소주처도 없고 능주처의 마음도 없으며 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집착하는 마음도 없으므로 그 마음은 무생이고 무주입니다.”의 대목을 결론맺은 것인데, 곧 주住가 그대로 무주無住이고 무주無住가 그대로 주住이기 때문이다.“무생심과 무생행은 불가사의합니다.”는 것은 언설을 떠나 있고 사려를 단절해 있는 것이다.“따라서 불가사의 가운데서 가설이기도 하고 불가설이기도 합니다.”라는 것은 언설을 떠나 있고, 또한 언설을 떠나 있다는 것도 떠나 있는 것이다. 언설을 떠나 있기 때문에 불가설이라 말하고, 언설을 떠나 있다는 것도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가설이라 말한다.“가설이기도 하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도 아닌 것(非不然)이고, “불가설이기도 합니다.”라는 것은 긍정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총설로서 “가설이기도 하고 불가설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다. 언설에 가설可說과 불가설不可說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유에도 또한 가사의可思議와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언설의 측면만 들어서 드러냈을 뿐이다.
④ 여래가 확정하여 서술함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래, 그렇다.”
논 이는 넷째로 여래가 확정하여 서술하는 것이다.42) 위에서 이해한 것이 도리에 계합할 뿐만 아니라, -
001_0629_a_01L處住心。無住無心。心無生住。如此住
001_0629_a_02L心。卽無生住。尊者。心無生行。 [35] 不可思
001_0629_a_03L議。不思議中。可不可說。
001_0629_a_04L此是第三領解。一切處者。一切眞俗。
001_0629_a_05L動寂等處。言無住者。於此一切。無
001_0629_a_06L所得故。言無離者。於此一切無。所
001_0629_a_07L不得故。所以然者。彼一切處。悉皆
001_0629_a_08L非然非不然故。心無住處者。無所住
001_0629_a_09L處故。無處住心者。無能住心故。無
001_0629_a_10L住無心者。合前二句。以無有處有住
001_0629_a_11L之心故。心無生住者。不無無生無住
001_0629_a_12L之心故。如此住心者。結前於一切處
001_0629_a_13L無住。乃至無離。無離之義。假1)設 [12] 住
001_0629_a_14L故。卽無生住者。結前心無住處。乃
001_0629_a_15L至心無生住。住卽無住。無住卽住故。
001_0629_a_16L心無生行。不可思議者。離言絕慮故。
001_0629_a_17L不思議中可不可說者。以離言亦離
001_0629_a_18L離言故。以離言故。言不可說。離離言
001_0629_a_19L故。亦可得說。言可說者。非不然故。
001_0629_a_20L不可說者。非是然故。故摠說言可不
001_0629_a_21L可說。如說言說。有可不可。當知其
001_0629_a_22L思。亦有可不可。但擧一邊影顯之耳。
001_0629_a_23L佛言。如是如是。
001_0629_a_24L此是第四述成。如前領解。非直2)契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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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9_b_01L또한 우러러보아도 부처님의 설법에 칭합하기 때문에 거듭해서 “그래, 그렇다.”고 말한다.「무생행품」에 대한 산문의 정설 부분은 이상으로 마친다.
(2) 설법을 찬탄함(讚說)
이하는 둘째로 게송으로 설법을 찬탄한 것이다.43)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산문으로 서술하는 것이고, 둘째는 게송이다.
① 산문으로 서술함
경 심왕보살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나서 미증유한 것이라 찬탄하였다. 그리고 게송을 설하여 말씀드렸다.
논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나서”는 이 「무생행품」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② 게송
이하 세 게송은 개별적인 송문頌文이 아니라 다만 총체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으니, 법法·비유(喩)·합合·결結이다.
가. 법
경
滿足大智尊 위대한 지혜 다 갖춘 존자께서
廣說無生法 무생행법을 광대하게 설하시네
聞所未曾聞 일찍이 듣지 못한 설법을 듣고
未說而今說 듣지 못한 설법 지금 설하시네
논 이것은 첫째 법法을 설하는 것이다.“듣지 못한 설법 지금 설하시네.”라고 찬탄한 것은 비록 이전에 자세하게 설법했지만, 지금 이 경문은 말은 간략하지만 뜻은 풍부하고 문장은 간략하지만 도리는 자세하니, 이와 같이 오묘한 법은 일찍이 설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
猶如淨甘露 마치 맑고 깨끗한 감로법 같아
時時乃一出 어쩌다가 단 한 번 출현한다네
難遇難思議 만나기도 어렵고 불가사의하며
聞者亦復難 설법을 듣는 것도 또 어렵다네
無上良福田 그 무엇보다 가장 좋은 복전과
最上勝妙藥 제일 높고 훌륭한 묘약 가지고
爲度衆生故 일체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而今爲宣說 지금 여기 베풀어 널리 설하네
나. 비유
논 여기의 두 구절은 둘째 비유(喩)이다.“감로법”은 불사의 약이니, 이 『경』으로 생사를 벗어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다. 합合
그 다음 네 구절은 셋째 합合이다.“그 무엇보다 가장 좋은 복전”은 설법을 듣는 자를 찬탄한 것이다.“제일 높고 훌륭한 묘약 가지고”란 사람들이 듣는 설법에 계합된 것이다.
라. 결結
마지막 두 구절은 넷째 결結이다.
(3) 설법을 듣고 얻은 이익을 설명함
경 그때 대중들이 이 설법을 듣고 나서 모두 무생과 무생의 반야를 터득하였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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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9_b_01L當道理。亦乃仰稱佛說。所以重言如
001_0629_b_02L是如是。長行正說。竟在於前。
001_0629_b_03L心王菩薩。聞如是言。歎未曾有。而說
001_0629_b_04L偈言。
001_0629_b_05L此下第二以偈讃說。於中有二。先
001_0629_b_06L序後頌。聞如是言者。聞此一品之內
001_0629_b_07L佛言也。
001_0629_b_08L滿足大智尊。廣說無生法。聞所未曾聞。
001_0629_b_09L未說而今說。
001_0629_b_10L此下三頌。非別頌文。但是摠歎。於
001_0629_b_11L中有四。法喩合結。此是第一法說。
001_0629_b_12L讃歎未說而今說者。雖前廣說。而今
001_0629_b_13L此經。言略義豊。文省理詳。若斯之
001_0629_b_14L妙。未先說故。
001_0629_b_15L猶如淨甘露。時時乃一出。難遇難思議。
001_0629_b_16L聞者亦復難。無上良福田。最上勝妙藥。
001_0629_b_17L爲度衆生故。而今爲 [36] 宣說。
001_0629_b_18L此下二句。是第二喩。言甘露者。不
001_0629_b_19L死之藥。以喩此經。能出生死。次有
001_0629_b_20L四句。是第三合。無上良福田者。歎
001_0629_b_21L能聞者。最上勝妙藥者。合所聞法。
001_0629_b_22L下之二句。第四結也。
001_0629_b_23L爾時。衆中聞設此已。皆得無生。無生
001_0629_b_24L般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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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29_c_01L논 이는 셋째 당시의 대중이 얻은 이익이다.45) 지전地前의 범부가 이 「무생행품」의 설법을 듣고서 초지의 무생법인을 터득한 것이다.
3) 「본각리품本覺利品」
논 일체의 유정은 시작이 없는 이래부터 무명의 장야長夜에 빠져 망상의 대몽을 꾼다. 이에 보살은 일미관행을 닦아서 무생법인을 터득하였다. 그때 보살은 중생이 본래 적정하여 그대로 본각인 줄을 통달하고서 일미의 침상에 누워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을 제도하였다. 본 품에서는 이러한 도리를 드러내므로 「본각리품」46)이라 한다.일미관행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하는 그 가운데 셋째로 본각의 이익에 대하여 설명한다. 무생행에 의해서 본각을 알아야 바야흐로 일체중생을 널리 교화하고 또한 그들에게 이익을 베풀어 줄 수가 있다. 이런 뜻을 말미암아 다음으로 본각에 대하여 연설한다.경문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본각의 이익에 대하여 널리 설명하고, 둘째는 게송으로 찬탄하고, 셋째는 그 당시의 대중이 이익을 터득한다.
(1) 본각의 이익에 대하여 널리 설명함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동을 인유하여 적정을 설명함으로써 본각의 이익의 종지를 간략하게 표한 것이다. 둘째는 숨어 있는 것(微)으로부터 드러난 것(著)에 이르기까지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널리 설명한 것이다.
① 본각의 이익의 종지를 간략하게 표함
다시 첫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체의 이동에 의지하여 본각의 이익을 드러내고, 둘째는 문답으로 본각의 이익을 드러내고, 셋째는 광명을 내어 본각의 이익을 찬송한다.
가. 신체의 이동에 의지하여 본각의 이익을 드러냄
경 그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일미진실의 불가사의함을 듣고서, 멀리에서 다가와 부처님 자리 곁에서 전념으로 경청하여 청정하고 명백한 경지에 들어 몸과 마음이 부동하였다.
논 처음에 “무주보살”이라고 한 것은, 이 사람이 비록 본각에는 본래 기동이 없음을 통달했지만 적정에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
001_0629_c_01L此是第三時衆得益。地前凡夫。聞說
001_0629_c_02L此品。能得初地無生忍故。
001_0629_c_03L本覺利品3)第四 [14]
001_0629_c_04L一切有情。無始已來。入無明長夜。
001_0629_c_05L作妄想大夢。菩薩修觀獲無生時。
001_0629_c_06L通達衆生本來寂靜。直是本覺。臥一
001_0629_c_07L如床。以是本利。利益衆生。此品顯
001_0629_c_08L是道理。故名本覺利品。
001_0629_c_09L爾時。無住菩薩。聞佛所說。一味眞實。
001_0629_c_10L不可思議。從遠近來。親如來座。專念
001_0629_c_11L諦聽。入淸白處。身心不動。
001_0629_c_12L別明觀行六分之中。此下第三明本
001_0629_c_13L覺利。依無生行。能會本覺。方得普
001_0629_c_14L化。饒益一切。由是義故。次演說之。
001_0629_c_15L就文有三。一者。廣明本覺利益。二
001_0629_c_16L者。以偈讃頌。三者。時衆得益。初中
001_0629_c_17L有二。一者。因動明靜。略標本利之
001_0629_c_18L宗。二者。從微至著。廣說本利之義。
001_0629_c_19L初中有三。一者。寄身移動以標本
001_0629_c_20L利。二者。因言往復以標本利。三者。
001_0629_c_21L放光讃頌本利。初中言無住菩薩
001_0629_c_22L者。此人雖達本覺本無起動。而不
001_0629_c_23L「設」作「說」{甲}。「契」作「▼(㓞/廾)甲}。「第四」
001_0629_c_24L無{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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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0_a_01L항상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그 덕에 의하여 명호를 내세워 무주라 한 것이다. 무주의 덕은 본각의 이익(本利)47)에 계합된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인유하여 그 종지를 표한 것이다.“일미진실의 불가사의”라는 것은 곧 앞의 「무생행품」에서 “무생심과 무생행48)은 불가사의합니다.”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멀리에서 다가와 부처님 자리 곁에서”란 이전의 자리는 부처님 자리에서 멀었지만, 「무생행품」을 듣고서 부처님 근처로 다가가 앉은 것이다. 이것은 곧 이전에는 심오한 설법을 듣지 못하여 그 지위가 범부로서 불과佛果에서 멀었지만, 지금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였으므로 자신은 반드시 불과를 터득할 근처에 있음을 안다는 것을 드러낸다.“전념으로 경청하여 청정하고 명백한 경지에 들어 몸과 마음이 부동하였다.”는 것은 이미 부처님 자리 곁에서 전념하여 법을 잘 듣고서 본래청정하고 본래 명백한 경지에 들어가 본각의 적정을 따라서 몸과 마음이 부동한 것이다. 이것을 인유하여 곧 본각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본래 기동이 없음을 통달하여 무소득을 터득했음을 나타낸다.
나. 문답으로 본각의 이익을 드러냄
경 그때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그대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느 경지에 도달했는가?”무주보살이 여쭈었다.“저는 근본이 없는 경지에서 왔고, 지금 근본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49)
논 이하는 둘째 문답으로 본의 이익을 드러낸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으니, 질문과 답변과 서술하여 마무리 짓는 것이다.
( 가) 질문)
나) 답변
둘째의 답변 내용은 범부의 지위로부터 와서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성인의 지위에 도달했을 때에 예전과 지금을 되돌아보니 다음과 같다.예전 범부의 지위에서 처음으로 발심했을 때는 스스로의 마음은 본래 기동이 없다고 믿었으니, 기동의 근본이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성인의 지위에서 무생을 터득하고 보니 스스로의 마음은 본래 무생임을 깨쳐 알았으니, 생기의 근본이 무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근본이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지금 도달한 경지도 또한 근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미 근본이 없음을 언급하였으므로 지말도 없는 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
001_0630_a_01L住寂靜。恒起普化。依德立號。名曰
001_0630_a_02L無住。無住之德。契合本利。故因此
001_0630_a_03L人。以表其宗。言一味眞實不可思議
001_0630_a_04L者。則前品說心無生不可思議等也。
001_0630_a_05L從遠近來親如來座者。其先座處。去
001_0630_a_06L佛座遠。聞前品已。遷至近處。表其
001_0630_a_07L先時。未聞深法。位在凡愚。去佛果
001_0630_a_08L遠。今聞佛說。得本覺利。自知當得
001_0630_a_09L佛果在近也。專念諦聽入淸白處身
001_0630_a_10L心不動者。已近佛座時。專念於諦聽。
001_0630_a_11L入本淸淨明白之處。隨本覺靜。身心
001_0630_a_12L不動。因此卽表入本覺時。達本無動。
001_0630_a_13L得無所得也。
001_0630_a_14L爾時。佛告無住菩薩言。汝從何來。今
001_0630_a_15L至何所。無住菩薩言。尊者。我從無本
001_0630_a_16L來。今至無本所。
001_0630_a_17L此下第二因言往復。於中有三。問。
001_0630_a_18L答。述成。第二答意。明從凡位來至
001_0630_a_19L聖位。至聖位時。顧尋古今。古在凡
001_0630_a_20L位。始發趣時。自信己心。本無起動。
001_0630_a_21L起動之本。不可得故。今至聖位。得無
001_0630_a_22L生時。證知自心。本來無生。生起之本。
001_0630_a_23L無所得故。故知始從無本處來。今所
001_0630_a_24L至處。亦無本所。旣擧無本。當知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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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0_b_01L지말도 없고 근본도 없으니, 온 곳 없고 도달하는 곳도 없다. 다만 부처님께서 질문하신 말씀을 받들고 따르는 입장에서 ‘온다’거나 ‘도달한다’는 말을 가탁(假寄)한 것이다. 비록 온 곳도 없고 도달한 곳도 없지만, 온 곳과 도달한 곳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온 곳과 도달한 곳을 인유하여 온 곳도 없고 도달한 곳도 없음을 드러내었으니, 도달한 곳과 온 곳이 모두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다) 서술하여 마무리 지음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대는 본래 온 곳이 없고 지금 또한 도달한 곳도 없다.50) 그대가 터득한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니, 곧 대보살마하살이다.”
논 이는 서술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서술하여 마무리를 짓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온 곳과 도달한 곳이 이미 똑같이 근본이 없다. 근본이 없다는 점이 똑같은즉 온 것도 없고 도달한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온 곳이 도달한 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본래 온 곳이 없고, 도달한 곳이 이미 온 곳과 똑같기 때문에 지금 바야흐로 도달한 곳도 없다. 또한 온 곳이 이미 근본이 없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 없고 오지 않는다는 것도 없으며, 지금 도달한 곳도 또한 근본이 없기 때문에 도달한 것이 없고 도달하지 않은 것도 없다.이미 온 바도 없고 도달한 바도 없어서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그대가 터득한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다.”고 하였고, 이미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여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므로 “곧 대보살마하살이다.”라고 하였다.
다. 광명을 내어 보살을 칭찬함
경 이에 대광명을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비추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大哉菩薩 참으로 훌륭하다 보살이여
智慧滿足 지혜를 빠짐없이 갖추고서
常以本利 언제나 본각의 이익으로써
利益衆生 중생에게 이익을 베풀도다
於四威儀 행주좌와 일체의 행위에도
常住本利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서
導諸群庶 일체의 중생을 이끌어들여
不來去去 거듭하여 오감을 없앤다네51)
논 이하는 셋째 여래께서 광명을 내어 보살을 칭찬함을 드러낸 것이다.52)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가) 경문(經家)의 설명
첫째는 경문(經家)의 설명이다. “대광명을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널리 비춘다.”고 한 이유는 터득한 대지혜의 광명으로 세간의 어둠을 비추어 세간으로 하여금 광명을 얻도록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것은 여래께서 위에서 칭찬하신 것53)을 증성證成한 것이다.
나) 게송으로 무주보살을 칭찬함
“참으로 훌륭하다 보살이여”라는 것은 무주보살을 특별히 칭찬한 것이다. -
001_0630_b_01L末。無末無本者。無來無至矣。但仰順
001_0630_b_02L佛問之辭。假寄來至之言。雖復不有
001_0630_b_03L來至。而非都無來至故。故因來至。顯
001_0630_b_04L無來至。至所來處。同無本故。
001_0630_b_05L佛言。汝本不從來。今亦 [37] 不至所。汝得
001_0630_b_06L本利。不可思議。是大菩薩摩訶薩。
001_0630_b_07L此是述成。述成意言。來處至處。旣
001_0630_b_08L同無本。無本處同。則無來至。所以
001_0630_b_09L然者。來處不異於至處故。本無從來。
001_0630_b_10L至處旣同於來處故。今無所至。又復
001_0630_b_11L來處旣無本故。無來不來。今所至處。
001_0630_b_12L亦無本故。無至不至。旣無來無至。
001_0630_b_13L本來寂靜。故言汝得本利。不可思議。
001_0630_b_14L旣得本利。自利利他。故言是大菩薩
001_0630_b_15L摩訶薩也。
001_0630_b_16L卽放大光。遍照大 [38] 千界。而說偈言。
001_0630_b_17L大哉菩薩。智慧滿足。常以本利。利益
001_0630_b_18L衆生。於四威儀。常住本利。導諸羣庶。
001_0630_b_19L不來去去。 [39] 不去
001_0630_b_20L此下第三如來放光。表讃菩薩。於中
001_0630_b_21L有二。先經家序。所以放大光明 [40] 照
001_0630_b_22L大千界者。爲表得大智慧光明。照世
001_0630_b_23L間闇。令得光明故。證成如來前所讃
001_0630_b_24L故。大哉菩薩者。別讃無住菩薩。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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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0_c_01L“지혜를 빠짐없이 갖추고서”라는 것은 안다는 것에 집착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행주좌와 일체의 행위에도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서”라는 것은 위에서 서술한 “멀리에서 다가와 부처님 자리 곁에서”라는 것처럼 이를 인유하여 본각의 이익을 시현한 것이다.“거듭하여 오감을 없앤다네.”라는 것은 적정하면서도 항상 교화작용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옴을 없앤다.’는 것은 이끌어 교화함을 따라 출세간을 터득케 하여 다시는 세간에 떨어져 돌아오지 않게 하는 것이고, ‘감을 없앤다.’는 것은 터득한 불퇴전의 경지를 따라서 세간을 벗어나 출세간으로 잘 가게(善逝)하는 것이다.
②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널리 연설함
아래는 둘째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널리 연설하는 것이다.54)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그대로 널리 연설하고, 둘째는 거듭하여 연설한다.
가. 그대로 널리 연설함
첫째의 그대로 널리 연설한 것에서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경 그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존자이시여, 어떤 이익을 베풀어서 중생의 일체정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식55)에 들게 하는 것입니까?”56)
논 “어떤 이익을 베풀어서”라는 것은 교화하는 사람이 베푸는 이익의 뜻을 질문한 것이다. 곧 위의 게송에서 “일체의 중생을 이끌어 들여”라는 구절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중생의 일체정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하는 것입니까.”라는 것은 교화받는 사람의 모든 정식이 전변되는 뜻을 질문한 것이다. 곧 위의 게송에서 “거듭하여 오감을 없앤다네.”라는 구절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일체정식”은 곧 팔식을 가리킨다.“암마라식”은 제9식을 가리킨다. 진제 삼장이 말한 구식九識에 대한 뜻은 바로 이 경문에 의거하여 제기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진제삼장의 『결정장론』의 설명과 같다.57)
나) 답변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제불여래는 항상 일본각一本覺으로 제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식에 들어가게 한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의 본각에 대하여 항상 일본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일깨워 저 중생으로 하여금 다 본각을 터득케 하고 모든 정식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결정본성58)으로서 본래 기동이 없기 때문이다.”
논 이는 둘째 답변이니,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곧장 펼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표방이고 둘째는 해석이다.
(가) 표방
“제불여래는 항상 일본각으로”라는 것은 교화하는 사람의 본원을 표방하였다.“제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식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
001_0630_c_01L慧滿足者。以無所知。無所不知故。於
001_0630_c_02L四威儀常住本利者。如前所序。從遠
001_0630_c_03L近來親如來座。因此示現本覺利故。
001_0630_c_04L不來去去者。寂而恒化故。言不來者。
001_0630_c_05L隨所導化。令得出世不退還故。言去
001_0630_c_06L去者。隨得不退展轉出離而善逝故。
001_0630_c_07L爾時。無住菩薩而白佛言。尊者。以何
001_0630_c_08L利轉。而轉衆生一切情識。入唵摩羅。
001_0630_c_09L此下第二廣演本利之義。於中有二。
001_0630_c_10L一者直廣。二者重演。初直廣中。先
001_0630_c_11L問後答。以何利轉者。是問能化轉利
001_0630_c_12L義。問前導諸之句。而轉衆生等者。
001_0630_c_13L是問所化轉諸識義。問前去去之句。
001_0630_c_14L一切情識。卽是八識。唵摩羅者。是
001_0630_c_15L第九識。眞諦三藏。九識之義。依是
001_0630_c_16L文起。如彼章說。
001_0630_c_17L佛言。諸佛如來。常以一覺。而轉諸識。
001_0630_c_18L入唵 [41] 摩羅。何以故。一切衆生本覺。常
001_0630_c_19L以一覺。覺諸衆生。令彼衆生。皆得本
001_0630_c_20L覺。覺諸情識。空寂無生。何以故。決定
001_0630_c_21L本性。本無有動。
001_0630_c_22L是答。正廣本利之義。於中有二。先
001_0630_c_23L標後釋。諸佛如來常以一覺者。是
001_0630_c_24L標能化之本。而轉諸識入唵摩羅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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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1_a_01L교화받는 사람의 전변을 표방하였다.
(나) 해석
해석에 두 가지가 있으니, 곧장 해석하는 것과 전변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 곧장 해석함
곧장 해석하는 것 가운데서 “왜냐하면 일체중생의 본각”이라고 한 것은 앞의 교화하는 사람의 본원이 일본각임을 해석한 것이다. 일체중생은 동일한 본각이기 때문에 일본각이라 한다.제불은 이것을 체득하여 이에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항상”이라 한다. 그래서 이 본각으로써 남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항상 일본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일깨운다.”고 한다.“저 중생으로 하여금 다 본각을 터득케 한다.”는 것은 교화받는 사람이 전변되어 암마라에 들어간다는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 ‘본각’은 암마라식을 가리킨다. ‘본각을 터득케 한다.’는 것은 암마라식에 들어간다는 뜻을 해석한 것으로, 본각에 들어갈 때 모든 팔식이 본래 적멸함을 깨친다는 것이다.구경을 깨치기 때문에 제식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정식은 공적하여 무생이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제식을 전변시켜”라는 구절을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이 경문은 본각과 시각을 모두 드러낸 것이니, “일체중생의 본각에 대하여 항상 일본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일깨워 저 중생으로 하여금 다 본각을 터득케 한다.”는 것은 본각의 뜻이고, “모든 정식은 공적하여 무생임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시각의 뜻이다. 이것은 시각이 곧 본각과 똑같음을 드러낸 것이다.
㉯ 전변하여 해석함
“왜냐하면 결정본성으로서 본래 기동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둘째 전변하여 해석하는 것이니, 앞의 시각에서 깨친 바59)가 적멸함을 해석한 것이다. 비록 팔식 모두가 수연으로 기동하여 전변되지만, 그 결정성을 찾고 나면 모두 무소득이기 때문에 “결정본성으로서 본래 기동이 없다.”고 한다. 본래 기동이 없으므로 본래 적멸하다.
나. 거듭하여 연설함
이하는 둘째로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거듭하여 연설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시각을 연설하고, 둘째는 본각을 연설한다.
가) 시각을 연설함
첫째 시각을 연설하는 것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식이 공적함을 연설하고, 둘째는 제식이 무생임을 연설한다. 첫째 제식이 공적하다는 것은 곧 소각所覺으로서의 시각이고, 둘째 제식이 무생이라는 것은 능각能覺으로서의 시각을 말한다.
(가) 제식諸識이 공적함을 연설함
첫째의 제식이 공적하다는 것에는 여섯 차례의 문답이 있다. -
001_0631_a_01L是標所化之轉。釋中有二。正釋。轉釋。
001_0631_a_02L正釋中言。一切衆生本覺者。釋前能
001_0631_a_03L化之本一覺。一切衆生同一本覺。故
001_0631_a_04L言一覺。諸佛體此。乃能普化。故言
001_0631_a_05L常以。以此本覺。令他覺故。故言常
001_0631_a_06L以一覺。覺諸衆生。令彼衆生。皆得
001_0631_a_07L本覺者。是釋所化轉入之句。本覺
001_0631_a_08L正是唵摩羅識。得本覺者。是釋入義。
001_0631_a_09L入本覺時。覺諸八識。本來寂滅。覺
001_0631_a_10L究竟故。諸識不生。故言諸識寂滅無
001_0631_a_11L生。是句正釋轉諸識句。此文具顯
001_0631_a_12L本始二覺。謂一切衆生本覺等者。是
001_0631_a_13L本覺義。覺諸情識寂滅無生者。是始
001_0631_a_14L覺義。是顯始覺。卽同本覺也。何以
001_0631_a_15L故下。第二轉釋。釋前始覺所覺寂
001_0631_a_16L滅。雖諸八識。隨緣動轉。而求定性。
001_0631_a_17L皆無所得。故言決定本性。本無有動。
001_0631_a_18L本無動故。本寂滅也。
001_0631_a_19L無住菩薩言。可一八切 [42] 識。皆緣境起。
001_0631_a_20L如何不動。
001_0631_a_21L此下第二重演。於中有二。先演始覺。
001_0631_a_22L後演本覺。初中亦二。一演諸識空寂。
001_0631_a_23L二演諸識無生。前是始覺之所覺。後
001_0631_a_24L是能覺之始覺。初中卽有六番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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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1_b_01L여섯 가지의 문답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제1과 제2의 문답은 공적함을 그대로 설명한다. 둘째, 제3의 문답은 제식은 본각과 동일한 모습이 아님을 설명한다. 셋째, 제4·제5·제6의 문답은 제식은 본각과 다른 모습이 아님을 설명한다.
㉮ 공적함을 그대로 설명함
a. 제1의 문답 : 기동起動이 없음을 설명함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일체(可一)의 팔식60)은 모두 경계를 반연하여 기동하는데, 어째서 암마라식은 기동하지 않습니까?”
논 이 대목은 제1의 문답으로 기동이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가일可一”이란 일체를 말하니, 일체중생이 소유하고 있는 팔식이다.“모두 경계를 반연하여 기동한다.”는 것은 사연四緣61) 가운데 소연연을 언급하여 기동하지 않는 점을 따진 것이다.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일체의 경계가 본래 공적하고, 일체의 식도 본래 공적하다. 공적하여 반연의 자성이 없는데 어찌 반연하여 기동하겠는가?”
논 이것은 경계의 반연이 없어져서 모든 식이 기동하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b. 제2의 문답 : 견見은 허망임을 설명함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일체의 경계가 공적한데 어떻게 본다는 것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본다는 것은 허망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만유는 무생無生이고 무상無相으로서 본래 자체의 명칭도 없이 다 공적하다. 일체의 법상도 또한 그와 같고, 일체중생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 몸조차 없는데 어찌 본다는 것인가.”
논 이하는 제2의 문답으로 견見은 곧 허망이고 허망하기 때문에 진정한 공적임을 설명한 것이다. 경계가 공적하기 때문에 경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곧 허망하다. 본다는 것 또한 공적하기 때문에 본다는 것이 있다고 계탁하는 것도 또한 허망하다. 이것을 해석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드러낸다.
a) 총체적으로 설명함
첫째,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오음과 십팔계 등의 존재는 본래 자체적으로 “나는 색 등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망심을 말미암아 색 등이라 말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의 모든 것은 다 공적하다.
b) 개별적으로 설명함
둘째,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에서 말한 “일체의 법상도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은 외부의 산·하·대지와 같은 육진의 법상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일체중생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은 내부의 색·수·상·행·식과 같은 오음의 몸을 가리킨다. 신체조차 없는데 어찌 본다는 작용이 있을 것인가.
㉯ 제3의 문답 : 제식이 본각과 같은 모습이 아님을 설명함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일체의 경계가 공적하고, 일체의 몸이 공적하며, 일체의 식이 공적하니, -
001_0631_b_01L於中有三。一者。前二問答。正明空
001_0631_b_02L寂。二者。第三問答。明不同相。三者。
001_0631_b_03L後三問答。明不異相。此初問答。明
001_0631_b_04L無起動。言可一者。一切之謂。謂一
001_0631_b_05L切衆生所有八識。皆緣境起者。四
001_0631_b_06L緣之中。且擧緣緣。以難不動。
001_0631_b_07L佛言。一切境本空。一切識本空。空無
001_0631_b_08L緣性。如何緣起。
001_0631_b_09L且遣境緣。顯識無起。
001_0631_b_10L無住菩薩言。一切境空。如何見一本如何
有見。一
001_0631_b_11L本如何
言見。 [43] 佛言。見卽爲妄。何以故。一切萬
001_0631_b_12L有。無生無相。本不自名。悉皆空寂。一
001_0631_b_13L切法相。亦復如是。一切衆生身。亦如
001_0631_b_14L是。身尙不有。云何有見。 [44]
001_0631_b_15L此下第二問答。明見是妄。妄故眞
001_0631_b_16L空。謂境空故。見有境卽是妄。見亦
001_0631_b_17L空故。計有見亦是妄。釋中有二。摠
001_0631_b_18L明別顯。摠明者。陰界等有。本不自
001_0631_b_19L名。我爲色等。但由妄心。名爲色等。
001_0631_b_20L是故一切悉皆空寂也。別顯中言。一
001_0631_b_21L切法相。亦如是者。謂外山河等六塵
001_0631_b_22L法相。一切衆生身。亦如是者。內色受
001_0631_b_23L等五陰之身。身體尙無。何有見用故。
001_0631_b_24L無住菩薩言。一切境空。一切身空。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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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1_c_01L본각도 또한 공적할 것입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일체의 본각은 훼손되지도 않고 괴멸되지도 않는 결정성으로서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며 공이라 말할 수도 없고 불공이라 말할 수도 없다.”
논 이하는 제3의 문답으로 (제식이) 본각과 같은 모습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각도 또한 공적할 것입니다.’라는 것은 반연으로 발생한 식이 이미 공적하듯이 반연으로 기동한 본각도 또한 공적하다는 것이다. 식이 이미 공적하기 때문에 공적한 식으로 보는 것도 허망하고, 본각 또한 공적하기 때문에 공적한 본각으로 깨친 것도 또한 허망하다는 것이다.”부처님께서 답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체의 본각’이란 말은 훼손되지도 않고 괴멸되지도 않기 때문에 공이 아니고, 자성이 남아 있지도 않기 때문에 또한 불공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본각에 대해서는 공이라 말할 수도 없고 불공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제식은 그렇지 않다. 허망하게 제법에 집착하여 진리에 위반되므로 공空이 되고 또한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본각과 제식이 같지 않은데 어찌 비슷하다고 하겠는가.”“결정성”이란 진여자성은 파괴되지 않는데 자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훼손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유상有相에 집착하여 공이 훼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괴멸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성無性에 계탁하여 진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훼손되지도 않고 괴멸되지도 않는 결정성이다.”라고 하였다.
㉰ 제식이 본각과 다른 모습이 아님을 설명함
이하의 세 가지 문답62)은 제식이 각과 다른 모습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이다.이 가운데 제4·제5의 두 가지 문답은 본각과 경계가 같은 모습임을 설명하고, 제6의 한 가지 문답은 본각과 제식이 같은 모습임을 드러낸다.
a. 제4, 5의 문답 : 본각과 경계가 같은 모습임을 설명함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그렇다면 모든 경계도 또한 그러하여 공상空相도 아니고 무공상無空相도 아니겠습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렇다. 저 모든 경계의 경우 그 자성은 본래 결정되어 있고, 그 결정은 자성의 근원으로서 처소가 없다.”무주보살이 여쭈었다.“그러면 본각도 또한 그와 같아서 처소가 없겠습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렇다. 본각은 처소가 없으므로 청정하고, 청정하므로 본각이 없으며, 만물은 처소가 없으므로 청정하고, 청정하므로 색이 없다.63)”
논 그 처음에 해당하는 제4의 문답은 경계가 본각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즉 모든 허망의 경계가 본래 없었다. -
001_0631_c_01L切識空。覺亦應空。佛言。可一覺者。不
001_0631_c_02L毁不壞決定性故。 [45] 非空非不空。無空不
001_0631_c_03L空。
001_0631_c_04L此下第三番。明覺不覺之不同相。問
001_0631_c_05L意言。覺亦應空者。從緣生識旣空。
001_0631_c_06L從緣起覺亦空。識旣空故。其見是妄。
001_0631_c_07L覺亦空故。其覺亦妄也。佛答意言。
001_0631_c_08L一切覺者。不壞道理。故非可空。不
001_0631_c_09L存自性。亦非不空。是故覺中。無空
001_0631_c_10L不空。諸識不爾。妄取諸法。違反眞
001_0631_c_11L理。可空可遣。如是不同。何得相類
001_0631_c_12L也。決定性者。謂眞如性。不可破壞。
001_0631_c_13L性自爾故。言不毁者。不取有相。以
001_0631_c_14L傷空故。言不壞者。不計無性。以損
001_0631_c_15L眞故。謂不毁壞於決定性也。
001_0631_c_16L無住菩薩言。諸境亦然。非空相。非無
001_0631_c_17L空相。佛言。如是。彼可境者。性本決定。
001_0631_c_18L決定性根。無有處所。無住菩薩言。覺
001_0631_c_19L亦如是。無有處所。佛言。如是。覺無處
001_0631_c_20L故淸淨。淸淨無覺。物無處所 [46] 故淸淨。
001_0631_c_21L淸淨無色。
001_0631_c_22L此下三番明不異相。於中前二番。明
001_0631_c_23L覺與境同相。後一問答。顯覺與識同
001_0631_c_24L相。初中前番。明境同覺。謂諸妄境。
-
001_0632_a_01L이미 그와 같은 허망의 경계가 없는데 어찌 공상空相이 있을 것이며, 이미 공조차 없는데 어찌 공을 없앨 수 있는가. 그러므로 “공상도 아니고 무공상도 아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써 곧 경계가 본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답변 가운데 “자성이 본래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근본은 존재가 아니기(不有) 때문에 공상空相이 아님을 설명하고, “처소가 없다.”는 것은 존재하는 공(有空)이 아니기 때문에 무공상無空相도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그 뒤에 해당하는 제5의 문답은 본각이 경계와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본각도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은 본각도 또한 반연으로 발생한 것으로 본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답변 가운데 “청정하므로 본각이 없다.”는 말은 공의 도리를 깨쳐 일체상을 떠나 있으므로 청정하다고 말한 것이다. 곧 본각의 자성이 이미 공하여 공 가운데는 본각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색이 공하면 색상이 없는 경우와 같다.앞의 제4의 문답에서 경계가 본각과 같다고 설명한 것은 “경계의 경우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다.”라는 뜻이 곧 제5의 “본각도 또한 공도 아니고 비공도 아니다.”라는 뜻과 같다는 것이다.지금 제5의 문답에서 본각이 경계와 같다고 설명한 것은 “각의 경우에 자성이 공하여 무상無相하다는 도리야말로 경계가 공하여 무상無相하다.”는 뜻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제4의 문답과 제5의 문답이 같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b. 제6의 문답 : 제식이 본각과 같은 모습임을 드러냄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심과 안식도 또한 그와 같이 불가사의하겠습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심과 안식도 또한 그와 같이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색色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명칭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안眼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견해가 없으므로 밖으로 떠나지 않으며, 심心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위가 없으므로 발기하는 처소가 없고, 식識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작동이 없으므로 반연함(緣)과 요별함(別)이 없다. 이처럼 자성은 모두 공적하다.
논 이는 셋째로 제식이 본각과 같음을 설명하는 것이다.64)“심과 안식”이란 안식의 종자가 적집된 ‘심’과 그 종자가 발기된 ‘안식’이다. 곧 간략하게 심과 안식의 두 가지를 들어 그 자성이 공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하 경문에서는 사연四緣으로 -
001_0632_a_01L本來不有。旣無其有。何有空相。旣
001_0632_a_02L非有空。何得無空。故言非空相。非
001_0632_a_03L無空相。以此而言則不異覺。答中
001_0632_a_04L言性本決定者。明本不有故非空相。
001_0632_a_05L無有處所者。明非有空故非無空也。
001_0632_a_06L後番問答。明覺同境。覺亦如是者。
001_0632_a_07L覺亦緣生。本性空故。答中言淸淨
001_0632_a_08L無覺者。覺空之理。離一切相。故曰
001_0632_a_09L淸淨。覺性旣空。空中無覺。如色空
001_0632_a_10L中。無色相故。前明境同覺者。以境
001_0632_a_11L非空非不空義。同於前覺非空非不
001_0632_a_12L空義。今明覺同境者。以覺性空無相
001_0632_a_13L之理。同於境空無相之義。二文不同。
001_0632_a_14L應如是知。
001_0632_a_15L無住菩薩言。心眼識亦復如是。不可
001_0632_a_16L思議。佛言。心眼識亦復如是。不可思
001_0632_a_17L議。何以故。色無處所。淸淨無名。不入
001_0632_a_18L於內。眼無處所。淸淨無見。不出於外。
001_0632_a_19L心無處所。淸淨無上止。 [47] 無有起處。識
001_0632_a_20L無處所。淸淨無動。無有緣別。性皆空
001_0632_a_21L寂。
001_0632_a_22L此第三番。明識同覺。心眼識者。謂
001_0632_a_23L眼識種子。積集之心。及此種子所起
001_0632_a_24L眼識。略擧此二。標其性空。下就四
-
001_0632_b_01L 안식이 공적한 것을 설명한다.“색은 처소가 없다.”는 것은 색의 자성이 애초에 공하기 때문이다.“청정하고 명칭이 없다.”는 것은 공 가운데는 색이 없기 때문이다.“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안근에 상응하여 경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연연의 공적을 설명한 것이다.“안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견해가 없다.”는 것은 안의 자성이 공하여 그 가운데 안근이 없기 때문이다.“밖으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색의 경계에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증상연의 공적을 설명한 것이다.“심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위가 없다.”는 것은 종자가 공하여 그 가운데 종자가 없기 때문이고, 또한 사연 가운데 으뜸이기 때문이다.“발기하는 처소가 없다.”는 것은 직접 식을 발기하는 처소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연의 공적을 설명한 것이다.“식은 처소가 없어 청정하다.”는 것은 이미 삼연三緣(근根·경境·식識)이 없어 안식이 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반연함과 요별함이 없다.”는 것은 반연하는 색도 없고 요별하는 제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등무간연의 공적과 안식의 공적을 설명한 것이다. ‘반연’은 이전에 소멸한 반연이고, ‘요별’은 이후에 발생하는 요별인데, 이 반연과 요별이 모두 공적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였다.이와 같이 사연四緣과 제식이 모두 공적하기 때문에 “이처럼 자성은 모두 공적하다.”는 말로 총결하였다.안식의 경우 사연이 모두 공적하다고 설명한 것처럼, 내지 의식의 경우에도 당연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법法65)에는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명칭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의意에는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견해가 없으므로 밖으로 떠나지 않으며, 심心에는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위가 없으므로 발기하는 모습이 없고, 식識에는 처소가 없어 청정하고 작동이 없으므로 반연함과 요별함이 없다. 이처럼 자성은 모두 공적하다.”여기서 의意는 제7식이고, 여기서 심心은 제8식이다. 이것은 팔식이 모두 공적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본각이 공적하다는 경우와 동일하다.
(나) 제식이 무생임을 설명함
경 자성에는 본각이 없지만 그 도리를 깨치면 본각이 된다. 선남자여, 본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
001_0632_b_01L緣。明眼識空。色無處所者。色性自
001_0632_b_02L空故。淸淨無名者。空中無色故。不
001_0632_b_03L入於內者。不與眼根作境界故。是明
001_0632_b_04L所緣緣空也。眼無處所淸淨無見者。
001_0632_b_05L眼性空中。無眼根故。不出於外者。
001_0632_b_06L無能行於色境界故。是明增上緣空
001_0632_b_07L也。心無處所淸淨無上者。種子空中。
001_0632_b_08L無種子故。四緣之內。爲上首故。無
001_0632_b_09L有起處者。無親起識之處所故。是明
001_0632_b_10L因緣空也。識無處所淸淨無動者。旣
001_0632_b_11L無三緣。眼識不起故。無有緣別者。
001_0632_b_12L以無緣色了別識故。是明等無間緣。
001_0632_b_13L及眼識空。緣者。前滅之緣。別者。後
001_0632_b_14L生了別。此二皆空。故言無有。如是
001_0632_b_15L四緣及識皆空故。摠結言性皆空寂。
001_0632_b_16L如說眼識四緣皆空。乃至意識應如
001_0632_b_17L是說。謂法無處所。淸淨無名。不入
001_0632_b_18L於內。意無處所。淸淨無見。不出於
001_0632_b_19L外。心無處所。淸淨無上。無有起處。
001_0632_b_20L識無處所。清淨無動。無有緣別。性
001_0632_b_21L皆空寂。此中意者。是第七識。此中
001_0632_b_22L心者。是第八識。是明八識皆悉空
001_0632_b_23L寂。所以同於一切覺空也。
001_0632_b_24L性無有覺。覺則爲覺。善男子。覺知無
-
001_0632_c_01L제식이 그대로 공적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금강지혜의 경지에서 해탈도로 끊고, 해탈도로 끊은 이후에는 무주의 경지에 들어가 출·입이 없고 마음의 처소가 없으니, 그것은 결정자성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 경지는 청정하여 마치 유리처럼 맑고, 자성은 항상 평등하여 마치 저 대지와 같으며, 본각으로 미묘하게 관찰함은 마치 지혜의 햇살과 같고, 이타행을 성취하여 본각을 터득함은 마치 대법우大法雨와 같다.66) 이 사지四智의 경지에 드는 것이야말로 곧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제식의 불생이다.”
논 이는 둘째로 제식이 불생임을 설명하는 것이니,67) “본래 무명을 따라 제식이 생기하였는데 지금은 시각을 따라 다시 심원으로 돌아간다. 심원으로 돌아갈 때 제식이 일어나지 않고 제식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각이 원만해진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간략하게 드러내는 것과 자세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 간략하게 드러냄(略標)
간략하게 드러내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a. 시각이 원만함
처음에 말한 “자성에는 본각이 없지만 그 도리를 깨치면 본각이 된다.”는 것은 시각이 원만함을 나타낸 경문이고, “본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제식이 그대로 공적에 들어간다.”는 것은 제식이 불생임을 나타내는 경문이다.“자성에는 본각이 없다.”는 것은 공한 자성에는 제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시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각이 없다는 이치를 깨치고 알면 시각의 지혜가 된다. 그러므로 “그 도리를 깨치면 본각이 된다.”고 하였다.
b. 제식은 불생임
“본각이 없음을 깨치고 안다.”는 말은 앞의 시각을 이어받은 것이다. 시각이 원만한 경우에는 팔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본각이 없다는 이치를 깨침에 따라 제식도 없어지고, 구경을 깨침에 따라 심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식이 그대로 공적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 자세하게 해석함(廣釋)
“왜냐하면” 이하는 자세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이 원만함(因滿)을 설명하고, 둘째는 과가 원만함(果圓)을 설명한다.
a. 인이 원만함을 설명함
“금강지혜의 경지”는 등각위로서 시각의 인이 원만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을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68) 지금은 본각의 인因의 측면에서 금강지혜라고 하였다.“해탈도로 끊는다.”는 것은 불생의 인이 원만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끊음’에 두 가지 뜻이 있다.하나는 만약 생득生得의 무명주지無明住地69)에 상대시키면 곧 금강심은 무간도無間道70)가 되고, -
001_0632_c_01L覺。諸識則入。何以故。金剛智地。解脫
001_0632_c_02L道斷。斷已入無住地。無有出入。心處
001_0632_c_03L無在。決定性地。其地淸淨。如淨琉璃。
001_0632_c_04L性常平等。如彼大地。覺妙觀察。如慧
001_0632_c_05L日光。利成得本。如大法雨。入是智者。
001_0632_c_06L是入佛智地。入智地者。諸識不生。
001_0632_c_07L是第二明諸識不生。欲明本隨無明。
001_0632_c_08L諸識生起。今隨始覺。還歸心源。歸
001_0632_c_09L心源時。諸識不起。識不起故。始覺
001_0632_c_10L圓滿。於中有二。略標廣釋。標中亦
001_0632_c_11L二。初言性無有覺。覺卽爲覺者。是標
001_0632_c_12L始覺圓滿章。覺知無覺。諸識則入者。
001_0632_c_13L是標諸識不生章。言性無有覺者。謂
001_0632_c_14L空性中。非但無識。亦無始覺。覺知
001_0632_c_15L無覺之理。則爲始覺之智。故言覺則
001_0632_c_16L爲覺。言覺知無覺者。牒前始覺。始
001_0632_c_17L覺圓時。八識不起。隨覺無覺。無諸
001_0632_c_18L識故。隨覺究竟。歸心源故。故言諸
001_0632_c_19L識則入。何以故下。釋中有二。先明
001_0632_c_20L因滿。後顯果圓。金剛智地者。謂等
001_0632_c_21L覺位。始覺因滿。金剛喩定。義如前
001_0632_c_22L說。今約覺因。名金剛智。解脫道斷
001_0632_c_23L者。不生因滿。然此中斷有其二義。
001_0632_c_24L若對生得無明住地。卽金剛心。爲無
-
001_0633_a_01L묘각의 초심이 해탈도解脫道가 된다. 무간도는 무명과 함께하지만, 해탈도가 일어날 때 그것을 곧장 끊는다.둘은 만약 제식의 희론종자에 상대시킨다면 곧 그 이전의 마음은 무간도로서 저 종자와 더불어 같이 생기하고 같이 소멸하지만, 최후의 일념인 금강유정은 해탈도로서 그대로 종자를 끊는다.지금은 그 종자를 끊는다는 뜻에 의거하기 때문에 “금강지의 경지에서 해탈도로 끊는다.”라고 하였다. 이때 이숙식異熟識이 나타나 있는 것은 전 찰나의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이니, (이숙異熟이란) 생기하는 인因과 과果가 동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이숙이 다시는 생기하지 않는데, 그때는 이미 일체의 종자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해탈도로 끊는다.”고 말한 것이 바로 제식이 불생하는 인因임을 알아야 한다.
b. 과가 원만함을 드러냄
다음으로 그 과를 드러낸다.71)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각이 원만함을 설명하고, 둘째는 제식의 불생을 드러낸다.
a) 각이 원만함을 설명함
그 첫째 가운데서 “해탈도로 끊은 이후에는 무주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은 금강지혜의 해탈도에서 종자를 끊고 묘각의 무주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제二諦를 벗어나 홀로 존재하여 둘이 없으므로 ‘무주’라 말한다.무주심은 이제를 모두 초월했기 때문에 세제世諦를 벗어나고 진제眞諦에 들어가는 것에 차이가 없다. 이미 벗어나고 들어가는 것도 없고 공과 유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처소가 없다.”고 하였다.이처럼 처소가 없는 도리는 오직 일심이니, 일심의 자체는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정자성의 경지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일심이 현현할 때 팔식이 모두 전의轉依하기 때문에 이 경우 사지四智가 원만해진다. 왜냐하면 곧 이 일심은 어둠을 떠나 있고 광명이 성취되어 있는 것으로 명백하고 청정하여 비추지 못하는 영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그 경지는 청정하여 마치 유리처럼 맑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이와 같은 일심은 양변을 떠나 있고 자타에 통달해 있어 평등무이平等無二하다. 그래서 “자성은 항상 평등하여 마치 저 대지와 같다.”고 하였으니, -
001_0633_a_01L間道。妙覺初心。爲解脫道。無間道
001_0633_a_02L時。與無明俱。解脫道起。方能正斷。
001_0633_a_03L若對諸識戱論種子。則其前心爲無
001_0633_a_04L間道。與彼種子俱起俱滅。最後一念。
001_0633_a_05L金剛喩定。是解脫道。正斷種子。今
001_0633_a_06L約斷其種子義門。故言金剛解脫道
001_0633_a_07L斷。此時現有異熟識者。由其前念種
001_0633_a_08L子所生。生起因果不同時故。此後異
001_0633_a_09L熟不更生者。此時已斷一切種故。故
001_0633_a_10L知此言解脫道斷。正是諸識不生之
001_0633_a_11L因。次顯其果。於中有二。先明覺圓滿。
001_0633_a_12L後顯識不生。初中言斷已入無住地
001_0633_a_13L者。金剛解脫斷種子已。卽入妙覺
001_0633_a_14L無住之地。二諦之外。獨在無二。故
001_0633_a_15L言無住。無住之心。雙泯二諦。故無
001_0633_a_16L出俗入眞之異。旣無出入。不在空有。
001_0633_a_17L故言心處無在。無在之處。唯是一心。
001_0633_a_18L一心之體。本來寂靜。故言決定性地。
001_0633_a_19L一心顯時。八識皆轉。故於是時。四
001_0633_a_20L智圓滿。所以然者。卽此一心離闇
001_0633_a_21L成明。明白清淨。無影不照。故言其
001_0633_a_22L地清淨。如淨瑠璃。是顯大圓鏡智之
001_0633_a_23L義。卽此一心。遠離二邊。通達自他。
001_0633_a_24L平等無二。故言性常平等。如彼大地。
-
001_0633_b_01L이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이와 같은 일심은 관찰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제법의 문을 관찰하지 못함이 없다. 그래서 “본각으로 미묘하게 관찰함은 마치 지혜의 햇살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묘관찰지妙觀察智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이와 같은 일심은 작위가 아니기 때문에 이타의 행위를 하지 못함이 없다. 그래서 “이타행을 성취하여 본각을 터득함은 마치 대법우와 같다.”고 하였다. 비가 만물을 적셔 과실을 성숙시키는 것처럼 이 묘관찰지도 또한 그와 똑같이 이타행으로 본각을 터득토록 한다. 이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이처럼 사지四智가 이미 원만한 것이 곧 시각始覺의 원만이다.
b) 제식의 불생을 드러냄
“이 사지의 경지에 드는 것” 이하는 제식諸識의 불생不生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지를 터득하는 것이 바로 묘각의 지위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는 이미 일심의 본원에 돌아가 있으므로 팔식의 모든 풍랑이 다시는 기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지혜에 드는 것이야말로 제식의 불생이다.”라고 하였다.이상 둘로 나누어72) 시각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나) 본각의 뜻을 연설함
이하는 둘째로 본각의 뜻을 연설하는 것이다.73)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장 설명하고, 둘째는 집착을 없애 준다.
(가) 곧장 설명함(正明)
첫째 곧장 설명하는 것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각에 둘이 없는 도리를 설명하고, 둘째는 장애를 없애고 깨침에 드는 문을 보여 준다.
㉮ 본각에 둘이 없는 도리를 설명함
첫째의 본각에 둘이 없는 도리를 설명함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하는 것이고,74) 둘째는 답변하는 것이다.
a. 질문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여래께서 설하신 일본각一本覺의 성지력聖智力 및 네 가지 큰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일체중생에게 본각의 근원이고 시각의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은 바로 자신의 몸속에 본래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75)
논 질문에서 말한 “일본각의 성지력聖智力 및 네 가지 큰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앞에서 설한 사지四智의 뜻을 순차적으로 나열한 것이다. 시각이 원만해지면 곧 본각과 똑같아져 본각과 시각이 둘이 아니므로 ‘일본각’이라 한다. 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성지력聖智力’이라 하고, 일각 안에 사홍서원의 큰 지혜를 갖추고 모든 공덕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지智地’라 하며, -
001_0633_b_01L是顯平等性智之義。如是一心無所
001_0633_b_02L觀故。於諸法門。無不觀察。故言覺
001_0633_b_03L妙觀察。如慧日光。是明妙觀察智之
001_0633_b_04L義。如是一心。無所作故。於利他事。
001_0633_b_05L無所不作。故言利成得本。如大法雨。
001_0633_b_06L雨潤萬物。令成菓實。此智亦爾。利
001_0633_b_07L他事成。令得本覺。是明成所作智之
001_0633_b_08L義。四智旣圓。是始覺滿也。入是智
001_0633_b_09L者已下。次顯諸識不生。得是四智。
001_0633_b_10L正是妙覺之位。故言是入佛智地。是
001_0633_b_11L時旣歸一心之源。八識諸浪。不更起
001_0633_b_12L動故 [48] 入智地者。諸識不生也。上來
001_0633_b_13L二分。演始覺竟。
001_0633_b_14L無住菩薩言。如來所說一覺。聖力四弘
001_0633_b_15L智地。卽一切生。 [49] 本根覺利。何以故。一
001_0633_b_16L切衆生。卽此身中。本來滿足。
001_0633_b_17L此下第二演本覺義。於中有二。一者
001_0633_b_18L正明。二者遣著。初中亦二。先明本
001_0633_b_19L覺無二之理。後示除障入證之門。初
001_0633_b_20L中亦二。先問後答。問中言一覺聖
001_0633_b_21L力四弘智地者。領次前說四智之義。
001_0633_b_22L始覺圓滿。卽同本覺。本始無二。故
001_0633_b_23L名一覺。無所不爲。故言聖力。一覺
001_0633_b_24L之內。1)俱 [15] 四大智。持諸功德。故言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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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3_c_01L이와 같이 사지는 일심의 역량과 동일하여 모두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큰 지혜(弘智)’라 한다.이와 같이 일각은 곧 법신이고, 법신은 곧 중생의 본각이다. 그러므로 “곧 일체중생의 본각의 근원이고 시각의 이익입니다.”라고 하였다. 본래 구비되어 있는 무량한 자성의 공덕이 중생심을 훈습하여 진여와 생멸의 두 가지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본각의 이익입니다.”라고 하였다.이처럼 일본각一本覺의 둘이 없는 뜻을 말미암아 어떤 중생도 법신을 벗어나 있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바로 자신의 몸속에 본래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b. 답변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렇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은 본래 무루로서 모든 선법과 이익의 근본이지만, 지금은 욕망의 가시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 이것은 답변으로 질문을 인정하는 것이니, 본각 속의 무량한 자성공덕은 삼루三漏76)에 물들거나 요동치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무루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근본이 되어 모든 선법과 이익을 발생하므로 “모든 선법과 이익의 근본이다.”라고 한다. 비록 본각을 지니고 있지만 객진번뇌인 욕망의 가시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현재는 자신이 본각을 터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장애를 없애고 깨침에 드는 문을 보여 줌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만약 어떤 중생이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지 못하여 지금도 채집採集77)하고 있다면, 그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채집하는 것도 그리고 독행78)하는 것도 분별로써 오염이 된다.79)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을 돌이켜서 공적한 이치(空窟)80)에 거주하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다스리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여 초연히 노지露地에 앉으며, 식음識陰(心識과 覺知)은 반열반이 된다.”
논 이하는 둘째로 그 장애를 없애고 깨침에 드는 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질문하고, 둘째는 답변한다.
a. 질문
질문에서 “채집한다.”라고 한 것은 삼유三有(三界)의 탐욕으로 생사의 과를 취하므로 ‘채採’라 하고, 이 모든 번뇌가 마음에 상응하기 때문에 ‘집集’이라 한다.무시이래로 끊임없이 현행하기 때문에 -
001_0633_c_01L地。如是四智。同一心量。皆無不周。
001_0633_c_02L故名弘智。如是一覺。卽是法身。法
001_0633_c_03L身。卽是衆生本覺。故言卽一切2)衆
001_0633_c_04L生。本根覺利。本來具有無量性德。
001_0633_c_05L熏衆生心。作二種業。故名本利。由
001_0633_c_06L是本覺無二義故。無一衆生。出法身
001_0633_c_07L外。故言卽此身中。本來滿足。
001_0633_c_08L佛言。如是。何以故。一切衆生。本來無
001_0633_c_09L漏。諸善利本。今有欲3)刺。 [16] 爲未降伏。
001_0633_c_10L是答述許所問。明本覺中無量性德。
001_0633_c_11L不爲三漏之所染動。故言本來無漏。
001_0633_c_12L以此爲本。生諸善利。故言諸善利本。
001_0633_c_13L雖有本覺。而由客塵欲㓨所覆故。今
001_0633_c_14L未得自本覺耳。
001_0633_c_15L無住菩薩言。若有衆生。未得本利。猶
001_0633_c_16L有採集。云何降伏難伏。佛言。若集若
001_0633_c_17L獨行。分別及與 [50] 染。廻 [51] 神住空窟。降伏
001_0633_c_18L難調伏。 [52] 解脫魔所縛。超然露地坐。識
001_0633_c_19L陰般涅槃。
001_0633_c_20L此下第二示其除障入證之門。於中
001_0633_c_21L有二。先問後答。問中言採集者。明
001_0633_c_22L三有欲取生死果。故言採。此諸煩
001_0633_c_23L惱與心相應。故言集。從無始來。現
001_0633_c_24L「俱」作「具」{甲}。「衆」無{甲}。「刺」作「㓨」{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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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4_a_01L“그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채집을 대치하는 방법이 생겼지만 그 힘이 미열하기 때문에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의심하는 것이다.
b. 답변
답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스려지는 것을 드러내고, 둘째는 다스리는 것을 설명하며, 셋째는 다스림으로 터득되는 뛰어난 이익을 드러낸다.
a) 다스려지는 것을 드러냄
“채집하는 것도 그리고 독행하는 것도”라는 것은 중생의 심행은 추행과 세행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어떤 때는 번뇌와 상응하므로 집集(번뇌의 쌓임)이고, 어떤 때는 번뇌를 떠나 있는 심행이므로 독獨(번뇌의 초월)이다. 번뇌를 떠나 있는 경우에도 아직 법집의 분별은 남아 있고, 번뇌와 함께할 경우에는 곧 번뇌에 오염되기 때문에 “분별로써 오염이 된다.”고 하였다.
b) 다스리는 것을 설명함
다음으로 다스리는 것을 설명한다. 즉 불경에 의하여 그 중생심(心)과 중생신(神)을 돌이켜 인상과 법상을 없애고 인공과 법공의 도리에 거주하기 때문에 “마음을 돌이켜서 공적한 이치에 거주한다.”고 하였다.이 중생심이 바야흐로 기동하여 도리에 순응하면 뛰어난 다스림이 되지만 저 번뇌가 무시로부터 도리에 역행하면 대적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이것은 지전地前에서 다스리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설명한 것이다.이 복도伏道81)를 말미암아 단도斷道82)의 지위에 들어가 점차 종자를 없애 가면서 마침내 완전히 없앤다. 종자가 완전히 사라질 경우 사마四魔83) 를 완전히 떠나기 때문에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한다.”고 한다.
c) 다스림으로 터득되는 뛰어난 이익을 설명함
다음으로 다스림으로써 터득되는 뛰어난 이익을 설명한다. 뛰어난 이익에는 보리과菩提果와 과과果果의 두 가지가 있다. 보리과는 유루인 오음의 취락을 초출하여 도량에 앉아 위없는 깨달음을 터득하기 때문에 “초연히 노지에 앉는다.”고 한다. 과과라는 말은 위없는 깨달음으로써 대열반을 증득하는 것인데, 각覺이 없음을 느끼고 알면84) 제식諸識이 모두 대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식음은 반열반이 된다.”고 한다.
(나) 집착을 없애 줌(遣著)
이하는 둘째로 집착을 없애는 것이다.85)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주로써 유주의 집착(著)을 없앰을 설명하고, -
001_0634_a_01L行不絕。故言難伏。治道方生。其力
001_0634_a_02L微劣。云何能伏。如是疑也。答中有
001_0634_a_03L三。先出所伏。次明能伏。後顯降伏所
001_0634_a_04L得勝利。若集若獨行者。衆生心行。麁
001_0634_a_05L細不定。或時煩惱相應故集。或時離
001_0634_a_06L惑心行故獨。離煩惱時。猶有法執分
001_0634_a_07L別。煩惱俱時。卽爲煩惱所染。故言
001_0634_a_08L分別及與染也。次明能伏。謂依佛經。
001_0634_a_09L廻其心神。遣人法相。住二空理。故
001_0634_a_10L言廻神住空窟。此心方起而順道理。
001_0634_a_11L故有勝能。彼惑無始而逆道理。故不
001_0634_a_12L能敵。故言降伏難調伏。是明地前伏
001_0634_a_13L除二障。由是伏道。入斷道位。漸拔
001_0634_a_14L種子。乃至永盡。永盡之時。遠離四
001_0634_a_15L魔。故言解脫魔所縛。次明降伏所得
001_0634_a_16L勝利。勝利有二。謂菩提果。及與果
001_0634_a_17L果。菩提果者。超出有漏五陰聚落。
001_0634_a_18L坐於道場。得無上覺。故言超然露地
001_0634_a_19L坐。言果果者。以無上覺證大涅槃。
001_0634_a_20L覺知無覺。諸識皆入。故言識陰般涅
001_0634_a_21L槃也。
001_0634_a_22L無住菩薩言。心得涅槃。獨一無伴。常
001_0634_a_23L住涅槃。應當解脫。
001_0634_a_24L此下第二遣著。於中有二。先明無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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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4_b_01L둘째는 무득으로써 유득의 집착(執)을 단제함을 보여 준다.
㉮ 무주로써 유주의 집착(著)을 없앰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a. 질문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마음으로 열반을 터득하고 나면 오직 일본각뿐으로서86) 번뇌가 수반되지 않고 열반에 상주하므로 그것은 마땅히 해탈일 것입니다.”
논 질문 가운데 “오직 일본각(獨一)”이란 팔식이 전의轉依될 때 일본각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번뇌가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집과 법집이 곧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무주보살은) “번뇌가 수반되지 않는 일본각은 열반에 상주하니, 상주하는 지혜로 일체의 속박을 해탈한다.”는 데 집착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질문한 것이다.
b. 답변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열반에 상주한다는 것은 곧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반은 본래 본각의 이익이고 본각의 이익은 본래 열반이므로, 열반의 각분이 곧 본각의 각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각의 자성은 (열반의 자성과) 다르지 않고, 열반의 (바탕은 본각의 바탕과) 다름이 없으며, 본각은 본래 무생인데 열반도 무생이고, 본각은 본래 무멸인데 열반도 무멸이어서, 열반과 본각은 본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무소득이 열반이고 열반이 무소득인데, 어찌 유주이겠는가.선남자여, 깨달으면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래 발생함이 없음을 깨달아 중생의 번뇌를 떠나고, 본래 적정이 없음을 깨달아 열반의 기동을 떠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경지에 머물면 마음에 집착이 없고 출입이 없어 암마라식에 들어간다.”
논 이는 답변으로, 유주의 집착을 곧장 없애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집착을 타파하고, 둘째는 자세하게 도리를 드러낸다.
a) 간략하게 집착을 타파함
첫째에서 “열반에 상주한다는 것은 곧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라는 것은 설령 영원한 깨침이라 할지라도 열반에 집착한다면 곧 그것은 집착으로서 열반에 속박되는데, 어떻게 상주하는 것을 해탈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b) 자세하게 도리를 드러냄
“왜냐하면”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뜻을 해석하면, “본각의 도리는 무주이기 때문에 유주라면 도리에 어긋난다. 도리에 어긋나는 마음은 속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것이다.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설명하고, 둘째는 시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드러낸다.
(a) 본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설명함
첫째 본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름이 없다.(無異)”라는 뜻으로 무득과 무주를 설명한다. 이 다름이 없다는 뜻에 네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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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4_b_01L以遣有住之著。後示無得以除有得
001_0634_b_02L之執。初中有二。先問後答。問中言
001_0634_b_03L獨一者。八識轉時。成一覺故。言無
001_0634_b_04L伴者。人法二執。斯遠離故。無伴之
001_0634_b_05L覺。常住於涅槃。常住之智。解脫一
001_0634_b_06L切縛。有作是執。故作是問也。
001_0634_b_07L佛言。常住涅槃。是涅槃縛。何以故。涅
001_0634_b_08L槃本覺利。覺利本涅槃。 [53] 涅槃覺分。卽
001_0634_b_09L本覺分。覺性不異。涅槃無異。覺本無
001_0634_b_10L生。涅槃無生。覺本無滅。涅槃無滅。涅
001_0634_b_11L槃覺本無異故。 [54] 無得涅槃。涅槃無得。
001_0634_b_12L云何有住。善男子。覺者不住涅槃。何
001_0634_b_13L以故。覺本無生。離衆生垢。覺本無寂。
001_0634_b_14L離涅槃動。住如是地。心無所住。無有
001_0634_b_15L出入。入唵摩羅識。
001_0634_b_16L是答正遣有住之執。於中有二。初
001_0634_b_17L略破執。後廣顯理。初中言常住涅
001_0634_b_18L槃是涅槃縛者。設有常覺住於涅槃。
001_0634_b_19L卽是執著。縛於涅槃。云何常住是解
001_0634_b_20L脫耶。何以故下。廣顯道理。理無住故。
001_0634_b_21L有住違理。違理之心。非縛是何。釋
001_0634_b_22L意如是。於中有二。先約本覺。以明
001_0634_b_23L無住。後約始覺。以顯無住。初中約
001_0634_b_24L無異義。以明無得無住。此無異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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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4_c_01Lⓐ 본각의 도리에 다름이 없음(本理無異)
첫째는 본각의 도리에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경문의 “열반은 본래 본각의 이익이고 본각의 이익은 본래 열반이므로”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열반이 곧 본각의 이익으로서 그 본각의 이익은 본래 열반이고, 그 시각은 본각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무득無得이라는 것이다.
ⓑ 각분에 다름이 없음(覺分無異)
둘째는 각분에 다름이 없다(覺分無異)는 것이다. 경문의 “열반의 각분이 곧 본각의 각분이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열반의 중덕衆德87)이 곧 본각의 덕임을 설명한 것이다.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무득이라는 것은 위의 첫째의 설명과 마찬가지이다.
ⓒ 일미로서 다름이 없음(一味無異)
셋째는 일미로서 다름이 없다(一味無異)는 것이다. 경문의 “본각의 자성은 (열반의 자성과) 다르지 않고, 열반의 (바탕은 본각의 바탕과) 다름이 없으며”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본각의 자성은 일미로서 차별상이 없는데, 그것이 곧 열반에 차별이 없는 것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
ⓓ 둘이 아니므로 다름이 없음(無二無異)
넷째는 둘이 아니므로 다름이 없다(無二無異)는 것이다. 경문의 “본각은 본래 무생인데 열반도 무생이고, 본각은 본래 무멸인데 열반도 무멸이어서, 열반과 본각은 본래 다름이 없다.”는 부분이다. 이것은 본각에는 본래 발생과 소멸이 없는데 그것이 곧 열반에 발생과 소멸이 없는 것과 같음을 설명한 것이다.이 네 가지의 다름이 없는 도리를 말미암아서 본래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무소득이 열반이고”는 곧 열반과 본각에 능득能得이 없음을 설명한 것이고, 다음으로 말한 “열반이 무소득인데”는 열반은 소득所得이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이미 능득과 소득이 없거늘 어찌 능주能住와 소주所住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어찌 유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곧 이것은 상주한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b) 시각에 의거하여 무주를 설명함
다음은 둘째 시각에 의하여 무주를 설명하는 것이다. 첫째는 무주를 나타나고, 둘째는 무주를 해석한다.“깨달으면(覺者)”이란 시각始覺을 말한다.해석하는 말 가운데 “본래 발생함이 없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생과 사가 본래 발생함이 없는 줄을 깨쳐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에 집착하는 허물을 떠난다.“본래 적정이 없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열반도 본래 적정이 아닌 줄을 깨쳐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에 들어간다는 기동을 떠난다.“마음에 집착이 없다.”는 것은 생사 및 열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출입이 없다.”는 것은 속제의 유(俗有)와 진제의 공(眞空)을 분별하여 보지 않는 것이다.“암마라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
001_0634_c_01L有其四種。一者本理無異。如經涅槃
001_0634_c_02L本覺利。利本涅槃 [55] 故。是明涅槃。是
001_0634_c_03L本覺利。此本覺利是本涅槃。其始
001_0634_c_04L覺者卽同本覺。所以無異故無得也。
001_0634_c_05L二者。覺分無異。如經涅槃覺分卽本
001_0634_c_06L覺分。是明涅槃衆德。卽是本覺之德。
001_0634_c_07L無異無得。如前說也。三者。一味無
001_0634_c_08L異。如經覺性不異。涅槃無異。是明
001_0634_c_09L覺性一味無差別相。卽是涅槃之無
001_0634_c_10L差別。四者。無二無異。如經覺本無
001_0634_c_11L生。涅槃無生。覺本無滅。涅槃無滅。
001_0634_c_12L是明本覺。本無生滅。卽是涅槃之無
001_0634_c_13L生滅。由是四種無異。道理本無異故
001_0634_c_14L無得涅槃。是明無能得涅槃覺。次言
001_0634_c_15L涅槃無得者。是明涅槃無所得義。旣
001_0634_c_16L無能得所得。何有能住所住。以之故
001_0634_c_17L言。云何有住。卽顯常住。不應道理。
001_0634_c_18L次約始覺以明無住。先標後釋。言
001_0634_c_19L覺者者。謂始覺者。釋中言覺本無生
001_0634_c_20L者。覺知生死本來無生。所以離着生
001_0634_c_21L死之垢也。言覺本無寂者。覺知涅槃
001_0634_c_22L本無寂靜。所以離入涅槃之動。心無
001_0634_c_23L所住者。不住生死及涅槃故。無有出
001_0634_c_24L入者。不見俗有及眞空故。入唵摩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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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5_a_01L일심의 자체는 양변을 떠나 있는데 그 심원에 돌아가기 때문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주가 되어야만 바야흐로 해탈을 터득한다. 그러므로 열반에 상주하면 열반의 속박을 떠나지 못한다.
c. 무득으로써 유득의 집착을 단제함을 보여 줌
이하는 둘째로 무득으로써 유득의 집착을 단제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득을 곧장 설명하고, 둘째는 의정을 거듭 없애며, 셋째는 이해시키고, 넷째는 마무리를 짓는다.
a) 무득을 곧장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a) 질문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만약 암마라식이라면 그것은 들어간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들어간 경지가 있다는 것은 유소득이라는 것이므로 법을 터득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논 위에서 “암마라에 들어간다.”는 말에 의거하여 들어간다는 말의 뜻을 곧이곧대로 취한 것이다. 즉 무구식無垢識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처럼 들어간 경우에는 증득했다는 것이므로 유소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심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하였다.
(b) 답변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다. 미혹한 아들이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있는 줄을 모른다. 시방으로 떠돌다가 오십 년이 흐른다. 그 동안 빈·궁·곤·고하여 오로지 일거리만 찾아다니는 것으로 육신을 건사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하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그와 같은 사정을 보고 아들에게 말한다. ‘너는 돈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느냐. 네 마음대로 쓰면 모두 충족할 것이다.’ 이에 그 아들은 정신 차리고 돈의 덕택으로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돈을 벌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말한다. ‘불쌍한 아들아! 기뻐할 것 없다. 네가 번 돈은 본래 네 것이었다. 네가 번 것이 아닌데, 어찌 기뻐한단 말이냐.’
논 이것은 답변이니, 무득의 뜻을 곧장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으니, 법法과 비유(喩)와 합合이다.
ⓐ 법
처음에 말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유소득이 아님을 총론한 것이다.
ⓑ 비유
“왜냐하면” 이하는 비유로써 무소득을 드러낸다. 여기에 네 가지의 비유가 있다. 첫째는 미혹한 아들이 금전을 갖고 있는 줄 모르고 빈고貧苦하게 떠돈다는 비유이고, -
001_0635_a_01L者。一心之體。離二邊故。歸此心源。
001_0635_a_02L故名爲入。如是無住。方得解脫。故
001_0635_a_03L住涅槃不離縛也。
001_0635_a_04L無住菩薩言。唵摩羅識。是有入處。處
001_0635_a_05L有所得。是得法也。
001_0635_a_06L此下第二遣有得執。於中有四。一
001_0635_a_07L者正明無得。二者重遣疑情。三者領
001_0635_a_08L解。四者述成。初中有二。先問後答。
001_0635_a_09L依前入言。如言取義。謂無垢識。有
001_0635_a_10L所入處。入時證得。故有所得。有作
001_0635_a_11L是疑。故作是問。
001_0635_a_12L佛言。不也 何以故。譬如迷子。手執金
001_0635_a_13L錢而不知有。遊行十方。經五十年。貧
001_0635_a_14L窮困苦。專事求索。而以養身。而不充
001_0635_a_15L足。其父見子。有如是事。而謂子言。汝
001_0635_a_16L執金錢。何不取用。隨意所須。皆得充
001_0635_a_17L足。其子醒已。而得金錢。心大歡喜。而
001_0635_a_18L謂得錢。其父謂言。迷子汝勿欣懌。所
001_0635_a_19L得金錢。是汝本物。汝非有得。云何可
001_0635_a_20L喜。
001_0635_a_21L是答正明無得之義。於中有三。謂
001_0635_a_22L法。喩。合。初言不者。摠非有得。何
001_0635_a_23L以故下。喩顯無得。於中有四種喩。
001_0635_a_24L一者。迷子不知有金錢。遊行貧苦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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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5_b_01L둘째는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금전이 있음을 알려 주고 충족케 한다는 비유이며, 셋째는 금전을 얻고 기뻐하는 비유이고, 넷째는 번 것이 아님을 알려 주는 비유이다.
ㄱ. 첫째 비유
첫째 비유에서 “미혹한 아들”이란 모든 중생이 자기의 본래마음에 미혹한 것을 말한 것이다. 여래께서 대비로 마치 외아들을 보듯이 간주하기 때문에 미혹한 아들에 비유한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궁자를 성문聲聞에 국한시켜 비유한다.88) 여기에서 미혹한 아들은 전체의 군생에 비유된다.“돈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모든 망식의 다섯 가지 번뇌로 집착하고 분별하여 자기의 청정한 마음을 덮어 모르게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시방으로 떠돌다가”라는 것은 널리 오상五相89)과 오사五事90)를 계탁하는 것이다.“오십 년이 흐른다.”는 것은 오음五陰을 받아 오십 가지 악을 발생하는 것이다. “빈貧”은 세간의 좋은 것을 적게 가진다는 것이고, “궁窮”은 출세간의 재량이 전혀 없는 것이며, “곤困”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극고를 받는 것이고, “고苦”는 인간 및 천상에 태어나 가벼운 고통을 받는 것이다.“오로지 일거리만 찾아다닌다.”는 것은 세간의 낙을 추구하여 복업을 쌓는 것이다.“육신을 건사한다.”는 것은 인간 및 천상의 낙을 받아 수용하는 것이다.“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세간의 낙을 받을수록 갈애가 더욱 증장되어 번성하지만 결국 쇠퇴하여 진정한 이익이 안 되는 것이다.
ㄴ. 둘째 비유
둘째 비유에서 “그 아버지가 아들을 본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본래마음으로 돌아가 동체대비로 모든 중생의 자부慈父가 된 것이다.“그와 같은 사정”은 저 첫째의 비유에서 말한 사정과 같다.“아들에게 말한다.”는 것은 중생에게 대승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다.“너는 돈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것은 청정심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니, 마땅히 믿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네 마음대로 쓰면 모두 충족할 것이다.”라는 것은 만약 청정심을 쓰면 본각의 뛰어난 이익과 법신의 혜명이 원만해지는 것이다.
ㄷ. 셋째 비유
셋째 비유에서 “그 아들은 정신 차리고”는 대승의 가르침을 듣고 믿음과 이해를 발생하여 그 지위가 지전地前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
001_0635_b_01L二者。其父示子有金錢。令得充足喩。
001_0635_b_02L三者。喜得金錢喩。四者。告非有得
001_0635_b_03L喩。初喩中言迷子者。謂諸衆生。迷
001_0635_b_04L自心源。如來大悲。如視一子。故喩
001_0635_b_05L迷子。法華窮子。局喩聲聞。此中迷
001_0635_b_06L子。通喩群生。手執金錢者。喩諸妄
001_0635_b_07L識。五縛煩惱。執着分別。覆自淨心。
001_0635_b_08L不知有故。遊行十方者。遍計五相及
001_0635_b_09L五事故。經五十年者。受五陰生五十
001_0635_b_10L惡故。貧者少有世間善故。窮者都
001_0635_b_11L無出世財故。困者或墮三途受劇苦
001_0635_b_12L故。苦者或生人天受輕苦故。專事
001_0635_b_13L求索者。求世間樂。作福業故。而以
001_0635_b_14L養身者。受人天樂而受用故。而不充
001_0635_b_15L足者。受世間樂。彌增渴愛。盛必有
001_0635_b_16L衰。無義利故。第二喩中。其父見子
001_0635_b_17L者。佛歸心源。同軆大悲。爲諸衆生。
001_0635_b_18L作慈父故。有如是事者。有如初喩所
001_0635_b_19L說事故。而謂子言者。爲衆生說大乘
001_0635_b_20L敎故。汝執金錢何不取用者。示有淨
001_0635_b_21L心。應信解故。隨意所須皆得充足者。
001_0635_b_22L若用淨心。本覺勝利。法身慧命。得
001_0635_b_23L圓滿故。第三喩中。其子醒已者。聞
001_0635_b_24L大乘敎。而生信解。位在地前故。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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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5_c_01L“돈의 덕택”은 초지를 터득하여 바로 통달위通達位91)에서 불성과 본각의 이익을 증견證見하는 것이다.“마음으로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후득지後得智92)에서 미래와 현재에서 발생하는 지극한 환희를 생각하는 것이다.“돈을 벌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관법을 떠나 정념正念을 잃고 유루심에서 법집을 일으켜 유소득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ㄹ. 넷째 비유
넷째 비유에서 “네가 번 돈은 본래 네 것이다.”라는 것은 그 증득한 본각의 이익이 본래 아들에게 속해 있던 것이지 지금에야 소유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네가 번 것이 아닌데, 어찌 기뻐한단 말이냐.”라는 것은 이미 본래 아들한테 속해 있던 것이지 지금에야 번 것이 아니므로 벌었다고 집착심을 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기뻐할 것 없다.”라는 것은 유소득에서 집착을 내어 기뻐하는 분별심을 방지한 것이다.
ⓒ 합
경 선남자여, 암마라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본래 떠나 있는 모습도 없고, 지금 들어간 것도 아니다. 옛적부터 미혹하다고 해서 없던 것도 아니고, 지금 깨쳤다고 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다.”
논 이는 셋째로 합合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론적인 합과 개별적인 합이다.
ㄱ. 총론적인 합
총론적인 합에서 말한 “암마라”는 번역하면 무구無垢이다. 본각은 본래 청정한 자성으로 개전改轉이 없으니, 마치 저 돈의 자성에 개전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금에는 네 가지 뜻이 있어 본각의 상·낙·아·정을 비유하였으니, (위의) 네 가지 비유에서 말한 금전과 완전히 합치된다.
ㄴ. 개별적인 합
개별적인 합에는 네 구절이 있다.“본래 떠나 있는 모습도 없다.”는 것은 위의 첫째 비유로서 손에 돈을 갖고 있는 것에 합치된다.“지금 들어간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위의 셋째 비유로서 돈을 얻은 것93)에 합치된다.“옛적부터 미혹하다고 해서 없던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위의 둘째 비유로서 “너는 돈이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느냐.”라는 것에 합치된다. 곧 옛적에는 미혹한 까닭에 사용하지 못했지만 손에 갖고 있으므로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지금 깨쳤다고 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위의 넷째의 비유로서 “본래 네 것이다. 네가 번 것이 아니다.”라는 것에 합치된다. 지금 이 본각도 본래적인 것으로 자심에서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
001_0635_c_01L得金錢者。得入初地正通達位。證見
001_0635_c_02L佛性本覺利故。心大歡喜者。後得智
001_0635_c_03L中。念當現得。生極喜故。而謂得錢
001_0635_c_04L者。出觀失念。有漏心中。故起法執。
001_0635_c_05L謂有得故。第四喩中。所得金錢是汝
001_0635_c_06L本物者。示其所證本覺之利本來屬
001_0635_c_07L汝。非始有故。汝非有得云何可喜
001_0635_c_08L者。旣本屬汝。非今始得。不宜於得
001_0635_c_09L生着心故。汝勿欣懌者。遮其分別。
001_0635_c_10L謂有所得。於中生着而欣懌故。
001_0635_c_11L善男子。唵摩羅者。亦復如是。本無出
001_0635_c_12L相。今則非入。昔迷故非無。今覺故非
001_0635_c_13L入。
001_0635_c_14L是第三合。於中有二。摠合別合。摠
001_0635_c_15L合中言唵摩羅者。此云無垢。本覺
001_0635_c_16L本淨。性無改轉。似彼金錢性無改故。
001_0635_c_17L又金有四義。喩本覺中常樂我淨。通
001_0635_c_18L合四喩中金錢也。別合中有四句。本
001_0635_c_19L無出相者。合初喩中手執金錢故。今
001_0635_c_20L卽非入者。合第三喩而得金錢。昔迷
001_0635_c_21L故非無者。合第二喩。汝執金錢何不
001_0635_c_22L取用。是昔迷故不用。而手執故非無
001_0635_c_23L也。今覺故非入者。合第四喩。是汝
001_0635_c_24L本物。汝非有得。今覺本物。不出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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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6_a_01L이미 본래부터 떠나 있던 적이 없는데, 어찌 들어간다고 하는가. 들어간 것이 아니므로 유소득이 아니다.
b) 의정을 거듭 없앰
이하는 의정을 거듭 없앤 것으로, 세 차례의 문답을 통하여 차례로 의정을 없애 준다.
(a) 첫째 문답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저 아버지가 아들의 미혹을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오십 년 동안 시방을 떠돌면서 빈·궁·곤·고하도록 내버려 둔 후에야 비로소 알려 준 것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오십 년이 지난 것은 일념지간一念之間(찰나)에 일심이 기동한 것이고, 시방을 떠돈 것은 원행으로 널리 계탁한 것이다.”
논 이것은 그 첫째의 문답이다. 곧 비유로써 질문한 의정에 대하여 법을 가지고 없애 준 대목이다. 답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오십 년이 지난 것’은 일념에 마음이 기동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시방을 떠돈 것’은 원행으로 널리 계탁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곧 일념지간에 널리 제법을 계탁한 것으로, 이 일념지간에 그 아버지가 알려 준 것에 계합된 것이다. 알려 준 바로 그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 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94) 마치 금전을 알아차린 것일 뿐이지 새삼스레 획득한 바가 아닌 것과 같다. 때문에 아버지가 알려 준 것은 오십 년의 오랜 세월이 경과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지간에 오십 가지 악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비유에서 ‘오십 년이 지난 것’이라 하였다.”답변의 뜻이 이와 같은데,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무명의 힘을 말미암아 사상四相(生相·住相·異相·滅相)을 일으킨다. 이 사상과 무명이 화합된 힘은 일심에 생·주·이·멸을 기동한다. 일심이 이미 기동되면 이 사상이 수반된다. 이런 까닭에 “일념지간에 일심이 기동한다.”고 말한다. 마치 『기신론』에서 “자성청정심이 무명의 바람을 인유하여 기동한다. ……”라고 설한 바와 같다.95) 자세한 것은 저 『기신론별기』의 설명과 같다.96)
(b) 둘째 문답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일념지간에 일심이 기동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일념지간에 일심이 기동하면 오음이 모두 발생하고, 오음이 발생하면 그 가운데 오십 가지 악이 모두 구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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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6_a_01L心。旣本不出。何得有入。非有入故。
001_0636_a_02L非有得也。
001_0636_a_03L無住菩薩言。彼父知其子迷。云何經五
001_0636_a_04L十年。十方遊歷。貧窮困苦。方始告言。
001_0636_a_05L佛言。經五十年者。一念心動。十方遊
001_0636_a_06L歷。遠行遍計。
001_0636_a_07L此下重遣疑情。三番問答次第遣
001_0636_a_08L疑。此初番者。問依喩疑。答就法遣。
001_0636_a_09L答意而言經五十年。喩於一念心動。
001_0636_a_10L十方遊歷。喩於遠行遍計。斯則一
001_0636_a_11L念之頃。遍計諸法。卽於此念。其父告
001_0636_a_12L言。告言之時。卽得醒悟。念究竟時。得
001_0636_a_13L無所得。如覺金錢而無所得。所以父
001_0636_a_14L告。非爲經久。但爲顯一念具五十惡
001_0636_a_15L故。喩中說經五十年耳。答意如是。
001_0636_a_16L是義云何。謂由無明力而起四相。四
001_0636_a_17L相無明和合力故。能動一心。生住異
001_0636_a_18L滅。一心旣動。帶此四相。是故說名。一
001_0636_a_19L念心動。如起信論云。自性淸淨心。
001_0636_a_20L因無明風動。乃至廣說。於中委悉。如
001_0636_a_21L彼記說。
001_0636_a_22L無住菩薩言。云何一念心動。佛言。一
001_0636_a_23L念心動。五陰具生。五陰生中。具五十
001_0636_a_24L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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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6_b_01L논 이는 둘째의 문답으로 둘째의 의정을 없애는 것으로, 소치所治의 악을 드러낸 것이다. 일념의 사상四相에 모든 생사가 섭수되어 있어서 오음과 오십 가지 악이 구비되어 있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오음에 오십 가지 악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식음識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팔식이다. 그리고 수음受陰과 상음想陰에도 식음과 마찬가지로 여덟 가지가 있다. 행음行陰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여덟 가지는 일심과 상응하고 한 가지는 일심과 상응하지 않는다. 색음色陰에는 열일곱 가지가 있다. 이들을 합치면 오십 가지가 된다. 열일곱 가지란 능조能造의 네 가지(四大)와 소조所造의 열세 가지이다. 말하자면 오근五根과 오진五塵과 법처에 섭수되는 세 가지 색, 곧 『현양성교론』에서 말하는 율의색律儀色, 불률의색不律儀色, 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이다.97) 이것은 일문에 오십 가지를 내세운 것이다. 이와 같은 오십 가지는 순전한 악으로서 모두 유전하여 열반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저 열반의 순전한 선에 상대된다.
(c) 셋째 문답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중생은 원행으로 널리 계탁하며 시방을 떠돌아다니다가 일념지간에 마음이 발생하여 오십 가지 악을 구비하였습니다. 이에 어떻게 하면 저 중생으로 하여금 일념지간에 오십 가지 악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할 수가 있겠습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저 중생에게 마음과 정신을 안좌시키고 금강지에 거주토록 하며, 적정하여 망념의 기동이 없게 하고 심원을 늘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하면, 그것이 곧 일념지간에 사상四相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98)
논 이것은 셋째의 문답으로 셋째의 의정을 없애는 것이니, 능치能治의 도를 설명한 것이다.“저 중생”이란 십신 이전의 일체중생이다.“마음과 정신을 안좌시킨다.”는 것은 십주 이후 마음을 삼공에 안주시켜 결정코 불퇴하므로 안좌라 말한다.“금강지에 거주한다.”는 것은 초지 이상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모든 멸괴를 떠나 있는 것이 금강과 같은 것이다.“적정하여 망념의 기동이 없다.”는 것은 등각위의 경지에서 그 동념이 본래 적정한 줄을 깨쳐 다시는 동념이 기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심원을 늘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한다.”는 것은 -
001_0636_b_01L是第二番遣第二疑。顯所治惡。欲明
001_0636_b_02L一念四相。攝諸生死故。具五陰有五
001_0636_b_03L十惡。云何五陰具五十惡。謂識陰有
001_0636_b_04L八。卽是八識。受想二陰。隨識各八。
001_0636_b_05L行陰有九。八是相應。一不相應。色
001_0636_b_06L陰十七。合爲五十。言十七者。能造
001_0636_b_07L四大。所造十三。謂五根五塵。法處
001_0636_b_08L所攝。有三種色。如顯揚說。謂律儀
001_0636_b_09L色。不律儀色。及定自在所生色故。
001_0636_b_10L且就一門。立爲五十。如是五十。是
001_0636_b_11L眞實惡。皆是流轉違涅槃故。對彼涅
001_0636_b_12L槃眞實善故。
001_0636_b_13L無住菩薩言。遠行遍計。遊歷十方。一
001_0636_b_14L念心生。具五十惡。云何令彼衆生。無
001_0636_b_15L生一念。佛言。令彼衆生。安坐心神。住
001_0636_b_16L金剛地。靜念無起。心常安泰。卽無生
001_0636_b_17L一念。
001_0636_b_18L是第三番。遣第三疑。明能治道。令
001_0636_b_19L彼衆生者。十信已前一切衆生故。安
001_0636_b_20L坐心神者。十住已去。安心三空。決
001_0636_b_21L定不退名安坐故。住金剛地者。初地
001_0636_b_22L已上。證得法身。離諸滅壞。如金剛
001_0636_b_23L故。靜念無起者。等覺位中。覺其動
001_0636_b_24L念。本來寂靜。令不起故。心常安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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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6_c_01L묘각위의 경지에 도달하여 본래 마음에 기동과 소멸이 없고, 본래 동념이 없어 시작과 종말도 없음을 보는 것이다. 기동과 소멸이 없으므로 항상하고 동념이 없으며 편안하고, 시작과 종말이 없으므로 태연하지 않음이 없다.이와 같이 수행하여 구경각을 터득하면 곧 생과 사가 없어 일념지간에 사상四相이 없기 때문에 “일념지간에 사상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동념의 이상異相99)을 깨달아 동념에서도 이상이 없다. 이로써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着相(異相)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상사각相似覺100)이라 말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地上菩薩) 등은 동념의 주상住相을 깨달아 동념에서도 주상이 없다. 이로써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101)을 떠나 있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 말하며, 보살지를 마친(菩薩地盡)102) 자는 방편을 완성하여 일념에 상응한다.103) 말하자면 일심이 처음 기동하는 것(生相)을 깨쳐 일심에 처음 기동하는 모습이 없어서 미세념微細念(生相)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일심의 자성을 본다.104) 이에 일심이 상주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佛果)이라 말한다.105)
생각해 보면 『기신론』에서 “일심의 자성을 보아 일심이 곧 상주한다.”는 것은 『금강삼매경』의 “심원을 늘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한다.”는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106) 그 밖의 구절도 『기신론』의 해석에 의거하면 위의 내용처럼 알 수 있을 것이다.이상으로 크게 나누어 본 일본각에 대한 연설을 마친다.
c) 이해시킴
경 무주보살이 여쭈었다.“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일념이 불생임을 깨쳐 그 일심이 편안하고 태연한 것이야말로 곧 본각의 이익입니다. 본각의 이익에는 사상四相의 동념이 없고 항상 (시각과 본각이) 존재하여 없지 않으므로, 시각이 없다고 해서 본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고, 본각이 없다고 해서 시각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시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그것이 곧 본각의 이익이고 본각입니다. 본각은 청정하고 무염이며 불변이고 불역입이다. 이처럼 결정자성인 까닭에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바로 그렇다.”
논 이는 셋째로 이해시키고, 넷째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107)“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라는 것은 총론적으로 이해하고 그 심오함을 찬탄한 것이고, 이하는 개별적으로 이해한 대목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
001_0636_c_01L者。至妙覺位。得見心源。無起無滅。
001_0636_c_02L本無動念。無始無終。無起滅故。常
001_0636_c_03L無動念故安。無始終故。無不泰然。
001_0636_c_04L如是修行。得究竟覺。卽無生死。一念
001_0636_c_05L四相。以之故言。卽無一念。爲顯是
001_0636_c_06L義故。起信論說言。初發意菩薩等。
001_0636_c_07L覺於念異。念無異相。以捨麁分別執
001_0636_c_08L着相故。名相似覺。如法身菩薩等。
001_0636_c_09L覺於念住。念無住相。以離分別麁念
001_0636_c_10L相故。名隨分覺。如菩薩地盡。滿足
001_0636_c_11L方便。一念相應。覺心初起。心無初
001_0636_c_12L相。以遠離微細念故。得見心性。心
001_0636_c_13L卽常住。名究竟覺。案云。此中得見
001_0636_c_14L心性心卽常住。卽釋此經心常安泰
001_0636_c_15L之句。餘句1)准 [17] 釋。如前應知。上來大
001_0636_c_16L分。演本覺竟。
001_0636_c_17L無住菩薩言。不可思議。覺念不生。其
001_0636_c_18L心安泰。卽本覺利。利無有動。常在不
001_0636_c_19L無。無有不無。不無不覺。覺知無覺。本
001_0636_c_20L利本覺。覺者淸淨無染。 [56] 不變不易。決
001_0636_c_21L定性故。不可思議。佛言。如是。
001_0636_c_22L此是第三領解。第四述成。不可思議
001_0636_c_23L者。摠領歎深。下別領解。於中有二。
001_0636_c_24L「淮」作「准」{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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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7_a_01L첫째는 이해한 언구言句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이해한 의리義理에 대한 것이다.
(a) 이해한 언구
“일념이 불생임을 깨쳐 그 일심이 편안하고 태연한 것”이란 위에서 “적정하여 망념의 기동이 없게 하고 심원을 늘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한다.”는 구절을 이해한 것인데, 이것은 곧 시각의 구경처를 가리킨다.
(b) 이해한 의리
이하는 이해한 의리에 해당한다.“곧 본각의 이익입니다.”라는 것은 시각이 본각과 다름이 없다는 뜻을 이해한 것이다. 『기신론』의 다음 설명과 같다.
만약 무념을 터득한 자는 곧 마음의 생상·주상·이상·멸상을 안다. 그래서 무념과 동등하기 때문에 실로 시각과 차이가 없다. 이에 사상이 동시에 존재하더라도 모두 독자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 평등하여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108)
생각해 보면 “실로 시각과 차이가 없다.”는 것은 경문의 “곧 본각의 이익입니다.”라는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이에 사상이 동시에 존재하여 모두 독자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 평등하다.”는 것은 경문의 “본각의 이익에는 사상四相의 동념이 없다.”는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이와 같이 시각이 본각과 다름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항상 존재하여 없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한다.“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그대로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항상’이라고 했지만 정녕 존재(有)에 해당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시각이 없다고 해서 본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비록 본각이 없지 않지만 시각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본각이 없다고 해서 시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이와 같이 시각이 없는 도리를 깨치고 알면 곧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이에 시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그것이 곧 본각의 이익이고 본각입니다.”라고 하였다.이리하여 구경에 깨쳐서 아는 자는 무명에 휩싸이는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청정하고 무염하다.”고 하였다.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청정한 것이고, ‘무염이다.’라는 것은 지금 오염에서 떠나 있다는 것이다.영원히 생·주·이·멸이 없으므로 “불변이고 불역입니다.”라고 하였다. ‘불역’은 생상과 주상이 없는 것이고, ‘불변’은 이상과 멸상이 없는 것이다.만약 이러할진댄 곧 진리의 경계(眞際)와 동일하고 법성과 평등하므로 “이처럼 결정자성이다.”라고 하였다.이미 진리의 경계와 동일하고 법성과 평등하여 언설문자를 떠나 있고 사려분별을 단절해 있기 때문에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하였다.앞에서 이미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했는데, -
001_0637_a_01L先領言句。後領義理。言覺念不生
001_0637_a_02L其心安泰者。領前靜念無起。心常安
001_0637_a_03L泰之句。此是始覺之究竟處。下領義
001_0637_a_04L理云。卽本覺利者。領無始覺異本覺
001_0637_a_05L義。如論說云。若得無念者。卽知心
001_0637_a_06L相生住異滅。以無念等故。而實無有
001_0637_a_07L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
001_0637_a_08L立。本來平等同一覺故。案云。實無
001_0637_a_09L始覺之異者。是釋經中。卽本覺利之
001_0637_a_10L句。四相俱時而有。皆無自立。本來
001_0637_a_11L平等者。是釋經中。利無有動。如是
001_0637_a_12L始覺覺知無異故。以能得常在不無。
001_0637_a_13L言常在者。直謂不無。然此中言常
001_0637_a_14L而無當有。故言無有不無。旣無當於
001_0637_a_15L有始覺故。雖不無覺而不有覺。故言
001_0637_a_16L不無不覺。覺知如是無覺道理。卽知
001_0637_a_17L始覺不異本覺。故覺知無覺本利本
001_0637_a_18L覺。如是究竟覺知之者。遠離無明所
001_0637_a_19L覆。故淸淨無染。淸淨者。本來淨故。
001_0637_a_20L無染者。今離染故。永無生住異滅。故
001_0637_a_21L不變不易。不易者。無生住故。不變
001_0637_a_22L者。無異滅故。若如是者。卽同眞際
001_0637_a_23L等於法性。故言決定性故。旣同平等
001_0637_a_24L離言絕慮。故言不可思議。前已言不
-
001_0637_b_01L지금 거듭하여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한 것은 불가사의한 것에 대해서도 또한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d) 마무리를 지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렇다.”는 것은 넷째로 마무리를 짓는 것이다. 위에서 무주보살이 이해한 바와 마찬가지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2) 게송으로 찬탄함
경 무주보살이 그 설법을 듣고 나서 미증유한 것을 터득하였다. 이에 게송을 설하여 말씀드렸다.
尊者大覺尊 존자이시여, 훌륭하신 대각세존께서는
說生無念法 중생에게 무념의 법을 설해 주셨다네
無念無生心 분별념도 없고 생멸도 없는 마음 되니
心常生不滅 그 마음 항상 살아 있어 소멸 없다네
一覺本覺利 일본각 및 본각의 이익을 얻음으로써
利諸本覺者 모든 본각의 중생들을 이롭게 해 주네
如彼得金錢 마치 궁자가 금덩어리 획득한 것처럼
所得卽非得 터득한 것이 본래 터득함 아니었다네
논 이는 둘째로 게송으로 찬탄하는 것이다.109) 게송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 제1·제2의 두 구는 총론적으로 능설을 찬탄한다. 둘째, 제3·제4·제5·제6의 네 구는 위의 법에 대한 설명을 찬송한다. 셋째, 제7·제8의 두 구는 저 비유로 한 설법을 찬송한다.
① 총론적으로 능설을 찬탄함
처음에 “중생에게 무념의 법을 설해 주셨다네.”라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무념법과 구경각의 성취에 대하여 설한 것이다.
② 법에 대한 설명을 찬송함
“분별념도 없고 생멸도 없는 마음 되니”는 생과 사의 분별념이 없어져 무생심을 성취하는 것이다.“그 마음 항상 살아 있어 소멸 없다네.”는 연설한 법문을 간략하게 찬탄한 것이다. 곧 위에서 “본래의 마음을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하면” 내지 “항상 존재하여 없지 않으므로”를 가리킨다. ‘살아 있어’는 존재한다는 것이고, ‘소멸’은 없어진다는 것이다.“일본각 및 본각의 이익을 얻음으로써 모든 본각의 중생들을 이롭게 해 주네.”라는 것은 저 모든 중생에게는 본각이 구비되지 않음이 없다. 이런 까닭에 “모든 본각의 중생들을”이라고 하였다.
③ 비유로 한 설법을 찬송함
아래의 두 구절은 위의 네 가지 비유를 찬탄한 것이다. 이것이 총론적으로 찬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 설법을 듣고 이익을 터득함
경 그때 대중은 이렇게 설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 모두 본각의 이익과 반야바라밀을 터득하였다.
논 이것은 셋째로 설법을 듣고 터득한 이익에 대한 대목이다.110) 설법한 뜻을 따라서 각각 이익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터득한 본각의 이익과 시각의 반야는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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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7_b_01L思議。今重言不思議者。亦不可思議。
001_0637_b_02L於不可思議故。佛言如是者。第四述
001_0637_b_03L成文。如前所領解。不違道理故。
001_0637_b_04L無住菩薩。聞是語已。得未曾有。而說
001_0637_b_05L偈言。
001_0637_b_06L尊者大覺尊。說生無念法。無念無生心。
001_0637_b_07L心常生不滅。一覺本覺利。利諸本覺者。
001_0637_b_08L如彼得金錢。所得卽非得。
001_0637_b_09L此是第二以偈讃頌。頌中有三。初之
001_0637_b_10L二句。摠讃能說。次有四句。頌前法
001_0637_b_11L說。後有二句。頌彼喩說。初言說生
001_0637_b_12L無念法者。說諸衆生。成無念法。究
001_0637_b_13L竟覺故。無念無生心者。無生死念。
001_0637_b_14L成無生心故。言心常生不滅者。略頌
001_0637_b_15L演文。彼言心常安泰。乃至常在不無
001_0637_b_16L故。生之言在。滅之言無。故一覺本
001_0637_b_17L覺利。利諸本覺者者。彼諸衆生。無
001_0637_b_18L無本覺。是故說言諸本覺者。下之二
001_0637_b_19L句頌前四喩。摠頌可知。
001_0637_b_20L爾時大衆。聞說是語。皆得本覺利。般
001_0637_b_21L若波羅蜜。
001_0637_b_22L此是第三聞法得利。隨所說義。隨得
001_0637_b_23L利故。得本覺利。始覺般若。平等無
001_0637_b_24L異。如前說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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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7_c_01L4) 「입실제품入實際品」
논 “실제”란 허환虛幻을 떠나 있음을 지칭한 것으로 구경의 뜻이다. 허환을 떠나 있는 구경이기 때문에 실제라 한다. 곧 교학에 의거하여 이치를 닦아서 이입理入하고 행입行入하기 때문에 입入이라 말한다.111) 그러나 실제는 경계가 없음(無際)을 실제의 경계로 삼고,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은 깨달음에 들어감이 없음(無入)을 가지고 깨달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입실제품이라 하였다.개별적으로 관행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품 가운데 셋째로 본각의 이익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부분을 마쳤다. 이하는 그 넷째로 허환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대목이다.112) 또한 앞의 「본각리품」에서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을 설명하였지만, 여기 「입실제품」에서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다.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의를 간략하게 표방하고, 둘째는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며, 셋째는 사리불(身子)이 이해하고, 넷째는 당시의 대중이 획득한 이익이다.
(1) 대의를 간략하게 표방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을 열어 주고, 둘째는 이미 들어간 실제를 드러낸다.
①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을 열어 줌
방편을 열어 주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론적으로 표방하고, 개별적으로 열어 준다.
가. 총론적으로 표방함
경 이에 여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모든 보살들은 본각의 이익(本利)과 깊은 깨달음(深入)으로 중생을 제도한다.
논 위의 경문은 총론적으로 표방하여 대의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나. 개별적으로 열어 줌
경 만약 후대 비시非時113)에 진여에 대응하여 설법을 한다면 시절의 이익과 설법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릇 순順 혹은 불순不順의 입장에서 설법하고, 동同도 아니고 혹은 이異도 아닌 입장에서 상응하여 그렇게 설법한다. 이리하여 모든 중생의 정情과 모든 중생의 지智114)를 이끌어 살반야薩般若115)의 바다에 유입시켜 그 중생으로 하여금 허환의 바람을 맞지 않게 하여 그들에게 일미의 신선굴(神孔)을 희망하도록 한다.
논 이는 둘째로 개별적으로 방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곧 네 가지 방편을 연다. 첫째는 시절을 아는 방편이고, 둘째는 근기를 아는 방편이며, 셋째는 끌어들이는 방편이고, 넷째는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다.
가) 시절을 아는 방편
첫째의 시절을 아는 방편이란 경문의 “만약 후대 비시非時에 진여에 대응하여 설법을 한다면 -
001_0637_c_01L入實際品1)第五 [18]
001_0637_c_02L言實際者。離虛之稱。究竟之義。離
001_0637_c_03L幻究竟。故名實際。依敎修理。理入
001_0637_c_04L行入。故名爲入。然實際。以無際爲
001_0637_c_05L際。二入是無入之入。故名入實際品。
001_0637_c_06L於是。如來作如是言。諸菩薩等。本利
001_0637_c_07L深入。可度衆生。
001_0637_c_08L別明觀行六分之中。第三依本利物
001_0637_c_09L分竟。此下第四從虛入實。又前品明
001_0637_c_10L心生滅門。今此品顯心眞如門。就
001_0637_c_11L文有四。一者略標大意。二者廣顯道
001_0637_c_12L理。三者身子領解。四者時衆得益。
001_0637_c_13L初中有二。先開令入方便。後示所入
001_0637_c_14L實際。開方便中。摠標別開。此文摠
001_0637_c_15L標令入大意。
001_0637_c_16L若後非時。應如說法。時說 [57] 利不俱。 [58] 但 [59]
001_0637_c_17L順不順說。非同非異。相應如說。引諸
001_0637_c_18L情智。流入薩般若海。無令可衆。挹彼
001_0637_c_19L虛風。悉令彼庶一味神孔孔字。諸本
作乳字。 [60]
001_0637_c_20L此是第二別開方便。於中卽開四種
001_0637_c_21L方便。一者。知時方便。二者。識機方
001_0637_c_22L便。三者。引入方便。四者。出離方便。
001_0637_c_23L知時方便者。如經若後非時。應如說
001_0637_c_24L「第五」無{甲}。
-
001_0638_a_01L시절의 이익과 설법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부분이다.‘후대’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이후이고, 둘째는 정법이 소멸한 이후이며, 셋째는 오중오백세五重五百歲116)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오백세이다.‘비시非時’는 중생의 인연이 순숙하지 않은 시절이고, 쉽게 깨치지 못하는 시절이며, 이견이 흥성하여 서로 비방하는 시절을 말한다. 만약 이와 같이 비시에 그대로 진여에 대응하는 설법을 하면 저 시절에 맞지 않아 이익이 없다. 시절과 설법의 수준에 이익이 병행되지 않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곧 시절을 아는 방편이다.
나) 근기를 아는 방편
둘째의 근기를 아는 방편이란 경문의 “그러므로 무릇 순順 혹은 불순不順의 입장에서 설법하고, 동同도 아니고 혹은 이異도 아닌 입장에서 상응하여 설한다.”는 부분이다.“순順으로 혹은 불순不順의 입장에서 설법한다.”는 것은 만약 그대로 그들 마음에 순順하여 설하면 그들의 잘못된 집착을 흔들어 줄 수가 없고, 설령 오직 그들 마음에 불순不順해서 설하면 그들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줄 수가 없다.117)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바른 믿음을 획득케 하고, 그들 마음에 본래의 잘못된 집착을 없애도록 해 주려고 모름지기 순의 입장에서 혹은 불순의 입장에서 설하는 것이다.또한 그대로 순리順理로만 설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켜 줄 수가 없다. 그것은 중생의 뜻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불순리不順理로만 설하면 어찌 바른 이해를 발생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에 신해를 획득토록 하기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 순과 불순으로 설하는 것이다.모든 이견과 쟁론이 흥성할 경우에 유견有見에 동조하여 설하면 그것은 공견空見과 달라지고, 공집空執에 동조하여 설하면 그것은 유집有執과 달라져서 동同이다 이異다 하는 쟁론을 더욱더 부추길 뿐이다. 또한 둘 모두를 동同이라 하면 그 둘은 곧 자기 내부에서 서로 다투고, 둘 모두를 이異라 하면 곧 그 둘 사이에 서로 다툰다. 이런 까닭에 동同도 아니고 이異도 아닌 입장에서 설한다.“동同도 아니다.”라는 것은 언설의 측면을 든 것으로 말은 모두 취하지만 뜻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異도 아니다.”라는 것은 뜻의 측면을 든 것으로 말을 모두 인정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다르지 않음(非異)을 말미암은 까닭에 그들의 견해에 어긋나지 않고, 같지 않음(非同)을 말미암은 까닭에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처럼 견해와 도리가 서로 응하여(相望)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여 그렇게 설한다.”고 말한다.“상응여설相應如說”에서 ‘여如’는 ‘이而’로서 ‘그렇게’의 뜻이다.
다) 끌어들이는 방편
셋째의 끌어들이는 방편이란 경문의 “이리하여 모든 중생의 정情과 지智를 이끌어 살반야薩般若의 바다에 유입시킨다.”는 부분이다. -
001_0638_a_01L法。時利不俱故。後有三義。佛滅度
001_0638_a_02L後故。正法滅後故。五重五百中。後五
001_0638_a_03L百歲故。言非時者。非純熟時故。非
001_0638_a_04L易悟時故。異見盛興相非時故。若於
001_0638_a_05L如是非時。直應眞如說法。不當彼時。
001_0638_a_06L無所利益。時利不並。故言不俱。是爲
001_0638_a_07L知時方便。識機方便者。如經順不順
001_0638_a_08L說。非同非異。相應如說故。順不順
001_0638_a_09L說者。若直順彼心說則不動邪執。設
001_0638_a_10L唯不順說者則不起正信。爲欲令彼
001_0638_a_11L得正信心。除本邪執故。須或順或不
001_0638_a_12L順說。又復直順理說。不起正信。乖彼
001_0638_a_13L意故。不順理說。豈生正解。違道理
001_0638_a_14L故。爲得信解故。順不順說也。若諸
001_0638_a_15L異見諍論興時。若同有見而說。則異
001_0638_a_16L空見。若同空執而說。則異有執。所
001_0638_a_17L同所異。彌興其諍。又復兩同彼二則
001_0638_a_18L自內相諍。若異彼二則與二相諍。是
001_0638_a_19L故非同非異而說。非同者。如言而取。
001_0638_a_20L皆不許故。非異者。得意而言。無不
001_0638_a_21L許故。由非異故。不違彼情。由非同
001_0638_a_22L故。不違道理。於情於理。相望不違。
001_0638_a_23L故言相應如說。如者而也。引入方
001_0638_a_24L便者。如經引諸情智流入薩般若海
-
001_0638_b_01L‘모든 중생의 정情’은 크고 작은 욕망을 지닌 근기의 차별이다.‘모든 중생의 지智’는 공과 유에 대한 지견의 차별이다. 이와 같은 무리를 이끌어 모두 수행을 좇아 일각 및 일체지해라는 무상보리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가도록 한다. 마치 온갖 강물이 다 대해에 들어가면 깊고 넓은 대해가 똑같은 일미인 것과 같다. 이것을 끌어들이는 방편이라 한다.
라) 벗어나게 하는 방편
넷째의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란 경문의 “중생으로 하여금 허환의 바람을 맞지 않게 하여 그들 모두에게 일미의 신선굴을 희망하도록 한다.”는 부분이다.‘맞다(挹)’118)는 것은 짐斟의 뜻으로 취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이다.‘허환의 바람’은 떠다니는 허공의 바람이 모든 파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외부의 경계가 모든 내부의 식랑識浪을 기동시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제도해야 할 중생이 경계의 바람을 맞은 까닭에 종전부터 모든 분별식의 파도에 전변되었다가 지금에야 그것을 맞지 않게끔 되어 그 분별식의 파도가 고요하게 멎은 것이다.‘희망(庶)’은 서기庶幾로서 희망한다는 뜻이다.‘신선굴(神孔)’은 신선이 거주하는 곳으로, 성읍을 멀리 떠나 있어 번뇌가 없이 고요하여 장생하는 곳이니, 대열반의 불사不死의 집을 비유한다. 이는 원만하고 적정하며 평등하기 때문에 ‘일미’라 하니, 저 중생으로 하여금 대열반을 희망하여 모든 분별식이 파도를 그치고 생사유전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를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라 한다.
② 이미 들어간 실제를 보여 줌
경 세간은 세간이 아니고 주처는 주처가 아니므로 곧 오공五空119)의 경우 그것은 벗어나고 들어가지만 집착함과 버림이 없다. 왜냐하면 제법은 공상이지만 제법의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고,120) 무無도 아니며 불무不無도 아니기 때문이다.121) 곧 무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기 때문에 결정자성이 없어서 유에도 집착이 없고 무에도 집착이 없다. 그러므로 저 유有와 무無와 범凡과 성聖의 분별지혜로는 안은한 법성의 도리를 헤아릴 수가 없다. 모든 보살이 만약 이와 같은 본각의 이익을 안다면 곧 보리를 터득한다.”
논 이는 들어간 실제의 도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듭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편집은 옳지 않다는 것이고, 넷째는 달자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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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8_b_01L故。諸情者。大小情欲差別故。諸智
001_0638_b_02L者。空有知見差別故。引接此輩。皆
001_0638_b_03L順道流。令入一覺一切智海。無上菩
001_0638_b_04L提深廣義故。如百川流。同入大海。
001_0638_b_05L大海深廣。同一味故。如是名爲引入
001_0638_b_06L方便。出離方便者。如經無令可衆
001_0638_b_07L挹彼虛風。悉令彼庶一味神孔故。挹
001_0638_b_08L者斟也。是取納義。言虛風者。謂遊
001_0638_b_09L空風。能起諸浪。喩諸境界。動諸識
001_0638_b_10L浪。可度衆生。挹境界風故。從前來
001_0638_b_11L諸識浪轉。今無令挹。識浪靜息也。
001_0638_b_12L庶者庶幾。是希望義。言神孔者。謂
001_0638_b_13L神1)仙 [19] 窟。遠離城邑無事閑靜長生之
001_0638_b_14L處。喩大涅槃不死之宅。圓寂平等。故
001_0638_b_15L名一味。令彼衆生。希大涅槃。止諸
001_0638_b_16L識浪。出離流轉。如是名爲出離方便。
001_0638_b_17L世間非世間。住非住處。五空出入。無有
001_0638_b_18L取捨。何以故。諸法空相。法性非無
001_0638_b_19L法性非無。一本
作。性非有無 [61] 非無不無。不無不有。無決
001_0638_b_20L定性。不住有無。非彼有無凡聖之智
001_0638_b_21L而能測 [62] 隱。諸菩薩等。若知是利。卽得
001_0638_b_22L菩提。
001_0638_b_23L是示所入道理。於中有四。一者略明。
001_0638_b_24L二者重釋。三者偏執不當。四者達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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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8_c_01L가. 간략하게 설명함
첫째의 간략하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세간은 세간이 아니다.”는 말은 세간의 오법五法122)이 존재가 없다(無所有)는 것이다.“주처는 주처가 아니다.”라는 것은 상주열반은 무소득이므로 관행을 닦는 자가 오온이 공한(五空) 줄을 터득했을 경우에 유를 떠나 공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벗어나고 들어간다.”고 하였다.공에 들어갈 경우에는 공성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공에 집착하지 않을지라도 공을 버리지도 않는다. 이로써 “집착함과 버림이 없다.”고 하였다.이미 오공에 들어갔다면 무슨 까닭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만약 집착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째서 버리지 않게 된단 말인가.
나. 거듭 해석함
이와 같은 질문에 답변하려고 둘째로 그에 대하여 거듭 해석한다.“제법은 공상이지만 제법의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닌” 까닭에 공에 들어간다(入空)123)고 설한다.“무無도 아니며 불무不無도 아니기 때문이다. 곧 무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닌” 까닭에 집착함과 버림이 없다.‘무無도 아니다.’라는 것은 법성의 도리는 토끼의 뿔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불무不無도 아니다.’라는 것은 관찰수행자가 없애지 않는 것이니, 없애지 않는 것은 도리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유有도 아니다.’라는 것은 관찰수행자 자신도 또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유有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제법의 자성은 이와 같이 유·무가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달자는 양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정자성이 없어서 유有에도 집착이 없고 무無에도 집착이 없다.”고 말한다.이런 도리를 말미암은 까닭에 집착하고 버림이 없다.
다. 치우친 집착은 옳지 않음
셋째에서 말한 “그러므로 저 유有와 무無와 범凡과 성聖의 분별지혜로는 은밀한 법성의 도리를 헤아릴 수가 없다.”에서 범부는 유有를 보존하여 공을 어기고, 이승은 유를 버리고 공적에 나아가니, 이와 같이 유·무의 분별을 벗어나지 못한 지혜로써 안은한 법성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할 수가 없다(非).”고 하였다.
라. 달자達者의 승리
넷째에서 말한 “모든 보살”은 지전보살地前菩薩이다. 만약 법성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을 알면, 처음 발심할 때 곧 정각을 성취하게 된다.124) 이런 까닭에 “곧 보리를 터득한다.”고 간절하게 말한다. 즉 발심하여 법성을 알아차렸을 경우 바로 그때가 곧 무상보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
001_0638_c_01L勝利。初中言世間非世者。世間五法
001_0638_c_02L無所有故。住非住處者。常住涅槃
001_0638_c_03L無所得故。修觀行者。達五空時。出
001_0638_c_04L有入空。故言出入。入空之時。不取
001_0638_c_05L空性。雖不取空而不捨空。以之故言
001_0638_c_06L無有取捨。旣入五空。何故不取。若
001_0638_c_07L無取者。如何不捨。爲答是問。故第
001_0638_c_08L二釋。諸法空相。法性非無。故說入空。
001_0638_c_09L非無不無。不無不有。故無取捨。言
001_0638_c_10L非無者。謂法性理。不同兎角故。言
001_0638_c_11L不無者。謂觀行者而不遣故。不遣之
001_0638_c_12L者。非無理故。言不有者。謂觀行者。
001_0638_c_13L亦不存故。不存之者。非有理故。法
001_0638_c_14L性如是。非定有無。是故達者。不住
001_0638_c_15L二邊。故言無決定性。不住有無。由
001_0638_c_16L是道理。故無取捨。第三中言。非彼有
001_0638_c_17L無凡聖之智者。凡夫存有而背於
001_0638_c_18L2)空。二 [20] 乘背有而趣空寂。如是不離
001_0638_c_19L有無之智。而能測量安隱法性者。無
001_0638_c_20L有是處。故言非也。第四中言諸菩薩
001_0638_c_21L者。地前菩薩。若知法性不有不無者。
001_0638_c_22L初發心時便成正覺。是故切言卽得
001_0638_c_23L菩提。謂卽發心知法性時。是時卽得
001_0638_c_24L「仙」作「屳」{甲}。「空二」作「二空」{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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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9_a_01L이 뜻은 『화엄경』 「발심공덕품」에 나온다.125)
문 위의 여러 경문에서는 “결정자성”이라고 말했는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는 “결정자성이 없다.”고 말하는가?답 그것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자성이 없다는 말은 결코 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냄
경 그때 대중 가운데 한 보살이 있었는데 이름이 대력이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존자이시여, 참으로 여여하게 설하셨듯이 오공의 경우는 벗어나서 들어가지만 집착함과 버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공의 경우에 집착함과 버림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논 이하는 둘째로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네 가지 문으로 분별한다. 첫째는 실제의 뜻을 드러내고, 둘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설명하며, 셋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계위를 열고,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을 보인다.
① 실제의 뜻을 드러냄
첫째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공을 설명하며, 셋째는 공이 곧 진眞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진眞이 곧 여如임을 설명한다.
가. 오공五空을 설명함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질문하는 이의 이름을 “대력”이라 한 것은, 이 사람이 실제의 법문에 들어가 온 법계에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대자재를 터득하였기 때문에 대력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입실제품」의 문에서 개발하여 현양한다.“참으로 여여하게(如如)”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진여 도리에 계합하는 것이니, 앞의 여如는 계합의 뜻이고, 뒤의 여如는 도리이다.먼저 이해를 하고 연후에 질문을 하였다. 질문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오공의 법문을 물었고, 둘째는 취와 사의 뜻이 없음을 물었다.
나) 답변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보살이여, 오공이란 삼유가 공한 것이고, 육도의 모습이 공한 것이며, 법상이 공한 것이고, 명상이 공한 것이며, 심식의 뜻이 공한 것이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공은 공이면서 공에 집착하지 않고 공이면서 공상空相이 없다. 이처럼 무상無相한 법에 어찌 집착함과 버림이 있겠는가.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곧 삼공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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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9_a_01L無上菩提。是義出華嚴經發心功德
001_0639_a_02L品也。上來諸文。每言決定性故。何
001_0639_a_03L故此中。乃言無決定性。是不相違。
001_0639_a_04L所以然者。無決定義。無改定故。
001_0639_a_05L爾時衆中。有一菩薩。名曰大力。卽從
001_0639_a_06L座起。前白佛言。尊者。如如一本
如佛所說。 [63]
001_0639_a_07L五空出入。無有取捨。云何五空而不
001_0639_a_08L取捨。
001_0639_a_09L此下第二廣顯道理。於中卽以四門
001_0639_a_10L分別。一顯實際義。二明趣入義。三
001_0639_a_11L開入之階位。四示入之方便。初中亦
001_0639_a_12L四。一1)明 [21] 五空。二明三空。三明空是
001_0639_a_13L眞。四明眞是如。初中有二。先問後
001_0639_a_14L答。問者名大力者。此人得入實際
001_0639_a_15L法門。遍周法界。無所不爲。得大自
001_0639_a_16L在。故名大力。故於是門。開發顯揚。
001_0639_a_17L言如如者。佛所說言。契當如理故。
001_0639_a_18L前如是當義。後如是道理。先領後問。
001_0639_a_19L問2)有 [22] 二義。一問五空法門。二問無
001_0639_a_20L取捨義。
001_0639_a_21L佛言。菩薩。五空者。三有是空。六道影
001_0639_a_22L是空。法相是空。名相是空。心識義是
001_0639_a_23L空。菩薩。如是等空。空不住空。空無空
001_0639_a_24L相。無相之法。有何取捨。入無取地。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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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9_b_01L논 이것은 차례에 따라 앞의 두 가지 질문에 답변한 대목이다.
(가) 첫째의 질문에 대한 답변
“오공五空”은 곧 세 가지 진여를 드러낸 것이다.126)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이고, 둘째는 실상진여實相眞如이고, 셋째는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뜻은 『현양성교론』에 설해져 있다.127) 오공 가운데 앞의 첫째와 둘째의 두 가지 공은 곧 앞의 (유전과 실상의) 두 가지 진여에 해당하고, 뒤의 세 가지 공은 곧 (유식의) 세 번째 진여에 해당한다.128) 이들은 무슨 뜻인가.첫째 “삼유가 공하다.”는 것은 삼유의 애착을 말미암아 삼계에 유전하는데, 삼계에 유전해도 전·후에 자성이 없고 찰나도 집착이 없는 공으로서 무소득이다. 이것이 유전진여문이다.둘째 “육도의 모습이 공하다.”는 것은 선업과 악업이라는 각각 두 가지 품을 말미암은 까닭에 육도의 과보가 본체와 비슷하게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모습은 본체에서 떠나 있지 않는 공으로서 무소득이다. 이것이 실상진여문이다.셋째 (법상이 공한 것과 명상이 공한 것과 심식의 뜻이 공한 것의) 세 가지는 유식진여이다. 여기에서 앞의 두 가지에 해당하는 법상과 명상은 집착의 대상(所取)인 의義와 명名을 없앤 것인데, 명과 의는 서로 객체의 입장으로 실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식은 능취能取인 심식을 없앤 것인데, 능과 소가 서로 대비되어 독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식의 도리는 들어가기가 가장 어렵기 때문에 우선 삼공을 열어 그 능·소를 없애는데, 능·소가 공해져야 비로소 무분별을 터득할 수가 있다.
(나) 둘째의 질문에 대한 답변
“보살이여” 이하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것이다.“이와 같은 공”은 오공을 총체적으로 들어서 그 이理와 지智를 변별한 것이다.“공이면서 공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의 지智는 집착이 없어서 이理와 평등하다는 것이다.“공이면서 공상이 없다.”는 것은 공의 이치는 무상無相하여 지智와 평등한 것이다. 이처럼 이와 지가 평등하여 능상과 소상이 없는데 어찌 그간에 집착함과 버림을 담고 있겠는가. 그러므로 중도에 들어가는 것은 곧 삼공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집착함이 없는 경지”란 곧 십지十地를 가리킨다.
나. 삼공三空을 설명함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그러면 삼공三空이란 무엇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삼공이란 공상空相도 또한 공한 것이고, -
001_0639_b_01L入三空。
001_0639_b_02L如其次第答前二問。五空卽顯三
001_0639_b_03L種眞如。何等爲三。一流轉眞如。二
001_0639_b_04L實相眞如。三唯識眞如。是義具如顯
001_0639_b_05L揚論說。此中前二空。卽前二眞如。
001_0639_b_06L後三空是第三眞如。是義云何。初
001_0639_b_07L三有是空者。由三有愛。流轉三界。
001_0639_b_08L三界流轉。無前後性。刹那無住。空
001_0639_b_09L無所得。卽是流轉眞如門也。第二六
001_0639_b_10L道影是空者。由善惡業。各二品故。
001_0639_b_11L六道果報。似本現影。影無離本。空
001_0639_b_12L無所得。卽是實相眞如門也。後三唯
001_0639_b_13L識眞如門者。前二是遣所取義名。名
001_0639_b_14L義互客。不成實故。後一是遣能取心
001_0639_b_15L識。能所相待。不獨立故。唯識道理。
001_0639_b_16L最難可入。故開三空。遣其能所。能
001_0639_b_17L所空故。得無分別。菩薩已下。答第
001_0639_b_18L二問。如是等空者。摠擧五空。辨其
001_0639_b_19L理智。空不住空者。空智無住。與理
001_0639_b_20L平等故。空無空相者。空理無相。與
001_0639_b_21L智平等故。理智平等。無能所相。何
001_0639_b_22L容取捨於其間哉。所以入中。卽入三
001_0639_b_23L空。無取地者。謂十地也。
001_0639_b_24L大力菩薩言。云何三空。佛言。三空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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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39_c_01L공공空空도 또한 공한 것이며, 소공所空도 또한 공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공은 공상·공공·소공의 세 가지 모습에 집착이 없어서 진실하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글과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또 불가사의하다.”129)
논 이 하나의 문답은 삼공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공상도 또한 공한 것이다.”에서 ‘공상’은 속제를 없애고 진제를 드러낸 것으로 평등한 상이고, ‘또한 공한 것이다.’는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은 것이다.“공공”의 뜻은 마치 진금을 녹여서 장엄구를 만드는 경우와 같다. 『열반경』에서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말하고,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말한다.”130)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것은 속제의 유무·시비의 차별상이 곧 공공의 뜻임을 설명한 것이다. 평등공을 공하다고 한 것은 속제의 차별을 드러낸 것이므로 그 차별을 공공이라 말한다.“공공도 또한 공한 것이다.”라는 것에서 ‘공공’은 곧 속제의 차별이고, ‘또한 공한 것이다.’는 다시 속제를 융합하여 진제로 삼은 것이니, 마치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덩어리로 만드는 것과 같다.셋째에서 말한 “소공所空도 또한 공하다.”는 것은 첫째 공문 안에서의 공은 속제를 드러낸 것이고, 둘째 공 가운데서의 공은 진제를 드러낸 것인데, 이 둘은 무이無二이기 때문에 ‘또한 공하다.’라고 하였다.이것은 이제를 융합하여 일법계를 드러낸 것이니, 일법계란 일심이다. 그러나 첫째의 공문 안에서 없앤 속제는 곧 변계소집상이고, 둘째의 공 가운데서 융합한 속제는 의타기상이다.131) 속제에 두 가지 상이 있으므로 없애는 것과 융합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다.또한 첫째의 공문 안에서 속제를 없애고 드러낸 진제, 그리고 둘째의 공 가운데서 속제를 융합하여 드러낸 진제의 경우, 이 두 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뿐이고 둘은 없으니, 진제는 오직 한 가지 곧 원성실성뿐이다. -
001_0639_c_01L空相亦空。空空亦空。所空亦空。如是
001_0639_c_02L等空。不住三相。不無眞實。文言道斷。
001_0639_c_03L不可思議。
001_0639_c_04L此一問答。是明3)二 [23] [64] 空。空相亦空者。
001_0639_c_05L空相卽是遣俗顯眞。平等之相亦空。
001_0639_c_06L卽是融眞爲俗。空空之義。如銷眞金
001_0639_c_07L作莊嚴具。如涅槃經言。是有是無。
001_0639_c_08L是名空空。是是非是。是名空空。是
001_0639_c_09L明俗諦有無是非差別之相。是空空
001_0639_c_10L義。空於平等空。顯俗差別故。故此
001_0639_c_11L差別。名爲空空。空空亦空者。空空
001_0639_c_12L卽是俗諦差別。亦空 [65] 還是融俗爲眞
001_0639_c_13L也。如銷嚴具。還爲金缾。第三中。言
001_0639_c_14L所空亦空者。謂初空中。空所顯俗。
001_0639_c_15L第二空中。空所顯眞。此二無二。故
001_0639_c_16L言亦空。是融一諦。顯一法界。一
001_0639_c_17L法界者。所謂一心。然初空門內。所
001_0639_c_18L遣俗者。是所執相。第二空中。所融
001_0639_c_19L俗者。是依他相。俗有4)二 [24] 種相故。
001_0639_c_20L所遣所融非一也。又初門內。遣俗
001_0639_c_21L所顯之眞。第二空中。融俗所顯之
001_0639_c_22L眞。此二門眞。唯一無二。眞唯一
001_0639_c_23L「明」作「名」{甲}。「有」作「其」{甲}。「二」疑
001_0639_c_24L「三」{編}。「二」作「一」{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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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0_a_01L그러므로 없애고 융합하여 드러낸 것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셋째 공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또한 이 삼공에서 첫째의 공은 속제의 중도를 드러내고, 둘째의 공은 진제의 중도를 드러내며, 셋째의 공은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며 변邊도 없고 중中도 없는 중도의 뜻이다.“이와 같은 공”이란 말은 삼공을 총체적으로 든 것이다. 곧 속제의 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진제의 상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속제와 진제가 없는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이기 때문에 “공상·공공·소공의 세 가지 모습에 집착이 없다.”고 하였다.이와 같이 집착이 없어 구경에 실제를 드러내므로 “진실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비록 진실하지 않음이 없을지라도 실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글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표현할 수 없다는 말도 또한 어디에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또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다. 공空이 진眞임을 설명함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그처럼 진실이 없지 않다면 그것은 곧 유에 상응할 것입니다.”
논 이하는 셋째로132) 공에는 진실이 없지 않지만 진실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을 설명한 것이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질문한 뜻은 다음과 같다. “무릇 유라든가 무라는 말에는 반드시 상대성이 있다. 그래서 유가 아니라면 반드시 무이고 무가 아니라면 반드시 유이다. 그러므로 만약 진실의 도리가 없지 않다고 말한다면 곧 마땅히 그것은 진실의 도리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무릇 모든 수행자가 매양 이와 같이 계탁하기 때문에 그 집착을 없애 주기 위하여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나) 답변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무라 해도 무에 집착이 없어서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다. 유의 법이 아니라고 해서 무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무라는 분별상이 아니라고 해서 유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유·무를 가지고 설명하거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살이여, 명칭(名相)도 없고 뜻(義相)도 없어서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명칭이 없는 명칭이지만 명칭 아님이 없고, 뜻이 없는 뜻이지만 뜻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논 답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장 답변하고, 둘째는 심오함을 찬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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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0_a_01L種圓成實性。所以遣融所顯唯一。第
001_0640_a_02L三空者。非眞非俗。非二非一。又此
001_0640_a_03L1)三 [25] 空。初空顯俗諦中道。次空顯眞
001_0640_a_04L諦中道。第三空顯非眞非俗無邊無
001_0640_a_05L中之中道義。言如是等空者。摠擧三
001_0640_a_06L空。不住俗相。不住眞相。亦不住於
001_0640_a_07L無二之相。故言不住三相。如是不住
001_0640_a_08L究竟顯實故。言不無眞實。雖不無實
001_0640_a_09L而非有實。由如是故。文言道斷。道
001_0640_a_10L斷之言。亦不可寄故。亦說言不可思
001_0640_a_11L議。
001_0640_a_12L大力菩薩言。不無眞實。是相應有。
001_0640_a_13L此下第三明空不無眞而不有眞義。
001_0640_a_14L先問後答。問意而言。凡言有無。必
001_0640_a_15L也相對。不有必無。不無卽有。若言
001_0640_a_16L不無眞實之理。則應是有眞實之理。
001_0640_a_17L凡諸學者。每作是計。爲遣彼執。故
001_0640_a_18L作是問。
001_0640_a_19L佛言。無不住無。不無不有不無不有。一本
作。有不住有。 [66]
001_0640_a_20L不有之法。不卽住無。不無之相。不卽
001_0640_a_21L住有。非以有無。而詮得理。菩薩。無名
001_0640_a_22L義相。不可思議。何以故。無名之名。不
001_0640_a_23L無於名。無義之義。不無於義。
001_0640_a_24L答中有二。一者正答。二者歎深。初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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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0_b_01L(가) 곧장 답변함
첫째에서 “무라 해도 무에 집착이 없어서”라는 것은 앞서 말한 “진실이 없지 않다.”는 구절 중의 ‘없다(無)’는 명칭이 없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이런 까닭에 없지 않다는 명칭이 있다는 뜻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로써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명칭이 없는 명칭을 뜻이 있다는 뜻에 해당시킬 수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유의 법이 아니라고 해서 무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비록 속제를 융합하여 진제로 삼았지만 진제가 없다는 법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무라는 분별상이 아니라고 해서 유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비록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았지만 속제가 있다는 모습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이처럼 진제와 속제는 유·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는 진실의 무이도리無二道理가 없지 않고, 진제와 속제는 이제가 없지 않다는 입장에서는 진실의 무이도리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유·무를 가지고 설명하거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뜻이 없는 뜻은 명칭이 있는 명칭에 칭합할 수 없음을 설명한 것이다.
(나) 심오함을 찬탄함
“보살이여” 이하는 둘째의 심오함을 찬탄한 대목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대로 찬탄하고,133) 둘째는 찬탄을 해석한다.134)
㉮ 그대로 찬탄함
“명칭이 없는 명칭이지만 명칭 아님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명칭은 뜻이 있다는 뜻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명칭이 없는 명칭’이 되지만, 뜻이 없는 뜻에 해당하기 때문에 ‘명칭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 찬탄을 해석함
“뜻이 없는 뜻이지만 뜻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뜻은 명칭이 있다는 명칭에 칭합되지 않기 때문에 ‘뜻이 없는 뜻’이 되지만, 명칭이 없다는 명칭에 칭합되기 때문에 ‘뜻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이와 같이 명칭과 뜻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또한 명칭과 뜻이 그대로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도리로 인해 불가사의한 것이다.
라. 진眞이 여如임을 설명함
이하는 넷째로 진眞은 여如가 아니지만 여의 뜻 아님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다.135) -
001_0640_b_01L言無不住無者。先言不無眞實句中。
001_0640_b_02L謂無之名。不住無義。是故不無之名。
001_0640_b_03L亦不當於有義。以之故言不無不有。
001_0640_b_04L是明無名之名。不當有義之義。不有
001_0640_b_05L之法。不卽住無者。雖融俗爲眞。而不
001_0640_b_06L守眞無之法故。不無之相。不卽住有
001_0640_b_07L者。雖融眞爲俗。而不守俗有之相故。
001_0640_b_08L以眞俗不住有無故。不無眞實無二
001_0640_b_09L之理。眞俗不無二諦故。不有眞實無
001_0640_b_10L二之理。故言非以有無而詮得理。是
001_0640_b_11L明無義之義。不稱有名之名。菩薩已
001_0640_b_12L下。第二歎深。於中有二。直歎。釋歎。
001_0640_b_13L無名之名。不無於名者。佛所說名。
001_0640_b_14L不當有義之義故。爲無名之名。而當
001_0640_b_15L無義之義。故言不無於名也。無義之
001_0640_b_16L義不無於義者。佛所體義。不稱有名
001_0640_b_17L之名故。爲無義之義。而稱無名之名。
001_0640_b_18L故言不無於義也。如是不有名義而
001_0640_b_19L亦不無名義。由是道理。不可思議也。
001_0640_b_20L大力菩薩言。如是名義。眞實如相。如
001_0640_b_21L來如相。如不住如。如無如相。相無如
001_0640_b_22L故。非不如來。衆生心相。相亦如來。衆
001_0640_b_23L生之心。應無別境。
001_0640_b_24L此下第四明眞不有如而無不如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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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0_c_01L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그와 같은 명칭과 뜻은 진실여眞實如이고 진실상眞實相이며, 여래여如來如이고 여래상如來相으로서 그 여如는 여如 자체에도 집착이 없습니다. 이에 여에는 여라는 상이 없고, 상에는 여가 없기 때문에 여래 아님이 없습니다. 중생심과 중생상의 경우에도 그 상이 또한 여래이듯이 중생의 마음도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어야 합니다.”
논 질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도리를 내세우고, 둘째는 의심나는 바를 묻는다.
(가) 도리를 내세움
“그와 같은 명칭과 뜻”이란 저 앞에서 설한 불가사의한 명칭(名相)과 뜻(義相)을 가리킨다. 명칭과 뜻이 서로 칭합되어 전도顚倒가 없고 전변轉變이 없으므로 ‘진실’이라 한다.이와 같이 명칭과 뜻이 능과 소를 멀리 떠나 있어 일미평등하기 때문에 “진실여眞實如의 모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이와 같이 명칭과 뜻이 평등여平等如이고 평등상平等相으로서 제불여래께서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여如來如이고 여래상如來相이다.”라고 하였다.“여如는 여如 자체에도 집착이 없다.”는 것은 명칭을 붙일 수 없는 여의 명칭은 그러한 것이 없다는 여의 뜻에 해당함을 설명한 것이다.“여에는 여라는 상이 없고, 상에는 여가 없다.”는 것은 여如와 상相이 없는 여와 상이어야 명칭이 없는 여의 명칭에 칭합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칭합되고 해당되어 능과 소가 평등하기 때문에 명칭과 뜻은 여래 아님이 없다.“상에는 여가 없다.”는 것은 여如와 상相에는 여와 상과 같음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모습 없음(無相)을 모습(相)으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에는 여라는 상이 없다.”는 것은 여의 무상無相이란 있을 수가 없음을 설명한 것이고, “상에는 여가 없다.”는 것은 무상의 여란 있을 수가 없음을 설명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여의 자체(體)와 모습(相)은 비록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또한 여의 자체와 모습이 없지는 않다. 이와 같이 여와 상이 없는 여이고 상이어야 비로소 명칭이 없는 명칭에 칭합된다.“중생심과 중생상의 경우에도 그 상이 또한 여래이다.”라는 것은 모든 중생의 분별심과 분별상에서 분별심과 분별상이 곧 분별심과 분별상이 아니므로 평등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저 중생의 분별심과 분별상 또한 여래이다. 이상은 첫째의 평등의 도리를 바로 내세운 것에 해당한다.
(나) 의심나는 것을 물음
다음으로 “중생의 마음도 마땅히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닙니다.”라는 것은 둘째의 의심나는 것을 물은 것이다. 곧 중생심과 중생상이 이미 여래라면 중생심은 다른 경계가 아니어야 한다.“다른 경계가 아니다.”라는 것은 곧 분별이 없는 것이다. 분별이 없으므로 염오가 없어야 하고, 염오가 없기 때문에 삼계가 없다. -
001_0640_c_01L於中有二。先問。後答。問中亦二。先
001_0640_c_02L立道理。後問所疑。言如是名義者。
001_0640_c_03L如前所說不可思議之名義相。名義
001_0640_c_04L相稱。無倒無變。故名眞實。如是名義。
001_0640_c_05L遠離能所。一味平等。故名如相。如
001_0640_c_06L是名義。平等如相。諸佛如來所體。
001_0640_c_07L故言如來如相。如不住如者。是明無
001_0640_c_08L名之如名當於無如之如義。如無如
001_0640_c_09L相相無如故者。無如相之如相稱於
001_0640_c_10L無名之如名。如是稱當能所平等故。
001_0640_c_11L若名若義非不如來也。相無如者。
001_0640_c_12L如相無如。如相正是無相爲相。當
001_0640_c_13L知如無如相是明不有如之無相。相
001_0640_c_14L無如者。是明不有無相之如。如之體
001_0640_c_15L相雖是不有而亦不無如之體相。
001_0640_c_16L如是無如相之如相方稱無名之如
001_0640_c_17L名也。衆生心相相亦如來者。謂諸衆
001_0640_c_18L生分別心相。相卽非相。無不平等。
001_0640_c_19L是故彼相亦是如來。上來正立平等
001_0640_c_20L道理。次言衆生之心應無別境者。是
001_0640_c_21L問所疑。衆生心相。旣是如來。則衆
001_0640_c_22L生心。應無別境。無別境者。卽無分
001_0640_c_23L別。無分別故。應無染汚。無染汚故。
001_0640_c_24L「三」作「一」{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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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1_a_01L이런 의심이 일어나는 까닭에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나) 답변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렇다. 중생의 마음은 실로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고, 그 도리로 보면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뇌에 오염되므로 삼계라 말하는데, 그 삼계의 마음을 여래와 다른 경계라 말한다. 그 경계는 허망한데 마음에서 변화하여 발생한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다.”
논 이것은 의심에 답변한 것이다. 먼저 인정하고, 나중에 그것을 부정한다.
(가) 인정함
대력보살의 말을 인정한 것은 자성이 청정한 것에 따르면 본래 오염이 없기 때문이고, 부정한 것은 외부의 오염을 따르면 여래와 다른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자성이 청정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보성론』에서 경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선심도 찰나찰나 소멸하여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불선심도 찰나찰나 소멸하여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머물지 않는다. 번뇌가 마음에 닿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않는데 어떻게 법에 닿지 않고서 마음을 오염시킬 수 있겠는가. …….136)
이것이 바로 오염되었으되 오염되지 않는 문이다.그리고 “외부의(他) 오염을 따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승만부인경』에서 “자성청정심은 요지하기 어렵다. 저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오염되는 것도 또한 요지하기 어렵다.”137)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염되지 않았으되 오염되는 문이다.“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고, 그 도리로 보면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자성청정심과 본각의 도리는 모든 번뇌가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부정함
“그러나 번뇌에 오염되므로 …….” 이하는 그 질문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첫째는 번뇌에 오염된 불각을 드러내고, 둘째는 불각에 상대하여 시각을 간략하게 보여 준다.
㉮ 번뇌에 오염된 불각을 드러냄
불각을 말한 가운데 “그러나 번뇌에 오염되므로 삼계라 말한다.”는 것에서 주지번뇌住持煩惱는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138)이다. 이 주지번뇌 때문에 삼계의 애착을 일으키고, 삼계의 애착 때문에 삼계의 망심이 발생하며, 이 망심을 말미암아 허망한 경계를 변작變作한다. 이런 까닭에 “마음에서 변화하여 발생한다.”고 하였다.
㉯ 불각에 상대하여 시각을 간략하게 보여 줌
다음으로 시각을 설명한다.“그러므로 만약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이란 도리에 의거하여 관觀을 행하면 -
001_0641_a_01L卽無三界。有作是疑。故作是問。
001_0641_a_02L佛言。如是。衆生之心。實無別境。何以
001_0641_a_03L故。心本淨故。理無穢故。以染塵故。名
001_0641_a_04L爲三界。三界之心。名爲別境。是境虛
001_0641_a_05L妄。從心化生。心若無妄。卽無別境。
001_0641_a_06L是答所疑。先與。後奪。與者。就自性
001_0641_a_07L淨。本無染故。奪者。約隨他染。有別
001_0641_a_08L境故。自性淨者。如寶性論引經說言。
001_0641_a_09L善心念念滅不住。非煩惱所染。不善
001_0641_a_10L心念念滅不住。非煩惱所染。煩惱不
001_0641_a_11L觸心。心不觸煩惱。云何不觸法。而
001_0641_a_12L能得染心。乃至廣說故。卽是染而不
001_0641_a_13L染門也。隨他染者。夫人經言。自性
001_0641_a_14L淸淨心。難可了知。彼心爲煩惱所染。
001_0641_a_15L亦難可了知。卽是不染而染門也。心
001_0641_a_16L本淨故理無穢故者。自性淨心本覺
001_0641_a_17L之理。非諸塵穢之所入故。以染塵下
001_0641_a_18L奪其所問。於中先顯不覺染塵。後對
001_0641_a_19L不覺略示始覺。不覺中言以染塵
001_0641_a_20L故名爲三界者。住地煩惱。略有三種。
001_0641_a_21L謂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
001_0641_a_22L以此住地。起三界愛。三界愛故。三
001_0641_a_23L界心生。由是妄心。變作虛境。以之故
001_0641_a_24L言從心化生。次明始覺。心若無妄者。
-
001_0641_b_01L망심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곧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다.”라는 것은 허망하게 일어난 경계는 마음을 따라 소멸되기 때문이다.이상의 네 가지 문을 합하면 ‘첫째 실제의 뜻을 널리 펼친 것’에 해당한다.139)
② 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침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만약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경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청정해졌을 경우에는 마땅히 삼계도 없겠습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렇다, 보살이여. 마음도 경계를 발생하지 않고 경계도 마음을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경계는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환화가 없으면 곧 나타나는 경계도 없다.
논 이하는 둘째140)로 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친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것을 총론적으로 설명하고, 둘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것을 개별적으로 드러내며, 셋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주체가 허물(過)을 떠나 있다는 것이고,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객체가 변견(邊)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
가. 실제에 들어감을 총론적으로 설명함
첫째의 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질문에서 “그 마음이 청정해졌을 경우에는 마땅히 삼계도 없겠습니다.”라는 것은 초지 이상에서는 본래 청정을 증견證見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로 삼계가 소멸하여 없다는 것이다. 삼계의 현상(事相)은 초지나 제8지에서 소멸하여 없어지고, 삼계의 자성은 등각위等覺位에서 소멸하여 없어지며, 삼계의 습기는 묘각위妙覺位에 도달해야 비로소 소멸하여 없어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뜻은 『이장장』에서 설한 것과 같다.141)
나) 답변
답변에서 총론적으로 긍정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삼계가 소멸하여 없어질 때에는 마음과 경계가 모두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마음이 망견으로 경계를 만들어 낸 것일 뿐, 마음에 망견이 없을 때에는 경계를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경계가 없으므로 마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나. 실제에 들어감을 개별적으로 드러냄
경 그러므로 보살이여, 마음속에 중생이 없어야 삼성이 공적해진다. 그러면 자기의 중생도 없고, 타인의 중생도 없으며, 내지 이입二入142)도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 마음에 이와 같은 본각의 이익(本利)을 터득해야 곧 삼계가 없다.”
논 이하는 둘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을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
001_0641_b_01L依理觀行。妄心不生故。卽無別境者。
001_0641_b_02L妄作境界。隨心滅故。上來四門。合
001_0641_b_03L爲第一廣實際義。
001_0641_b_04L大力菩薩言。心若在淨。諸境不生。此
001_0641_b_05L心淨時。應無三界。佛言。如是。菩薩。心
001_0641_b_06L不生境。境不生心。何以故。所見諸境。
001_0641_b_07L唯所見心。心不幻化。卽無所見。
001_0641_b_08L此下第二廣趣入義。於中有四。一者
001_0641_b_09L摠明趣入。二者別顯趣入。三者入之
001_0641_b_10L離過。四者入之離邊。初中有二。先
001_0641_b_11L問。後答。問中言。此心淨時應無三界
001_0641_b_12L者。初地已上。證見本淨故。隨所應
001_0641_b_13L得。三界滅無。三界事相者。或於初
001_0641_b_14L地。或第八地。而得滅無。三界自性
001_0641_b_15L者。等覺位中。而得滅無。三界習氣。
001_0641_b_16L至妙覺位。方得滅無。此義具如二障
001_0641_b_17L章說。答中摠許。故言如是。三界滅
001_0641_b_18L無時。心境不相生。所以然者。唯心
001_0641_b_19L妄見。變作境界。心無妄時。則不作
001_0641_b_20L境。境界無故。不生心也。
001_0641_b_21L菩薩。內無衆生。三性空寂。則無己衆。
001_0641_b_22L亦無他衆。乃至二入亦不生。心得如
001_0641_b_23L是利。卽無三界。
001_0641_b_24L此下第二別明趣入。於中有二。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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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1_c_01L첫째는 총론적으로 법수를 들어 설명하고, 둘째는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드러낸다.
가) 총론적으로 법수를 들어 설명함
이는 첫째의 총론적으로 법수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마음속에 중생이 없다.”는 것은 십주위十住位에서 안으로 인공을 터득한 것이다.“삼성이 공적해진다.”는 것은 십행위十行位에서 안으로 법공法空을 터득한 것이다.“그러면 자기의 중생도 없고 타인의 중생도 없어진다.”는 것은 십회향위十廻向位에서 평등공平等空을 터득하여 널리 자타自他·인법人法의 모든 것(衆)을 없앤 것이다. ‘모든 것(衆)’은 중생은 중衆이라 하고, 오음의 법은 또한 오중五衆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143)은 모두 상사공相似空으로 아직은 진정한 증득이 아니다.“내지 이입二入”은 지전위地前位와 지상위地上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법수를 통틀어 열거한 것이다.
나)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드러냄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이입二入이 마음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도 본래 발생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입入이 있겠습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이입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은 다음과 같다.곧 중생이 지니고 있는 진성은 여래와 다르지 않아서 이에 동일하지 않고(不一) 같지도 않지만(不共) 단지 객진번뇌에 휩싸여 있을 뿐임을 깊이 믿는 것이고, 또한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각覺·관觀(麤煩惱와 細煩惱)을 응주하며, 또한 불성은 유도 아니고(不有) 무도 아니며(不無), 또한 자기도 없고(無己) 남도 없으며(無他), 범과 성이 불이不二임을 금강심지에 견주堅住하여 불이不移임을 제대로 관찰한다. 이와 같이 적정한 무위가 되어 분별이 없게 되는 것을 이입이라 말한다.
논 이하는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144)
(가) 질문
질문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묻고, 나중에 따진다.
(나) 답변
답변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답변하고, 나중에 회통시킨다.
㉮ 답변
답변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수를 표시하고, 둘째는 명칭을 나열하며, 셋째는 차례대로 법상을 변별한다.
a. 법수를 표시함
이 가운데 “이입”은 도리에 따라 신해信解하지만 아직 증득한 수행(證行)을 터득하지 못한 것이므로 이입이라 한다. 이것은 지전위地前位에 해당한다. “행입”은 도리를 증득한 뒤 수행하여 무생행에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 이것은 지상위地上位에 해당한다.
b. 명칭을 나열함
a) 이입理入
이입理入에 대한 경문에 네 구절이 있다.“중생이 지니고 있는 …… 깊이 믿는 것이다.”라는 것은 십신위十信位에 들어간 것이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중생상이 진성과 다르지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
001_0641_c_01L者摠標擧數。二者問答別顯。此是初
001_0641_c_02L文。內無衆生者。謂十住位。得內人
001_0641_c_03L空故。三性空寂者。十行位中。得內
001_0641_c_04L法空故。則無己衆亦無他衆者。十廻
001_0641_c_05L向位。得平等空。遍遣自他人法衆故。
001_0641_c_06L所言衆者。衆生名衆。五陰之法。亦
001_0641_c_07L名五衆故。是相似空。未得眞證。乃
001_0641_c_08L至二入者。通擧地前地上入數。
001_0641_c_09L大力菩薩言。云何二入不生於心。心
001_0641_c_10L本不生。云何有入。佛言。二入者。一謂
001_0641_c_11L理入。二謂行入。理入者。深信衆生不
001_0641_c_12L異眞性。不一不共。但以客塵之所翳障。
001_0641_c_13L不去不來。凝住覺觀。諦觀佛性。不有
001_0641_c_14L不無。無己無他。凡聖不二。金剛心地。
001_0641_c_15L堅住不移。寂靜無爲。無有分別。是名
001_0641_c_16L理入。
001_0641_c_17L此下問答別顯。問中有二。先問。後難。
001_0641_c_18L答中亦二。先答。後通。答中有三。牒
001_0641_c_19L數。列名。次第辨相。此中理入者。順
001_0641_c_20L理信解。未得證行。故名理入。位在
001_0641_c_21L地前。行入者。證理修行。入無生行。
001_0641_c_22L故名行入。位在地上。理入文中。有
001_0641_c_23L其四句。深信已下。乃至翳障。是十
001_0641_c_24L信入。不一者。謂衆生相。不異眞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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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2_a_01L“같지도 않다.”는 것은 같지도 않고 또한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다.“감도 없고 옴도 없는 각·관을 응주한다.”는 것은 십주위十住位에 들어간 것이다. 중생이 공하다는 것을 깨쳤기 때문에 오거나 감이 없다. 곧 인공문에 들어가서 그 마음을 고요하게 머물러서 불성에는 오고 감이 없음을 알아서 살피는 것이다.“불성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을 제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십행위十行位에 들어간 것이다. 곧 이미 법공을 터득하고 그 법공문에 의하여 불성에는 법상이 없고 공성이 없지 않음을 제대로 살피는 것이다.“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범과 성이 불이임을 ……”이라는 것은 십회향위十廻向位를 설명한 것이다.이처럼 이입은 이미 자타가 평등한 공을 터득했기 때문에 마음이 금강처럼 굳게 머물러 물러남이 없다. 『범망경』에서 말한 십금강十金剛145)과 『인왕경』에서 말한 십견심十堅心146)은 곧 십회향의 다른 명칭이다.
b) 행입行入
경 행입은 다음과 같다.마음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마음의 모습은 흐르거나 변역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망념이 고요해지고 추구함이 없어서 팔풍에 흔들리지 않으니, 마치 대지와 같다. 분별심(心)을 없애고 망아妄我를 떠나 있으므로, 중생을 제도하되 마음도 발생하지 않고(無生) 경계의 모습도 없으며(無相) 집착(取)도 없고 저버림(捨)도 없다.
논 이는 지상地上에서 증입하는 수행을 설명하는 것이다.“마음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여리지如理智의 마음은 대상이 없으므로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마음의 모습은 흐르거나 변역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리지의 경계가 삼제三際를 떠나 있으므로 흐르거나 변역의 경계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일체세간의 복락 내지 보리의 대열반과大涅槃果 등 일체에 대하여 다 원구願求가 없고 평등平等에 통달하여 피·차가 없기147) 때문에 경계의 팔풍八風148)에 흔들림이 없는 것은 자리의 행입을 설명한 것이다.“분별심을 없애고 아를 떠나 있으므로 ……”는 남으로 하여금 수행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아공과 법공을 증득하여 -
001_0642_a_01L而非一故。不共者。非亦一亦異故。
001_0642_a_02L第二句言。不去不來凝住覺觀者。是
001_0642_a_03L十住入。悟衆生空故不來去。於人空
001_0642_a_04L門。靜住其心。覺察佛性。無去來故。
001_0642_a_05L第三句言。諦觀佛性不有不無者。是
001_0642_a_06L十行入。已得法空。依法空門。諦觀
001_0642_a_07L佛性。不有法相。不無空性故。第四
001_0642_a_08L句言。無己無他凡聖不二等者。是明
001_0642_a_09L十廻向位。理入已得自他平等空故。
001_0642_a_10L心如金剛。堅住不退。梵網經中。名
001_0642_a_11L十金剛。仁王經中。名十堅心。是十
001_0642_a_12L廻向之異名也。
001_0642_a_13L行入者。心不傾倚。影無流易。於所有
001_0642_a_14L處。靜念無求。風鼓不動。猶如大地。捐
001_0642_a_15L離心我。救度衆生。無生無相。不取不
001_0642_a_16L捨。
001_0642_a_17L是明地上證入之行。心不傾倚者。如
001_0642_a_18L理智心。不攀緣故。攀緣之心。不生起
001_0642_a_19L故。影無流易者。如理之境。離三際
001_0642_a_20L故。流變境像。不復現故。所有一切
001_0642_a_21L世間福樂。乃至菩提大涅槃果。於是
001_0642_a_22L一切。皆無願求。通達平等。無此彼
001_0642_a_23L故。故非境界風所鼓動。是明自利行
001_0642_a_24L入。捐離己下。令他入行。以證二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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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2_b_01L인상과 법상을 떠나 있는 까닭에 널리 일체를 제도할 수가 있다. 비록 마음도 발생하지 않고 경계의 모습도 없지만 그 적멸149)한 자성에 집착하지도 않고 늘상 일체중생을 저버리지도 않는다. 이런 까닭에 “집착도 없고 저버림도 없다.”고 하였다.
c. 차례대로 법상을 변별함
이와 같은 자리행과 이타행을 행입이라 한다.
㉯ 힐난을 회통함
경 보살이여, 마음에는 나고 듦이 없다. 나고 듦이 사라진 마음이라야 비로소 나고 듦이 없는 마음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입入150)이라 한다.
논 이는 둘째로 저 힐난한 바를 회통시키는 것이다.도리를 증득한 마음은 생멸을 멀리 떠나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마음에 나고 듦이 없다. 나고 듦이 없으면 또한 옛적에 나고 들었던 마음도 없기 때문에 나고 듦이 사라진 마음이 된다. 옛적에 있던 나고 듦의 마음을 제거해야만 그 나고 듦이 없는 마음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로소 나고 듦이 없는 마음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입入151)이라 한다.”고 하였다.이와 같이 앞의 힐난을 잘 회통시킨다.
다. 실제에 들어가는 주체가 허물을 떠나 있음
경 보살이여, 이와 같이 실제에 들어간 법은 그 법상이 텅 비어 있지 않다. 텅 비어 있지 않는 법이야말로 그 법은 허망하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허망하게 없어지지 않는 법에는 공덕이 구족되어 있어 주체의 마음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도 아니어서 법이法爾하게 청정하기 때문이다.”
논 이하는 셋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주체가 허물(過)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152)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둘째는 자세하게 해석한다.
가) 간략하게 설명함
이는 첫째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실제에 들어간 법”은 실제에 들어가 나고 듦이 없는 법을 말한다.이 “허망하게 없어지지 않는 법”은 주체(能)와 대상(所)에 평등하고,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떠나 있으며, 모든 공덕을 구족하고 있다.“주체의 마음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도 아니다.”라는 것은 마음과 경계가 평등하여 주체와 대상의 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법이法爾하게 청정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모든 분별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나) 자세하게 해석함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주체의 마음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도 아니어서 법이하게 청정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공적하고 여여한 법은 심식의 법도 아니고 마음으로 만들어진 법도 아니며, 공상의 법도 아니고 색상의 법도 아니며, 심불상응의 법도 아니고 -
001_0642_b_01L離人法相故。能普遍救度一切。雖心
001_0642_b_02L無生。亦無境相。而不取其寂滅之性。
001_0642_b_03L恒不捨於一切衆生。以之故言不取
001_0642_b_04L不捨。如是二行。名爲行入。
001_0642_b_05L菩薩。心無出入。無出入心。入不入故。
001_0642_b_06L故名爲入。
001_0642_b_07L此是第二通彼所難。證理之心。遠離
001_0642_b_08L生滅。無始無終故。心無出入。無出
001_0642_b_09L入已。亦無昔日出入之心故。無出入
001_0642_b_10L心。去昔有出入心。入此不出入心故。
001_0642_b_11L言入不入故。故名爲入。如是前難得
001_0642_b_12L善通也。
001_0642_b_13L菩薩。如是入法。法相不空。不空之法。
001_0642_b_14L法不虛1)棄。 [26] 何以故。不無之法。具足功
001_0642_b_15L德。非心非影。法爾淸淨。
001_0642_b_16L此下第三能入離過。於中有二。略明。
001_0642_b_17L廣釋。此卽略明。如是入法者。謂入
001_0642_b_18L實際無出入法。是不無法。能所平等。
001_0642_b_19L離諸過患。具諸功德。非心非影者。
001_0642_b_20L心境平等。離能所故。法爾淸淨者。
001_0642_b_21L無始無終。離諸相故。
001_0642_b_22L大力菩薩言。云何非心非影法爾淸淨。
001_0642_b_23L佛言。空如之法。非心識法。非心使所
001_0642_b_24L有法。非空相法。非色相法。非心不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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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2_c_01L심무위상응의 법도 아니며, 나타나는 모습도 아니고 드러내어 보이는 것도 아니며, 자성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며, 명칭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며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뜻(義相)153)에는 진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여 아닌 법이 없고, 또한 진여 없는 곳이 없다. 진여 없는 곳(無如)이 없으므로(無有) 모든 존재는 진여의 존재(如有) 아님이 없다. 왜냐하면 뿌리(根)와 줄기(理)의 법은 뿌리도 아니고 줄기도 아니어서 모든 쟁론을 떠나 있으므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154)보살이여, 이와 같이 법이하게 청정한 법은 생에 의해 생기는 생도 아니고, 멸에 의해 소멸되는 멸도 아니다.”
논 이하는 둘째로 과過를 떠나 있음을 자세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며, 셋째는 이해이고, 넷째는 서술하여 마침이다.
((가) 질문)
(나) 답변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체의 마음도 없고 대상의 모습도 없다.”는 구절을 해석하고, 둘째는 “법이法爾하게 청정하다.”는 구절을 해석한다.
㉮ 주체의 마음도 없고 대상의 모습도 없다는 구절을 해석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제에 들어간 법은 모든 마음과 모습을 떠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둘째는 마음과 모습은 진여의 도리 아님이 없음을 설명한다.
a. 실제에 들어간 법은 모든 마음과 모습을 떠나 있음을 설명함
첫째에서 “공적하고 여여한 법”이란, 실제에 들어갈 때 모든 분별상을 떠나는 것을 공空이라 하고, 능과 소가 평등한 것을 여如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에 들어간 법은 모든 마음(心)과 마음의 모습(影)을 떠나 있다.마음과 마음의 모습의 차별에 대략 여섯 가지 짝이 있다. 첫째는 심과 심소가 짝이 되고, 둘째는 허공과 색이 짝이 되며, 셋째는 불상응행과 여러 무위無爲가 짝이 되고, 넷째는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이 짝이 되며, 다섯째는 자성과 차별이 짝이 되고, 여섯째는 명언名言과 상의相義가 짝이 된다. 이 여섯 가지 짝 가운데 첫째의 한 짝은 능연심能緣心의 부류이고, 뒤의 다섯 가지 짝은 소연영所緣影의 부류이다. 이 여섯 가지 짝을 떠나 있기 때문에 주체의 마음(心)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影)도 아니니, 차례대로 여섯 가지 짝의 구절이 있다.“심식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여덟 가지 분별식의 마음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마음으로 만들어진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여섯 가지의 심소유법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
001_0642_c_01L應法。非心無爲相應法一本云。非心有爲不
。 [67] 相應法。非心無爲是
001_0642_c_02L相應
法 非所現影。非所顯示。非自性。非
001_0642_c_03L差別。非名。非相。非義。何以故。義無 [68] 如
001_0642_c_04L故。非如之法。 [69] 亦無無如。無有無如。非
001_0642_c_05L無如有。何以故。根理之法。非理非根。
001_0642_c_06L離諸諍論。不見其相。善薩。如是淨法。
001_0642_c_07L非生之所生生。非滅之所滅滅。
001_0642_c_08L此下第一 [70] 廣釋離過。先問。次答。三領。
001_0642_c_09L四述。答中有二。先釋非心非影之句。
001_0642_c_10L後釋法爾淸淨之句。初中亦二。先明
001_0642_c_11L入法離諸心影。後明心影無非如
001_0642_c_12L理。初中言空如之法者。入實際時。
001_0642_c_13L遠離諸相曰空。能所平等曰如。如是
001_0642_c_14L入法。離諸心影。心影差別。略有六
001_0642_c_15L雙。一者。心及心所爲雙。二者。虛空
001_0642_c_16L與色爲雙。三者。不相應行及諸無爲
001_0642_c_17L爲雙。四者。影像及與本質爲雙。五
001_0642_c_18L者。自性差別爲雙。六者。名言及與
001_0642_c_19L相義爲雙。此六雙中。初之一雙。能
001_0642_c_20L緣心類。後五雙者。所緣影類。離此
001_0642_c_21L六雙。故非心影。如其次第有六雙句。
001_0642_c_22L非心識法者。以離八識心故。非心使
001_0642_c_23L所有法者。以離六位心所有法故。非
001_0642_c_24L「棄」作「弃」{甲}。
-
001_0643_a_01L“공상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색상이 없는 허공법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색상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현색顯色·형색形色·표색表色의 세 가지 색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심유위불상응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스물네 가지 불상응행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심무위불상응의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그 밖의 일곱 가지 무위법을 떠나 있기 때문인데, 이것도 결국 심에 의하여 드러난 것이므로 ‘심무위’라 하고, 세 가지 무위의 모습과 상응하는 법이므로 ‘상응법’이라 한다. 또한 세 가지 진여법155)을 떠나 있는 것이 깨달음의 문에 들어가면 세 가지 차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나타나는 모습도 아니다.”라는 것은 방편관으로 나타나는 본법本法(本質) 및 동분同分156)의 영상影像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드러내어 보이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또한 영상으로 드러내어 보인 본질의 법 곧 뼈대(骨鎖) 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자성도 아니다.”라는 것은 색色과 심心 등의 자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차별도 아니다.”라는 것은 무상無常 등의 차별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명칭도 아니다.”라는 것은 명名·구句·문文 같은 능전能詮의 모습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형상도 아니고 뜻도 아니다.”라는 것은 명名에 의해 나타나는 형상(相)과 명칭에 해당하는 뜻(義)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공적하고 여여한 법은) 무슨 까닭에 이 여섯 가지 짝의 모습을 떠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능과 소가 평등하여 무차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b. 마음과 모습은 진여의 도리 아님이 없음을 설명함
“진여 아닌 법이 없고” 이하는 둘째로 마음(心)과 마음의 모습(影)의 법은 진여의 도리 아님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다.“그러나 진여 아닌 법”은 앞에서 부정했던 여섯 가지 짝의 법상이다.“또한 진여 아님이 없다.”는 것은 진여의 도리가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진여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한 가지 존재(一有相)의 법이라도 진여의 도리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모든 존재는 진여의 존재 아님이 없다.”는 것은 설령 진여가 아닌 법이 있다면 존재가 가능하겠지만 이미 진여 아닌 법이 없으므로 존재(有)가 불가능하다.“왜냐하면” 이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뿌리(根)”는 나무의 뿌리로서 감추어진 종자에 비유된다.“줄기(理)”는 나무의 줄기로서 나타난 법에 비유된다. 마치 저 위에서 암마라의 과실을 비유한 설명과 같다.“모든 쟁론을 떠나 있으므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
001_0643_a_01L空相法者。離無色相虛空法故。非色
001_0643_a_02L相法者。離顯形表三種色故。非心不
001_0643_a_03L相應法者。離二十四不相應行故。非
001_0643_a_04L心無爲相應法者。離餘七種無爲法
001_0643_a_05L故。依心所顯故。名心無爲。三種無
001_0643_a_06L爲之相。相應法故。名相應法。亦離
001_0643_a_07L三種眞如法者。入證門中無三別故。
001_0643_a_08L非所現影者。離方便觀之所顯。現本
001_0643_a_09L法同分之影像故。非所顯示者。亦離
001_0643_a_10L影像之所顯。示本質之法骨鏁等故。
001_0643_a_11L非自性者。離色心等之自性故。非差
001_0643_a_12L別者。離無常等差別相故。非名者。
001_0643_a_13L離名句文能詮相故。非相義者。離名
001_0643_a_14L所詮相。當名之義故。何故離此六
001_0643_a_15L雙相者。能所平等無差別故。故言如
001_0643_a_16L故。非如之法已下。第二明心影法
001_0643_a_17L無不如理。非如法者。 [71] 謂前所非六雙
001_0643_a_18L法相。亦無無如者。如理遍通故。無
001_0643_a_19L有無如者。無一有相之法。而無如理
001_0643_a_20L者故。非無如有者。設有無如之法。
001_0643_a_21L可得爲有。旣非非如之法。不得爲有
001_0643_a_22L故。何以故下。釋非有義。根者樹根
001_0643_a_23L喩於種子。理者木理喩於現法。如
001_0643_a_24L前菴羅果喩中說。離諸諍論不見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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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3_b_01L각혜覺慧로 추구해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이상의 두 부분은 주체의 마음도 아니고 대상의 모습도 아님을 펼친 것이다.
㉯ 법이法爾하게 청정하다는 구절을 해석함
“이와 같이 법이法爾하게 청정한 법은” 이하는 그 다음으로 법이하게 청정한 법을 펼친 것이다.“생에 의해 생기는 생도 아니다.”라는 것은 생상生相을 떠나 있으므로 자체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멸에 의해 소멸되는 멸도 아니다.”라는 구절도 또한 그처럼 멸상滅相을 떠나 있으므로 자체가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청정한 법은 유위의 상을 떠나 있어서 생도 없고 멸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런 뜻으로 “법이法爾하게 청정하다.”고 한다.
(다) 이해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이 (공적하고 여여한) 법상은 합하여 성취된 것도 아니고 홀로 성취된 것도 아니며, 구속되는 것도 아니고 얽매이는 것도 아니며,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오는 모습도 아니고 또 가는 모습도 아니니, 불가사의합니다.”157)
논 이는 셋째로 이해한 것이다.158)“합하여 성취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심心도 아니고 심소心所도 아니니, 심과 심소는 별체로 상응하기 때문이다.“홀로 성취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자성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니, 이 두 가지 뜻은 따로 두 가지 체가 없기 때문이다.“구속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명칭도 없고 뜻도 아니기 때문이니, 명칭과 뜻은 서로 의지하기 때문이다.“얽매이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영상과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니, 영상과 본질은 서로 견주어 수반되기 때문이다.“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기 때문이니, 모여서 집성되면(聚集) 색이 되고 흩어져서 괴멸되면(散壞) 공이 되기 때문이다.“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불상응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기 때문이니, 불상응행은 생기하고 모든 무위법은 멸滅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설한 여섯 가지 짝의 뜻을 떠나 있음을 이해시킨 것이다.“또한 오는 모습도 아니다.”라는 것은 생에 의해 생기는 생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 가는 모습도 아니다.”라는 것은 멸에 의해 소멸되는 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의 경문에서 말한 “법이法爾하게 청정하다.”는 것을 가리킨다.처음에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한 것은 진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여로서 마음과 언설을 떠나 있기 때문이고, -
001_0643_b_01L相者。覺慧求之。無所得故。上來二
001_0643_b_02L分。廣非心影。如是淨法已下。次廣
001_0643_b_03L法爾淸淨。非生之所生生者。離生相
001_0643_b_04L故。體非生故。下句亦爾。離滅相故。
001_0643_b_05L體非滅故。如是淨法。離有爲相。無
001_0643_b_06L生無滅。無始無終。由是義故。法爾
001_0643_b_07L淸淨也。
001_0643_b_08L大力菩薩言。不可思議。如是法相。不
001_0643_b_09L合成不獨成。不羈不伴。不聚不散。不
001_0643_b_10L生不滅。亦無來相。及以去相。 [72] 不可思
001_0643_b_11L議。
001_0643_b_12L此是第三領解。不合成者。非心非心
001_0643_b_13L所。心與心所。別體相應故。不獨成
001_0643_b_14L者。非自性非差別。是二義。別無二
001_0643_b_15L體故。不羈者。非名非義故。名義互
001_0643_b_16L爲客故。不伴者。非影質故。影質相
001_0643_b_17L類而爲伴故。不聚散者。非空非色故。
001_0643_b_18L聚集爲色。散壞爲空故。不生滅者。
001_0643_b_19L非不相應。非無爲故。不相應行。是
001_0643_b_20L生起故。諸無爲法。滅所顯故。此領
001_0643_b_21L前說離六雙義。亦無來相者。非生之
001_0643_b_22L所生生故。及以去相者。非滅之所滅
001_0643_b_23L滅故。是領後說法爾淸淨。初言不可
001_0643_b_24L思議者。非如之如。離心言故。後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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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3_c_01L마지막에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한 것은 공적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으로서 또한 마음과 언설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라) 서술하여 마침
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그대 말처럼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마음, 그 마음도 또한 마찬가지이다.159) 왜냐하면 여여는 공적한 일심과 다르지 않은데, 공적한 일심은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논 이는 넷째로 서술하여 마치는 것이니,160) 차례대로 두 종류의 “불가사의하다.”라는 구절을 서술하였다.“마음”이란 깨침에 들어간 마음을 말한다. 곧 무분별심의 마음은 실제에 들어감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여여는 공적한 일심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앞의 불가사의를 해석한 것이다.“공적한 일심은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뒤의 불가사의를 해석한 것이다.
라. 실제에 들어가는 객체가 변견을 떠나 있음
경 중생과 불성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왜냐하면 중생의 자성은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고, 생멸의 자성은 그 자성이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자성과 생멸법상이 본래 여여하고, 여여하므로 기동이 없다.
논 이는 넷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객체가 변견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161)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불성이 같다·다르다 하는 변견을 떠나 있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여여함이 있다·없다 하는 변견을 떠나 있음을 드러낸다.
가) 불성이 같다·다르다 하는 변견을 떠나 있음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둘째는 자세하게 드러낸다.
(가) 간략하게 설명함
이는 첫째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같다·다르다를 떠나 있는 것이고, 둘째는 다르다는 것을 떠나 있음을 해석한다.
㉮ 같다·다르다를 떠나 있음
첫째에서 같다·다르다를 떠나 있다는 것은 중생과 불성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불성”이라는 말은 진여불성이다. 『열반경』에서는 “불성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말한다.”162)고 하였다. 그러므로 같다고 한다든가 다르다고 하면 모두 허물이다.
㉯ 다르다는 것을 떠나 있음을 해석함
“왜냐하면 중생의 자성은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고” 이하는 둘째로서 다르다는 것을 떠나 있음을 해석하는 것이니, 같지 않다는 뜻은 쉽게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중생이 불성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생멸의 자성은 그 자성이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생사가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이처럼 자성과 법상이 본래 여여하고, 여여하므로 기동이 없다.”는 것은 중생 곧 사람의 자성과 생멸 곧 법의 모습이 본래 여여하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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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3_c_01L不可思議者。離心之心。亦離二故。
001_0643_c_02L佛言。如是。不可思議。不思議心。心亦
001_0643_c_03L如是。何以故。如不異心。心本如故。
001_0643_c_04L此是第四述成。如其次第。述彼二種
001_0643_c_05L不思議句。所言心者。謂入證心。無
001_0643_c_06L心之心。入於不入。故不思議。如不
001_0643_c_07L異心者。釋前不思議。心本如故者。
001_0643_c_08L釋後不思議也。
001_0643_c_09L衆生佛性。不一不異。衆生之性。本無
001_0643_c_10L生滅。生滅之性。性本涅槃。性相本如。
001_0643_c_11L如無動故。
001_0643_c_12L此下第四所入離邊。於中有二。先
001_0643_c_13L明佛性。離一異邊。後顯如如離有無
001_0643_c_14L邊。初中有二。略明。廣顯。此卽略明。
001_0643_c_15L此中亦二。先離一異。後釋離異。離
001_0643_c_16L一異者。謂衆生與佛性。不一亦不異
001_0643_c_17L故。言佛性者。眞如佛性。如涅槃經
001_0643_c_18L言。佛性者名第一義空故。若一若異。
001_0643_c_19L皆有過故。衆生之性。本無生滅者。
001_0643_c_20L此下釋離異義。不一之義。易可見故。
001_0643_c_21L此句明人不異佛性。生滅之性。性本
001_0643_c_22L涅槃者。是明生死不異涅槃故。性相
001_0643_c_23L本如。如無動故者。衆生人性。生滅法
001_0643_c_24L相。本來是如。故不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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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4_a_01L(나) 자세하게 드러냄
경 일체의 유위법상은 연을 따라 생겨난 것이지 본래 생기해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생기해 있는 무위법상과 불성은 여여하고 여여하여 기동하는 바가 없다. 유위의 인연에 해당하는 불성과 법상은 그 모습이 본래 공하여 없고, 소연연所緣緣은 공공으로서 연기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인연법은 미혹한 마음에 허망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에 지금 나타나 있는 것은 본래부터 불생이니 인연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공적한 일심법과 여여법의 도리는 자체가 공하여 없다. 마치 저 공왕처럼 본래 주처가 없다는 것인데 범부의 마음으로 허망하게 분별하여 본다.
논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오직 다르다는 변견을 떠나 있다는 뜻만을 펼친 것이다. 일체의 유위법상은 연으로부터 생겨나고, 일체의 과법도 연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에 곧 새롭게 생기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미 생기해 있는 무위법상과 불성은 여여하여 기동하는 바가 없다. 이하는 능기能起하는 모든 인연도 역시 공하다는 것을 설명한다.“인연에 해당하는 불성과 법상은 그 모습이 본래 공하여 없다.”는 것은 종자로서의 인연은 존재하지 않기(無所有) 때문이다.“소연연은 공공으로서 연기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소연연所緣緣의 법은 하나가 아닌 다양한 것이지만 모두 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공공’이라 한다. 이런 까닭에 연이 없이 능기能起한다.“그러므로 일체의 인연법은 미혹한 마음에 허망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라는 것은 증상연增上緣과 등무간연等無間緣은 미혹한 마음에 허망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므로 그것 또한 공이라는 것이다.“이에 지금 나타나 있는 것은 본래부터 불생인데 그것은 인연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두 가지 공163)을 결론지어 마무리한 것이다. 곧 인연으로 나타난 과果는 본래 불생으로서 공하고, 능기能起하는 모든 인연은 본래 없으므로 공하다.“공적한 일심법과 여여법의 도리는 자체가 공하여 없다.”는 것은 앞에서 설한 인과 과는 곧 집착의 대상인데, 집착의 대상이 없으므로 집착하는 주체도 또한 공하다는 것이다. 곧 집착의 대상을 공의 도리라고 설하는 것처럼 집착하는 주체도 또한 그와 같기 때문이다.이상은 법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이하에서는 비유를 인용하였다.“공왕”이라 한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계空界이니, 명암색明暗色을 말한다. 둘째는 공왕空王이니, 허공법이 일체색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모든 백성의 소의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
001_0644_a_01L一切法相。從緣無起。起相性如。如無
001_0644_a_02L所動。因緣性相。相本空無。緣緣空空。
001_0644_a_03L無有緣起。一切緣法。惑心妄見。現本
001_0644_a_04L不生。緣本無故。心如法理。自體空無。
001_0644_a_05L如彼空王。本無住處。凡夫之心。妄分
001_0644_a_06L別見。
001_0644_a_07L此下第二廣顯。此中唯廣離異邊義。
001_0644_a_08L一切法相。從緣所生。一切果法。從
001_0644_a_09L緣有故。卽無生起。起相性如。如無
001_0644_a_10L所動也。下明能起諸緣亦空。因緣性
001_0644_a_11L相。相本空無者。種子因緣。無所有
001_0644_a_12L故。緣緣空空。無有緣起者。所緣緣
001_0644_a_13L法。非一衆多。莫不皆空。故曰空空。
001_0644_a_14L是故無緣之能起也。一切緣法。惑心
001_0644_a_15L妄見者。謂增上緣。等無間緣。唯心
001_0644_a_16L妄見故亦空也。現本不生。緣本無
001_0644_a_17L故者。結成二空。緣所現果。本來不
001_0644_a_18L生。能起諸緣。本來無故。心如法理。
001_0644_a_19L自體空無者。前說因果。是所取法。
001_0644_a_20L所取法無故。能取心亦空。如說所取。
001_0644_a_21L法空道理。能取心體。亦如是故。上來
001_0644_a_22L法說。下引譬喩。言空王者。空有二。
001_0644_a_23L一者空界。謂明暗色。二者空王。謂
001_0644_a_24L虛空法。爲一切色之所依故。如王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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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4_b_01L허공을 공왕이라 한다. 이와 같이 공왕은 본래 주처가 없다. 그런데도 범부의 마음으로 허망하게 계탁하고 분별하여 이곳을 허공이라 하고 저곳도 허공이라 하는 것은 오직 허망한 견해일 뿐으로, 이곳이라는 것도 없고 저곳이라는 것도 없다. 인과 과의 제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망심으로 집착한 것일 뿐이지 인도 없고 과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변계소집偏計所執의 인과 과에 의거해서 이와 같이 비유하였으니, 허망하게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 여여가 있다·없다 하는 변견을 떠나 있음을 드러냄
경 여여한 모습은 본래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유나 무의 모습은 오직 분별의 심·식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보살이여, 마음의 자성과 같이 자체가 없지는 않지만 자체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보살이여, (여여한 마음의 자성은) 무이지만 무의 모습이란 없으므로 언설의 경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은 텅 비고 밝아 형상이 없어서 두 가지로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 이는 둘째로 여여법은 유나 무의 변견을 떠나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164)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구절은 여여가 변견을 떠나 있음을 곧장 설명하고, 둘째 구절은 변견이 있으면 허망하다는 것을 반증하며, 셋째는 공적심을 인용하여 여여가 변견을 떠나 있음을 예로 삼고, 넷째는 여여는 언설을 떠나 있음을 다시 설명한다.165)
((가) 여여가 변견을 떠나 있음을 곧장 설명함)
((나) 변견이 있으면 허망하다는 것을 반증함)
(다) 공적심을 인용하여 여여가 변견을 떠나 있음을 예로 삼음
셋째에서 “마음의 자성과 같이”란 일심의 체성과 같다는 말이다.“자체가 없지는 않다.”는 것은 자체가 없다는 변견을 떠나 있다는 것으로 마치 토끼의 뿔과 같다.“자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자체가 있다는 변견을 떠나 있다는 것으로 마치 소의 뿔과 같다. 곧 다른 모습이 없는 까닭에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체가 있지 않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라는 것은 유가 아니라고 해서 곧 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가 아니라고 해서 곧 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뜻으로 말미암은 까닭에 다시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저 일심의 도리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처럼 여여의 도리도 또한 같으므로 이렇게 설한다. 이런 까닭에 셋째 구절의 처음 부분에서 “여여한 마음”이라고 하였다.
(라) 여여는 언설을 떠나 있음을 다시 설명함
“보살이여, 무이지만 무가 아닌 모습은 언설의 경지가 아니다.” 이하는 넷째, 여여가 언설을 떠난 도리를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
001_0644_b_01L諸民之所依。故說虛空。名爲空王。
001_0644_b_02L如是空王。本無住處。而凡夫心。妄
001_0644_b_03L計分別。此處虛空。彼處虛空。唯是
001_0644_b_04L妄見。無此無彼。因果諸法。當知亦
001_0644_b_05L爾。妄心所取。無因無果。是約遍計
001_0644_b_06L所執因果而作是喩。妄見處故。
001_0644_b_07L如如之相。本不有無。有無之相。見唯
001_0644_b_08L心識。菩薩。如心之性一本云。如
是心法。。 [73] 不無自
001_0644_b_09L體。自體不有。不有不無。菩薩。無不無
001_0644_b_10L相。非言說地。何以故。眞如之法。虛曠
001_0644_b_11L無相。非二 [74] 乘所及。
001_0644_b_12L此是第二明如如法。離有無邊。於中
001_0644_b_13L有四。初句正明如如離邊。次句反
001_0644_b_14L擧有邊是妄。三者引心離邊爲例。
001_0644_b_15L四者還明如如離言。第三中言如心
001_0644_b_16L之性者。猶如一心之體性也。不無自
001_0644_b_17L體者。謂離無自體邊。如兎角故。自體
001_0644_b_18L不有者。謂離有自體邊。如牛角故。非
001_0644_b_19L謂他相無故不有故。言自體不有而
001_0644_b_20L已。不有不無者。不有卽是不無。不
001_0644_b_21L無卽是不有。由是義故。更合明也。
001_0644_b_22L如一心法。不有不無。如如之理。亦
001_0644_b_23L同是說。是故句首曰如心也。無不無
001_0644_b_24L相。非言說地已下。第四還明如如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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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4_c_01L“무이지만 무의 모습이 없으므로”는 위의 첫째 구절에서 말한 “본래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라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모든 언담言談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도리(安足處)가 아니라는 것이다.“두 가지로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심尋과 사伺 두 가지의 작용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과 사의 두 가지 법은 언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여여에는) 이 두 가지 작용이 미칠 수 없으므로 여여는 언설의 경지가 아니다.
③ 실제에 들어가는 계위
경 마치 허공의 경계는 내도와 외도들이 헤아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육행六行의 보살이어야 여여의 경지를 알 수가 있다.”
논 이하는 크게 분류한 과목에서 셋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계위이다.166)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제에 들어간 경지가 깊고 깊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실제에 능입하는 계위와 수행을 언급하며, 셋째는 계위를 개별적으로 드러내고,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엄밀하게 설명한다.
가. 실제에 들어간 경지가 깊고 깊음을 설명함
첫째에서 “허공의 경계”라는 것은 여여법이 텅 비고 밝아 형상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라 일컫는다는 것이다.“내도와 외도들이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은 내도內道(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스물여덟 종류의 성스러운 가르침167)과 외도外道(불교 이외의 가르침) 가운데 아흔다섯 종류의 가르침이 있는데,168) 이들 범부와 성인들이 (허공과 같은 여여법을) 측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 실제에 능입하는 계위와 수행을 언급함
둘째 부분에서 “육행의 보살이어야 여여의 경지를 안다.”는 것은 곧 보살의 이입二入(理入과 行入)의 계위를 언급한 것이다.
다. 계위를 개별적으로 드러냄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육행의 보살이란 무엇입니까? 바라건대 그것을 설해 주십시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첫째는 십신행을 닦는 보살이고, 둘째는 십주행을 닦는 보살이며, 셋째는 십행행을 닦는 보살이고, 넷째는 십회향행을 닦는 보살이며, 다섯째는 십지행을 닦는 보살이고, 여섯째는 등각행을 닦는 보살이다. 이와 같이 닦는 자라야 여여법의 경지를 알 수가 있다.”
논 이는 셋째로 계위를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단지 수행의 계위만을 드러내고 그에 따른 과위는 제외하였다. 그러므로 묘각의 경지는 취하지 않았다. 이 육행 가운데 앞의 네 가지 계위는 이입理入의 계위이고, 뒤의 두 가지 계위는 행입行入의 차별이다. 이에 대한 간략한 뜻은 『본업경』에 있고,169) 자세하게 분별한 뜻은 -
001_0644_c_01L言道理。無不無相者。明初句中本不
001_0644_c_02L有無。非諸言談安足處故。非二所及
001_0644_c_03L者。非尋伺二之所行故。尋伺二法。
001_0644_c_04L是語言足。非此二所行故。非言說之
001_0644_c_05L地也。
001_0644_c_06L虛空境界。內外不測。六行之士。乃能
001_0644_c_07L知之。
001_0644_c_08L此下大分第三入之階位。於中有四。
001_0644_c_09L一明所入甚深。二擧能入位行。三者
001_0644_c_10L別顯階位。四者覈明入心。初中言虛
001_0644_c_11L空境界者。謂如如之法。虛曠無相。
001_0644_c_12L故名虛空。內外不測者。謂內道中。
001_0644_c_13L二十八聖。及外道中。九十五種。此等
001_0644_c_14L凡聖。不能測量也。第二中言六行
001_0644_c_15L之士乃能知之者。是擧菩薩二入階
001_0644_c_16L位也。
001_0644_c_17L大力菩薩言。云何六行。願爲說之。佛
001_0644_c_18L言。一者十信行。二者十住行。三者十
001_0644_c_19L行行。四者十廻向行。五者十地行。六
001_0644_c_20L者等覺行。如是行者。乃能知之。
001_0644_c_21L此是第三別顯階位。唯顯行位。除其
001_0644_c_22L果位。所以不取妙覺之地。此六行中。
001_0644_c_23L前四位是理入階降。後二位者行入
001_0644_c_24L差別。於中略義。在本業經。廣分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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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5_a_01L『화엄경』170)에 나온다.
라.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엄밀하게 설명함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실제인 본각의 이익171)에는 나고 듦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법과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실제의 법은 그 법에 끝이 없다. 그러므로 끝이 없는 그 마음이어야 곧 실제에 들어갈 수가 있다.”
논 이는 넷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엄밀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가) 질문
질문에서 “실제인 본각의 이익에는 나고 듦이 없습니다.”라는 것은 뒤의 두 가지 계위 곧 십지위와 등각위에서 자리행과 이타행을 얻어 도리에 계합하여 나고 듦이 없다는 뜻이다.“그런데 어떤 법과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입니까?”라는 것은 실제에 들어가는 법과 마음은 어떤 것인가를 곧장 물은 것이다.
나) 답변
답변에서 “실제의 법은 그 법에 끝이 없다.”라고 한 것은 들어갈 바의 법(所入法)이 본래(法爾) 끝이 없음을 언급한 것이다. 곧 시간적으로는 전제가 없고 후제가 없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므로 삼세의 시제를 떠나 있고, 공간적으로는 이곳이 없고 저곳이 없어 중앙도 없고 가(邊)도 없으며, 육방의 처소를 떠나 있고, 심심하여 떠나 있지 않은 변견이 없으며, 광대하여 두루하지 않은 처소가 없다.이 네 가지 뜻172)을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끝이 없다.”고 하였다.들어가는 주체의 마음에도 또한 네 가지 뜻을 갖추고 있으므로 실제에 들어가지 못함이 없다. 실제는 주체와 객체의 변견을 떠나 있고, 마음도 또한 실제와 마찬가지로 주체와 객체의 변견을 떠나 있어서 들어가는 것이 없어야 실제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하니, 이를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뜻이라고 한다.
④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
이하의 크게 분류한 과목에서 넷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이다.173)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의 계위는 지전의 네 계위174)로서 곧 이입문理入門 안의 방편관에 해당한다. -
001_0645_a_01L義。出華嚴敎。
001_0645_a_02L大力菩薩言。實際覺利。無有出入。何
001_0645_a_03L等法心。得入實際。佛言。實際之法。法
001_0645_a_04L無有際。無際之心。則入實際。
001_0645_a_05L此是第四覈明入心。問中言實際覺
001_0645_a_06L利無有出入者。擧後二位。得二利行。
001_0645_a_07L與理相稱。無出入義。何等法心得入
001_0645_a_08L實際者。正問於中能入心法。答中言
001_0645_a_09L實際之法法無有際者。擧所入法。法
001_0645_a_10L爾無際。縱無前後際。無始無終故。
001_0645_a_11L離三世時故。橫無此彼際。無中無邊
001_0645_a_12L故。離六方所故。甚深無際。無邊不
001_0645_a_13L離故。廣大無際。無所不遍故。具此
001_0645_a_14L四義。故言無際。能入之心。亦具四
001_0645_a_15L義。故於實際無所不入。當知實際
001_0645_a_16L離能所邊。心亦如是。離能所際。卽
001_0645_a_17L無其入。乃能得入。是謂不可思議義
001_0645_a_18L也。
001_0645_a_19L大力菩薩言。無際心智。其智無涯。 [75] 無
001_0645_a_20L涯 [76] 之心。心得自在。自在之智。得入實
001_0645_a_21L際。如彼凡夫。軟心衆生。其心多喘。以
001_0645_a_22L何法御。令得堅心。得入實際。
001_0645_a_23L此下大分第四入之方便。入方便者。
001_0645_a_24L位在地前四位。理入門內方便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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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5_b_01L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첫째는 능입의 방편을 설명하고, 둘째는 방편의 뛰어난 이익을 드러낸다.
가. 능입의 방편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략적인 것이고, 둘째는 자세한 것이다.
가) 대략적으로 드러냄
대략적인 것 가운데 먼저 질문이다.
(가) 질문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여여한 마음과 지혜(心智)에는 변제가 없습니다. 그 지혜는 끝이 없고, 끝이 없는 마음은 그 마음에 자재를 터득하며, 자재를 터득한 지혜는 실제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저 범부의 경우처럼 중생은 마음이 유약하여 그 마음은 항상 들떠 있는데, 어떤 법으로 다스려야 견고한 마음을 터득하여 실제에 들어가도록 할 수가 있습니까?”
논 질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내용을 이해시키고, 둘째는 뒤의 내용을 질문한다.이해시키는 가운데서 말한 “변제가 없습니다.”라는 것은 마음의 체體가 끝이 없기 때문이다.“끝이 없다.”는 것은 지혜의 작용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나) 답변
경 부처님께서 대력보살에게 말씀하셨다.“저들 중생의 마음이 들떠 있는 것은 안팎의 번뇌와 수번뇌175)가 유주流注하기 때문이다. 마치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고 대풍이 불어 물결을 일으키면 대룡이 놀라는데 마음이 놀란 까닭에 많이 들떠 있는 것과 같다.보살이여, 그들 중생으로 하여금 세 가지에 통하고 하나를 유지하여(存三守一) 여래선에 들도록 하면 그 선정으로 인하여 들뜬 마음이 곧 사라진다.”
논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스려야 하는 장애의 모습을 보여 주고, 둘째는 능치의 방편을 보여 준다.
㉮ 다스려야 하는 장애의 모습을 보여 줌
첫째에서 “마음이 들떠 있다.”는 것은 놀란 마음이 불안하여 그 날숨과 들숨이 다급해지는 것을 들떠 있다고 한다. 곧 육식六識이 뒤흔들려 멈추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안팎의 번뇌”176)란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177)는 안으로 자아를 반연하고, 의식의 여섯 가지 번뇌는 밖으로 모든 경계를 반연함을 말한다.“수번뇌가 유주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분忿과 한恨 등은 작은 수번뇌이고, 그 혼침과 도거 등은 큰 수번뇌이며,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등은 중간 수번뇌인데, 이런 수번뇌들이 함께 흘러서 현식現識에 모여들기 때문이다.“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것은 근본혹根本惑과 수혹隨惑 등 일체의 현행은 모두 근본식根本識(阿賴耶識)에 훈습되어 깊고 넓게 적집되기 때문이다.“대풍이 불어 물결을 일으킨다.”는 것은 업력으로 미혹한 육진의 경계가 제멋대로 현행하기 때문에 ‘대풍이 분다.’고 하고, 수면해隨眠海(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두드려 제7식을 기동시키므로 ‘물결을 일으킨다.’고 한다.“대룡이 놀란다.”는 것은 무명주지無明住地는 가장 큰 세력으로 근본식의 수면隨眠의 해저海底에 있으므로 ‘대룡’이라 하였고, 이와 같은 무명은 적정에 위반하여 -
001_0645_b_01L於中有二。先明能入方便。後顯方便
001_0645_b_02L勝利。初中亦二。先略。後廣。略中先
001_0645_b_03L問。問中亦二。一領於前。二問於後。
001_0645_b_04L領中言無際者。心體無際故。無涯者。
001_0645_b_05L智用無涯故。
001_0645_b_06L佛言。菩薩。彼心喘者。以內外使。隨使
001_0645_b_07L流注。滴瀝成海。天大 [77] 風鼓浪。大龍驚
001_0645_b_08L駭。驚駭之心。故令多喘。菩薩。令彼衆
001_0645_b_09L生。存三守一。入如來禪。以禪定故。心
001_0645_b_10L則無喘。
001_0645_b_11L答中有二。先出所治障相。後示能治
001_0645_b_12L方便。初中言心喘者。驚心不安。其
001_0645_b_13L出入息。急速曰喘。以喩六識。掉動
001_0645_b_14L不停。內外使者。末那四使。內緣自
001_0645_b_15L我故。意識六使。外緣諸境故。隨使
001_0645_b_16L流注者。謂忿恨等小隨煩惱。其沉掉
001_0645_b_17L等大隨煩惱。及無慚愧中隨煩惱。隨
001_0645_b_18L使等流。集注現識故。滴瀝成海者。本
001_0645_b_19L使隨惑。一切現行。皆熏本識。積集
001_0645_b_20L深廣故。天風鼓浪者。業力所感。六
001_0645_b_21L塵境界。任運現行。故名天風。鼓隨
001_0645_b_22L眠海。起七識浪。故曰鼓浪。大龍驚
001_0645_b_23L駭者。無明住地。其力最大。住在本
001_0645_b_24L識隨眠海底。故名大龍。如是無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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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5_c_01L늘상 추동심麤動心을 증장하므로 ‘놀란다.’고 하였다. 이런 모든 반연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마음이 들떠 있다. 이는 다스려야 할 장애의 모습을 알도록 한 것이다.
㉯ 능치의 방편을 보여 줌
이하는 능치能治의 방편을 보여 준 것이다.“세 가지에 통한다.”는 것은 대풍을 막아내는 방편이고, “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은 대룡을 조복받는 방편이며, “여래선에 들도록 한다.”는 것은 들떠 있는 마음을 바로 다스리는 방편이다.
나) 방편을 자세하게 드러냄
이하는 둘째로 방편을 자세하게 드러낸 것이다.178) 여기에 세 가지 문답이 있다.
(가) 법수를 들어 총체적으로 설명함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세 가지에 통하고 하나를 유지하여 여래선에 들어간다179)는 것은 무엇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세 가지에 통한다는 것은 세 가지 해탈을 통한다는 것이고, 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함을 유지하는 것이며, 여래선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심의 진여를 이관理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곧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논 이는 첫째 문답으로 법수를 들어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함을 유지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일심법에 두 가지 문(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이 있는데, 지금은 먼저 그 심진여문을 유지하여 무명의 대룡의 세력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명이 바로 일심의 여여함을 미혹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지한다(守).”는 것은 관행에 들어 있을 경우는 고요히 일여의 경지를 유지하고, 관행에서 나와 있을 경우는 일미의 관행심을 잃지 않기 때문에 “하나를 유지한다(守一).”고 하였다. 『본업경』에서는 십행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 번째 진실심행은 대법륜을 자재하게 굴리는데, 그것이 소위 보살의 삼보이다. 보살은 그 경우 제일의중도第一義中道의 지혜로 각보覺寶(佛寶)를 삼고, 일체법에 발생과 움직임이 없으면서 작용에 즉한 것으로 법보를 삼으며, 항상 육도에 다니면서 육도중생과 화합하므로 승보라 말한다. 이것이 곧 일체중생을 전변시켜 불해佛海에 유입시키는 진실심행이다.180)
생각해 보면, 과거·현재·미래에 중도일미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관행이 일심을 유지하는 작용이다. 이 관행은 십행위에 있다. 그 밖의 문은 나중에 드러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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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5_c_01L違反寂靜。常能增長麁動之心。故曰
001_0645_c_02L驚駭。由是諸緣。令心多喘。此是令
001_0645_c_03L知所治障相。自下示其能治方便。存
001_0645_c_04L三者。能遮天風方便。守一者。能伏
001_0645_c_05L大龍方便。入如來禪者。正治多喘之
001_0645_c_06L方便也。
001_0645_c_07L大力菩薩言。何謂存三守一。入如來禪。
001_0645_c_08L佛言。存三者。存三解脫。守一者。守一
001_0645_c_09L心如。入如來禪者。理觀心如。 [78] 入如是
001_0645_c_10L地。 [79] 卽入實際。
001_0645_c_11L此下第二廣顯方便。有三問答。此初
001_0645_c_12L番中。擧數摠標。守一心如者。一心
001_0645_c_13L法中。有二種門。今先守其心眞如門。
001_0645_c_14L爲伏無明大龍勢故。無明正迷一心
001_0645_c_15L如故。此中守者。入時靜守一如之境。
001_0645_c_16L出時不失一味之心。故言守一。如本
001_0645_c_17L業經十行中言。十爲自在轉大法輪
001_0645_c_18L故。所謂菩薩三寶。菩薩爾時。於第
001_0645_c_19L一中道 [80] 智爲覺寶。一切法無生動與
001_0645_c_20L則爲法寶。 [81] 常行六道與六道衆生
001_0645_c_21L和合名僧寶。轉一切衆生。流入佛
001_0645_c_22L海故。案云。三時不失中道一味。卽
001_0645_c_23L是此觀守一之用。此觀在於十行位
001_0645_c_24L也。餘門後顯。此中不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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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6_a_01L(나) 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냄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세 가지 해탈법은 어떤 것들이고, 이관理觀의 삼매는 어떤 법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세 가지 해탈은 허공해탈·금강해탈·반야해탈이다.181) 그리고 이관理觀이란 그 마음이 진여의 도리처럼 본래청정하여 긍정과 부정의 분별이 없는 마음이다.”대력보살이 여쭈었다.“그러면 세 가지에 통하는 집중작용(存用)은 무엇이고, 실상을 관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마음과 현상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을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이라 말한다. 그리고 실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안의 관행과 밖의 관행에서 나고 듦이 다르지 않고, 중도제일의제의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마음에 얻음과 잃음이 없고,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에도 모두 청정심으로 유입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리켜 실상을 관찰한다고 말한다.
논 이 두 가지 문답은 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182)첫 번째 답변183)에서 “세 가지 해탈”이라 한 것은 삼혜三慧가 팔해탈八解脫을 섭수하므로 해탈이라 한 것이다. 『본업경』에서는 십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섯째는 제불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소위 팔해탈관이다. 문혜로써 내가內假와 외가外假의 두 모습은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 첫째 해탈이다. 사혜로써 안의 오음법과 밖의 일체법이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 둘째 해탈이다. 수혜로써 육관六觀184)을 구족하여 색계의 오음이 공해지는 것이 셋째 해탈이다. 그리고 사공四空185)의 오음과 멸정관滅定觀(滅盡定)이 모두 불가득하게 된 것이 뒤의 다섯 가지 해탈이다. 이 팔해탈은 모두 여여한 모습이다.186)
생각해 보면 팔해탈관은 간략하게 두 문이 있다. 첫째, 만약 사상事相으로 보면 오직 수혜관修慧觀일 뿐이다. 이것은 이승에 공통하는 것으로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 만약 문혜와 사혜와 수혜의 삼혜로써 인공과 법공을 관찰하자면 곧 그것은 대승관大乘觀이다. 이것은 본 경문의 설과 같다.첫째의 해탈은 안으로는 색상을 두고 밖으로는 색 등을 관찰하는 것이니, 안에 색·수·상·행·식의 오음법상을 두고서 안으로 아공을 관찰하고, 밖에 색·성·향·미·촉·법을 두고 중생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은 쉽게 들어갈 수 있어서 문혜聞慧만으로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본업경』에서 “문혜로 내가內假와 외가外假의 두 모습이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색 등을 그대로 두고(不遣) 공을 관찰하는 것이 -
001_0646_a_01L大力菩薩言。三解脫法。是何等事。理
001_0646_a_02L觀三昧。從何法入。佛言。三解脫者。虛
001_0646_a_03L空解脫。金剛解脫。般若解脫。理觀心
001_0646_a_04L者。 [82] 心如理淨。無可不 [83] 心。大力菩薩言。
001_0646_a_05L云何存用。云何觀之。佛言。心事不二。
001_0646_a_06L是名存用。內行外行。出入不二。不住一
001_0646_a_07L相。心無得失。一不一地。淨心流入。是
001_0646_a_08L名觀之。
001_0646_a_09L此二問答別顯觀行。初答中。言三解
001_0646_a_10L脫者。則是三慧。攝八解脫。故名解脫。
001_0646_a_11L如本業經。十住中言。六爲諸佛所護。
001_0646_a_12L所謂八解脫觀。聞慧得內假外假。二
001_0646_a_13L相不可得故。一解脫。思慧 [84] 內。五陰法
001_0646_a_14L外。一切法。不可得故。二解脫。修慧
001_0646_a_15L六觀具足。色界五陰空。三解脫。四空
001_0646_a_16L五陰。及滅定觀。皆不可得故。五解脫。
001_0646_a_17L如相故。案云。八解脫觀。略有二門。若
001_0646_a_18L就事相。唯修慧觀。是共二乘。如餘處
001_0646_a_19L說。若就三慧觀人法空。是大乘觀。如
001_0646_a_20L此文說。初解脫者。內有色相。外觀色
001_0646_a_21L等。謂內存色等。五陰法相。觀內我
001_0646_a_22L空。外存色等。觀衆生空。是空易入
001_0646_a_23L聞慧所得故。言聞慧得。內假外假。二
001_0646_a_24L相不可得故。不遣色等。以觀空故。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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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6_b_01L마치 허공이 색상을 그대로 두고 있는 경우와 같기 때문에 이것을 ‘허공해탈’이라 한다.둘째의 해탈은 안의 색상은 없애고 밖의 색·성·향·미·촉·법을 관찰하는 것이니, 안으로 색·수·상·행·식의 오음법상을 없애고 밖으로 일체의 산·하·대지 등이 공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곧 욕계의 제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은 난해하여 사혜思慧를 통해야 관찰되므로 『본업경』에서 “사혜로 안의 오음법과 밖의 일체법이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안팎의 제법을 추구하여 쳐부수는 것이 마치 금강으로 모든 색법을 타파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금강해탈’이라 한다.뒤의 여섯 가지 해탈은 모두 수혜修慧이다. 위의 색계와 무색계의 일체법이 공하다고 관찰하므로 수혜라 말한다. 육관은 모두 수혜로서 선정에 의하여 발생된다. 이런 까닭에 여섯 가지 해탈을 모두 ‘반야해탈’이라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여섯 가지 차별상이 있다.셋째의 명칭은 정해탈淨解脫이다. 곧 색계의 오음이 밝고 깨끗하며 적정寂靜한 줄을 몸소 증득하여 그것이 모두 공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에 정해탈이라 한다. 이것은 자내증自內證을 몸소(名身) 증득하는 것이므로 『본업경』에서 “육관을 구족하여 색계의 오음이 공해지는 것이 셋째 해탈이다.”라고 하였다.넷째의 명칭은 공처해탈空處解脫(空無邊處定을 터득하는 것)이다. 곧 공무변처에서 오음이 공한 줄을 관찰하는 것이다. 내지 비상해탈非想解脫(非想非非想處定을 터득하는 해탈)도 그와 같아서 멸정법도 또한 불가득임을 관찰하기 때문에 멸진해탈滅盡解脫이라 한다. 이것은 모두 번뇌를 없앤다는 것으로부터 내세운 명칭이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사공四空187)과 오음五陰과 멸정관滅定觀이 모두 불가득하게 된 것이 뒤의 다섯 가지 해탈이다. 이 팔해탈은 모두 여여한 모습이다.”라고 하였다.이와 같은 삼혜는 인공과 법공을 관찰하여 인집人執과 법집法執 및 현행하는 상응박相應縛과 능연박能緣縛을 다스려 그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해탈이라 말한다. 곧 이미 안과 밖에 있는 일체의 가법假法을 없애고 모든 경계에서 천풍天風(大風)이 불어 오는 것을 방지한다(能遮)는 것이다.실상을 관찰하는 마음(理觀) 부분에서 말한 “그 마음이 진여의 도리처럼 본래청정하여 긍정과 부정의 분별이 없는 마음이다.”라는 것은 분별상이 없는 도리에 따라 마음에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뒤의 답변188)에서 말한 “마음과 현상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을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이라 말한다.”는 것은 -
001_0646_b_01L似虛空不遣色相故。說是爲虛空解
001_0646_b_02L脫。第二解脫者。內無色相。外觀色等。
001_0646_b_03L內遣色等。五陰法相。外觀一切山河
001_0646_b_04L等空。欲界諸法。無所不空。是空難解。
001_0646_b_05L思慧所觀。故言思慧。內五陰法。外一
001_0646_b_06L切法。不可得故。推求析破。內外諸法。
001_0646_b_07L如似金剛破諸色法。是故名爲金剛
001_0646_b_08L解脫。後六解脫。皆是修慧。觀上二
001_0646_b_09L界一切法空。故言修慧。六觀皆是
001_0646_b_10L修慧依定所發。是故摠名般若解脫。
001_0646_b_11L於中六種差別相者。第三名淨解脫。
001_0646_b_12L身作證色界五陰。光潔寂靜觀悉
001_0646_b_13L空。故名淨解脫。自內所證。名身作
001_0646_b_14L證故。言具足色界五陰空三解脫。第
001_0646_b_15L四名空處解脫。觀空處五陰空故。乃
001_0646_b_16L至非想解脫亦爾。觀滅定法。亦不可
001_0646_b_17L得。故名滅盡解脫。皆從所遣。以立
001_0646_b_18L其名。故言四空五陰。及滅定觀。皆不
001_0646_b_19L可得故。五解脫如相故。如是三慧。
001_0646_b_20L觀人法空。伏離二執。現行二縛。故
001_0646_b_21L名解脫。旣遣內外一切假法。能遮諸
001_0646_b_22L境。天風吹鼓也。理觀中言。心如理淨。
001_0646_b_23L無可不心者。順理無相。心無分別故。
001_0646_b_24L後答中言。心事不二。是名存用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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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6_c_01L세 가지에 통한 작용의 뛰어난 공능을 말한다.어떤 사람이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을 터득하지 못하면 설령 고요한 마음으로 공을 관찰하더라도 현상을 마주하면 정념을 잃고서 아와 아소에 집착하고 역경계(違)와 순경계(順)에 집착하며 천풍 곧 대풍에 요동되어 마음과 현실(心事)이 각각 달라져 버린다. 그러나 만약 세 가지 해탈을 능숙하게 닦으면 관행에서 나와 현상을 마주해도 아직 관행의 세력이 남아 있어 나와 남에 집착하지 않고, 좋아하는 경계(好)와 싫어하는 경계(惡)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천풍 곧 대풍에도 휩쓸리지 않고, 나고 듦도 모두 잊어 마음과 현실이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이와 같아야 이에 세 가지에 통한 작용이라 말할 수 있다.이 이관理觀은 처음 십신위十信位에서 닦고,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은 십주위十住位에서 완성된다. 저 『본업경』에서 십주위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 이관理觀을 내세우는 것과 같다.189)
“안의 관행과” 이하는 둘째의 질문에 답변한 것으로 이관의 모습을 설명한다. ‘안의 관행’은 관행에 들어가 공적하게 비추는 수행이고, ‘밖의 관행’은 관행을 나와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이다. 관행에서 나오거나 관행으로 들어가거나 중도를 잃지 않기 때문에 “다르지 않고”라고 한다. 『본업경』의 십회향十廻向의 대목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열째는 자재한 지혜로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것으로 소위 중도제일의제이다. 곧 반야로써 중도의 입장에서 일체법이 다르지 않음을 관찰하여 통달하는 것이다. 그 관찰하는 지혜가 전전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제일의제관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이지 진정한 중도제일의제관은 아니다. …….190)
“중도제일의제의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관二諦觀이고, “마음에 얻음과 잃음이 없다.”는 것은 평등관平等觀이다. 이제의 방편관과 평등의 방편관에 의하여 초지初地의 가르침인 흐르는 물에 진입하기 때문에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에도 모두 청정심으로 유입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본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가지 관행이란 다음과 같다. 가명으로부터 공에 들어가는 것을 이제관이라 하고, 공으로부터 가명에 들어가는 것을 평등관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관행은 방편도方便道이다. 이 두 가지 공관을 말미암아 -
001_0646_c_01L是名存三之用勝能。若人未得存三
001_0646_c_02L之用。靜心觀空。步事失念。取我我
001_0646_c_03L所。着違順境。天風所動。心事各異。
001_0646_c_04L若能熟修三解脫者。出觀涉事。觀勢
001_0646_c_05L猶存。不取我他之相。不着好惡之境。
001_0646_c_06L由是不爲天風所鼓。入出同忘。心事
001_0646_c_07L不二。如是乃名存三之用也。是觀
001_0646_c_08L1)如 [27] 修在十信位。存用得成。在十住
001_0646_c_09L位。如本業經十住位中。立此觀故。
001_0646_c_10L內行已下。答第二問。以明觀相。內
001_0646_c_11L行者。入觀寂照行。外行者。出觀化
001_0646_c_12L物行。若出若入。不失中道。故言不
001_0646_c_13L二。如本業經十向中言。十以自在慧
001_0646_c_14L化一切衆生。所謂中道第一義諦。般
001_0646_c_15L若處中而觀。達一切法而無二。其慧 [85]
001_0646_c_16L轉轉入聖地。故名相似第一義諦觀。
001_0646_c_17L而非眞中道第一義諦觀。乃至廣說
001_0646_c_18L故。不住一相者。二諦觀故。心無得
001_0646_c_19L失者。平等觀故。依此二種方便觀故。
001_0646_c_20L進入初地法流水中。故言一不一地
001_0646_c_21L淨心流入。如彼經。言三觀者。從假
001_0646_c_22L2)入空名 [28] 二諦觀。從空入假。名平等
001_0646_c_23L觀。是二觀方便道。因是二空觀。得
001_0646_c_24L「如」作「始」{甲}。「入空名」作「名入空」{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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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7_a_01L중도제일의제관에 들어간다. 이것은 이제를 쌍조雙照하여 진심眞心과 속심俗心이 적멸하여 초지의 진리가 흐르는 물에 진입한다. …….191)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이제관’은 속제를 없애고 진제를 관찰하는 것으로 곧 정체지正體智(本分의 입장으로 後得智의 상대)의 방편이다. 평등관은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를 관찰하는 것으로 후득지後得智(新熏의 입장으로 正體智의 상대)의 방편이다. 곧 세속에 대하여 그것이 환화幻化와 같다고 관찰하여 득과 실에 집착하지 않고 따르고 거부함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 말한다.“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는 초지의 다른 명칭(異名)이다. 왜냐하면 초지가 곧 그대로 십지로서 일시에 십중법계에 들어가고, 십지가 곧 그대로 초지로서 직접 편만으로 초문의 입문(入)을 삼기 때문이다. 진실로 십지 그대로 초지임을 말미암기 때문에 같은 경지(一)라 하고, 초지가 그대로 십지를 말미암기 때문에 다른 경지(不一)라 한다. 이런 까닭에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라 한 것이다.이처럼 이제관의 방편과 평등관의 방편에 의하여 그 일심을 청정케 한다. 이를 말미암아 같은 경지와 다른 경지에 유입한다. 이런 이유에서 “모두 청정심으로 유입된다.”고 하였다.여기에서는 오직 이제관과 평등관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펼쳤을 뿐이므로 그 사이의 중도제일의제관에 대해서는 이에 준거하여 알 수가 있다.
나. 방편의 뛰어난 이익을 드러냄
이하는 크게 분류한 과목 중 둘째로 방편의 뛰어난 이익을 드러내는 것이다.192)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이고, 둘째는 받는 공양의 뛰어난 이익이며, 셋째는 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이고, 넷째는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이다.
가)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
이것은 첫째로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에 대한 대목이다.
경 보살이여, 이와 같은 사람193)은 분별상(二相)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출가하지는 않을지라도 재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때문에 비록 법복을 걸치지 않고,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지 않으며, 포살布薩에 참여하지는 않을지라도 자기의 마음에 방자함(自恣)이 없어 성과聖果를 획득한다. 이승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 훗날 반드시 과만果滿하여 불보리를 성취한다.”
논 첫째에도 네 가지의 뛰어난 이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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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7_a_01L入中道第一義諦觀。雙照二諦。心心
001_0647_a_02L寂滅。進入初地法流水中。乃至廣說。
001_0647_a_03L案云。此中二諦觀者。遣俗觀眞故。
001_0647_a_04L卽是正體智之方便。平等觀者。融眞
001_0647_a_05L觀俗。卽是後得智之方便。觀俗如幻。
001_0647_a_06L不取得失。無適無莫。故名平等。言
001_0647_a_07L一不一地者。初地之異名。所以然者。
001_0647_a_08L初地卽是十地。一時頓入十重法界
001_0647_a_09L故。十地卽是初地。直以遍滿爲初門
001_0647_a_10L入故。良由十地卽初地。故名一。初
001_0647_a_11L地卽十地。故不一。是故名爲一不一
001_0647_a_12L地。依二方便。以淨其心。由是流入
001_0647_a_13L一不一地。以之故言。淨心流入。此
001_0647_a_14L中唯廣初後二觀。中間一觀。准可知
001_0647_a_15L故。
001_0647_a_16L菩薩。如是之人。不在住 [86] 二相。雖不出
001_0647_a_17L家。不住在家。故 [87] 雖無法服。不具持波
001_0647_a_18L羅提木叉戒。不入布薩。能以自心。無
001_0647_a_19L爲自恣。而獲聖果。不住二乘。入菩薩
001_0647_a_20L道。後當滿地。成佛菩提。
001_0647_a_21L此下大分。第二方便勝利。於中有四。
001_0647_a_22L一者得果勝利。二者得供勝利。三者
001_0647_a_23L無患勝利。四者無住勝利。此卽第一
001_0647_a_24L得果勝利。初中亦有四種勝利。一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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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7_b_01L(가) 변견을 떠나는 뛰어난 이익
첫째는 변견을 떠나는 뛰어난 이익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양변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이와 같은 사람은 분별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출가하지는 않을지라도 재가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대목에 해당한다.
(나) 자재한 뛰어난 이익
둘째는 자재한 뛰어난 이익이다. 교문敎文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심으로 도리를 결판하여 삼가하여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비록 법복을 걸치지 않고,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지 않으며, 포살에 참여하지는 않을지라도 자기의 마음에 방자함이 없어 성과聖果를 획득한다.”는 대목에 해당한다.
(다) 깨달음에 들어가는 뛰어난 이익
셋째는 깨달음에 들어가는 뛰어난 이익이다. 이는 “이승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간다.”는 대목에 해당한다.
(라)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
넷째는 터득한 과보의 뛰어난 이익이다. 이것은 “훗날 반드시 과만하여 불보리를 성취한다.”는 대목에 해당한다.
나) 받는 공양의 뛰어난 이익
이하는 둘째로 받는 공양의 뛰어난 이익에 대한 것이니, 세 가지 뛰어난 공덕을 터득하여 복전의 자격이 되어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이 반드시 공양하기 때문이다.경문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보살이 복전임을 설명하고, 둘째는 이승은 그 경지를 보지 못함을 드러내며, 셋째는 보살은 그 경지를 본다는 것을 드러낸다.
(가) 보살이 복전임을 설명함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출가한 것은 아니지만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서 여래의 가사를 수하고 보리좌에 앉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사람이라면 사문들조차도 마땅히 존경하고 공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바로 그렇다. 왜냐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서도 마음은 삼계에 대한 연민을 일으켜 여래의 가사를 수하고 법공처에 들어가 보리좌에 앉아서 정각의 일지一地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인아와 법아를 초월한 것이다. 하물며 사문인들 어찌 존경하고 공양하지 않겠는가.”
논 첫째 부분에는 세 가지 복전이 나타나 있다.“열반의 집에 들어가서도 마음은 삼계에 대한 연민을 일으킨다.”는 것은 삼해탈이니,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이다. 삼계가 공적한 것을 열반의 집이라 하니, 편안한 마음으로 깃들 수 있는 청정한 처소이기 때문이다. 삼해탈관으로 삼계의 공적한 경지에 들어 있으면서도 깨침에 집착이 없어 다시 세속에 대한 연민을 일으켜 널리 삼계를 교화하기 때문에 -
001_0647_b_01L離邊勝利。不墮道俗二邊相故。如經
001_0647_b_02L如是之人不在二相。雖不出家。不
001_0647_b_03L住在家故。二者自在勝利。不爲敎
001_0647_b_04L門戒律所制。能以自心。決判道理。
001_0647_b_05L蕭然無爲而無不爲故。如經雖無法
001_0647_b_06L服。乃至而獲聖果故。三者入道勝
001_0647_b_07L利。如經不住二乘。入菩薩道故。四
001_0647_b_08L者得果勝利。如經後當滿地。成佛
001_0647_b_09L菩提故。
001_0647_b_10L大力菩薩言。不可思議。如是之人。非
001_0647_b_11L出家。非不出家。何以故。入涅槃宅。着
001_0647_b_12L如來衣。坐菩提座。如是之人。乃至沙
001_0647_b_13L門。宜應敬養。佛言。如是。何以故。入涅
001_0647_b_14L槃宅。心起越 [88] 三界。着如來衣。入法空
001_0647_b_15L處。坐菩提座。登正覺一 [89] 地。如是之人。
001_0647_b_16L心超二我乘 [90] 何况沙門而不敬養。
001_0647_b_17L此下第二得供勝利。得三勝德。堪作
001_0647_b_18L福田。一切道俗。所應供故。就文有
001_0647_b_19L三。先明菩薩福田。次顯二乘不見。
001_0647_b_20L後顯菩薩能見。初中卽現三種福田。
001_0647_b_21L入涅槃宅。心起三界者。是三解脫存
001_0647_b_22L三之用。三界空寂。名涅槃宅。安心
001_0647_b_23L1)栖 [29] 託之淨處故。三解脫觀。入三界
001_0647_b_24L空。而不取證。還起俗心。普化三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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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7_c_01L“마음은 삼계에 들어가서도 삼계에 대한 연민을 일으킨다.”고 한다. 삼계에 대하여 연민심을 일으키지만 거기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곧 ‘세 가지에 통하는 작용’이다.“여래의 가사를 수하여 법공처에 들어 있다.”는 것은 곧 일심의 여여를 유지하는 관행이다. 말하자면 삼계에 노닐면서 널리 교화할 경우 인욕의 가사를 수하고, 피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며, 다시 법공에 들어가 일심의 여여를 유지한다. 『법화경』에서는 “유화와 인욕을 가사로 삼는다.”194)고 하였다.“보리좌에 앉아 정각의 일지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여래선으로 이관理觀의 마음이다. 말하자면 법공에 앉아서 지속적으로 방편을 닦아 초지에서 정각의 참된 관행을 터득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제법이 공적함을 자리로 삼는다.”195)고 하였다.이와 같은 세 가지 계위에서는 모두 인공과 법공을 관찰하여 인아와 법아의 두 가지 집착을 소멸하기 때문에 “인아와 법아를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아와 법아를 초월한 까닭에 단덕斷德을 구족하고, 삼해탈관을 닦은 까닭에 지덕智德도 또한 갖춘다. 그러므로 보살은 출가인과 재가인의 복전이 된다.
(나) 이승은 그 경지를 보지 못함을 드러냄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저 일지一地 및 공해空海는 이승인이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겠습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바로 그렇다. 저 이승인은 삼매의 맛에 집착하여 삼매의 몸을 터득하므로 저 공해와 일지를 마주하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혼미하고 깨지 못한 것과 같다. 여러 겁이 지나도록 깨지 못하다가 문득 술기운이 소멸된 후에야 비로소 깨어난다. 이에 바야흐로 일지와 공해를 수행한 연후에 불신佛身을 터득한다.196)
논 이하는 둘째로 이승은 그 경지를 보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 질문
질문에서 “일지一地”라고 한 것은 십지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서 십지는 곧 초지이므로 ‘일지’라 한다.“공해空海”는 앞의 세 가지 관행197)을 통하여 들어간 공이니, 그 경지가 심심하고 광대하기 때문에 바다라고 한다.
㉯ 답변
답변에서 “바로 그렇다.”라고 한 것은 볼 수 없음을 긍정한 것이다.198)이하에서는 이승이 볼 수 없는 이유를 해석한다. -
001_0647_c_01L故。言心起三界。起三界心而不染着
001_0647_c_02L卽是存用。着如來衣。入法空處。卽
001_0647_c_03L是守一心如之觀。謂涉三界普化之
001_0647_c_04L時。着忍辱衣。而不疲倦。還入法空
001_0647_c_05L守一心如。如法華經言。柔和忍辱衣
001_0647_c_06L故。坐菩提座。登正覺一地者。是如
001_0647_c_07L來禪。理觀之心。謂坐法空。進修方
001_0647_c_08L便。得登初地正覺眞觀。如法華經言。
001_0647_c_09L諸法空爲座故。如是三位。皆觀二空。
001_0647_c_10L人我法我二執。伏滅故。言心超二我。
001_0647_c_11L超二我故。斷德具足。修三觀故。智
001_0647_c_12L德亦備。故能堪作道俗福田也。
001_0647_c_13L大力菩薩言。如彼一地。及與空海。二
001_0647_c_14L乘之人。爲不見也。佛言。如是。彼二乘
001_0647_c_15L人。味着三昧。得三昧身。於彼空海一
001_0647_c_16L地。如得酒病。惛醉不醒。乃至數劫。猶
001_0647_c_17L不得覺。酒消始悟。方修是行。後得佛
001_0647_c_18L身。
001_0647_c_19L此下第二二乘不見。於中有二。先問。
001_0647_c_20L後答。問中言一地者。謂所登地。十
001_0647_c_21L地卽初地。名爲一地。空海者。謂前
001_0647_c_22L三觀所入之空。甚深廣大。故名爲海。
001_0647_c_23L答中言如是者。許不見也。下釋二乘
001_0647_c_24L「栖」作「拪」{甲}。
-
001_0648_a_01L“삼매의 맛에 집착한다.”는 것은 고요한 선정을 좋아하는 까닭에 적정에 나아가는 것이다.199)“삼매의 몸을 터득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바를 추구하여 마음이 소멸되는 선정(滅心定)에 들어가 그로 인하여 열반에 들어가 회신멸지灰身滅智(無餘涅槃)가 되지만, 지智와 심心이 소멸된 경지에서 오히려 멸정의 자체가 발생하여 심心과 심법(智)을 방해하는데, 이것을 “삼매의 몸을 터득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적정을 좋아하는 훈습이 아직 근본식에 남아 있어서 그로 인하여 공해와 일지의 경지를 터득하지 못한다.“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혼미하고 깨지 못한 것과 같다. 내지 여러 겁이 지나도록 깨지 못한다.”는 것은 수다원須陀洹의 사람은 팔만 겁 동안 머무르고, 내지 아라한阿羅漢의 경우는 이만 겁 동안 머무르며, 벽지불辟支佛의 경우는 만 겁 동안 열반에 머물러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 그것을 전체적인 모습으로 “여러 겁이 지나도록”이라고 설한다.“문득 술기운이 소멸된 후에야 비로소 깨어난다. 이에 바야흐로 일지와 공해를 수행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는 훈습의 두텁고 얕은 정도를 따라서 집착의 기운이 사라지고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데, 마음을 일으켰을 때 비로소 회심하여 대승에 들어가서 바야흐로 앞에서 말한 세 가지 관행을 닦는다. 『능가경』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譬如惛醉人 비유하면 술에 몹시 취했던 사람이
酒消然後悟 술기운이 사라진 후에야 곧 깨어나
得佛無上體 부처님이 지니고 계신 무상의 몸이
是我眞法身 자신의 진법신인 줄 깨친 격이라네200)
(다) 보살종성은 그 경지를 봄을 드러냄
경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은 일천제의 종성을 벗어나서 곧 육행에 들어간다. 수행자리에서 찰나에 마음이 청정하여 결정적으로 명백해져서201) 금강의 지혜력으로 아비발치阿鞞跋致202)의 경지에서 중생을 도탈度脫시키는데, 그 자비가 끝없다.”
논 이는 보살종성을 지닌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일천제의 속성인 불신의 장애를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곧 육행의 처음인 십신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행자리에서 그대로 찰나에 청정심을 발생하는 것은 곧 십주위의 처음인 발심주에 해당한다.“결정적으로 명백해진다.”는 것은 십행위의 온갖 수행이 명정明淨한 것이다.“금강의 지혜력”은 십회향위의 견고한 지력智力에 해당한다.“아비발치의 경지”는 초지 이상에서 터득하는 진정한 깨침으로서 물러남이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
001_0648_a_01L不見所由。味着三昧者。樂着靜定。
001_0648_a_02L而趣寂故。得三昧身者。如所樂趣
001_0648_a_03L入滅心定。因入涅槃。灰身滅智。智
001_0648_a_04L心滅處。滅定軆生。遮心心法。如是
001_0648_a_05L名爲得三昧身故。樂寂熏習。在本識
001_0648_a_06L中。因是不悟空海一地。如得酒病。
001_0648_a_07L惛醉不醒。乃至數劫。猶不覺者。須陁
001_0648_a_08L洹人。八萬劫住。乃至羅漢二萬劫
001_0648_a_09L住。辟支佛者十千劫住。住於涅槃而
001_0648_a_10L不覺悟。今摠相說。乃至數劫。酒消
001_0648_a_11L始悟。方修是行者。隨其樂着。熏習厚
001_0648_a_12L薄。着氣消息。得還起心。起心之時。
001_0648_a_13L廻心入大。方修如前三種觀行。如楞
001_0648_a_14L伽經頌曰。譬如惛醉人。酒消然後悟。
001_0648_a_15L得佛無上軆。是我眞法身。乃至廣說。
001_0648_a_16L如彼人者。從捨闡提。卽入六行。於行
001_0648_a_17L地所。一念淨心。決定明白。金剛智力。
001_0648_a_18L阿鞞跋致。度脫衆生。慈悲無盡。
001_0648_a_19L是明菩薩種性之人。從捨闡提不信
001_0648_a_20L之障。卽入六行之初十信。於修行地
001_0648_a_21L之所。卽發一念淨心。卽是十住之初
001_0648_a_22L發心。決定明白者。謂十行位。衆行
001_0648_a_23L明淨故。金剛智力者。謂十廻向堅固
001_0648_a_24L智力故。阿鞞跋致者。謂初地已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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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8_b_01L“중생을 도탈度脫시키는데, 자비가 끝없다.”는 것은 곧 앞의 계위는203) 이타행이므로 이승의 경우 이타행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다) 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그와 같은 사람의 경우 반드시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 사문(성문승)들을 마땅히 존경할 수는 없겠습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계율을 받은 자(성문승)는 불선으로 교만해지기 때문에204) 바다에 파랑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六行의 菩薩乘)의 심지는 팔식의 바다가 명징하고 구식의 흐름이 청정하여 천풍天風(壞劫 때에 부는 바람)조차도 흔들지 못하여 파랑이 일어나지 않는다. 본래 계의 자성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 계를 지닌다는 것은 미혹한 전도이다. 그러나 앞의 그와 같은 사람은 칠식과 육식이 발생하지 않아 모두 멸정滅定을 모아서 삼불三佛을 본래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보리심을 내고, 삼해탈의 무분별상(三無相)에서 일심의 깊은 도리를 따라 들어가고, 또 깊이 삼보를 공경하여 위의를 상실하지 않으므로 그들 사문들(육행의 보살)을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보살이여, 저 사람들은 세간의 동법動法과 부동법不動法에 집착이 없어 삼공취三空聚205)에 들어가 삼유심三有心(삼계의 중생심)을 소멸시킨다.”
논 이는 셋째로 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에 대한 것이니, 인과에 대한 범부의 오해를 떠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가) 질문
여기의 먼저 질문206) 가운데서 “반드시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위에서 설한 “계율을 갖추어 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저 사문들(성문승)을 마땅히 존경할 수는 없겠습니다.”라는 것은 저들의 경우 이미 계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굳이 지계자持戒者처럼 공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 답변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대력보살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하고, 둘째는 뒤의 질문에 대해서 부정한다.
㉮ 앞의 질문에 대하여 긍정함
첫째에서 “계율을 받은 자”는 계율을 받은 사람은 곧 모든 성문들이다.207) 곧 자신의 지계를 믿고 모든 파계를 업신여기므로 “불선으로 교만해진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아직 제법이 공한 줄을 터득하지 못하여 수면隨眠의 바다에서 제7식의 파랑이 전전展轉하기 때문에 “바다에 파랑이 인다.”고 한다. 이것은 소승 지계인의 과실을 언급한 것이다.“그들의 심지”는 보살의 마음은 제법이 공한 줄을 증득하여 대지(본각)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
001_0648_b_01L眞證無退故。度脫衆生慈悲無盡者。
001_0648_b_02L卽於前位利他行故。爲別二乘不能
001_0648_b_03L行故。
001_0648_b_04L大力菩薩言。如是之人。應不持戒。於
001_0648_b_05L彼沙門。應不敬仰。佛言。爲說戒者。不
001_0648_b_06L善1)慢 [30] 故。海波浪故。如彼心地。八識海
001_0648_b_07L澂澄。九識流淨。風不能動。波浪不起。
001_0648_b_08L戒性等空。持者迷倒。如彼之人。七六
001_0648_b_09L不生。諸集滅定。不離三佛。而發菩提。
001_0648_b_10L三無相中。順心玄入。深敬三寶。不失
001_0648_b_11L威儀。於彼沙門。不無恭敬。菩薩。彼仁
001_0648_b_12L者。不住世間動不動法。入三空聚。滅
001_0648_b_13L三有心。
001_0648_b_14L此是第三離患勝利。謂離凡夫因果
001_0648_b_15L患故。於中先問應不持戒者。如前說
001_0648_b_16L言不具持波羅提木叉戒故。於彼沙
001_0648_b_17L門。應不敬仰者。旣不持戒故。不須
001_0648_b_18L敬持戒者故。答中有二。先許前問。次
001_0648_b_19L2)奪 [31] 後問。初中言爲說戒者者。所爲
001_0648_b_20L說戒之人。卽是諸聲聞也。恃自持戒。
001_0648_b_21L懱諸破戒。故言不善慢故。是人未得
001_0648_b_22L諸法空故。隨眠海中。七識浪轉。故
001_0648_b_23L言海波浪故。是擧持戒之人過失。如
001_0648_b_24L彼心地者。謂菩薩心。證諸法空。入大
-
001_0648_c_01L제8식 안에 인집人執과 법집法執 및 수면隨眠과 분별기分別起가 이미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제8식의 바다가 명징하다.”고 한다.【징澂은 징澄을 뜻한다.】무분별지無分別智로 본각에 증입하여 모든 경지가 증장되고 모든 잡염雜染을 떠나 있으므로 “구식의 흐름이 청정하다.”고 한다. 본각은 곧 제9식이기 때문이다.마음에 분별이 없어 경계에 기동되지 않기 때문에 “천풍조차도 흔들지 못한다.”고 말한다.흔들지 못하여 모든 7식에 염오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파랑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이런 사람은 이미 일체법공의 경지를 증득하여 일곱 가지 계208)의 자성이 모두 공적하기 때문에 “본래 계의 자성은 허공과 같다.”고 한다.그러나 성문인은 법공을 통달하지 못하고, 계의 자성이 있는 것으로 집착하여 자신의 지계를 믿기 때문에 “계를 지닌다는 것은 미혹한 전도이다.”라고 한다.이상은 대력보살의 앞의 질문에 답변한 것이다. 곧 계를 수지하지 않는 것은 과실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그러나 앞의 그와 같은” 이하는 대력보살의 나중 질문에 답변한 것으로 저들에게는 아만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칠식과 육식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나의 사혹思惑이 현행하지 않고, 견혹見惑의 종자가 이미 단멸된 것이다.“모두 멸정滅定을 모은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생기하는 식(前六識인 分別事識)의 심과 심소의 번뇌가 다 멸진되고 나서 이정理定에 들어가는 것이다.“삼보리를 본래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보리심을 낸다.”는 것은 발심한 이래로 여래장불인 모든 중생에 대하여 널리 공경심을 발생하고 또 그 발심에 의하여 경만하지 않음을 설명한다.“삼해탈의 무분별상에서 일심의 깊은 도리를 따라 들어간다.”는 것은 행입行入을 터득할 경우 무명의 뿌리를 없애고, 저 앞에서 설한 삼해탈 가운데서 일심법을 따라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인해 “또 깊이 삼보를 공경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형상의 불보와 종이와 비단(紙素)의 법보와 네 종류의 승보 등으로서 공경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그들 사문들을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은 삼불三佛에 의하여 발심한 까닭에 교만의 뿌리와 무명종자를 없앤 것이다. -
001_0648_c_01L地故。第八識內二執。隨眠分別起者。
001_0648_c_02L皆已滅盡。故言八識海澂。澂者澄也。
001_0648_c_03L無分別智。證入本覺。地地增長。離
001_0648_c_04L諸雜染。故言九識流淨。本覺正是
001_0648_c_05L第九識故。心無分別。非境所動。故
001_0648_c_06L風不能動。不能動故。染七不生。故
001_0648_c_07L言波浪不起。是人旣證一切法空。七
001_0648_c_08L支戒性。達皆空寂。故言戒性等空。而
001_0648_c_09L聲聞人。不達法空。執有戒性。恃自
001_0648_c_10L能持。故言持者迷倒。是答初問。明
001_0648_c_11L不持戒而非過失。如彼已下。次答後
001_0648_c_12L問。以明無慢。七六不生者。末那四
001_0648_c_13L惑。不現行故。見惑種子已斷滅故。
001_0648_c_14L諸集滅定者。諸生起識。心心所集。
001_0648_c_15L皆滅盡已。入理定故。不離三佛而發
001_0648_c_16L菩提者。明發心來。普敬心生。如來
001_0648_c_17L藏佛。是諸衆生。依彼發心。不輕慢
001_0648_c_18L故。三無相中。順心玄入者。得行入
001_0648_c_19L時。拔無明根。如前所說。三解脫中。
001_0648_c_20L順一心法而深入故。由是義故。深敬
001_0648_c_21L三寶。謂形像佛。紙素等法。四種僧
001_0648_c_22L等。無所不敬。故於沙門。不無恭敬。
001_0648_c_23L以依三佛而發心故。拔憍慢根無明
001_0648_c_24L「慢」作「▼(忄+㬅)」{甲}。「奪」作「▼(大/集)」{甲}。
-
001_0649_a_01L이상은 허물의 모든 원인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 뒤의 질문에 대하여 부정함
이하부터는 허물의 모든 결과를 떠나 있음을 드러낸다.“세간의 동법과 부동법에 집착이 없다.”는 것은 욕계의 인간과 천상에서 누리는 부와 즐거움을 동법動法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산선散善의 과보이고, 색계와 무색계에서 누리는 적정의 과보를 부동법不動法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정선定善의 과보이다. 바로 그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없다.”고 하였다.“삼공취에 들어간다.”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처럼 전전展轉하여 증입하기 때문에 ‘취’라 하였다.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발생하지도 않기 때문에 “삼유심을 소멸시킨다.”고 하였다.
라)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
경 대력보살이 여쭈었다.“저 사람들은 과만족덕불과 여래장불과 형상불 등의 처소에서 보리심을 내고 삼취정계三聚淨戒209)에 들어가지만 그 상에 집착이 없습니다. 그리고 삼유심을 소멸하지만 적멸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고, 중생을 저버리지도 않으며, 부조지不調地210)에 기꺼이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사의하겠습니다.”
논 이것은 넷째로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위에서 설한 것을 이해하고, 둘째는 집착이 없음을 드러낸다.
(가) 위에서 설한 것을 이해함
먼저 첫째는 삼불을 본래 떠나 있지 않음을 이해한 것이다.“과만족덕불”은 시각이 완성되어 만덕이 원만해진 것이다.“여래장불”은 일체중생이 본래 본각이라는 것이다.“형상불”은 금·동·진흙·나무로써 존상을 드러낸 것이다. 곧 이것은 인因·과果·이理·사事가 결여되지 않기 때문이다.“삼취정계에 들어가지만 그 상에 집착이 없습니다.”라는 것은 앞에서 “계의 자성은 허공과 같다.”는 구절을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곧 삼취정계에 들어가는 네 가지 연은 계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취정계의 네 가지 연에 대해서는 뒤의 「진성공품」에서 설한다.
(나)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을 드러냄
이하 둘째는 집착이 없는 뛰어난 이익을 그대로 드러낸다. 비록 다시 삼공취에 들어가 삼유심을 없앴을지라도 적멸의 경지에 머물지도 않고 널리 육바라밀을 닦는다.마음이 산란한(多喘) 중생이 거주하는 곳을 “부조지”라 한다. -
001_0649_a_01L種故。上來明其離諸因患。自下顯其
001_0649_a_02L離諸果患。不住世間動不動法者。欲
001_0649_a_03L界人天富樂之果。名爲動法。散善果
001_0649_a_04L故。色無色界寂靜之果。名不動法。
001_0649_a_05L定善果故。於彼不着故曰不住。入三
001_0649_a_06L空聚者。如前所說。展轉增入。故名
001_0649_a_07L爲聚。非直不着。亦令不生。以之故
001_0649_a_08L言滅三有心。
001_0649_a_09L大力菩薩言。彼仁者。於果滿足德佛。 [91]
001_0649_a_10L如來藏佛。形像佛。如是佛所。而發菩
001_0649_a_11L提心。入三聚戒。不住其相。滅三有心
001_0649_a_12L不居寂地。不捨可衆。入不調地。不可
001_0649_a_13L思議。
001_0649_a_14L此是第四無住勝利。於中有二。先領
001_0649_a_15L上說。後顯無住。領中二句。先領不
001_0649_a_16L離三佛之句。果滿足德佛者。始覺究
001_0649_a_17L竟。萬德圓滿故。如來藏佛者。一切
001_0649_a_18L衆生本來本覺故。形像佛者。金銅泥
001_0649_a_19L木能表尊像故。因果理事無所遺故。
001_0649_a_20L入三聚戒不住其相者。是領前戒性
001_0649_a_21L等空之句。入戒四緣。不着戒相故。
001_0649_a_22L三聚四緣。後品當說。自下正顯無住
001_0649_a_23L勝利。雖復入三空聚。滅三有心。而
001_0649_a_24L不住寂地。普涉六度。多喘衆生所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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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49_b_01L번뇌가 남아 있지만 무루업(不繫業)에 의하여 피안에 태어나기 때문에 “기꺼이 들어간다.”고 말한다.번뇌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속히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저 소승인의 경우 삼무수대겁三無數大劫(三大阿僧祗劫)에 걸쳐 점차 단제하여 보리를 터득할 경우에야 바야흐로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이지, 금강지 이후에도 내내 없어지지 않은 것을 가리켜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211)
(3) 사리불(身子)이 이해함
경 그때 사리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게송을 설하여 말씀드렸다.
具足般若海 반야의 바다를 갖추었건만
不住涅槃城 열반성에도 머무르지 않네
如彼妙蓮華 그것은 미상불 묘련화처럼
高原非所出 고원에는 피어나지 않는다네
諸佛無量劫 제불께서는 무량한 겁토록
不捨諸煩惱 제번뇌 버리지도 않으면서
度世然後得 세간제도 마치고 터득하니
如泥華所出 마치 진흙 속의 연꽃 같네
如彼六行地 저 여섯 가지 수행의 길은
菩薩之所修 보살이 닦아 가는 수행이고
如彼三空聚 저 세 가지 삼매의 수행은
菩提之直道 보리에 이르는 지름길이네212)
논 이하는 셋째로 사리불(身子)이 이해하는 것으로213) 소승의 대중에게 대승심을 내도록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서술하여 마치는 것이다.
① 이해함
첫째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앞의 세 게송은 위에서 설한 것을 찬송하고, 뒤의 두 게송은 사리불 자신이 발심한 바를 진술한다.
가. 위에서 설한 것을 찬송
첫째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로 앞의 두 게송은 집착이 없는 도를 찬송한다. 그 다음의 2구는 육행의 계위를 찬송한다. 마지막의 2구는 삼공취를 찬송한다.처음에 말한 “반야의 바다를 갖추었건만”은 삼해탈로 삼혜를 갖춘 것이다.“열반성에도 머무르지 않네.”는 삼유심이 소멸되었지만 적정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고원에는 피어나지 않는다네.”는 저 이승의 경우 번뇌의 늪을 떠나 있지만 팔만 겁 동안에도 발심하지 못한 것이다.“제번뇌 버리지도 않으면서”는 저 이승이 사생四生214) 동안에 속히 번뇌를 단제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마치 진흙 속의 연꽃 같네.”는 아직 남아 있는 번뇌를 말미암아 부조지不調地에 들어갔지만, 거기에서 보살행을 모두 닦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보리과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
001_0649_b_01L之處名不調地。由所留惑依不繫
001_0649_b_02L業於彼受生故名爲入。言留惑者。
001_0649_b_03L謂不速盡。如小乘人。於三無數大劫
001_0649_b_04L時中。漸次而斷。得菩提時。方滅盡
001_0649_b_05L故。不謂金剛已還。一向不斷。故名
001_0649_b_06L爲留。
001_0649_b_07L爾時。舍利弗。從座而起。前說偈言。
001_0649_b_08L具足般若海。不住涅槃城。如彼妙蓮華。
001_0649_b_09L高原非所出。諸佛無量劫。不捨諸煩惱。
001_0649_b_10L度世然後得。如泥華所出。如彼六行地。
001_0649_b_11L菩薩之所修。如彼三空聚。菩提之直道。
001_0649_b_12L此下第三。身子領解。爲令小衆。發
001_0649_b_13L大心故。於中有二。一者領解。二者
001_0649_b_14L述成。初中亦二。在前三頌。頌前所
001_0649_b_15L說。其後二頌。陳自發心。初中有三。
001_0649_b_16L一前二頌。頌無住道。次有二句。頌
001_0649_b_17L六行位。後之二句。頌三空聚。初中
001_0649_b_18L言具足般若海者。謂三解脫。具三慧
001_0649_b_19L故。不住涅槃城者。滅三有心。不居
001_0649_b_20L寂地故。高原非所出者。如彼二乘。
001_0649_b_21L離煩惱泥。八萬劫等。不發心故。不
001_0649_b_22L捨諸煩惱者。不如二乘。二二生中。
001_0649_b_23L速斷盡故。如泥華所出者。由所留惑。
001_0649_b_24L入不調地。於中具修菩薩行故。因是
-
001_0649_c_01L삼취정계의 수행에 대해서는 경문에 있으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사리불 자신이 발심한 것을 진술함
경
我今住不住 제 머묾 및 머물지 않음은215)
如佛之所說 부처님의 말씀과 똑같으니
來所還復來 온 곳으로 다시 또 돌아가
具足然後出 구족한 연후에 나오려 하네216)
復令諸衆生 그리고 다시금 제중생에게
如我一無二 나와 똑같이 둘 없게 하여
前來後來者 먼저 오고 나중에 오는 자
悉令登正覺 모두 다 정각을 터득하리라217)
논 이것은 둘째로 사리불 자신이 발심한 것을 진술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처음의 2구는 지금 발심한 계위를 진술하고, 나머지 한 게송 반은 이후에 닦아 나갈 수행을 드러낸다.“제 머묾 및 머물지 않음은”은 지금 부처님 설법을 듣고 나서 대승심을 발한즉 적멸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다.“온 곳으로 다시 또 돌아가”라는 것은 무시이래로 유전해 온 곳을 나는 일찍이 떠나 있었지만 지금 다시 돌아와서 삼계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변제정邊際定218)의 힘에 의해서 받은 몸으로 그 적절한 곳을 따라 시현하는 것이다.“구족한 연후에 나오려 하네.”는 보살의 일체행을 구족한 연후에야 그 보살의 몸을 벗어나 불신佛身을 터득하는 것이다.“먼저 오고”라는 것은 과거에 이미 선근이 성숙한 자이고, “나중에 오는 자”라는 것은 미래세에 바야흐로 성숙하게 될 자이므로, 미래제가 다하도록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② 서술하여 마침
경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불가사의하도다. 그대는 반드시 후세에 보살도를 성취하여 무량한 중생을 생사의 바다에서 건져줄 것이다.”
논 이것은 둘째로 서술하여 마친 대목으로서, 사리불이 말한 것을 인가하는 것이다.
(4) 대중이 획득한 이익
경 그때 대승의 대중은 모두 보리를 깨치고, 모든 소승의 대중들도 오공五空의 바다에 들어갔다.
논 이것은 크게 분류한 가운데 넷째로 당시의 대중이 획득한 이익에 대한 것이다.219)“대중”은 곧 대승의 무리이다. -
001_0649_c_01L能證菩提果。故云行1)三 [32] 聚。在文可
001_0649_c_02L知。
001_0649_c_03L我今住不住。如佛之所說。來所還復來。
001_0649_c_04L具足然後出。復令諸衆生。如我一無二。
001_0649_c_05L前來後來者。悉令登正覺。
001_0649_c_06L此是第二陳自發心。於中有二。初之
001_0649_c_07L二句。陳今發心之位。後一頌半。表
001_0649_c_08L其後修之行。我今住不住者。今聞佛
001_0649_c_09L說已。發大心卽住不住寂地之心故。
001_0649_c_10L來所還復來者。無始流轉之來之處。
001_0649_c_11L我先所離。今還復來。來入三界。度
001_0649_c_12L衆生故。邊際定力。延所受身。隨其
001_0649_c_13L所宜。而示現故。具足然後出者。具
001_0649_c_14L足菩薩一切行後。出離此身得佛身
001_0649_c_15L故。言前來者。過去善根已成熟者也。
001_0649_c_16L言後來者。於未來世方成熟者也。窮
001_0649_c_17L未來際。不休息故。
001_0649_c_18L爾時。佛告舍利弗言。不可思議。汝當於
001_0649_c_19L後。成菩薩提道。 [92] 無量衆生。超生死海。 [93]
001_0649_c_20L第二述成。印其所說。
001_0649_c_21L爾時。大衆。皆悟菩提。諸小衆等。入五
001_0649_c_22L空海。
001_0649_c_23L此是大分第四。時衆得益。言大衆者。
001_0649_c_24L「三」作「二」{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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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50_a_01L“보리를 깨친다.”는 것은 일지一地의 보리심에 오입悟入한 것이다.“모든 소승의 대중”은 성문중으로 곧 세 가지 진여문220)에 들어간 것이다.
『금강삼매경론』 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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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50_a_01L是大乘衆。悟菩提者。悟入一地菩提
001_0650_a_02L心故。諸小衆者。謂聲聞衆。得入三
001_0650_a_03L種眞如門故。
001_0650_a_04L金剛三昧經論卷中。
-
001_0650_b_01L
- 1)『金剛三昧經』의 정설분은 일미관행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에 해당하는 「無相法品」·「無生行品」·「本覺利品」·「入實際品」·「眞性空品」·「如來藏品」의 여섯 품목을 가리킨다.
- 2)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둘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답변 부분이다.
- 3)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 4)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넷째에 해당한다.
- 5)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다섯째에 해당한다.
- 6)주고받는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여섯째에 해당한다.
- 7)이 대목을 풀어서 말하면, “본래 스스로 발생한 것(自生)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발생한 것(從他生)도 아니며, 자타가 함께하여 발생한 것(共生)도 아니고, 인을 통해서 발생한 것(因生)도 아닌 것으로서 곧 발생이 없는 것(無生)이다.”라는 뜻이다.
- 8)연의 대사代謝 : 낙사落謝와 같이 늘 맞물려서 변천하는 것이다.
- 9)사불四不 : 부자생不自生·불타생不他生·불공생不共生·불인생不因生을 가리킨다.
- 10)팔불八不 : 본 『金剛三昧經論』에서 말한 불일不一·불이不異·부단不斷·불상不常·불입不入·불출不出·불생不生·불멸不滅을 가리킨다.
- 11)원문의 “善男子。 是心性相。 又如阿摩勒果。 本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無生”에서 마지막의 ‘무생無生’의 대목이 『金剛三昧經註解』와 『金剛三昧經通宗記』의 경우 ‘불무생不無生’인 것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무생無生’인 경우는 “심성의 바탕은 자생도 아니고, 타생도 아니며, 공생도 아니고, 인생도 아닌 것으로 곧 무생이다.”이고, ‘불무생不無生’인 경우는 “심성의 바탕은 자생도 아니고, 타생도 아니며, 공생도 아니고, 인생도 아니며, 무생도 아니다.” 또는 “심성의 바탕은 자생도 아니고, 타생도 아니며, 공생도 아니고, 인생도 아니며, 불무생이다.”이다. 또한 경문과는 달리 본 『金剛三昧經論』에서 원효는 사불四不을 언급하면서 ‘불인생不因生’을 빼고 ‘불무생不無生’을 넣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은 ‘本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無生’이 『金剛三昧經註解』와 『金剛三昧經通宗記』의 ‘本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不無生’처럼 무생을 불무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 주고 있다.
- 12)왜냐하면 : 이전 대목이 현의顯疑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이라면, “왜냐하면” 이후 대목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간접적인 해석에 해당한다.
- 13)『瑜伽師地論』 권16(T30, 363a).
- 14)네 가지 비방 : 일이一異·단상斷常·입출入出·생멸生滅의 네 가지 분별의 속성을 말한다.
- 15)여섯째로 해석하는 부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 16)대몽大夢 : 중생이 미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 17)여섯째로 해석하는 부분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그 넷째로서 옳다(是)는 것을 설명하는 것에 해당한다.
- 18)『瑜伽師地論』 권95(T30, 844c20~22).
- 19)첫째의 정설 부분의 네 가지 가운데 둘째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이다.
- 20)위에서 언급한 일一·이異·단斷·상常·입入·출出·생生·멸滅’의 여덟 가지를 가리킨다.
- 21)열 가지가 없다(十無) : 견見·문聞·득得·실失·언言·설說·지知·상相·취取·사捨가 없는 것이다.
- 22)『妙法蓮華經憂波提舍』 권하(T26, 9c~10a)에 의하여 생략된 내용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팔생 내지 일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팔생과 일생이란 모든 범부가 결정코 초지에서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역량 내지 분수에 따라서 팔생 내지 일생에 모두 초지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삼계의 분단생사를 떠나 분수에 따라서 진여법성을 볼 수 있으므로 보리를 터득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구경에 만족한 여래의 방편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八生乃至一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謂證初地菩提法故。 八生一生者。 謂諸凡夫決定能證初地故。 隨力隨分。 八生乃至一生皆證初地故。 此言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以離三界分段生死。 隨分能見眞如法性名得菩提。 非謂究竟滿足如來方便涅槃也。)”
- 23)“본래 득得도 없고 부득不得도 없는데”에 해당하는 말은 ‘본무유득부득本無有得不得’이다. 이 대목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득得의 부정과 그 득의 부정인 부득不得에 대한 부정으로서 곧 이중의 부정이다. 둘째는 능能과 소所에 대한 분별의 부정이다. 득은 능득能得이고 부득은 불소득不所得으로서 능득의 부정과 소득所得의 부정으로서 양자의 부정이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경우처럼 이중 부정의 의미로 해석된다.
- 24)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존자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보리의 자성에는 득得도 없고 실失도 없으며 각覺도 없고 지知도 없어 분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이 없은즉 청정한 자성입니다. 그 자성에는 간間도 없고 잡雜도 없고 언言도 없고 설說도 없으며 유有도 없고 무無도 없으며 지知도 없고 부지不知도 없습니다.”
- 25)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제법과 제행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체법과 일체행에 처소가 없는 것은 결정자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터득도 없고 터득하지 못함도 없는데,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고 하겠습니까.”
- 26)솔이심率爾心 : 졸이심卒爾心이라고도 한다. 전5식의 감각과 의식의 관계에 대하여 졸이심卒爾心·심구심尋求心·결정심決定心·염정심染淨心·등류심等流心의 오심五心을 말하는데, 이 가운데 졸이심은 대상을 향한 찰나의 마음을 가리킨다.
- 27)삼수三受 : 고수苦受·낙수樂受·사수捨受이다.
- 28)심·의·의식 : 초기경전에서는 모두 제6식으로 간주하였지만, 후에 유식학에서는 각각 제6식과 제7식과 제8식으로 분별하였다. 원효는 본 『金剛三昧經論』에서 이들에 대하여 모두 제6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서 심心은 미래에 해당하고, 의意는 과거에 해당하며, 의식意識은 현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삼세가 모두 공적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
- 29)변행遍行 : 오변행五遍行을 가리킨다. 오변행은 온갖 마음의 형상에 반드시 따라 일어나는 다섯 가지 심리작용으로서 작의作意·촉觸·수受·상想·사思를 가리킨다.
- 30)구체적으로는 ‘이근과 이촉과 이식, 비근과 비촉과 비식, 설근과 설촉과 설식, 신근과 신촉과 신식’을 가리킨다.
- 31)수전문隨轉門 : 수전리문隨轉理門으로서 진실리문眞實理門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방편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 32)부정하여 따지는 문답 중 여섯째 증득이 없다고 서술한 세 가지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 33)일체의 마음 작용은 무상에 불과하여 자체가 적멸한 무생이다. 그런데도 적멸심이 발생하거나 무생심이 발생하면 그것은 유소득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여 무생행에 어긋난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이다.
- 34)실제로 적멸이 발생했으면서 발생했다는 그 마음조차 불생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 35)부정하여 따지는 문답 중 여섯째 증득이 없다고 서술한 세 가지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 36)이정理定에 대하여 그 모습을 설명한 것과 이지理智에 대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가리킨다.
- 37)「無生行品」의 정설正說에 네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둘째가 부정하여 따지는 문답인데, 지금까지 설명한 여덟 가지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 38)이것은 “그 무생법인의 마음에는 주처되는 경계(所)가 없고 주처하려는 마음(能)도 없어서 집착하는 대상도 없고 집착하려는 마음도 없으므로 그 무생법인의 마음이야말로 곧 무생이고 무주입니다.”라는 뜻이다.
- 39)무생심과 무생행(心無生行) : 무생법인의 마음이 무생이고 또한 무행인 모습을 가리킨다.
- 40)「無生行品」의 정설正說에 네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 41)“그 마음에는 소주처도 없고, 능주처의 마음도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 42)「無生行品」의 정설正說에 네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넷째에 해당한다.
- 43)「無生行品」의 세 부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 44)원징圓澄의 견해에 의하면 여기에 나오는 두 가지 무생에서 앞의 무생은 무생선정無生禪定을 의미하고, 뒤의 무생은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의미한다. 『金剛三昧經註解』 권2 「無生行品」(X35, 229c), “兩無生者。 上句是禪定。 下句是般若。”
- 45)「無生行品」의 세 부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 46)「本覺利品」에서는 본각의 이익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본각本覺과 이행利行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이 품의 대의에 대하여 원징은 “본각이란 곧 모든 사람들의 법신이고, 이행이란 곧 모든 사람들의 법성이다. 법성은 생·멸하지 않지만 또한 생멸의 작용이 없지 않으니, 이로써 무생의 뜻을 드러내고, 법신은 상이 없지만 상의 작용이 없지 않으니, 이로써 무상의 뜻을 드러낸다.(本覺者。 即人人之法身。 利行者。 即人人之法性。 法性。 非生滅。 而亦非不生滅用。 顯無生義。 法身。 無相。 而靡所不相用。 顯無相義。 )”고 설명한다. 『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29c).
- 47)본각의 이익(本利) : ‘본本’은 무생법인의 터득으로서 본각이고, ‘이利’는 무량한 차별지혜로서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전환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a)에서 “本利二字。 本即所得法忍。 即是本覺。 利即無量差別智。 即是轉識。”이라고 하였다.
- 48)무생심과 무생행 : 이 번역문의 원문은 ‘심무생心無生’에 해당한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앞에 있는 「無生行品」의 해당 대목에서 ‘심무생행心無生行’의 의미로 설명하였다.
- 49)보살이 부동지不動地에 도달했음을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8b).
- 50)『宗鏡錄』 권83(T48, 875a)에서는 이어서 주처住處까지도 없다고 부연하여 설명한다. “내지 색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고 이름이 없어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은 처소가 없고 청정하고 보는 작용이 없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마음도 처소가 없고 기동하는 곳이 없고, 청정하고 움직임이 없어서 반연을 분별함도 없다. 이에 자성이 모두 공적하다. 나아가 저 심왕도 본래 머무는 곳이 없다.(乃至色無處所。 清淨無名。 不入於內。 眼無處所。 清淨無見。 不出於外。 心無處所。 清淨無上。 無有起處。 清淨無動。 無有緣別。 性皆空寂。 乃至如彼心王。 本無住處。)”
- 51)여기 두 개의 게송은 이미 부동지에 들어간 보살이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오고 감이 없는 부동지에 머물게 해 준다는 것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b).
- 52)셋째로 여래께서 광명을 내어 무주보살의 본각이행本覺利行에 대하여 게송으로 칭찬한 대목이다.
- 53)여래께서 위에서 칭찬하신 것 : 위에서 말한 “그대는 본래 온 곳이 없고 지금 또한 도달한 곳도 없다. 그대가 터득한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니, 곧 대보살마하살이다.”를 가리킨다.
- 54)둘째로 숨어 있는 것(微)으로부터 드러난 것(著)에 이르기까지 본각의 이익의 의의를 광설廣說하는 것에 해당한다.
- 55)암마라식唵摩羅識 : 암마라는 번역하면 백정식白淨識인데, 곧 제9식이다. 전5식과 제6식과 제7식은 세간상이고, 지금의 정식情識은 제8식으로서 세간과 출세간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제9식은 오직 출세간뿐이다. 소위 저 세간의 정식을 굴려서 출세간의 청정자성으로 들어가게 한다. 『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30b).
- 56)“어떤 이익을 베풀어서(轉) 중생의 일체정식을 전변시켜(轉)”의 대목에서 앞의 전轉은 전법轉法이고, 뒤의 전轉은 전식轉識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b).
- 57)『決定藏論』 권상(T30, 1020b) 참조.
- 58)결정본성決定本性 : 결정적으로 본각의 자성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곧 본각의 자성은 그 바탕(體)에 기동起動이 없고 또한 불래不來·불거不去의 경지에 도달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종문에서 명심견성明心見性하는 지결旨訣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b~c).
- 59)이에 해당하는 대목은 “모든 정식은 공적하여 무생임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이다.
- 60)일체(可一)의 팔식 : ‘가일可一’을 원효는 ‘일체一切’의 뜻으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원징은 『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30c)에서 ‘여일체식如一切識’으로 간주하여 ‘저 일체의 식’으로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적진寂震은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89c)에서 ‘가可’는 뒤의 ‘일체식一切識’과 독립된 용어로서 자각각타自覺覺他의 행行을 터득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가可’는 하나의 구절로 보아야 한다. 그 다음의 ‘일체식一切識’의 세 글자와 연결해서 읽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가可’는 무주보살이 자각각타의 무생행을 마음으로 깨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可)’라고 말한 것이다.(可字。 當作一句。 勿連下三字讀。 此可者。 乃無住菩薩。 心領意會於自覺覺他之行。 故曰可。)”
- 61)사연四緣 : 인연因緣·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增上緣을 가리킨다.
- 62)이하의 세 가지 문답 :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제4·제5·제6의 문답을 가리킨다.
- 63)“청정하므로 색이 없다.”에 해당하는 원문 ‘淸淨無色’은 ‘淸淨故無色’의 뜻으로 해석된다.
- 64)제식은 본각과 다른 모습이 아님을 설명한 셋째에는 다시 제4·제5·제6의 문답이 있는데, 그 가운데 셋째에 해당하는 제6의 문답이다.
- 65)법法 : 의근意根의 소연이 되는 법경法境을 뜻한다.
- 66)“그 경지는 청정하여 마치 유리처럼 맑고, 자성은 항상 평등하여 마치 저 대지와 같으며, 본각으로 미묘하게 관찰함은 마치 지혜의 햇살과 같고, 이타행을 성취하여 본각을 터득함은 마치 대법우와 같다.”는 대목을 원효는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의 사지四智에 배대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0c~291a)에서는 이들 각각의 구절에 대하여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에 배대하여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해석하고 있다.
- 67)시각을 연설하는 것에 대하여 첫째로 제식이 공적함을 연설하고, 둘째로 제식이 무생임을 연설한다. 이 가운데 그 둘째에 해당한다.
- 68)『金剛三昧經』의 제목 가운데 ‘금강’에 대한 설명이 이에 해당한다.
- 69)무명주지無明住地 : 오주五住 곧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욕애주지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무애주지無愛住地·무명주지無明住地 가운데 하나로 잠재적인 미세번뇌 및 소지장을 가리킨다. 나머지 사주四住는 현행번뇌 및 번뇌장을 가리킨다.
- 70)무간도無間道 : 무애도無碍道라고도 한다. 지말번뇌에 장애받지 않는 금강지金剛智의 경지를 통하여 해탈도에 나아간다.
- 71)둘째로 과가 원만함(果圓)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 72)시각을 두 가지, 곧 첫째는 제식이 공적함을 연설하고, 둘째는 제식이 무생임을 연설한 것을 가리킨다.
- 73)본각의 이익의 의의에 대해 거듭하여 연설한 것으로, 첫째는 시각을 연설하고, 둘째는 본각을 연설한다. 이 가운데 그 둘째인 본각을 연설하는 부분이다.
- 74)원효는 위의 경문을 질문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은 바로 자신의 법신 속에 본래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는 말을 부처님께 다짐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 75)이 경문은 일체중생의 경우 바로 자신의 법신 속에 부처님과 동일하게 본리本利 곧 일본각一本覺의 성력聖力과 사지四智를 본래 원만하게 구족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1a)에서는 “여래께서 설하신 일각一覺의 성지력聖智力 및 네 가지 큰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곧 일체중생의 본각의 근원이고 시각의 이익입니다.”라는 대목에 대하여 “여래가 설한 일각은 성지지력聖智之力 및 사홍지원지지四弘智願之地로서 자성법문을 닦아서 자성중생을 이롭게 하고 자성번뇌를 단절하여 자성불도를 성취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일체중생의 본각의 근원이고 시각의 이익이다.”라고 해석한다.
- 76)삼루三漏 : 무루無漏의 상대 개념인 욕루欲漏·유루有漏·무명루無明漏를 가리킨다.
- 77)채집採集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1a)에서는 『楞伽經』을 인용하여 “심心은 채집하는 행위이고, 의意는 널리 모으는 것이다.(心名採集業。 意名廣採集。)”라고 하였다.
- 78)채집하는 것은 번뇌와 더불어 뒤섞이는 것이고, 독행은 번뇌를 벗어나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함께 한다 혹은 홀로 한다는 것으로 그 자체가 집착이다.
- 79)『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32a) 및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1c)에서는 채집과 독행에 대하여 각각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에 배대하여 제8 장식의 소변所變으로 간주하고 있다.
- 80)공적한 이치(空窟) : 공굴空窟은 상분과 견분을 초월한 것으로서 곧 공적한 이치를 뜻한다.
- 81)복도伏道 : 견도見道에서 견혹見惑을 다스리고 수도修道에서 수혹修惑을 다스리는 것이다.
- 82)단도斷道 : 견도見道에서 견혹見惑을 완전히 단제하고 수도修道에서 수혹修惑을 완전히 단제하는 것이다.
- 83)사마四魔 : 수도에 장애가 되는 오음마五陰魔·번뇌마煩惱魔·천마天魔·사마死魔를 가리킨다.
- 84)각覺이 없음을 느끼고 알면 : 본래부터 깨달음 그것이었을 뿐이지 새삼스럽게 깨달음이 발생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아는 행위로서 곧 일본각一本覺에 해당된다.
- 85)본각의 뜻을 연설한 대목 가운데 첫째는 곧장 설명하는(正明) 부분이고, 둘째는 집착을 없애는(遣著) 부분이다. 이는 둘째에 해당한다.
- 86)오직 일본각뿐 : 마음에 열반이 터득되어 청정한 일본각의 자성만 독존하고 제식諸識은 모두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6(X35, 292a).
- 87)중덕衆德 : 법신法身·해탈解脫·반야般若의 열반의 삼덕을 가리킨다.
- 88)『妙法蓮華經』 권2(T9, 16b) 참조.
- 89)오상五相 : 소전상所詮相·능전상能詮相·상속상相續相·집착상執着相·부집착상不執着相으로 미迷·오悟의 다섯 가지 법상法相을 가리킨다.
- 90)오사五事 : 명名·상相·분별分別·정지正智·여여如如의 다섯 가지 미迷·오悟의 법을 가리킨다.
- 91)통달위通達位 : 자량위資糧位·가행위加行位·수습위修習位·통달위通達位·구경위究竟位의 오위五位 가운데 하나이다.
- 92)후득지後得智 :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로서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에 상대되는 지혜이다. 근본지가 분별의 주체와 대상이 없음에 비하여 후득지는 분별의 주체와 대상이 있다.
- 93)돈을 얻은 것 : 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래 금전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해당한다.
- 94)알려 준 바로~터득한 것이다 : 이 대목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알려 준(告言) 바로 그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究竟) 그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라는 것으로 ‘알려 준 바로 그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은 돈오에 해당하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은 점수에 해당한다. 둘째는 “알려 준 바로 그때 깨침을 터득한 것이지, 후에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때에야 비로소 터득한다는 것은 소득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돈오돈수의 입장에 해당한다. 둘째의 해석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금전의 비유 곧 “마치 금전을 알아차린 것일 뿐이지 새삼스레 획득한 바가 아닌 것과 같다.”에 합치된다. 금전의 비유와 관련하여 첫째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알려 준 바로 그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란 일념지간에 알아차린 것에 해당하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라는 것은 오십 년 동안 떠돈 것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에서 “그러므로 아버지가 알려 준 것은 오십 년의 오랜 세월이 경과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지간에 오십 가지 악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라는 대목으로 보면 일념과 오십 년이 시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금전의 비유와 관련해도 첫째의 경우 하등의 모순이 아니다. 다만 일념이라는 대목과 오십 년 동안이라는 대목의 어디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가, 일념과 오십 년을 수행의 과정 내지 완성의 어디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가의 문제로서 모순 대립의 문제로 볼 필요는 없다. 여기에서는 첫째의 입장으로 해석한다.
- 95)『大乘起信論』(T32, 576c).
- 96)『大乘起信論別記』(T44, 228a).
- 97)『顯揚聖敎論』 권1(T31, 484a).
- 98)마음과 정신을 안좌시키고, 금강지에 거주토록 하며, 적정하여 망념의 기동이 없게 하고, 심원을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게 하는 네 가지 수행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 권2(X35, 234ab)에서는 『圓覺經』(T17, 920b)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작作·임任·지止·멸滅의 사병四病, 곧 사상四相을 다스리는 수행법으로 해석하였다.
- 99)이상異相 : 생상生相·주상住相·이상異相·멸상滅相의 사상四相 가운데 하나이다.
- 100)상사각相似覺 : 아공我空은 깨쳤지만 법공法空은 깨치지 못한 상태이다. 초지初地 이상의 수분각隨分覺과 유사하므로 상사각相似覺이라 한다.
- 101)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 : 분별分別 곧 아공我空을 깨치고 또 추념麤念 곧 법공法空을 깨친 상태이다.
- 102)보살지를 마친(菩薩地盡) : 십주十住로부터 십지十地까지 모든 보살행을 완성한 무구지無垢地 이전의 경지이다.
- 103)일념에 상응한다 : 해탈도를 완성한다는 의미이다.
- 104)일심의 자성을 본다 : 생상生相이 없으므로 멸상滅相도 없고, 멸상滅相이 없으므로 생상生相이 없어서 생멸상生滅相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 105)『大乘起信論』(T32, 576b) 참조.
- 106)이 대목은 『大乘起信論』이 『金剛三昧經』을 인용했다는 뉘앙스로 비친다. 이하의 몇 가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107)무득으로써 유득의 집착(執)을 없애 주는 것에 첫째는 무득을 그대로 설명하고, 둘째는 의정을 거듭 없애며, 셋째는 이해를 시키고, 넷째는 마무리를 짓는 등 네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셋째와 넷째가 여기에 해당한다.
- 108)『大乘起信論』(T32, 576c).
- 109)위에서 「本覺利品」을 첫째는 본각의 이익을 널리 설명하고, 둘째는 게송으로 찬탄하며, 셋째는 그 당시의 대중이 이익을 터득하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이 가운데 그 둘째인 게송으로 찬탄하는 대목에 해당한다.
- 110)「本覺利品」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 가운데 셋째로서 그 당시의 대중이 이익을 터득하는 것에 해당한다.
- 111)『達磨語錄』에 의하면, 이입理入은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동일한 진성眞性의 소유자임을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심신深信하는 것을 가리키고, 행입行入은 이입의 실천으로서 보원행報怨行·수연행隨緣行·무소구행無所求行·칭법행稱法行의 사행四行을 가리킨다. 『少室六門集』 「二種入」(T48, 369c)에서 이입理入의 경우 입入은 깨달음에 들어감이고 행입行入의 경우 입入은 이미 깨달음에 들어가 그것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 『金剛三昧經論』에서 원효는 행입의 경우에 대하여 자리의 행입과 이타의 행입의 이행二行으로 설명을 한다.
- 112)「入實際品」은 정설분의 일곱 가지 품 가운데 그 넷째에 해당한다.
- 113)비시非時 : 본래 율장에서는 ‘율로 정해 놓은 시간을 벗어난 때’의 의미로서 율에 어긋나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법正法의 시대가 아닌 상법像法 내지 말법末法의 시대로서 불법의 유통 여건이 불리한 시대를 가리킨다.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5a~b)에서는 특히 오탁악세五濁惡世의 투쟁견고시대鬪諍堅固時代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 114)모든 중생의 정情과 지智 : 둔근중생의 정식情識과 이근중생의 심지心智를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5a) “引一切邪見。 鈍根衆生之情識。 與利根衆生之心智。” 참조.
- 115)살반야薩般若 : 일체종지一切種智이다. 곧 반야般若는 인因이고 살바야薩婆若는 과果이다. 중생으로 하여금 이 일체종지라는 과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5a) 참조.
- 116)오중오백세五重五百歲 : 제1오백세의 해탈견고시대解脫堅固時代, 제2오백세의 선정견고시대禪定堅固時代, 제3오백세의 다문견소시대多聞堅固時代, 제4오백세의 탑사견고시대塔寺堅固時代, 제5오백세의 투쟁견고시대鬪爭堅固時代를 가리킨다.
- 117)순順은 설법을 듣는 대상인 중생의 깜냥에만 맞추어 설하는 것으로 중생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불순不順은 설법을 하는 주체인 보살의 입장에서만 설하는 것으로 중생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일으킬 인연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순의 입장으로 설하고, 때로는 불순의 입장으로 설하는 방편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118)‘맞다’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허공의 바람에 흩날리지 않게 하거나 내지 허공의 바람을 맞아 휘말리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다.
- 119)오공五空 : 삼유三有가 공한 것이고, 육도六道의 모습이 공한 것이며, 법상法相이 공한 것이고, 명상名相이 공한 것이며, 심식心識의 뜻이 공한 것을 가리킨다.
- 120)제법의 자성이~것이 아니고 : 어떤 본에는 “제법의 자성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로 되어 있다.
- 121)무無도 아니며~아니기 때문이다 : 『大正新修大藏經』에 수록된 『金剛三昧經』을 비롯하여 『金剛三昧經註解』, 『金剛三昧經通宗記』의 경우처럼 ‘성비유무性非有無’의 경우로 해석하면 ‘제법의 자성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라는 뜻이 된다. 이하 이 대목에 해당하는 『金剛三昧經論』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122)세간의 오법五法 : 삼유三有·육도령六道靈·법상法相·명상名相·심식心識을 가리킨다.
- 123)공에 들어간다(入空) : 오법이 모두 공하다는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리킨다.
- 124)『大方廣佛華嚴經』 권8(T9, 449c).
- 125)『大方廣佛華嚴經』 권17(T10, 89a). 60권본 『大方廣佛華嚴經』의 경우 권8(T9, 449c)에 나온다.
- 126)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첫 번째 답변이다.
- 127)『顯揚聖敎論』 권3(T31, 493b).
- 128)삼유가 공한 것은 유전진여이고, 육도의 모습이 공한 것은 실상진여이며, 법상이 공한 것과 명상이 공한 것과 심식이 공한 것의 세 가지 공은 유식진여이다.
- 129)여기에서 말하는 세 가지 공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5c)에서는 “오직 제9지, 제10지, 등각, 묘각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唯九地十地。 與等玅二覺所知。 他不能解。)”라고 말한다.
- 130)남본 『大般涅槃經』 권15(T12, 704a).
- 131)첫째의 공문 안이란 삼공 가운데 “공상도 또한 공한 것”이고, 둘째의 공 가운데란 “공공도 또한 공한 것”을 가리킨다.
- 132)대력보살이 질문한 세 번째에 해당한다.
- 133)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보살이여, 명칭(名)과 뜻(義)이라는 모습도 없고 불가사의하다.”
- 134)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명칭이 없는 명칭이지만 명칭 아님이 없고 뜻이 없는 뜻이지만 뜻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 135)실제의 뜻을 드러내는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공을 설명하며, 셋째는 공이 곧 진眞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진眞이 곧 여如임을 설명한다. 이 가운데 그 넷째에 해당한다.
- 136)『究竟一乘寶性論』 권2(T31, 824c)에서는 『勝鬘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b)의 내용을 인용하여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찰나도 선심은 번뇌에 오염된 바가 없다. 찰나도 불선심 또한 번뇌에 오염된 바가 없다. 번뇌가 마음에 닿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않는데 어떻게 법에 닿지도 않고 마음을 오염시킬 수 있겠는가.(刹那善心非煩惱所染。 刹那不善心亦非煩惱所染。 煩惱不觸心。 心不觸煩惱。 云何不觸法。 而能得染心。)”
- 137)『勝鬘獅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T12, 22b).
- 138)욕애주지欲愛住地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오욕에 집착하는 번뇌로서 욕계의 사혹思惑이고, 색애주지色愛住地는 색신色身에 집착하는 번뇌로서 색계의 사혹思惑이고, 유애주지有愛住地는 무색계의 사혹이다.
- 139)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대목에 네 부문이 있는데, 그 첫째가 실제의 뜻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합한 네 부문이란 첫째는 오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공을 설명하며, 셋째는 공이 곧 진眞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진이 곧 여如임을 설명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140)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네 가지 문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 141)『二障義』(H1, 811c~812a).
- 142)이입二入 : 이입理入 곧 지전위地前位와 행입行入 곧 지상위地上位를 가리킨다.
- 143)이런 것들 : 십주위와 십행위와 십회향위에서 각각 인공人空과 법공法空과 평등공平等空을 터득한 것을 가리킨다.
- 144)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친 네 부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 145)『梵網經』 권상(T24, 997c).
- 146)『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권상(T8, 826c).
- 147)원구願求가 없고 평등平等에 통달하여 피차가 없다 : 원구願求가 없는 것은 무원삼매無願三昧의 터득이고, 평등에 통달하여 피차가 없다는 것은 무상삼매無相三昧의 터득을 가리킨다.
- 148)팔풍八風 : 마음을 흔드는 이利·쇠衰·훼毁·예譽·칭稱·기譏·고苦·낙樂을 가리킨다.
- 149)적멸 : 여기에서는 “마음도 발생하지 않고 경계의 모습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
- 150)입入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7a~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입入이라는 글자의 뜻을 설명한 대목이다. 이성理性은 본래 무생이고, 심행心行은 본래 무상無相이다. 그러므로 일법도 취함이 없고 일법도 버림이 없다. 무릇 진성의 도리는 취할 수 없기 때문이고 진심은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행心行은 무상無相하여 본래 나옴도 없고, 이성理性은 무생無生하여 본래 들어감도 없다. 이것은 보살이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에는 본래 나옴도 없고 들어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옴과 들어감이 없는 마음을 터득한즉 들어가도 들어감이 아닌 줄을 안다. 들어감도 들어감이 아니지만 억지로 그것을 들어감이라 말한다.(此明入字之義。 言理性本自無生。 心行本自無相。 故不取一法。 亦不捨一法。 葢以眞性之理。 不可取故。 眞心之行。 不可捨故。 然心行無相。 本無所出。 理性無生。 本無所入。 是以菩薩利生之心。 本無出入。 然得此無出無入之心。 則知入而不入。 以入而不入。 故強名之曰入。)”
- 151)입入 : 구체적으로는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의 입을 가리키고, 넓게는 실제에 들어가는 경우의 입을 가리킨다.
- 152)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친 네 부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 153)뜻(義相) : 위에서 실제의 뜻을 드러내는 가운데 네 가지, 곧 첫째는 오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공을 설명하며, 셋째는 공이 곧 진眞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진이 곧 여如임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그 넷째 부분에서 언급했던 명칭(名相)과 뜻(義相) 가운데 뜻(義相)에 해당한다.
- 154)왜냐하면 뿌리(根)와~없기 때문이다 :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7a)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오직 명칭뿐이므로 근根·이理의 법으로 말하면 이理도 없고 근根도 없다. 근根은 곧 근경根境을 말하고, 이理는 곧 의리義理이다. 근경은 비상非相이고 의리는 무생無生이므로 모두 유有가 아니다. 근根과 이理의 두 가지는 이미 쟁론의 상대가 아닌데 그것이 어찌 유有이겠는가.(何以惟名。 根理之法。 非理非根。 根即根境。 理即義理。 根境非相。 義理無生。 故皆不有。 二者既非諍論何有。)”
- 155)세 가지 진여법 : 선법진여善法眞如·불선법진여不善法眞如·무기법진여無記法眞如를 가리킨다.
- 156)동분同分 : 『俱舍論』에서 말하는 75법에서 14가지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모든 법상法相으로 하여금 동일하게 만드는 인이 되기 때문에 동분同分이라 말한다. 여기에 중생동분衆生同分 곧 유정동분有情同分과 법동분法同分의 두 가지가 있다.
- 157)이 경문의 대목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7(X35, 298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대력보살이 법法과 의義를 깊이 이해한 것이다. 또한 먼저 불가사의함을 찬탄하고 나중에 그 불가사의함을 자세하게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적하고 여여한 법상에 대하여 저는 지금 그것이 다음과 같은 줄을 알았습니다. 곧 온갖 법이 모여서 성취된 것이 아니고, 또한 한 가지 법으로 홀로 성취된 것도 아니며, 일체의 유위법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무위법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며, 그것이 적취된 것이라 말할 수가 없고, 그것이 흩어진 것이라 말할 수도 없으며, 한 가지도 발생함을 볼 수가 없고, 한 가지도 소멸함을 볼 수가 없으며, 또한 오고 가는 모습으로 터득되는 것도 아니므로 본체가 본래부터 여여한 까닭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그것을 ‘불가사의합니다.’라고 찬탄한 것은 부처님의 뜻을 깊이 이해한 것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此乃深領法義。 亦先歎不可思議。 而後言之曰。 如是法相。 吾今已知。 其不爲衆法所合成。 亦不可言一法之所獨成。 不爲一切有法所羈。 不爲一切無法所絆。 不可言其有所積聚。 不可言其有所散失。 不見有一法可生。 不見有一法可滅。 亦無來去之相可得。 體本如故。 言已。 復歎之曰。 不可思議。 其深領佛意。 可知矣。)”
- 158)셋째로 허물(過)을 떠나 있음을 자세하게 해석한 네 부분 가운데 셋째에 해당한다.
- 159)『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7b)에 의하면 ‘불사의심不思議心’은 여래의 공적한 일심과 여여한 마음이고, ‘심역여시心亦如是’는 일체중생의 마음을 가리킨다.
- 160)셋째로 허물을 떠나 있음을 자세하게 해석한 네 부분 가운데 넷째에 해당한다.
- 161)실제에 들어가는 뜻을 널리 펼친 네 부분 가운데 넷째에 해당한다.
- 162)『大般涅槃經』 권25(T12, 767c).
- 163)두 가지 공 : 소연연所緣緣이 공하다는 것과 증상연增上緣·등무간연等無間緣이 공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 164)실제에 들어간 객체가 변견을 떠나 있다는 두 부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 165)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분은 “여여한 모습은 본래 유나 무가 아니다.”이고, 둘째 부분은 “유나 무의 모습은 오직 분별의 심·식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이며, 셋째 부분은 “보살이여, 여여한 마음의 자성은 자체가 없지는 않지만 자체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이고, 넷째 부분은 “보살이여, 무이지만 무가 아닌 모습으로서 언설의 경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은 텅 비고 밝아 모습이 없어서 심尋과 사伺의 언설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이다. 이하에서 첫째 경우와 둘째 경우를 생략하고 셋째 경우부터 설명을 가한 것은 첫째와 둘째의 경우는 경문을 보면 그대로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166)「入實際品」의 경문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그중 둘째가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문단인데, 여기에 다시 네 가지 문이 있다. 본문은 이 네 가지 문 중 셋째에 해당한다.
- 167)스물여덟 종류의 성스러운 가르침 : 28견見 혹은 28부정견不正見으로서 『大乘阿毘達磨雜集論』 권12(T31, 751a~c) 참조.
- 168)『大般涅槃經』 권10(T12, 668a), “세존은 항상 설한다. 일체의 외학에 속하는 95종은 모두 악도에 나아가지만, 성문제자는 모두 바른 길을 향한다.(世尊常說。 一切外學。 九十五種。 皆趣惡道。 聲聞弟子。 皆向正路。)”
- 169)『菩薩瓔珞本業經』 권2(T24, 1010b~1023a).
- 170)『大方廣佛華嚴經』 권15~권39(T10, 83c~210c).
- 171)본각의 이익 : 실제에 들어가 있는 본각과 그것을 실천하는 이행利行을 가리킨다.
- 172)네 가지 뜻 : 현상적인 두 가지 모습 곧 삼세三世의 시간時間과 육방六方의 공간空間, 그리고 본질적인 두 가지 속성 곧 심심甚深한 변제邊際와 광대廣大한 소제所際를 가리킨다.
- 173)「入實際品」의 경문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그 중 둘째로 입실제의 도리를 자세하게 드러내는 데 다시 네 가지 문이 있다. 이 문단은 그 네 가지 문 중에서 넷째에 해당한다.
- 174)네 계위 : 지전의 네 계위는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을 가리킨다.
- 175)수번뇌 : 근본무명번뇌根本無明煩惱를 따라서 발생하는 지말번뇌枝末煩惱를 가리킨다.
- 176)안팎의 번뇌 : 『金剛三昧經註解』에서는 51가지 마음을 얽어매는 것으로 유식수도오위唯識修道五位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첫째의 자량위資糧位는 지전地前의 주住·행行·향向의 30심으로서 불도의 자량을 저장하는 지위이다. 둘째의 가행위加行位는 30심의 끝으로 장차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것인데,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의 사선근四善根을 방편으로 삼아 가행加行하는 지위이다. 셋째의 통달위通達位는 초지의 입심入心(地마다 각각 入·住·出의 三心이 있다)으로서 이공무아二空無我의 도리에 통달하는 지위인데, 곧 견도見道이다. 넷째의 수습위修習位는 초지의 주심住心부터 제10지의 출심出心 곧 등각 사이에서 거듭 묘관을 수습함으로써 나머지 장애를 단제하는 지위인데, 곧 수도修道이다. 다섯째의 구경위究竟位는 구경에 단혹증리斷惑證理하는 지위인데, 곧 무학도無學道이다. 이것은 법상종法相宗에서 내세운 것이다. 그 인·과를 합하여 41위인데, 여기에다 십주十住 이전인 십신위十信位를 열면 곧 51위이고, 제10지의 끝에다 등각等覺을 열면 곧 52위가 된다. 법상종의 41위와 천태종의 52위는 개開·합合이 다를 뿐이다.
- 177)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 : 제7식에 해당하는 말나식의 네 가지 번뇌는 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이다. 심心·의意·식識에서 심은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고, 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이며, 식은 제6 의식意識이다. 이처럼 제7의 말나末那는 의意로 번역된다.
- 178)능입의 방편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둘째인 자세한 것에 해당한다.
- 179)세 가지에~여래선에 들어간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1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存은 마음을 집중하는 것(注念)이고, 수守는 마음을 보호 유지하는 것이며, 여래선如來禪은 자성청정의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고, 관觀은 마음을 섭수하여 돌이켜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관심여理觀心如는 자성의 진리로써 일심진여의 본체를 돌이켜서 관찰하는 것이다.(注念曰存。 護念曰守。 如來禪。 返於自性清淨之體。 攝心返視曰觀。 理觀心如。 以自性眞理。 返觀一心眞如之體也。)”
- 180)『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4a), “十爲自在轉大法輪故。 所謂菩薩三寶。 菩薩爾時於第一義中道智爲覺寶。 一切法無生動與則用爲法寶。 常行六道與六道衆生和合故名僧寶。 轉一切衆生流入佛海故。” 참조.
- 181)세 가지~금강해탈·반야해탈이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2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보여 주는 세 가지 해탈상은 각각 허공해탈문·무상해탈문·무작해탈문이다. 또한 허공은 곧 법신의 뜻이고, 금강은 곧 법신해탈의 몸이며, 반야는 곧 법신해탈의 작용이다. 그런즉 법신과 반야는 모두 해탈법상이 되므로 셋이 곧 하나이고 하나가 곧 셋으로서 열반의 삼덕을 성취하는 비장祕藏이다.(此示三解脫相。 即是空無相無作三解脫門。 又虗空即是法身義。 金剛即法身解脫之體。 般若即法身解脫之用。 然法身般若。 摠成解脫法相。 三即是一。 一即是三。 以成涅槃三德祕藏也。)”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9a)에서는 허공해탈은 법신法身이고, 금강해탈은 진공眞空이며, 반야해탈은 묘유妙有라고 해석한다.
- 182)방편을 자세하게 드러낸 대목 가운데, 첫째 문답은 법수를 들어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에 상대하여, 둘째 및 셋째 문답은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에 해당한다.
- 183)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문답 가운데 첫째 답변을 가리킨다.
- 184)육관六觀 : 주관住觀·행관行觀·향관向觀·지관地觀·무상관無相觀·일체종지관一切種智觀을 가리킨다.
- 185)사공四空 : 사공정四空定으로 무색계의 식무변처공識無邊處空·공무변처공空無邊處空·무소유처공無所有處空·비상비비상처공非想非非想處空을 가리킨다.
- 186)『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3b).
- 187)사공四空 : 사공정四空定 또는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 한다. 무색계에서 터득하는 네 가지 정定으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가리킨다.
- 188)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대목 가운데 둘째 답변을 가리킨다.
- 189)『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3a).
- 190)『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4b).
- 191)『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4b).
- 192)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을 보이는 두 가지 부분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 193)이와 같은 사람 : 그 중생으로 하여금 세 가지에 통하고 하나를 유지하여(存三守一) 여래선에 들어가 그 선정으로 인하여 들뜬 마음이 곧 사라지게 된 사람을 가리킨다.
- 194)『妙法蓮華經』 권4(T9, 32a).
- 195)『妙法蓮華經』 권4(T9, 32a).
- 196)이 경문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9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일지는 곧 초심에 정각하는 경지이고, 또한 진여의 자성이 공한 바다는 실로 대심의 경계로서 이승이 터득하는 견해가 아니다. 여래의 삼매(印解)는 이승에게는 전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삼매를 만나면 그 삼매에 취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잠시 미몽에 빠지지만 삼매에서 깨어나 발심하면 다시 불지를 터득한다.(彼一地者。 即初心正覺之地。 及與眞如性空之海。 實大心境界。 非二乘所得見也。 如來印解。 非二乘全無。 但爲三昧所醉。 暫時迷失。 定醒發心。 還得佛地。)”
- 197)세 가지 관행 : 이제관二諦觀·평등관平等觀·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을 가리킨다.
- 198)이승인의 경우에는 일지一地와 공해空海의 경지를 볼 수 없다는 대력보살의 말에 긍정해 준 것이다.
- 199)궁극적인 깨침보다는 오히려 현재 눈앞에 전개되는 선정의 공능을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적정을 추구하여 선정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2c)에서는 이승의 경우 사선四禪 및 사공정四空定의 선적禪寂에 탐착하는 것이라 말한다.
- 200)『入楞伽經』 권4(T16, 540b).
- 201)수행자리에서 찰나에~결정적으로 명백해져서 :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39c~ 240a), “이와 같이 또한 점수를 말미암아 들어가는데, 어찌 돈교대심이라 하는가.(如斯亦由漸而入。 何稱頓教大心。)”에서는 돈교대심頓敎大心이라 말하고,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3c), “이것은 곧 모든 경지를 한꺼번에 초월하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서 무공용의 대행이다.(此直示頓超諸地。 無功用大行。)”에서는 모든 수행이 지위를 돈초頓超하여 공용功用이 없는 대행大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한다.
- 202)아비발치阿鞞跋致 : 십지十地 가운데 제8 불퇴전지不退轉地를 말하지만 십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 203)앞의 계위 : 육행六行 가운데 앞에서 말한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를 가리킨다.
- 204)계율을 받은~교만해지기 때문에 : 분별이 없는 그와 같은 사람이 가령 계율을 받으면 계를 받았다는 사실에 아만심이 높아졌을 거라는 내용이다.
- 205)삼공취三空聚 : 삼삼매三三昧인 공삼매空三昧·무상삼매無相三昧·무원삼매無願三昧를 말한다. 한편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3c)에서는 공상역공空相亦空, 공공역공空空亦空, 소공역공所空亦空으로 해석하고 있다.
- 206)먼저 질문 : 대력보살의 질문은 하나이지만 내용으로는 두 가지에 해당한다. 그 두 가지 내용 가운데 첫째를 가리킨다.
- 207)소승계의 경우 바라제목차를 중시하여 지악止惡이 목표이므로 계의 결과를 중시한다. 이에 반하여 대승계는 심지계心地戒로서 작선作善이 목표이므로 원인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바라제목차(계의 조항)를 받는다는 것은 소승의 경우를 가리킨다.
- 208)일곱 가지 계 : 신업身業의 세 가지 계와 구업口業의 네 가지 계를 가리킨다.
- 209)삼취정계三聚淨戒 : 섭선법계攝善法戒·섭률의계攝律儀戒·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가리킨다.
- 210)부조지不調地 : 무학지無學地로서 아라한의 경지이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4a), “『文殊般若經』에서 말한다. 번뇌를 다한 아라한을 부조不調라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가 다하여 다시는 번뇌에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文殊般若經云。 漏盡阿羅漢。 是名不調。 以諸結已盡。 更無所調故。)” ;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0b), “부조지란 곧 무조지無調地인데, 부조란 곧 공용이 없고 분별이 없는 자연의 무위행인 무공용행無功用行으로서 삼승이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不調地者無調。 不調即無功用行。 非三乘思議之境也。)”
- 211)삼무수대겁三無數大劫에 걸쳐 점차 단제된다는 것이 전제된 의미의 ‘남아 있는 번뇌’이지 아직 단제하지 못했다는 의미의 ‘남아 있는 번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곧 여기에서는 차전遮詮이 아닌 표전表詮의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 212)『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4b)에서는 이상의 세 게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목은 수증修證의 요체로서 육행六行은 보살이 닦는 수행이고, 삼공三空은 이에 보살이 증득한 진보리도眞菩提道이다.(此明修證之要。 六行爲菩薩所修之行。 三空乃菩薩所證之眞菩提道也。)”
- 213)「入實際品」에서는 심진여문을 드러내는 네 부분 가운데 그 셋째인 사리불(身子)이 이해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 214)사생四生 : 네 차례의 생사生死로서 제1생에는 성문의 자량위資糧位를 닦고, 제2생에는 성문의 가행위加行位를 닦으며, 제3생에는 연각의 자량위와 가행위를 닦고, 제4생에는 성위聖位에 들어가 과보를 획득한다.
- 215)제 머묾~머물지 않음은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4b)에서는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생사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지 스스로 적멸의 세계에 머무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216)구족한 연후에 나오려 하네 : 중생이 반야해般若海를 다 구족한 연후에야 내가 중생의 세계에서 떠난다는 말이다.
- 217)여기 두 게송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8(X35, 304b)에서는 중생의 이익을 위한 원력이 큰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 218)변제정邊際定 : 사념청정捨念淸淨이 성취되는 제4선으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경지를 가리킨다.
- 219)「入實際品」에서는 심진여문을 드러내는 네 부분 가운데 그 넷째인 당시의 대중이 획득한 이익에 해당한다.
- 220)‘세 가지 진여문’은 첫째는 무상진여無相眞如인데 제법의 본체로서 변계소집의 허상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생진여無生眞如인데 제법은 인연의 소생으로 실생實生이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무성진여無性眞如인데 제법의 진체眞體는 언망여절言亡慮絶이므로 망정妄情에 집착되지 않는 실성實性이라는 것이다.
- 1)「第三」無{甲}。
- 1)「二」作「一」{甲}。
- 1)「三」作「二」{甲}。
- 1)「設」作「說」{甲}。
- 2)「契」作「▼(㓞/廾)甲}。
- 3)「第四」無{甲}。
- 1)「俱」作「具」{甲}。
- 2)「衆」無{甲}。
- 3)「刺」作「㓨」{甲}。
- 1)「淮」作「准」{甲}。
- 1)「第五」無{甲}。
- 1)「仙」作「屳」{甲}。
- 2)「空二」作「二空」{甲}。
- 1)「明」作「名」{甲}。
- 2)「有」作「其」{甲}。
- 3)「二」疑「三」{編}。
- 4)「二」作「一」{甲}。
- 1)「三」作「一」{甲}。
- 1)「棄」作「弃」{甲}。
- 1)「如」作「始」{甲}。
- 2)「入空名」作「名入空」{甲}。
- 1)「栖」作「拪」{甲}。
- 1)「慢」作「▼(忄+㬅)」{甲}。
- 2)「奪」作「▼(大/集)」{甲}。
- 1)「三」作「二」{甲}。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호귀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