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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碑文
한용운 찬, 龍城大禪師 舍利塔碑銘 幷序
- 소재 ; 해인사 용탑선원(1941)
- 師曹溪直下、第三十五代法孫喚惺志安之後裔、而法諱震鍾、號龍城。白氏子、系出水原、世居全羅道南原竹林里。父曰南賢、母孫氏。母夢一異僧、著法衣入室、因以有娠。以李朝高宗甲子五月八日生師。
- 대선사께서는 조계종의 법맥을 곧바로 이으신 제35대 법손 환성 지안喚惺志安1) 선사의 후예後裔로, 법휘法諱는 진종震鍾이고, 호號는 용성龍城이다. 백씨白氏의 자제로,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대대로 전라도 남원 죽림리竹林里2)에 살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손씨孫氏이다. 어머니가 비범하고 기이한 승려(異僧) 한 분이 법의法衣를 입고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스님을 잉태하였다. 그리고 조선 고종高宗 갑자甲子(1864)년 5월 8일에 스님을 낳았다.
- 師生而穎悟、不喜羶葷、每有不忍之行。六·七歲時、見其父釣魚、擇其未死者放之水。父詰之、師曰安忍見其死。父異之。九歲能詩。見兒童摘花、直吟摘花手裏動春心、人稱其才。
-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였고, 비리거나 매운 음식(羶葷)3)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마 하지 못하는 행동(不忍之行)4)도 있었으니, 6~7세에는 아버지께서 낚시하는 것을 보고는, 살아 있는 물고기들을 골라서 물에 놓아 주었다. 아버지께서 그것을 꾸짖자, 스님이 말하길 “어찌 차마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여서 아버지를 놀라게 하였다. 9세에 이미 시詩를 잘 지었는데, 아이가 꽃을 따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꽃을 따자 손 안에서 봄의 마음 꿈틀대네.(摘花手裏動春心)”라고 읊어, 사람들이 그 재주를 칭찬하였다.
- 0001_0001_b_01L嘗告父母以出家、父母初則難之、大事因緣竟莫能遏、遂許之。十九歲入伽倻山海印寺、依華月和尙落髮。後叅義城孤雲寺水月長老、問生死事大、無常迅速、如何見得性。長老曰世屬像季、法遠根鈍、驟難超入、莫若先誦大悲呪、業障自除、心光頓發。師遂信而不疑、自此誦大悲呪、口口聲誦、心心黙念。
- 일찍이 부모님께 출가하겠다고 알리자 처음에는 부모님께서 반대하였지만, 대사大事의 인연因緣을 끝내 막을 수 없었는지 결국 허락하였다. 19세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서 화월華月 화상和尙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았다. 후에 의성義城 고운사孤雲寺의 수월水月 장로長老를 찾아뵙고, “생사는 중대한 일이며(生死事大) 세상은 덧없고 빨리 변하는데(無常迅速),5) 어떻게 해야 불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장로는 “세속은 말세(像季)6)이고 법法은 멀어졌으며 근기根機는 둔해져서, 정진精進하여 성인의 경지에 다다르기가 어려워졌으니, 우선 대비주大悲呪7)를 외워 업장業障8)을 사라지게 하고 심광心光9)이 피어나게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스님께서 그 말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아서 그때부터 대비주를 외웠는데, 입으로는 소리 내어 외우고 마음으로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 後至楊州普光寺兜率庵、猛加精進、一日忽疑、森羅萬象皆有本源、我此見聞覺知、從何而生。疑來疑去、疑到十二晝夜、猛覺一念、如桶底脫相似。往叅金剛山無融禪師、具述前緣、融曰不道不是、更叅話頭。
- 후에 양주楊州 보광사普光寺 도솔암兜率庵에 가서, 맹렬히 정진精進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 문득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모두 근원(本源)이 있는데, 나의 견문각지見聞覺知10)는 어디로부터 생겨났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끊임없이 의심이 들기를 6일 만에 모든 것을 단박에 깨닫자, 마치 물통의 밑바닥이 빠지듯 훤히 깨닫게 되었다(桶底脫).11) 금강산의 무융無融 선사禪師를 찾아가서 찾아온 이유를 자세히 말하니, 무융 선사가 말하길 “그 깨달음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다시 화두를 참구해 보아라.”라고 하였다.
- 0001_0002_a_01L師自是叅狗子無佛性話。到兜率庵精進、一日忽然失笑云去年貧未始貧、無立錐之地、今年是始貧、錐也無。正爲我準備語也、自此有契。
- 스님은 이때부터 ‘개에게는 불성이 없는가(狗子無佛性)’12)라는 화두를 깊이 생각하였다. 도솔암에 돌아와서 정진하던 어느 날, 문득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작년 가난은 가난도 아니라(去年貧未始貧)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無立錐之地), 금년 가난이 진짜 가난이라(今年是始貧) 송곳마저 없다네(錐也無).13) 이 말이 바로 나를 위해 준비된 말이구나.”라고 말하였고, 이로부터 대도에 계합함이 있었다.
- 二十七歲於通度寺金剛戒壇、師禪谷律師受具戒及大戒。其後曺溪山松廣寺三日庵夏安居時、閱傳燈錄、至黃蘗法語、月似彎弓、少雨多風處、猛然大悟。不啻於月面佛日面佛話、狗子無佛性話、煥然明白、百千公案了如氷釋。
- 27세에 통도사通度寺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선곡禪谷 율사律師로부터 비구계(具戒)14)와 보살대계(大戒)15)를 받았다. 조계산曺溪山 송광사松廣寺 삼일암三日庵에서 하안거夏安居16)를 할 때에 『전등록傳燈錄』17)을 보다가 황벽黃蘗 선사의 법어法語 중에 “달은 활처럼 휘어 있고(月似彎弓), 비는 적고 바람은 많네(少雨多風)”라는 구절에 이르러 일순간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월면불月面佛도 일면불日面佛’18)이라는 화두뿐만 아니라,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에 이르기까지 모두 밝고 분명해졌으며, 셀 수 없이 많은 공안公案19)들이 모두 얼음 녹듯 환하게 풀렸다.
- 乃作偈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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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金烏千秋月 금오산20) 천추의 달이요
洛東萬里波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漁舟何處去 물고기 잡는 배는 어디로 갔나
依舊宿蘆花 여전히 갈대꽃에 머물고 있네
- 0001_0002_b_01L更閱一大時敎、以度生爲己任、入泥入水、京城各處、高擧祖令、大闡弘猷。未幾創敎會、特明大覺之玄旨、大欲傳布海外、別設屬會于間島。島且譯華嚴·圓覺·楞嚴·金剛·起信等經、傳廣布內外、其外所著不尠。常好放生、其數不億、可謂兼行六度、無一不備。
- 다시 일대시교一大時敎21)를 보고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고(入泥入水)22)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조사의 가르침(祖令)을 높이 들고 여래의 넓은 법(弘猷)을 크게 떨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각교회(敎會)23)를 창시하여, 대각大覺의 심오한 이치를 밝히는 데 특별히 노력하였고, 해외까지 포교를 크게 넓히기 위해 별도로 간도間島에 지회支會24)를 세웠다. 또한 간도에서 『화엄경(華嚴)』·『원각경(圓覺)』·『능엄경(楞嚴)』·『금강경(金剛)』·『기신론(起信)』 등 여러 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외에 널리 전파하였으며, 그 밖의 저술도 적지 않다. 늘 방생하길 좋아하여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가히 ‘6바라밀(六度)을 함께 행하여 하나라도 빠짐이 없다’고 말할 만하였다.
- 六十一歲舍利一粒出齒間、色紫光潤、形似頂骨。庚辰春、忽示疾、付囑門徒、吾將滅度、切莫擧哀掛孝。但誦無無上大涅槃、圓明常寂照足矣。二月二十四日黎明、臨終時、門人問當恁麽時、向甚麽處去。師云、匏花穿籬出、閑臥麻田上、微笑入寂、異香動人、一大事因緣至是而畢。世壽七十七、僧臘五十九。翌年、門徒等起塔於海印寺之西麓以安師之舍利、立石。
- 61세에 사리舍利 한 알이 치아 사이에서 나왔는데, 자줏빛에 윤택이 났으며 모양은 윗머리뼈(頂骨)를 닮아 있었다. 경진庚辰(1940)년 봄에 갑자기 병세를 보이자, 문도들을 불러 “내가 장차 멸도滅度할 것이니, 절대 곡을 하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25)고 당부하였으며, “다만 ‘무상대열반無上大涅槃 원명상적조圓明常寂照’26)라는 구절만 암송해 준다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2월 24일 새벽에 임종 시에 문도들이 묻기를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스님께서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고(匏花穿籬出),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눕네(閑臥麻田上)”라고 대답하였다. 미소를 지으며 입적하였는데, 기이한 향기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 일대사一大事의 인연因緣이 여기에 이르러 마쳤다. 세수世壽는 77세였고, 승랍僧臘은 59세였다. 다음 해에 문도 등이 해인사의 서쪽 기슭에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고, 비석을 세웠다.
- 而記銘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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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03_a_01L그 비명碑銘은 다음과 같다.
法貴度生 중생 제도를 귀히 여겨
隨機從緣 근기 따르고 인연 따라
恒沙方便 셀 수 없는 방편 쓰되
無關不玄 현묘하지 않음이 없네
以燈傳燈 등불로써 등불을 전하여
有正無像 형상 없이 바르게 있어
是故大德 이 때문에 대덕스님께선
旣龍且象 용龍인데다 코끼리로다
有師龍城 대선사 용성 스님께선
錐也不留 송곳의 틈조차 안 주고
未說一偈 한 게송도 아니 말해도
山河點頭 산하가 모두 끄덕였네
非珠有珠 사리 아닌 사리 있어27)
離色離空 색도 공도 다 떠나서
塔而安之 탑을 세워 안치하니
伽倻之中 옛 가야의 땅이라네
知音千載 천년토록 날 알아줄 이가
少亦何傷 적다고 어찌 마음 상하겠나
古桐離絃 옛 거문고의 줄이 끊겼어도
山峩水洋 산은 높고 바다는 넓구나28)
- 佛紀 二千九百六十八年 辛巳 七月 日、龍雲 謹撰、吳世唱 篆、一齋 崔宗瀚 書
- 불기佛紀 2968년 신사辛巳(1941)년 7월 일 용운龍雲이 삼가 글을 짓고, 오세창吳世唱이 전서篆書를 썼으며, 일재一齋 최종한崔宗瀚이 글씨를 쓰다.
문도질門徒秩
-
은법제자恩法弟子
벽허 상휘碧虛常輝, 운산 성주雲山性周, 단암 성호檀庵性昊, 회암 준휘檜庵俊輝, 덕운 기윤德雲基允, 자운 기정紫雲基正, 동곡 법명東谷法明, 봉암 대희峰庵大喜, 해문 영주海門永周, 해운 재국海雲載國, 포우 혜명抱牛慧明
수법제자受法弟子
선파 학성仙坡學成, 대가 우성大呵愚惺, 경성 덕율警惺德律, 자항 선주慈航善柱, 계월 경선溪月敬善, 보우 용기普雨龍起, 고암 상언古庵祥彦, 금포 수현錦圃守玄, 인곡 창수仁谷昌洙, 중봉 태일中峯泰一, 보경 봉운普鏡峯雲, 성봉 응성性峰應惺, 동헌 태현東軒太玄, 도암 정훈道庵禎熏, 향산 종원香山鍾遠, 동암 성수東庵聖洙, 성암 경련聖庵景鍊, 자운 성우慈雲盛祐, 동호 화소東湖花笑, 연호 성민蓮湖性玟, 상락 아정常樂我淨, 보광 태연寶光泰衍, 석성 화경石城和璟
은좌恩佐
동산 혜일東山慧日, 김해 석선金海石船, 고봉 태수高峰泰秀
전계傳戒
경하 재영景霞載英
계좌戒佐
진용 황진眞龍晃震, 동명 재민東溟在敏, 야천 종이野泉宗伊, 백하 덕수白荷德秀
선좌禪佐
경봉 정석鏡峰靖錫, 범하 도홍梵河道弘, 전강 영신田岡永信
손상좌孫上佐
설곡 도윤雪谷道允, 태허 석진太虛錫珍, 화산 용석華山容錫, 범해 성안梵海性眼, 금담 병희錦潭秉喜, 선해 성철禪海性徹, 춘곡 돈수春谷頓修, 동계 태용東溪泰龍, 혜담 일원慧潭一圓, 성해 원철性海圓徹, 현경 성우玄鏡性禹, 선월 귀성禪月貴聖, 만허 유수萬虛流水, 범지梵智, 봉명鳳鳴, 성태性泰, 혜용慧勇, 석용石龍, 태식泰植, 학수學洙, 법안法眼
신도대표信徒代表
최창운崔昌雲, 고봉운高鳳雲
주지住持
설호 초우雪醐草牛
감무監務
동운 성관東雲性寬
감사監事
혜봉 대연慧峰大蓮
법무法務
능허 영진凌虛永鎭
건탑화주建塔化住
고대일화高大日華, 최선광명崔善光明
석등화주石燈化主
안선덕행安善德行, 김보광월金普光月
비석碑石 용두구좌시주龍頭龜座施住
채보현등蔡普賢燈, 순단順丹
장남長男 윤경섭尹景燮, 차남次男 윤응석尹應碩
오세창 찬, 龍城大禪師 碑銘
- 소재 ; 범어사(2001)
- 전불심인 부종수교 대각홍천 조계사조 원력수생 용성조사 진종비명(傳佛心印 扶宗樹教 大覺弘闡 曹溪嗣祖 願力受生 龍城祖師 震鍾碑銘)29)
- 永嘉覺公、證道歌云、一超直入如來地、自利利他終不竭、生於末法、能秉慧劒般若鋒金剛燄、摧外道破邪宗、震法雷擊法皷、布慈雲灑甘露。作大丈夫漢者是誰、龍城禪師是其人也。
- 영가 각공永嘉覺公30)의 〈증도가證道歌〉31)에 이르기를,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서(一超直入如來地),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自利利他終不竭). 말법 세상에 태어나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았으니(生於末法能秉慧劒), 반야의 칼날 위에 금강의 불꽃이 일도다(般若鋒金剛燄). 그것은 다만 외도의 마음을 꺾을 뿐 아니라 삿된 가르침도 깨뜨리도다(摧外道破邪宗).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法皷를 두드림이여(震法雷擊法皷),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도다(布慈雲灑甘露)”라고 하였다. 과연 이 대장부라고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용성 선사龍城禪師 바로 그 사람이다.
- 師俗姓白氏、貫水原、高麗名臣、忠肅公、諱莊之後裔、父諱南賢、母孫氏、世居湖南南原郡之竹林里、母夢異僧、著袈裟、入室中、覺而有娠、以李朝高宗甲子五月八日生師。
- 용성 선사의 속성俗姓은 백白씨이고,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고려의 명신名臣인 충숙공忠肅公 장莊의 후예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남현南賢이고, 어머니는 손씨孫氏이며, 대대로 전라도 남원 죽림리竹林里32)에 살았다. 어머니가 어느 날 비범하고 기이한 승려(異僧)가 가사袈裟를 입고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스님을 잉태하였다. 그리고 조선 고종高宗 갑자甲子(1864)년 5월 8일에 스님을 낳았다.
- 師生而有異、厭聞腥臭。黃口時也、隨其父釣魚、見生者、盡放之、六歲時也。
-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비범함이 있었으며, 비린 냄새를 맡는 것을 싫어하였다. 아주 어린아이33) 때 아버지가 낚시하는 데에 따라가서, 잡아놓은 물고기 중에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다 놓아주었으니, 스님의 나이 6살 때 일이다.
- 詠扇子詩曰、大撓八竹扇、借來洞庭風、又見村童摘花詩曰、摘花手裏動春心。是見其慧頭有來由、九歲時也。
- 글재주도 뛰어나서 ‘부채(扇子)’를 시제詩題로 하여 “팔죽선을 크게 흔들어(大撓八竹扇) 동정호의 바람을 빌려오리라(借來洞庭風)”라는 시를 지었으며, 또 시골아이가 꽃을 따는 것을 보고는 “꽃을 따자 손 안에서 봄의 기운 꿈틀대네(摘花手裏動春心)”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는 혜두慧頭34)가 일찍부터 그 유래가 있음을 보인 것이니, 스님의 나이 9살 때 일이다.
- 欲出家禀父母、父母知其法器天成、許之。遂入伽倻山海印寺、依華月和尙、得度爲僧。仍徃義城郡之孤雲寺、參水月長老、問曰、生死事大、無常迅速、如何得見性、長老曰、去聖時遙、魔強法弱、宿業障重、難於排除、若至誠誦大悲心呪、則業障自滅、心光透明。師禀教、不撤誦呪。
- 스님이 출가하고자 부모님께 아뢰니, 부모님께서는 그 타고난 법기法器35)를 아시고, 결국 허락하였다. 드디어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서 화월華月 화상에게 의탁하여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어서 의성군義城郡 고운사孤雲寺로 가서, 수월水月 장로長老를 참례하고 묻기를 “생사는 중대한 일이며(生死事大) 세상은 덧없고 빨리 변하는데(無常迅速),36) 어떻게 해야 불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如何得見性)?”라고 하였다. 이에 장로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가 오래되어, 마魔가 강해지고 법法은 약해졌으며, 숙세宿世의 업장業障37)이 무거워져서 이를 제거하기 어려우니, 만약 정성을 다하여 대비주大悲呪38)를 외우면, 자연히 업장이 소멸되고 마음이 훤히 깨닫게 될 것이니라”라고 답하였다. 스님이 그 가르침을 받고, 그로부터 밤낮없이 대비주를 외웠다.
- 遊方至楊州之普光寺兜率菴、倍加精進。忽又自疑、山河大地、萬象森羅、皆有本源、所謂人者、以何爲根、又我此見聞覺知之根在甚麽處、我之心念、從何而生。如是起疑、至第六日、一念子、如桶底脫相似。不可曰議而心思、十六歲時也。
- 그 후 여러 지방을 유행하다가 양주楊州 보광사普光寺 도솔암兜率菴에 가서 더욱더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의심하기를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삼라만상萬象森羅은 모두 근원이 있는데, 그렇다면 소위 인간이란 무엇에 근본한다는 말인가?’라 하고, 또 ‘나의 견문각지見聞覺知39)의 근본은 어디에 있으며, 나의 이 생각은 어디로부터 생겨났는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의심을 품은 지 6일째 되는 날에 의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한 생각(一念子)이 마치 물통의 밑바닥이 빠지는 것(桶底脫)40)처럼 툭 빠져서 환히 깨닫게 되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는 미묘한 것이었으니, 스님의 나이 16살 때 일이다.
- 至金剛山表訓寺、謁無融禪師、具述前緣。融問曰、能知一念子、如桶底脫相似者、是甚麽物。師黙而不答、融曰、不道不是、更參話頭始得、師自是更參狗子無佛性話、十七歲時也。
- 스님은 금강산金剛山 표훈사表訓寺에 가서, 무융無融 선사를 찾아뵙고, 이전에 경험했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무융 선사가 묻기를 “한 생각이 마치 물통의 밑바닥이 빠지는 것과 같음을 알았다고 한 주체는 바로 무엇인고?”라고 물었다. 그러나 용성 스님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무융 선사가 말하길 “그 깨달음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다시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여서, 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용성 스님은 이로부터 다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41)라는 화두를 참구하였으니, 스님의 나이 17세 때 일이다.
- 復歸普光寺兜率菴、忽然失笑、古云、去年貧、未是貧、無立錐之地、今年貧、始是貧、錐也無、正謂此之境界。二十歲時也。
- 스님은 다시 보광사普光寺 도솔암兜率菴으로 돌아와서 수행을 하였는데, 어느 날 문득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길 “옛말에 ‘작년 가난은 가난도 아니라(去年貧未始貧)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無立錐之地), 금년 가난이 진짜 가난이라(今年是始貧) 송곳마저 없구나(錐也無)’42)라고 한 말이 바로 이 상황을 이른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이는 스님의 나이 20세 때 일이다.
- 於梁山郡通度寺之金剛戒壇、師禪谷律師、受比丘戒及菩薩大戒、二十七歲時也。
- 스님은 양산군梁山郡 통도사通度寺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선곡禪谷 율사律師로부터 비구계比丘戒43)와 보살대계菩薩大戒44)를 받으니, 스님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
- 於曹溪山松廣寺之三日菴、夏安居時、披閱傳燈錄、至黃蘗法語、月似彎弓、少雨多風處、忽然打失鼻孔。45) 馬祖日面佛月面佛話、及趙州無字話、意旨煥然明白。
- 순천順天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삼일암三日菴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할 때에 『전등록傳燈錄』46)을 보다가, 황벽黃蘗 선사의 법어法語 중에 “달은 활처럼 휘어 있고(月似彎弓), 적은 비에 바람은 많네(少雨多風)”라는 구절에 이르러, 홀연히 단박에 깨달았다. 그리하여 마조馬祖 선사의 ‘월면불月面佛도 일면불日面佛’47)이라는 화두뿐만 아니라, 조주趙州 선사의 ‘무자無字’48) 화두에 이르기까지, 그 뜻이 모두 환하게 이해되고 분명해졌다.
- 乃作偈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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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金烏千秋月 금오산에 천년의 달이요
洛東萬里波 낙동강에 만리의 파도로다
漁舟何處去 고기잡이배는 어디로 갔는고
依舊宿蘆花 여전히 갈대꽃에서 머물도다
- 初悟再悟、乃至三悟、是皆師之自利事也。
- 스님의 첫 번째 깨달음,49) 두 번째 깨달음,50) 세 번째 깨달음51)은 모두 스님의 자리自利52)에 대한 일이었다.
- 師以辛亥始來京城。其翌年禪宗梵魚寺、於大寺洞、創立禪堂、請師主法師。慨然就之、每日曜說法、擧揚宗旨。京城士女、始得聞心地法門、莫不讚歎師之法道高明、四十九歲時也。
- 스님은 신해辛亥(1911)년에 처음으로 경성京城으로 왔다. 이듬해 선종禪宗 범어사梵魚寺에서 대사동大寺洞(인사동)에 선당禪堂을 창립하여 스님을 법사法師로 초청하였다.53) 개연히 그 직책을 맡아 매주 일요일마다 설법하여, 불교의 깊은 가르침(宗旨)을 받들어 널리 전하였다. 이에 경성의 사람들이 비로소 심지법문心地法門54)을 듣게 되어, 스님의 법도法道가 고명高明하다고 찬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는 스님의 나이 49세 때 일이다.
- 後師於鳳翼洞、自營殿堂顔曰、大覺弘闡玄風。兼譯佛典、如首楞嚴經、起信論、金剛般若經、圓覺經、華嚴經、梵網經、及禪門撮要等、諺文刊行、廣宣佛教。五十八歲時也。
- 그 후에 스님은 봉익동鳳翼洞에 스스로 전당殿堂을 열어 ‘대각大覺’55)이라고 하고, 선종의 깊고 오묘한 도를 널리 알렸다. 그리고 스님은 불교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수능엄경首楞嚴經』·『기신론起信論』·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원각경圓覺經』·『화엄경華嚴經』·『범망경梵網經』·『선문촬요禪門撮要』 등과 같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간행하여서,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이는 스님의 나이 58세 때 일이다.
- 自壬戌至辛未十年之間、以放生爲事、是則師之利他事也。
- 임술壬戌(1922)년부터 신미辛未(1931)년까지 10년 동안은 방생放生하는 일에 힘썼는데, 이는 스님이 이타利他56)를 행한 시기였다.
- 師一日看經次、忽自左齒間出紫黑色舍利一粒、形如佛頭、色亦光潤、六十一初度時也。
- 스님이 하루는 경전을 보는 중에 홀연 왼쪽 치아 사이에서 자흑색의 사리舍利 한 알이 나왔는데, 모양은 부처님의 머리와 닮았고, 그 색 또한 광택이 났다. 이는 61세, 환갑 때의 일이다.
- 庚辰、二月、師忽示疾、凡三日間、爲信男女晝夜說法。又囑門徒等曰、吾滅度後、汝等莫作世情悲泣穿孝、但誦無上大涅槃圓明常寂照則足矣。至二十四日、日出時、微笑入寂、世壽七十七、僧臘六十一。
- 경진庚辰(1940)년 2월에 스님이 갑자기 병에 걸렸는데, 3일 동안이나 신도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설법하였다. 그리고 문도들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입적(滅度)한 후에 너희들은 속세의 인정에 사로잡혀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말아라. 다만 ‘무상대열반無上大涅槃 원명상적조圓明常寂照’57)라는 구절만 암송해 준다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2월 24일 해가 뜰 즈음에 미소를 띠며 입적하였으니, 세수世壽는 77세였고, 승랍僧臘은 61세였다.
- 師之法嗣、寔有多人、而東山慧日是余內姪。而寓余家學西醫、高宗壬子於大寺洞禪堂、偶聞師所說法警策人認主人公之語、慧於言下、頓悟宿緣、發菩提心。遂盡棄其學、而決意出家。癸丑於梵魚寺之金魚禪院、以師爲師v得度受戒。遊方求法、不怠參學。
-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는 실로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동산 혜일東山慧日58)은 나의 처조카(內姪)이다. 그는 나의 집에 머물면서 서양 의학을 배웠었는데, 고종高宗 임자壬子(1912)년에 대사동大寺洞(인사동) 선당禪堂에서 용성 스님의 ‘사람을 경책59)하여 주인공임을 깨닫게 한다(警策人認主人公)’는 말씀을 우연히 듣고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전생의 인연(宿緣)을 단박에 깨닫고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켰다. 이에 그동안 배운 학문을 전부 버리고, 출가하기로 결의하였다. 계축癸丑(1913)년에 범어사梵魚寺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용성 스님께 출가하여 계戒를 받았다. 그 후 여러 곳을 다니며 불법을 구하였고,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 師遷化來京、收拾師之法語。將刊印公諸世、又與同門諸人欲立塔碑海印、以報師恩。撰師行狀、來乞余銘。余旣嘉尙其志、又知師最深義、不敢辭、乃綴其狀。
- 용성 스님이 입적하시자 경성京城으로 와서, 스님의 법어法語를 모으고 정리하였다. 장차 문집을 간행하여서 세상에 알리고, 또 용성 스님 문하의 사람들과 함께 해인사에 탑을 세워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 뜻이 가상한데다가, 또 용성 스님의 가장 깊은 뜻을 잘 알기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글을 짓는다.
- 而爲之銘曰。
-
그 명문은 다음과 같다.
南巡遍參善知識 남쪽으로 가서 선지식을 두루 참례하고
西來單傳上乘禪 서쪽에서 왔던 상승선60)을 홀로 전하였네
殺活由意劍在手 살활61)의 방편을 손안의 검같이 뜻대로 하니
魔外落膽雷震天 마외62)가 천둥과 벼락에 깜짝 놀라듯 하네
楊柳春風黃鳥語 버드나무의 따뜻한 바람에 꾀꼬리 노래하고
蓼花秋水白鷗眠 여뀌 꽃이 핀 가을 물에 흰 갈매기 잠들었네
萬丈靑烟朱海底 만 길 푸른 연기 붉은 바다 밑으로 사라지고
一輪紅日下山邊 둥글고 붉은 해는 산언저리로 뉘엿뉘엿 지네
- 世尊應化二千九百六十八年 辛巳 暮春 上澣 葦滄居士 吳世昌 謹撰。
- 세존응화世尊應化(佛紀) 2968년 신사辛巳(1941)년 늦봄(暮春) 상한上澣63)에 위창葦滄 거사居士 오세창吳世昌64) 삼가 짓다.
문도질門徒秩
-
은법제자恩法弟子
동산 혜일東山慧日, 벽허 상휘碧虛常輝, 운산 성주雲山性周, 회암 준휘檜庵俊輝, 덕운 기윤德雲基允, 자운 기정紫雲基正, 동곡 법명東谷法明, 단암 성구檀庵性具, 해문 영주海門永周, 해운 재국海雲載國, 포우 혜명抱牛慧明, 봉암 대희峰庵大喜, 고봉 태수高峯泰秀, 김해 석반金海石般
수법제자受法弟子
선파 학성仙坡學成, 대가 우성大呵愚惺, 경성 덕률警惺德律, 자항 선주慈航善柱, 계월 경선溪月敬善, 보우 용기普雨龍起, 고암 상언古庵祥彦, 금포 수현錦圃守玄, 인곡 창수麟谷昌洙, 중봉 태일中峰泰一, 보경 봉운普鏡峯雲, 성봉 응성性峰應惺, 동헌 완규東軒完圭, 도암 정훈道庵禎熏, 향산 종원香山鍾遠, 동암 성수東庵聖洙, 성암 경련聖庵景鍊, 자운 성우慈雲盛祐, 동호 화소東湖花咲, 연호 성민蓮湖性玟, 상락 아정常樂我淨, 보광 태연寶光泰衍, 석성 화경石城和璟
전식傳式
동산 혜일東山慧日, 경하 재영景霞載英
계좌戒佐
야천 종이野泉宗伊, 백하 덕수白荷德秀, 진룡 황진眞龍幌震, 동명 재민東溟在敏
선좌禪佐
경봉 정석鏡峰靖錫, 범하 도홍梵河道弘, 전강 영신田岡永信
용성하일세동산문도질龍城下一世東山門徒秩
-
은법제자恩法弟子
퇴옹 성철退翁性徹, 성운 지효聖雲智曉, 덕산 명진德山明眞, 지백 상규智伯祥圭, 한산 화엄寒山華嚴, 지유 철주知有哲柱, 남곡 덕명南谷德明, 지천 지혜智天智慧, 청량 백운淸凉白雲, 수산 제운水山齊雲, 내옹 능가奈翁能嘉, 금하 광덕金河光德, 불국 정관佛國正觀, 용산 대정勇山大㝎, 벽파 동주碧坡東州, 서해 흥교瑞海興教, 서건 양국西乾養國, 향운 수영香雲壽榮, 진공 성현眞空性玄, 향산 혜운香山慧雲, 여현 정견如玄正見, 홍원 인철弘願仁喆, 양익 남익両翼南翊, 목우 성오牧牛性悟, 태인 몽산泰仁夢山, 서림 대성西林大成, 일여 영환一如泳桓, 삼성 반월三星半月, 금옹 계전金翁戒田, 원광 원일圓光元一, 의림 창도義林昌道, 사옹 법윤獅翁法允, 휴정 원명休靜元明, 삼우三友
법제자法弟子
도천 도천道川道天, 선운 지원禪雲知元, 송암 종복松岩宗馥, 호산 경준湖山景俊, 금봉 혜원金峰慧源, 석옹 용대石翁容大, 석담 석만石潭錫萬, 고헌 일호高憲一湖, 영봉 덕윤靈峰德潤, 도원 형선道圓荊善, 월공 도해月空道海, 금성 명선金城明煽, 원응 종원圓應宗源, 대각 진하大覺鎭夏, 법련法蓮, 도원道圓, 문수文殊, 운공雲空, 법륜法輪, 대우大愚
은제자恩弟子
고산 혜원杲山慧元, 원경 진식元鏡晉植, 신광 수월新光水月, 혜명 무진장慧命無盡藏, 도근 백근道根白根, 시언 종원始言宗元, 송산 무근松山茂根, 원두 우식圓頭禹植, 보해 선래寶海善來, 담연 근옥湛然根玉, 각암 일미覺庵一味, 향국 성래香國聲來, 초당 선용草堂善用, 구해 일출九海日出, 호연 재후浩然載厚, 경암 제우敬庵濟佑, 서암 혜관瑞庵慧觀, 만오 영호晩悟英昊, 법담 종환法潭鍾煥, 동근東根, 화광華光, 오본悟本
삼세三世
도림 법전道林法傳, 덕진 여환德眞如幻, 휴휴 홍선休休弘禪, 원형圓亨, 태완 일원泰完一源, 만송 병식卍松秉植, 보광 성주普光性柱, 지하 법융智霞法融, 성진性眞, 성주性周, 성국 관조性國觀照, 무설無說, 광탄光呑, 성허性虛, 중원中圓, 지명志朙, 청평淸平, 천제闡提, 종현宗賢, 진관眞觀, 혜문慧門, 광진光眞, 만상萬祥, 인걸因傑, 석우石牛, 덕륜德輪, 보원普願, 진관眞寬, 거해巨海, 성호成浩, 일석一石, 태허泰虛, 경선鏡禪, 삼환三幻, 향산香山, 만수曼殊, 도현道玄, 자명慈明, 법광法光, 혜원慧圓, 창도昌道, 지공志空, 경담鏡潭, 성관性觀, 성문性汶, 성조性照, 지정至淨, 원우元愚, 청암靑岩, 원공圓公, 기현奇玄, 영담影潭, 종묵宗默, 지환至歡, 인각仁覺, 보일寶日, 화랑花郞, 명교明教, 혜성慧醒, 지오至晤, 지상至常, 지홍至弘, 삼밀三密, 원명圓明, 현수玄修, 지원至元, 종선宗宣, 종훈宗熏, 도해道海, 지연至然, 지족知足, 원측圓測, 원융圓融, 원택圓澤, 대인大仁, 석공石公, 화공華公, 우담優曇, 종덕宗德, 원정圓頂, 법성法性, 보문普門, 주열周悅, 경호景皓, 법광法光, 상운祥雲, 범산梵山, 금정金井, 초안超眼, 송강松江, 정법正法, 정범正梵, 동초東初, 탈해脫海, 고담古潭, 보타普陀, 원해圓海, 자원慈園, 지문至門, 화중和中, 원타圓陀, 현정玄淨, 도해度海, 진공眞空, 원행圓行, 원범圓梵, 벽지碧志, 학륜學輪, 정여正如, 정현正賢, 도행道行, 혜진慧陳, 진조眞肇, 지공至空, 원운圓雲, 무구無垢, 주용周用, 상진相珍, 성일性日, 백련白蓮, 석호石虎, 원욱圓旭, 지선至禪, 웅관雄觀, 진여眞如, 원담圓湛, 원천圓泉, 해월海月, 원정元淨, 상훈尙勳, 상묵尙黙, 혜운慧耘, 해동海東, 중봉中峰, 법상法常, 일각日覺, 지광智光, 벽천碧泉, 정만正滿, 벽만碧晩, 진우眞愚, 설현說玄, 정각正覺, 정암正岩, 만화萬化, 각명覺明, 원소圓昭, 항명恒朙, 유정唯靜, 혜민慧敏, 혜성慧惺, 상허常虛, 진성眞性, 선공禪空, 진학眞學, 대안大眼, 원진圓眞, 경운敬雲, 현철玄哲, 동제東齊, 각우覺雨, 각진覺眞, 진명眞明, 기재奇哉, 월호月湖, 선재善哉, 선적善寂, 도우度宇, 도성度星, 원규圓奎, 원정圓頂, 원영圓映, 범허梵虛, 효성曉惺, 동욱東旭, 동수東秀, 성범性範, 봉곡峰谷, 월주月舟, 혜진慧眞, 철우鐵牛, 능혜能慧, 원일圓一, 현우玄愚, 자오慈悟, 원종圓宗, 혜은慧垠, 도림道林, 법상法常, 보우普雨, 법일法一, 법영法榮, 종봉宗峰, 효선曉禪, 자선慈善, 현암賢庵, 원관圓觀, 법현法現, 정산丁山, 경민敬旼, 원여圓如, 원초圓超, 법종法鍾, 두산斗山, 도응道應, 성훈性勳, 종호宗皓, 승원承遠, 정허正虛, 원도圓道, 대방大方, 도진道盡, 혜경慧耕, 원통圓通, 범일梵日, 무상無相, 지철至徹, 지명至明, 각현覺顯, 지공智公, 보원寶元, 보천寶泉, 보림寶林, 보광寶光, 정안正眼, 원순圓珣, 원암圓岩, 현수玄秀, 성남性男, 현연玄然, 현공玄空, 진정眞靜, 도관道觀, 도법度法, 도광度光, 원장圓璋, 원유圓瑜, 원근圓瑾, 도휘道輝, 혜정慧靜, 원제圓濟, 원철圓徹, 경흥憬興, 원광圓廣, 원연圓淵, 지종至宗, 지묘至妙, 능혜能慧, 불공不空, 무량無梁, 지법至法, 지현至玄, 신일信一, 계현啓炫, 정목正牧, 원산圓山, 원경圓烱, 원걸圓傑, 원규圓奎, 원응圓應, 원태圓太, 원전圓田, 고봉古峰, 원당圓瑭, 원묘圓妙, 원여圓如, 원국圓國, 원봉元峰, 보륜寶輪, 무공無空, 목종木鍾, 법찬法讃, 철암哲岩, 인공仁公, 혜관慧觀, 현응玄應, 혜수慧秀, 효명曉明, 효경曉鏡, 범종梵宗, 원일圓日, 혜정慧靜, 범수梵水, 서현書玄, 지성至成, 지암至岩, 정일正日, 철우徹雨, 원인圓仁, 원충圓忠, 원서圓瑞, 범진梵眞, 원기元寄, 각행覺行, 정오正悟, 무작無作, 무염無染, 완호玩虎, 진성眞性, 본원本源, 범일梵一, 진석眞碩, 현초玄草, 원감圓鑑, 원구圓玖, 원종圓宗, 원성圓成, 용암龍岩, 강하江河, 월도月刀, 안도岸度, 구행久行, 구주久住, 효진曉進, 지현指玄, 상래常來, 상현常現, 범천梵天, 진보眞寶, 진성眞性, 진오進悟, 응현鷹現, 도현道玄, 운지云智, 상범常梵, 혜장慧藏, 탄욱呑旭, 약연鑰延, 벽산碧山, 귀원歸元, 성만聖滿, 효경曉鏡, 현제玄濟, 진성眞惺, 효응曉應, 법안法眼, 범현梵玄, 오산悟山, 두하杜河, 광원廣遠, 윤도潤道, 성본聖本, 동일東日, 월호月瑚, 진철眞徹, 승혜承慧, 혜철慧哲, 송음松音, 구도求度, 진종眞宗, 상한常閑, 쾌성快惺, 도희道熙, 성인誠寅, 영성咏惺, 가영伽泳, 행언行彦, 훈암勳岩, 의신儀信, 선익善益, 범해梵海, 예봉禮峰, 성광聖光, 신성神聖, 범허梵虛, 범운梵耘, 만응萬應, 현조玄照, 연담蓮潭, 고벽古碧, 법림法林, 혜거慧炬, 각현覺玄, 선현宣賢, 법우法雨, 서영瑞榮, 혜조慧照, 혜통慧通, 혼성混惺, 완해玩海, 혜종慧宗, 석총釋聰, 진영眞泳, 월제月濟, 지봉智峯, 석상石霜, 해봉海峰
사세四世
통광通光, 무비無比, 경담鏡潭, 원인圓印, 처광處光, 승원勝源, 혜웅慧雄, 원신圓信, 법진法盡, 일광日光, 혜운慧耘, 법상法常, 원중圓中, 진효眞曉, 혜안慧眼, 법안法眼, 일장日藏, 정견正見, 법림法林, 원타圓陀, 지일知一, 탄우呑宇, 광조光照, 정혜㝎慧, 광제光霽, 혜철慧哲, 현공玄公, 미타彌陀, 능원能圓, 사명思明, 세정世正, 원철圓哲, 세광世光, 현정玄靜, 현응玄應, 효명曉明, 일웅一雄, 재응在應, 명광明光, 동언東彦, 보명普明, 종언宗彦, 종현宗玄, 종민宗敏, 승련勝蓮, 일륜日輪, 일선日禪, 일정日頂, 정야正也, 정견正見, 명원明圓, 상원尙圓, 성해性海, 혜일慧一, 혜담慧潭, 승국僧國, 승범僧梵, 원허圓虛, 원상圓常, 원묵圓默, 원혜圓慧, 담해曇海, 혜안慧眼, 자현慈現, 원광圓光, 원만圓滿, 원경圓鏡, 원자圓自, 원석圓錫, 원지圓智, 원증圓證, 화봉華峰, 보각普覺, 돈오頓悟, 보운普雲, 석강石剛, 돈각頓覺, 수대守臺, 돈수頓脩, 보승寶勝, 관일觀一, 무염無染, 공마空摩, 무관無關, 길상吉祥, 승전勝田, 대웅大雄, 원성圓性, 선웅善雄, 원돈圓頓, 원능圓能, 원료圓了, 원개圓, 일서日瑞, 일감日鑑, 일수日秀, 일영日映, 일건日乾, 일경日徑, 일행日行, 일공日空, 선광善光, 여공如空, 승현承眩, 선타禪陀, 연중然重, 봉명鳳鳴, 포일抱一, 몽운夢雲, 고경古鏡, 원무圓無, 덕원德圓, 무염無染, 법신法信, 법수法修, 일초一草, 제환諸幻, 일문日門, 일청日靑, 일명日明, 일혁日赫, 일백日白, 일현日賢, 일관日寬, 일출日出, 일진日眞, 일형日亨, 일봉日峰, 도경道鏡, 도림道林, 도성道惺, 도은道垠, 도산道山, 일제日濟, 일통日通, 일홍日弘, 일명日明, 일중日中, 일상日常, 일대日大, 일원日圓, 일법日法, 법장法藏, 법우法雨, 법열法悅, 법등法燈, 일향日向, 일연日淵, 일효日曉, 일장日藏, 일광日珖, 일안日安, 일철日鐵, 일주日柱, 일묵日默, 일암日岩, 일운日雲, 일소日咲, 일창日彰, 일규日珪, 도일道一, 덕관德冠, 진산眞山, 법융法融, 대혜大慧, 본각本覺, 범효梵孝, 대우大愚, 벽안碧眼, 진월眞月, 도봉道峰, 일련日蓮, 일화日華, 일적日寂, 일견日見, 일혜日慧, 양휴両休, 해륜海輪, 해문海門, 해도海道, 해공海空, 도연道然, 도명道明, 일포日布, 일고日高, 일쾌日快, 일조日照, 상현尙賢, 세등世燈, 혜등慧燈, 승언承彦, 여명如明, 유광由光, 유방由昉, 유정由正, 도륜道輪, 광원廣遠, 법해法海, 혜륜慧輪, 선일禪日, 지응知應, 신학信學, 명인明仁, 명우明宇, 도준道俊, 덕관德冠, 신범信範, 덕인德仁, 일계日溪, 일성日誠, 일양日陽, 일산日山, 일찬日讃, 도경度鏡, 효경曉炅, 표훈表訓, 도웅道雄, 불도弗濤, 광조光祚, 현암玄岩, 삼화三和, 일준日儁, 일거日居, 일만日卍, 혜광慧光, 현혜玄慧, 현담玄潭, 일교日皎, 광조光祚, 지수地守, 일공日空
오세五世
동림東林, 진현眞玄, 청원靑苑, 진문眞聞, 자응慈應, 도안道雁, 서봉瑞峰, 선응禪應, 자원慈元, 진명眞明, 정한正閑, 도문道門, 신종信宗, 명조明照, 명철明徹, 성연性然, 성조性照, 허정虛淨, 덕원德苑, 덕장德藏, 청경淸鏡, 무량無量, 중원中圓, 시원是圓, 보산寶山, 수산守山, 긍산肯山, 석산昔山, 정산㝎山, 덕일德日, 지원智願, 회산會山, 원정圓定, 영산靈山, 현산玄山, 법봉法逢, 정봉定逢, 삼봉三逢, 보인普印, 정수正修, 눌산訥山, 방산方山
대중질大衆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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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本寺
조실祖室 : 지유 철주知有哲柱
선덕禪德 : 지백 상규智伯祥圭, 나옹 능가奈翁能嘉, 남곡 덕명南谷德明, 용산 대정勇山大定, 벽파 동주碧坡東州, 태인 몽산泰仁夢山
한주閑主 : 불국 정관佛國正觀, 서해 흥교瑞海興教, 홍원 인철弘願仁喆, 양익 남익両翼南翊, 지연知宴
교수教授 : 청량 백운淸凉白雲, 휴휴 홍선休休弘禪, 성국 관조性國觀照, 여천 무비如天無比, 화랑花郞
금어선원金魚禪院
선덕禪德 : 태완泰完
유나維那 : 금우金牛
열중悅衆 :
청중淸衆 : 일원一源, 인각仁覺, 노현老玄, 봉두棒頭, 자림慈林, 효담曉潭, 원오圓悟, 방원芳元, 원광圓光, 법융法融, 일효日曉, 원국圓國, 무문無門, 지원智圓, 지안智眼, 범종梵宗, 길상吉祥, 현천玄天, 일통日通, 성구性久, 청원靑源, 범해梵海, 현삼玄三, 원감圓鑑
범어사강원梵魚寺講院
강주講主 : 일해 덕민一海德旻
강사講師 : 능허能虛, 용학龍學
중강仲講 : 석산昔山
입승立繩 : 일운日雲
찰중察衆 : 도경度鏡
사교반四教班 : 보명普明, 신성神聖, 성각性覺, 범허梵虛, 해문海門, 법림法林, 해도海道, 고벽古碧, 대은大隱, 일묵日默, 법보法寶
사집반四集班 : 혼성混惺, 덕인德仁, 정명正明, 영산靈山, 완해玩海, 해공海空, 법열法悅
치문반緇門班 : 눌산訥山, 성각性覺, 정수正修, 표훈表訓, 현담玄潭, 관혜觀慧, 태연泰然, 석총釋聰, 도천道川, 명우明宇, 능주楞周
종무소宗務所
원주院主 : 초안超眼
호법護法 : 각우覺牛
포교布教 : 지종至宗
재무財務 : 석호石虎
교무教務 : 진명眞明
총무總務 : 석공石公
법사法師 : 선과善果, 원명圓明, 지행至行, 자안慈眼, 범마梵馬, 범행梵行, 지장地藏
건비建碑 : 대법사大法寺 지천 지혜智天智慧
주지住持 : 목우 성오牧牛性悟
불기佛紀 2545년 신사辛巳, 2001년 정월 일 문손門孫 서강西岡 기현奇玄은 삼가 글씨를 씀.
운허스님 찬, 龍城大宗師 舍利塔碑(1977)
- 月雲, 『耘虛禪師語文集』(東國譯經院,1989), pp.339-342.
-
0001_0004_b_01L종사의 이름은 진종(震鍾), 호는 용성, 성은 백, 본은 수원, 속명은 상규(相奎)니, 전라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 백남현(南賢)의 장자요, 어머니는 밀양 손씨라. 손부인이 하루는 점잖은 스님이 가사를 수하고 방에 들어오는 꿈을 꾸〈p.339〉고, 서기 一八九四년 갑자 五月 八일에 종사를 낳았다. 종사는 나서부터 영명하고 비린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六세에 아버지의 고기 잡는데 따라다니면서 산 것을 골라서 물에 넣었는데, 이유를 물으니 ‘죽으려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였다. 한번은 머슴의 동생이 나쁜 병에 걸려서 옷도 밥도 없이 토굴에서 굶어 앓는 것을 보고는 집에서 쌀을 퍼다 주었다. 七세에 아이들이 꽃 꺾는 것을 보고 ‘꽃을 따는 손에는 봄기운이 감돈다’는 한문시(摘花手裏動春心)를 지으니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十四세에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에 도망쳐 갔다가 부모에게 끌려 돌아왔고, 十九세에 합천 해인사의 극락전에 가서 화월(華月)스님의 상좌가 되어 상허(相虛)율사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그해에 의성군 고운사의 수월스님을 찾아 ‘생사가 큰일이요, 세월은 빠르니 어찌하면 견성을 하오리까?’ 수월은 ‘시대가 말법이어서 법은 멀고, 근기가 둔하여 빨리 들어가기 어려우니, 먼저 천수다라니를 많이 외워 업장이 소멸되면 마음이 열리리라’ 하매, 그때부터 천수주력에 전력하였다. 뒤에 양주군 보광사의 도솔암에서 정진하다가 문득 의심하기를 ‘삼라만상이 모두 근원이 있는데 사람의 근본은 무엇인가? 또 나의 보고 듣고 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디서 생긴 것인가?’ 이렇게 의심하기 六일만에 홀연히 깨달으니 마치 물통 바닥이 빠지는 것 같았다. 금강산 표훈사의 무융스님에게 이 인연을 말하니, 스님은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시 화두를 참구하라’ 한다. 그때부터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p.340〉었다. 또 도솔암에서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웃으면서 ‘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니, 송곳 세울 땅이 없었는데 금년 가난이 참으로 가난하니, 송곳까지 없다 한 말이 나를 두고 한 것인가보다’ 하고 이때부터 얻은 바가 있었다. 二十七세에 양산 통도사에서 선곡(禪谷)율사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으니, 칠불암 대은율사의 계맥이다.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에서 여름 안거를 하면서 전등록을 보다가 ‘달이 시위메운 활과 같으면 비는 적고 바람이 많다’는 데서 홀연히 콧구멍을 잃어버리니 ‘일면불 월면불화두’와 무자화두의 뜻을 분명하게 알았다. 그후부터 여러곳으로 다니면서 법화경 기신론 등 일대시교를 열람하였고, 어느해 금오산을 지나다가 게송을 읊으니 ‘금오산 비치는 달 천고에 밝았는데 낙동강 흐르는 물 만리에 굽이친다. 고기잡는 거룻배 어디 갔는가? 여전히 갈꽃 속에 묵고 있구나! (烏山千秋月 洛東萬里波 漁舟何處法 依舊宿蘆花)’ 이로부터 중생교화에 일생을 바치기로 하였다.
三十七세부터 여러 선원에서 납자를 제접하였고, 四十四세에 청국 북경에 가서 반년 동안 그곳 불교를 더듬어보고 선객들과 문답한 일이 있었다. 一九一九년 기미에 조선민족대표 三十三인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수년동안 왜적의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六十一세에 경을 읽다가 왼쪽 이에서 자색사리 한 개가 나왔는데 모양이 정골과 같았다. 서울 봉익동에 대각회를 설립하고 포교에 종사하면서 함양의 백운산에 三十정보의 땅을 사서 감나무, 밤나무 만여주를 심어 화과원을 만들고, 북간도의 연길현에 七十상(晌)의 토지〈p.341〉를 사서 교당을 설립하여 장래에 선객들이 농사 지으면서 참선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一九四◯년 봄에 가벼운 병이 들면서 문도들에게 ‘내가 죽거든 상복도 입지 말고, 곡도 하지 말고, 무상대열반 원명상적조(無上大涅槃 圓明常寂照)만 외우라’고 유촉하고, 二월 二十四일 임종시에 묻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니 ‘호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서 삼밭에 피었느니라(匏花穿籬出臥在麻田上)’ 하면서 웃고 입적하니, 춘추는 七十七세요, 법랍은 五十九세라. 저서는 「귀원정종」, 「각해일륜」, 「수심결」, 「청공원일」, 「어록」 등이 있다. 일찍이 환성지안선사의 법을 이었으니 태고보우선사의 十一대손이라. 해인사의 서쪽에 탑을 세워 사리를 모시고, 돌을 세워 용운이 지은 비명을 새겼다. 세월이 오래고 시대가 달라지매 종사의 고암상언이 이 비를 다시 세운다.
西紀 一九七七년 十月 日
現地에서 錄取〈p.342〉
지관스님 찬, 龍城祖師 行蹟碑
- 소재 ; 해인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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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06_b_01L傳佛心燈 譯經弘闡 救國護法 龍城祖師 行蹟碑銘 幷序
一千七百年의 韓國 佛敎史를 살펴보건데 三國을 비롯하여 高麗와 朝鮮朝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高僧大德이 出世하여 韓國佛敎의 中興과 國民精神 啓導에 赫赫한 業蹟을 남겼음은 두루 아는 事實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舊韓末 禪敎律에 精通하였을 뿐만 아니라 文殊의 智座에서 奮然히 일어나 普賢의 紫陌으로부터 途中事를 시작하여 佛敎의 大衆化와 國民啓導 및 抗日 獨立運動의 旗幟를 높이 들고 大獅子吼를 외쳤던 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己未年 三·一 獨立運動 때 民族代表 三十三人中 佛敎代表였던 龍城祖師이시다. 祖師는 曹溪直下 第三十五代 法孫인 喚惺志安禪師의 後裔(錦溪元宇 靑波慧苑 百忍泰榮 翫眞大安 枕虛處華 草愚永瑄 南湖幸準 等 七師를 뛰어 넘어 二百餘年을 遡及하여 喚惺志安禪師를 遠嗣하였다.)로써 俗性은 白氏 本貫은 水原 俗名은 相奎 法名은 震鍾이며 龍城은 法號이다. 스님은 一八六四年 五月 八日 全羅北道 南原郡 下磻岩面 竹林里(現在의 全羅北道 長水郡 磻岩面 竹林里 二五二 番地)에서 아버지 白南賢公과 어머니 密陽孫氏의 長男으로 誕生하였다. 孫氏夫人이 어느날 밤 한 스님이 金爛袈裟를 입고 房에 들어오는 胎夢을 꾸고 孕胎하여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부터 寡默하였으며 葷肉이 섞인 飮食은 一切를 먹지 아니하였다. 淸高의 氣質과 溫恤의 情이 남달라 六歲 때 아버지가 낚은 물고기 중 살아있는 것은 許諾없이 모두 놓아주어 아버지가 크게 꾸짖으니 죽어가는 生命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울면서 대답하였다. 또 머슴의 동생이 怪疾에 걸려 草幕에 放置된 채 飢餓와 病苦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父母 모르게 糧食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으니 이때 이미 度生의 알을 품은 資質을 감추지 못하였고 九歲 때 全州 合竹扇을 詩題로 내건 鄕塾의 白日場에서 大橈合竹扇하니 借來洞庭風이라 作詩하고 봄날 村童들이 진달래꽃 따는 것을 보고 摘花手裏動春心이라고 卽興詩를 읊어 文才의 뛰어남이 遠近에 알려져 그 英特함에 稱頌이 자자하였다. 少年期에 접어 들자 儒書 못지 않게 佛書를 가까이 하였으며 十四歲 때 佛經을 보다가 크게 느낀 바 있어 父母 모르게 南原郡 蛟龍山城의 德密庵에서 行者生活을 하였으나 父母의 挽留에 依해 還家하게 되었다. 스님은 그 뒤에도 世俗에 뜻이 전혀 없어 一八七九年 다시 出家할 뜻을 굳히고 父母의 간곡한 挽留를 뿌리치고 慶尙南道 陜川郡 伽倻山 海印寺 極樂殿을 찾아가 華月和尙을 恩師로 相虛慧造律師를 戒師로 하여 沙彌戒를 받았다. 곧이어 義城 孤雲寺 水月永旻和尙을 親見하고 無常이 迅速하니 어떻게 하여야 見生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去聖時遙에 魔强法弱하며 宿業障重하여 善弱難排이니 誠禮三寶하며 勤誦大悲神呪하면 自然業障消滅하고 心光透漏하리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大悲呪와 六字呪를 九個月 동안 持誦하다가 楊州 普光寺 兜率庵에서 森羅萬像은 모두 그 根源이 있거늘 人間의 根本은 무엇인가라는 疑團으로 精進하다가 六日만에 忽然히 깨달으니 五蘊山中尋牛客이 獨坐虛堂一輪孤로다 方圓長短誰是道오 一團火炎燒大千이라는 偈頌을 읊었다. 一八八三年 金剛山 表訓寺 無融禪師를 參訪하여 無字話頭를 決擇받고 다시 普光寺 兜率庵으로 돌아와 勇猛精進하다가 排雲携霧尋文殊타가 始到文殊廓然空이로다 色色空空還復空하니 空空色色重無盡이라는 歌頌을 읊었다. 一八八四年 三月 梁山郡 通度寺 金剛戒壇에서 禪谷律師로부터 比丘戒와 菩薩戒를 受持하니 이는 一八二八年 大隱朗旿律師가 그의 스승인 金潭長老와 함께 智異山 雙溪寺 七佛庵에서 七日間 祈禱끝에 瑞祥受戒한 大隱律師의 戒脈이다. 그해 冬安居는 智異山 金剛臺에서 지냈고 一八八五年부터 順天 松廣寺 三日庵에서 精進하면서 틈틈이 景德傳燈錄을 보다가 金輪可觀禪師의 法語인 月似灣弓하니 小雨多風이라는 句節에 이르러 割然大悟하여 一面佛月面佛話와 無字話頭까지도 渙然明白하였다. 다시 海印寺로 돌아와 精進하다가 伽倻名價高靑丘 明心道師幾往來 矗矗奇岩疊鱗高 密密栢樹相連靑 無限白雲滿洞鎖 洪鍾轟轟碧空衝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眼日己敍라는 敍景詩를 읊어 自然과 日常이 融合된 境界를 보였다. 一八八六年에 다시 松廣寺 三日庵으로 옮겨 夏安居를 마치고 嶺南으로 돌아오던 중 洛東江을 건너면서 金烏千秋月이요 洛東萬里波로다 漁舟何處去오 依舊宿蘆花라는 悟道頌을 읊었다. 스님은 이와 같이 敎를 거치지 아니하고 直接 禪으로 들어가 悟道한 然後 敎學을 남김없이 涉獵하는 禪敎兼修의 길을 主唱하였다. 悟道後 順天 松廣寺 甘露庵 湖鵬講伯에게서 起信論과 法華經을 受講하고 禪客 三十三人과 함께 智異山 上禪庵에서 한해 여름을 지낸 다음 谷城 泰安寺 水鯨講伯으로부터 禪要와 書狀을 讀破하였으며 이어 上無住庵에서 冬安居를 解制하고 聞慶 淸華山 圓寂庵 石橋律師에게서 梵網經과 四分律을 聽受하면서 夏安居를 解制하고 다시 松廣寺 湖鵬講下에서 華嚴經을 受講하였으며 海印寺의 月華講伯으로부터는 禪門拈頌을 月華講伯이 聞慶 大乘寺로 移錫하므로 講伯을 따라가 華嚴十地品과 緇門警訓을 閱覽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스님은 緇門警訓을 閱覽하던 중 靈雲志勤禪師의 法語인 驢事未去에 馬事到來의 意旨는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에 長安大道亂如絲하니 人去人來終不休라고 對答했다. 또 護明禪師가 明明百草頭에 明明祖師意라 하니 和尙의 見解는 어떠한가라는 質問에 四佛山中에 花紅柳綠하니 禪師가 任意로 遊覽하시구려 하였다. 그 후 金溝郡(現在 金堤郡 金溝面) 龍眼臺의 道植禪師를 參訪 直下에 臨濟老漢을 보았는가? 그때 스님이 大聲一喝하니 禪師가 一棒을 내리치고 拍掌大笑하였다. 二十三歲 때 見性悟道하고 三十歲까지에는 修禪과 經論 語錄 等을 두루 閱覽하였다. 그후 七夏 동안 晦跡韜名하여 保任專注하였다. 一九◯◯年 가을 洪城 天藏庵을 거쳐 定慧寺에 이르러 慧月禪師와 格外宗旨를 擧揚하고 松廣寺 曹溪峰 土窟에서 冬安居 一九◯一年 二月 海印寺 修禪社에서 霽山禪師와 西來密旨를 擧揚하였으며 星州 修道庵에서 冬安居를 지냈다. 一九◯二年 智異山 華嚴寺 塔殿에서 夏安居 中 찾아온 滿空禪師에게 遠路에 路毒이 어떠하며 侍者는 몇 사람인가 하고 물음에 禪師는 侍者도 없고 또한 路毒도 없다는 知彼知己의 法談을 나누었으며 冬安居를 順天 仙岩寺 七佛殿에서 지내고 이듬해 봄 妙香山 上毘盧庵에 修禪會를 創設하였고 金剛山 佛地庵서 冬安居 一九◯四年 二月 鐵原 寶盖山 聖住庵에 修禪會를 開設하였으며 一九◯五年 寶盖山에 觀音殿을 創建하여 住錫하면서 禪門要旨一卷을 著述하였고 그해 가을 三角山 望月寺로 移錫하였다. 이무렵 海印寺 所藏 國寶 高麗八萬大藏經板이 歲久年深하여 大部分의 經板이 板角의 鐵裝飾이 差脫하고 많은 字劃이 磨滅한 것을 본 스님은 經板補修佛事의 願을 세우고 있던 次 마침내 一九◯六年 一月 望月寺로 스님을 親見하려 온 林尙宮에게 貴重한 聖寶修板佛事를 付託하여 林尙宮의 周旋으로 二萬兩의 內帑金이 令達되었고 王은 佛事의 圓滿한 成就를 위해 擔當官 林某氏와 姜大蓮和尙을 파견하였으며 別官은 金聖業을 寺中에서 任命한 現場監督은 景明과 泳海 두 스님이었다. 그해 九月 德裕山 護國寺에서 修禪社를 열어 衲子를 提接 一九◯七年 三月 山內舊基에 禪院을 創建하고 法泉庵이라 이름하였다. 九月에는 中國에 건너가 北京 觀音寺에서 冬安居를 마치고 一九◯八年 二月 通州 華嚴寺에 當到하니 그곳 어느 스님이 受戒寺를 물음에 梁山 通度寺라고 對答하니 그는 말하기를 吾國의 戒脈이 언제 朝鮮에 傳해졌는가 듣건데 朝鮮에는 沙彌戒만 받아 僧伽가 되고 比丘戒는 授受하는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事實인가 함에 스님은 正色하고 言聲을 높여 空中의 日月이 어찌 汝國의 것인가 佛法은 天下의 公道이거늘 어찌 中國의 專有物로만 생각하는가 비록 나라는 大國이나 사람들은 小人이라고 詰責하였다. 그해 二月 서울로 돌아왔다. 一九◯九年 三月부터 海印寺 願堂庵에 彌陀會를 創設하여 禪淨一致를 唱導하였으며 그해 四月 十五日 結制 때 海印寺 大寂光殿에서 法床에 올라 良久하고 柱杖子를 一下한 다음 告衆曰 山僧이 不啻根鈍知淺이라 近日에 事煩하여 佛法에 頓無情況이어니 敎我說什 麽法고 我有眼如盲하고 有耳如聾하면 有鼻如塞하고 有口如啞하며 有身如枯木하고 有意如寒灰하나니 敎我說什麽法고 設余 眼不盲 耳不聾 鼻不塞 口不啞 身不枯木 意不寒灰인들 敎我說什麽法고 道道하라 余仰 不得己하여 說少許法하여 通箇消息하리라 楞嚴經云하되 決擇眞妄하여 以爲密因이라 하시니 諸人은 作麽生會오 學道人이 若馳求心과 知見情量心이 不歇하면 是爲邪見이요 不名學也니라 昔에 世尊이 在 靈山會上 坐 獅子座하사 百萬大衆이 圍繞러니 世尊이 忽無去處어늘 人天 百萬億 菩薩大衆이 各 以天眼으로 觀察十方하되 罔知 世尊 去處러라 彌勒이 觀察四衆하며 亦自決疑하여 問 文殊한데 文殊가 引古決疑하시니 此事는 非天眼으로 所可知也니라 擧如此等話四五則然後에 拈起柱杖하고 良久云 人人箇箇立千仞이라 到這裏하여 討箇甚麽오 士人은 讀詩書學禮義하고 農人은 日出而作 日入而息하여 鑿井而飮하고 耕田而食하며 工人은 出自家兩隻手하여 巧作千般奇物하고 商人은 行商也行商하고 坐商也坐商하나니 敎我說什麽法고 會麽아 不塗紅粉也風流니라 然이나 從上諸聖이 因五道歷四生이 爲此事也시며 畢竟悟得底도 亦悟此事也며 今日大衆이 同會道場도 亦爲此事也니라 會麽아 添脂着粉也無妨이니라 良久라가 擧起柱杖하고 拈放背後云會麽아 良久云 伽倻巍巍兮여 白雲片片이요 麥穗重重兮여 鶯歌滑滑이로다. 綠樹風淸兮여 芳草煙生이라하고 良久한 다음 吟古頌云 鐵牛對對黃金角 木馬雙雙白玉蹄 爲愛雪山香草細 夜深乘月過前溪 玉麟帶日離霄漢 金鳳含花下彩樓 野老不嫌公子醉 相將携手御街遊라 하였다. 一九一◯年 河東 七佛禪院 祖室로 있으면서 大衆의 懇請으로 歸源正宗을 著述하였으니 이는 排佛政策으로 佛敎를 彈壓해온 儒敎와 西歐列强의 西勢東漸하는 물결을 타고 繁昌하는 西敎에 對한 近世 最初의 敎理的 闡明이었다. 이듬해 二月 上京하여 都城 內에 西敎의 敎會는 廣大嚴麗하고 尖塔이 높이 솟아 日曜禮拜時에 聽衆이 滿堂할 뿐 아니라 鍾聲 또한 錚錚하건만 佛敎의 寺院은 寂寞 無人함을 보고 이것이 누구의 責任인가 하고 痛歎한 스님은 入泥入水하며 入廛垂手하는 途中事를 決心하고 康永勻居士의 집에서 禪會를 열어 禪布敎의 旗幟를 들었으니 이것이 一般大衆을 向한 都市 禪布敎의 嚆矢이다. 이어 스님은 서울 鐘路區 鳳翼洞에 大覺寺를 세우고 一九一二年에는 大寺洞에 朝鮮佛敎 臨濟宗 中央敎堂을 세워 大衆布敎를 始作한 지 三年만에 三千餘 民衆이 雲集하였고 一九一三年 南泉, 惺月, 道峰, 石頭和尙 等 넷 스님의 發起로 禪學院을 세우게 된 것도 스님의 禪布敎에 影響을 받은 것이다. 大都市마다 禪布敎堂을 建立하고자 資金을 마련하기 爲해 一九一六年부터 北靑에서 金鑛을 運營하였으나 失敗하여 스님의 計劃은 霧散되었다. 그러나 傳統佛敎의 眞面目을 宣揚하는 大衆布敎를 通해 亡國民의 民族意識을 일깨워 祖國光復의 힘을 키우고자 한 스님의 뜻은 一九一九年 三月 一日의 己未獨立宣言으로 이어져 三十三人의 民族代表中 韓龍雲禪師와 함께 佛敎界의 代表로 參與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倭警에 체포되어서는 그들의 奸巧한 懷柔를 뿌리치고 마침내 뜻을 굽〈p.45〉히지 아니하여 西大門 監獄에서 一年六個月間의 獄苦를 치루었다. 또한 北靑에서의 金鑛 事業과 延吉의 農場 運營은 內心으로는 獨立鬪士들에 對한 資金支援과 情報提供을 爲함이었다. 이러한 功勞로 一九六二年 政府로부터 國家功勞賞을 一九九◯年에는 國家로부터 錦冠文化勳章과 文化部로부터 한글저술과 譯經功勞로 感謝牌를 追贈 받았다. 스님은 出獄한 뒤에도 이 民族의 覺醒을 위하고 새로운 時代에 적응하는 佛敎의 理想的인 進路를 개척하고 民族文化의 根幹을 이루고 있는 韓國傳統 佛敎의 日本化 政策에 對抗하여 一九二一年에는 五十八歲의 白髮老衰와 目眩神昧에도 不拘하고 佛敎의 一大革新의 母體로 大覺敎를 創立하는 한편 三藏譯會를 만들어 經典의 우리말 飜譯에 專念하였으니 이는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려는 日帝의 馬脚을 豫見하였기 때문이다. 스님의 著述로는 禪門要旨, 歸源正宗을 비롯하여 心造萬有論, 修心正路, 팔상록, 大覺敎儀式, 大覺敎歌集, 불문입교문답, 覺海日輪, 晴空圓日, 修心論, 釋迦史, 極樂路程記, 佛敎唱歌, 大覺源流, 敎理大典, 大覺敎兒童敎科書, 臨終訣, 梵網經演義, 吾道의 眞理, 吾道는 覺, 龍城禪師語錄 等이고, 譯書로는 신역대장경, 首楞嚴經鮮漢演義, 卍金毘羅經, 覺頂心觀音正士摠持經, 大方廣圓覺經, 詳譯科解金剛經, 八陽經, 조선글화엄경, 朝鮮語楞嚴經, 六祖壇經, 大乘起信論, 灌頂伏魔經, 覺說梵網經, 鮮漢譯大方廣佛華嚴經, 六字靈感大明王經, 千手經, 지장보살본원경, 鮮漢文譯禪門撮要, 金剛三昧經, 六字大明王經, 川老金剛經 等이며, 論說로는 萬日參禪結社會創立記, 活句參禪萬日結社發願文, 日本式犯戒生活에 대한 建白書, 中央行政에 대한 希望, 禪話漏說 等이고 雜誌로는 佛日과 無我 等을 發刊하였다. 한편 스님은 持戒에 있어서도 嚴正하였으니 그 持戒思想의 根源은 百丈의 淸規에 있고 實踐은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을 이어 받아 禪農一致를 主唱하였다. 一九二二年 亡命地인 延吉市 明月村과 鳳寧村 一帶에 田地 七十餘晌을 買入하여 大覺敎堂을 設立, 禪農一致의 修行을 몸소 본 보였다. 그러나 總督府의 諜者로 投入된 서울 鐘路區 天一堂 漢藥房 從事員인 安某는 計劃的으로 스님의 上佐가 되어 두터운 信任을 얻은 다음 農場을 經營한 지 三年만에 賣却 逃走하여 스님의 뜻은 挫折되고 말았다. 그러나 스님은 一九二七年 慶南 咸陽郡 栢田面 白雲理 白雪山에 三十餘町步를 確保하여 華果院을 設立하고 果樹 一萬餘 株를 심고 다시 禪農佛敎를 일으켜 韓國禪修行의 새로운 局面을 열었으니 日帝植民治下의 劣惡한 寺院經濟를 극복하며 나아가서 民族이 經濟力을 向上시키므로써 나라를 回復하는 힘을 기르고자 하였다. 亡命地로부터 돌아온 直後인 一九二四年 四月 二十八日 大覺寺에서 看經次 左齒間으로부터 五色이 玲瓏한 舍利 一顆가 出現하여 三次에 걸쳐 放光하였다. 一九二五年 三角山 望月寺에서 活句參禪 萬日結社를 創設하고 날로 쇠퇴해 가는 以戒爲師의 律風振作을 위하여 佛工인 韓鳳憐에게 玉石으로 觀音 및 地藏菩薩像과 戒牒板, 法王之寶, 千華律脈戒師之印, 防僞之印 等을 새기게 하고 觀音 및 地藏菩薩像 前에서 萬日祈禱를 奉行하면서 禪律一致를 提唱하고 그해 十月 十五日 海印寺 金剛戒壇에서 如法한 授戒法會를 開設하였으니 이후 스님으로부터 禪法과 戒法을 받은 제자가 무려 數萬에 이르렀으니 末世之正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特히 우리 固有의 傳統 文化를 抹殺하고자 하는 日帝 植民政策의 一環으로 韓國佛敎의 傳統과 思想을 日本佛敎化하고자 僧伽의 帶妻食肉과 飮酒率家를 暗暗裏에 助長하는 朝鮮總督府와 日本內務省에 맞서 一九二六年 五月과 九月에 各各 建白書를 내어 佛敎의 根本精神에 立脚한 韓國佛敎의 傳統을 지키고자 努力하였으나 日帝에 의하여 이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斷念하지 아니하고 平生을 通하여 期會가 있을 때마다 帶妻率家와 飮酒食肉을 비롯한 온갖 犯戒의 잘못을 指摘하고 退色變質되어가는 韓國佛敎의 一大覺醒을 促求하였다. 스님은 平素敎育을 通하여 겨레가 깨우치지 못하면 佛敎의 中興도 祖國의 光復도 至難하다는 信念을 가지고 一九二八年에는 大覺日曜學校를 一九二九年에는 大覺敎堂에 修禪會를 開設하여 民衆敎育에 힘썼으나 一九三四年 日帝는 大覺敎의 活動을 彈壓하여 一九三六年에는 不得已 大本山 梵魚寺 京城布敎堂으로 改稱하였으나 一九三八年 大覺敎 創設 十八年만에 이를 解散시키므로써 스님의 活動은 事實上 봉쇄당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이에 屈伏하지 않고 一九三九年 朝鮮佛敎 禪宗叢林으로 改編하여 活動을 再開하였으나 無常迅速하고 時不待人하여 마침내 一九四◯年 二月 二十四日 서울 大覺寺에서 門徒들에게 涅槃을 豫言하시고 沐浴한 다음 架裟를 입고 端正히 앉아 入寂하니 世壽는 七十七歲요 法臘은 六十一歲였다. 臨終에 앞서 스님은 내가 오늘 涅槃에 들고자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거나 孝道를 行하려 하지 말고 오직 無上大涅槃이 圓明常寂照라는 法句만을 외우라고 遺敎하였다. 이때 弟子가 묻되 스님은 어느곳으로 向하여 가시렵니까 하니 匏花穿籬出하여 閒臥麻田上이라는 臨終偈를 남겼다. 一九四一年 海印寺 西麓 弘濟庵 東便에 韓龍雲禪師가 지은 祖師의 舍利塔碑를 세움과 同時에 塔廟를 侍護할 龍塔殿도 함께 建立하였다. 그러나 그 當時는 日帝治下였기에 스님의 生涯를 赤裸裸하게 摘記하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 하던 次 門徒와 스님의 遺志를 받들어 一九六九年에 設立된 財團法人 大覺會의 理事長이며 스님의 마지막 生存한 受法弟子인 慈雲老師의 發願과 大覺寺住持 佛心道文 和尙과 立碑幹事인 無心普光師主의 心血을 기울인 努力과 모든 門徒들의 合力으로 새롭게 碑碣를 세우게 되었으니 實로 스님 가신 지 半世紀만의 佛事임에 어찌 기쁘지 않으랴!! 感泣하면서 敢히 祖師의 行狀을 撰하는 바이다. 以上 祖師의 偉業倬跡을 偈頌으로 讚揚하노라.
悠久한 韓國佛敎 千七百餘年 동안
數많은 高僧大德 民族의 횃불되어
龍城堂 大祖師도 宿世의 願行따라
實相山 기슭아래 童子로 應身했네
出衆한 學童生活 四書를 涉獵하고
竺敎에 뜻을두어 海印에 出家하여
三藏에 精通하고 密旨를 大悟한後
文賢의 智行으로 이江山 살펴봤네
白衣의 檀君子孫 日帝에 짓밟히고
뺴앗긴 祖國山河 곳마다 피멍인데
兄弟는 굶주리고 姉妹는 헐벗으니
이슬픔 이아픔을 그누가 알겠으랴
이民族 이겨레를 가슴에 쓸어안고
解放의 그날까지 이한몸 사루리라
한손에 삽을들고 한손에 藏經번역
徹夜를 지새우니 落淚가 江이된다
사무친 解放一念 佛菩薩 感應시켜
塔洞의 獨立宣言 民族의 代表되고
西大門 監獄속에 囹圄의 五百日이
光復의 氣運되어 祖國은 獨立됐네
世緣이 임박하니 門徒를 모아놓고
위없는 大涅槃은 둥글고 常寂하다
慧命을 당부하고 微笑로 坐脫하니
영롱한 五色舍利 人天의 福田이네
大祖師 願行속에 宗團은 바로서고
佛法의 深奧함을 누구나 쉬배워서
達磨의 五葉처럼 江山에 滿開하니
크신뜻 거룩함은 後學에 龜鑑되네
東山에 달이뜨니 西山에 해가지고
南山에 說法하니 北山은 點頭하네
寂光殿 毘盧遮那 華嚴을 常設하니
紅流洞 秋溪聲이 伽倻山 吐해낸다
佛紀二五三七年(一九九三) 五月 八日
門孫 伽山智冠 謹撰
龍城祖翁
龍兮龍兮 造花莫測 呑吐乾坤 出沒自在
孔聖歎仰 誰敢復言 大吼寶塔 萬邦震動
詳譯金言 千古煇皝 鳳翼高座 花雨滿天
梵魚深藏 佛祖難窺 忽來忽去 夜半太陽
或住或行 蒼海明珠 一擧一投 少林虎嘯
一嚬一笑 曹溪獅躍
咦
輿此老有甚怨
柱杖從橫天地黑 億萬杖夫眼炯炯
曹溪宗正 不肖孫 退翁性徹 拜讚
門徒秩
-
恩法弟子
碧虛常輝 雲山性周 檀庵性昊 東山慧日 檜庵俊輝
東軒完圭 德雲基允 紫雲基正 東谷法明 峰庵大喜
海門永周 海雲載國 抱牛慧明
受法弟子
仙坡學成 大呵愚惺 警惺德律 慈航善柱
溪月敬善 普雨龍起 古庵祥彦 錦圃守玄
仁谷昌洙 中峰泰一 普鏡峯雲 性峰應惺
道庵禎熏 香山鍾遠 東庵聖洙
聖庵景鍊 慈雲盛祐 東湖花笑 連湖性玟
常樂我淨 寶光泰衍 石城和璟
恩佐
金海石船 高峰泰秀
傳戒
景霞載英
戒佐
眞龍幌震 東溟在敏 野泉宗伊 白荷德秀
禪佐 鏡峰靖錫 梵河道弘 田岡永信
佛紀二五三七年 癸酉(一九九三) 五月 八日
龍城門徒 門長 性徹退翁
財團法人 大覺會 理事長 金河光德
龍城門徒協議會 會長 佛國正觀
順天 朴 秉圭 謹書
대각사 대각회 사적기
- 소재 ; 대각사(1988)
-
대각사는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二번지·三번지에 연하여 위치하고 있는 절이다. 십구세에 출가 이십이세에 대각의 문을 열고 선·교·율에 정통하여 근세 한국불교계에 가장 큰 위업을 남긴 백용성 대종사께서 사십팔세 되던 일천구백십일년 사월 팔일 봉익동 二번지에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스님의 속성은 수원 백씨이며 이름은 상규 법명은 진종이고 법호가 용성이다. 갑자 일천팔백육십사년 오월 팔일 전라도 남원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대각사 창건 팔년 후인 오십육세 때 기미년 삼월일일 독립선언서에 서명 그로 인해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삼년의 옥고를 치르고 오십팔세 봄 동 감옥에서 출옥하였다. 그 후 불교의 현대화 기치를 들고 조선 세조대왕 이후 처음으로 핵심 경전 번역과 반포를 위해 대각사에 삼장역회를 설립하고 이곳에서 귀원정종· 심조만유론 등을 저술 발간했고 이어 신역대장경·화엄경·금강경·수능엄경·금비라동자위덕경·선문촬요·관정복마경·각정심관음정사총지경·대승기신론·금강삼매경·범망경·대방광원각경·육자영감대명왕경·천수경·지장보살본원경·팔양경 등을 번역 출간하고 아울러 대각교의식·수심정로·각해일륜·청공원일·팔상록·수심론·석가사·임종결·오도는 각·오도의 진리 등을 저술 간행하였다. 오십구세부터는 만주 연길 명월재 등에 칠십 정보의 대지를 구입 대각사 소속 포교당을 건립했고 이어 경남 함양 백전 백운산에 화과원을 설립 선·농일치 사상을 제창하였다. 대종사 육십일세 사월이십팔일 대각사에서 불경을 보던 중 입 왼쪽에서 치사리 일과가 나왔는데 현재 경남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 서편 사리탑에 모셔져 있다. 동년 불일지를 창간했고 사년 뒤 대각일요학교를 설립 삼장역회 기관지인 무아지를 간행하였다. 그 이듬해 대각사에 참선하는 모임의 선회를 개설하여 역경포교 등 중생교화에 힘쓰시다 일천구백사십년 이월 이십사일 대열반에 드시니 세수가 칠십칠세요, 법랍이 오십구세다. 일천구백삼십년 말 대종사 육십칠세 때 대각성전 이십육평 요사채 이십오평을 신축하였고 일천구백육십오년 회암 주지 때 이층 영각 상하 이십평을 지었다. 조국광복 후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던 김구 선생과 임원들의 귀국 봉영회를 이곳에서 개최하였고 일천구백육십이년 정부에서는 대종사께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제五호)을 추서하였다. 역대 주지로는 창건 주지 백용성대종사, 二대 회암 일천구백사십년부터 오십삼년까지, 三대 소천 오십삼년부터 오십사년까지, 四대 동암 오십사년부터 오십오년까지, 五대 회암 오십오년부터 칠십사년까지, 六대 효경 칠십사년부터 팔십팔년 현재까지의 四임기를 역임하는 동안 신도불자들의 정성으로 기존 법당 이십육평에서 사십오평으로 증축했고 요사채 이십오평에서 칠십평으로 증축 기존 대지 일백팔십이평에서 일백일십육평을 매입 총 이백구십팔평으로 확장했다. 일천구백팔십오년 시월부터 일천구백팔십육년 십일월까지 대각사 도량 내 기존 건물을 철거, 지하 일층 지상 삼층 총건평 사백평으로 신축하고 범종각 이층 일십평을 신축 대각의 종 일천관 주조와 일주문 일십오평을 신축하였다. 창건시 모셨던 석불상은 중생사로 이안하고 새로 삼존금동불상과 상중단 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대종사 오십팔세 되던 일천구백이십일년에 봉익동 二번지에 대각교회를 창립한 정신을 기리고 대각사상을 현창키 위해 일천구백육십구년 구월 십일일 재단법인 대각회를 봉익동 三번지에 설립하였다. 초대 임원으로 이사장에 동헌, 이사에 고암, 자운, 동암, 소천, 성철, 회암, 보경, 도원, 광덕, 성진, 석옹, 도문, 수길, 형하, 감사에 능가, 혜총, 김성철. 제二대 임원으로 이사장에 광덕, 이사에 자운, 고암, 동암, 회암, 도문, 석옹, 보경, 효경, 보광, 감사에 지관. 제三대 임원으로 선효. 四·五대 이사장에 자운, 회암스님의 입적으로 四대 지관, 동헌스님 자리를 五대 도업, 석옹스님의 뒤를 흥교가 이었고, 감사에 여환, 보광. 사무국장에는 대각회 설립시부터 현재까지 이태석씨가 맡고 있다. 용성대종사께서 선·농일치 사상을 제창하면서 실천도량으로 개설했던 많은 농지들이 일제의 압력으로 신탁되어 모두 유실되었고 화과원만이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에서 망실되었던 것을 선효화상이 임야 사십일만오백오십평, 밭 사천일백사십칠평 등의 전답을 찾아 대각회에 환원시켰다. 또 농막 관리소 건물 등을 화과원으로 등기하고 전기불사 등을 하였다. 대각사를 거쳐간 문중 고승대덕으로는 동산, 회암, 고암, 동헌, 소천, 자운, 동암, 덕산, 정산, 능가, 광덕, 홍철, 운문스님 등이 있다. 동산스님은 한국불교 정화 이후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였고 고암스님도 조계종 종정을 三대 연임하였다. 대각회를 설립한 창립 초대 이사장으로 동헌스님이 일천구백육십년부터 십오년간 대각회를 이끌었고 이어 회암스님이 二대 주지로 부임 六·二五의 참화를 딛고 입적할 때까지 대각사를 수호했으며 자운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 등 종단 요직을 거쳐 일천구백칠십육년부터 팔십칠년까지 십이년간 대각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대각사 발전의 기틀을 다지셨다. 능가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일년부터 십육년 동안 세계불교지도자대회와 해외포교에 주력하였고 광덕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이년부터 팔십사년까지 대각사에서 용성스님의 뒤를 이어 현대불교 포교의 횃불을 들고 불광법회와 불광출판사를 창립 문서포교의 일환으로 많은 저술을 하여 정화 이후 한국불교 포교의 새 장을 열었으며 홍철법주는 일천구백오십구년에 룸비니를 창립 중고·대학생 포교의 선봉으로 룸비니를 독립하여 이끌고 운문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이년 어린이 법회를 설립하여 어린이 불자 양성에 주력하다 운문사를 창건 시무중이며 도문스님은 용성대종사의 많은 저술을 대각회출판부 발행으로 복간하여 반포에 힘쓰며 그밖의 자운스님 편역 경전과 많은 분들의 역저를 대각회출판부 이름으로 간행하고 있다. 또 대각회 소속 사원으로 등기된 분원으로 서울에 금강사, 성덕사, 기원사, 보명선원, 육화사, 불광사, 본원정사, 향림선원, 불광반야원, 법안정사가, 경기도에 문수암, 영원선원, 개원사, 정토사가 있고, 충남에 연실사, 법정사, 효광선원, 법성선원, 학림선원이, 경북에 보광사, 대구에 대자비원, 백련포교원, 부산에 감로사, 구룡사, 대법사, 금수선원, 장천사, 대각선원, 경덕염불원, 경남에 청송사, 화과원, 여래원, 반야선원, 제월선원, 반야선원, 전북에 자혜선원, 전남에 선응선원, 제주도에 양진선원, 남국선원, 보문선원이 있다. 본부의 기본재산으론 대각회 부지 일백삼십평, 대각사 부지 일백구십오평, 대각성전 회관 사백평, 일주문 일십오평, 범종각 二층 일십평이 있다. 대각성전 건물은 세월이 흘러 신도수가 늘어나도 위로 몇층을 더 올려 지을 수 있도록 기초와 골격을 튼튼히 하였고 돌담장과 정원공사, 법당 내의 닫집, 탁자, 영단 각 건물 단청에 이르기까지 모두 새롭게 단장된 것이다.
대각도량 자비광명 누리의 어둠 밝힐 제
대종사 가르침을 큰 거울로 걸어서
대각하늘 오가는 구름 마음 비워 헤리라.
불기 이천오백삼십이년(단기 사천삼백이십일년, 서기 일천구백팔십팔년) 사월 초파일
효경 글을 짓고 고평석 글씨 쓰며
주인철 도안하고
이송재 조각하다.
용성龍城스님 거주터(居住址)
- 소재 ; 대각사 일주문(1999)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불교 혁신운동을 펼친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이 활동하던 곳
- 1)환성 지안喚惺志安(1664~1729) : 환성은 법호이고, 지안은 법명이다. 속성은 정鄭씨이고 춘천에서 나서 15세에 출가하였다. 상봉 정원霜峯淨源에게서 구족계를 받았고, 월담 설제月潭雪霽(1632~1704)의 법을 이었다.
- 2)죽림리竹林里 :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로, 현재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 해당한다.
- 3)전훈羶葷 : 누린내 나는 어육魚肉과 맵고 독한 냄새가 나는 마늘이나 파 등을 이르는 말이다.
- 4)불인지행不忍之行 : 자비와 의리에 입각하여 절제된 행실로 차마 행하지 않는 행동이란 뜻이다.
- 5)영가 현각永嘉玄覺 스님께서 육조대사六祖大師를 친견親見하고 하였던 선문답禪問答의 일부이다.
- 6)상계像季 : 계季는 말末과 같은 뜻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삼시三時 중의 두 시기로서, 즉 불교가 쇠퇴해지는 기간을 말한다. 여기서는 말세末世의 뜻으로 쓰였다.
- 7)대비주大悲呪 : 『천수경千手經』에 있는 천수관음의 공덕을 찬양한 82구句의 주문으로, 이것을 외면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고 한다.
- 8)업장業障 : 불도의 수행과 선행을 막는 세 가지 장애 중 하나를 말한다.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에서 지은 악업으로 인하여 생기는 장애를 이른다.
- 9)심광心光 : 부처의 지혜가 만물의 진상을 밝히는 것을 광명光明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 10)견문각지見聞覺知 : 인식이 외부 대상과 접촉하는 것의 총칭이다. 안식眼識의 작용을 견見, 이식耳識의 작용을 문聞이라 하고,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작용을 각覺이라 하며, 의식意識의 작용을 지知라고 한다.
- 11)통저탈桶底脫 : 물통의 밑바닥이 빠지듯 미정망집迷情妄執에서 싹 벗어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12)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 중국 당나라의 조주 종심趙州從諗(778~897) 선사와 수행승 사이에 이루어진 문답이다. 이 내용은 훗날 중국 남송 중기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는 무문 혜개無門慧開(1183~?) 화상의 저작 『무문관無門關』에 수록돼 있다. 무문 선사는 선가 공안 중 48칙을 뽑아 평과 설명을 붙여 『무문관』을 엮으면서 ‘구자무불성’ 화두를 제1칙으로 꼽았다.
- 13)향엄 지한香嚴智閑(?~898) 선사의 말이다.
- 14)구계具戒 : 구족계具足戒의 준말로, 불교 교단의 승려 중 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戒를 말한다. 모든 계율이 완전히 구비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15)대계大戒 : 대승계大乘戒의 준말로,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키는 계라는 뜻이다.
- 16)하안거夏安居 : 승려들이 여름 장마 때 외출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 17)전등록傳燈錄 : 중국 송나라의 도언道彦이 1004년에 엮은 불교 서적으로, 석가모니 이래 여러 조사祖師들의 법맥法脈과 법어法語들을 모아서 엮어 놓았다. 모두 30권으로 되어 있다.
- 18)월면불일면불月面佛日面佛 : 『조당집祖堂集』 14권 「마조록馬祖錄」에 전하고 있는 선문답이다. 마조馬祖 대사가 병이 깊었을 때 그 절의 원주院主 스님이 문병하러 와서 말하길 “스님, 요즈음 병세가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대사께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라 답하였다고 한다. 『불설불명경佛說佛名經』에 따르면, 월면불은 하루밖에 못 살고, 일면불은 1,800년을 산다고 한다.
- 19)공안公案 : 선종禪宗에서 조사祖師가 수행자를 인도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과제를 말한다.
- 20)금오산金烏山 : 금오산은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산이다.
- 21)일대시교一大時敎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애에 걸쳐 설한 일체의 가르침을 말한다.
- 22)입니입수入泥入水 :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진흙탕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물속에도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 23)대각교大覺敎 : 용성 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창립한 교단을 말한다.
- 24)지회支會 : 본회의 관리 아래 있으면서 일정한 지역 안의 일을 맡아보는 조직을 말한다. 여기서는 1922년 중국 연길에 설립한 대각교당大覺敎堂을 말한다.
- 25)거애괘효擧哀掛孝 : 상례喪禮에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는 것을 말한다. 거애擧哀는 선종禪宗에서 장례식 때 관 앞에서 ‘애哀 애哀 애哀’라고 세 번 곡을 하여 슬픔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괘효掛孝는 상복을 걸치고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말한다.
- 26)이 구절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에 나오는 게송의 일부이다. “위없는 가장 크고 완전한 깨달음(無上大涅槃)이 둥글고 가득히 밝아서 항상 고요히 비추네(圓明常寂照)”라는 뜻이다.
- 27)용성 스님 61세에 치아 사이에서 사리舍利 한 알이 나왔던 것을 말한다.
- 28)산아수양山峩水洋 : 옛날에 백아伯牙가 고산류수곡高山流水曲을 타니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듣고, “산은 높고 물은 넓게 출렁이며 흐르는구나(山峨峨 水洋洋)”라고 하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친구의 마음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 29)번역하면,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그대로 전하고, 부처님의 큰 가르침을 잡아 세우며, 큰 깨달음을 널리 펼치고, 조계종 조사祖師의 뒤를 이어서 원력으로 몸을 받아 태어나신, 용성龍城 조사, 진종震鍾 스님의 비명碑銘”이다.
- 30)영가각공永嘉覺公 : 중국 당나라 때 승려인 영가 현각永嘉玄覺(665~713)을 말한다. 호는 일숙각一宿覺, 자字는 명도明道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천태天台의 지관止觀에 정통하고, 온주 용흥사龍興寺에서 수행하였다. 조계曹溪의 혜능慧能을 찾아가 문답하여 인가를 받은 후 용흥사로 돌아와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저서로는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증도가證道歌』가 있다.
- 31)증도가證道歌 : 현각 선사가 선禪의 핵심을 운문韻文으로 읊은 글이다.
- 32)죽림리竹林里 :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로, 현재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 해당한다.
- 33)황구黃口 : 주둥이가 노랗다는 뜻으로, 젖내 나는 어린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통상 다섯 살 전후의 아이를 말한다.
- 34)혜두慧頭 : 화두를 깨치고 불법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 35)법기法器 : 법의 그릇이 큰 사람으로, 불법佛法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사람을 말한다. 즉 근기가 높고 대도수행을 할 수 있는 바탕과 소질이 큰 사람을 말한다.
- 36)영가 현각永嘉玄覺 스님께서 육조대사六祖大師를 친견親見하고 하였던 선문답禪問答의 일부이다.
- 37)업장業障 : 불도의 수행과 선행을 막는 세 가지 장애 중 하나를 말한다.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에서 지은 악업으로 인하여 생기는 장애를 이른다.
- 38)대비주大悲呪 : 『천수경千手經』에 있는 천수관음의 공덕을 찬양한 82구句의 주문으로, 이것을 외면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고 한다.
- 39)견문각지見聞覺知 : 인식이 외부 대상과 접촉하는 것의 총칭이다. 안식眼識의 작용을 견見, 이식耳識의 작용을 문聞이라 하고,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작용을 각覺이라 하며, 의식意識의 작용을 지知라고 한다.
- 40)통저탈桶底脫 : 통의 밑바닥이 빠지듯 미정망집迷情妄執에서 싹 벗어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41)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 중국 당나라의 조주 종심趙州從諗(778~897) 선사와 수행승 사이에 이루어진 문답이다. 이 내용은 훗날 중국 남송 중기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는 무문 혜개無門慧開(1183~?) 화상의 저작 『무문관無門關』에 수록돼 있다. 무문 선사는 선가 공안 중 48칙을 뽑아 평과 설명을 붙여 『무문관』을 엮으면서 ‘구자무불성’ 화두를 제1칙으로 꼽았다.
- 42)향엄 지한香嚴智閑(?~898) 선사의 말이다.
- 43)비구계比丘戒 : 불교 교단의 비구가 받는 계戒를 말한다. 모든 계율이 완전히 구비되었다 하여 구족계具足戒라고도 한다.
- 44)보살대계菩薩大戒 : 대승大乘의 보살이 받아 지키는 계라는 뜻이다.
- 45)타실비공打失鼻孔 : 『대혜보각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에 나오는 말이다. 콧구멍(鼻孔)을 쳐 없앤다(打失)는 뜻으로, 깨달은 뒤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행했던 수행의 자취마저도 단박에 모두 없앴다는 말이다.
- 46)전등록傳燈錄 : 중국 송나라의 도언道彦이 1004년에 엮은 불교 서적으로, 석가모니 이래 여러 조사祖師들의 법맥法脈과 법어法語들을 모아서 엮어 놓았다. 모두 30권으로 되어 있다.
- 47)월면불일면불月面佛日面佛 : 『조당집祖堂集』 14권 「마조록馬祖錄」에 전하고 있는 선문답이다. 마조馬祖 대사가 병이 깊었을 때 그 절의 원주院主 스님이 문병하러 와서 말하길 “스님, 요즈음 병세가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대사께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라 답하였다고 한다. 『불설불명경佛說佛名經』에 따르면, 월면불은 하루밖에 못 살고, 일면불은 1,800년을 산다고 한다.
- 48)조주무자趙州無字 : 한 승려가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개(狗子)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없다(無)”고 대답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무無’는 세상에서 말하는 유무상대有無相對의 ‘무無’가 아니라 유무의 분별을 초월한 절대적 ‘무’를 가리킨다.
- 49)보광사의 도솔암에서 대비주大悲呪를 염송하면서 정진하여, 물통 밑이 빠지는 것(桶底脫)처럼 환하게 깨달은 때를 말한다.
- 50)금강산 표훈사의 무융 선사를 찾아뵙고 나서, 보광사普光寺 도솔암兜率菴에서 화두를 참구하다가 얻은 깨달음을 말한다.
- 51)송광사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하면서 『전등록』을 열람할 때 얻은 깨달음을 말한다.
- 52)자리自利 : 스스로 수행하여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 또는 자기를 위하여 닦는 불법을 말한다. 이후부터는 스님의 이타利他에 대한 일을 서술하여 밝혔다.
- 53)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 모든 사찰의 주지와 재산에 관한 권한은 총독이 가진다는 7조의 조선사찰령과 8조의 시행규칙을 발표하여 조선불교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총독부에 예속시켰다. 그러나 임제종 운동은 소멸되어 총독부에 예속되지 않고, 조선불교의 독자성을 되찾기 위하여 새로운 포교당을 건립하였다. 총독부에 예속된 원종의 본부는 1910년에 창건한 각황사覺皇寺(현 조계사)에 둔 반면, 임제종 운동을 전개하였던 범어사와 통도사 등 남부지방의 연합포교당은 대사동大寺洞(지금의 인사동)에 선당禪堂을 개설하였다. 이로써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30본사 주지들의 원종과 이에 반대하는 임제종은 지척의 거리에 두고 대립하면서, 남쪽의 범어사 포교당과 북쪽의 각황사로 분리되었다.
- 54)심지법문心地法門 : ‘심지心地’는 사람들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진심을 대지大地에 비유한 말로, 대지가 만물의 근본이 되듯 모든 것에 근본이 되는 마음을 깊이 있게 밝힌 법문을 말한다.
- 55)이때 용성 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였다.
- 56)스님이 출가하여 수행한 기간은 61년인데, 이중 전반기의 30년 동안인 47세까지는 산중수행山中修行과 산중선회山中禪會를 중심으로 상구보리上求菩提를 구하는 자리행自利行의 기간이며, 후반기의 30여 년인 77세까지는 대중교화를 위한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이타행利他行의 생애를 보냈다.
- 57)이 구절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에 나오는 게송의 일부이다. “위없는 가장 크고 완전한 깨달음(無上大涅槃)이 둥글고 가득히 밝아서 항상 고요히 비추네(圓明常寂照)”라는 뜻이다.
- 58)동산 혜일東山慧日 : 근대의 승려(1890~1965)로, 속명은 하봉규河鳳奎이다. 고모부 오세창吳世昌, 은사 주시경의 영향을 받아 1912년 흥사단에서 국어연구회 활동을 하였고,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용성龍城 스님과의 만남 후 1912년 범어사에서 출가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용성 스님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3년간 옥바라지를 하였다. 1930년 해인사 선원 조실과 안변 석왕사 조실이 되었고, 후에 30년간 후학 지도에 힘써 13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1955년에는 불교정화운동을 마무리하여 승단을 비구 중심으로 바꾸었으며, 종정에 추대되었다.
- 59)경책警策 : 불교 사찰에서 좌선하는 수행자의 나태해진 정신과 흐트러진 자세를 다시 고치기 위해서 죽비로 어깨를 가볍게 치는 것으로, 여기서는 참마음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따끔한 가르침을 말한다.
- 60)상승선上乘禪 : 모든 사람이 다 수행할 수 있는 선, 또는 가장 깊고 넓은 선이라는 뜻. 대승선大乘禪과 같은 말이다.
- 61)살활殺活 : 중생이 갖는 번뇌와 망상은 죽이고, 밝은 지혜는 살린다는 뜻이다. 금강과 같이 단단한 지혜의 검으로 중생의 의단疑團을 자유자재로 제어하여 인연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제도함을 말한다.
- 62)마외魔外 : 천마외도天魔外道의 준말로, 불도佛道를 흔들어 방해하는 마귀를 가리킨다.
- 63)상한上澣 : 초하루에서 초열흘까지의 열흘 동안을 말한다. 초순初旬, 상순上旬이라고도 한다.
- 64)오세창吳世昌 :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며,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1864~1953)로, 위창葦倉은 그의 호이다. 개화파 중인 오경석의 아들로 대한민보사 사장을 지냈으며,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