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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해일륜覺海日輪
[표지]
- 각해일륜覺海日輪
대각교大覺敎 용성당龍城堂 진종震鍾 백상규白相奎 저술著述
이재수*
✽
옮김
- 白龍城先生肖像
각해일륜覺海日輪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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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大覺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대가 아니라고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1)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대각의 주먹(金拳)을 세워 올린 그것에 곧바로 본래 밝은 근본 진성(元眞)을 단박에 깨달을 것이지, 그대는 왜 스스로 미혹해 있는가?”2)라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길, “비유하자면 허공의 바탕에는 이런저런 모양이 없지만 능히 여러 가지 모습을 세우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끝없는 허공은 깨달음에서 나타나는 것”3)이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어떤 경우(一切時)에라도 있으면서 허망한 생각(妄念)을 일으키지 말고, 또 온갖 허망한 마음(妄心)에도 쉬어 없애 버리려고 하지도 말며, 망상의 경계(妄想境)에 있을지라도 분명히 깨달아 알려고 하지 말고, 분명히 깨달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진실을 가리려고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4)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끝없는 허공이 그대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 마치 한 조각 구름이 드넓고 맑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다.”5)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저절로 생기는 것(自然)도 아니고 인연을 따라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저절로 그러한 것이 아닌 것도 아니고, 인연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니, 일체의 형상을 떠나 있으면서도 일체의 법에 상즉하는 것이다.”6)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바다 같은 깨달음의 성품(覺海性)은 맑고 원만하며, 원만하게 증득한 깨달음은 본래 오묘하다. 본래 밝음이 비치어 대상이 생겨나니, 그 대상이 생기면 밝은 성품이 없어진다. 허공이 대각大覺에서 생겨남이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유루有漏의 미진과 같은 수많은 국토가 모두 허공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물거품이 없어지면 허공도 본래 없을 것인데, 하물며 모든 삼유三有가 있겠는가!”7)
또 말씀하시기를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도 인연을 따라 일체의 현상(事)과 법法을 성취하는 것이다.”8)라고 하시니, 내가 일찍이 이러한 성전을 보고 확실히 자신自信하였고 환하게 명백히 깨우쳤으니 도道의 큰 근원은 깨달음(覺)에서 나온 것이다.
각覺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본각本覺, 시각始覺, 구경각究竟覺이 원만하여 둘이 아닌 것(無二)을 말한다.
해海란 무엇인가? 끝없이 드넓고 깊게 융합하여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일륜日輪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오묘한 지혜가 원만하고 밝아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말한다.
종교, 도덕, 진리, 철학, 과학, 인과 등을 모두 다 갖추지 않음이 없으므로 ‘각해일륜覺海日輪’이라고 말한다.
覺海日輪頭言
覺曰 諸可還者는 自然非汝언이와 無可還者는 非汝而誰오하시오며 又云金拳起處에 直下頓悟本明元眞이어늘 汝何自迷오하시며 又云譬如虛空이 體非群相이로되 而能建立諸所物相이라하시며 又云無邊虛空이 覺所現發이라하시며 又云居一切時하야 不起妄念하며 於諸妄心에 亦不息滅하며 住妄想境하야 不可了知하며 於無了知에 不辨眞實이라하시며 又云無邊虛空이 生汝心內함이 猶如片雲이 點太淸裏라하시며 又云非自然이며 非因緣이며 非不自然이며 非不因緣이니 離一切相하고 卽一切法이라하시며 又云覺海性이 澄圓하고 圓證覺이 元妙로다. 元明이 照生所하고 所立照性亡이로다. 空生大覺中이 如海一漚發이로다. 有漏微塵國이 皆依空所生이로다. 漚滅空本無어니 況復諸三有아하시며 又云眞如는 不守自性하야 隨緣成就一切事法이라하시니 余가 曾見此聖典하고 廓然自信하야 煥然明白하니 道之大源이 出於覺이로다. 覺者는 何오? 本覺始覺究竟覺이 圓滿無二之謂也오. 海者는 何오? 汪洋冲融하야 深廣不測之謂也오. 日輪者는 何오? 妙智圓明하야 無所不照之謂也니 宗敎道德眞理哲學科學因等이 無所不備故로 覺海日輪云이로다.
대각응세大覺應世 2956년(1929) 기사己巳 12월 일 백상규白相奎 삼가 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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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05_b_01L각해일륜覺海日輪 머리말
각해일륜覺海日輪 제1권
제1. 대각의 본원심
제2. 대각교 원조의 성호를 풀이함
제3. 대각능인적묵각의 성도成道함을 밝힘
제4. 중생의 차별이 많으나 성품은 둘이 없는 것
제5. 구경에 하나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
제6. 인연을 관하는 것
제7. 세계가 창조됨을 설명함
제8. 중생이 된 것을 설명함
제9. 중생이 화생한 뒤에 서로 계속됨을 설명함
제10. 중생이 오직 식으로 된 것을 밝힘
제11. 오직 마음으로 된 것을 밝힘
제12. 천진 화학작용을 밝힘
제13. 대각의 부사의한 신통변화가 있음을 밝힘
제14. 중음신을 변명함
제15. 일체 유정동물은 반드시 식이 있는 것을 변명함
제16. 인과를 변명함
제17. 정情과 상想 두 가지 경중으로 삼계에 승강함을 변명함
제18. 사람이 현재(現今)의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받는 것을 변명함
각해일륜覺海日輪 제2권
제19. 고와 낙이 오직 마음으로 된 것
제20. 사랑이 종자가 되고 생각을 근문根門에 들여서 태가 되는 것
제21. 생각 자체가 가벼워 난생이 되는 것
제22. 사랑에 걸려 경계에 부딪침에 부합符合하여 습생이 되는 것
제23. 이 몸을 떠나 저 몸으로 의탁하여 변역으로 생겨나는 것
제24. 맑은 것으로 광채를 발하여 빛이 나서 색이 된 것
제25. 있는 것을 싫어하여 공에 집착하며 몸을 멸하여 없는 데로 가는 것
제26. 허망한 상에 잠결하여 빛이 없고 생각만 있는 것
제27. 굳게 어리석음을 지켜서 무상이 되는 것
제28. 물건을 기다려 빛(色)을 이루나 원래 빛이 없는 것
제29. 본래 빛이 없으나 이미 감득하여 바탕을 이루니 그 빛이 없는 것은 아닌 것
제30. 다른 몸으로 서로 이루니 그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 것
제31. 원수를 갚자고 의탁하여 났으니 그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닌 것
제32. 욕계육천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
제33. 십선계와 선정을 닦아 색계십팔천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
제34. 사공정을 닦아 무색계천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
제35. 병자를 보호하며 영혼을 천도하는 것
제36. 관법을 의지하여 소승을 성취함
제37. 각을 생각하되 관법을 행하면 마음이 화하여 낙원이 되는 것
제38. 신주를 지송코저 함에 반드시 네 가지 법을 알 것
제39. 인연을 돌이켜 관함에 마음이 화하여 연각이 되는 것
제40. 삼관을 원만히 깨치고 마음이 화하여 대승이 되는 것
제41. 한갓 경전만 독송하고 관법을 닦지 않으면 마침내 이룰 이치가 없는 것
제42. 진흙을 씻어 희게 하는 것은 마침내 그 이치가 없는 것
제43. 마음을 밝히어 도를 통달하여 마침내 정각을 성취하는 것
제44. 교의 바다에 현현한 글귀를 촬요하여 밝게 가리는 것
제45. 식을 굴려서 지혜를 이루는 것
각해일륜覺海日輪 제3권
수심정로修心正路
제46. 시삼마是甚麽 화두話頭에 병을 간택揀擇함(제1)
제47. 화두가 좋은 화두가 있다 함을 간택함(제2)
제48. 시삼마 화두가 백천 화두에 근본根本된다 함을 간택함(제3)
제49. 무슨 화두마다 본의심本疑心이 있으며 또 병된 것을 가림(제4)
제50. 화두를 참구하는 데 제병통諸病痛을 자세히 밝힘(제5)
제51. 화두참구話頭參究하는 모양을 말함(제6)
제52. 공부할 때에 불가불不可不 마군魔群이를 알아야 할 것(제7)
제53. 마가 도덕道德을 해롭게 하는 인유因由를 밝힘(제8)
제54. 마가 도를 해롭게 할 수 없을 밝힘(제9)
제55. 외도의 괴수된 자만 가림(제10)
제56. 색음色陰이 녹아질 때에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남(제11)
제57. 수음受陰이 녹아지려고 하면 열 가지 마군이가 나는 것을 말함(제12)
제58. 상음想陰이 녹아질 때에 열 가지 경계가 나는 것을 말함(제13)
제59. 외도의 종류를 밝힘(제14)
제60. 행음行陰과 색음色陰이 다 녹지 못하고 그 가운데 앉아 외도됨을 밝힘(제15)
제61. 상常·무상無常 외도를 말함(제16)
각해일륜覺海日輪 제4권
육조단경요역六祖壇經要譯
제1. 단경을 역술하여 본교의 전도과로 한 이유를 설명함
제2. 육조 성사께서 법을 받으신 역사
제3. 『마하반야경』의 제목을 강론함
제4. 공덕과 복덕이 다름을 설명함
제5. 안락세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제6. 정과 혜가 일체(定慧一體)
제7. 마음공부하는 데 용심用心하는 것
제8.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을 전수하는 것
제9. 무상참회無相懺悔를 주는 것
제10. 네 가지 큰 서원을 발하는 것
제11. 삼신이 일체임을 설명함
제12. 모든 근숙정사根熟正士들이 참청參請하는 것
제13. 성사께서 열반하시는 것
각해일륜覺海日輪 제1권
제1. 대각의 본원심(大覺之本源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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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08_b_01L묻기를(問曰),
“우리 교를 대각大覺이라고 하는데 무슨 뜻(意思)이 있습니까?”
대답하기를(答曰),
“두 가지로 나누어 풀이할(分釋)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보고 제일 크다고 할 것은 하늘과 땅과 허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교에서 크다고 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연심本然心은 천지 허공 만물天地虛空萬物을 상대적相對的으로 크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상대(對對)가 끊어진 것을 말한 것이고, 각覺이라는 말은 깨치는 이도 깨칠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대각의 본연심성은 말로 가르쳐 줄 수 없고 어떤 형상으로도 보여 줄 수 없다. 허공 가운데에 전기電氣의 성품이 가득하고 바닷물 가운데에 짠맛이 가득하여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다. 이와 같아서 대각의 체성도 분명히 있지만 일체의 이름과 모양이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뜻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일체 이름과 모양이 없어 본래 없다고 말하지만 분명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물건도 없어 마음도 아니고 불타佛陀도 아니며, 달마達磨도 아니고 승가僧伽도 아니며, 귀신도 아니고 무슨 물건도 아니며, 허공도 아니고 하늘도 아니지만, 지극히 크고 지극히 작으며, 지극히 비었고 지극히 신령하며, 지극히 견고하고 지극히 굳세며, 지극히 부드러워서 사의思議할 수 없다.
이 본성은 이름과 모양이 없지만 과거와 현재를 꿰었으며, 육합六合9)을 두루 에워쌌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의 주인옹主人翁이 되고 만법萬法의 왕王이 되는 것이다. 드넓고 드넓어서(蕩蕩) 비교할 곳이 없고 높고도 높아서(巍巍) 짝할 곳이 없다. 천지 세계보다 먼저 있어 시초始初가 없고, 천지가 마친 뒤에도 있어 종말終末이 없다.
이 대원각체성大圓覺體性은 천지가 나와 한 근원이며, 만물이 나와 동체同體이다.10) 이 성품은 성현에게 있다고 해서 더하지 않고 범부凡夫에 있다고 해도 덜하지 아니하며, 생멸生滅이 없어 각지고 둥글고 길고 짧음(方圓長短), 크고 작은 이름과 모양(大小名相) 등 일체가 하나도 없지만, 하늘에 있으면 하늘이 될 수 있고 땅에 있으면 땅이 될 수 있으며, 사람에게 있으면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이것은 우리 대각의 본원심성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대각의 근본적根本的인 심성心性을 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치게 하며,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을 깨닫게 함(覺他)이 둘이 아니어서 원만圓滿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하며, 또 사람사람마다 발 아래(脚下)에 청풍淸風이 떨치고 낱낱이 눈앞(面前)에 달이 밝았으니, 이것은 본각이 사람마다 본래 구족한 것을 표시한 것이다. 비록 본래 각성覺性을 구족했을지라도 깨치지 못한 것은 범부이고, 비록 깨침이 있을지라도 닦지 못하면 범부이니 어찌하여 그러한가?
비록 본래本來 금金일지라도 백 번이나 풀무에 단련하지 않으면 순금(眞金)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한번 순금만 되면 다시는 변하지 않으니, 우리가 닦아서 일진심一眞心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아서 이것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본각과 시각이 구경에 둘이 아니기 때문에 구경각이라고 하는데, 이상에서 이미 말한 것을 다 깨치면 대각이라 하는 것이다.”
제2. 대각교 원조의 성호를 풀이함(大覺敎元祖之名號分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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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기를,
“대각교의 원조는 누구라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우리 교의 원조는 능인적묵각能仁寂默覺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능인이라고 하는가? 능인이라고 하는 말에서 ‘능能’은 선권방편善權方便에 능하다는 말이고, ‘인仁’은 자비심慈悲心이 광대하다는 말이니, 대자대비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이다. ‘적묵寂默’은 큰 지혜智慧로 이치를 밝힌다는 말이니, 꿰뚫어 말하자면, 고요히 항상 비추고 비추어 항상 고요하여 고요함과 비춤이 함께 원만하다는 뜻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능인적묵이라고 하며, ‘각覺’은 능소能所와 모든 상대(對對)가 끊어졌지만, 모든 법을 깨달아 뚜렷이 비춘다는 뜻이니, 이것을 대각성인의 법호法號라 한다.”
“그러면 이 성현이 어느 때에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까?”
“지금(1929)으로부터 2천956년 전에 인도印度 가비라국迦毘羅國에서 탄생하셨음을 세상이 다 알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다.”
“어찌하여 대각교大覺敎라고 이름하였습니까?”
“우리 교의 원조 성호가 본래 대각능인적묵각석가모니불을 번역하면 대각능인적묵각이다.이라고 하기에 대각교라고 하였다.”
제3. 대각능인적묵각의 성도成道함을 밝힘(大覺能仁寂默之成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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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기를,
“대각은 어느 때에 정각을 이루었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능인적묵께서 진묵겁塵墨劫 이전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지만, 중생을 제도(衆生濟度)하기 위하여 모든 세간世間에 나타나시는 것이 마치 일천 강물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진묵겁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천하四天下를 부수어 미진微塵으로 만들어 그 미진 수효대로 먹 한 장씩 된다고 한다면 그 수효가 얼마라고 하겠는가? 그 먹을 다 갈아서 그것이 다하도록 점點을 찍고 그 점의 수효대로 한 겁(一劫)씩 헤아리면 그 수효가 얼마나 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많은 겁 전에 불도를 통달하시고 등정각을 이루시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한량없는 세계마다 인연을 따라 나타나심이 마치 달이 하늘에 나타나서 일만 물을 비추는 것과 같으니, 허공의 달은 법신法身에 비유하고 물에 비치는 달은 응화신應化身에 비유한 것이다.
허공의 달이 천하의 모든 나라(天下萬國)를 비추며 일체 물에 비치니, 그 달이 하나인 것을 알 것이며, 대각의 진신眞身이 백천억 화신으로 나누어지시고 그 화신이 진신眞身과 하나임을 알 것이다.”
제4. 중생의 차별이 많으나 성품은 둘이 없는 것(衆生之差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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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10_a_01L묻기를,
“세계의 유정동물有情動物이 각각 차별이 있으니 그들의 신령스럽게 밝은 지각(靈明知覺)이 하나입니까 많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동적강銅赤江(한강)에 비친 달의 그 본원本源을 생각하여 보면 공중空中 달의 그림자(影子)이다.
온 세계의 사람이 각각 그릇을 가져와서 각기 동적강 물을 길어 가면 온 세계의 사람 수효대로 그릇 가운데에 달이 하나씩 있으니 그 많은 달이 허공 가운데 달그림자임을 알 것이다. 그릇과 물과 허공 가운데 달 등 세 가지 인연(三緣)이 화합和合하여 그릇마다 달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릇은 비록 다를지언정 달은 다르지 않은 것과 같아서 중생의 업력業力과 몸과 마음(情器)의 차별이 다를지언정 본래의 법신(本法身)은 다르지 않다.
비유하자면 밝은 구슬을 제조하는 데 있어서 그 구슬의 원료原料도 다르지 않고 그 구슬의 밝은 체성도 다르지 아니하여 백천만 개라도 모두 그러하다. 또 빈방 안에 촛불을 하나 켜고 이 촛불 하나로부터 백천만 개의 촛불을 나누어 켜면 하나의 촛불이 백천만 개를 이루는데, 그 촛불이 낱낱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아서, 하나가 무량無量이 되고 무량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삼계 육도 사생三界六途四生의 차별이 무량하지만, 신령스러운 대각의 성품(靈覺性)은 다르지 아니하니 업력 차별로 각각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 본원의 성품은 하나인 것이다.”
제5. 구경에 하나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究竟爲一質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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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10_b_01L묻기를,
“일체중생이 다 깨치면 한 덩이를 이룰 것이니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비유하자면 수은水銀 한 병을 가져다가 방 안에 퍼뜨리면 백천 개가 될 것이고, 한곳에 쓸어 모으면 하나가 될 것이니, 일체중생이 다 깨치면 한 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과거 모든 성현이 모두 한 뭉치가 되었다가 퍼뜨려 놓으면 여러 낱낱이 되고 마는 것이니, 누구라 누구라 하는 과거 모든 성현이 모두 하나로부터 여럿이 되어 나온 것이지만, 가상假相으로 나는 누구이니 누구이니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대체로 비유라고 하는 것은 그 종류種類를 따라 말한 것이고, 전체를 통틀어 비유한 것이 아니다. 물 가운데의 짠맛은 본연성이 단멸斷滅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지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어서 일체의 이름과 모양이 없는 데 비유한 것이다. 전기의 성질(電氣性)에 비유한 것은 허공계에 가득하여 이름과 모양이 없고 삼세 고금이 없으며, 전파電波가 인연(緣)을 따라서 전기등의 불도 켜고 전보도 하며 전화도 하고 무선전신無線電信으로 먼 만 리 밖에서 서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 법신이 법계에 충만充滿하여 인연을 따라 일체를 성취하는 데 비유한 것이고, 촛불 비유와 수은 비유는 하나가 많은 것이 되고 많은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허공의 달이 일천의 강물에 비치는 것은 석가진신釋迦眞身이 허공의 달과 같고 응화신은 강물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며, 또 중생의 몸과 마음(情器)이 차별이 있을지라도 그 성품은 차별이 없다는 비유이다.
이 비유가 분명한데도 그대가 어찌 알지 못하고 수은 한 덩어리를 흩으면 여러 낱낱의 방울이 되고 떡방아를 찧어 가루를 반죽하면 한 뭉치가 되는 것과 같아서, 과거에 깨친 자와 미래에 깨칠 자들이 모두 개성個性이 없어지고 한 덩어리가 된다고 하면, 너도 없고 나도 없을 것이며, 과거에 모든 응정등각應正等覺과 모든 정사正士의 차별이 없어 모두 떡 반죽하듯이 한 덩어리가 되고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그 근원根源이 똑같이 하나라고 정한다면, 어찌 외도外道들이 말하는 것이 확실히 잘못된 상견(死常)이 아니겠는가? 그대의 말대로 하면 과거에 모든 대각과 모든 정사들의 ‘원인 되는 수행 자리(因地)’에서 발심發心하여 무량겁에도 불도를 닦아서 차례로 오십오위五十五位를 밟으면 각각 등정각을 이루신 역사歷史가 따로 있을 것이 없으며, 또 석가釋迦다, 미륵彌勒이다, 미타彌陀다, 관음觀音이다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가령 따로 있다고 할지라도 방편적方便的으로 가상적假想的으로 있을지언정 그 실상은 한 덩어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소견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름과 모습(名相)도 지을 것이 없는데, 무슨 망상과 사견을 일으키는가? 그러나 묻는 데 대하여 대답을 아니할 수 없다. 비록 본원각성本源覺性이 하나라고 할지라도 개성은 뚜렷하게(歷歷) 분명分明하다. 비유하자면 밝은 구슬 천 개를 놓고 이 구슬의 체성과 이 구슬의 투명透明한 것이 추호秋毫도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 구슬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혼합하여 한 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같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방 안에 촛불 하나 켜 놓으면 광명이 그 방 안에 가득하고, 두 개를 켜든지 백 개 천 개까지를 켜 놓아도 그 광명이 낱낱이 다르지 않고 낱낱이 광명이 가득하지만, 이 촛불 광명이 저 촛불 광명을 서로 장애하지 아니하고 각각 방 안에 가득하며, 비록 가득할지라도 합쳐진 것도 아니며 서로서로 섞인 것도 아닌 것과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성품도 그리하여 용성의 깨친 편으로 알아보면 용성의 광명 체성이 허공계虛空界와 법계法界를 다하여 사무쳤으며 과거 삼세 모든 성현도 자증분自證分의 입장에서 보면 낱낱이 모두 그러할 것이다.
또 인드라망의 구슬(帝網珠) 주렴珠簾과 같아서 이 구슬 광명의 체성에서 저 백천 구슬 광명 체성이 낱낱이 다 나타나며, 낱낱의 구슬에도 하나하나 그와 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깨달은 자의 광명 체성도 서로 거듭거듭 함께 나타남(重重互現)이 이와 같다. 그러나 석가나 미륵이나 미타든지 관음이든지 문수든지 보현이든지 각기 자수용삼매自受用三昧에 들면 서로 보지 못하며 서로 알지 못하는데, 이 부사의不思議한 경계境界를 깨치지 못하고 망정과 억견으로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6. 인연을 관하는 것(因緣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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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12_a_01L주인공主人公이 묻기를,
“제법諸法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있으며,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없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용성이 즉시 곽성냥을 딱 그어서 불을 켜고 ‘이것이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있는 것인가?’ 또 불 꺼진 뒤에 묻기를 ‘이것이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없는 것인가?’라고 한다면, 용성의 생각과 같아서는 모든 것은 인연의 모임으로부터 있는 것이고, 인연이 흩어짐을 따라서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성냥을 그으면 한곳에서 불이 일어나고 세계 만국 사람이 성냥을 같은 날 같은 시각(同日同時)에 딱 그으면 불이 일시에 일어난다. 이것으로서 본다면, 불이 처소處所가 없고 인연도 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과거 무량겁 전으로부터 오늘날까지라도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일어날 것이며, 미래 억천만 세 후라도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일어날 것이니 참으로 불의 성질과 이치가 가고 오는 것이 아니고 또 머무르는 처소(住處)가 없는 것이며, 멀고 가까운 것이 없는 것이고 끝없는 허공과 모든 법계(盡虛空遍法界)에 가득한 것이다.”
주인공이 또 묻는다.
“시방 허공세계 전체가 불이라고 한다면,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모두 불이 붙어서 타 버릴 것이며, 일월성신과 사람과 짐승, 초목(人畜草木)들이 모두 불에 타 버릴 것이 아닙니까?”
용성이 웃으며 말한다.
“그대가 제법인연諸法因緣의 성품과 현상(性相)을 알지 못하는구나. 또 곽성냥을 딱 그어서 불을 켜고 묻기를, ‘이 불의 전체를 불의 바탕(火體)이라 할 것이고, 불이 둥글고 길쭉하고 끝이 뾰족한 것을 불의 모양이라 할 것이며, 붉은 것은 불빛이라 할 것이고, 뜨거운 것은 불의 본성이라고 할 것이며, 환한 것은 불의 광명이라 할 것이고, 불은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고 다시 불을 입으로 확 불어서 꺼 버리며 묻기를, ‘불이 어디로 갔는가?’”
주인공이 어안이 벙벙하게 앉아서 눈만 깜빡깜빡하고 생각하기를,
‘용성이 급히 돌파하여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진실한 지혜가 없어서 분별심으로 알려고 하는구나.’
주인공이 말하기를,
“인연이 다한 이후에 헤어지는 것이니 불도 없는 것이 아닌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없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주인공이 대답하기를,
“불이 꺼진 후에는 불의 형체와 불빛과 불 광명과 뜨거운 것을 모두 볼 수 없고, 성냥가지나 성냥을 더 보아도 불을 볼 수 없는데,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확 일어나고 확 불면 불이 간 데 없으니, 내가 이것을 보고 불이 원래대로 없는 줄 알았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러면, 단정코 없는 것인가?”
주인공이 말하기를,
“단정코 없는 것이지요.”
용성이 말하기를,
“아주 없는 것이면 단멸이 아닌가?”
주인공이 말하기를,
“다시 무엇이 있겠습니까?”
용성이 다시 성냥을 그어서 불을 켜고 묻기를,
“이 불이 아주 단멸한 것이면 지금에 어찌 다시 불이 일어나는가? 이 이치를 알지 못하면 허무단멸 외도虛無斷滅外道가 된다.
불의 본성은 이름과 모양이 없고 광명도 없으며, 뜨거운 것도 없어서 끝없는 시방세계의 허공과 모든 법계(盡十方虛空遍法界)에 가득한 것이어서 본래의 형체가 없고 광명이 없으며, 뜨거운 것이 없는 것이니 어찌 산하대지가 불에 타 버리겠는가? 불의 본성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삼세가 없고 거래가 없으며, 머무는 처소가 따로 없지만, 인연을 따라서 불이 있고 인연 따라서 불이 없는 것이니 그 불의 본성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다. 고금에 종교가宗敎家나 철학가哲學家나 과학가科學家나 극도에 아는 것이 있고 없는 그것밖에는 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용성이 어느 한쪽에 치우친 마음(偏黨心)을 두는 것이 아니라 아무 종교라도 나에게 유익하면 믿고자 하노라. 그러나 천하고금 종교가 허무자연虛無自然을 주장하는 외도外道가 아니면 상견常見에 집착하였으니, 어찌 본연의 나의 성품이 단지 공하거나 단지 실재하거나 하는 것(但空但有)이 아님을 알았겠는가?
불의 본성은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지만, 인연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이어서 한 사람이 돋보기(火鏡)를 가져다 태양太陽에 견주어 광명을 반사反射하게 하고 그 광선光線에다가 쑥(蓬艾)을 대어 두면 불이 일어난다. 그리고 천하 사람이 이와 같이 하면 불이 동시에 일어날 것이니 인연이 모이고 흩어짐(因緣聚散)으로 있고 없는 것이다.”
주인공이 묻기를,
“불은 그렇다고 한다면 물은 어떠합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방저蚌渚11)라는 구슬을 달에 견주어 달 광명을 받으면, 맑은 물이 흘러 내려오고 구슬을 치워버리면 물이 생겨나지 않을 것인데, 물이 달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만일 달에서 온다고 한다면, 구슬이 없어도 물이 항상 달 광명 있는 곳곳마다 흐를 것이고, 만일 구슬에서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면, 달 광명을 구슬에 비추지 않아도 구슬에서 물이 항상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연이 모임으로 물 흐름이 있고 연이 흩어지면 물 흐름이 없는 것이다. 천하만국에까지 사람마다 구슬을 가져다가 달 광명에 비치면 구슬을 가진 곳에는 모두 물이 흘러내릴 것이다. 이것이 처소도 없고 시간도 없는 것이어서 그 물의 성품이 시방허공과 법계에 가득하여 이름과 모양이 없지만, 다만 연을 따라 있고 연을 따라 없는 것이 분명하다.”
주인공이 묻기를,
“물은 그렇다고 한다면 바람은 어떠합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한 사람이 부채(扇子)를 부치면 바람이 일어나고 진시방세계 사람이 동시에 일제히 부치면 동시에 바람이 일어날 것이다. 바람의 성품은 처소도 없고 시간도 없으며 이름과 모양도 없지만, 시방세계에 가득하여 인연이 화합한 곳에서 일어나고 인연이 흩어진 다음에 멸하는 것이다.”
또 주인공이 묻기를,
“땅은 무엇으로 인해 있는 것입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티끌이 모여 합하면 덩어리를 이루어서 땅이 되고, 티끌이 흩어지면 없음을 이루는 것이다. 진정한 땅의 성품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어서 시방세계 허공에 가득하여 인연이 화합함을 따라서 세계국토를 이루고 인연이 흩어짐에 따라 멸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묻기를,
“티끌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지혜 있는 사람은 담장 밖(墻外)에 소뿔(牛角)이 뾰족하게 보이는 것을 보고서 소가 있는 것을 알고, 산 너머에서 연기烟氣가 피어나는 것을 보고서 불이 있는지를 안다. 어찌 혀(舌)가 닳도록 설명한 후에 알겠는가.
참으로 답답하고 애석하구나. 내가 이 말을 설명하자면 참으로 성가신 것이지만, 그러나 대강 말하여 볼 것이다. 진성이 깊고 미묘하여 연을 따라 일체 만법을 성취하는 것이니 천지 고금 세계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고(唯心所作) 오직 아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唯識所造)이다.
『능엄경楞嚴經』에 대각께서 말씀하기를, ‘광대廣大한 허공이 네 마음에서 생生하여 일어나는 것이 한 조각 뜬구름이 가장 맑은 허공 속에서 피어나는 것과 같은데, 하물며 모든 세계가 허공을 의지하여 있는 것은 더군다나 말할 것이 무엇이 있으리오’12)라고 하셨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참마음은 지극히 크고 허공은 작은 것이며 또 허공은 지극히 크고 세계는 작은 것이다.
묘명진심妙明眞心은 참으로 밝은 것이다. 능소도 없고 상대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큰 허공에서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서 잠깐 사이에 두루 가득하여 천하를 덮지만 내가 일어남을 알지 못하고, 잠깐 사이에 구름이 걷혀서 청천백일이 되지만 내가 흩어져 멸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아서 우리의 본래 근원 되는 대원각성도 홀연히 생각이 퍼뜩 일어나서 천지세계 만물을 건립建立하지만 내가 일어남을 알지 못하며, 수水·화火·풍風 삼재三災가 일어나서 인연이 흩어져 멸하지만 내가 멸함을 알지 못하며, 또 멀리 생각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서 생각을 이루지만 내가 일어났노라고 미리 말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 내가 멸한 것도 알지 못한다. 생각이 멸하지만 내가 미리 멸함을 말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내가 멸한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아서 만법이 다 일어날 때에 내가 일어남을 말하지 아니하고 멸할 때에 내가 멸함을 말하지 아니하며, 또 만법이 각각 서로서로 일어나고 멸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말하기를,
“대지산하가 본래 어떻게 되었단 말입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물이 얼어서 얼음(氷)이 된 것은 사람사람이 모두 아는 것이지만, 성품이 일어나서 천지 세계 만상을 이루는 것은 어찌 알지 못하는가.
내가 간략히 설명할 것이다. 이름과 모양으로 나타낼 수 없는 이 물건을 이름과 모양을 붙여서 말하기를 본연성本然性이라고 하기도 하고 묘각妙覺이라고 하기도 하며, 묘명진심妙明眞心이라고 하기도 하고 묘원각성妙圓覺性이라고 하기도 하며, 진각眞覺이라고 하기도 하고 대원각성大圓覺性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많은 이름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일체 상대가 끊어졌으므로 참말로 그려 내지 못할 것이다. 가장 참으로 비었고 참으로 밝은 성품이 신령하고 미묘하여 고금시종古今始終과 생멸윤회生滅輪廻가 본래 없는 것이다.
진공묘지眞空妙智가 마치 큰 허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과 같아서 진여자성(眞性)에 연기緣起가 일어남이 무량무변하니, 그 연기가 일어남에 대하여 설명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허공虛空 자체自體는 일체가 아니지만, 갖가지 크고 작은 물상物像을 건립할 수 있는 것과 같아서 본각성이 자체가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며, 갖가지 상도 아니지만, 성性이 일어나서 상相 됨이 곧 세계이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된 것과 같은 것이니, 이 묘명진심이 가장 밝은 것이다.
한 생각이 번뜻 일어남으로 제일 처음에 미혹함을 이루니 이것을 이름하여 제8아뢰야신식第八阿賴耶神識이라고 하는데, 모두가 이 식으로 변화하여 만물을 출생한 것이다. 이 제8식第八識자체自體가 말쑥하고 텅 비어서 허공과 같으며 무사무려無思無慮하여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식無記識이라 한다.
비유하자면 명경明鏡이 일체 청靑·황黃·적赤·백白·흑黑 등 오색과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일체를 비추지만 못 비추는 것을 분별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공중의 구름이 일어남에 자연히 태양의 광명을 가리는 것과 같아서 망념妄念이 문득 일어나서 본각성本覺性이 자연히 가리는 것이다. 구름이 태양 광명(日光)을 가린 까닭으로 청명한 허공에 빛난 태양 광명이 컴컴한 허공과 화합하는 것과 같아서 망념이 일어남에 참으로 텅 비고 밝은 나의 본각성이 밝고 어두운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름이 태양 광명을 가림에 음산하고 후텁지근함에 빗물이 내리는 것과 같아서 본각의 성품을 망념이 가림에 참으로 텅 빈 나의 자성이 컴컴한 완공頑空과 화합하여 그 어두운 바탕을 이루었으며, 참으로 밝은 나의 묘명진심이 망녕되어 밝은 것을 이루었다. 이 완공의 어두운 바탕과 망녕의 밝은 두 가지 바탕이 서로 맞부딪침에 따라 바람이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이 진공의 어두운 바탕은 흙(土)이 되는 원소原素이고, 망녕되게 밝은 바탕은 물(水)이 되는 원소이며, 완공의 흐린 바탕과 진명眞明의 컴컴하게 어두운 망명妄明과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對衝)하여 마주 부딪치는 것은 바람이 일어나는 원인原因이다.
이 공중에 바람 기운(風氣)이 유동적流動的으로 말미암아서 공중에 어두운 기운(昧氣)이 강한 힘(强力)을 생하기 때문에 기운이 맺혀서 금金이 되는데, 이것이 금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이 공기의 강한 힘이 극함에 공기의 유동력이 완강頑强하므로 두 기운이 부딪쳐서 서로 문지르기(相磨) 때문에 이 문지르는 힘(磨力)을 인하여 열렬한 기운이 생겨나니 이것이 불이 나는 원인이다.
공기의 열렬한 불기운(火氣)이 완강한 공기와 서로 부딪침에 따라 화력의 완강한 금기金氣가 무르녹으니 이것이 물이 생겨나는 원인이다. 공기의 압력壓力과 공기의 충동력(衝力)으로 인하여 화력이 점점 더 일어나므로(轉勝) 어두운 기운(昧氣)이 생겨나니 이것이 흙이 생겨나는 원인인 것이다.
대체로 천지 만물과 사람과 축생과 온갖 것이 형상이 없는 공기를 인하여 있는 것이고, 공기는 완공을 인하여 있는 것이며, 완공은 각명覺明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고 각명은 본각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다. 혹 이름을 묘명진심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 대원각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름할 수 없지만 언설言說로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 지은 것이다. 세상 사람과 모든 교敎에서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꽃이 피고 잎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다 자연이라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소견이다.”
주인공이 말하기를,
“봄이 가고 가을이 오며, 낮이 가고 밤이 되는 것과 꽃이 피고 열매 맺히는 것이 누가 시켜서 되었겠습니까. 모두 자연히 된 것이 아닙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봄이 되고 가을이 되는 이치를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는 것은 해가 하짓날(夏至)로부터 남南으로 점점 내려감에 따라서 양기陽氣가 점점 엷어지고 음기陰氣가 점점 더 더욱 치성해짐(增勝)에 따라서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는 것이다. 동짓날(冬至)부터 해가 점점 북北으로 올라옴에 따라서 태양 기운이 점점 뜨거워지므로 음기가 점점 엷어지기 때문에 봄이 되거나 여름이 되는 것이다. 옥황상제玉皇上帝나 귀신이 하는 일이 아니다.
꽃이 피고 잎이 피는 것은 양기가 오면 피는 것이고 양기가 가면 죽는 것이다. 달리 귀신이나 상제께서나 일부러 그렇게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땅과 물과 종자가 있더라도 따뜻한 양기를 받지 아니하면 꽃이 피고 잎이 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인연으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며, 자연히 저절로 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대각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겨나고 모든 법이 인연을 따라서 멸한다’13)고 하셨다.”
용성이 다시 곽성냥을 딱 그어 불을 켜고,
“보아라. 이것이 나뭇가지와 유황과 약과 딱 긋는 곳과 사람의 손과 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불이 나는 것이 아닌가? 천지 세계 만물이 모두 인연을 떠나고는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용성이 또 그릇에 물을 떠다 놓고,
“주인공아 보아라. 천상의 달이 이 그릇 가운데에 비치었구나.”
물을 쏟아 버리고,
“보아라. 아까 보던 달이 어디로 갔는가? 달이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인가?”
주인공이 말하기를,
“달은 있지만 물이 없어서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인연이 화합하면 나타나는 것이고, 인연이 떠나면 흩어지는 것이다. 달이 없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이 다 이와 같다. 사람이나 축생이나 모두가 인연을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고, 인연을 따라 흩어지는 것이지만, 그들의 본연한 성품은 생멸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원래로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사람의 영상이 물 가운데에 나타남에 완전히 본래 사람(本人)과 같이 따라서 굽혔다가 펴는 움직임(屈伸動作)을 한다면 그 사람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맑은 거울을 비춤에 또 자기 형체와 움직임이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이와 같아서 우리 인생의 아는 마음이 부모의 인연과 화합함을 따라서 이 육체에 태어났다가 이 육체의 인연이 흩어지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다.”
주인공이 말하기를,
“그러한 미신迷信은 말하지 마시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누가 죽은 후에 그러한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용성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다만 눈앞(目前)의 일만 알고 전혀 자신의 중대한 사건事件은 알지 못하는구나. 그러면 죽어서 못 보는 것은 그만두고 지금 살아서 그대가 그대를 보는가? 우리 두 사람이 지금 앉아서 말하지만 눈을 깜박이고 손을 놀리며 굽혔다가 펴는 움직임을 하니 흡사히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그대가 어찌 보는가?
지금 내가 손과 발과 온몸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어서 마음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대가 나를 보는가? 또 그대는 잠을 아니 자고, 나는 잠들어 꿈을 꾸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노니는데 그대가 나를 역력히 보는가?”
주인공이 말하기를,
“볼 수 없습니다. 몸은 형상이 있지만 마음은 형상이 없는데, 어찌 보느냐 못 보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습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서도 보지 못하는데 죽은 후에 어찌 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고 어서 깨쳐야 할 것이다. 하룻날에 24시간이 윤회를 하고 1년에 12개월이 윤회하며,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윤회하고, 사람의 몸은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윤회하며,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로 윤회하는 것이다. 천지 만물이 윤회하지 않는 물건이 없다. 오직 사람만 윤회를 하지 않고 죽은 후에 우리 마음이 연기같이 사라져 없겠는가?
용성이 또 성냥을 딱 그어서 불을 켜고 ‘이 불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하며, 입으로 확 불어 꺼 버리고 ‘이 불이 어디로 갔는가? 이 불이 오고 가는 곳을 아느냐?’ 이 불의 현상은 연달아 켜졌다 꺼졌다 하지만 불의 본성本性은 상주불생常住不生하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한다. 이것을 알면 제법이 다 상주불생하고 상주불멸한다. 마구니의 견해(魔見)를 내어서는 안 된다.”
제7. 세계가 창조됨을 설명함(世界創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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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17_a_01L대체로 대원각성은 넓고 커서 끝이 없으며 깊고 깊어서 밑이 없어 허공으로도 비유하지 못하는데 어찌 하늘이 덮고 땅이 실을 수 있겠는가? 항상 고요한 체성은 지극히 텅 비어서 다함이 없어 옮겨 가지 아니하고, 항상 밝은 묘용妙用은 지극히 신령하여 다함이 없어서 변하지 않는다.
대각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끝없는 허공이 너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을 비유하자면 한 점 구름이 허공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라고 하시니 참마음은 크고 허공은 작은 것이며, 또 허공은 크고 세계는 작다는 말씀이다. 이 오묘하고 밝은 마음이 매우 깊고 미묘微妙하여 자기의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서 일체의 사업事業을 성취하는데,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성의 본능本能이라고 할 것이다.
또 묘명진심妙明眞心이 본분本分을 지키지 아니하고 아주 너무 밝아서 경거망동經擧妄動하므로 참 밝은 성품이 망령스럽게 밝아서 어두운 마음과 함께 화합하는데 이것이 무명이 된다. 비유하자면 청정淸淨한 바닷물이 외면外面으로 보면 일정一定하여 요동하지 아니하지만 안으로 미세微細하게 잠복潛伏하여 흘러서 머물지 않는 것과 같아서 묘명진심이 미세한 인연을 발생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 미세하게 요동하는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이 식이 움직임에 안으로는 묘명진심을 은폐隱弊하고 밖으로는 일만의 형상(一萬形相)을 발생시키는데, 이것은 허공과 세계와 만 가지 형상이 건립되기 전에 오직 묘명진심이 아뢰야식으로 변화(變體)된 것을 말한다. 이 아뢰야식은 세간성인世間聖人과 범부凡夫는 아는 자가 없다. 이것은 대각성인께서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서 철저적徹底的으로 깨달아 밝힌 것이다. 허공 가운데 미세한 티끌이 항상 움직여서 멈추지 않지만 범부는 보지 못하다가 아침에 새로 올라오는 새로운 태양 광명이 창틈으로 들어옴에 미세한 티끌이 낱낱이 보이는 것이다. 그와 같아서 대적정삼매를 증득하여서 아뢰야식이 쉼 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의 본체는 맑아서 허공과 같기 때문에 맑은 식(淸淨識)이라고도 하며, 일만 형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심왕식心王識이라고도 한다. 이 아뢰야식이 아득하고 텅 비어서 허공이 되고, 움직이어서 유주流注14)하기 때문에 모든 공기가 되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이 모든 공기의 원소와 유정무정有情無情의 종자種子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하고, 다르게 익혀지는 성질이 많기 때문에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한다. 비유하자면 해가 올라오면 허공과 우주만상宇宙萬像이 모두 밝은 광명으로 변화하더니 해가 서산西山으로 지면 우주宇宙 전체全體가 어두운 것으로 변화한 것과 같아서 묘명진심이 아뢰야식으로 변화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 완전한 허공 가운데에 어두운 기운이 여러 가지 분자分子를 발생시키는데 이 공기의 파도波濤가 치고 움직여 자꾸자꾸 변함이 한량없기 때문에 세계가 건립建立된다.
묘명진심은 완전히 텅 빈 것과 있는 것이 없지만 이 마음을 미혹(迷)하기 때문에 무명無明이 일어나고, 무명으로부터 알음이 경계境界를 발생시키고, 경계가 있음을 말미암아서 본래 밝은 성품이 숨겨진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완공頑空의 공空과 지각知覺의 알음이 나누어진다. 상想이 잠복潛伏하여 무기분자無記分子를 이루어 무정계無情界가 건립되고, 알음의 분자分子로 지각이 난동亂動하여 유정중생有情衆生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완전하게 미혹(迷)한 망상妄想이 어려서 맺힘으로 무기無記한 공기가 모든 분자를 내어서 무정세계無情世界가 되고, 망령된 알음이 항상 지각을 발생하여 유정동물有情動物이 된다. 이것이 모두 하늘이나 무슨 귀신鬼神이 조화를 부려서 세계 만물과 유정동물을 창조한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본원각성本源覺性이 심심미묘深深微妙하여 연기緣起가 한량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세계와 유정동물이 건립된 것이니 미신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천지 세계가 건립하기 전에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이 어디에서 나는 것인가? 이 아뢰야식의 체體가 완전히 텅 비어서 기운이 어두우며 아뢰야식체가 맑아서 망령되이 밝은 것이니, 어두운 기운은 흙이 되는 원소이고 밝은 기운은 물이 되는 원소이다.
이 어두운 기운은 탁하고 밝은 기운은 가벼운 것이다. 이 탁한 기운에도 두 가지 성질이 있으니 하나는 음토陰土가 되는 원소이고 하나는 양토陽土가 되는 원소이다. 이 밝은 기운에도 두 가지 성질이 있으니 하나는 음수陰水가 되는 원소이고 하나는 양수陽水가 되는 원소이다.
이 두 가지 성질이 서로 엉키어서 서로 부딪혀 그 사이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묘명진심으로부터 아뢰야식이 되고 아뢰야식으로부터 완공이 되며, 완공으로부터 어두운 기운과 밝은 기운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운이 서로 마주치면 그 사이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형상形相이 있는 세계가 성립되기 전에 이 세계가 성립되려는 원인이다. 사람도 이 바람의 힘으로 이 육체를 움직이고 세계와 일월성수日月星宿도 이 바람의 힘으로 운행運行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세계의 맨 아래(世界最下)의 국토國土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무릇 움직여 동하는 것이 바람도 되고 나무도 되는 것이니, 이 요풍양목搖風陽木이 음토陰土와 배합配合하여 그 둘 사이에서 음금양금陰金陽金이 생겨나며, 또 양금음목陽金陰木이 배합하여 그 둘 사이에서 양화음화陽火陰火가 생겨난다. 또 양화음금陽火陰金이 배합하여 양수음수陽水陰水가 생겨나며, 또 양수음화陽水陰火가 배합하여 양토음토陽土陰土를 생하는 것이다.15)
그러하므로 오행五行이 상생上生하여 만물을 생성하고, 오행五行이 상극相剋하여 만물을 소탕掃蕩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본연의 한 성품에서 신령한 마음의 불가사의한 작용(靈心不思議作用)으로 변화하여 생긴 것(化作)이지 결코 하늘이 창조創造한 것이 아니다. 내가 게송偈頌으로 간략히 그 뜻을 말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頌曰).
“언어도言語道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없사오니
어떻다고 그려 낼꼬.
허공으로 입을 삼고
산하대지山河大地
광명光明 놓아
만반신변萬般神變 다하여도
그려 낼 수 전혀 없다.
향상법신向上法身 허공 같고
진공묘지眞空妙智 일월 같다.
자체투명自體透明 영롱하여
신령하고 미묘하다.
시종생멸始終生滅이 없으니
생사윤회 있겠는가?
밝고 밝고 밝은 성품
비고 비고 비인 마음
시간 연대時間年代 끊어졌다.
밝은 성품 미묘하여
제 자성을 지키잖고
대해 바다 파도 일듯
무진연기無盡緣起 발생發生한다.
식심지혜識心智慧 없는 성품
식심識心 파도 일어나니
불생불멸不生不滅 저 성품이
반분생멸半分生滅 되었도다.
진眞과 망妄이 화합和合하여
제8식第八識이 되었으니
고요하여 허공 되고
움직여서 세계 된다.
어둔 매기昧氣 흙이 되고
밝은 기운 물이 되어
수토배합水土配合 성립하니
오행 차례 일어난다.
명매이기明昧二氣 배합하여
서로서로 충돌(對衝)하니
대풍륜大風輪이 일어나서
삼팔목三八木이 되었도다.16)
양목음토陽木陰土 배합하여
양금음금陽金陰金 발생한다.
양금음목陽金陰木 부부夫婦되어
이칠화二七火가 나는구나.
양화음금陽火陰金 배합하여
일륙수一六水가 발생한다.
크고도 큰 빗줄기가
허공으로 내려지며
한량없는 대풍륜이
밑을 받쳐 견고하여
큰 바다를 성립하니
억만유순億萬由旬 깊어서도
청정담연淸淨湛然 부동不動터니
큰 바람이 일어나서
바닷물이 동탕動蕩하니
도천파도滔天波濤 뛰어논다.
대풍력大風力이 맹렬猛烈하여
바람 물이 서로 치니
한량없는 물거품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두텁기도 한량없고
관대하기 무량하다.
점점 굳어 고체固體되어
금은 유리 칠보세계
미묘하고 정결하다.
세력 좋은 맹풍력猛風力이
허공중에 던져두어
색구경천色究竟天 이뤘도다.
한량없는 해를 지나
물이 점점 감축減縮되어
몇만 유순 내려오니
대풍륜이 다시 일어
칠보세계 좋은 천당天堂
엄정嚴淨하게 이뤘도다.
이와 같이 대규모大規模로
좋은 천국天國 십팔층十八層을
질서 있게 이룬 뒤에
점점 아래로 내려오며
여섯 층계 천궁전天宮殿을
엄정하게 지어 놓으니
이로부터 세계들이
층계층계 성립되어
욕계육천欲界六天 되었도다.
다시 대풍 서로 쳐서
우리 사는 큰 땅덩이
둔탁하게 이루었도다.
이와 같은 무수세계
중중무진重重無盡 한량없어
허공중에 떠 있으니
무궁무진無窮無盡 화장華藏세계
불가사의不可思議 대천세계大千世界
성인 범부 한량없어
무량겁을 계산해도
미진수微塵數의 하나라도
모두 전혀 알 수 없다.
종종 형상 방원장단方圓長短
온갖 차별 한량없다.
일어나는 세계들과
무너지는 세계들의
선후 차별 알 수 없다.
세계마다 물로 되나
지·수·화·풍 화합이오,
유정들도 그러하여
지·수·화·풍 된 것이다.
물이 얼어 얼음 되니
얼음 전체 물이로다.
밝은 성품 일어나서
환변幻變하여 세계 되니
세계 전체 마음이다.
삼계유심三界唯心 분명하나
구박범부具縛凡夫 모르고서
진비잡설塵飛雜說 도도滔滔하다.”
제8. 중생이 된 것을 설명함(衆生起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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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20_a_01L게송으로 말하기를(頌曰),
“대원각성 본원심은
세계 중생 한가지다.
지각 성품 잠복되어
무기성질無記性質 이루어서
지·수·화·풍 성립되니
산하석벽山河石壁 이 아니며
팔식바다(八識海) 변동變動하여
지각으로 환변幻變하니
육도중생 저 아닌가.
무기성품無記性品 세계 되고
지각 분자分子 중생 된다.
대해 바다 하나이나,
무량파도 도도하여
물결마다 차별 있듯
천진天眞 성품 하나이나,
염정연기染淨緣起 한량없어
국토차별國土差別 중생차별衆生差別
형모차별形貌差別 심행차별心行差別
무량무변 하신 말씀
한마디로 할 수 없소.
세계 성립 되고 난 뒤
중생들이 화생하니
마침 봄비 내려오매
독 가운데 고인 물이
오래되어 벌레(蟲) 나듯
세계 성립 오랜 뒤에
인종화생人種化生 분명하다.
세상 사람 자세 보오.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이것 아니 분명한가?”
제9. 중생이 화생한 뒤에 서로 계속됨을 설명함(衆生相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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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으로 말하기를(頌曰),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여
백천겁에 연애戀愛심이
서로 이어 상속하여
부모처자 인연 되어
세세생생 모였도다.
내가 너를 살해하고
네가 나를 살해하여
원한심이 맺혔기에
나는 너를 원수 갚고
너는 내게 원수 갚아
세세생생 원수 된다.
염소 죽어 사람 되고
사람 죽어 염소 되어
쉴 새 없이 윤회하오.
사기횡령 도적할 적
남종여종 우마축생
세계마다 충만하오.
오계五戒 받아 인간수생人間受生
십선十善 닦아 천당수생天堂受生
유루선정有漏禪定 닦은 사람
사선사공四禪四空 수생하고
탐진치貪瞋癡가 중한 사람
삼악도三惡道에 수생한다.
삼계윤회三界輪回 정륜井輪 같아
억천겁에 다함없다.
착한 것도 몽환夢幻이요,
악한 것도 몽환이니
삼계 대몽 어서 깨어
나의 본성 통달하면
생사윤회生死輪回 본래 없다.”
제10. 중생이 오직 식으로 된 것을 밝힘(衆生唯識建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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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21_a_01L대체로 참마음 성품의 자체가 모든 형상이 없어 지혜와 알음이 없지만, 자체를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일어나니 이로서 생멸이 없는 본원성本源性이 생멸을 이룬다.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이 화합和合하여 오로지 생멸도 아니고, 오로지 불생멸도 아닌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도 하고 불각不覺이라고도 하며, 근본무명이라고도 하고 제8식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자체가 맑아 허공과 같고 크기는 본원성과 같다.
이것이 세 가지 지극히 미세한 형상을 내니 이것은 모양이 없는 하나의 식의 작용(識相)이다. 하나인 진성眞性을 깨달아 본분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식의 파도(識浪)가 일어나서 미세한 생각이 된다. 지극히 미세한 생각을 업상業相이라고도 하고, 이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의 업상으로 말미암아 미세하게 볼 수 있는 것의 상相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전상轉相이라고도 하는데 어찌 그러한가?
아뢰야식에서 미세하게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능히 보는 모양(能見相)이 있으니, 이것은 능히 보는 모양으로 전변轉變된 것이기 때문에 전상轉相이라고도 한다. 능히 보아서 비추는 체體가 독립獨立되었기 때문에 경계가 나타난다. 이것은 능히 보는 자의 경계이니, 안으로 육근의 몸과 밖으로 세계 만물이 망령되이 나타나기 때문에 현상現相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를 이름하여 삼세상三細相이라고도 한다. 이 삼세상을 의지하여 여섯 가지 매끄럽지 않은(麤) 모양이 일어나는 것이니 법이 제 마음(自心)으로부터 일어남을 알지 못하고 결정코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법집法執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두 가지 구별이 있으니, 첫째는 지상智相이라고 하는데, 지상은 곧 지혜라는 말이다. 지혜로써 모든 법이 결정코 있음을 견고하게 집착하는 것이니 이 몸이 있음으로부터 마칠 때까지 법을 집착하여 버리지 아니하기 때문에 법집구생혹法執俱生惑이라고 한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라고 하는데, 법을 집착하여 항상 분별하는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지상과 상속상이라 한다. 하나는 이 위에서 말한 법을 견고히 집착하기 때문에 자타가 다름을 보고 자기를 헤아려 나에 집착하는 것인데, 이 가운데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첫째는 아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것을 집착하여 몸이 있는 이후로부터 목숨을 마치기까지 아상에 집착하여 버리지 아니하는데, 이것을 아집구생혹我執俱生惑이라고 한다. 둘째는 명자상名字相을 헤아리는 것이니 아상에 집착하여 분별을 집착하는데, 종신토록 변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아집분별혹我執分別惑이라고 한다.
둘째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증애취사심憎愛取捨心이 일어나며 탐진치가 치성하여 업을 짓기 때문에 선악 등 모든 업보를 받는다. 이 위에서 기록한 지상과 상속상과 집취상과 계명자상과 조업과 수보 등을 합하면 여섯 가지가 된다.
제11. 오직 마음으로 된 것을 밝힘(三界唯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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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21_b_01L보라! 우리가 말하고 잠잠하며, 손을 올리고 발을 움직이며, 앉고 누우며, 잠자고 오고 가며, 보고 들으며, 깨닫고 아는 것이 무슨 물건인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이 다 한다고 한다면, 어찌 죽은 송장은 알지 못하는가? 이것은 결정코 우리의 마음이다.
눈을 감고 깊은 방 가운데에 앉았는데, 마음이 천리만리를 순식간에 왕래하되 산하석벽이 걸림 없어서 자유자재로 왕래하니 이것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대는 유물론唯物論을 주장하니, 그대의 마음은 아무런 상관도 없고 오직 마음 밖에 있는 물건이 시비선악是非善惡과 모든 탐진치를 일으킬 수 있는가? 사람이 평상 위에 누워서 꿈을 꾸는데 꿈속에 하늘과 땅(天地) 해와 달(日月) 별들(星宿)과 모든 것이 역력하게 분명하니 이것도 오직 물건이 하는 것인가?
오직 물질物質이 정신精神을 지배한다고 하여서 유심唯心을 부인不認하고 유물唯物만 주장하니, 그대의 마음은 목석木石과 같이 아무 분별도 없는데 밖으로 모든 물건이 분별하는가? 마음이 하지 않고 오직 물건이 분별한다고 한다면, 죽은 송장은 어찌 분별이 없는가?
예나 지금이나 천하에 종교, 도덕과 철학과 과학과 모든 학문을 누가 제정하였는가? 마음을 내어 놓고 오직 물건은 그 법을 제정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에 전제국과 공화국과 노농공산勞農共産 등에까지 마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정한 목석이 하는 것인가? 그 유물을 주장하는 것은 마음을 내어 놓고 누가 한 것인가? 무정이면 목석이어서 하등의 지각이 없으므로 무슨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같아서는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자기의 밝은 성품을 깨달아 가는 마음, 공정한 마음, 굳센 마음, 진행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본원각성을 깨달으며, 큰 눈을 떠서 과거·현재·미래 등 삼세의 일(三世事)을 깨달아 가며, 우주의 모든 진리眞理와 고금의 흥망성쇠興忘盛衰와 미래의 모든 것을 밝은 마음으로 관찰하여 용단 있게 할 것은 하고, 아니할 것은 애초부터 볼 것 없이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대각의 종지는 법을 아주 정하여 놓은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춘하추동 사시가 질서를 따라서 바뀌는 것과 같아서 봄에는 봄일을 하고, 가을에는 가을일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일 시대를 거슬러 역리逆理를 행하여 도를 행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
『법화경法華經』에 말씀하시기를 “수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였다.”17)라고 하시니, 방편이라는 것은 도에 들어가게만 하는 것이지, 법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대해 바다를 건너가는 데에는 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하므로 우리 대각께서는 무수한 항하사의 모래알 수와 같은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인도하여 정도로 행하게 할 뿐이지 털끝만큼이라도 중생을 속이는 것이 없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요점만 말하자면(大關節) 마음이 주체가 되는 것이다. 앉고자 하면 곧 앉고, 눕고자 하면 곧 눕는 것이며, 가고자 하면 곧 가는 것이니, 백만 가지 일이 마음의 기틀이 움직이는 대로 모든 일을 시행하며, 한 생각을 쉬면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마음이 경계에 끌려서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일으키는 것은 본래 사람의 본래 성품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겁겁다생劫劫多生에 생활하기 위하여 자연히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발생하여 점점 습관이 굳어져서 그러한 것이다.
강물이 얼어서 얼음이 된 것은 추운 기운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지만 그 물의 본체는 본래 얼음이 아니고, 본래 그러한 성품이 범부가 된 것은 습관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니 본원성이 본래 범부가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의 습관에 끌리어서 고운 색色을 보면 음심淫心이 일어나고, 황금黃金을 보면 욕심欲心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는 오직 물건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라 하여 유물론을 주장하고 유심론을 부인하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자는 마음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우리의 본원각성은 본래 자연도 아니고 인연도 아니며, 자연 아닌 것도 아니고 인연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일체 형상을 여의고, 일체 형상에 나아가서 낱낱이 사무친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용성에게 묻기를,
“대체로 유정동물有精動物은 기운이 모이면 생겨나는 것이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 것이라고 하니 무슨 물건이 있어서 나고 죽을 것인가?”
용성이 대답하기를,
“네 말과 같이 다만 기운으로만 나고 죽는 것이고 마음은 없는 것이라고 하니, 대체로 기운이 신령하게 아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고 한다면 공기든지 전기든지 무슨 기운이든지 다 신령하게 아는 것이 있을 것이니, 그러면 어디든지 기운이 모이는 곳마다 사람으로 반드시 나툴 것이다. 만일 영지靈智가 없다고 한다면 오직 무정한 기운이 어찌 영지가 분명한 사람을 낳겠는가? 그러할 이치는 만무하다.”
그 사람이 다시 말하되,
“나무가 불에 타면 연기는 날아가고 나무의 몸통은 불에 사라져서 재가 되고 마는 것과 같을 것이니, 사람이 죽은 뒤에 무엇이 다시 있겠는가?”
용성이 대답하기를,
“우리의 본원각성本源覺性, 광명체성光明體性과 아뢰야식이 천지 허공법계를 두루 에워싸고도 꿰뚫어(包圍貫徹) 가득하여, 무량원겁無量遠劫에 세계국토를 성립하는 차별과 세계 형용 차별과 세계 주겁主劫 차별과 세계 괴공壞空 차별과 일체 유정동물의 형형색색과 일체 유정동물의 음성音聲 차별과 무엇이든지 광명체성光明體性 아뢰야식장阿賴耶識藏 가운데에 낱낱이 도장(印)을 찍어 두고 그 성품은 바다와 같이 조금도 증감增減이 없으니, 그대가 이 부사의한 일을 아는가?
그대가 유성기留聲器를 보느냐? 그 유성기의 모양 속에 소리를 잡아넣어서 머물러 두었지만 형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의 광명체성 가운데에 우주만상 일체를 도장 찍어 두지만, 미래가 없어지도록 머물러 털끝만큼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대가 믿지 아니할 것이다. 그대가 큰 소리를 하든지 작은 소리를 하든지 그 성음聲音이 공중에 전성電性을 따라 전파電波가 일어나서 순식간에 시방허공과 법계法界를 다하여 음파音波가 가득하게 되는데, 그 음파가 가득함을 따라서 허공과 법계에 가득한 전성電性으로부터 아뢰야식장과 대각본원성에 형적이 없는 도장(印)을 찍어서 그 말소리의 본체가 미래겁이 다하도록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말소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무시겁無始劫으로부터 미래겁이 다하도록 일체유정一切有情 무정無情 동물動物의 모든 소리가 역력히 분명하여 삼세에 간단間斷이 없고 시방에 공결空缺이 없다. 그것은 현재 지금에도 증명할 수 있다.
어디든지 전파를 따라 라디오 기관을 설치한 곳에 접촉되면 원근이 없이 말소리를 전한다. 참으로 부사의하다. 그 소리가 시방에 가득하되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이것만 그러할 뿐 아니라 가령 어떠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깊은 방 가운데에 앉아서 가만히 무엇을 생각하고 자기만 아는 것으로 인증하겠지만, 그 즉시로 시방에 모든 성현은 명명백백하게 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국토의 현상차별이든지 일체의 유정동물이든지 무엇을 막론하고 법계본성에 도장을 찍어 두어 미래겁이 다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보아라! 전깃불이 오는데 그 불이 어디에서 왔으며, 또 가는데 어디로 가는가? 올 때에도 형적이 없이 오고, 갈 때에도 형적이 없이 간다. 이것이 인연으로 모임을 따라서 나고 인연이 흩어짐을 따라 없어진다. 그 전성電性과 전기가 허공계와 법계에 가득히 충만하여 불생불멸한 것을 아는가?
흙과 물과 불과 바람과 모든 만물이 모두 죽고 사는 것이나 그들이 모두 죽지 않고 항상 우주와 허공계에 가득한 것을 아는가? 일체 유정동물이 다 생멸하지만 미래겁이 다하도록 항상 죽고 사는 것이 없는 것을 아는가?
사람의 몸은 물거품과 같고 마음은 바닷물과 같아서 물거품은 없어지더라도 물은 항상 있는 것과 같이 몸은 없다가도 있기도 하고 있다가 없는 것을 아는가? 허공의 구름은 항상 일어나고 멸하지만, 허공은 언제든지 텅 비어서 요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아는가? 유심 유물이 둘이 없어 하나임을 아는가?
대각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곧 금강계金剛界이다’라고 하시니 금강은 곧 생멸이 없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하므로 유물과 유심이 둘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바닷물이 청정한데 그 물이 맑은 줄로만 아는가? 그 물에는 반드시 짠맛이 있다. 허공이 텅 비었는데 빈 허공인 줄로만 아는가? 그 허공의 본원이 되는 대각성이 있다.
그대는 무엇이든지 눈에 보이지 아니하면 없는 줄로만 아는가? 그 성품은 비록 형상이 있는 물건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눈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불은 뜨겁고 후추는 매우며, 나무는 결이 부드러운 것과 강한 것이 있으니, 이 형형색색形形色色 등 만물이 다 자기의 성질이 있지만, 가만히 두고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형적形迹이 있는 물건도 각각 가만히 두고는 그 성질을 알 수 없는데, 일체 만물이 형체가 없는 기운으로부터 생겨나고, 형체가 없는 기운은 형체가 없는 아뢰야식의 업의 종자(業種)로부터 생겨나고, 형체가 없는 아뢰야식은 일체 명상一切名相이 없는 대원각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대원각성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심의식이 진행하는 처소가 소멸하여(心行處滅) 일체의 이름과 형상이 없는 것이다. 텅 비고(空) 있는(有) 것으로 말할 수 없으나 본래 깨친 성품이 결정코 있는 것이 마치 전기의 성품이 우주에 가득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허공의 구름이 일어나고 멸하며, 바람이 일어나고 쉬며, 산하대지 만물이 허공을 의지하여 있어 변화가 무상하지만, 허공은 언제든지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비유하자면 물이 변하여 파도가 되는데, 물이 곧 파도이고 파도가 곧 물이다. 물과 파도가 곧 둘이 아닌 것과 같아서 마음 밖에 각覺이 없고, 각 밖에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나는 삼계만법三界萬法이 유심유식唯心唯識이라고 한다. 유심유물唯心唯物을 둘로 보지 않는 것이다.”
제12. 천진 화학작용을 밝힘(天眞化學作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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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25_a_01L주인공이 묻기를,
“세계가 건립된 것과 중생이 생활하는 원인은 위에서 이미 들어서 알았겠지만, 천엽화千葉花, 단엽화單葉花의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 오색五色과 또 사이사이 서로 뒤섞여(間雜) 천형만태千形萬態로 된 저 꽃들은 무슨 이치로 된 것입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대각의 본원성품으로부터 아뢰야식이 건립되고, 아뢰야식으로부터 허공이 나뉘어 열리게(分開) 되며, 허공으로부터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五行의 기운이 발생되고, 오행의 기운으로부터 무수한 세계가 건립된 것이다. 이 아뢰야업식의 종성차별로부터 공기空氣와 오행의 차별(五行差別)이 있어서 유동流動하여 쉬지 아니하는데, 이 오행의 기운이 허공에 두루 가득하고 어지럽게 뒤섞여(遍滿混雜) 모든 물질物質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 공기 가운데 오행 기운과 해와 달이 운행하는(日月運化) 기운으로 일체 물질一切物質의 갖가지 형상과 갖가지 색色이 천형만태로 다른 것이다.
오늘날(現今)의 화학자化學者들이 물질을 제조함에 무엇무엇을 화합하면 무엇이 되고, 무엇무엇을 화합하면 무슨 빛이 되는 것과 같다. 보리(麥)를 길러 엿기름(麥芽)을 만들어 밥에 화합하여 온숙溫熟하면 단술이 되는 것과 같이, 밀(眞麥)을 뽑아 누룩을 만들어 밥과 물에 화합하여 온숙하면 술이 되는 것과 같으며, 아뢰야식의 종자성種子性이 갖추어져 있어 공기가 오행기운 분자로 화합되어서 각각 소질素質의 분량分量을 따라 화합되는 대로 천연적 화학을 성취하여 일체의 물상(一切物相)에 갖가지 형상과 갖가지 빛이 있는 것이다.
일체 물질이 원시적原始的인 시대時代에는 모두 아뢰야식으로부터 화생으로 건립된 것이고, 건립된 뒤에는 뿌리로 전하는 것(根轉)과 종자로 전하는 것(種轉)과 화생化生이 있는데, 목단꽃과 작약꽃은 뿌리로 종자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를 가져다가 해부하고 분석하여 보아도 목단나무나 작약나무의 가지(枝)나 잎사귀나 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작약나무나 목단나무가 어디로부터 따라 생겨 나온 것인가? 그 뿌리가 생길 때에 아뢰야식의 종성種性과 업종성業種性의 기운을 얻어서 본래의 화학적 작용(天眞化學的作用)을 충분히 성취하여 목단나무와 작약나무의 가지와 잎사귀(枝葉)에 꽃피는 것이 원만히 갖추어져 있어서 물과 흙(水土)과 따뜻한 양기를 얻어 만나게 되면 움이 나와서 점점 자라서 가지와 잎사귀(枝葉)가 무성하고, 꽃이 피어 불긋불긋 희끗희끗 천진난만한 것이다.
종자로 전하는 것은 아뢰야식의 종성과 업성의 기운(氣分)을 받아서 뿌리로부터 나무로 전하며, 나무로부터 가지와 잎(枝葉)에 전하여 전통의 기운(傳統氣分)을 오롯이 전한다. 꽃피고 열매 맺는데, 그 과실 가운데에는 반드시 씨가 있고 그 씨 가운데에는 인심仁心이 있어서 그 아뢰야식의 종성업인種性業因을 따라 나무가 나오는 것이다.
그대가 보라. 저 소나무 씨가 가장 작지만 그 작은 씨 가운데로 천지만엽千枝萬葉인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나오게 된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다 알 것이니, 세세한 잔말은 다 할 것이 없다.”
주인공이 묻기를,
“유심유식적唯心唯識的으로 화현化現되기는 마찬가지인데, 초목의 종자는 무정지물無情之物이 되어 나오고, 조수鳥獸의 알(卵)은 유정동물有情動物이 되어 나옵니다. 그러한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뢰야식 가운데에 두 가지 종성種性이 있는데, 하나는 지종성知種性이고 하나는 무기종성無記種性이다. 지종성에는 반드시 유정동물이 되어 나오고, 무기종성에는 반드시 무정지물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제13. 대각의 부사의한 신통변화가 있음을 밝힘(大覺之不思議神通變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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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26_a_01L객이 묻기를,
“대각께서 부사의한 신통변화가 있다고 하는데, 무슨 도를 닦았기에 그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신통변화와 조화가 있습니까? 나는 몹시도 허망하고 거짓되어(虛誕) 보여서 믿지 않습니다.”
용성이 대답하기를,
“대체로 부사의한 신통변화와 조화는 누가 없겠는가? 그러나 천상, 인간과 유정동물이 그 정도를 따라 그 작용하는 신통변화가 각각 다른 것이다. 이것이 모두 마음의 작용이고, 추호도 다른 것은 없다. 까마귀와 까치는 날고 노루와 사슴은 기는 것은 모두 천진묘용天眞妙用이며, 무작신통無作神通이니 이 신통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그러나 내가 범부와 성인이 작용하는 신통변화(神變)를 말하겠다.
대체로 범부에게도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등이 많으나, 그 가운데 지혜가 있는 자만 말하겠다. 현재 서양 사람이 마음으로 자세히 연구하여 모든 기계機械를 교묘히 만들고, 공기와 물과 불(水火)을 사용하여 운전運轉하는데, 화륜선火輪船은 물 위로 빨리 나는 것과 같이 가고, 기차氣車는 육지陸地에서 빨리 나는 것과 같이 가며, 비행기飛行機는 허공으로 빨리 날아간다. 이것은 모두 범부의 심령적心靈的 작용作用으로써 물질적 기계를 사용하는 신통변화이다. 또 우주 간에 충만한 전기를 사용하는 방법方法을 연구하여 라디오로 일체 통신과 노래와 연설하는 것을 방송放送하며, 전신電信, 전화電話, 전기등電氣燈을 사용하니 이것이 다 심리적 작용이 아닌가?
탐내고 성내는 번뇌가 있는 중생도 모든 기계의 사용하는 법을 통달하여 이와 같이 광대한 사업을 한다면, 대각께서는 무량아승지겁無量阿僧祗劫을 닦아서 도행道行이 원만한 성인이시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대각께서는 무슨 술법術法이나 그러한 마술魔術이 아니다. 우리의 본연성에 본래 구족한 무작묘용無作妙用이다. 모든 하늘 사람의 신통을 대각의 신통변화의 작용(神變作用)에 비유하자면, 대각은 해와 달(日月)과 같고, 제천諸天은 반딧불(螢火)과 같아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각의 육신통六神通을 대강 말하겠다. 대각의 천안통天眼通은 분별상分別相과 작용상作用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허공을 다하고 법계를 다하여 온통 사무쳐 보니 그 시력視力은 원근遠近이 없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대각의 몸은 본원자성 광명성체本源自性光明性體이어서 거래去來가 없는 몸이며, 온몸이 눈이어서 법계에 가득한 것이다. 그러하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허공이 다하고 법계가 다하여 삼세를 명철明撤히 보시는 것이다.”
묻기를,
“현재에 시방세계 모든 소리를 다 듣는다고 하는데, 그 말이 허황하여 헤아리기가 어려워 믿을 수 없는데, 어찌 형상과 자취가 없는 과거사와 미래사를 역력히 보겠습니까?”
용성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일체 만물이 지·수·화·풍으로 건립된 것을 아는가?”
“예, 그것으로 건립된 것을 알지요.”
“그러면 모든 것이 무슨 인연으로 나고 죽는 것을 아는가?”
“예, 그렇지만은 성인이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하지夏至부터 태양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감에 태양 광명이 지면地面에서 거리가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양기陽氣가 점점 희박하여지므로 북방北方 음기陰氣가 점점 따라서 수승하며, 가을(秋)이 됨에 오곡五穀 백곡百穀과 모든 과실菓實이 다 성숙하며, 또 따라서 겨울이 됨에 초목草木은 모두 낙엽落葉이 되어 말라지고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니 이 인연으로 죽는 것이다.
동지冬至를 당함에 태양이 남으로부터 점점 올라옴에 지면地面에 태양 광선이 점점 뜨거워지는 인연으로 일체 초목총림草木叢林이 꽃피고 잎이 나니 이것이 다 양기가 오면 나고 양기가 가면 죽는 것이다.
그것들이 말라(枯) 썩어짐에 아주 없어지는 것으로 아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이 썩어 말라질 때에 물 기운은 태양에 폭사暴射를 받아 공기 중으로 유산流散하여 어느 곳이든지 혹 바닷물이나 혹 강물이나 냇물에 합하여 억만겁 동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둔탁한 바탕은 흙이 되어서 언제든지 없어지지 아니하며, 바람 기운과 불기운은 위로 떠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바람은 바람과 합하여 바람이 일어나기 전의 바람의 성품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과 합하여 불나기 전에 불의 성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지·수·화·풍의 본성이 법계에 두루하여 항상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아는가? 사람의 육체도 그와 같고 세계도 수水·화火·풍風 삼재三災가 일어나서 없어지는 것 같으나, 그 지·수·화·풍의 본성은 언제든지 법계에 가득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은 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죽으면 아주 없어진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구나. 우리가 보는 관찰觀察로는 세계와 무정초목도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어찌 우리의 본마음과 본 성품이 없어지겠는가!
그대가 유성기留聲器에 무슨 소리든지 잡아 넣어 둠에 그 소리가 없어지지 않고 천 년이라도 있는 것을 알겠는가? 또 우리의 일평생 무슨 말이든지 한 것이 낱낱이 허공법계에 가득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아는가? 무수한 사람이 큰 소리 작은 소리를 막론하고 소리마다 공기와 전기를 따라 낱낱이 허공계에 가득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강물 가운데 돌을 던짐에 그 물에 파문波汶이 사면으로 뻗어 나가서 그 끝에 닿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말소리가 비록 작을지라도 전파電波를 따라서 법계에 가득해짐에 그 소리가 고금에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아는가?
또다시 비유하자면 그대가 일평생 문학文學에 종사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마음속에 넉넉히 간직하여 두었지만, 간직하여 둔 곳이 없는 것과 같아서, 무시겁으로부터 미래겁이 다하도록 모든 물질의 형상과 일체 차별 형상과 모든 유정동물의 마음먹는 것이 역력하여 항상 있는 것을 아는가?
또 그대가 일체 동물이 무시겁으로부터 오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역력분명하여 허공과 법계를 다하여 언제든지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아는가? 저것들이 다 본원성으로부터 일어나지만 일어남을 말하지 아니하며, 멸하지만 멸함을 말하지 아니한다. 비유하자면 허공에 구름이 일어나고 멸하지만, 허공은 일정하고 요동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아서, 본원성도 그러하여 온갖 것이 이것으로부터 일어나지만 본성은 털끝만큼(毫末)도 요동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 앞에서 이미 말한 모든 물상의 차별과 모든 음성의 차별과 일체 유정동물의 차별이 모두 본원각성에 도장을 찍어(印) 두는 것이 마치 유성기에 소리를 넣어 둠에 그 소리를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어 전혀 형적이 없지만, 천 년 뒤까지라도 유성기를 놓고 기계를 돌리면 그 소리가 역력분명한 것과 같다. 사람마다 일평생 보고 들은 것과 『시경』과 『서경』 등 온갖 종류의 책(詩書百家)과 종교, 철학, 과학 등을 마음에 받아 간직하여 두었지만 형적을 볼 수 없으며, 형적이 없지만 인연을 따라 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아뢰야식과 법계성法界性에 도장을 찍어(印) 둔 것이다.
만물의 형체를 성립한 원료原料는 지수화풍이라고 하며 금목수화토라고 하는데, 만물이 이것을 떠나서는 모든 형상이 없는 것이며, 담담하고 쓰고 달고 맵고 짠 것은 만물의 성질이다. 그 맛에서 잠기는 성질은 음陰이 되고 뜨는 성질은 양陽이 되는 것이며, 혹 물질이 강하고 유柔하며, 곧고(直) 굽은(曲) 것은 기운에 관계되는 것이다. 청황적백흑은 만물의 빛이 되는 것이고, 방원장단대소 등은 만물의 형상이 되는 것이며, 청탁은 음양의 기분으로 된 것이다. 물은 언제든지 내려가고 불은 언제든지 올라가는 것이며, 불은 뜨겁고(熱) 물은 젖는(濕) 것이다. 이것은 우주간宇宙間에 변치 아니하는 것이다.
대체로 뜨고 잠기며, 비고 실한 것은 음양의 기운을 표시한 것이다. 불은 마찰력磨擦力으로 전기를 발현하는데, 전기는 시방十方 허공에 가득한 것이다. 이 전기는 전성電性을 의지하여 있는 것이니 이것을 사용하는 대로 전신이 되고 전화가 되며, 전등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이나 땅이나 바람이나 모든 것이 그 본래 기운과 그들의 형용체상을 갖추기 전에 성품이 허공에 가득하여 서로 어지럽게 뒤섞이지(雜亂) 아니하는 것이 마치 백천의 등불을 한방에 켜는데, 여러 등불이 서로 어지럽게 뒤섞이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무형적으로 허공법계에 가득한 것이다. 이것들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있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이것들의 종자성種子性을 간직하여 둔 것이니, 이 종자성의 수효를 알 수 없이 한량없다. 이 종자성에는 각기 업종자를 갖추고 있다. 아뢰야식은 환변幻變이 무상한 것인데, 이것의 환변으로 일체종자성과 업종자성이 발현하여 천진한 화학적 작용으로 만물의 형상이 각각 차별이 있는 것과 청황적백흑 오색으로 꽃이 피고 잎이 피는 것이 각각 차별이 있는 것과 일체 유정동물의 차별이 있는 것과 그들의 음성이 각각 차별이 있는 것이 불가사의하니 어찌 입으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다 아뢰야식의 부사의不思議한 업종차별業種差別의 화학적化學的인 작용作用이니, 이것이 다 우리의 광명체성 본각을 의지하여 건립된 것이다.
우리가 이 식정무명識情無明을 타파하고 본원각성에 합하면 손바닥 위에 뚜렷이 밝은 구슬을 놓고 보는 것과 같아서 허공을 다하고 법계를 다하여 보고 듣고 하는 것이지 무슨 술법이 아니다. 우리가 다 낱낱이 구족하였지만 무명의 깜깜한 어둠(黑暗)에 덮여 있기 때문에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범부가 된 것이다.
대각께서는 이 성품을 깨달아서 수용하기 때문에 그의 육신통六神通과 모든 신통이 불가사의하니 어찌하여 그러한가? 세상 사람이 미진微塵을 보지 못하다가 아침에 태양광선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면, 가는 티끌을 역력히 다 보는 것과 같아서 우리의 마음이 지극히 청정하면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다 보고 듣고 알 것이다.”
제14. 중음신을 변명함(明辨中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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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29_a_01L객이 묻기를,
“중음신中陰神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은 옳은가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우리의 본원각성은 본래 중음신이 없다. 유정동물은 낱낱이 업혹業惑의 습기習氣가 맺혀서 중음신이 있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강물은 본래 얼음이 아니지만은 태양의 찬(寒) 기운으로 인하여 얼음을 이루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중음신이라고 합니까?”
답하기를,
“유정동물이 다 죽을 때에 이 육체는 버리고서 저 새로운 육체를 받지 못하였을 때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을 중음신이라고 하는데, 음陰이라고 하는 말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묘명진성妙明眞性을 그늘로 하여 가리기 때문에 이름을 음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두루(通) 합하여 중음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중음신의 모양은 어떠한가요?”
답하기를,
“중음신은 대개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용모가 단정端正하고, 하나는 용모가 추악麤惡한 것이다. 지옥 중음신은 느티나무(楡木)를 불에 사른 빛과 같고, 축생畜生 중음신은 연기 빛과 같으며, 욕계 중음신은 금빛과 같고, 색계色界의 모든 중음신은 빛이 선명하고 좋으며, 무색계無色界에는 중음신이 없고, 공空과 식識과 비상非想과 비비상非非想에 머무른다.
또 육취의 중음신은 손과 발이 각기 둘이 되는 자도 있으며, 혹 사족四足을 가진 자도 있으며, 발이 많은 자도 있고 혹 발이 없는 자도 있으니, 모두 현세업력現世業力을 따라서 사람은 사람의 생각을 내고 축생은 축생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몽중에 행行·주住·좌坐·와臥하는 것이 생시生時의 자기 몸이지 다른 것은 없다.”
묻기를,
“사람이 죽은 뒤에 낱낱이 중음신이 있습니까?”
대답하기를,
“악업이 중한 자는 곧 악취로 가서 나고, 선업이 중한 자는 선도에 가서 나며, 악과 선을 닦지 못한 자는 중음신의 과보(報)를 받는 것이다. 그 과보를 받는 것이 혹 십 년이나 백 년까지를 받는 자도 있으니 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묻기를,
“사후에 천도를 시킨다고 하니 이 말이 허황한 말이 아닌가요?”
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귀신鬼神의 과보를 받은 자가 수없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관리管理하는 자가 있어서 통치統治하는 것이니, 인간사人間事와 다르지 아니할 것이다. 혹 사후에 자손子孫이 삼단보시三壇布施를 베풀어서 선법을 지어 죽은 영혼靈魂을 도와주면, 그 음덕으로 천도되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 천도하는 인유因由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시방 일체 성현의 위력이고, 둘째는 법을 지닌 집사자執事者의 법력法力과 관력觀力이며, 셋째는 시방에 유주무주有住無住 고혼孤魂에게 법식法食을 보시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으로 유주무주 고혼에게 보시하여 주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재물과 법으로 보시하여 주는 음덕으로 천도가 되는 것이나, 이것이 다 사람마다 효순심孝順心에 있을 것이므로 나는 힘써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다 미신이라고 할 것이다.”
“중음신도 생사가 있습니까?”
답하기를,
“생사가 있는 것은 인간 사람과 같다. 중음신이 업보를 벗고 타처에 가서 날 때에 귀신 가운데에서 곧 없어질 때에 귀신 가운데에서는 죽은 곳이 되고, 옮겨 가는 곳은 나는 곳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로써 앉아 보면 나는 것이 꿈이고, 나는 자로 앉아 보면 죽는 것이 꿈이니 삼계육도三界六途가 모두 다 몽환夢幻이다.”
묻기를,
“중음신의 형체가 없으니 어찌하면 볼 수 있습니까?”
답하기를,
“중음신과 귀신이 다르니 죽은 뒤 49일 전에는 중음신으로 있고, 49일 뒤에는 귀신의 과보를 받아 인간 사람과 같이 남녀男女가 배필配匹을 정하여 자식 낳고 사는 것도 있고, 거리거리 중천에 떠돌아다니는 것도 있으니, 그들의 형용과 모양을 모두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귀신의 편으로 앉아서 보면 자기들의 형용이 분명하지만, 흡사 바람과 같아서 있기는 분명하지만 형상이 없기 때문에 볼 수 없다.
사람은 양계陽界이고, 귀신은 음계陰界이어서 음양陰陽이 서로 상적相敵하지 못할 때 보지 못하는데, 비유하자면 태양이 비추는 곳에는 어두운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현세에는 공증이라고 하며, 명두明斗라고 하며 태주太主라고도 하는데, 지방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그것을 접한 여자나 남자나 점을 할 때에 ‘휘-잇’ 하면서 말소리가 분명하지만,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다. 이 모든 귀신을 부리는 술법이나 혹 양기가 허하여 보는 것도 있으며, 성인이 대정大定에 들어가면 일체 귀신을 사람 보는 것과 같이 역력히 분명하다.”
“중음신이 육도에 갈 때에 어떻게 가는가요?”
답하기를,
“중음신이 각기 업을 따라가는데, 업력業力으로 천당天堂으로 갈 자는 머리가 문득 위로 향하여 날아 올라가고, 축생(傍生)으로 가서 태어날 자는 중음신이 우마축생牛馬畜生과 같이 옆으로 누워서 가며, 지옥으로 가는 자는 중음신의 머리가 거꾸러져서 아래로 향하여 간다. 무슨 중음신이든지 다 신통이 있어서 허공으로부터 마음대로 날아서 순식간에 천리만리를 가는 것이다.”
제15. 일체 유정동물은 반드시 식이 있는 것을 변명함(動物必有含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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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30_b_01L묻기를.
“일체 유정동물이 다 식識이 있다고 하지만 그 형체를 볼 수 없으니 어느 것이 식의 형체가 되는가요?”
답하기를,
“비유하자면 바람은 형체가 없어서 볼 수가 없지만, 나무를 만나면 흔들흔들하는데, 이것을 보면 바람의 모양은 없지만 확실히 바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과 같아서 식체識體는 볼 수는 없지만, 경계를 따라서 아는 것이다. 미운 곳에는 미워하고 사랑할 곳에는 사랑하는 것이 식이라 할 것이며, 몸이 물건에 닿으면 아는 것(識)이 나타나고, 눈이 물건을 대하면 아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니, 바람의 비유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식이 보고 들을 수 있지만 그 식을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이다. 눈이나 귀나 정신을 물론하고 해부하여 보아도 식의 형체는 결정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제16. 인과를 변명함(因果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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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31_a_01L객이 묻기를,
“대각성인이 인과因果를 말씀하셨으나, 금생에 인因을 지으면 내생에는 과果를 받는다는 말은 알 수 없습니다.”
용성이 대답하기를,
“그대는 어찌 인과를 이상하게 아는가? 천지 만물과 사계절의 차례(四時節序)와 인생의 날마다 쓰는 움직임과 고요함(日用動靜)이 모두 인과를 초월한 자가 하나도 없다. 봄으로 인하여 여름이 되는 결과結果가 있고, 여름으로 인하여 가을이 되는 결과가 있으며, 가을로 인하여 겨울이 되는 결과가 있고, 겨울로 인하여 봄이 되는 결과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앉으면 설 것이고, 섰으면 누울 것이며, 누우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그것이 다 인과이다. 내가 착하게(善) 하면 남이 착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미워하면 남이 미워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밭에다가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대가 세상에서 귀신에 붙들린 사람을 보았는가? 어떠한 사람이 묘한 술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혹 천신이나 건달바신乾闥婆神을 지극히 위하다가 그 신들이 감응感應함을 얻은 사람은 눈과 얼굴이 변하여 그 전과 조금 달라지고 성미性味도 달라져서 청정히 하기를 좋아하며, 항상 좋은 향香을 피우기 좋아하고, 음식飮食과 거처居處와 모든 것을 청정히 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천신天神이 붙은 곳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무지 형적이 없을 것이며, 온몸과 수족까지 해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아도 천신이 붙은 곳이 없을 것이다.
선심을 닦은 자도 이와 같아서, 자연히 심기心氣가 화평하며, 얼굴에 악한 기운이 없고 덕기德氣가 있어서 모든 사람이 다 보기를 좋아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그 사람에게 착한 형적이 붙은 곳이 없으나 현세現世에도 이와 같이 좋은 것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형체가 없는 심식心識이 자신의 선심을 닦은 것으로 인하여 복덕종자를 마음 밭(心田)에 심은 것이니, 이 사람은 후세에 가서 좋은 과보果報를 자연히 얻을 것이라는 것을 지혜가 있는 사람은 다 증명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동산에 계수나무(桂木)나 전단향나무가 많이 서 있고 그대와 나와 이곳에 있는데, 맑은 바람이 저 향기로운 수풀(香林)을 지나오면 기이한 향취가 우리의 코를 찌르니(觸鼻) 저 형체 없는 바람이 형체 없는 향냄새를 가지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와 같아서 형체 없는 식識이 형체 없는 선업을 가져서 후세로 옮겨 가서 무한한 복락福樂을 받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이 도깨비(魍魎)를 부리는 술법術法을 성취하기 위하여 지극하게 주문呪文을 외우다가 그 주술呪術을 성취한 자는 얼굴이 노랗고 몸에 노린내가 나며, 또 부다나富多那라는 악한 귀신이 붙으면 부패하고 부정한 물건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의 몸을 해부하여 보아도 형적을 보지 못하며, 또 악형惡刑 구실을 다니는 사람은 그 구실을 다니기 전에는 얼굴에 악기가 없다가 점점 그 사람의 마음이 악해짐에 따라 눈자위가 변하고 살기殺氣가 있어서 덕은 추호도 없고, 악기가 가득하여 사람마다 보고자 아니하니, 그 악업이 형적이 없지만 나타남이 분명하다.
사람의 심식은 형적이 없지만, 그 악업을 도장 찍어(印) 아뢰야식에 간직하여 두었다가 후세로 옮겨 가는 것이 비유하자면, 그대와 내가 이곳에 있는데, 앞동산에 묻은 부정한 물건이나 혹 썩은 송장이 있어서 마침 바람이 그곳으로부터 불어와서 이곳에 악취가 코를 찌르는 것과 같다. 바람은 형체가 없는 식에다가 비유하고, 악취는 악업에다가 비유한 것이다. 일생에 지은 악업이 형적은 없지만, 형체 없는 식이 형체 없는 악업惡業을 가지고 후세에 옮기어 악도에 몸을 받아 태어나(受生) 고苦를 받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제17. 정情과 상想 두 가지 경중으로 삼계에 승강함을 변명함(三界升降在於情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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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32_a_01L객이 묻기를,
“삼계에 몸을 받아 나는(受生) 것은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사람마다 마음에 정情과 상想 두 가지가 무겁고 가벼움으로 말미암아 선도악도善道惡途가 달라지는 것이다. 본래 정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욕심과 음심에 관계가 많을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우리의 마음이 본래 청탁이 없지만, 그 지은 바를 따라서 청탁이 있게 된 것이다.
대개 향취가 있고 맛이 좋은 것은 사람에게 유익하고, 냄새가 악하고 맛이 독한 것은 사람을 중독시키는 것이다. 혹 어떤 물건은 먹으면 정신을 상쾌하게 하고, 어떤 물건은 먹으면 정신을 둔탁하게 한다.
우리의 청정한 마음은 구속이 없다고 하지만, 술을 먹으면 취하고 비상砒霜을 먹으면 죽으며, 선약仙藥을 먹으면 오래 산다. 그러하므로 대각께서 술과 오신채五辛菜를 금지禁止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술을 많이 먹으면 정신이 혼탁渾濁해지는데, 그 뜻이 둔탁하여 점점 무거워지는 것이고, 오신채를 많이 먹으면 심경心經에 상화相火를 많이 돕는 것이니, 진심嗔心을 돕는 것이다. 익혀서 많이 먹으면 음심淫心을 돕는 것이니 음욕, 성냄, 어리석음(淫怒痴) 등이 수승해짐을 따라 마음이 무겁고 중탁重濁하여지므로 삼악도로 가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비유하자면 맑은 물을 한 그릇 떠다 놓고, 그 물에다가 흙을 풀어서 세게 저으면 그 물이 혼탁해지는데, 그 탁한 것은 정情에 비유하고, 그 맑은 것은 상想에 비유한 것이다. 그 그릇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두면, 탁한 것은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맑은 물은 점점 위로 뜨는데, 맑은 것이 많으면 인간으로부터 천상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受生) 것이고, 탁한 것이 많으면 인간으로부터 삼악도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또 비유하자면 새 발에다가 실을 매어 둔 것과 같이, 새는 상想에 비유하고 실은 정情에 비유한 것이다. 실이 기다라면 새가 날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인데, 삼악도로 가는 비유이고, 실이 없고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천상으로 가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제18. 사람이 현재(現今)의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받는 것을 변명함(捨身受身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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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33_a_01L객이 묻기를,
“사람이 육신肉身을 버리고 내생來生에 몸을 받고자 할 때에 그 형용은 어떠합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사람이 죽을 때에 사대로 조직된 이 육체가 움직여서 운전하는 바람 기운과 따뜻한 불기운은 위로 떠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차고 찬 몸뚱이만 남아 있어서 썩어서 물이 되고 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때는 싱그러운 신식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신식神識은 비록 형체가 없지만, 청정하고 오묘한 색근(淨妙色根)이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범부가 대단히 알기 어렵다. 모든 귀신이 다 청정하고 오묘한 색근을 의지하여 보고 듣고 아는 것이다.
비유로 말할 것이다. 그대가 필시 꿈을 꾸어 보았을 것이다. 몽중夢中에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見聞覺知)과 말하고 움직임(言語動作)과 일체가 생시와 어떠하던가?”
객이 대답하기를,
“생시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것이 청정하고 오묘한 색근을 빌려서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대각께서는 이것 보기를 현재에 우리가 사람 보는 것과 같이 한다. 이 신식 자체가 바람과 같아서 분명히 있지만 형체는 없는 것이니, 산하석벽山下石壁이 걸림 없어서 순식간에 천리만리를 가는 것이다. 새로운 몸을 받기 전에는 이 신식이 법계의 바탕(法界體)에 머물러 오직 생각하는 힘만 있다. 이 신식이 인연因緣을 따라 몸을 받아 태어나는(受生) 것이니, 십만까지라도 몸을 받아 태어날 인연이 있으면 순식간에 당도하는 것이다.
대개 아는 것을 식識이라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종자種子가 있으므로 싹이 날 수 있는 것과 같아서, 식이 있으므로 육체를 나게 하는 것이다. 지혜로부터 식이 나기 때문에 이름을 생각이라고 한다. 신식 자체가 뚜렷이 서 있으므로 자타自他의 구별이 있게 되었다. 괴로움(苦)과 즐거움(樂)과 선善과 악惡의 모든 경계를 알기 때문에 식이라고 한다.
종자로부터 움이 터서 큰 나무를 성취하는 것과 같이, 식識으로부터 사람의 몸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신식이 이 몸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것이 사람이 거울 가운데에서 얼굴이 나타나 있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 강물 가운데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신식과 부모와 인연이 합한 것은 거울에 비유하고, 신식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것은 강물에서 다시 얼굴을 나타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아뢰야식이 온갖 변화가 있기 때문에 만물이 발생하지만 세상 사람은 식으로 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인도나라에 지적초知跡草라는 풀이 있는데, 꽃이 피면 크고 아름다우며 맛이 최상 가는 것인데,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 꽃을 꺾으려고 가면 그 꽃이 발자국 소리를 알아듣고 곧 움츠러드는 것이니 식이 포함된 것이 아닌가?
또 나무가 있는데, 혹 새(鳥)나 거미(蛛)가 그 나뭇잎에 앉으면, 곧 나뭇잎이 갑자기 오므라져서 그 물건을 흡수吸受하여 먹으니, 비록 무정한 물건일지라도 아뢰야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대체로 신식은 분명히 있으나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여자가 아이를 잉태함에 자기 배 가운데에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이가 배 속에서 굼실굼실 노는 것은 알 수 있다. 신식은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다. 비유하자면 태양광명이 우주에 찬란함에 송장이나 더러운 똥에 비추어도 태양광명은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한 유리琉璃에 비추지만 태양광명은 더 깨끗한 것이 없는 것이다.
식이 인상印像을 잘 받아서 자체 안에다가 하나도 유실함이 없이 잘 간직하여 두었다가 인연을 만나면 모두 나오는 것이다. 종자種子를 밭(田)에 묻어 그 종자의 업성業性을 따라 형상形相이 나오는데, 맵고 쓰고 단 것이 다른 것과 같이, 선업을 지은 자는 얼굴이 단정하고 모든 복이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악업을 지은 자는 얼굴이 법도法度를 잃어서 혹 단정치 못하거나, 혹 자비덕상慈悲德相이 없어서 아름답지 못하여 복이 자연히 없는 것이다. 신식이 몸을 버리고 갈 때에 눈구멍이나, 귓구멍이나, 콧구멍이나, 입구멍이나, 털구멍이나 무슨 구멍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나가는 곳이 없이 나가는 것이며, 들어갈 때에도 모든 구멍으로 찾아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몽중에 마치 물건을 보며 인축人畜의 소리가 역력히 들리며 천리만리를 다니며 놀더니, 잠을 깨어 놓고 보니 하나도 없으며, 식이 옮겨 갈 때에도 몽중에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대는 식을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아뢰야식의 자체가 광대하고 큰 것이 진성眞性과 비등하며, 허공 전체와 같아서 들어가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맑고도 항상 유동력流動力이 강하며, 모든 만물의 종자를 머금고 있으며, 모든 선악업을 받아서 도장을 찍어(印) 두고 천진 화학적 작용이 구족하므로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형형색색으로 업을 따라 나는 것이다. 이것이 천진본연성의 묘용이며, 아뢰야식의 천진 화학적 작용이니, 그대는 자세히 깨쳐야 할 것이다.
그대는 계란鷄卵을 보는가? 그것은 둥글둥글하여 눈도 귀도 없으며, 두루뭉수리하여서 아무런 지각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당히 산 물건이니 이 계란 전체가 아뢰야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어서 만일 아뢰야식과 분리되면 곧 썩고 마는 것이다. 이 계란을 따뜻한 곳에 두면, ‘꼬끼오!’ 하고 우는 산(生) 물건이 그 가운데에서 나온다.
소나무 씨가 비록 작으나 낙락장송이 그 가운데서 나오고, 고기 알이 비록 작으나 장강대해長江大海를 툭툭 쳐서 파도를 일게 하는 큰 고기가 나오며, 매의 알(鷹卵)이 비록 작지만 창공蒼空을 능멸히 하는 송골매가 나오니, 알卵로 있을 때에 보면 무정지물과 같으나, 당당히 산(生) 물건이 아닌가?
참외(眞苽)나 가지(茄子) 등 물건이 비록 무정한 물건이나 부인이 그 밭 가운데 들어서 오줌을 누면 딱딱 벌어지니, 어찌 단순히 무정지물이라고만 볼 것인가? 만물이 서로 상생상극相生相克이 있으니, 무엇이 있어서 상생상극하는가? 다 아뢰야식의 작용이다. 그러하므로 천지 만물이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고, 오직 아뢰야식이 지은 것이다.
인도국에 향초가 있는데, 이름이 첨바라화瞻婆羅華라 하니 그 꽃과 흑임자黑荏子를 한데 혼합하여 잘 쪄서 익힌 뒤에 기름을 짜면 향취가 아름답다. 이것이 옮겨 가는 것이 없이 곧 옮겨 가는 것이니 식이 옮겨 가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객이 묻기를,
“생시에는 육안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지만, 사후死後에는 눈과 귀와 코가 없는데 볼 이치가 만무합니다.”
용성이 대답하기를,
“눈먼 장님(盲人)은 어찌 보는가?”
객이 대답하기를,
“장님이 본다는 것은 참 거짓말입니다.”
용성이 대답하기를,
“그대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漆夜) 삼경三更에 무엇을 보는가?”
대답하기를,
“오직 어두운 것만 봅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 어두운 것을 보는 것은 장님과 같은 것이니, 그것이 곧 보는 것이다. 장님이 밤에 꿈을 꾸는데 몽중에 일월日月이 명랑明朗하고, 만물이 분명한 것을 보니 그것이 육안으로 보는 것인가? 그 보는 것은 밝은 마음이 보는 것이다. 사람이 비록 몸은 죽을지라도 밝은 마음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신식을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신식은 저장貯藏하여 둔 곳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갖가지 형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종자를 따라서 움이 나오는 것이니, 만일 종자가 썩어지면 움이 나지 못하는 것이다. 종자를 따라 움이 나서 큰 나무가 된 것이고, 또다시 나무 끝에 꽃이 피고 과실이 맺혀 종자가 익었지만, 그 나무 전체를 해부하여 보아도 그 종자는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다. 이와 같아서 신식으로부터 사람의 육체가 되었지만, 육체를 해부하여 식을 찾아보아도 식이 있는 곳이 없고, 또 식을 여의고는 이 몸도 없다.
또 비유하자면 저 과실이 나무로부터 익기(熟也)를 마치는데, 과실 가운데에 씨가 있으니 과실과 종자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그러하여 목숨을 마칠 때에 신체 가운데로 식만 또렷이 나서서 떠나는데 형체를 볼 수 없으니, 부모처자권속과 금은옥백金銀玉帛을 다 버리고 오직 식만 홀로 가는 것이다.
이 식은 형체는 없으나 자기는 몸이 분명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식이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화합하고, 음욕淫慾에 연애戀愛로써 서로 얽힌 것이며, 생각으로써 서로 집착한 것이고, 착한(善) 인연으로써 반연하여 화합하기도 하며, 악惡한 인연으로써 반연하여 화합하기도 하며, 지혜훈습智慧薰習한 것으로써 업연業緣을 따라 몸을 받아 태어나는데, 아버지가 될 사람의 식과 어머니가 될 사람의 식과 육체가 서로 교접할 때에 자식이 될 자의 신식이 만 리 밖에 있더라도 일순간一瞬間에 당도하여 인연이 화합된 뒤에서 잉태가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명경을 가져다가 사람의 얼굴에다가 대하는데, 얼굴이 없더라도 나타나지 못할 것이며, 명경이 없더라도 나타나지 못할 것이니 명경과 얼굴과 두 가지 인연이 화합한 뒤에야 얼굴이 나타나되 가는 털끝만큼(毫髮)도 틀림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신식이 이 몸을 버리고 저 몸을 받는데, 혹 복도 받고 죄도 받지만, 마치 꿀벌이 맛에 취하여 꽃 위에 앉아서 맛을 탐착하다가 그 꽃을 버리고 다른 꽃으로 옮겨 가되, 혹 나쁜 꽃을 버리고 좋은 꽃으로 옮겨 가기도 하며, 혹 좋은 꽃을 버리고 나쁜 꽃으로 옮겨 가기도 하는데, 이와 같아서천당지옥이 다 자기의 신식身識으로 지은 것이지 누가 명령을 해서(命令的) 지은 것은 아니다.”
각해일륜覺海日輪 제2권
제19. 고와 낙이 오직 마음으로 된 것(苦樂唯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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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36_b_01L객이 묻기를,
“일체 고苦와 낙樂을 식識이 짓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믿지 않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소견이 적으면 의심이 많다고 하더니 그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비유로 말할 것이다. 설산雪山에 비니초毘尼草를 먹은 소의 젖을 가져다가 여러 가지 적당한 약을 화합하여 환약을 지으면 그 젖이 좋은 약의 효능을 가져서 사람의 몸을 윤택하게 하는데, 선을 닦은 업이 식識을 잘 도와주어 내생에 좋은 과보果報를 받게 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젖은 몸에 비유하고, 여러 가지 좋은 약으로 화합한 것은 모든 선업을 닦는 데 비유하며, 그 약을 먹으면 몸이 윤택한 것은 식이 선업에 훈습熏習을 받아 복과福果를 얻는 데 비유한다. 또 그 비니초를 먹은 소젖에 약을 화합하여 먹는 법을 모르고 적당치 못한 약을 화합하여 먹으면 도리어 해를 보는 것이다. 약이 비록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없고 모든 지각知覺도 없지만 사람의 몸을 도와주기도 하고 도리어 손해를 입히기도 하는데, 업의 선악으로 선도와 악도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受生) 것도 다 이와 같은 것이다.
대체로 우리의 아는 것(識)이 업력業力을 따라 변하는 것이 불가사의不可思議이다. 아는 것은 눈과 귀와 코와 입도 없지만, 꿈 가운데에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아 깨달아 알며, 중음신中陰身까지라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아 깨달아 아는 것이 분명하다. 십선十善을 닦는 자는 욕계육천欲界六天에 몸을 받아 태어나고(受生), 사선팔정四禪八定을 닦는 자는 색계십팔천色界十八天에 몸을 받아 태어나며, 사공정四空定을 닦는 자는 사공천四空天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데, 아는 것(識)이 짓는 업을 따라 윤회하는 것이 분명하다.”
객이 묻기를,
“대각大覺의 진리가 선을 지어 천당에 가자는 목적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일체 유정동물一切有情動物의 아는 것(識)이 다 업력에 부림을 당하여 경계境界를 따라서 천당天堂, 지옥地獄에 정처 없이 윤회하지만, 대각의 진리를 깨친 자는 망령되이 아는 식정識情이 단박에 비고, 참으로 밝은 성품이 청정하여 탕탕무위蕩蕩無爲하는데, 어찌 천당 가기를 즐겨 하겠는가? 천당의 즐거움(樂)이 좋다 하여도 필경에는 타락하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아는 것(識)이 천당에 가는 모양은 어떠한가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흐린 물이 가라앉으면 맑은 것은 위로 올라와 뜨는 것과 같이, 혼탁한 정욕이 가라앉으면 맑은 생각이 위로 떠서 천당에 갈 때에 자기의 아는 것이 산 사람과 같이 신육수족身肉手足이 완전함을 보는 것이 마치 꿈 가운데 사람과 같은 것이다.
아는 것(識)의 보는 것이 천궁天宮에 한량없이 좋은 장엄을 보고 천당에 몸을 받아 태어나니(受生), 이 아는 것은 자기의 법계法界에 의탁하여 미묘하게 보는 것이고, 육안肉眼을 의탁하여 보는 것이 아니다. 이 아는 것이 미묘微妙하게 보는 것은 천궁에 즐거움을 보고 순식간에 저곳에 왕생往生하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아는 것은 형상이 없는데 어찌 삼계제취三界諸趣에 큰 몸과 작은 몸을 받습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바람이 형체가 없지만, 혹 산악山岳을 요동시키며 대해에 파도를 일으키니, 아는 것이 형상이 없지만 그 힘이 맹렬한 것도 이와 같다. 모기(蚊螟)의 몸을 받으면 제가 받는 것만큼 작용하여 쓰고, 큰 사자의 몸을 받으면 그만큼 작용하여 쓰는 것이니 참으로 미묘하다. 이 아는 것이 크다고 하면 한이 없이 크고, 작다고 하면 미진微塵 속에도 차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밝은 등불이 저 집의 작고 큰 것을 따라 광명이 가득해지는 것과 같이, 아는 것도 모든 업력을 따라 형형색색이 같지 아니하여, 크고 작은 몸을 운전하여 가게 되는 것이 이와 같다.
우리의 아는 것이 다 짓고 받는 것이고, 상재上宰나 모든 귀신이 주고받는 것이 아닌 것이다. 비유하자면 넓은 벌판에서 목마른 사람이 단물을 만나는 것도 누가 주는 것이 아니고, 물을 만나지 못하는 것도 누가 막는 것이 아니다. 각각 업력業力을 따라 고와 낙을 받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만물의 모든 종자가 땅을 인하여 움이 트지만 물로써 윤택하며, 태양의 더운 기운을 말미암아 점점 익는데 그 빛이 점점 달라지는 것과 같이, 우리의 몸이 복업福業 지음을 말미암아 자연히 재산이 풍부하고, 금은백옥이 창고에 가득하여 모든 복락을 받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대가 세상 사람을 보라. 날이 밝도록 밤이 새도록 천하의 민중民衆들이 부귀를 꿈꾸어 돈과 재물(錢財)을 구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는데 그 원인이 아마도 반드시(想必) 있을 것이다. 아무리 지혜가 있고 똑똑하여 잘난 사람도 돈과 재물 앞에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또 그대가 보아라. 세상에 어떤 사람은 한번 남과 같이 살아 보기를 결심하고, 남에게 고용을 당해 겨우 살게 됨에도 곧 죽어 버리는 자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험악한 음식을 먹다가 좋은 음식이 생기면 복통이 나서 그 음식을 먹지 못하니, 속담에 ‘복이 없는 자는 계란도 유골有骨이라’고 하는 말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객이 묻기를,
“그러면 복만 있으면 놀고먹어도 무방한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 그렇게 미련한 말을 하는가? 금년 농사를 지어 놓고 파먹기만 하고 다시 농사를 짓지 아니하면, 내년부터는 한 낱의 곡식도 먹을 것이 없을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닌가?”
객이 묻기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복이 되는 것입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복을 짓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부모에게 효순하고 사장에게 경순하며, 형제와 우애하여 가족과 화합하며, 거처를 정결히 하여 힘의 대소를 따라 항상 공익을 행하고 사욕을 멀리하며, 대각의 진리를 천하의 대중에게 선전하여 미신을 타파하고 정도로 행하게 하며,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거든 내가 잘되는 것과 같이 즐거워하며, 대각성전에 대각께 공양을 올리거든(聖供) 천하대중과 일체 유정동물이 다 삼계고해를 해탈하고, 낱낱이 대각성인이 되기를 원할 것이며, 가난과 질병(貧病)을 구제하여 줄 것이니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닦으면 복이 되는 것이다.”
객이 말하기를,
“선을 쌓은 집은 반드시 자손에게 경사가 오는 것이고, 악을 쌓은 집은 반드시 자손에게 재앙이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로 본다면, 사람의 집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선령先靈의 음덕이 자손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보라. 고수瞽瞍는 완전한 필부이어서 선을 지은 것이 없으니 반드시 자손에게 재앙과 불행(殃禍)이 있을 것인데도 어찌 순舜임금과 같은 성자聖子를 낳았으며, 요堯임금은 성인이어서 반드시 자손에게 경사가 있을 것인데도 어찌 불초자 단주丹朱를 낳았으며, 또 순임금은 반드시 자손에게 경사가 있을 것인데도 어찌 불초자 상균商均을 낳았으며, 공자孔子는 성인이어서 항상 경사만 있을 것인데도 어찌 진陳나라, 채蔡나라 사이에서 칠일의 난을 만나 굶주린 고통을 당하였겠는가?18) 이와 같은 일을 천하고금에 미루어 보면 동적강銅赤江(한강) 모래 수효와 같아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객이 묻기를,
“선근을 닦은 자가 잘된다는 말도 믿을 수 없고, 악을 지은 자가 잘못된다는 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어찌 그런 것인가요? 과거는 물론하고 현재에 내가 보는 것에 악한 사람은 당연히 망할 것인데 점점 흥왕하고, 착한 사람은 잘될 것인데도 점점 망하여 가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인과라는 말을 살피지 못하는구나. 인因이라는 말은 시초를 말한 것이고, 과果라는 것은 마침을 말한 것이다. 인이라는 것은 봄에 농사를 짓는 것과 같고, 과라는 것은 가을에 곡식을 거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횡설수설橫說竪說하는 것이 마치 봄에 추수하는 것과 같다. 봄부터 칠팔 개월을 노력하여야 추수하는 것과 같이 전생에 지은 인因으로 금생에 결과를 얻는 것이다. 혹 금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보를 받는 자도 있고, 혹 삼생 후에 받는 자도 있으며, 인을 지을 때에 곧 과果 받는 자도 있으니, 업을 짓고 복 받는 차별이 천차만별이어서 어찌 한가지로 결정하여 말할 것인가?
혹 초반에 선심을 닦다가 중반에 악을 짓는 자도 있으며, 혹 중반에 선을 닦다가 후반에 악을 짓는 자도 있으며, 혹 초반에 악을 짓다가 후반에 선을 닦는 자도 있으며, 혹 순전히 선업을 닦는 자도 있으며, 혹 선이 수승(勝)하고 악이 하열(劣)한 자도 있으며, 혹 악이 수승하고 선이 하열한 자도 있으며, 혹 선과 악을 서로 반반(相半) 정도 짓는 자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因 지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 과보를 받는 것도 일정하지 못한 것이다.
요순의 아들이 어질지 못한 것과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란을 받는 것과, 안연顏淵이 요절(夭死)한 것과 자건子騫이 악모惡母를 만나는 것이 다 전생에 지은 업연業緣으로 된 것이니,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고, 선령先靈에서 지은 음덕을 자손에게 전통적傳統的으로 받는 것이 아닌 것이다.”
객이 묻기를,
“그대의 말이 옳은 듯하지만, 고시대古時代에 어떤 사람이 역률逆律을 범하면 삼족이 멸하고, 어떤 사람이 국가에 대공을 이루면 자손에게 경사가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덕을 쌓은 집안(積善之家)에는 반드시 남은 복이 있고(必有餘慶), 악한 것을 쌓은 집안(積惡之家)에는 반드시 남은 재앙이 있다(必有餘殃)는 것이 아닌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동업同業과 별업別業의 차별을 그대는 어찌 알지 못하는가? 국가와 백성의 업이 같기 때문에 한 국토에 나고, 부모와 자녀가 업이 같기 때문에 한집에 동거하는 것이다.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와 자라, 곤충 등의 중생(乃至禽獸漁鱉昆蟲之物)까지라도 각각 저들의 부속部屬이 있어 구별이 다르다. 그러하므로 국가에 난難이 있으면 백성이 도탄에 빠져들고 국가를 잘 다스리면 백성이 편안하며, 부모가 경사가 있으면 자손이 환희하고 부모가 병이 있으면 자손이 근심하는데, 이것은 다 숙세宿世의 업연과 동업同業으로 된 것이다.
또 별업別業이라 하는 것은 혹 한 나라가 소란한데 일방一方은 편안하며, 혹 한곳에서 몹쓸 재앙을 당하였는데 다른 곳은 무사하며, 혹 열 사람이 사지에 들어갔는데 한두 사람이 살아오기도 하니 이것이 다 동업 가운데 별업인 것이다. 또 한 가족 가운데도 형은 부귀하고 동생은 빈천하며, 또 노비권속과 우마육축이 한집에서 거주해도 귀천이 각각 다른 것이다. 이것이 다 동업 가운데 별업이거늘 세상 사람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부귀를 받으면 아만심이 높아 일체 사람을 경멸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 복이 다하면, 다시 빈천의 과보를 받을 것을 어찌 알겠는가?”
객이 묻기를,
“이것이 다 우리의 아는 것(識)으로 지은 것이라 하니, 그 모습을 잘 그려 내어 보여 주시오.”
용성이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과실 종자를 땅에 던져두면 과실이 나무 끝에서 맺지만, 그 과실나무 속으로부터 가지로 나오고, 가지 속으로부터 가지 끝으로 나와서 달린 것이 아니다. 나무를 분석하여 보아도 그 종자를 보지 못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그 종자를 가져다가 나무 끝에 둔 것도 아니며, 나무뿌리가 왕성하여 견고하나 그 뿌리에서 종자를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아서 몸은 선악업이 다 몸을 의지하여 있는데, 저 몸을 해부하여 찾아보아도 업은 선악이 갖추어 있지만 저 업이 흔적이 없으며, 또 한 점 익어 가는 상이 없는 것이다.
또 비유하자면 사람의 그림자는 형체가 있고 질애質礙19)가 없어서 붙잡을 수가 없으며 얽어맬 수 없지만 사람의 동작을 따라 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몸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업도 그러하여, 몸과 업이 있지만 저 업을 보지 못하며, 얽어맬 수 없으나 몸을 여의지는 못하는 것이다. 또 비유하자면 좋은 선악이 사람의 몸을 도와 일체 병고를 제거하고 기력이 강건하며, 몸이 윤택하며 낯빛이 빛나고 윤택(光潤)하지만 그 약의 효능은 형상이 없어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업도 그러하여 형상이 없지만 사람의 몸을 도와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선업이 도와주는 것은 의복, 음식과 모든 재산이 풍족하며 수족手足이 단정하고 용모가 수승殊勝하며, 궁전과 누각이 화려하고, 금은칠보가 가득하여 안녕과 쾌락을 받는 것이고, 악업이 응하는 것은 지옥과 아귀와 축생에 몸을 받아 태어나며(受生), 비록 인간계에 사람이 될지라도 빈궁하고 하천하며, 제근諸根이 구족하지 못하여 모든 고통 받는 형상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또 비유하자면 밝은 거울이 사람 얼굴의 곱고 추함을 비추어 주지만 거울 가운데 나타나는 얼굴의 바탕이 없어서 붙잡을 수 없으니, 아는 식정識情도 그러하여 선악에 훈습熏習함을 받아 선도 악도 나타나지만, 그 업식業識을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한 점 밝게 아는 것(識)이 큰 몸과 작은 몸을 가져 운전하는데, 그 이치가 어떠한 것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아는 것은 대소를 정할 수 없는 것이니, 큰 몸을 가지면 크게 작용作用하고, 작은 몸을 가지면 작게 작용하는 것이다. 곤충이 아는 것은 적은 듯하지만, 작은 몸을 버리고 태산과 같은 몸을 받으면 그 작용이 광대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사냥하는 사람이 화살에 독한 약을 발라 큰 코끼리를 쏘는데 그 화살의 독기가 혈관血貫을 따라 전신에 흘러 들어가서(流注) 코끼리를 살해한다. 코끼리와 화살의 독약을 서로 비교하면, 대소가 천양지간天壤之間이다. 그러나 그 코끼리가 죽은 뒤에는 독기가 옮아가는 것과 같아서 우리의 아는 것이 몸을 버리고 다시 큰 몸을 받으며, 금생에 보고 듣는 모든 경계를 버리고, 업력을 따라 옮아가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또다시 비유하자면 난타용왕難陀龍王과 오파난타용왕烏波難陀龍王이 있는데, 그 용의 몸 길이가 수미산須彌山을 세 번 둘러서(三匝) 감을 만큼 길며, 그 용이 한번 크게 숨을 쉬면, 수미산이 진동하고 대해의 바닷물이 변하여 독기를 이룬다. 이 용왕의 몸이 장대長大하고 기력이 웅장雄莊하지만, 그 아는 것(識)은 조그마한 모기 깔다귀의 아는 것과 추호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 용왕이 그와 같이 굉장하지만 독한 미균微囷이 용왕의 입으로 들어가면 용이 곧 죽는 것이다.
이 적은 미균의 독기가 저 용왕을 죽일 수도 있다. 우리의 아는 것이 비록 적은 듯하지만, 가령 지구地球 별만 한 몸을 받으면 그 몸을 마음대로 운전하여 굉장히 작용하며, 모기만 한 몸을 받으면 그만큼 운전하는 것이다.
또 비유하자면 소나무 종자가 비록 작으나 아름드리 큰 나무(連抱之木)가 그 씨앗으로부터 나오니 그 종자를 나무에 비교한다면 대소가 현격하게 다르지만(懸殊), 그러나 그 종자 가운데 소나무를 찾아보아도 없는 것이며, 또 종자를 여의면 소나무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아서 한 점 밝은 식識이 큰 몸을 낼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객이 묻기를,
“아는 식이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는데, 어찌 속히 썩어지는 몸 안에 머물러 있나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비유하자면 빈궁한 사람이 여의주如意珠를 얻었는데, 보배의 힘으로 금은전보를 얻어 궁전이 화려하고 꽃과 열매가 무성하여 온갖 복락을 받다가, 그 사람이 여의주如意珠를 유실遺失함에 부귀가 다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아는 식도 다 이와 같아서 파괴할 수 없이 견고하지만, 그 아는 것에서 생겨 나온 몸은 속히 없어지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지극히 부드럽고 오묘한 아는 식이 어찌 탁하고 굳은 색신色身 가운데 뚜렷이 들어갑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물(水)의 본체本體가 지극히 부드럽지만 빠르게 흐르는 물이 흙과 바위(土石)를 뚫고 내려간다. 우리의 아는 것(識)도 이와 같아서 지극히 부드럽고 오묘하여 견고하고 강한 사대四大를 뚫고 들어가 업보業報를 받다가 문득 버리고 가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중생이 목숨을 마칠 때 천당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 좋을까요, 대각성인의 나라에 나는 것이 좋을까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천당이 아무리 좋다 하여도 삼계를 면치 못하는 것이니, 복이 다하면 필경에 타락하는 것이다. 대각성인의 법을 닦는 자는 상근기는 바로 도를 깨쳐서 가고 올 것이 없으니 원각이 널리 비추며, 적멸이 둘이 없어서 저 가운데에는 천당만 아니라 일체 모든 대각성인의 국토가 허공에 꽃이 어지러이 일어나고 어지러이 멸하는 것과 같아서, 서로 상즉(卽)한 것도 아니고, 여읜 것도 아니니 일체 유정동물이 다 본래 깨친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 것인가? 원각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세계와 허공을 삼키어서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무거무래無去無來하여 삼계고해三界苦海를 여의어서 해탈하는 것이다. 혹 하근기의 중생이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옴마니반메훔’)이나 무량수각無量壽覺(‘아미타불’)을 일심으로 생각하여 항상 지송하면,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뒤바뀌지(顚倒) 않고 곧 대각성인의 화신국토에 왕생하는데, 동적강銅赤江(한강) 모래 수와 같은 천당의 즐거움을 받을지라도 대각성인의 국토의 하품下品만 못할 뿐 아니라, 천당의 즐거움은 복이 다하면 곧 타락하여 다시 고통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지옥에 가는 모양은 어떠합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지옥에 가는 중생은 업력이 무거우므로 목숨을 마칠 때에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죽는 것이구나. 부모 친척과 사랑하는 벗과 영원히 이별하니 나의 근심을 어찌하리오?’라고 한다. 그 업력을 나타내는 것이 다른 것을 한가지로 말할 수 없다.
무릇 지옥에 들어가는 자는 발은 위로 향하고 머리는 아래로 꺼꾸러지는 것이니, 그 아는 것(識)이 한곳을 보니 순전히 피(血)바다가 있는 곳이다. 아는 것이 업력으로써 피를 마시고자 하여 급히 따라가서 피에 맛을 들여 애착하기 때문에 곧 지옥에 나는 것이니, 부패한 썩은 물에 더러운 인력因力으로써 아는 것이 그 가운데에 의탁依托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무슨 물건이든지 썩어서 더럽고 냄새가 나는 곳에 벌레가 생겨나는 것과 같아서, 아는 것이 더러운 피바다로 인하여 지옥에 들어가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객이 묻기를,
“지옥 중생은 그 모양과 빛이 어떠합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피를 애착하여 지옥에 나는 중생은 몸이 핏빛과 같고, 화탕지옥火湯地獄에 나는 중생은 몸이 검은 구름 빛과 같으며, 유탕하乳湯河지옥에 나는 중생은 몸이 잡색으로 아롱아롱한 빛깔을 지녔으며, 그 몸은 매우 부드러워 매우 귀한(極貴) 어린아이의 몸과 같으며, 그 몸이 장대하기는 8주肘가 넘고,20) 수염과 털이 땅에 끌리며, 수족과 얼굴 생김새가 온전치 못하다.”
객이 묻기를,
“음식은 무엇을 먹는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지옥 중생이 먹는 것은 조금도 즐거울 것이 없나니, 구리쇳물이 배 속에 들어감에 골절이 다 불타 버리며, 업력으로 하여금 하룻밤 하룻낮에 만 번 죽고 만 번 살아나는 그 무서운 고통을 어찌 입으로 말하겠는가? 대각께서 다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내가 더 말할 것이 없다.
대체로 모든 것이 우리의 아는 것(識)으로 지은 것이고,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의 아는 것이 모든 것에 물들임(染着)으로 인하여, 망정妄情을 일으켜서 정들임(愛着)을 쌓아서 쉬지 않으면, 사랑의 결과로 없던 사물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하므로 그대가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면 입 가운데에서 침이 나오고, 정든 사람을 이별하든지 혹 죽든지 하면 사랑이 지극하여 슬퍼서 통곡하여 눈 가운데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는 식이 안에서 활동하여 음기를 쌓기 때문에 눈물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재물을 탐착하면 마음에서 사랑이 생겨나기 때문에 온몸이 광윤光潤하고, 마음이 음욕을 생각하여 연애가 지극(極)하면 남녀의 생식기로 자연히 진액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다 우리의 아는 것(識)에서 경계를 반연하여 정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애욕망정愛欲妄情이 곧 물이 생겨나는 원인이다. 물의 성질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니 그 애욕의 자체가 자연히 업을 불러서 아는 것(識)이 생사에 윤회하게 하며, 마음이 번뇌에 쌓이거나 진심이 일어나거나 하면 이것이 불이 일어나는 것이니, 곧 아는 것(識)이 풍도지옥風途地獄과 화탕지옥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모든 애욕과 번뇌를 놓아 버리고 순일하게 생각이 청정하면, 비유하건대 맑은 기운은 위로 뜨는 것과 같아서 아는 것(識)이 위로 올라 천상에 나는 것이다. 만일 이 가운데에서 복덕과 지혜를 닦으며 청정한 원력을 세우면, 자연히 마음이 열리어서 대각성인을 친견하고 안락국토安樂國土에 왕생하는 것이다.
만일 탁한 정이 적고 맑은 생각이 많으면, 곧 날아다니는 신선과 대력귀왕大力鬼王과 날아다니는 야차夜叉와 땅에 다니는 나찰羅刹이 되어 사천왕천四天王天에 돌아다니게 되어 걸림이 없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 도착한 원력과 착한 마음이 있어 대각의 정법正法을 보호하며, 금계禁戒를 가지는 사람과 마음 닦는 사람을 보호하는 자는, 친히 대각의 좌하座下에 머물러 태어난다.
탁한 뜻과 맑은 생각이 골고루 평등(均平)하면 위로 갈 수도 없고 아래로 떨어질 수도 없어 인간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데(受生), 생각이 맑은 자는 총명하고 뜻이 탁한 자는 우둔한 것이다. 탁한 뜻이 많고 맑은 생각이 적으면 축생취畜生趣에 떨어지되, 그 가운데도 정情이 무거운(重) 자는 털 있는 짐승이 되고 정이 가벼운 자는 날아다니는 짐승이 되는 것이다.
탁한 정신은 십분의 칠이나 되고 맑은 생각은 십분의 삼이나 되면, 아는 것(識)이 아래로 끌리어 이 세계 아래 물 바퀴(水輪)와 불 바퀴(火輪) 둘 사이에 떨어져 모진 불기운을 받아서 아귀餓鬼가 되어 항상 불(火)을 탐하게 되며, 물이 불로 변하여 도리어 해롭게 하기 때문에 그 주리고 배고픈 딱한 형편(情狀)은 말할 수 없어서 백천겁百千劫을 지나가지만 쉴 새가 없는 것이다.
또 탁한 뜻이 십분에 구가 되고 맑은 생각이 십분에 일이 되면, 아는 것이 끌리어 바람 바퀴(風輪)와 불 바퀴(火輪) 두 사이에 떨어지지만 죄罪가 가벼우면 유간지옥有間地獄에 떨어지고, 죄가 무거우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는 것이다.
또 십 분이 온전히 탁하면 아비대지옥阿鼻大地獄에 떨어지는데, 만일 아울러서 대승을 비방하고 금계禁戒를 무너뜨리며, 삿된 법을 설하여 세상을 의혹케 하며, 오역죄와 십중죄(五逆十重)를 짓는 자는 천지天地에 대삼재大三災가 나서 이 세계가 무너질 때에 다른 세계 아비지옥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대각께서 말씀하신 지옥의 행상行相이 자세하고 분명함이 많이 있으나 조금만 가려 뽑아 간략히 말하였다.”
제20. 사랑이 종자가 되고 생각을 근문根門에 들여서 태가 되는 것(流愛爲種納想爲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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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43_a_01L객이 묻기를,
“태로 태어나는 중생의 이유를 듣고자 합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대각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중생이 연애로부터 정욕情欲이 발하여서 정情으로써 교합交合함에 정은 반드시 치우쳐지고 반듯함이 있는 것이다. 치우치는 데는 가로로 누워서 가는 어지러운 생각이 있고, 반듯한 데는 바로 서서 가는 어지러운 생각이 있는 것이다. 서서 가는 생각은 사람과 신선이 되어서 머리는 하늘로 향하고 발은 땅을 밟고 다니니 그 무리가 세계에 가득하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서서 가는 생각에 응하여 태어나는 까닭인 것이다. 가로로 가는 생각은 모든 축생의 무리가 되는 것이니, 머리와 몸이 누워서 다니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가로로 가는 생각에 응하며 태어나는 까닭이다.”
객이 묻기를,
“중생이 태에 드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나요?”
용성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 태를 받아 나오는 이치理致를 알면 반드시 목숨을 마치고 다른 곳에 가서 몸을 받아 태어나는(受生) 이치를 알 것이다.
대체로 사람이 태를 받음에 비록 부정모혈父情母血이 엉키어 서로 화합할지라도 그 식 될 자의 아는 것(識)이 아비와 어머니의 아는 것과 함께 인연이 화합되지 아니하면 잉태孕胎하지 못하는 것이다.
『본사경本事經』에 대각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명無明을 끊지 못하고, 탐애貪愛를 버리지 못하며, 업 지음을 쉬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연을 말미암아 태장胎藏의 몸을 받는다. 업은 밭이 되고 아는 식은 종자가 되며, 연애戀愛(渴愛)는 빗물이 되어 이 몸을 성취한 것이다’21)라고 하시며, 『유가론瑜伽論』에 말씀하기를 ‘부모가 연애의 정이 가장 극함에 최후에 각각 농후濃厚한 정혈을 내려 삼연三緣이 화합하므로 어머니 배 가운데에 잉태孕胎되는데, 마치 젖을 달일 때에 엉긴 것과 같아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의지하여 태를 받는 것이다’22)라고 하였다.
대체로 부모의 정혈은 수토水土의 기분氣分과 같은데, 아무리 부모의 정혈이 화합할지라도 불(火)과 바람(風)이 아니면 성숙成熟하지 못하고, 빙 돌지 못하며, 모든 구멍을 통창通彰하게 못하는 것이다.
내가 네 가지 비유로 말할 것이다. 푸른 풀을 의지하여 벌레가 생겨나는 것이니, 벌레는 푸른 풀이 아니지만, 풀을 여의고는 벌레가 없는 것이다. 저 풀과 인연이 화합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벌레의 빛이 푸른 것이다.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父精母血)로 이 몸을 성취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소똥을 의지하여 벌레가 나는 것이니, 소똥은 벌레가 아니고, 또 벌레는 소똥을 여의고 없는 것이다. 소똥과 인연이 화합하여 벌레가 생겨나기 때문에 벌레의 빛이 누런 것이다. 부모와 인연이 화합하여 몸이 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또 대추를 의지하여 벌레가 나는 것이니, 대추는 벌레가 아니고, 벌레는 대추를 여의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대추와 인연이 화합하여야 생겨나기 때문에 벌레 빛이 대추에 인상을 받아 붉은 것이니 부모와 인연이 화합하여 몸이 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또 소락蘇酪을 의지하여 벌레가 나는 것이니, 소락은 벌레가 아니고, 벌레는 소락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소락과 인연이 화합하여 벌레가 생겨나기 때문에 벌레 빛이 흰 것이다. 부모와 인연이 화합하여 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수·화·풍이 구족具足하지 못하면 이 몸을 성취하지 못하는데, 땅은 굳고 물은 젖고 불은 뜨겁고 바람은 움직이는 것이다. 땅만 있고 물이 없으면, 마른 가루를 뭉치려고 하여도 화합이 아니 되는 것과 같고, 만일 물만 있고 땅이 없으면, 물은 걸릴 것이 없이 흘러서 흩어지는 것과 같으며, 땅과 물만 있고 불이 없으면, 오월 유월에 음굴陰堀에 둔 고기가 일광을 쬐이지 못하면 곧 썩어지는 것과 같고, 오직 땅과 물만 있고 바람이 없으면, 유리병을 제조하는 데 바람 기운을 불어 넣지 아니하면 그 안(內)을 비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가 서로 의지하지 아니하면 몸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아는 것(識)이 태에 들 때에 무슨 이유로 들어가는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아는 것이 이 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받을 때에 부모가 될 자의 인연을 얻는데 수만 리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당도하나니, 만일 남자의 중음신이면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를 미워하여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 ‘만일 저 남자가 다른 곳으로 가면 내가 저 여인과 상관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함에 음욕심이 불꽃같이 치성하여 그 욕심에 가려져서 저 남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다만 여자만 있는 것을 보고 환희하여 저 여인과 자기와 교합交合함을 보며, 부모가 될 남녀가 서로 교합하여 정수가 나온 것을 문득 자기의 정혈로 알아 지극히 좋은 생각을 내기 때문에 중음신中陰身이 거칠고 혼탁(麤濁)하고 무거워져서 어머니가 될 여인의 태장 가운데 들어가 오른 옆구리에서 어머니를 안고 꿇어 앉아 있다. 만일 여인의 중음신中陰身이면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를 미워하여 이러한 생각을 한다. ‘저 여자가 멀리 가면 저 장부와 인연을 교합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위의 남자의 중음신과 같은 것이다. 어머니의 옆구리에 있어 어머니를 등지고 꿇어 않는 것이다.
태로 나는 것은 아는 것이 다 음욕으로 화합하여 되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사랑을 마음에서 흘러 내어 종자種子가 되고, 생각을 근문根門에 받아들여 태가 된다’23)고 하신 것이다.”
객이 묻기를,
“부모와 자식이 음욕으로 된다는 것은 너무나 망발이 되는 것이 아닌가요?”
대답하기를,
“그대가 목숨을 마칠 때에 이 육체를 버리고 영혼만 떠나갈 것이니, 그 영혼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도 나의 부모가 될 것이 없다. 이 신령하게 아는 것이 다생의 습기를 이기지 못하여 부모가 될 자와 자식이 될 자가 인연이 화합하여 낳은 뒤에 예절禮節로써 부모자식 간의 천륜을 정한 것이다.
그대의 몸이 태어난 뒤에는 부모가 되겠지만, 몸이 태어나기 전에는 망발이라고 할 것이 없다. 혹 성인聖人과 신선神仙이 태장에 드는 것은 범부와 달라 자기의 신력으로 미리 태장에 몸을 머물러 두어 혹 6년 만에 혹 80년 만에 태어나는 것도 있으니 한 율례律例로 말할 것이 아니다.”
제21. 생각 자체가 가벼워 난생이 되는 것(想體輕擧動轉爲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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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45_a_01L객이 묻기를,
“난생卵生은 어떻게 나는 것인가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알로 나는 중생은 마음에서 생각하는 업상業想으로 인하여 항상 윤회하는데, 대개 그 이치가 나올 때에 내가 일어남을 말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죽을 때에 내가 멸함을 말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죽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업이 보報를 알지 못하며, 보가 업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은 업의 자체가 가벼워서 항상 움직이는(動) 것에 전도顚倒되기 때문에 난생의 무리가 되는 것이다. 난생들은 다분히 육괴肉塊로 교합하지 아니하고 기운으로써 교합하여 알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육괴로 교합하는 난생도 있으니 뱀과 자라와 거북의 무리는 다 육괴로 교합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교합할 때에 중음신이 인연을 따라 들기 때문에 응활체凝滑體를 이루어 온전한 알이 되는데, 그 알 가운데에는 다만 아뢰야식이 있을 뿐이니, 만일 이 식識이 없으면 곧 썩어버릴 것이다.
생각의 자체가 가벼운 힘이 뛰어나기 때문에 날짐승(飛禽)의 무리가 날 수 있고, 생각에 잠기는 힘이 뛰어나기 때문에 날짐승의 무리가 날아다니다가 나무 그늘(樹陰)에 내려앉으며, 고기는 물에서 항상 뜨고 잠기는 것이다. 이것이 다 사상思想의 번뇌와 부침浮沈의 요란한 생각으로 된 것이고, 천신天神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닌 것이다.”
제22. 사랑에 걸려 경계에 부딪침에 부합符合하여 습생이 되는 것(愛滯觸境趣符爲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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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이 말하기를,
“대체로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심의식心意識이니 심의식의 허물로 망망茫茫한 삼계三界의 고통의 바다에 빠져 나올 기약이 전혀 없다. 탁한 뜻과 밝은 생각이 균등均等한 자는 사람이 되고, 맑은 생각이 적고 탁한 뜻이 많은 자는 축생이 된다. 아는 것(識)의 생각하는 업이 치우치게 두드러지면 습생濕生이 되는 것이다.
중생이 항상 향 내음을 집착하여 사랑하고 선근善根은 지은 것이 없으므로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臨命終時)에 아는 것이 허깨비(幻化)로 변하여 저 더럽고 냄새나는 개천 구덩이가 정결하고 아름다운 향내가 코를 찌르므로(觸鼻), 아는 것(識)이 환희심이 나서 급히 따라가 향취에 염착하기 때문에 습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향기를 의지하지 아니하면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팔만 사천 번을 엎치고 뒤치는 망상이 있기 때문에 습생이 대개 구물구물 뒤척뒤척하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
제23. 이 몸을 떠나 저 몸으로 의탁하여 변역으로 생겨나는 것(離此托彼變易爲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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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 말하기를,
“화생化生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화생은 항상 낡은 몸을 바꾸어 새 몸을 얻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맹렬한 것이다. 굼벵이는 자기의 몸을 변하여 매미가 되기를 열성으로 희망하여 공부를 쉬지 아니하기 때문에 제 원을 성취하여 공중에 자유롭게 날며, 녹음綠陰 가운데 읊조리며 일시라도 신선이 되었지만 도리어 타락하니 일장춘몽이로다.
벌레가 화하여 나비가 되고, 새가 화하여 조개가 되니 이와 같은 수없는 무리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다 낡은 것을 벗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화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옥과 천당이 다 화생으로 생겨나는 것이니, 지옥은 비린내를 맡고 깊이 물들어 집착하고, 천당은 처소가 정결한데 깊이 염착하여 나는 것이니, 선악의 업이 다 제가 짓고 제가 받는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誰怨誰咎)?”
제24. 맑은 것으로 광채를 발하여 빛이 나서 색이 된 것(粘湛發光精耀有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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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46_a_01L객이 묻기를,
“무엇을 가지고 유색有色이라 합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종교를 신봉하지만 정도를 알지 못하고, 혹 해와 달(日月)이나 혹 물과 불(水火)을 믿어서 도를 삼기도 하며, 항상 밝은 광채를 희망하여 해와 달과 물과 불에 절하고, 마음으로 정밀하고 빛나는 광채를 관觀하며 유색정有色定을 닦아 아는 것(識)이 광명으로 화하여 으레 광명에 걸림을 입어 목숨을 마친 뒤에는 광채 있는 물건이 되기도 한다. 혹 시방十方 모든 세계에 해와 달도 되며, 혹 일월성수日月星宿 가운데에 가서 기도하며, 혹 야광주와 수정주와 마니보주 등 한량없는 광채가 나는 보배구슬이 되는 것이다.
그대가 보라! 팔월달 달 밝은 때에 조개가 공중에 달을 보고 마음으로 사모하여 모두 입을 벌리고, 일심으로 달을 바라보기 때문에 조개 배 가운데에 밝은 진주가 생기는데, 이것이 다 마음이 짓는 것이다.
세계 사람이 아무 종교나 믿으면 다 좋은 줄로 알지만, 자기의 분상에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아무리 일월성수 모든 광채 나는 물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대원각성을 깨치지 못하므로 필경에 타락하여 생사고해에 윤회하는데 어찌하여 그러한가? 이것이 다 팔만사천 정요란상精耀亂想으로 공부하여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형상이 있는 사물(有相之物)은 필경에 허망한 것이다.”
제25. 있는 것을 싫어하여 공에 집착하며 몸을 멸하여 없는 데로 가는 것(厭有着空滅身歸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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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46_b_01L객이 묻기를,
“무엇을 무색중생無色衆生이라고 하는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올바른 종교를 믿지 않고 무색계천無色界天에 나기를 희망하고, 무색계정無色界定을 닦는 것이니 참으로 어리석도다! 저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 몸이 큰 걱정이다. 내가 이 몸이 있는 까닭으로 모든 고통이 있는 것이다. 몸만 없으면 무슨 고통이 있겠는가?’ 이 생각을 굳게 집착하여 몸을 멸하고 없는 데로 돌아가고자 일단 정신이 변치 않기 때문에 몸이 없는 과보를 성취하는 것이다. 비록 몸은 없다고 할지라도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없어지지 아니하여 미혹에 전도되는 것이다.
정신이 어두운 바탕에 완전하게 빈 것을 의지하여 어두운 것에 합하여 있는 것이 비유하자면, 어떤 한 사람이 흑암黑暗 가운데 있어서 자기 몸을 보지 못하지만 모든 생각을 하는 것이 있는 것과 같아서, 몸은 없어지고 완전(完惡)한 허공의 바탕을 의지하기 때문에 무색계천無色界天에 나는 과보를 받는 것이니, 이것은 외도의 종류이다. 이것들은 사상思想만 있고 색신이 없으며, 업혹이 어둡고 무거워(昏重) 체體는 공매空昧에 합하고, 아는 것(識)은 음은陰隱에 붙이는데 마음이 흩어져 공하며 색상色相이 녹아져 없는 것이다.
또 주공신主空神의 무리가 있으니, 업과業果에 정과색定果色이 없고 별도로 소침消沈에 속한 것이니 업체業體는 없지만 업에 매어 나는 것은 있는 것이다. 이 무리들은 세계에 가득히 있지만 범부는 알지 못하는데, 이것이 다 마음으로 지어서 되는 것이다.”
제26. 허망한 상에 잠결하여 빛이 없고 생각만 있는 것(妄相潛結無色有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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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47_a_01L객이 묻기를,
“무엇을 유색중생이라고 하는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세간의 범부들이 마음이 올바르지(正) 못하여 참마음을 잃고 무슨 귀신의 행상을 그리든지 조성하여 놓고 항상 삿된 마음으로 생전에 복과 수명을 빌며, 사후에 영혼이 천당에 가기를 원하여 마음을 고요히 깊게 생각(潛心)하여 헛된 우상에 전도되어 일생에 정신이 그곳에 생각생각마다(念念) 어둡지 않기(不昧) 때문에, 죽은 뒤에 아는 것(識)이 형상 있는 몸을 받지 않고, 무슨 신당이든지 우상 있는 곳에 의지하는데, 참 애석하도다!”
객이 묻기를,
“그러면 예수교가 참 종교가 아닌가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우상偶像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형상形像 있는 우상이고, 또 하나는 형상이 없는 우상이다. 형상 있는 우상은 오히려 작은 우상이지만 형상이 없는 우상은 참으로 큰 우상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남녀신도가 길을 가다가도 꿇어 엎드려 빌고, 자다가도 빌며,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어디든지 꿇어 엎드려, ‘하나님 생전에 안락하고, 사후에 천당에 가게 하여지이다’ 하니 그 우상은 형상이 없으나 세계와 허공에 가득하여 우상 없는 곳이 없다.
형상이 있는 우상은 산신당山神堂이나 성황당城隍堂이나 화상과 등상이 있는 곳에만 빌고, 우상이 없는 곳에는 빌 생각이 없으니, 그 우상은 참 작은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를 멸하고 복을 얻기 위하여, 형상이 없는 천신을 마음에 하나 만들어 놓고 복된 과보를 희망하여 빌기를 마지아니한다. 세상 사람 보기에는 우상이 없는 듯하나 참으로 버리기 어려운 지독한 우상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그러면 현재 대각교에서 어찌 우상에 예배합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옛날 사람이 성상을 세운 것이지만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천지현격天地懸隔한 것이다. 대각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악화복길흉善惡禍福吉凶이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라고 하시며, 또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 일체 우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우상 문제는 3천 년 전에 대각께서 가장 먼저 설파한 것이다. 오늘날에 새로운 문제 될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일 빛깔과 형상 있는 것으로 대각을 보고자 하거나,
소리로 나의 명호를 불러서 대각 보기를 구하거나 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끝내 대각을 보지 못할 것이다.’24)
라고 하시니, 이것은 사람마다 자기의 본연각성이 곧 도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각의 제자는 천추에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뜻을 표시하여 성상聖像을 조성하여 엄숙히 위하지만, 일체 천당지옥天堂地獄과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다 나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며, 또 나의 본연한 성품이 곧 도가 되는 줄로 알기 때문에 성상聖像에 집착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우상에는 다 귀신이 의탁하여 있다고 하니 모든 대각의 성상에도 다 귀신이 의탁하여 있을 것이 아닌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우상을 조성하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성상을 조성할 때에 가지신주加持神呪를 독송하여 사귀邪鬼를 축출하며, 진언眞言을 복장 안에 안치安置하고, 큰 거울을 태양太陽에 견주어 그 광선을 이용하여 성상의 두 눈에다가 바로 비추고 점안點眼법을 행하기 때문에 일체 마왕외도魔王外道와 모든 귀신이 멀리 달아나 일체 삿된 귀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상을 모시는 것은 단지 모범적으로 기념하기 위한 것이며, 다만 공경할 뿐이다. 일체 집착상을 두지 않는 것이다.
원래 이치는 성상을 모셔도 무방하고 아니 모셔도 무방한 것이니, 어찌 집착상이 있겠는가? 다만 사람마다 자기의 본성이 곧 도道인 줄 알면 항상 자기의 본성本性을 닦고, 모든 것에 의뢰심이 없어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높은 것이다. 누구를 의뢰하여 복福을 빌며 수명(壽)을 빌겠는가? 다 복과 수명이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다.
일체중생의 본성 본심이 나와 같이 평등함을 알아 항상 자비심으로 구호하며, 일체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하며, 자심이 청정하여 삿된 마음이 없으며, 고요히 요동치 아니하여 산란심이 없으며, 지혜가 밝아 우치심이 없으면, 만덕을 성취하여 복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복이 오며, 수명이 장원長遠하기를 구하지 아니하여도 장원하여 만사가 안락한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고 공적空寂하며, 광대하여 삼세三世에 간단間斷이 없으며, 시방에 빈자리(空缺)가 없어 천지와 세계를 다 머금었지만 형적이 없으며, 가는 티끌 속에 들어가지만 보이지 아니하며, 밝은 것은 티끌 수와 같은 해와 달보다 많으며, 그의 신변과 조화가 무궁무진하여 남에게 빌 것이 털끝만큼도 없으니 어찌 모든 천신에게 기도하여 천당 가기를 희망하겠는가?
우리는 대각의 진리를 깨쳐서 도덕을 삼기 때문에 설사 성상을 모셔 예배하고 공경하여도 우치한 미신이 아니며, 허공에다가 예배하여도 우치한 미신이 아니며, 만천 년을 예배하지 아니하여도 아만我慢이 아닌 것이다. 다만 정도만 목적함이요, 행리처行履處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객이 묻기를,
“오늘날에 대각께 공양을 올리고(聖供) 예배하는 것을 폐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그대가 인연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배하는 것의 그 실정實情은 나의 진성眞性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 받는 것이지만, 과거의 모든 대각과 인연을 맺은 것이니, 자연히 성인을 만나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삼계만법三界萬法이 다 인연으로 성립된 것이니, 성인에게 인연이 없으면 누가 너를 제도할 것인가? 우리는 대각의 가르침을 믿는 제자로서 우리가 성인을 위하지 않고서 누가 위할 것인가? 우리는 반드시 효순으로써 으뜸을 삼는 것이니, 마치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에 항상 출입함에 고하며, 조석으로 합장하고 안부를 여쭈며(問訊), 의복 음식으로 받들어 섬기는(承事) 것과 같이, 우리가 대각성인이 아니면 삼계고해를 어떻게 해탈할 것인가?
그러하므로 조석에 항상 예배공경하며, 오시午時에 항상 대각께 공양을 올릴(聖供) 것이니 이것이 선생 제자 간에 천고에 내려오는 규율인 것이지 미신이 아닌 것이다. 설사 성인에게 축원기도祝願祈禱를 하더라도 다 내가 건립한 나의 원력이요, 다른 교에서 다만 천신과 신명에게 의뢰하여 복된 과보를 희망하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삼계만법이 다 나의 마음으로 지은 것이니, 나의 마음이 정직하고 지성스러우면, 소원이 스스로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상에게 예경하는 것은 규율적으로 항상 다반예식을 할 뿐이다. 털끝만큼도 염착이 없는 것이니, 저 세간의 외도들이 형상 있는 우상이든지 형상 없는 우상에게 단지 정성을 드리며 기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성전에 예경할 때에 단지 나의 자성을 반조返照하여 일체 경계에 반연치 않고, 오직 마음과 경계가 텅 비어 한 물건도 없고 영지靈智가 밝아 역력히 분명하여 무정無情과 같지 아니하지만 털끝만큼도 의뢰심이 없으면, 그림자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아서 감응함이 헛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미혹한(迷) 사람은 그러하지 아니하여 자기의 마음속에 형상 있는 우상이나 형상 없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허망한 데만 정신을 의탁하여 우상에 전도되기 때문에 팔만사천으로 어지러운 생각(亂想)을 잠결潛結하여 허망되게 자기의 본성을 잃고 우상에 집착되어 색음色陰에 의지하지 않고 삿된 생각(邪想)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허망한 우상 가운데에 형상 없는 알음(知)을 맺어 밝지 못하여 귀신鬼神이 되고 정기情氣가 온전치 못하여 흩어져 정령이 되는데, 그 귀신정령鬼神情靈은 참다운 몸은 없고, 다만 생각만이 있는 것이다.”
제27. 굳게 어리석음을 지켜서 무상이 되는 것(固守痴頑化爲無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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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 묻기를,
“무상중생無想衆生은 무슨 연유로 생겨나는 것입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세간에 종교를 믿는 중생들이 정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치하고, 미련한 도를 닦지만, 항상 마음을 쉬어 생각이 없고, 그 없는 곳에 정신을 두어 무정과 같이하여 무사무려無思無慮에 집착하기 때문에, 목숨을 마친 뒤에 정신이 화하여 토목금석이 된다. 예전에 겁빈나劫賓那가 돌이 되고, 연소가 나무가 되며, 정나라 사람 완(鄭人緩)이 잣나무가 되고,25) 황석공黃石公이 돌이 되는 것이26) 다 이것이다.”
제28. 물건을 기다려 빛(色)을 이루나 원래 빛이 없는 것(待物成色元非有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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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 묻기를,
“비유색중생非有色衆生이 되는 이유는 어찌함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세간 중생이 삿된 업으로써 남을 의탁하여 무슨 방면이든지 자기의 생활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자기의 독립정신으로 하지 못하고, 남에게 형세를 믿어 지내기 때문에 해파리 무리를 감득하는데, 해파리가 빛깔이 없으니 물거품과 같아서 빛이 없는 것이다. 바닷물에 떠다니다가 새우를 만나서 꼭 안아 조아려지면 그 새우의 눈이 해파리의 눈이 되어 색상을 못 보는 것이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의 무리가 비유색이다. 일체 유정동물이 몸 가운데에 모든 벌레가 의탁하여 사는 것이 다 비유색중생이다.”
제29. 본래 빛이 없으나 이미 감득하여 바탕을 이루니 그 빛이 없는 것은 아닌 것(本是無色旣感成質非其無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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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0_a_01L객이 묻기를,
“비무색중생非無色衆生은 무슨 이유로 생겨납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세간 사람이 술법을 성취하고자 하여 주문을 지성으로 외우는데, 그들의 소망은 육정육갑六丁六甲27)과 육임육무六任六戊와 모든 신장을 부리어 비바람을 부리고(呼風喚雨) 산을 옮기고 바다를 건너는(移山渡海) 모든 일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낮으로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며 신장을 불러 감응하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삿된 업으로 서로 흡인하여 일단 정신이 주문을 의탁하여 어지러운 생각으로 부르기를 마지아니하는데,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친 뒤에 요정妖精이나 도깨비(魑魅)와 같은 동물이 되는 것이다.
세간에 요정이나 온갖 도깨비(魑魅魍魎)의 무리들이 본래는 형색이 없지만 업의 과보를 초래하여(業感) 질애質礙를 성립成立하기 때문에 비무색이라 하는 것이다.”
제30. 다른 몸으로 서로 이루니 그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 것(異質相成非其有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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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 묻기를,
“비유상중생非有想衆生은 무슨 이유로 생겨나는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대체로 세계 중생이 인因 가운데 남을 속여 다른 물건을 내 것으로 만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과보 가운데에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취하여 자기의 것을 만드는 것이다.
대개 종류를 들어서 말한다면, 뽕나무 벌레가 본시 벌이라는 생각이 없지만, 나나니가 물어다 놓고, ‘나나나’ 하고 벌레 몸을 부딪치며 일단 정성을 다하면, 본래 벌이라는 생각이 없던 벌레가 화하여 벌이 되는데, 내가 벌이라는 생각이 있으니 그 무리가 세계에 가득한 것이다.”
제31. 원수를 갚자고 의탁하여 났으니 그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닌 것(報怨托生非無其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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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0_b_01L객이 묻기를,
“비무상중생非無想衆生은 무슨 인유로 나는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세간에 인축을 물론하고 부모 자식이 다 숙세에 원수가 있어서 보복하기를 위하여 인간에 와서 태어나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세간 사람은 자식을 가지면 낙태도 하며, 혹 낳을 때에 모자가 죽기도 하고, 혹 낳은 뒤에 죽기도 하며, 혹 부모의 재산을 탕진하여 복장腹臟을 태우기도 하고 혹 오역죄五逆罪를 행하여 부모가 참혹한 일을 당하게 하는데, 이것이 다 전세前世의 원수 갚기를 위하여 온 것이다.
대부분 축생의 종류를 들어 말한다면, 올빼미는 흙덩이 안에서 자식을 낳는데 자식이 제 어미를 잡아먹으며, 파경조破鏡鳥는 독한 과실을 품고서 자식이 되지만, 자라고 나면 제 부모를 다 잡아먹으니 그 종류가 세간에 가득하다. 이 열두 가지 종류로 태어나는 중생28)이 다 자기의 습관성을 의지하여 망상에 전도하므로 삼계에 윤회하여 고해苦海가 무량하지만 벗어날 기약이 없으나, 대각성존大覺聖尊의 도는 모두 이것이 아니다.”
제32. 욕계육천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受生欲界六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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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1_a_01L객이 묻기를,
“욕계육천에 가는 것은 무슨 도를 닦나요?”
용성이 말하기를,
“모든 하늘에서 태어나는 행상이 매우 많아서 말하기 어려우니, 간단한 말로 설명할 것이다. 인간에서 십선十善을 닦는데, 처첩妻妾의 은애恩愛를 버리지는 못하지만 음욕을 어지럽히지(亂) 아니하고 절대로 사음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탁한 뜻이 적고 맑은 생각의 분자가 매우 뛰어나므로 그 식정識情이 가볍고 청정함(輕淸)을 따라 사왕천四王天에 나는 것이다. 또 십선을 닦지만, 자기의 처첩이라도 애욕이 적으며 혼자 있을 때에는 음욕이 없는 듯하니 사왕천보다 더 가볍고 청정함을 따라 삼십삼천三十三天에 나는 것이다. 십선을 닦는 중생은 자기의 처와 만나면 잠시 교합하고 서로 여읨에 음욕의 생각도 없으며 마음이 고요하여 난동亂動이 적으면 이 아래 하늘보다 더 가볍고 청정하기 때문에 야마천夜摩天에 나는 것이다. 또 십선을 닦지만, 일체 시에 음욕이 적으며 경계를 당하면 어기지 못하는데, 이 아래 하늘보다 더 가볍고 청정하기 때문에 도솔천兜率天에 나는 것이다.
또 십선을 닦지만, 음욕이 없으나 경계를 따라 설사 음욕을 행할지라도 담담무미淡淡無味하니 이 아래 하늘보다 더욱 가볍고 청정하기 때문에 화락천化樂天에 나는 것이다. 또 십선을 닦지만, 음욕심이 온전히 없으며 세상과 같이하지만 온전히 재미가 없나니 이 아래 하늘(下天)보다 더욱 마음이 가볍고 청정하기 때문에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나는 것이다.”
제33. 십선계와 선정을 닦아 색계십팔천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兼修戒定報生色界十八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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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1_b_01L객이 묻기를,
“색계십팔층천色界十八層天에 왕생하는 법은 어떠한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십계를 지켜서 신구의身口意를 청결히 하며,십계十戒는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殺盜淫)과 불망어, 불기어, 불양설, 불악구(妄語綺語兩舌惡口)와 불탐, 부진, 불치(貪瞋痴)이다. 아울러서 선정을 닦지만, 상계上界는 좋아하고 하계下界는 싫어하며, 정도를 알지 못하고 다만 몸만 국집局執하여 계를 지키지만 음욕을 행치 아니하며, 부정관不淨觀과 고골관枯骨觀 등을 닦아 익히면 범중천梵衆天에 나는 것이다.
십계와 선정(戒定)을 닦지만, 신심身心이 청정함이 범중천보다 더 수승하기 때문에 범보천梵輔天에 나는 것이며, 또 범중천, 범보천보다 더 수승하여 마음이 오묘하고 둥글며 지혜가 명달하기 때문에 범중천과 범보천을 통솔通率하는 대범천大梵天에 나는 것이다.
이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은 욕계육천欲界六天의 팔고八苦를 여의고, 몸과 마음이 가볍고 평안(輕安)한 과보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늘도 대원각성大圓覺性을 깨치지 못하므로 복이 다하면 필경必竟에 타락되고 마는 것이다.
또 계정혜戒定慧를 닦아 마음이 밝지만 광명光明이 조금 낮기(劣) 때문에 소광천小光天이라 하고, 또 더욱 정밀히 수행修行하여 마음 광명이 서로 비추지만 유리와 같기 때문에 무량광천無量光天이라 하며, 또 더욱 공부가 깊어 감에 뚜렷이 광명이 음성音聲과 화化하여 법을 강연講演하기 때문에 광음천光音天이라 하는데, 이 하늘들도 대원각성을 깨치지 못하므로 복이 다하면 필경에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이상은 이선천二禪天이다.
또 공부가 점점 깊어짐에 즐거운 마음을 여의고 적멸寂滅을 성취하나 오히려 정력定力이 조금 낮기 때문에 소정천小淨天이라 하고, 또 공부가 더 깊어짐에 청정淸淨하고 오묘하여 신심경계身心境界가 한량이 없기 때문에 무량정천無量淨天이라 하며, 또 공부가 더 깊어짐에 청정하고 빈 경계가 끝이 없어 적멸락寂滅樂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변정천徧淨天이라 하는데, 이 하늘들도 대원각성을 깨치지 못하였으므로 필경에 타락되고 마는 것이다.이상은 삼선천三禪天이다.
또 공부가 더욱 깊어 감에 고와 낙을 다 놓아 버리며, 거칠고 무거운 번뇌(麤重感)가 끊어지고 깨끗한 복이 생겨나기(生) 때문에 복생천福生天이라 하고, 또 공부가 더 깊어짐에 고락을 잊은 가운데 재물에 초라함(物陋)이 없고 수승한 지혜(勝解)가 청정하여 유루선정有漏禪定으로부터 무루행無漏行에 미치어 가기 때문에 복애천福愛天이라고 한다. 이 복애천에서 두 갈래로 가는 길이 있으니 하나는 바로 광과천廣果天으로 가는 길이며, 하나는 무량정천無量淨天으로 가는 길이다. 다른 소견所見을 국집하지 않고 닦는 복이 밝으면 청정한 복(淨福)이 점점 광대해지기 때문에 광과천에 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소견所見을 가져서 있는 것(有)으로 생멸生滅을 삼고 없는 것(無)으로 열반을 삼아, 몸은 고목같이 하고 마음은 차가운 재와 같이 하기 때문에 무상천無想天에 나는 것이니 이것을 외도천이라고 한다. 이 모든 하늘들이 심사출입식尋伺出入息이 있기 때문에 수화풍水火風 삼재三災를 면치 못하는데, 생각이 거친 것을 심尋이라고 이름하고 지극히 미세微細한 것은 사伺라고 이름한 것이다. 범중천과 범보천은 거칠고(麤) 미세한 번뇌(細惑)가 있기 때문에 천지의 대삼재인 화재火灾·수재水灾·풍재風灾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대범천大梵天도 미세한 번뇌(微細惑)가 있기 때문에 화재를 당하고,이상은 초선천初禪天이다. 소광천과 무량천과 광음천은 즐거운 낙이 있기 때문에 수재를 당하며,이상은 이선천二禪天이다. 소정천과 무량정천과 변정천은 출입식이 있기 때문에 풍재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이상은 삼선천三禪天이다.
또 마음과 경계를 버려서 번뇌를 끊기 때문에 무번천無煩天이라 하고, 또 공부가 깊어짐에 미세한 번뇌를 끊기 때문에 무열천無熱天이라 하며, 또 연영緣影을 끊어 오묘하게 보는 것이 원명圓明하기 때문에 선견천善見天이라 하고, 또 정밀하게 보는 지혜가 늘어나 명경과 같기 때문에 선현천善現天이라 하며, 또 색과 색의 성품이 끝이 없는데 들어가기 때문에 색구경천色究竟天이라 하는 것이다.
이 다섯 하늘은 소승사과小乘四果 가운데 다분히 아나함阿那含이 나는 것이니, 다시는 인간세계에 오지 않기 때문에 오불환천五不還天이라고도 하고, 오정거천五淨居天이라고 하는데, 하층에 있는 하늘들은 사선천주四禪天主가 있다는 말만 듣고서 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하늘도 대원각성을 깨치지 못하기 때문에 필경에는 타락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욕계의 육천과 색계의 십팔천에 대성大聖의 원력으로 몸을 받아 태어나는(受生) 것은 제외하여 놓고 설명하는 것이다.”
제34. 사공정을 닦아 무색계천에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修四空定受生無色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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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3_a_01L객이 묻기를,
“무색계사천無色界四天이란 것은 어떠한 하늘입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앞에서 말한 하늘로 무색계사천이 있으니, 다 색신色身이 없기 때문에 무색계사천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는 공처천空處天이니 공부할 때에 ‘나(我)에게 큰 걱정이 있으니, 내 몸이 있음으로 고통이 있다’고 하여 몸을 싫어하고, 완전히 빈 데로 돌아가는 관법觀法을 닦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식이 공을 의지하여 머물러 있으므로 공처천空處天이라 한다.
또 하나는 완전히 공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고 하여 식識을 의지하기 때문에 식처천識處天이라 한다. 또 하나는 공과 색(空色)을 이미 잊었으면 식심識心도 모두 잊을 것이라 하여 모두 멸하여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이라 한다. 또 식심이 발동하지 아니하는 식을 의지하여 멸한 것이니 참으로 멸한 것이 아니며, 다함(盡)이 없는 가운데서 다함을 발명하였으므로,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으므로 생각이 아니라고 하고, 다한 것도 같지만 다한 것도 아니며, 아닌 것도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이라 하는 것이다.
이 하늘들은 업과색業果色은 없고 정과색定果色만 있으니 혹 듣지 못한 아라한이 거주하기도 하며, 혹 무상천외도無想天外道들이 거居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하늘들도 대원각성大圓覺性을 깨치지 못한 범부의 하늘이어서 아무리 신통변화가 무궁하며 한량없는 쾌락을 받지만, 천복이 다하면 도리어 타락하여 고해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우리 대각교는 천당에 가려고 하는 교가 아니다. 나의 대원각성大圓覺性을 깨우쳐 영원히 생사고해生死苦海를 해탈하고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객이 묻기를,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천당으로 가는 말을 길게(長) 합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우리 교인에게 그 사정邪正과 시비是非를 알게 하고자 하여 외람되게 행상行相을 설명한 것이다.”
제35. 병자를 보호하며 영혼을 천도하는 것(善護病者引導正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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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3_b_01L객이 묻기를,
“생사는 인간에게는 큰일입니다. 부모 친척이 병이 들어 사망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첫째는 병든 사람(病人)이 거처하는 방과 온 집안을 청결히 하고 일주청향一炷淸香을 피우며, 어육주초魚肉酒炒와 오신채五辛菜를 엄금하고 대승성전을 독송하며, 세간의 마구 지껄여 시끄럽게 떠드는(喧譁) 잡담을 하지 말고, 항상 대각의 성전의 말씀을 병자의 귀에 들려주되 일정하게 슬픈 기색과 우는 기색을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의 인정으로 보면, 울지 않으면 어진 사람(仁者)의 도리가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그 사실에 들어가 보면 불효막대한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환자가 병이 위중하여 감에 따라 온몸 마디마디(四肢百節)가 쑤시고 아프며(疼痛), 호흡이 몹시 가쁘고 헐떡거려서(喘促) 마음에 죽을까 두려워하는 가운데 병자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말과 슬프게 눈물을 흘리는 기색을 보여서 병자의 마음(心思)을 자극해서 애연한 정과 슬픈 마음이 심간에 사무치게 하니 이것이 불효를 끼치는 것이다. 아무쪼록 세상이 무상함을 말하여 애착심을 버리고 청정한 도심이 일으키게 하며, 대각의 명호(聖號)를 생각하여 안락국토에 왕생하게 해야 할 것이지, 도리어 애착심을 일으키게 하여 악도에 떨어지게 하니 이것이야말로 불효막대한 것이다.”
객이 말하기를,
“설사 애착심을 일으키거나 번뇌심을 일으키기로서니 악도에 떨어질 것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허공에 나는 새와 물에 노는 물고기라도 조금이라도 거리낀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날고 뛰지 못하는 것과 같아 처자권속과 금은보화(金銀玉帛)와 좋은 친구를 다 버리고 영원히 홀로 떠나갈 때에 조금이라도 걸림이 있으면 좋은 곳을 못 가는 것이다.
마음이 청정하고 고요하여 산란심이 없어야만 영혼이 바로 왕생할 것이거늘 영혼의 사정을 털끝만큼도 알지 못하고 한낱 어리석어 칠통같이 어두운 소견으로 ‘애고! 어머님, 애고! 아버님,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오?’ 하며 꿀떡꿀떡 슬피 우는 소리에 영혼 역시 애착과 번민에 걸리어 앞길이 막막하여 어디로 갈 것을 알지 못하고, 혹 거리 중천에 귀신이 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삼악도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 영혼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자손이 아니라 큰 원수가 될 것이다. 그러하므로 부모나 혹 누구든지 병이 들었을 때와 임종할 때에 대각의 성전에 있는 말씀과 마음을 돌이켜서 대원각 본원성으로 반본환원返本還源하는 것을 역력히 설명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임종일로부터 조석상식朝夕上食에서 삼년상까지 단지 우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 것이다. 망자가 목숨을 마친(命終) 후에 한 시간이나 더 지났다면, 세상 사람의 체면으로 또 망극지통을 표시하기 위하여 곡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에서는 부모의 영혼을 영원히 안락국토로 왕생하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절대로 주육과 오신채와 일체 부정한 제물을 쓰지 않으며 살생을 엄금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초혼을 부르며 혼백을 집으로 모셔다가 조석상식과 삼년상을 지내되 곡성으로 만 판을 짜겠지만, 우리 교에서는 부모의 영혼이 갈 곳을 못 가고 자손의 집에 와서 있는 것은 아주 좋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우리 교에서는 부모가 목숨을 마치실 때에 대승성전을 외우고, 아미타 성호를 지성으로 부르며, 목숨을 마친 뒤에는 시다림을 하고, 『금강경』이나 『원각경』을 독송할 것이지 절대로 곡성을 많이 내지 않는다. 칠칠七七이 사십구일과 삼년상에도 청정히 재계를 하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영혼을 천도하기로만 목적하고 영혼이 집에 있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객이 묻기를,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미신이 아닌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영혼이 없는 줄만 자세히 아는가? 귀신이 없는지 있는지 자세히 모른다면, 부모의 영혼에게 좋다고 하는 것은 인자의 도리에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제36. 관법을 의지하여 소승을 성취함(修行苦集心化小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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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4_b_01L객이 묻기를,
“삼계三界 중생이 심의식心意識의 허물로 망망한 고해에 빠져 벗어날 기약이 없으며, 또 고락과 죄복을 도무지 깨치지 못하고, 저 광겁다생으로 익힌 습관習慣을 금강철봉金剛鐵棒으로도 도저히 파괴할 수 없으니 어찌해야만 습관을 파괴하고 삼계고해三界苦海를 해탈할 것입니까?
삼계제천三界諸天과 악마외도惡魔外道와 육도사생六途四生이 오직 마음으로 지은 것이고, 식심집착識心執着으로 된 것인데, 어떻게 해야만 식심을 타파하고 본성을 깨칠 것인가요? 우선 첫째에 소승小乘들은 무슨 법을 닦아서 삼계고해를 해탈하였나요?”
용성이 말하기를,
“소승의 행상이 많으며 닦는 법이 많으나 내가 간략히 말할 것이다.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닦아야 되는 것이다. 어찌함인가? 하나는 몸이 부정한 것을 관하는 것(觀心不淨)이니 최초부터 종자種子가 부정한 것이다. 어찌 그런가? 음욕업인淫欲業因으로 나는 것이며, 또 부정모혈父精母血로 된 것이며, 또 모태 가운데 들어감에 생장生臟 밑과 숙장熟臟 위에 있는 것이며, 또 아홉 구멍에 더러운 물이 항상 흐르는 것이며, 또 몸 안에 모든 벌레와 삼십육종 부정물이 있는 것이며, 죽은 뒤에는 썩어서 흥청흥청한 것이니, 이 몸이 참 부정한 것이다. 이렇게 설명한 것은 그 원인을 알도록 한 것이니, 관할 때에는 이렇게 어지럽게 할 것이 아니라 다만 단순히 몸이 부정한 것만 일심으로 관해야 할 것이다.
그 관하는 법은 몸과 마음을 다 쉬어 허공과 같이하고 마음으로 관하되, 행주좌와에 끊임없이 적적寂寂하고 깨끗하게 관하면 필경에 사대四大가 공하고 내가 없음을 깨칠 것이니, 이것은 탐심이 많은 중생에게 적당한 방편이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받음이 고됨을 관할 것(觀受是苦)이니, 이 몸은 고깃덩어리니 생로병사와 굶주림, 목마름, 추위, 더위(飢渴寒暑)를 항상 받기 때문이며, 즐거움을 받는 것도 고가 되는 것이니, 즐거움이 극진하면 슬픔이 생겨나는 까닭이며, 바라는 것을 받는 것도 고통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일심으로 고요하고 깨끗하게 관하면 자연히 사대가 공하고 내가 없음을 깨칠 것이니, 이것은 오욕락五慾樂에 집착한 중생에게 오묘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마음이 무상함을 관할 것(觀心無常)이니, 홀연히 즐거운 마음이 생겨났다가 홀연히 성내는 마음(嗔心)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 희로애락과 생멸변화가 무상한 것인데 무엇이 떳떳하리오? 이와 같이 마음이 무상함을 관하여 일심으로 고요하고 깨끗하게 관하면 자연히 사대가 공하고 내가 없음을 깨칠 것이니, 이것이 아我를 집착하여 떳떳한 것으로 아는 중생에게 오묘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법이 내가 없음을 관하는 것(觀法無我)이니, 자세히 관하여 보라. 무엇이 내가 되는가? 지·수·화·풍 사대로 된 이 몸은 필경에 부서져 무너지는(敗壞) 것이니 내가 아니며, 변종이 무쌍하여 분별하는 마음은 생각생각이 생멸하여 변화무궁하니 내가 아니며, 허공과 우주와 내외의 제법을 낱낱이 관찰하여 보아도 하나도 내가 아니니, 어떤 법이 내가 되는가? 모두 내가 없는 법을 관찰할 것이니, 이와 같이 일심으로 관하면 자연히 사대가 공하고 내가 없음을 깨칠 것이다. 이것이 집착하는 중생에게 오묘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방편을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것이다.
또 산란심散亂心이 많은 중생에게 호흡식呼吸息을 헤아리는 관법을 가르치는데, 숨이 한 번을 들어가고 한 번 나오는 것을 헤아리되, 하나로부터 열씩 헤아려 일심으로 자세히 헤아리기를 마지아니하면, 자연히 사대가 공하고 내가 없음을 깨칠 것이니, 이것은 산란 중생에게 오묘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소승의 관하는 법이 많지만 간략히 말하였노라.
삼계 중생이 무량겁으로부터 오며, 그 습관이 한량없으니 만일 관법으로 지극히 공부하지 아니하면 무량겁 생사를 어찌 타파할 것인가? 이 관법을 일심으로 닦아 지혜로 번뇌를 타파하지 아니하면, 영겁이라도 삼계고해를 해탈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세간의 번뇌를 여의고 고요한 곳에 단정히 앉아 몸과 마음을 다 쉬고 고요한 가운데 맹렬히 관법을 닦아 마지아니하면, 소승의 도를 성취할 것이다.”
객이 묻기를,
“소승은 무슨 법을 성취하였나요?”
용성이 말하기를,
“밖으로는 천삼라지만상天森羅地萬像이 다 공하고, 안으로는 육근六根과 육식六識과 칠식七識에 아我가 공함을 증득하여 적적삼매를 얻어 영원히 삼계생사의 고통을 해탈하며, 그 신통변화가 불가사의하여 대천세계를 앵두알만큼으로 보면, 천지를 움직여 억만 리를 순식간에 왕래하며, 원겁사遠劫事를 한 생각에 다 아는 것을 어찌 입으로 말할 것인가?
대개 소승법을 설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대하여 말할 때에 일체법이 거울 가운데 형상과 같고 물 가운데 달과 같으며, 파초와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아지랑이(陽炎)와 같고 일체법이 떳떳함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고 내가 없으며, 깨끗함이 없다 하여 모든 형상을 배척하고, 그 참된 것을 나투는 것이 소승법인 것이다.”
객이 묻기를,
“어찌하여 소승이라 하나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수레는 물건을 싣고 운전하여 가는 뜻이니, 단지 삼계만법이 공空하여 형상이 없는 것을 깨치기 때문에 소승이라 하는데, 어찌함인가? 치우치게 아가 공한 진여(我空眞如)만 깨치고, 법이 공한 진여(法空眞如)는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일체법이 떳떳한 것이 없고 즐거운 것이 없으며, 깨끗함이 없는 것을 깨치고, 일체법이 참으로 떳떳하고 참으로 즐거움, 참되고 참으로 청정함을 깨치지 못하며, 진眞과 속俗이 융통하여 일체법이 상주불생하고 상주불멸함을 깨치지 못하기 때문에 소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의 수행하는 법이 네 가지가 있으니 고苦·집集·멸滅·도道라고 하는데, 일체중생은 그 고통 받는 결과를 말하지 아니하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명하되, ‘그대들은 보라! 인생 가운데에 만 가지 고통과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이 다 무엇을 따라서 있는 것인가? 다 우리들이 전생과 금생에 몸과 입과 뜻이 청정치 못함을 원인으로 하여 지독한 고통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이 죄악은 다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모여 있는 것이다. 이 근본의 죄악을 짓는 원인을 끊지 아니하면, 삼계의 고통을 해탈하고 자유롭게 스스로 즐거워할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여 몸은 계戒를 지켜서 청정히 하고, 마음은 관법을 닦아 깊이 번뇌혹을 끊는 것이니, 이것을 소승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각님께서 전수傳授하신 별전종지別傳宗旨를 믿어 수행하기 때문에 교의 말씀은 간략히 하고자 한다.”
제37. 각을 생각하되 관법을 행하면 마음이 화하여 낙원이 되는 것(念覺觀法心化樂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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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6_b_01L객이 묻기를,
“세상 사람이 무량수각無量壽覺을 생각하여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데, 단지 무량수각만 생각하면 가는 것인가요, 별도로 닦는 법이 있는 것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다만 무량수각을 입으로만 부르는 것은 장래 무량수각을 친견할 인연은 있지만, 대단히 더디고 먼(遲遠) 일이다. 무량수각을 생각할 때에 관법을 행하는 것이 좋으니 내가 간략히 말할 것이다.
하나는 무량수각이나 관음대성이나 그 성상이 서서 계시되 금색광명이 빛나며, 거룩한 성상이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바로 드리움을 관할 것이니, 이것을 반주삼매般舟三昧라고 한다.
대개 사람이 무량수각을 생각한다고 하여도 종일토록 알음을 일으키면 온갖 경계로부터 다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무량수각을 외우든지 부르든지 할지라도 알음으로 일체 분별하는 것을 다 쉬고 고요히 하여 일심으로 관법을 행하면, 자연히 산란한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청정해질 것이다. 이 정력定力으로써 무량수국토에 왕생하는 것이다. 혹 떨어지는 해가 뚜렷하여 비치되 광명이 없는 해의 본체만 관하기도 하며, 혹 성상에 백호광명만 관하기도 하는데, 그 관법이 많은 것이지만 모든 분별을 쉬고 고요히 마음으로 관하는 법은 다 같은 것이다. 산란심으로 다만 부르기만 하고 마음은 각처에 나가 있으면 왕생하기 어려운 것이다.”
제38. 신주를 지송코저 함에 반드시 네 가지 법을 알 것(要誦神呪必知四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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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7_a_01L객이 묻기를,
“세상 사람이 주문을 지송하는데 무슨 공부와 수련하는 법이 있나요?”
용성이 말하기를,
“주문을 지송하자면 음욕과 주색을 엄금하며, 항상 청정히 목욕하고 옷을 자주 갈아입으며, 향을 피우고 일심 정성으로 주문을 지송하되 네 가지 법을 행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주문을 고성으로 외우되 그 외우는 놈을 돌이켜 볼 것이며, 하나는 입과 혀를 움직이지 말고 다만 생각으로 주문을 생각하되 이 생각하는 놈을 돌이켜 볼 것이며, 하나는 주문을 외울 때에 범서의 옴 자를 관하되 그 옴 자가 달과 같이 뚜렷하고 밝은 것을 관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일체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관법을 행하면 자연히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번뇌가 없어지고, 머묾이 없는 마음의 바탕(體)이 영지불매하여 자연히 본마음을 깨치나니 이것이 주문하는 법이다. 자력과 타력을 합하여 무진무궁한 진리를 깨치면 그 가운데 불가사의 도력이 있는 것이다.”
제39. 인연을 돌이켜 관함에 마음이 화하여 연각이 되는 것(返觀因緣心化緣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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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7_b_01L객이 묻기를,
“연각緣覺의 행상을 듣고자 합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연각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대각으로부터 법을 듣고 삼계만유三界萬有와 내외제법이 다 환幻으로 있는 것을 깨친 자도 있으며, 하나는 근성根性이 맹렬하여 스승의 가르침(師訓)을 받지 아니하고도 다른 법(外分)을 아는 것이다.
저 초목의 잎이 피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서 천지 만물이 다 환으로 있음을 깨칠 수도 있고 대각의 법(內分)을 아나니, 내 몸은 생로병사가 있음을 보고 마음이 생겨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멸하는 것(生住異滅)을 깨치어 십이인연十二因緣으로 된 것을 통달할 수 있다.
십이인연은 첫째는 무명無明의 인연으로 행行이 나고, 둘째는 행의 인연으로 식識이 나며, 셋째는 식의 인연으로 이름(名)과 형색形色이 나고, 넷째는 명색名色의 인연으로 육근六根에 들임(入)이 나며, 다섯째는 육근에 들이는(六入) 인연으로 닿는 것(觸)이 나고, 여섯째는 닿는 것의 인연으로 받는 것(受)이 나며, 일곱째는 받는 인연으로 사랑(愛)이 나고, 여덟째는 사랑의 인연으로 취取하는 것이 나며, 아홉째는 취하는 인연으로 있음(有)이 나고, 열째는 있는 인연으로 나는 것(生)이 있으며, 열한째는 나는 인연으로 늙는 것(老)이 있고, 열두째는 늙는 인연으로 죽는 것(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근본으로부터 일어나는 생기차서生起次序라고 하는 것이다.”
객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 삼계고해와 일체 번민고통을 여의고 성인이 되고자 하면 어찌하여야만 할 것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이것을 닦아 끊어야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끊을 것인가? 이 열두 가지가 이렇게 일어나는 근본을 일심으로 관해야 할 것이니, 비유하자면 금강산에서 동적강銅赤江(한강)으로 흘러서 서해 바다로 가는 것을 따라가지 말고, 물이 나오는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필경에는 물이 나오는 근원을 알 것이다. 연각이 이 십이인연을 끊고 무루묘도無漏妙道를 증득한 것이다. 대개 도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실지로 행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연각의 행상을 들었으나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시 자세히 설명하기를 바랍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십이인연에 각각 오온五蘊을 갖추었으니, 오온이라고 함은 형색(色)과 받음(受)과 생각(想)과 행하는 것(行)과 아는 것(識) 등이다. 모든 법은 본래 공空하니 집착할 것 없고 경계는 뜬구름 같으니 사랑할 것이 없는데, 그 근원을 밝게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탐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알지 못한 것은 무명無明이 되고 탐착하는 것은 행行이 되며, 경계를 요별了別하여 분별하는 것은 식識이 되고, 식에 모든 것을 쌓는 것은 명색이 되며, 명색에 의지한 대상이 되는 것은 육근이 되고, 경계로 화합하는 것은 촉觸이 되며, 촉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은 받는 것(受)이 되고, 흔연히 받는 것은 사랑(愛)이 되며, 사랑의 반연이 취取하는 것이 되고, 취하는 까닭으로 뒤에 업을 흡인하는 것은 있는 것(有)이 되며, 색·수·상·행·식 오온을 성취한 것은 나는 것(生)이 되고, 오온이 변해 가는 것은 늙는 것(老)이 되며, 오온이 멸하여 무너지는 것은 죽는 것(死)이 되고, 의식意識에 합당치 못하게 받는 것은 근심이 되고, 근심이 변하여 우는 것은 슬픔이 되며, 안·이·비·설·신·의식意識의 불평을 받는 것은 고苦가 되고, 번민한 마음은 뇌惱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십이인연의 모양이다.
이 십이인연의 근본을 통달하여 일심으로 관법을 닦으면 십이인연이 다 공함과 자기의 근본성품을 깨달을 것이다. 연각緣覺의 행상이 많은 것을 내가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정신만 취하여 간략히 말하였다. 연각이 비록 소승에 포함되었지만 무루묘도無漏妙道를 증득하여 그 지혜와 신통과 변화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제40. 삼관을 원만히 깨치고 마음이 화하여 대승이 되는 것(圓證三觀心化大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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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58_b_01L객이 묻기를,
“대승은 무슨 심법을 닦는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대승교 가운데 마음 닦는 법이 많으나 간략히 설명할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 정환적삼관靜幻寂三觀이 있으니, 정관靜觀은 일체 모든 소견과 지각과 분별을 쉬고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고요함을 관하는 것이다. 일심으로 지극히 비고 고요함을 관하면, 한 몸만 고요할 뿐만 아니라 한 세계가 고요할 것이니, 깨친 성품도 한 세계에 가득할 것이다. 만일 깨친 성품이 한 세계에 가득하면 한 세계 가운데에서 한 중생이라도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다 아는 것이다. 무수한 세계까지라도 마음이 고요해지면 깨친 성품도 가득하므로 그 세계 가운데에 한 중생까지라도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다 아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 이 관법을 민상징신관泯相澄神觀이라고 하는데, 민상이라는 말은 일체상이 공空하고, 징신이라는 말은 정신을 맑힌다는 말로 일체상이 공하여 지극히 고요한 것을 관하는 것이다. 이 관법을 닦음으로부터 마음이 지극히 고요하여 필경에 본각의 자체를 깨치게 하는 방편인 것이다.
환관幻觀은 지극히 밝은 지혜를 관하는 것이니, 머묾이 없는 마음의 체성으로부터 머묾이 없는 큰 용用이 현전하는 것이다. 먼저 일체 대각성존께서 갖가지 수행하시는 방편점차를 의지하여 일심으로 삼매를 닦으며, 광대한 원력을 일으켜 정각正覺을 성취하기 원하며, 창생을 제도하기 원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 이것을 이름하여 기환소진관起幻銷塵觀이라 하였으니, 그 뜻은 머묾이 없는 환지幻智를 일으키려고 환다운 티끌을 녹이는 것이다. 이것은 큰 용用이 나타나 모든 진뇌망상에 간섭함이 없음을 관하는 법이다. 이것은 한낱 체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용을 구족한 것이다.
또 하나는 적관寂觀이며, 또 중도관이라고도 하는데, 양변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것을 중도관이라 하는 것이다. 정혜定慧와 체용體用을 쌍으로 닦아 가는 것이며, 정혜와 체용이 쌍으로 고요하여 한 점이라도 짐작이 없기 때문에 쌍적관雙寂觀이라 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 이것을 절대영심관絶待靈心觀이라 하니 절대絶待는 체용이 쌍으로 고요하고, 영심靈心은 정혜定慧가 원명圓明하고 체용이 무애無碍하여 무주심체無住心體가 영지불매한 것이다. 체용이 쌍으로 없어 상대가 끊어져 중도中道도 없는 것이며, 체용이 원융하여 중도中道가 완연한 것이니 그러하기 때문에 삼사三事를 뚜렷이 증득하면 곧 원각이라 하는 것이다.
『원각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이 정혜를 닦고자 한다면, 먼저 몸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반듯하게 하며, 호흡식呼吸息을 고르게 하여 예사로 하고 편안히 서서 이 출입식을 헤아리는데 하나, 둘, 셋, 넷 이 모양으로 열까지 헤아리고, 또다시 그와 같이 하기를 일심으로 끊임없이 헤아리면 자연히 산란심이 없어지고, 마음과 경계가 고요하여 점점 더욱 수승하여지는 것이다. 자연히 마음 가운데에 나는 것(生)과 머문 것(住)과 달라지는 것(異)과 멸하는 것(滅)이 역력분명하여 그 수효를 다 알며, 점점 더 증진增進하여 나아가면 백천세계의 빗방울 수효를 역력히 다 알지만, 눈앞에 수용하는 물건 보는 것과 같다’29)고 하셨다.
『화엄경』에는 법계삼관法界三觀을 닦는 법이 있으니, 첫째는 참으로 공空하여 일체형상이 끊어짐을 관(眞空觀)하며, 둘째는 이사理事가 걸림 없음을 관하며(理事無礙觀), 셋째는 진법계성眞法界性이 천지 세계天地世界와 허공만유虛空萬有의 일체 세간법에 두루 변만하여 낱낱이 머금어 용납함을 관하는(周遍含容觀) 것이다.
또 천태산 지자(天台智者) 성사께서 『법화경』을 의지하여 공가중空假中 삼관을 제정하였으니, 첫째는 자성이 공함을 관하는 것(空觀)이며, 둘째는 연기차별을 관하는 것(假觀)이며, 셋째는 양변에 분별이 없음을 관하는 것(中觀)이다.
또 오묘한 관법이 있으니 반문문성反聞聞性하는 것이니 중생이 귓불(耳根)로 일체의 소리를 듣거든 그 소리로 쫓아가지 말고, 소리 듣는 놈을 돌이켜 간단없이 일심으로 정진해 가면 자연히 원통경계(圓道境界)를 증득하는 것이다. 삼장경전에서는 다 관법으로써 마음 닦는 공부를 삼는 것이니, 그 관법이 많지만 대강 몇 가지만 기록하였다.”
제41. 한갓 경전만 독송하고 관법을 닦지 않으면 마침내 이룰 이치가 없는 것(徒誦經典不修觀法終無成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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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60_a_01L요사이에 경전을 보고 읽고 설법이나 한다면서, ‘내가 화엄종이다, 법화종이다’ 하니 참으로 가소롭다. 그러면 세상에 문장이라도 다 도덕성인이 될 것인가? 만일 참다운 화엄종이라고 한다면 『화엄경』을 보기도 하겠지만, 첫째 법계삼관을 닦아야만 참다운 화엄종이라고 할 것이며, 만일 참다운 법화종이라고 한다면 공가중삼관空假中三觀을 닦아야만 할 것이다. 『원각경』이나 모든 경전에 다 그 가운데 관법이 있으니 그 경을 따라서 관법을 닦아야만 할 것이다. 만일 관법을 닦지 아니하고 경전만 보고 지껄이는 것은 봄새와 가을벌레와 같아 풍력에 끌린 것이 되는 것이다.
요사이 법사들이 염불을 권하는 것을 보니 성호를 입으로 부르짖어 외우면 염각念覺이라 하는데, 그 글자는 생각한다는 글자가 분명하고, 불佛을 외우라고 하는 글자는 아니다. 정당히 불을 생각할 때에 입불관立佛觀을 하든지 백호관白毫觀을 하든지 일몰관日沒觀을 할 것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분명하니 자세히 보고 할 것이다. 이 위에 성호를 생각하는 법을 말하였으니 자세히 보고 할 것이다. 나는 본시 교종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요점만 취하여 간략히 설명하였다.
대각성인이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시어 식심관識心觀을 타파하고 대원각을 깨쳐서 법계진리를 통달케 하였으니, 어찌 입으로만 지껄이고 외우는 것으로 도를 삼았겠는가? 중생을 정도로 인도하지 아니하는 법사는 중생의 일대사 인연을 크게 낭패시키는 것이니 그 죄가 많을 것이므로 부디 신중히 할 것이다.
대개 이 마음공부(心功)는 관법이 아니면 금강보다 더 견고한 중생의 무명업식을 어찌 타파할 것인가? 이 공부는 총명지식과 문장지혜와 온갖 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며, 말 잘하는 변재로 할 수도 없고, 모든 신통과 지혜로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다 성전 가운데에 그 마음공부를 닦는 관법이 한량없지만 간략히 설명하였다.
제42. 진흙을 씻어 희게 하는 것은 마침내 그 이치가 없는 것(洗泥成白終無其理)
- 0001_0060_b_01L가령 시방세계 모든 대중이 연단煉丹 공부를 하여 신선이 된다고 하여도 대원각성을 깨치지 못하면 생사윤회를 면치 못하여 필경에 타락하는 것이다. 모든 대중이 신선과 사선팔정四禪八定을 닦아 모든 하늘에 난다 하여도, 우리의 본원성을 깨치지 못하면, 도리어 타락하여 고해에 윤회함을 면치 못하는데, 우리가 닦는 도는 절대로 천당 가기를 원치 아니하며 신선 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바람을 부르고 비를 오게 하고(呼風喚雨), 산을 옮기고 바다를 건너(離山渡海)는 술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제43. 마음을 밝히어 도를 통달하여 마침내 정각을 성취하는 것(明心達道終成正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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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61_a_01L우리는 다만 본래 스스로 구족한 대원각성을 깨쳐 영겁에 생사고해를 면하고 천상 인간에 큰법왕이 되어 널리 중생을 제도(廣濟衆生)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이 마음공부(心功)하는 관법으로 적겁積劫에 혼미한 무명번뇌를 타파하고 무량한 신변조화가 사람사람마다 구족하여 육식六識을 돌이켜 육신통을 삼으며, 탐·진·치를 돌이켜 계戒·정定·혜慧를 삼으며, 대지를 변화하여 황금으로 만들며, 장하長河를 저어서 소락제호酥酪醍醐를 삼는 것이 다른 술법이 아니라, 우리의 본연성의 본래 갖춰 있는 본능인 것이다.
영가永嘉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섯 가지 신기한 용用이 공空하지만 공이 아니요, 하나 둥근 광명이 빛나지만 빛이 아니로다. 다섯 눈을 깨끗이 하고 다섯 힘을 얻는 것은 오직 증득한 사람만이 알 것이고, 타인은 헤아리지 못한다.”30)라고 하며, 또 말씀하시기를 “삼신사지三身四智가 본체 가운데 둥글고, 팔해육통八解六通이 심지心地에 도장을 찍는다(印).”31)라고 하였다.
대원각을 깨친 자는 수미산을 겨자 속에 넣지만, 겨자도 증감增減이 없고 수미산도 본상本相이 옛날 그대로 변함이 없으며(依舊), 사천왕천四天王天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이 다 들어감을 알지 못하고, 오직 원각을 깨친 자만이 아는 것이다. 우리의 원각성에 구족해 있는 신통을 말하면 일겁 이겁이라도 다 말하기 어려운데, 내가 성인의 말씀을 의지하여 믿을 만큼 말한 것이다. 한량없는 보배가 내게 있는 것을 누구에게서 구하려 하는가? 부디 어리석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44. 교의 바다에 현현한 글귀를 촬요하여 밝게 가리는 것(敎海玄句撮要明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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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61_b_01L객이 묻기를,
“삼장교해三藏敎海 가운데 가장 오묘하고 가장 현현한 글귀를 듣기 원합니다.”
용성이 웃으며 말하기를,
“깨친 자는 모든 말씀(言言)이 오묘한 법이지만, 미혹한 자에게는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다 망견이 될 것이고, 깨친 자에게는 세간과 출세간법이 다 오묘한 법이 되는 것이다. 꿈 가운데 있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다 꿈이요, 꿈을 깨어난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다 꿈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간략히 말할 것이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눈이 잠을 쫓지 아니하면 모든 꿈이 저절로 없고, 마음이 다르지 아니하면 만법이 허물없다’32)고 하니 깨끗이 정신을 가다듬어 들어야 할 것이다.
주먹을 들고 묻기를 ‘보는가?’
땅을 치고 말하기를 ‘듣느냐?’
‘듣고 보는 것이 이 무엇인가?’
‘만일 깨치면 참으로 현현하고 오묘하니라.’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상을 취하지 아니하면 여여如如하여 요동치 아니한다’33)고 하며, 또 말씀하시기를,
‘만일 얼굴과 빛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 불러 나를 구求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라.
대각을 볼 수 없는 것이다.’34)
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이 꿈 같고 꼭두각시 같으며,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우레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이와 같이 관하라.’35)
라고 하며, 또 말씀하시기를,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 마음도 들을 수 없다’36)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대각께서 만일 말씀하신 것이 있다 하여도, 나의 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대각께서 만일 말씀하신 것이 없다고 하여도 나의 말을 알지 못함이다’라고 하며, 또 말씀하시기를, ‘정한 법 있음이 없는 것이 대각의 말씀이며, 정한 법 있음이 없는 것이 아뇩보리이다’37)라고 하시니 이것을 깨치면 참으로 미묘하니라.
또 『능엄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을 가히 돌려보낼 곳이 있는 것은 자연히 네가 아니지만, 가히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네가 아니고 누구냐?’38)고 하시며, 또 말씀하시기를 ‘참다운 지견知見에 망견妄見을 세우면 이것이 무명의 근본이요, 참다운 지견에 망견이 없으면 진견眞見이라고 이름한다’고 하며, 또 말씀하시기를 ‘비유하자면 허공의 자체自體가 여러 가지 형상이 아니지만, 모든 물상物相을 건립할 수 있는데, 사람의 본성도 이와 같다’고 하며,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본성은 인연因緣도 아니고, 자연自然도 아니며, 인연 아닌 것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것도 아니니, 일체상을 여의고 일체법에 상즉(卽)하였다’39)고 하시니 이것을 깨치면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또 『원각경』에 말씀하시기를, ‘환幻인 줄로 알면 곧 여읠 것이니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幻을 여의면 곧 각이니, 또한 점차漸次가 없다’40)고 하시며, 또 말씀하시기를, ‘대각께서 원각을 닦는 것이 허공의 꽃과 같은 줄 알면 또한 몸과 마음이 생사를 받을 것이 없으니, 일부러 지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41)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허공이 아니라 허공의 본성인 까닭이며, 항상 요동치 아니하고 대원각성이 괴멸이 없는 까닭이며, 지견이 없는 까닭이며, 법계성과 같아서 구경에는 원만하여 시방에 두루한 까닭이다’42)라고 하시며, 또 말씀하시기를, ‘일체시一切時에 있어 망념을 일으키지 말고, 저 모든 망령된 마음을 또한 쉬어서 멸하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망상경계에 머물러 알음을 더하지 말고, 저 알음이 없는데 진실을 가리지 말라’43)고 하시니 이것을 깨치면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과거 전체가 이 법을 설하며, 현재 전체가 이 법을 설하고, 미래 전체가 이 법을 설하며, 국토가 이 법을 설하고, 중생이 이 법을 설하며,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초초花花草草 모든 것이 이 법을 설하는데, 마땅히 일진법계의 성품을 보라. 십법계등十法界等과 일체의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일진심一眞心의 대광명체가 지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제45. 식을 굴려서 지혜를 이루는 것(轉識成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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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62_b_01L객이 묻기를,
“삼계에 윤회하는 것이 다 심식心識이 환변幻變한 것이므로 천형만태를 추출하는데, 어떻게 수행하여야만 해탈할 것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대해 바다를 건너고자 하면 배를 타는 것과 같아서 방편을 빌리지 않으면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대가 눈을 뜨면 방方·원圓·장長·단短과 청靑·황黃·적赤·백白 모든 형상을 낱낱이 보며, 눈을 감으면 오직 캄캄하게 어두운 것을 보는데, 이 두 가지 보는 놈을 돌이켜 보되 일심으로 관하기를 마지아니하면, 밝고 어두운 것과 모든 형상이 텅 빈 것을 볼 것이다. 이 텅 빈 것을 보는 놈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다 끊어져 언설과 마음으로 그려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이 제 눈을 보지 못하고 칼이 제 몸을 베지 못하며, 물로 물을 씻지 못한 곳에 또다시 한번 나아가면 묘색妙色인 진공眞空과 진공인 묘색이 상주불생常住不生하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하여,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며, 주장자는 다만 주장자이다. 따로 그대에게 가르칠 것이 없노라.
그러나 또다시 오묘한 것이 있으니 각체覺體인 진공眞空과 각체인 묘유妙有가 동시에 원만한 것이 허공에 해와 달이 병존幷存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불러 진공묘지라 하고, 무엇을 불러 본원각체라고 할 것인가? 모든 명상이 없는 가운데 명상을 말한 것이다.
또 움직이는 소리와 고요한 소리 두 가지를 듣는 것이니, 어떠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인가? 밖으로 바람 소리, 물소리, 사람 소리, 새소리와 무슨 물건이 서로 부딪쳐서 나는 소리와 모든 한없는 소리가 다 움직이는 인연으로 나기 때문에 움직이는 소리라고 한다. 그리고 일체 소리에 반연치 않고 고요히 듣는 놈을 돌이켜 보면, 귓속에서 물 내려오는 소리가 나는 것이니 이것을 고요한 소리라고 할 것이다. 또 자세히 관하여 보면 지극히 고요함을 알리는데 이것이 고요함을 듣는 것이다. 밖으로 일체 소리 듣는 놈과 안으로 고요함을 듣는 놈을 돌이켜 관해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동적강銅赤江(한강)이 금강산에서 내려와서 서해 바다로 가는 것이니, 그 물이 나오는 근원을 알고자 한다면 동적강을 따라서 서해 바다로 가지 말고, 그 물을 거슬러서 뚝섬 쪽으로 쉬지 않고 올라가면 저 금강산 골 어느 곳에서 나오는 것을 자연히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일체의 소리를 듣는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 말고, 그 듣는 놈을 거슬러 돌이켜 관하여 보면 자연히 이것이 텅 빈 곳을 깨칠 것이니 이 빈 것이 그 깨친 자에게 도리어 경계가 될 것이다.
이 빈 것을 깨쳐 볼 수 있는 놈을 다시 돌이켜 관하면, 관할 수 있는 놈과 관할 대상이 되는 놈과 이 두 가지가 확연히 공하여 이변삼제二邊三際와 중도中道가 다 없어질 것이다. 이 가운데에 다시 한 걸음 나가면 깨우침이 이 위에서 눈 뿌리를 돌이켜 깨친 것과 같은 것이다. 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돌이켜 관할 것이니, 이미 지나간 것을 그림자(影子)로 반연하는 것과 현재에 모든 것을 반연하는 것과 미래에 오지 못한 것을 반연하는 생각을 돌이켜 일심으로 관하여 들어가야 할 것이다.
대체로 의식意識이 모든 선악을 분별함이 없으면, 곧 정신이 흐릿하여 무기無記하는데, 항상 그 근원을 돌이켜 일심으로 관하면, 일어나는 생각과 멸하는 생각이 텅 비어 허공과 같이 될 것이다. 그 허공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놈을 다시 돌이켜 일심으로 관하면 주체와 대상(能所)이 없을 것이다. 이곳에 다시 한 걸음을 나서면 위에서 말한 눈 뿌리(眼根)를 돌이켜 깨친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이제 이 육근 가운데 눈 뿌리와 귀 뿌리(耳根)와 뜻 뿌리(意根)에 공부하는 세 가지 법만 말하고 나머지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 세 가지 공부하는 법에 인연대로 한 가지만 돌이켜 공부하면, 자연히 십팔계十八界를 해탈하고 위없는 도를 성취할 것이다. 10년에서 30년까지를 한정하고 일심으로 관법을 닦으면 반드시 도를 통하지 아니할 자가 없을 것이다.”
객이 묻기를,
“육조 혜능六祖慧能 성사께서 객이 『금강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깨치고, 또 5조 홍인弘忍 성사께서는 『금강경』 설함을 듣고 다시 두 번 깨쳤다 하시니 그것이 어찌함인가요?”
용성이 급히 주장자를 들고 묻기를,
“그대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객이 주저하였는데, 용성이 벼락 같은 소리로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여기에서 의논하고자 하면 곧 어겨지는 것이다.”
객이 말하기를,
“지혜가 암둔하여 알 수 없으니 자세히 분석해 주십시오.”
용성이 말하기를,
“이것을 어떻다고 분석하겠는가? 그러나 그대를 위하여 분별할 것이다. 본래 법은 깊고 얕음(深淺)이 없지만 중생의 근성이 차별이 있기 때문에 깊고 얕음이 있는 것이다.”
다시 주장자를 들고 물어 말하기를,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객이 대답하기를,
“있는 것입니다.”
용성이 곧 불을 가져다가 주장자를 불살라 가루를 만들어 놓고 부채로 확 부쳐서 날아가게 해버리고 다시 묻기를,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객이 그제야 주장자가 없음을 깨치고, 산하대지 만상삼라가 없음을 깨치며, 자기의 육신이 없음을 깨치고, 육진·육근·육식과 칠식이 없음을 깨쳐 아공진여我空眞如를 알고 다시 물어 말하기를,
“이밖에는 다시 없습니까?”
라고 하였는데, 용성이 다시 주장자를 들고,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객이 그제야 바야흐로 주장자가 환幻으로 있음을 깨달으니, 만상삼라도 그러하며 세간 출세간법이 다 그러하여 환으로 있는 것을 깨치고 다시 물어 말하기를,
“내가 일체법을 가만두고 다 환으로 있음을 깨쳤으나, 나의 깨친 곳이 철저히 나머지가 없이 다 깨친 것인가 의심됩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깨친 것은 소승의 아공진여를 깨친 것이고, 두 번째 깨친 것은 연각의 십이인연이 환으로 있음을 깨친 것이다.”
객이 말하기를,
“다시 듣기를 원합니다.”
용성이 다시 주장자를 들고,
“이것이 있는 것인가?”
객이 다시 주장자는 곧 공空한 것이며, 공이 곧 주장자이어서 상相과 공空이 둘이 없으며, 또 본래 한 물건도 그대에게 바칠 것이 없어 이러함도 얻을 수 없고, 이렇지 아니함도 얻을 수 없으며, 이렇고 이렇지 아니함을 다 얻을 수 없음을 크게 깨쳐서 손을 흔들며 말하기를,
“이밖에 무슨 도리가 다시 있나요?”
용성이 말하기를,
“이것이 옛날 육조 성사가 『금강경』에 ‘마땅히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내라(生)’는 말씀을 객에게 듣고, 본래 한 물건도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만일 교리로 말한다면, 능소가 없고 체용이 끊어져 아我가 공하고 법이 공하며, 이 두 가지가 함께 공함을 증득한 것이다.”
객이 다시 물어 말하기를,
“이밖에는 다시 또 없는 것인가요?”
용성이 주장자를 들고 물어 말하기를,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객이 다시 크게 깨어 말하기를,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요, 주장자는 다만 주장자입니다.”
라고 하고 우레 같은 소리로 크게 한번 외쳤다. 그러자 용성이 말하기를,
“좋은 할喝이로다.”
객이 소매를 떨치고 나가거늘, 용성이 불러 말하기를,
“이것이 육조가 5조 홍인 선사(弘忍聖師)께서 ‘마땅히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아 말하기를, ‘자성이 본래 청정하고, 본래 생멸이 없으며, 본래 구족하고, 본래 요동치 아니하며, 만법을 낼 수 있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니 홍인 성사께서 크게 인가하신 것이다. 그대의 깨친 것이 곧 이것이니, 의심치 말아야 할 것이다.”
객이 다시 말하기를,
“후인을 위하여 한 말을 묻고자 합니다. 이것이 경전의 가르침으로 말하면 어찌된 것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법화경』을 설하실 때에 먼저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를 보이시니, 이것은 우리의 본연청정한 일진법계성一眞法界性을 보인 것이다. 백호상광白毫相光이 동방으로 만팔천세계에 비치는 것은 백호白毫는 본각묘명本覺妙明을 표시한 것이고, 상광相光은 일승묘지一乘妙智를 표시한 것이며, 만팔천세계는 십팔계十八界를 표시한 것이고, 동방은 부동지체를 표시한 것이며, 위로는 아가니타천阿迦尼陀天44)에 비치고 아래로는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비치는 것은 법계에 뚜렷이 사상事相을 나투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一)와 많은 것(多)이 걸림이 없는 것과 원근이 걸림이 없는 것과 많고 적은 것이 걸림 없는 것과 사사事事가 걸림 없는 법계를 보이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모든 것이 적멸한 모양은 말로 펼 수 없도다. 이 법이 법위法位에 머물러 세간상이 항상 머문다’고 하시니 이 말씀은 일체의 세간상世間相이 상주불생常住不生하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객이 또 묻기를,
“모든 법이 공하고, 또 그 공하는 것도 공한 것도 공하며, 또 한층 짐작이 없는 것이니, 그 공하여 짐작이 없는 것이 우리의 성품이 아닌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일체중생이 상에 집착하여 집착함이 견고하기 때문에 모든 상이 공함을 설하여 인아사상이 공함을 깨치게 하는 것은 속히 삼계고해에서 벗어나게 하는 까닭이며, 소승들이 공견空見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 공견법을 타파하여 법공성法空性을 증득케 하는 것이다. 또 그 법공에 집착할까 하여 또 아공과 법공도 다 없는 것을 증득하게 하며, 또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앉아 일체 대각도 죽이며, 일체 조사도 죽이며, 그곳에 앉고 다시 한걸음을 나서지 못하기 때문에 또 반자교半字敎를 배척하고, 원자교圓字敎를 설하시니, 이른바 모든 것이 상주불생하고 상주불멸함을 보이는 것이다.”
객이 묻기를,
“원자교는 무슨 말이며, 반자교는 무슨 말입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반자교半字敎라는 것은 일체법이 떳떳함이 없고 즐거움이 없으며, 내가 없고 깨끗함이 없다고 하는데, 이것을 비유하자면 하늘 ‘천天’ 자를 쓰는 사람이 두 ‘이二’ 자만 써 놓고 사람 ‘인人’을 쓰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에 반자교라 하고, 원자교圓字敎는 일체법이 참으로 떳떳하고 참으로 즐거우며, 참되고 참으로 청정하다는 말이니 이것은 두 ‘이二’ 자에 사람 ‘인人’ 자를 더하여 온전히 하늘 ‘천天’ 자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다.”
객이 말하기를,
“명상名相을 지어 말하자면, 어떤 것이 나의 성품이 되고 빌 ‘공空’ 자가 적당합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요즘에 다분히 견성하였다고 하는 자들이 다 비고 비인 것을 주장하여 말 못하고, 마음으로 여길 수 없이 짐작 없는 것으로 견성하였다고 하지만, 우리 교는 그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물 가운데 짠맛이 있지만, 제대로 두고는 짠 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짠 형상이 없으며 명자도 없는 것이니, 짠 것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공하여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 바닷물의 전체가 온전히 짠 것이다.
우리 성품도 이와 같아서 일진심이 곧 각(一眞心卽覺)이고, 각이 곧 일진심이니 각覺인 진공眞空과 진공인 각이 법계 전체法界全體이어서, 상주불생하고 상주불멸한 것이다. 각을 여읜 진공이 없고 각을 여읜 묘유가 없는 것이다. 어느 때에는 진공을 먼저 설하고 묘유를 뒤에 설할 때도 있으며, 어느 때에는 묘유를 먼저 설하고 진공을 뒤에 설할 때도 있으며, 어느 때에는 진공과 묘유를 쌍雙으로 놓을 때도 있으며, 어느 때에는 진공묘유를 쌍으로 거둘 때도 있는 것이다.
우리 대각교에서는 다만 빈 성품을 깨친 것으로 견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각체를 말하자면 삼계 모든 대각이라도 입을 벽 위에 거는 것이니, 지혜와 식으로 어찌 미치겠는가? 그대가 누누히 묻기 때문에 내가 명백하게 설명하지만, 나의 허물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다시 비유로 한마디 말할 것이다. 허공에 해와 달이 뚜렷이 밝은 것과 같으니 각은 허공의 본체에 비유하고, 달과 해는 진공묘지眞空妙智에 비유하니 아무리 허공이 광대하다고 하여도 해와 달이 없으면 흠이 되고, 아무리 해와 달이 밝다고 하여도 허공이 없으면 용납하지 못한다. 우리의 도道도 그리하여 각체인 진공묘지가 원만무애한 것이다. 그러하므로 대각께서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를 뚜렷이 증득하기 때문에 원각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객이 묻기를,
“마음공부(心功)를 하더라도 지혜로써 번뇌무명을 타파해야만 자성을 깨치는 것인가요?”
용성이 말하기를,
“지혜로써 무명을 타파하고자 하는 자는 소승의 소견이니 만일 자성을 깨친 자는 번뇌가 즉시 보리菩提이어서 본래 청정하여 둘이 없는 것이다.”
객이 말하기를,
“선정과 해탈을 닦지 않으면 어찌 견성할 도리가 있을 것입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육조의 말씀과 같아서 오직 각성만 의논할지언정 선정과 해탈을 의논치 말아야 할 것이다. 선정과 해탈은 두 가지 법이어서 각覺의 진리가 아니다. 대각의 법은 둘이 아니니 비유하자면, 장강과 대해의 파도가 굼실굼실(溶溶)하지만 천파만파가 낱낱이 물이고 물이 낱낱이 파도이어서 원래 둘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비유하자면 물의 젖는 성품과 같아야 흘러가든지 파도치든지, 맑든지 탁하든지 젖는 성품은 둘이 없으며, 물이 맑고 탁함은 있을지언정 젖는 성품은 다르지 아니한 것이다.
우리의 오온과 십팔계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 있는 자는 그 성품이 둘이 없음을 요달하는데, 둘 없는 성품이 곧 참다운 성품이라고 육조 성사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다.”
각해일륜覺海日輪 제3권
수심정로修心正路
제46. 시삼마是甚麽 화두話頭에 병을 간택揀擇함(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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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66_b_01L대체로 마음을 닦는 도인들은 먼저 공부길을 자세히 간택하여 바른 길을 얻어야 헛고생(苦相)을 아니하고 탄탄대로로 걸림 없이 갑니다. 수도인修道人들은 자세히 들어 보시오. 사람사람마다 한 물건이 있으니 천지와 허공을 온통 집어삼키어서 있고, 또 가는 티끌 속에도 작아서 차지 아니 합니다. 밝기는 백천 일월百千日月과 견주어 말할 수 없고, 검기는 칠통漆桶과도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물건은 우리가 옷 입고 밥 먹고 잠자는 데 있지만, 이름을 지을 수 없고 얼굴을 그려 낼 수도 없습니다. 이는 곧 마음도 아니고 마음 아닌 것도 아니며,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님도 아니며, 불佛도 아니고 불 아님도 아니며, 하늘도 아니고 하늘 아님도 아니며, 귀신도 아니고 귀신 아님도 아니며, 허공도 아니고 허공 아님도 아니며, 일물一物도 아니고 일물 아님도 아닌 것입니다. 그가 갖가지 여러 가지가 아니지만 갖가지 여러 가지를 건립建立할 수 있는데, 지극히 밝고 지극히 신령하며, 지극히 비었으며,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가늘며, 지극히 강强하며 지극히 부드럽습니다(柔).
이 물건은 명상名相이 없으며 명상 아님도 없도다. 이 물건은 마음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고 마음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며, 언설言說로도 지을 수 없고 고요하여 말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의심하고 또다시 의심하되, 어린아이가 어머니 생각하듯이 간절히 하며, 닭이 알을 품고 앉아 그 따듯함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같이 하면, 참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칩니다.
수도인修道人들은 또다시 나의 말을 들어 보시오. 우리가 공부 닦는 것은 삼장三藏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에 상관이 없고, 오직 대각大覺께서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반좌半座를 나누시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으시며, 사라쌍수간婆羅雙樹間에서 관棺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셨으니, 이것을 전하여 오는 것이 우리가 믿어 행하는 것입니다. 출격장부出格丈夫들이 안다면 곧 알 것이겠지만, 모른다면 의심하여 보시오. 사리불舍利弗과 같이 지혜 있는 사람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티끌 수와 같이 많은 상사上士라도 조금도 알지 못하며, 삼세三世 모든 대각大覺도 이 물건을 알지 못하는데,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모든 도인들은 알거든 내어 놓으시오, 모르거든 의심하여 보시오. 부디 공부하는 도인들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모든 경계境界를 따라가면서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하지 마시오. 또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놈이 무엇인가?’라고 하지 마시오. 또 생각으로 생각 일어나는 곳을 들여다보지도 마시오. 또 화두할 때에 잘되고 못되는데, 이해利害를 취하지도 마시오. 또 고요하고 안락함을 취하지 마시오. 또 공부하다가 마음이 텅 빈 것을 보고 견성見性하였다고 하지 마시오. 이 물건은 모든 각覺의 말도 미치지 못하고, 모든 팔만경전八萬經典에도 그려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이와 같이 의심하시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어떠한 이유(因由)로 ‘보고 듣는 놈이 무엇인가?’라고 하지 말라 하며,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놈이 무엇인가?’라고 하지 말라 하며,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보지 말라’고 합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육근六根이 경계를 대함에 그 아는 분별이 나타남이 한정이 없는데, 그 허다한 경계를 따라가면서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찾으면, 그 마음이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그 화두도 일정一定한 것이 아니니라. 그렇게 하다가 혹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아는 놈으로 자기自己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잘못 알기도 쉽다. 그렇지 아니하면 고요한 것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삼기도 쉽다. 그렇지 아니하면 공空한 것으로 본성을 잘못 알기도 쉽다. 그렇지 아니하면 맑은 것으로 자성을 깨쳤다고 하기도 쉽다.
마음이 스스로 내가 소소영영하다고 하지 아니하는데, 무슨 일로 소소영영하다고 하는가?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서 비추어 들여다보지도 말라. 혹 맑은 생각으로 맑고 맑은 곳을 보아 그곳에 집을 짓고 들어앉기도 쉽다. 설혹 일념당처一念當處가 곧 공함을 깨칠지라도 확철대오確徹大悟가 아니니라.
육조六祖께서 말씀하시길,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로 땅을 괴였으며 밝은 것은 해와 달 같고 검기는 칠통과 같아서 항상 나의 움직이고 고요한(動靜) 가운데에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45)라고 하시며, 또 육조께서 회양懷讓을 대하여 묻기를 ‘무슨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가?’46)라고 하셨는데, 회양이 알지 못하여 8년을 궁구하다가 확철대오 하였으니, 이것이 화두하는 법이다.
이 물건은 육근六根으로 짜여 만들어진(構造) 놈이 있든지 없든지에 상관이 없이 항상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상관없이 항상 있다. 공하고 공하지 아니한 것이 상관이 없이 항상 있다. 허공은 없어져도 이 물건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밝은 것은 무량한 해와 달과 견주어 볼(比準) 수 없다. 검은 것은 칠통과 같다고 할 수 없다.
참으로 크도다! 천지 세계世界와 허공을 다 삼켜도 삼킨 곳이 없다. 참으로 작은 것이다! 가는 티끌에 들어갔지만 그 티끌 속에도 보이지 아니한다.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단지 의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추호秋豪라도 달리 아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단지 의심이 큰 불덩어리같이 의심만 하여야 할 것이다. 단지 은산철벽銀山鐵壁같이 하여 발붙이지 못할 곳을 향하여 뚫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묻기를,
“천지와 허공을 온통 집어먹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 나의 본원本源 각성覺性이 아닙니까? 나의 참마음이 아닙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너의 알음알이(知解)가 아닌가? 네가 참으로 증득證得한 것인가? 비유하자면 어떠한 사람이 서울을 보지 못하고, 서울을 본 사람에게 서울 일을 들어 보았다고, 그 서울을 자세히 본 사람은 서울을 본 말을 자세히 하니, 그 서울을 안 본 사람이 서울에 남대문이 어떠하고, 종로가 어떻고, 대궐이 어떻다고 하는 말을 들어서 알았다. 그러면 그것이 서울을 직접 본 것이 되는가?
성인聖人이 마음이니 성품이니 말씀하시니, 그 말만 듣고 그 말만 옮기면 성인이 되는 것인가? 본성이 어느 때에 내가 본성本性이라고 말하던가? 이것은 사람이 명상을 지어서 마음이다, 성품이다라고 여러 가지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명상을 짓기 전에는 무슨 물건인고? 네가 궁구窮究하여 진실로 깨치며, 진실로 증득해야만 될 일이 아닌가? 이 일은 말로 지어내 꾸며도 될 수 없고 말이 잠잠하여 고요한 것으로도 될 수 없으며, 있는 마음으로도 될 수 없고 없는 마음으로도 될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궁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성현도 알지 못한다 하는데, 너의 아는 것(識)으로 알 수 있는가? 그 의미意味가 깊도다! 모든 성현이 참으로 몰라서 모른단 말도 아니고 알아서 안다는 말도 아니니, 그대가 이 물건을 아는가? 이것은 물건도 아니므로 말로 그려 낼 수 없다.
이 물건을 아는가? 이것은 그려 낼 수 없다고 하나 깨친 자는 분명하다. 비유하자면 저기 철로鐵路가 있고, 철로 위에는 차車가 있으며, 차에는 화통火桶이 있고, 화통 속에는 석탄石炭과 물이 있어서 물이 자꾸만 졸아 갑니다. 그러나 차는 가지 않소. 어찌하여 차가 가지 않는가? 사람이 기계를 부리지 아니하면 차는 가지 않는 것이오. 예,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 몸을 가지고 동작動作하여 앉고 눕고 다니는데, 몸이 동작할 수 있는가요? 예, 그렇지 않고, 저 차와 같은 것이오.
그러면 무엇이 동작을 하는가요? 그것은 나한테 물을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몸을 운동시킬 수 있는 것을 찾아보시오.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의심하여 보시오. 어찌 내가 나를 알지 못하시오? 내가 열성熱誠으로 권하노니, 부디 찾아보시오. 몸은 아침이슬과 같고, 목숨은 서편에 다 넘어가는 햇빛과 같소. 어서 찾아보시오.”
제47. 화두話頭가 좋은 화두가 있다 함을 간택함(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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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69_a_01L어떠한 사람이 묻기를,
“화두가 좋은 것이 따로 있다지요?”
용성龍城이 말하기를,
“그런 말씀 하지 마시오. 화두가 어디 좋은 화두가 있단 말이오?”
“내가 시삼마是甚麽(이뭣고)는 무 자無字만 못한 줄로 알았소.”
용성이 말하기를,
“다시 그런 사견邪見을 일으키지 마시오. 좋고 나쁜 것은 사람에게 있고 화두법에는 없소. 용성이 지금으로부터 과거(距今) 40년 전에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사방에 다녔으니 그 행색行色은 떨어진 옷을 입고 걸식(幣衣乞食)을 하지만, 나의 직분에는 만족하였다. 맑은 하늘(晴天)에 나는 학鶴과 같이 흰 구름(白雲)으로 벗을 삼고, 사해팔방 돌아다니니 청풍명월이 나의 집이었다.
한 선지식을 친견하고 법을 물으니 그 선지식이 말하기를, ‘시삼마 화두는 사구死句고, 무자 화두는 활구活句이다’라고 하였는데, 용성이 정색하고 대하여 말하기를,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이치理致는 만무합니다. 시삼마는 사구도 아니고, 활구도 아닌 줄로 아옵니다.’
시삼마 화두가 사구로 확정確定될 것 같으면, 남악 회양 성인南岳懷讓聖人이 숭산崇山으로부터 왔는데, 육조 성사六祖聖師께서 물어 말하기를, ‘네가 어디에서 왔느냐?’ 회양께서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하여(罔知所措) 8년을 궁구하다가 확철대오하여 육조 성사의 적자嫡子가 되시니 도道가 천하에 으뜸이라. 어찌 사구에서 깨치시고 활구 문중門中에 동량棟樑이 되리오?
시삼마가 활구로 확정될 것 같으면, 육조 성사께서 하루는 이르시기를,
‘내가 한 물건이 있으되 천지에 기둥(柱)이 되고 해와 달같이 밝으며, 칠통같이 검으며 두미頭尾와 면목面目이 없지만 오인吾人의 동용중動用中에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하시니 하택 신회 선사(荷澤神會師)는 나이가 칠 세였는데 곧 나와 정례頂禮하고 대답하기를, ‘삼세각三世覺의 본원本源이요, 신회의 각성覺性입니다.’
육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사관을 머리에 쓰고, 학자學者를 제접提接할지라도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시니, 어찌 활구문 중에서 깨치고 사구문 중에서 지해종도가 되겠습니까?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선지식이 말하기를 “시삼마는 병통이 많다.”고 하였는데,
용성이 말하기를,
“무슨 말씀입니까?”
선지식이 말하기를,
“요즘 깨쳤다고 하는 것이 시삼마 하는 사람에게 유독 많더라.”
용성이 말하기를,
“시삼마를 어떻게 알기에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선지식이 대답하기를,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것이다.”
용성이 말하기를,
“무엇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선지식이 말하기를,
“혹 ‘소소영영한 놈이 무엇인가?’ 혹 ‘보고 듣는 놈이 무엇인가?’ 혹 ‘이 생각하는 놈이 무엇인가?’ 하니라.”
용성이 대답하기를,
“가탄可歎, 가탄可歎할 일입니다. 화두를 이와 같이 궁구하는데, 어찌 병통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육근문六根門의 머리에 아는 빛, 그림자 식이 경계를 따라 감각하는 대로 ‘이것이 무엇인가?’ 하며, 또 뜻 뿌리(意根)에 분별하는 그림자 식을 가지고 ‘이것이 무엇인가?’ 하며, 또 생각으로 염念이 일어나는 뿌리(根)를 들여다보며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찾으니, 이것으로부터 병이 많이 납니다.
이 사람은 공한 병이 아니면 맑은 병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것을 지키는 병病이 허다許多합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 어찌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증득證得하겠습니까? 천칠백 화두千七百話頭가 그 참구參究하는 법은 전체적으로 하나이니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시삼마는 한 물건을 알지 못하여 참구하는 것이니, 위에서 이미 말하였기 때문에 그만두겠노라.”
제48. 시삼마 화두가 백천 화두에 근본根本된다 함을 간택함(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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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70_a_01L어떤 사람이 묻기를,
“백천의 화두에 시삼마가 아니 들어가면 화두가 되지 아니한 줄로 생각합니다.”
용성이 대답하기를,
“내가 그 말의 의미意味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 사람이 말하기를,
“‘이 무엇고?’ 하지 아니하면, 무엇을 가지고 의심하리오? 가령 무자無字 화두를 할지라도 ‘무가 무엇인고?’ 하든지, ‘무가 무슨 도리道理인고?’ 하든지, 그렇게 하여야만 화두가 되지요.”
용성이 묻기를,
“누가 화두를 그 모양으로 가르치던가?”
“오늘날(現今) 선지식으로 저명著名한 모모某某가 이같이 가르치나이다.”
용성이 말하기를,
“화두 하는 법도 자세히 모르고 학자學者들을 거느리고 앉아서, 도를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수치羞恥스러운 일이다. 한 장님이 여러 사람을 끌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격으로 화두에 시삼마가 들지 아니하면 아니된다고 하니, 그러면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 하는 사람은 ‘잣나무가 이 무엇고?’ 마삼근麻三斤 화두 하는 사람은 ‘삼 서 근이 이 무엇인고?’ 간시궐乾屎橛 화두 하는 사람은 ‘마른 똥막대기가 무엇인고?’ 하겠구나.
그래서 잣나무와 삼 서 근과 마른 똥막대기를 알지 못하여서 이것을 알자고 ‘무엇고?’ 하는 것인가? 참으로 알자면 산이나 물이나 들이나 일체 만물一切萬物을 다 활구로 알기는 어렵다마는 그렇게 화두를 하는 법은 아니다. 또 네가 무 자를 알지 못하여 ‘무엇고?’ 하는가? 일체 화두에 시삼마를 넣어서 의심을 아니하여도 화두마다 제 화두에 의심이 있는 것이다.”
제49. 무슨 화두마다 본의심本疑心이 있으며 또 병된 것을 가림(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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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70_b_01L시삼마是甚麽는 일물一物의 소이연所以然을 알지 못하여 의심하는 것이니, 이 물건은 천지 허공과 만물을 온통 집어삼키고 있는 물건이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이 물건은 있는 것으로 알 수 없고 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참 없는 물건도 아니며, 일물一物이 아니라고 할 것도 아니고 다만 일물이라고 할 것도 아니며, 일체사의一切思議로 알 것도 아니고 일체부사의一切不思議로 알 것도 아니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이와 같이 다만 의심할 뿐이다.
만일 이 밖에 딴 말과 딴 사상思想이 있으면 병인 것이다. 다만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 자나 시삼마나 백천 화두百千話頭가 의심하는 것과 그 병 되는 것이 한 가지(一般)이다.
무 자는 중국(支那)말, 조선朝鮮말이 다르기 때문에 순전純全한 중국말로 하면,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개유각성皆有覺性 조주인삼도무趙州因甚道無라.” 하는데, 이것을 전제全提라 하고 인삼도무因甚道無 이것은 단제但提라 한다.
또 순전히 조선말로 하자면, “고물고물하는 미물微物이라도 신령神靈한 것을 머금는 것이 다 깨닫는 성품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趙州는 무슨 까닭으로 없다고 하는가? 또 무엇으로 인하여 없다고 하는가?” 하는 것이며, 조선말과 중국말을 섞어 하자면, “준동함령이 다 각성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는 무엇으로 인하여 무라고 이르셨는가?” 하는 것은 단제但提라 하는 것이다.
이 화두는 대각大覺의 말씀으로 보면, “준동함령이 다 대원각성大圓覺性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는 어찌 없다고 하시는가?” 하며, 이로부터 의심이 다 요사이에 선지식들이 많이 말하기를 “어찌 없다고 하는가?” 하든지, 또 “무슨 까닭으로 없다고 하는가?” 또 “무엇을 인하여 없다고 하는가? 어찌 없는가? 어찌 없다고 하는가?” 이같이 하면 다 조주趙州의 뜻을 참구하는 참의사구參意死句가 된다.
조주는 “무엇을 인하여 무라고 일렀는가?” 또 단지 “무무無無라 하였는데, 또 무가 무엇인가” 이와 같이 하면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말과 중국말을 섞어서 하면 활구가 되고, 순전히 조선말로만 하면 참의사구가 된다고 하니, 참으로 그런 말을 마시오.
내가 항상 제방학자諸房學者들이 이러한 말을 함을 대단히 탄식합니다. 알지도 못하고 선지식이 되어 남의 눈을 멀게 하지 마시오. 어찌해서 조선말로 화두를 참구하면 참의사구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씀이오? 쓸데없는 말로 나의 잘함을 자랑하여 타인他人의 모자란 점(短處)을 찾으니 참으로 부끄러운(羞恥) 일입니다.
여보시오, 어떠한 것이 활구가 되고, 사구는 어떠한 것이 사구가 되는 것인가? 모든 학자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는 것은 선지식의 허물이지 학자의 허물이 아니니, 허물이 한량없이 크다고 할 것이오.
활구다, 사구다 하는 것을 내가 비유로 말하겠습니다. 비유하자면 당신이 허공을 허공과 같이 꼭 그려 내겠소?
혹자가 말하기를,
“허공은 비고 통하여 상하변제上下邊際가 없으며, 물을 뿌려도 물이 묻지 아니하고 불로 태워도 불에 타지 아니하며, 바람이 불어도 요동搖動치 아니하니, 이것이 허공이 아닙니까?”
용성이 말하기를,
“허공이 조만早晩간에 그대들에게 내가 여차여차하다고 말하던가? 이것은 그대의 알음알이 뜻으로 허공을 화작化作함이 아닌가? 허공이 그대의 식정識情의 화작을 입었으니, 그렇게 보면 허공의 활면목活面目이 그대의 분별의식分別意識에 화합함을 입어 사구死句가 된 것이다. 이 비유를 자세히 알면 활구사구活句死句가 즉시 판단될 것이다.
무릇 화두에 의정疑情이 큰불덩이와 같아서 참구參究하는 의정疑情 밖에는 추호만큼이라도 달리 아는 생각을 두지 아니하면, 이것이 활구참선이 되는 것이다. 어찌 무無가 무엇으로 인하여 무라고 하는가? 하늘에도 아는 마음이 있으면 사구가 되는 것이다. 또 ‘무가 무엇인가?’ 단지 ‘무’ 하는 것은 아무 데도 못쓰게 하는 것이다. ‘무가 무엇인가?’ 하며 찾는 것은 네가 무 자를 몰라서 그리하는가? 무 자를 알고도 ‘무가 무엇인가?’ 하는가? 백 년 3만 6천 조百年三萬六千朝를 반복返復하여 아무리 찾아도 없을 무 자밖에는 또다시 다른 무 자가 없다.
또 입을 삐죽이 하여 ‘무 무’ 소리를 하고 앉았으니, 생각을 붙들어 매자는 주의注意인가? 무슨 까닭인가? 하필 무 자만 ‘무 무’ 할 것이 없다. 옴唵 자라도 ‘옴옴唵唵’ 하면 되지 아니할까? 내가 이것을 많이 보아 왔다.
무릇 언구言句를 의심치 아니하는 것이 큰 병이니, 큰 의심이 있는 연후에야 크게 깨닫는다고 고인古人이 말씀하셨다.
요사이에 한낱 참선하는 학자가 와서 공부를 묻거늘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본래 무슨 공부를 하였소?’”
그 선객이 대답하기를,
“내가 마음 가운데 무 자無字를 하나 써 놓고 그 무 자를 관觀합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것은 참선이 아니고, 교중敎中에 혹 일몰관日沒觀 백호관白毫觀이 있으니 차라리 그것을 하는 것이 옳지 않소?”
한 선객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유무의 무(有無之無)도 아니고, 진무의 무(眞無之無)도 아니니, 이것이 웬 ‘무’인가? 합니다.”
용성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병나기 전에 약방문을 준비하여 가지고 다니는 것이니, 매우 지혜가 있소.”
그 선객이 말하기를,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이것은 세상 사람이 진실히 공부하여 진실히 깨닫지 못하고, 쓸데없는 알음으로 헤아려 말하기를, ‘조주가 불성이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불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각성覺性이 있다는 말은 영각靈覺이 소소昭昭하단 말씀이고, 각성이 없다는 말은 본래 공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병통을 없애기 위하여 있다, 없다 하는 ‘무無’가 아니라고 배척하는 것이며, 또 혹자들은 유무가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므로, 유무가 없는 것이 참 없는 것이라고 지해知解를 내기 때문에 ‘참으로 없는 무도 아니다’라고 한 것인데, 그대는 병나기 전에 약방문을 가지고 미리 약을 먹는 것이 아닌가?
그대가 미리 그런 생각을 말고 단지 무라 하는 뜻을 알 수 없는 데 나아가 크게 의심하되 일체중생이 다 깨달은 성품 있거늘 어찌 조주趙州는 ‘무’라 하는가? 무슨 까닭으로 ‘무’라 하시는가? 어찌 없다 하시는가? 어찌 없는가? 무슨 뜻으로 없다 하는가? 어떻게 하든지 의심만 할 것이다.”
또한 선객이 말하기를,
“『대혜서장大慧書狀』에 말하기를,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趙州가 말하기를, 무無라 함을 보아야 할 것이다’47)라고 하시니, 이러하기 때문에 ‘무’ 자만 볼지언정 무슨 의정을 하리오?”
용성이 말하기를,
“슬프도다! 세상 사람의 가지가지 병통이 참으로 다 말할 수 없다. 그 무 자를 보라 한다고 하니, 그대의 눈으로 보는가? 마음으로 보는가? 그것은 ‘개에게 각성覺性이 있습니까?’ 조주(州)가 말하기를, ‘무라 하는 것을 의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는 말씀인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話頭는 어떤 스님이 조주께 묻기를, ‘어떤 것이 달마 조사達摩祖師가 서쪽(西)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州) 스님이 말씀하시길, ‘뜰 앞의 잣나무인 것이다’ 하시니, 이 화두 하는 법은 ‘서편에서 오신 달마 조사의 뜻을 묻는데, 무슨 까닭으로 잣나무라 하는가? 또 무엇으로 인하여 잣나무라 하시는가?’ 할지어다.
간시궐乾屎橛 화두 하는 법은 어떤 스님(僧)이 운문雲門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각覺입니까?’ 운문이 말하기를, ‘간시궐이다’라고 하시니, 이 화두 하는 법은 ‘각을 묻는데, 무슨 뜻으로 간시궐이라 하시는가? 다만 무슨 뜻으로 간시궐이라 하시는가?’ 하여야 할 것이다.
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화두 하는 법은 위산潙山이 향암香巖에게 묻기를, ‘네가 부모미생전 면목面目한 글귀를 일러 오너라. 그런 후에야 너와 더불어서 서로 보리라’ 하시니, ‘부모는 나의 고기 덩어리 몸을 낳았을지라도 나의 본래면목은 낳지 못하였으니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 의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러면 내가 전세前世에 개였다가 사람이 되었는가? 사람이 스스로 사람이 되었는가? 의심하여 보라는 말인가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그것을 궁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의 천진 본연면목天眞本然面目은 부모父母가 나를 낳으려(生) 하여도, 낳을 수가 없고 천지가 나를 낳으며, 나를 덮으며 나를 실으려고 하여도 능히 하지 못하는데, 나의 본래 구주인舊主人의 면목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가 낳기 전에 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고? 의심하는 것이다.
또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話頭 하는 법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의심하는 것이다.”
제50. 화두를 참구하는 데 제병통諸病痛을 자세히 밝힘(詳明)(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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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73_a_01L무릇 모든 병은 아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중생의 아는 마음은 파리와 같습니다. 파리가 모든 물건마다 다 옮겨 붙지만 불 끝 위에는 엉겨 붙지 못하는데, 중생의 아는 마음도 이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아는 가운데에서 두 가지 병이 있으니, 하나는 마음이 총명하여 잘 아는 것으로 교묘한 꾀(計巧)를 잘 내며 생각을 잘하여 재주로 도를 알려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법을 입으로 의론하여 ‘알 수 없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알 수 없소’ 하는데, 두 가지 병이 있습니다.
이 아는 것과 모르는 두 가지 병으로부터 네 가지 병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는 병으로부터 유심병有心病을 일으키는 것이니, 혹자들은 ‘눈으로 보고 아는 것(眼識)과 귀로 듣고 아는 것(耳識)과 코로 냄새 맡고 아는 것(鼻識)과 입으로 맛보고 아는 것(舌識)과 몸에 닿아서 아는 것(身識)과 뜻 뿌리(意根)로 분별하여 아는 것(眼識)48) 등 이 여섯 가지 문으로 감각하여 아는 것을 지키라’고 하는 자도 있으며, 혹 ‘소소영영昭昭靈靈으로 도道를 삼으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것이 육근六根의 광영光影을 지키는 것이므로 종놈을 잘못 알아서 상전으로 삼는 것이니라.
혹 ‘공空함을 돌이켜 보라’ 하는 자도 있으며, 공을 증득하는 것으로 도를 삼는 자도 있으니 이것이 다 병이다.
혹 나의 본심本心으로 계행戒行도 지키고 절도 지으며, 불사(聖事)도 하고 모든 복덕福德을 지어야 대각이 된다고 하는 것이니, 우치愚痴한 병이로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나의 본성은 억지로 조작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보아라! 허공은 사람이 만드는 것인가? 우리의 본성을 짓는 것으로 아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네가 아는 마음으로 무량겁無量劫을 이리저리 생각하여 볼지라도 추호도 상관이 없다.
그러면 모르는 마음이 도道인가? 혹자들은 무심無心이 도라고 하여 일부러 무심을 짓되 얼굴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죽이며, 얼굴은 고목枯木나무와 같이 하고 마음은 식어 버린 재와 같이 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이 병이다. 혹자들은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아는 것으로 도를 삼으며, 혹자들은 ‘어느 때든지 마음을 쉬라, 쉬고 쉬어 가면 정념情念이 생겨나지 아니한다’고 한다.
이것은 달마 성사達摩聖師가 중국(支那)에 처음 왔을 때에 2조 혜가 성사慧可聖師께서 밖으로 치구馳求하는 마음을 쉬지 못하여 한없는 총명聰明으로 마음이니, 성품이니, 이치이니, 여러 가지를 설하여 도를 증거하는데, 달마께서 2조 혜가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도를 알고자 한다면, 밖으로 모든 인연을 없애 버리고, 안으로 마음이 헐떡거리지 아니하여 장벽墻壁같이 하여야 도에 들어가리라’ 하시니 혜가께서 달마의 말씀하신 그 자리에서 모든 인연을 쉬고 크게 깨쳤으니, 이것은 혜가의 치구심馳求心을 없애라는 잠시방편暫時方便이다. 진실한 법이 아닌데도 지금 사람들이 마음을 고목枯木나무와 돌덩이같이 만들려고 하니 참 불쌍하도다!
또 맑은 것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도 도道를 삼으니, 이것은 제8식第八識을 지키는 외도外道이어서 각법覺法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탕탕무애蕩蕩無碍하여 마음대로 자재自在히 하라. 생각이 일어나든지 생각이 멸하든지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라고 하니 이것은 자연외도自然外道이어서 각의 도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다 아는 병과 모르는 병의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는 것이니, 학생學生에게 만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식善知識이 잘못 가르친 병이 있는 것이다.
도를 알지 못하거든 남을 가르치지 마시오. 그 죄악이 천지에 용납하기 어렵소. 남의 대사를 그르치게 하니 그 허물이 적지 않소. 요즘에 견성見性한 사람이 많으나 실제로 보면 참으로 없다고 하여도 옳을 것이오. 일시一時에 적은 명리名利를 탐하여 그렇게 하다가는 무량겁 동안 허물이 됩니다.
또 하나는 도를 진실하게 참구하여 진실하게 깨치는 것이 옳거늘 눈치와 말로 알려고 하니 참 어리석소.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진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어찌 눈치로 알고 말로 알며, 문자文字에 있는 언설言說로 알겠는가?
또 하나는 말없이 고요히 하고 잠잠한 것으로 알 수 없소. 나의 진면목眞面目은 적묵寂默도 아니고, 유심이나 무심이나 언어言語나 적묵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진성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묻기를,
“육조六祖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위로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 땅을 기둥하였다’ 하니 천지 사이에 가득히 찼다고 하는 말인지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위로 하늘을 버티는 기둥이 되니 하늘이 이것이 아니면 덮을 수가 없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는 기둥이 되니, 땅이 이것이 아니면 실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천지만 버티겠는가? 온 세계世界와 허공虛空과 법계法界를 온통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이 묻기를,
“무자 화두無字話頭에 열 가지 병이 있는데, 다른 화두도 열 가지 병이 있습니까?”
대답하기를,
“화두마다 있소.”
“그러면 그 열 가지 병을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대답하기를,
“열 가지 병이 아는 것으로부터 있으니, 첫째, 이 아는 한 글자가 도에 장애障碍되는 것이다. 둘째, 이 아는 것으로부터 ‘이것은 이 뜻이다. 저것은 저 뜻이다. 이것은 이 이치다. 저것은 저 이치다’ 하는 병이며, 셋째, 귀로 듣고 마음으로 뜻을 풀어 내어 이리저리 생각하며, 넷째, 이것으로부터 뜻으로 생각하며, 다섯째, 입으로 의론하며, 여섯째, 또 생각할 수 없는 두 가지 병이 있고, 이것으로부터 네 갈래로 병이 있으니, 일곱째, 있는 마음으로 구하고자 하며, 여덟째, 없는 마음으로 얻고자 하며, 아홉째, 말로 하려고 하며, 열째, 잠잠한 것으로 통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열 가지 병이 있으니, 첫째,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아는 것과, 둘째, 참 없음이라고 아는 것과, 셋째, 도리로 아는 것과, 넷째, 뜻 뿌리(意根)로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과, 다섯째,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작깜작하는 곳에 무겁집을 짓고 뿌리를 박는 것과, 여섯째, 말로 장기를 삼아 살아갈 방도(活計)를 짓는 것과, 일곱째, 일 없는 구덩이 속에 있는 것과, 여덟째, 불조의 향상관向上關을 들어 일으키는(擧起) 곳에 받아들여 감당하는(承當) 것과, 아홉째, 문자文字 가운데 인용하여 증거로 삼는(引證) 것과, 열째, 미혹(迷)을 갖고서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 등을 열 가지 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열 가지 병이 경교經敎 가운데에 있으면 법계부사의법문法界不思議法門이 되겠지만, 경전 밖에 따로 전한 것(敎外別傳)으로 보면 큰 병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자세히 가르쳐 주기를 바랍니다.”
대답하기를,
“첫째는, ‘있다, 없다’ 하는 ‘무無’로 아는 병이니, 학자學者의 대병大病은 ‘깨쳤다, 알았다’ 하는데 모든 병이 있는 것이다. 확철確徹히 깨치지 못하면 병이 가득 찬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화두만 참구하는 것이 좋다.
혹 어떠한 사람은 내가 조주께서 ‘무’를 말한 것을 ‘깨쳤다’ ‘어떻게 깨쳤소?’ ‘예, 내가 깨친 것은 각성覺性이 있는 것을 대하여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각성이 있다’고 하는 말은 깨치는 성품이 있다는 말이다. 이 신령하고 참된 성품이 외롭게 드러나 각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일체중생에게 각성이 있다는 말이다. (신령하게 깨치는 성품을 각이라고 한다.)
각성이 없다는 말은 신령하게 깨친 그 당처當處가 본래공本來空하여 한 법도 없는 것이니, 무엇을 마음이니 각이니 성품이니 하는가? 그러므로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용성이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은 불조의 설화문說話門의 입장에서 보면, 병이 될 것 없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큰 병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알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둘째는 참으로 없다는 병이니, 가령 어떠한 사람이 ‘화두를 깨쳤다’ 하거든 곧 묻기를, ‘어떻게 깨쳤는가?’ ‘예, 나의 깨친 뜻은 나의 본래면목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절대絶對로 없어 각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이것을 다 없애버려 참으로 없는 것이니, 이같이 깨달았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유무有無를 함께 보면 정각正覺을 수순한다는 말씀은 경에도 있는데, 이것은 불조의 설화문에 좋은 말이다. 그러나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큰 병이 되는 것이다.”
셋째는 도리道理로 아는 병이니,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내가 한 가지 깨침이 있다. 이미 있고 없는 것으로 알 수 없고,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가 다 공한 것으로도 무 자 뜻이 아니니라.”
하니, 내가 또다시
“깨친 곳이 있소? 그러면 어떻게 깨쳤소?”
“예, 내가 묘妙한 것으로 알았소.”
“묘한 것으로 알았다니 무슨 말이오?”
“말로 보일 수 없고, 분별로 알 수 없는 것이 묘한 것이오. 내가 『법화경法華經』을 보니, ‘그치고, 그치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나의 법法은 오묘하여 사의思議하기 어렵다’49)고 하시니, 조주趙州의 ‘무’ 자도 이와 같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 말을 경교로 보면 병이 될 것이 없겠지만, 활구참선에는 큰 병이 된다. 그러하므로 고인古人이 혹 현현묘묘玄玄妙妙한 도리道理로 도를 삼을까 싶어 하여, 도리로 알음을 짓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넷째는 뜻 뿌리로 헤아리는 병이니, 이 사람이 ‘모두 병 되는 것이다’라고 함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 하여 까막까막 생각하여 헤아려서 알려고 하는데, 급히 호령하여 말하기를,
“이 여우 정령(狐狸精靈)이여! 무슨 계교사량計較思量을 하는가?”
그러하므로 옛날 사람이 뜻 뿌리로 헤아리지 말라 하신 것이다.
다섯째는 눈썹을 찡긋찡긋하고 눈을 꿈적꿈적하니, 이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내가 깨친 바 있노라.”
라고 하였는데,
“여보시오 당신이 어떻게 깨쳤소?”
“예, 이것은 참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가만히 작용作用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면 가만히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그 진상眞相을 보이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용성이 급히 소리쳐 말하기를,
“곧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지 못하고, 옛사람의 기틀을 따라 한번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자기의 깨침을 삼는가? 그러므로 옛날 사람이 말씀하시기를,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빡이는 곳을 향하여 무겁집을 짓지 말라’고 하시니, 이것은 무자의無字意를 깨친 것이 아닌 것이다.”
여섯째는 진실로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말로만 도를 닦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말은 도가 아닌 것이다.
일곱째는 일 없는 갑(無事匣) 속에 있는 병이니,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내가 ‘무’ 자를 또 깨친 바 있노라.”
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깨쳤나요?”
“예, 내가 깨달은 바는 곧 일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도를 듣고 갖가지 분별심分別心과 갖가지 치구심馳求心이 있기 때문에 한칼로 두 구절을 내어 당하當下에 일 없는 것을 깨치게 하기 때문에 ‘무’라고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자기가 자성을 확철히 깨달아야만 ‘무’ 자를 타파打破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제 너의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할 것이 없다, 일이 없다’고 하지만, 다시 대답하여라. 어떤 것이 조주의 ‘무’를 말하는 뜻인가?”
저 사람이 다시 대답하기를,
“하염없고 일 없는 것이 ‘무’를 말하는 뜻입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이까짓 소견으로 어찌 무상도無上道를 알겠는가? 요사이에 학자들이 흔히 이러한 폐단이 많다. 자칭 ‘일 마친 사람’이라 하여 고기 잡는 집과 술 파는 집에 한가히 노닐 것이며, 녹수청산에 뜻대로 하여 하염없이 즐겁다 하는 것이니, 이것은 네가 무단히 절로 깨쳤다 하는 것과 같다. 그러하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 없는 갑匣 속에 있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여덟째에는 그 사람이 묵묵부답하였는데, 용성이 말하기를,
“아란야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狗子)에게도 도리어 각성覺性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무無’라고 하심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예배하였는데, 용성이 급히 말하기를,
“예배는 무슨 일을 위함인가? 알고 예배하는 것이냐,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인가, 아니면 승당承當하는 뜻인가?”
대답하기를,
“승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고 하는 것인가, 모르고 하는 것인가?”
하니 그 사람이 호령하는데, 용성이 천연한 태도로 소리쳐서 말하기를,
“큰 용을 낚으려 하였는데, 쓰지 못할 작은 자라가 앙금앙금 걸어 나온다. 다시 일러라.”
그 사람이 잠잠하고 있는데, 용성이 웃으며 말하기를,
“참 벙어리로다. 현현玄玄한 지취旨趣를 알지 못하고 한갓 적묵寂默하기만 해 괴롭게 하는구나.”
그 사람이 눈만 뛰룩뛰룩 굴리고 소향所向을 알지 못하는데, 용성이 소리쳐서 말하기를,
“무상도無上道를 눈치로 알려고 하는가? 요사이에 종사宗師가 고인古人의 향상법向上法을 들어 말한다면, 얼른 눈치로 알아 승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가히 애석하도다! 그러하므로 옛사람이 고인의 화두를 들어 말하는데 승당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문자 가운데 인증하는 법이니, 그 사람이 이 말 저 말 여러 말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어떤 경에는 어떻게 말하고, 어떤 글에는 어떻게 말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용성이 말하기를,
“그대의 도안道眼이 명백明白하여 가슴 가운데로 솟아난 것이라도 지극히 정밀하고 세세히 하여야 간택할 것인데도, 어찌 고인의 책자가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인증하는 것이냐 말할 것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이 문자文字 가운데 인증引證함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이다.”
열째는 미혹함을 가지고 깨치기를 기다리는 병이니, 그 사람이 다시 말하기를,
“나는 미혹한 사람이니 어서 깨치기를 기다리노라.”
용성이 말하기를,
“내가 미혹하였다고 깨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병이로다. 어찌 그러한가? ‘내가 고인의 현관玄關을 알지 못하니, 어서 급히 공부를 할 것이다’라고 하여 머리에 불 끄듯이 하는데, 급히 깨칠 마음이 앞에 있어 큰 장애障碍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십종병이라고 하니 부디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혹자或者가 헤아려 생각해(商量) 말하기를,
“조주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사람을 보고 공연히 방긋방긋 웃고 물건을 가지고 희롱하지만,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무’ 자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하며, 또 혹자들은 말하기를,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요, 구자狗子는 다만 구자요, 무 자는 다만 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며, 또 혹자들은 조선문朝鮮文에 ‘무’ 자라 하는데, 이것이 큰 병이 되는 것이다.
이 문중門中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만 화두話頭만 참구하고 아는 마음은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하만세天下萬歲 영웅호걸英雄豪傑이며, 고금철학가古今哲學家가 하나도 이 마음을 깨친 사람이 없고, 오직 대각능인大覺能仁 삼십삼성사三十三聖師와 오파분방五波芬芳의 모든 성사께서 크게 깨쳤도다.
이 마음을 어떻게 아느냐, 말하여라.”
혹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떳떳하여 변치 아니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하늘과 땅이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사시四時가 변하여 바뀌는 것과 만물이 변하여 옮기어 가는 것과 삼세가 간단없이 흘러가는 것들이 가지가지 허망하고 허깨비 같은데(虛幻) 어찌 떳떳하다(常)고 하는가? 그대 몸이 떳떳하다고 할 수 없다. 백세광음百世光陰이 자꾸자꾸 흘러감에 목숨이 아침 이슬과 같으니 어찌 떳떳하다고 할 것인가? 너의 마음이 떳떳한가?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또 생멸심生滅心이 변화무쌍變化無雙한데 이 어찌 떳떳하다고 할 것인가? 또 너의 성품이 떳떳한 것인가? 그러면 고금에 응연凝然히 변치 아니하여, 나는 이치가 끊어질 것이다.
또다시 묻노라. ‘어떠한 것이 너의 성품인가?’
만일 빈 것이 너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길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만일 맑은 것이 너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길이 맑아 흐리지 아니할 것이며, 만일 착한 것이 너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길이 착하여 악하지 아니할 것이고, 만일 악한 것이 너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길이 악하여 착하지 아니할 것이니, 성인은 길이 성인이 되고 범부는 길이 범부가 될 것이다. 겁劫이 다할 때까지라도 한 사람도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참된 성품이 매우 깊어서 미묘微妙하여 제 자성自性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고 한다. 또 만일 일체 제법을 그르다고 한다면 천지 만물과 사대오온四大五蘊과 유정무정有情無情이 다 없는 데로 돌아가 허무虛無할 것이니, 이것들이 다 외도外道의 견해見解인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비고도 신령하고, 고요하고도 오묘하다’고 하니 네가 감히 끊어져 없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이치가 스스로 내가 이치라고 함이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인하여 이치를 세운 것이니, 본래 이치가 끓어진 것인데, 감히 이치라고 말하는 것인가?
기운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람에게 허령지각虛靈知覺의 기운과 공기와 전기와 물기운과 불기운 무리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본래 모든 기운이 없는 것인데, 감히 모든 기운이라고 말하겠는가?
인연因緣은 화합化合한 것으로 이룬 것이다. 이 한 물건은 인연으로 조작된 것이 아닌데, 감히 인연이라고 말하겠는가? 자연自然은 천진天眞만 믿는 것이다. 성품은 자연도 아닌데, 네가 감히 자연이라고 말하겠는가?
사제법四諦法이라 하는 것은 첫째는 괴로운(苦) 법이니 이것은 삼계三界 괴로운 과보果報이고, 또 둘째는 모으는(集) 업이니 그 삼계에 모든 고를 받는 것이다. 입 뿌리와 몸 뿌리와 뜻 뿌리, 이 세 가지 곳에 모든 죄악이 모여 있는 것을 인因이라고 하고, 또 셋째는 멸滅하는 법이고, 또 넷째는 도법이니, 이 도법인道法因을 닦아 몸 뿌리, 입 뿌리, 뜻 뿌리에 모인 죄악의 근본인根本因을 끊고 청정적멸과淸淨寂滅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참다운 도는 마음을 불 꺼진 식은 재와 같이 하는 것이 아니니, 감히 사제법이라고 말하겠는가?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 하는 것은 일체중생이 모든 가히 사량思量할 만한 경계를 대하면 참으로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탐착심을 일으키는 것인데, 알음이 없는 것은 어두운 무명無明이 인因이 되고, 탐착심貪着心을 일으키는 것은 행行하는 과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인연으로부터 탐착을 행하는 과果가 생生하는 것이다.
또 탐착하는 인연으로부터 모든 경계를 낱낱이 가려 분별하여 아는(識) 과가 생겨나고, 또 하나는 이 아는 인연으로부터 가지가지 차별을 갖추었기 때문에 명색名色의 과果가 나고, 또 명색의 인으로 육근六根에 들이는 육입과六入果가 나며, 또 육근에 들이는 인으로부터 육근에 닿는(觸) 과果가 나고, 육근에 닿는 인으로부터 낱낱이 받아들이는(受) 과果가 나고, 받아들이는 인으로 사랑하는(愛) 과果가 나며, 사랑하는 인으로부터 취取하는 과가 나고, 또 취하는 인으로부터 업이 있는(有) 과果가 나며, 또 업이 있는 인으로부터 생生하는 과가 나고, 생하는 인으로부터 늙어 죽는(老死) 과가 나며, 또 늙어 죽는 인으로부터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과가 나는 것이다.
본래 무명이 끊어졌는데 감히 십이인연이라고 말하겠는가? 각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감히 각승覺乘을 말하겠는가? 아는 것으로도 알지 못하고, 지혜로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원래로 이름과 말이 아닌데 감히 최상승最上乘이라고 말하겠는가? 본래 격식의 안(格內)이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격식 밖(格外)의 도리를 말하겠는가? 모두 이것이 아니면 무슨 물건인지 한번 궁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루살이가 곳곳마다 엉기어 붙지만 불꽃 위에는 붙지 못하는데, 세상 사람의 아는 마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또 한 사람이 묻기를,
“기운이 모이면 사람이 나는 것이고, 기운이 흩어지면 사람이 죽는 것이다. 무슨 궁구할 가치가 있겠는가?”
용성이 대답하기를,
“기운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또 기운은 자각自覺이 있는 것인가, 자각이 없는 것인가? 만일 기운이 자각이 있다고 한다면, 허공 기운과 전기 기운과 물기운과 불기운이 다 아는 자각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분명히 알 것이고, 나무와 돌덩이라도 기운이 다 있는 것이니 그것들이 다 자각이 있어서 말하던가? 아무 자각도 없이 기운으로만 사람이 난다고 할 수 없다.
또 네 말대로 사람이 기운으로만 나고 죽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자각이 기운 가운데 있는 것인가, 기운이 자각 가운데 있는 것인가? 자각이 기운을 인因하여 나타나는 것인가, 기운이 자각을 인하여 나타난 것인가? 그 기운은 어디에서 나는 것이며, 그 자각은 어디로부터 있는 것인가? 그 자각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의 형색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궁구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공부를 할 때에 한가히 앉아 잠만 자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혹 잠이 오거든 곧 일어나 서서徐徐히 걸어 다니며 공부를 놓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51. 화두참구話頭參究하는 모양을 말함(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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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79_a_01L어떤 사람이 묻기를,
“화두를 의심하라고 하니, 어떻게 의심하여야 될까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귀중한 보배를 몸에 깊이 간직하여 애지중지하다가 홀연히 잃어버렸다(遺失). 그 사람이 모르고 있다가 손으로 보배를 둔 곳을 만져 보니 보배가 간데없거늘 그 사람이 의심이 나서, ‘보배를 어디에다 두었는가?’ 하고 찾는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날이 훨쩍 새기 전에 이상한 물건을 주는데, 자세히 보니 날은 아직 밝지 못하여서 알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아서, 그 사람이 의심이 바짝 나는 것과 같이 화두 하는 모양이 이와 같은 것이다.
혹 화두를 할 때에 어떤 때에는 나귀를 끌고 우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소. 어떤 때에는 뜨거운 불과 같이 번뇌가 끓고, 어떤 때에는 찬 얼음과 같아서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며, 어떤 때에는 순풍에 돛을 단 배와 같아서 술술 잘된다. 그러나 공부가 잘되는지 못되는지, 좋거나 언짢은 마음을 두지 말고 다만 화두만 하여야 할 것이다.
또 고요히 앉아 맑고 맑은 것을 취하여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운동運動하고 말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으며, 고요히 할 수 있는 것으로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생각을 허공과 같이 하든지, 또 마음을 담벼락과 같이 하여 공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外道이며, 혼魂이 흩어지지 아니하여도 죽은 사람인 것이다. 다만 이 한 물건 모른 것을 의심할 것이다.
공부를 일심一心으로 하여 가면, 보고 듣는 경계가 자연히 고요하고, 물건과 내가 함께 저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없어지고 허공이 녹아지는 것이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자연히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할 것이다.”
또 묻기를,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데, 그 망상을 어떻게 제거할까요?”
용성이 말하기를,
“망상이 일어나든지 안 일어나든지 가만히 두어 망상을 제거하려고 말라. 망상을 제거하려고 하면 망상이 더 일어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소가 달아나거든 소고삐를 단단히 잡아당기면 소가 스스로 사람을 쫓아오는 것과 같아서, 망상이 일어나든지 안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말고 화두만 들어 의심하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또 화두로 망상을 제하려고 하지 말며, 또 다만 화두만 들어서 의심하여도 망상을 잡지 못하거든 화두를 즉시 놓아 버리고 마음도 쉬어 예전과 같이(如前) 한 뒤에 다시 화두를 들면 새롭게 다시 깨끗해진다.
또 화두를 들어 의심할 때에 몸과 마음을 다 놓아 한결같이(如常) 편안히 하고 화두를 또렷이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화두를 너무 급하게 들면,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하여 가슴도 답답하고 머리도 아프며 코에서 피도 나는 것이다. 이 병은 마음을 너무 조급히 한 탓이다.
또 마음을 너무 방심하면 화두를 저버리기 쉬운 것이니, 부디 화두를 너무 극도로 하지 말고 너무 방심으로도 하지 말라. 거문고 줄이 느슨해도 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팽팽해도 소리가 나지 않으니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첩첩한 산중에 들어가다가 홀연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하여 진퇴進退할 곳이 없게 되면, 이런 때를 당하여 용단력勇斷力을 다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면 꽃이 불긋불긋하고 버들이 푸릇푸릇한 곳에 별천지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공부는 다 아는 마음으로 헤아려 궁구하는 것이지만, 이 공부는 단지 알지 못할 이 한 물건을 일심으로 의심하여 참구하는 것이다. 헤아려 알고자 하면 만 년을 궁구하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할 때에 무슨 재미를 찾지 말고, 모기가 쇠로 만든 소 위에 앉아 부리를 내리지 못할 곳을 향하여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번에 뚫어 들어가면, 몸까지 쑥 들어갈 것이다.
화두만 일심으로 의심하여 궁구하고 추호라도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이 부드러운(日暖風和) 봄철(春節)이 돌아오면 꽃피고 잎이 돋듯이 공부가 익으면 자연히 이같이 되는 것이다.”
제52. 공부할 때에 불가불不可不 마군魔群이를 알아야 할 것(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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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80_a_01L용성이 말하기를,
“공부하는 도인들은 마장魔障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마魔라 하는 것은 생사를 좋아하는데, 사람의 지혜를 끊으면 착한 법을 파괴破壞하며, 오욕五欲에 탐착貪着하는 것이다. 마왕魔王은 세 가지 악한 것이 있으니, 첫째, 악한 것으로써 해롭게 함에 악한 것으로 갚으며, 둘째, 사람이 나를 해하지 아니하는데 아무런 까닭 없이(無故) 악으로써 해롭게 하며, 셋째, 사람에게 은혜를 입음에도 갚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것이다. 삼계 가운데에 마왕의 악이 가장 극심한 것이다.”
묻기를,
“무엇을 마왕이라고 합니까?”
대답하기를,
“대개 세계가 있으면 육도六途가 있고, 육도가 있으면 선악이 있으며, 선악이 있으면 사정邪正이 있는 것은 무궁겁無窮劫에 바뀌지 못할 정리正理인 것이다. 한량이 없이 옴으로부터 수없는 마왕은 다 말할 수 없겠지만 이제 내가 경전經典 가운데 많이 본 것으로 말한다면, 욕계欲界에 여섯 하늘을 지나서 색계천色界天에 올라가기 전에 마왕의 궁전이 있는데, 가로 세로(縱廣)가 6천 유순이고, 복 받는 것은 욕계천과 같은 것이다.”
객이 묻기를,
“모든 마계는 몇 가지나 됩니까?”
대답하기를,
“두 가지 마魔로부터 여러 가지 마가 있으니, 하나는 나의 마음 가운데에서 생겨나는 마이고, 또 하나는 밖에서 들어오는 마이다.
첫째, 나의 마음에서 마가 일어나는 것이니, 첫째는 오음마五陰魔이고, 둘째는 번뇌마煩惱魔이며, 셋째는 산란마散亂魔이고, 넷째는 음란마陰亂魔이며, 다섯째는 탐마貪魔이고, 여섯째는 진심마嗔心魔이며, 일곱째는 즐거워하는 마(喜魔)이고, 여덟째는 슬퍼하는 마(悲魔)이며, 아홉째는 조금만 깨치면 자족한 줄로 아는 마(自足魔)이고, 열째는 잘 안다는 마(知解魔)이며, 열한째는 아만마我慢魔이고, 열두째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음마陰魔이며, 열셋째는 마음을 일으키는 천마天魔이고, 열넷째는 일으키기도 하고 안 일으키기도 하는 희론마戱論魔이며, 열다섯째는 인과因果가 없다는 마이고, 열여섯째는 사견마邪見魔이다. 범인의 마음 가운데 팔만사천 번뇌(塵惱)가 있기 때문에 팔만사천 자심마自心魔가 있는 것이다.
둘째, 외마外魔가 들어오는 것은 옛사람이 말하기를, ‘벽壁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겨나면 마가 침노한다’고 하였다. 원컨대 도 닦는 사람들은 목인木人이 꽃 보듯 새 보듯 하여 무서워하지도 말고 즐거워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혹 도 닦는 사람에게 음마든지, 천마든지, 귀신마든지, 이매망량마魑魅魍魎魔든지, 산정요괴山精妖怪들이 수도인修道人을 해롭게 하여도 업을 파괴하는 것이니, 간절히 마음에 주의注意해야 할 것이다.”
제53. 마가 도덕道德을 해롭게 하는 인유因由를 밝힘(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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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기를,
“무슨 일로 모든 마魔들이 남의 도덕을 해치고자 합니까?”
대답하기를,
“내가 『능엄경』을 보니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도를 닦아 마음이 바르고 일정한 곳에 들어감에 시방보살과 무루대아라한無漏大阿羅漢이 마음이 지극히 정밀하여 담연청정湛然淸淨해지면, 모든 마왕과 범부의 하늘들이 인간 사람과 달라서 그 무리들이 오통신안五通神眼으로 궁전이 아무런 까닭 없이(無故) 무너지고 땅이 떨치고 벌어지며, 물과 육지가 날며 솟아남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인간 사람은 어두워 알지 못하거든 범부 하늘 무리들은 다섯 가지 신통이 있어서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大驚) 서로 백천 방편으로 도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다.’50)
또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참된 마음을 발하여 본원각성本原覺性으로 돌아가면 시방허공이 다 녹아지는데, 어찌 허공 가운데 있는 세계가 무너지지 아니할 것인가?’라고 하셨다.”
제54. 마가 도를 해롭게 할 수 없음을 밝힘(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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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저 모든 마가 비록 크게 성을 내지만, 그의 무리들은 번뇌망상(塵惱妄想) 가운데 있는 것이고, 너는 묘각妙覺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저희들이 아무리 신통을 다하여 도를 파괴하려 하여도, 비유하자면 바람이 태양 광명을 불어 옮기려 하는 것과 같고, 칼로 물을 베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조금도 서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요동하면 마장을 이룰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는 끓는 물과 같고 범부 하늘(凡夫天)과 마왕과 모든 귀신들은 얼음과 같아서, 더운 기운이 가까이 오면 곧 녹아버리는 것과 같이 아무리 신력을 믿어도 쓸 곳이 없다.”51)
라고 하셨다. 그러하므로 도를 닦는 사람은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고, 단지 일심으로 조사 공안을 의심하여 궁구해야 할 것이다. 기름이 밀가루 속에 들어가면 마침내 찾아낼 수 없는 것과 같아서, 한번 사도로 들어가면 나오기가 어려운 것이다.
제55. 외도의 괴수된 자만 가림(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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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81_b_01L요즈음에 각법覺法을 해치는 외도는 스님 가운데 가장 많고, 선지식 가운데도 간간이 있다.
묻기를,
“선지식이라면 어찌 외도라 하겠습니까?”
대답하기를,
“요사이 사람들은 조사 공안을 진실로 닦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여서 사람에게 스승 되기를 좋아하여 학자의 안목을 많이 눈멀게 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사와 정을 알고 가려 가르치는 사람이 대단히 희소하며, 사와 정을 알고 배우는 사람이 대단이 적다. 그러하기 때문에 외도는 견성한 사람에게 많이 있소.”
묻기를,
“외도가 몇 가지나 됩니까?”
대답하기를,
“이십 가지 큰 외도가 있지만, 모든 외도 가운데 상수가 됩니다. 내가 간략히 가려 뽑을(揀擇) 것이다. 모든 외도는 깨달았다고 안다고 하는 데 있으니, 깨치지 아니하였다면 말겠지만 깨달았다면 철저히 깨쳐야 될 것이다. 모든 외도들은 흔히 각법覺法 가운데서 도를 닦다가 소견이 잘못 들면 외도가 되는 것이다. 저 외도들도 제자가 많이 있고 각기 말하기를, ‘내가 무상대도를 이루었다’고 하니 참 애달프도다!
곡식에서 벌레가 나서 도리어 곡식을 해롭게 한다. 외도가 되고자 함이 아니라 자기가 알지 못한 탓이다. 참다운 도는 대단히 알기 어렵다.
내가 비유로써 조금 말할 것이다. 오음산五陰山 하나 있다면, 저 오음산 밖에 또 산이 하나 있는데 이름을 대각산大覺山이라 한다. 그러나 이 산이 지극히 높을 뿐만 아니라 사면이 철벽鐵壁이어서 발을 붙일 길이 없지만, 오직 오음산이 있어 한 실마리 길이 통한다. 이 오음산이 평지로부터 산꼭대기(絶頂)에 가는데 5백 리이고, 그 정면 중심正面中心으로 길이 하나 있는데, 대각산으로 바로 가는 길이다. (이 비유는 모든 병에 걸리지 아니하고, 다만 일심으로 화두만 하면 필경에 크게 깨친다는 말이다.) 양옆에 5십 군데로 갈라져 가는 길이 있으니, 그 길이 험악하여 독사와 호랑이 굴이 있어서 행인들이 낱낱이 호랑이 독사에게 잡혀먹히게 된다. 이것은 오음중五陰中에 5십 군데로 갈라 가는 험악한 삿된 길을 말한다.
제56. 색음色陰이 녹아질 때에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남(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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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82_a_01L비유하자면 날이 지극히 추워서 물이 어는 것을 얼음이라 하고, 마음이 흔들리고 움직여(動蕩) 그 습기로 맺힌 것을 오음이라 하는데, (색음은 오음 가운데 하나로 있는 것이다.) 어찌 음陰이라 하는가?
비유하자면 날이 음침하면 태양太陽이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과 같아서 오음이 일어나면, 맑은 마음이 나타나지 아니함을 그늘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일심으로 닦아 가면 습기로 맺혀 있던 색음이 녹아지는데, 열 가지 보지 못하던 희유한 경계가 나타난다.
첫째는 몸이 걸리는 데에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니, 산속이나 물속이나 석벽 속이나 걸림 없이 왕래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는 몸이 온통 내외 없이 환히 보이는 것이 유리와 같아서, 몸 가운데 회충과 벌레를 주워 내는데 몸이 조금도 헐거나 상함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공중空中에 법설法說함을 듣는 것이니, 안과 밖이 텅 비어 사무치며 눈 뿌리에 아는 것(眼識)과 귀뿌리에 아는 것(耳識)과 코뿌리에 아는 것(鼻識)과 혀뿌리에 아는 것(舌識)과 몸 뿌리에 아는 것(身識)과 또 뜻 뿌리에 의탁하여 아는 것(意識)들이 색음이 녹는 바람에 다 그전의 경계를 잃어버리고, 서로 빈주賓主가 되어 공중에서 설법함을 듣는 것이고, 넷째는 각覺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니, 마음과 경계가 신령하게 깨달은 데서 물들임으로 마음의 광명이 밝아 모든 세계에 환하게 비추는 것이며, 다섯째는 허공이 보배 빛으로 화化하는 것이니, 마음을 억제하여 참된 생각이 없게 되는 데서 그 쓰는 힘이 뛰어넘기 때문에 허공이 보배 빛으로 변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어두운 집이 낮과 같이 밝은 것이니, 마음 닦는 것이 점점 깊어 감으로 그 보는 것이 점점 맑아져 그 아는 마음이 광채가 찬란하여 어두운 것을 깨쳐 보는 것이고, 일곱째는 몸에다가 불을 놓고 칼로 찍어도 알음을 깨치지 못하는 것이니,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 오진五塵이 한가지로 녹음에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를 헤쳐 보면 순전히 몸이 공한 것이고, 여덟째는 세계를 다 사무쳐 보아 불국佛國을 이룸이니, 오탁악세를 싫어하고 대각의 세계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어리석어 정밀히 닦아 생각이 오래됨에 자기의 아는 마음이 불국을 화化한 것이며, 아홉째는 한밤중에 산이든지 물이든지 석벽이든지 멀고 가까운 것을 걸림 없이 보나니, 이것은 마음을 정밀히 닦아 그 정신이 핍박이 되므로 그 투명透明한 것이 원근 없이 사무쳐 보는 것이고, 열째는 외마가 점점 들어오는 것이니, 그 마군의 신통력으로 혹 선지식도 나투고, 혹 불보살도 나투며, 혹 귀신도 나투고, 혹 미인美人도 나투며, 혹 호랑이나 사자도 나투되 그 변화가 불측하여 백천 방편으로 공부를 저해코자 하며, 혹 사람을 미치게도 하는데, 만일 도인이 공부를 힘써 하다가 이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나거든 추호라도 희유한 생각이든지 공포恐怖스러운 생각이든지 모든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다만 일심으로 공부만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마군이는 스스로 없어지고 공부는 점점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만일 이 경계를 깨치지 못하면 자기의 신세를 그르치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이 조금만큼 아는 것이 있으면 희유한 생각을 내어 마음이 전도되는 까닭으로 대도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제57. 수음受陰이 녹아지려고 하면 열 가지 마군이가 나는 것을 말함(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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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83_a_01L모든 아는 것(識)을 두지 아니하고 일심으로 나아감에 색음은 녹아지고, 또다시 수음을 녹이고자 할 때에 열 가지 마군이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니 자세히 보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수음의 성질은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색음이 이미 다 녹는데, 내외內外가 비어 융통하지만 수음이 녹지 못하면, 가위눌린 사람과 같아서 훤히 들리고 보이지만, 마음에 객기客氣가 접촉接觸된 것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색음이 녹아지면 이 몸으로 산하석벽을 걸림이 없이 드나들고, 수음이 다 녹으면 비유하자면 사람이 집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몸에서 출입하기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첫째는 일심으로 마음을 닦는 것으로 수음이 녹을 때에 마음이 몸을 떠나 순식간에 무량세계를 두루 자유自由 왕래를 하는데, 그때에 자기가 위없는 도를 성취한 것으로 생각하고, 저 중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내어 저 중생을 어찌할까 하여 눈물을 흘리며, 모기만 보아도 외아들 생각하듯 하여 눈물을 흘리니, 이것은 비마悲魔가 마음에 들어간 것이고, 둘째는 그 마음이 한없이 날카롭고 용맹하여 모든 성현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이것은 미친 마군이가 들린 것이며, 셋째는 크게 목마른 생각을 내는데, 정력定力은 굳세어지고 지혜는 적으며, 또 수음이 다 녹지 못하였으므로 나아감에 새로이 더 증득한 것은 없고 색음은 이미 다 녹아 아득히 의지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크게 답답하여 목마른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넷째는 내가 위없는 도를 철저히 증득하였다 하여 다시 공부를 하지 아니하는데, 곧 지족知足하다는 마군이가 들어와 붙은 것이며, 다섯째는 근심하여 살고자 아니하는데, 곧 근심 마군이가 들어와 붙은 것이다. 여섯째는 즐거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희마喜魔가 붙은 것이고, 일곱째는 무단히 아만심我慢心을 걷잡지 못하여 고금 천하에 한 사람도 눈앞에 없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포고布告하여 말하기를, ‘성상聖像이라 함은 우상偶像에 불과한 것이다. 너희들은 이것을 보라. 이것은 금으로 만든 것이고, 저것은 구리로 만든 것이며, 또 이것은 흙으로 만든 것이고, 저것은 나무로 만든 것이다. 또 저 경經을 보라. 이것은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 참된 것인데도 이것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무단히 쓸데없는 흙과 나무를 숭배 공경하여 공양하는 것이 실로 허망하다’고 하니 누가 이것을 알지 못할 사람이 있겠는가? 경전과 성상은 만고의 표준일 뿐이다. 저만 아는 것이 아니니 이것은 큰 이단 마군이가 붙은 것이고, 여덟째는 무단히 한량없이 편하다는 마음을 내어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데, 이것은 경청마輕淸魔가 붙은 것이며, 아홉째는 비고 맑은 성품을 얻어 길이 없어진 것으로 주장하여 인과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공마空魔가 붙은 것이고, 열째는 그 공부가 깊이 들어가면 수음이 다 녹아질 지경에 이르러 그 마음이 홀연히 사랑함을 일으키는데, 사랑이 극도에 이르면 미친 마음이 일어나서 탐욕심이 불길이 일어나듯 하니, 이는 욕마欲魔가 붙은 것이다.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부디 자세히 이 글을 보시오. 마군이에게 속지 마시오.
요사이 선지식이 많으나 외도 마군이가 대단히 많다. 요즈음에 스님들이 석가세존의 제자라고 하지만, 대부분 외도마종이다. 그들이 자청하여 ‘내가 대각의 제자다. 내가 선지식이다’라고 하지만, 그 실상은 대각의 도를 해롭게 하는 외도 마군이다. 승속남녀 할 것 없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 모두 속아 지내는데, 참으로 애석하도다. 내가 이같이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도 민망하여 이같이 말을 하는 것이다.
선지식이라 자칭하는 자가 옛적이나 지금이나 많이 그러한 변통이 있는 것이다. 대혜 종고 선사大慧宗杲禪師 말씀과 같이 ‘고기의 눈알이 밝은 구슬이다’52)라고 가르친 것이 많다.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을 고요히 비추어 지키라고 하는데, 이것은 육근문두六根門頭에 감각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일체 마음을 다 쉬고, 쉬어라. 이 쉬는 것이 참 공부이다’라고 가르치니, 이것은 공적空寂한 것을 지키는 것이다. 또 ‘마음을 쉬고 쉬어 몸은 고목과 같이 하고, 마음은 식은 재와 같이 하여 아무 분별도 없는 것이 마치 담벼락과 같이 하여라’와 같이 가르치는 자도 있는데, 이것은 달마 대사達摩大師께서 2조 혜가惠可에게 밖으로 치구馳求하여 마음을 쉬지 아니하고, 도를 분별심으로 알고자 하기 때문에 그 분별심에 결박됨을 풀어 주고자 하여 말하기를, ‘혜가야! 도를 깨치고자 한다면, 밖으로 반연하는 마음을 없애고 안으로 헐떡이는 마음을 쉬어라. 담벼락같이 하여라’라고 하는 것은 잠시 혜가 대사의 분별에 결박된 마음을 풀어 주신 방편이고 참다운 도가 아닌데도, 우치한 사람이 이것을 가르치니 참으로 애석한 것이다.
또 ‘육칠의식六七意識으로 맑고 맑은 허공과 같은 제8담식第八湛識을 고요히 비추어 안으로 들여다보라’고 하니, 이것은 제8담식으로 도를 삼는 것이다.
또 ‘생각이 일어나든지 생각이 멸하든지 간섭할 것이 없으니, 탕탕무애蕩蕩無礙하여 뜻대로 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것은 자연의 체를 지키어 도를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르치는 것이 다 마군의 권속이고, 대각성인의 도가 아니다.
제58. 상음想陰이 녹아질 때에 열 가지 경계가 나는 것을 말함(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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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84_b_01L일심으로 마음을 닦는 데 수음은 비록 녹았을지라도 또다시 상음이 있는 것이다. 다시 용맹 정진하여 일심으로 정진精進하면, 상음이 녹을 때에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상음이라 하는 것은 부동浮動하는 망습이니, 낮이면 생각이 되고 밤이면 꿈이 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상음이 녹아지면 꿈이 없어지고, 자나 깨나 한결같아서 말끔한 허공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마가 제일 극심하나니, 이 글을 자세히 보시오.
첫째는 수음이 다 없어진 사람은 마음이 일정하고 밝으므로 그 사람이 더욱 일심으로만 닦아 가면 허물이 없을 것이나, 무단히 그 마음이 뚜렷이 밝은 것을 사랑하여 그 정밀한 생각을 날카롭게 하여 잘 공교함을 구한다. 그런데, 그 구하는 마음을 틈타서 하늘 마군이가 그 사람의 깊은 마음속(心肝)에 붙어 만 가지 변화를 나툰다. 혹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변재가 한량없어 설법을 잘하게도 하고, 혹 상제의 몸으로도 나투며, 부인의 몸으로도 나투고, 여러 가지 몸으로 나투되 그 몸 가운데서 광명이 나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도인이라고 믿어 그 교화를 얻어서 청정계행을 파하고 가만히 음욕을 몰래 채우는(潛通) 것이다. 그러할 뿐만 아니라 또 마귀에게 붙어서 온갖 변화를 부리는데, 어떤 때에는 변고가 나고, 어떤 때에는 좋은 일이 있으며, 어떤 때에는 겁화가 일어나고, 어떤 때에는 난리가 난다 하여 모든 백성의 재물을 무고히 닳아 없어지게(耗損) 한다. 그런데 자기의 몸에 마군이가 붙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든 신도로 하여금 사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용성이 말년에 우리 교를 믿는 사람은 정도에 들어가기를 위하여 이 글을 기록합니다. 나도 지금 노년이라 눈이 어두워 붓대를 잡아 기록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보시고 사도를 따르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공부에는 아는 것과 구하는 것이 큰 병입니다. 공부하는 법을 잘 알아가지고 일심으로 정성심으로 하여 가면, 공부가 순순하여 자나 깨나 어語·묵默·동動·정靜에 간단없이 화두가 자연히 들려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수록 더욱더욱이 단지 한결같이 하여 가면,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아 모든 마군이에게 속임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상음 가운데에 열 가지 마군이 경계가 있으니, 너무 지리하여 번민증이 나기 때문에 그만둡니다. 그러하나 추호라도 달리할 생각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며, 설혹 이상한 경계를 볼지라도 마음을 요동치 아니하면, 마군이가 자연히 물러가는 것입니다. 구하는 틈을 보든지, 알아 구하는 틈을 보든지, 무슨 틈을 보든지, 마음이 요동함을 따라 하늘 마군이와 귀신 마군들이 백천 가지 방편을 베풀어 도를 닦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속지 아니하면, 마魔가 혹 부모, 친척, 권속이나 친구나 그런 사람에게 붙어가지고 백방으로 유인도 합니다.
마의 신변으로 지나간 일도 알게 하고, 돌아오는 일도 알게 되며, 잠시 동안에 여러 만 리를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앉은 자리에서 천상, 인간과 지옥, 아귀, 축생을 다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마음 가운데에서 참도덕으로 생겨난 것인가 하여 즐거운 마음을 내어 그 경계를 쫓다가 그 마군이 권속이 되고 맙니다.
또 마군이 말은 흔히 ‘음욕도 상관없다. 술과 오신채도 상관없다.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신도들은 참으로 가려잡을 수 없다.
요즈음에는 각법覺法이 더욱 쇠퇴하여 마군이가 대단히 왕성하였소. 신도들은 참 알 수 없었소. 스님 가운데 마군이가 많습니다. 선지식이라 명성을 얻은 가운데에는 외도 마군이가 많습니다. 또는 도인이라야 서로 아는 것이니, 요즈음 신도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무단히 된 스님이나, 아니 된 스님이나, 자기의 친소를 따라 도인이니, 선지식이니 하니 참으로 애석할 일입니다.
여간해서 도에 눈이 밝아가지고도 도인을 알기 어려운데, 어찌 나의 눈이 밝지 못하고 남의 도를 알 것이오? 부디 신도들은 ‘음주식육이 무방반야이다’라는 스님들이 비록 선지식일지라도 따라 배우지 마시오.
제59. 외도의 종류를 밝힘(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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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85_b_01L대체로 대각大覺의 도를 닦아 정도를 크게 깨치지 못하고 외도로 떨어지는 것은 외도라도 큰 외도가 되는데, 그 다음에는 족히 말할 것이 없다. 대각의 도는 다만 일심만 닦아 성취되는 것이고, 하늘이나 귀신이나 그것들을 섬겨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찌하여서 일심을 닦는 가운데에도 외도에 빠지는가?
예, 자세히 들으시오. 범부가 처음으로 대각의 도에 발심하여 일심으로 도를 닦는데 점점 마음이 세지 아니하여 일정한 마음이 태산과 같으므로 그러한 때에 장차 색음色陰이 공하여진다. 그 지경에 당하면 산하석벽이 걸림 없이 몸이라도 아무 데나 들어 다니게 된다. 그때에는 그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위없는 도를 얻었다’고 하여 제 마음으로 모든 마업을 지으며, 또다시 그전에 색음이 녹은 경계는 비록 팔리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수음受陰이 녹음을 얻으면, 마음이 몸을 떠나 온갖 곳에 나아가 놀다가 돌아오는 것이 비유하자면 사람이 집을 떠나가다가 돌아오는 것과 같다.
이때에 그 사람이 위없는 도를 얻은 것으로 인증하여 가지가지 뜻을 낸다면, 밖으로 하늘 마군이(天魔)와 대력마왕大力魔王들이 그 사람 마음이 틈 나는 것을 따라서 그 뜻대로 이루기 때문에 이 사람이 미혹하여 정도를 알지 못하여 마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또 그 사람이 이것에 떨어지지 아니할지라도 다시 일심으로 견고히 닦다가 행음行陰이 녹아지면, 마음이 고요하고 맑은 것이 갠 허공 같아 천류遷流하는 상이 다하며, 꿈이 아주 없는 것이므로 낮 생각이 밤에 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하늘 마군이와 대력귀왕은 도를 해치게 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스스로 집을 짓고 들어앉아 외도가 되는 것이다.
대체로 행음은 만 가지를 화하여 일으키는 생멸生滅의 근원根元이 되기 때문에 태胎·란卵·습濕·화化 십이유생十二類生의 근원을 보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문득 아는 것을 일으켜 외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행음이 허망한 줄 알지 못한 탓이며, 또 색음이 생명의 근본이 됨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제60. 행음行陰과 색음色陰이 다 녹지 못하고 그 가운데 앉아 외도됨을 밝힘(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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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86_b_01L첫째는 색色·수受·상想·행行·음陰이 텅 비면 일체중생이 이곳에서 나서 저곳에서 죽는 것을 알지 못함이 없지만, 과거로 팔만 겁 전의 일은 알고, 미래로 팔만 겁 뒤의 일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팔만 겁 전에는 천지 세계가 생긴 원인이 없다.”라고 하여 인因이 없는 논論을 세움으로써 정지견正知見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이 무인외도無因外道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이 사람이 말하기를 “물질은 변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사람이고, 축생은 본래 축생이다. 까마귀는 본래 검고 따오기는 본래 흰 것이며, 인천은 본래 서서 다니는 것이고, 축생은 본래가 옆으로 다니는 것이다. 흰 것은 씻어서 흰 것이 아니며, 검은 것은 물이 들어서 검은 것이 아니니 일체 물건이 필경畢竟에 인因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끝내 인이 없다는 외도인 것이다.
셋째는 상음想陰이 녹아지면 마음과 경계가 다하기 때문에, 이 만겁 가운데에 일을 다 아는 것이다. 이 사람이 나는 것과 멸하는 것을 쓸어버리고 따로 떳떳함(常)을 헤아리는데, 이것은 마음과 경계의 두 가지 성품을 다하여 생멸을 다 쓸어버리고 뚜렷하고 떳떳함을 세우는 외도인 것이다.
넷째는 혹 나고 혹 멸하는 것을 헤아려 떳떳함을 삼는 것이니,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기를, ‘지·수·화·풍 사대를 의식하여 생멸이 있을지언정 사대의 원소는 항상 멸하지 아니하나니, 모든 법이 생멸하는 것 이 자체가 떳떳함이다’라고 헤아리는 것이다. 이런 상견常見 외도는 만겁의 일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여덟째 알음알이(八識)가 청정하여 허공과 같음을 보고 이것에 집착하여 도를 삼는 것이니, 이것이 무명의 뿌리가 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외도는 제8신식身識을 그릇 알아 도를 삼는 것이니 팔만 겁의 일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혹 사견을 일으켜 떳떳함을 삼는 것이니 저 사람이 망령되이 말하기를, ‘생멸은 다 상음想陰에 속하는 것이다. 이제 상음이 다 멸하였으니 영원히 생멸이 없는 성품은 행음行陰에 속한 것이다’라고 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행음이 곧 생멸의 근원이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모두 이름하여 상견 외도(常外道)라고 하는 것이다.
제61. 상常·무상無常 외도를 말함(제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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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나는 떳떳하고(常) 다른 이는 무상하다 하는 것이니, 나의 맑은 성품은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얽히어 없어지지 아니하거든 일체중생이 다 나의 맑은 성품 가운데에서 스스로 일어났다가 멸하였다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하나만 떳떳한 것이고, 일체중생은 다 무상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팔식八識을 지키는 외도인 것이다. 고금에 외도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더 벗어남이 없으니 그만두고자 한다.”
각해일륜覺海日輪 제4권
부록 육조단경요역六祖壇經要譯
제1. 단경을 역술하여 본교의 전도과로 한 이유를 설명함
- 용성이 젊은 나이(早年)에 발심하여 단포자單袍子 일납자一衲子로 청천에 뜬 학과 같이 사해팔방에 훨훨 다녔는데, 대각응세 2910년(1884, 용성 선사 21세) 4월 8일에 경기도 양주군 고령사古靈寺53)에서 비로소 『단경』을 얻은 후로 항상 이 경으로 선생을 삼아 도를 닦아 왔었다. 이제 우리 대각교에 정신골수精神骨髓를 삼아 널리 중생을 제도(廣濟衆生)하기를 목적으로 하고 이 경을 번역한다.
제2. 육조 성사께서 법을 받으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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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87_b_01L육조 성사六祖聖師께서 대범도량大梵道場에 계실 때에 소주자사韶州刺史 위거韋據와 문도門徒 1천60여 인이 지극히 공경 예배하고 도를 물었는데, 성사聖師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다 마음을 청정히 하여 큰 지혜를 일으키라(生).”
라고 하시고 성사께서 얼마 동안 있다가(良久) 다시 대중에게 고하여 말씀하시기를,
“각성覺性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을 쓰면 바로 정각을 성취하여 마친 것이다.”
라고 하셨다.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의 역사를 들어 보아라. 나의 엄부嚴父께서 조정朝庭에서 벼슬하시다가, 영남嶺南 신주新州로 귀양 오셨는데, 부친께서 불행히 일찍 돌아가셨다. 가세가 기울어져서 생활이 곤란한 가운데 당상의 노모가 계셔서 남해南海로 돌아와서 참담慘擔한 생활로 지냈었다.
하루는 나무를 팔고자 시장에 가서 있다가 저녁 무렵에 나무를 팔아 돈을 받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려 할 즈음에 마침 한 사람이 경을 외우는데,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혜능惠能이 말씀을 듣고 곧 마음이 열리어 깨닫고 손님에게 묻기를,
“무슨 경을 외우신 것이오?”
객이 대답하기를,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 동선도량東禪道場에 홍인 선사弘忍禪師께서 문도에게 고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다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라. 반드시 정각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하셨기에 내가 홍인 성사에게 이 경을 받아 왔노라.”
혜능이 이 말을 듣고 저절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홍인 성사에게 계법戒法을 받고자 하나 당상에 연로하신 자당慈堂이 계실뿐더러 옷과 양식(衣粮)이 없으니, 어찌하여 노모를 편안히 계시게 하고 저 홍인 성사의 문하에 참배參拜하여 무상도無上道를 배울까?”
라고 하니 객이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는 것이어서 이 말을 듣고, 안타깝게 여기어 백금 10냥쭝을 주어 말하기를,
“이것을 가져다가 그대의 노모를 편안히 지내시게(安接) 하고 속히 황매현 동산東山법회에 가서 도를 배우라.”
라고 하였는데, 혜능이 백배 사례하고 본집에 돌아와 시봉을 두어 노모를 편히 모시게 하고 길을 떠난 지 30일이 다 못 되어서 황매현 동산법회에 참배하였다. 성사가 묻기를,
“네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혜능이 다시 배례拜禮하여 말하기를,
“제자는 신주 지방地方에 사는 백성이고, 온 뜻은 오직 정각을 구하고 다른 물건은 구하지 아니하나이다.”
성사께서 거짓 방편으로 안목眼目을 증험證驗하여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 백성이고, 또 오랑캐이니 어찌 대각을 성취할 것인가?”
혜능이 여쭈기를,
“사람은 남북이 있다고 하겠지만, 영각성靈覺性은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오랑캐의 몸과 성사의 몸은 높고 낮음(尊卑)이 있을지라도 영각성은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성사께서 도중徒衆이 시기할까 염려하시어 거짓 방편으로 말씀하시기를,
“그만 그치고 후원에 가서 일이나 하여라.”
혜능이 다시 여쭈기를,
“제자가 항상 지혜를 내어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는 것이 복전이 되는 것이니 이 밖에 무슨 일을 하라 하십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랑캐의 근성根性이 가장 맹리猛利하도다. 다시 말을 말고 후원에 가서 일이나 하여라.”
혜능이 즉시 명을 받들어 후원으로 돌아오니 원주가 나무를 패고 흰쌀을 찧는(白米舂精) 책임을 맡기었다. 혜능이 책임을 잘 이행하여 온 지 어언간 8개월八個月이 되었다. 성사께서 하루는 작무처作務處에 나아가서 혜능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악인들이 너를 해할까 염려하여 너와 말하지 아니하니 아느냐?”
혜능이 여쭈기를,
“제자도 성사의 뜻을 알기 때문에 감히 당전堂前에 가지 못합니다.”
또 하루는 성사께서 모든 문도를 불러 분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남과 다만 복전만 구하고 생사의 대사를 해탈코자 아니하는데, 만일 자성을 미혹하고 복만 지으면, 삼계고해三界苦海를 어느 때에 해탈할 것인가?
너희들은 속히 게송을 지어 오너라. 크게 깨쳐 도에 계합하면 즉시 법을 전수하여 제6대 조사가 되리라. 사량思量하면 맞지 아니할 것이니 지체하지 말라. 비유하자면 용맹스러운 대장이 윤도輪刀를 들고 백만의 진중에 들어감에 이러쿵저러쿵(如何若何) 묻지 않고, 곧 쓰는 것을 보리라.”
이때 문도들이 성사의 가르침(敎則)을 받고 각자 처소에 돌아와 말하기를,
“우리는 헛된 힘을 들여서 게송을 지을 것이 없다. 신수 상좌神秀上座가 오늘날 교수사敎授師로 있으니 성사 백세 후에는 당연히 교수사를 의탁할 것이다.”
라고 하고 게송 짓기를 단념하였다. 신수가 모든 사람의 뜻을 알고 말하기를,
“불가불 내가 게송을 지을 수밖에 없다. 게송을 지어 바치지 아니하면 설혹 내가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성사께서 내 지혜의 깊고 얕음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내가 법을 구하는 것은 옳고, 망령되이 조사의 성위(祖師聖位)를 희망하는 것은 옳지 못하도다. 참 어렵고 어렵도다.”
라고 하고 드디어 게송을 가지고 두어 차례나 성사에게 바치려 하였지만, 심중이 황홀하여 게송을 바치지 못하고 여러 차례 헛걸음을 하여 돌아오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3일간이나 게송을 올리고자 하여 조사당전祖師堂前에 나갔으나 심중이 떨리어 끝내 게송을 바치지 못하고 헛걸음을 하여 돌아오니 잠자고 먹는 일(寢食之節)이 불안하였다.
신수가 마음속으로(內念) 생각하기를,
‘성사가 계신 처소 앞에 복도 세 칸(步廊三間)이 있으니 그 벽에다가 게송을 붙여 두어 자연히 성사께서 보시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라고 하고 이 밤 삼경에 게송을 남쪽 회랑 벽(南廊壁間上)에 붙이고 본처에 와서 다시 생각하기를,
‘성사께서 게송의 뜻이 도에 합하다고 하시면 내가 지은 것이라 하고, 만일 맞지 못하다면 내가 공연히 산중에서 세월을 허송하고 사람에게 공경예배를 받았다 하리라.’
라고 하였다. 그 게송에 말하기를,
‘몸은 보리나무와 같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도다.
때때로 부지런히 떨치고 닦아
티끌(塵埃)이 끼지 않게 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성사께서 신수의 행동을 모른 체하시고 노봉공盧奉供을 불러 『능가경』 변상도를 그려서 남쪽 회랑 벽에 붙이려고 하다가 문득 게송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변상도變相圖를 그려 붙일 것이 없다.”
라고 하시고 곧 도중을 불러 말씀하기를,
“이 게송을 지송하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니, 너희들은 다시 지송하라.”
라고 하셨다. 이날 밤 삼경에 신수를 불러 묻기를,
“이 게송을 네가 지은 것이 아닌가?”
신수가 여쭈기를,
“감히 제자가 지었사오나 망령되게 조사의 성위를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문밖에서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격이니, 이 같은 소견으로 무상대도를 어찌 얻겠는가? 본심과 본성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함을 깨달아 만법을 건립하되 염념念念히 걸림이 없어 하나가 참되면 일체가 다 참되어 모든 경계(萬境)가 여여如如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으면 곧 각성을 본 것이다. 또다시 내가 이틀간의 말미를 주는(受由) 것이니 게송을 지어 오거라.”
신수가 심중이 황홀하여 다시 게송을 짓지 못하였다.
그때에 한 동자가 방앗간을 지나며 신수가 지은 게송을 외우니, 혜능이 이 게송을 듣고 마음으로 ‘이 게송은 도를 깨치지 못하였도다’ 하시고 동자에게 물어 말하기를,
“무슨 글귀를 외우는가?”
동자가 대답하기를,
“너 같은 오랑캐가 어찌 알 것인가?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나고 죽는 일이 크고(生死事大)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하니 너희들은 다 게송을 지어 오라. 만일 깨친 자가 있으면, 의발을 전하여 6대 조사를 삼을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교수사께서 지으신 게송이다.”
라고 하였다. 혜능이 말하기를,
“나도 이 게송을 지송하여 인연을 맺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상인上人은 나를 인도하오.”
동자가 혜능을 인도하여 게송이 붙은 곳에 안내하였는데, 혜능이 말하기를,
“나는 글자를 알지 못하니, 상인은 나를 위하여 한번 읽어 주소서.”
그때에 별가別駕 벼슬하는 장일용張日用이라는 사람이 있다가, 높은 목소리로 게송을 외우자 혜능이 청파에 말하기를,
“나도 또한 게송을 지을 것이니, 상인은 써서 주기를 바랍니다.”
별가가 말하기를,
“만일 오랑캐가 게송을 지으면 참으로 희유한 일일 것이다.”
혜능이 말하기를,
“무상대도를 배우고자 한다면, 초학初學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하인下下人도 상상인上上人의 지혜가 있고, 상상인도 하하인만큼 지혜가 못한 자도 있으니, 만일 사람을 업신여기면 무량한 죄가 있으리라.”
별가가 말하기를,
“게송을 외우라. 내가 너를 위하여 써 줄 것이니, 만일 네가 법을 얻거든 나를 먼저 제도하여 주기를 바라노라.”
혜능이 게송을 설하여 말하기를,
“보리菩堤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맑은 거울(明鏡)도 또한 받침대가 아니로다
본래 한 물건이 없으니
어떤 곳에 티끌(塵埃)이 끼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것을 본 도중徒衆들이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가히 얼굴로써 사람을 취하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가 어찌 성인을 부리어 먹었는가?”
하였는데, 홍인 성사께서 악인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짐짓 신짝으로 문질러 버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게송은 견성하지 못한 것이다.”
라고 하시니, 도중들이 모두 의심을 놓아 버렸다. 성사께서 아무도 모르게 방앗간에 가서 혜능을 보시니, 혜능이 돌을 지고 쌀을 찧고(舂精) 있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를 구하는 사람은 법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아니하는 것이다.”
라고 하시고, 또 물으시기를,
“쌀이 다 익었느냐?”
혜능이 여쭙기를,
“쌀은 익은 지 오래되었지만, 택미擇米를 아직 못하였습니다.”
성사께서 주장자로 방아머리를 세 번 치고 주장자를 등 뒤에 메시고 가셨는데, 혜능이 그 뜻을 알고 이날 밤 삼경三更에 뒤 창문을 열고 방장方丈으로 들어가니 성사께서 법의法衣로 창문을 가리시고 『금강경』을 설하셨는데, ‘마땅히 머무는 것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 확철히 크게 깨닫고 여쭙기를,
“어찌 자성이 본래 청정하고 본래 생멸이 없으며, 본래 구족하고 본래 요동擾動함이 없으며, 만법을 생生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알았습니까?”
성사께서 혜능이 본성을 깨달은 것을 아시고 곧 삼경에 법을 전하시니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
성사께서 의발을 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제 네가 6대 조사가 되었으니 천하에 덕을 널리 베풀고(布德天下) 세상의 모든 사람을 널리 제도하여(廣渡蒼生) 끊어짐이 없게 하라.”
라고 하시고, 곧 게송을 주어 말씀하시기를,
“유정有情이 와서 종자種子를 심으면
인지因地에서 과果가 다시 나는도다.
무정無情은 이미 종자가 없는 것이니
성품도 없고 또한 생生할 것도 없도다.”
라고 하셨다. 〔이것은 현상(事)의 측면에서 분석한 것이다.〕 또
“정情도 없고 종자도 없으니 성품도 아니고, 또한 나는 것도 없도다.” 〔이것은 이치(理)의 측면에서 분석한 것이다.〕
성사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달마께서 처음으로 중국으로 오셨을 때 믿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법의法衣를 전하여 신信을 삼았지만, 다만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것이니, 법의法衣와 법기法器는 너에게만 전한 것이다. 이 뒤로는 다시 전하지 말라.
도가 법의와 법기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만일 이 뒤로 의발을 전하다가는 투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죽이는 폐단(殺戮之弊)이 생겨날 것이다. 네가 빨리 이곳을 떠나가야 할 것이다. 악인이 반드시 너를 해할 것이다.”
혜능이 말하기를,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회懷 땅을 만나거든 곧 멈추고, 회會 땅을 만나거든 은신하라.”
라고 하셨다. 성사께서 친히 혜능을 데리고 구강역九江驛에 도착하시니, 마침 한 척의 목선이 있었다. 성사가 친히 노를 저으려 하신지라 혜능이 말하기를,
“미혹할 때에는 성사께서 제자를 건네주셨겠지만, 제자가 깨친 뒤에는 스스로 건너갈 것입니다. 건너는 이름은 하나이지만, 쓰는 곳은 다릅니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나의 도가 너를 말미암아 크게 행할 것이다. 네가 떠난 지 3년이 되면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니, 네가 남방으로 가되 도를 속히 전하지 말라. 시절인연이 오면 꽃 피고 잎 피듯 자연히 도가 천하에 퍼질 것이리라.”
사제 사이에 서로 작별하고 성사께서 돌아와 수일 동안 당堂에 오르지 아니하시니 문도들이 의심이 생겨서 일제히 나아가서 여쭈었다.
“무슨 병환이 나셨습니까?”
성사가 대답하기를,
“내가 의법을 전하여 남방으로 보냈노라.”
“어떤 사람에게 전수하셨습니까?”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혜능에게 전하였노라.”
라고 하셨다. 혜능이 성사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시고(拜別), 두 달 만에 대유령大庾嶺에 당도하시니, 5조 성사의 문도들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장정 수백 명이 혜능의 뒤를 급히 쫓아 법의와 법기를 강탈코자 하였다. 그 가운데도 진혜명陳惠明이라는 사람이 성질이 추악하고 기력이 절등하고 용맹이 남들보다 뛰어났으므로 쫓기를 급하게 하였다. 혜능 성사께서 법의와 법기를 크고 큰 반석 위에 던지며 말씀하시기를,
“이 의발은 신信을 표한 것이다. 가히 힘으로 다투겠는가? 그대는 마음대로 가져가라.”
라고 하시고,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는데, 혜명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환희한 마음으로 급히 의발을 거두려고 하였다. 그런데 태산 같은 바위가 움죽우죽하고 의발은 조금도 요동치 아니하였다. 그러자 혜명이 크게 놀라서 엉겁결에 나오는 말이,
“제자는 법을 위하여 왔사옵고 의발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오니, 바라건대 이와 같은 인생을 제도하여 주소서.”
혜능 성사께서 반석 위에 좌정하시니, 혜명이 엎드려 절하고 말하기를,
“행자께서는 제자를 위하여 법을 설하소서.”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법을 위하여 왔다면, 모든 인연을 쉬어 한 생각도 짓지 말라. 내가 너를 위하여 법을 설할 것이다.”
얼마동안 한참 있다가 혜명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선善도 생각지 말고 악惡도 생각지 말라. 바로 이때를 당하여 어떤 것이 혜명 상좌(明上座)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고?”
라고 하시자, 혜명이 언하言下에 크게 깨닫고 다시 여쭈기를,
“위에서 말씀하신 은밀한 말씀과 은밀한 뜻 밖에 다시 은밀한 뜻이 있습니까?”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설하여 준 것은 곧 은밀한 것이 아니라, 네가 반조返照하면 은밀한 것이 네게 있는 것이다.”
혜명이 또 여쭈기를,
“제가 오랫동안 황매현 동산법회에 있었으나 저의 본래면목을 깨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가르침에 힘입어 본연각성本然覺性을 깨달았습니다. 물 마시는 사람이 차고 더운 것을 자기가 아는 것과 같이 모두 그러하므로 행자는 곧 저의 스승이십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와 나는 한갓 홍인 성사를 사부로 섬기었으니 달리 말을 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 또 묻기를,
“혜명이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성사가 대답하기를,
“원袁 땅54)을 만나거든 그치고 몽蒙 땅을 만나거든 거주하라.”
라고 하셨다. 혜명이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다가 뒤에 쫓아오는 무리를 보고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이 산이 높고 깊숙하고도 그윽하여(深邃) 종적이 묘연하니 다른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 옳다.”
라고 하니, 쫓는 무리들이 다 그렇게 여기고 다른 곳으로 찾아가 버렸다. 성사께서 점차로 나아가서 조계曹溪에 도착하시니, 또 악한 무리가 뒤를 이어 따라왔다. 성사께서 드디어 사회현四會縣으로 가서 사냥하는 사람의 무리 중에 섞이어 피난하였다. 세월이 강물과 같이 흘러서(如流) 어언간 15년을 지냈다.
항상 사냥꾼과 더불어 법을 설하시니 엽사들이 다른 사무를 맡기지 아니하고, 항상 그물이나 지키라고 하였다. 매양 살아 있는 짐승을 보시면 다 놓아 버리시며, 밥을 먹을 때에는 고기 지지는 가마에 나물을 익혀 드시니 혹 사람들이 힐난하여 말하기를,
“고기 먹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성사께서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고기 가에서 익은 나물만 먹을 따름이다.”
라고 하시었다. 하루는 악운이 다하고 설법을 하여 중생을 제도할 시대(說法度生時代)가 옴을 생각하시고 드디어 광주군廣州郡 법성사法性寺로 가셨다. 이곳에서는 인종印宗 법사가 문도 1천여 인을 거느리고 『열반경』을 강론하고 있었다.
때에 마침 바람이 불어 깃대에 달린 깃발(幡)이 펄렁펄렁 움직이고 있었는데, 한 학인은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인다(動).”
라고 하고 또 한 학인은 말하기를,
“깃발이 움직인다.”
라고 하여 서로 각기 의견을 국집하여 논의論義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성사께서 나아가 말씀하시기를,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인자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객이 묻기를,
“그 뜻이 매우 깊으니 어떻게 뜻을 깨우쳐 압니까(解得)?”
용성이 대답하기를,
“바람이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뜻은 ‘바람 성품은 법과 같이 움직이는(法如是動) 것이어서 깃발이 동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성性에 집착된 것이다. 또 깃발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 사람 뜻에는 ‘깃발이 없으면 움직이는 표시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깃발이라는 모습(幡相)에 집착된 것이다.
성사께서 ‘깃발과 바람이 움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바람과 깃발을 내놓고 따로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 곧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곧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삼계전체三界全體가 유심대광명체唯心大光明體가 움직인 것이라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인종仁宗이 이것을 보고 즉시 성사를 맞아 상석으로 모시고 예배한 후에 모든 성전聖典에 있는 깊고 깊은 뜻을 힐난하여 물어보자마자 한 말씀도 문자文字에 상관된 말은 없지만, 말씀마다 간략하고 이치가 적당하여 물 샐 틈이 없었다.
인종이 다시 여쭙기를,
“행자行者는 보통 사람과 같은(如常) 사람이 아니라 진실로 성인일 것입니다. 황매산에서 홍인 성사에게 법을 받고 법의와 법기를 가지고 남쪽으로 오셨다고 하더니 필시 행자가 분명합니다.”
드디어 인종이 제자의 예를 행行하고,
“법의와 법기를 대중에 보이시어서 신信을 표하소서.”
라고 청하자 성사께서 곧 법의와 법기를 보이셨는데, 인종과 그 문도 1천여 인이 일제히 뛸 듯이 기뻐하여(踊躍歡喜) 다 같이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인종이 여쭙기를,
“홍인 성사께서 부촉하신 말씀이 없었습니까?”
성사께서 대답하시기를,
“오직 견성見性만 의논하시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을 의논치 아니하셨다.”
라고 답하셨다. 인종이 말하기를,
“어찌 이 선정과 해탈을 의논치 아니하셨습니까?”
성사께서 대답하시기를,
“선정이니, 해탈이니 하는 것은 두 가지 법이 되는 것이다. 대각의 법이 아니니 대각의 법은 둘이 없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인종이 묻기를,
“둘 없는 법은 어떠한 것입니까?”
성사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열반경』을 강론하니, 밝게 각성覺性을 보는 것이 둘 아닌 법인 것이다.”
인종이 묻기를,
“『열반경』에 말씀하시기를, 고귀덕왕보살高貴德王菩薩이 부처님께 ‘살생·투도·음행·망어(殺盜淫忘)를 범하고 오역죄를 지은 자와 깨달음의 성품 종자를 끊은(覺種性斷) 무성천제無性闡提들은 마땅히 선근각성善根覺性을 끊습니까? 끊지 아니합니까?’”
라고 여쭙자, 대답하시기를,
“대각께서 말씀하시기를, ‘선근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선善이고, 하나는 불선不善이니, 각성은 선과 불선이 아니기 때문에 끊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거니와 지혜 있는 자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님을 요달하는데, 둘 없는 성품이 곧 각성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인종이 듣고 크게 환희하여 여쭈기를,
“제자가 경을 강론한 것은 기왓장과 자갈돌 같고 성사께서 강론하시는 것은 진금眞金과 같은 것입니다.”
하며 찬탄하였다.
제3. 『마하반야경』의 제목을 강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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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92_b_01L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대 성인의 가르침(敎)을 듣고자 한다면, 각각 마음을 청정히 하여 의심을 없애면 선대 성인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의 각성에 큰 지혜는 사람마다 있지만, 마음을 미혹한 까닭으로 깨치지 못하는데, 선각자에게 법을 들어 자기의 본연성품을 깨치라. 각성은 본래 어리석음(愚癡)과 지혜 두 가지 차별이 없지만 미오迷悟로 인하여 다른 것이다.
내가 이제 『마하반야경』의 제목을 설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각각 지혜를 얻게 할 것이니 자세히 들어라.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mahā-prajñā-pāramitā)은 범어梵語이니 우리말로 번역하면 ‘큰 지혜로 생사의 바다를 건너 원명적조圓明寂照한 열반의 언덕에 이른다’는 말씀이니, 이것은 마음을 깨달아 행할 것이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말이 다르지 아니하면 본성을 깨친 것이니, 성품을 여의고는 각이 없는 것이다.
마하摩訶(mahā)는 크다는 말이니, 마음 자체가 광대하여 마치 허공과 같아서 상하변제上下邊際와 방원장단方圓長短과 청황적백淸黃赤白, 대소大小 등이 없고, 시비선악是非善惡이 없으며, 진심嗔心 내고 고집뿐인 마음은 없고, 머리와 꼬리가 없어 모든 대각의 세계와 국토가 허공과 같으니, 그대들의 자성이 공한 것도 다 이와 같은 것이다.
나의 말을 듣고 의해력意解力이 충분치 못한 자는 빈 것에 집착할 것이니 이 사람은 오해誤解한 것이다. 제일로 빈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질 것이다.
비유하자면 허공 자체가 일체 이름과 모양(名相)이 없지만, 만물의 색상色相을 건립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의 자성은 완공頑空이 아니라 참으로 빈 진공묘지眞空妙智이니, 우리의 자성이 만법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고, 선악의 취사와 일체의 염착이 없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다.
대개 공부하는 사람은 얼굴을 잊으며 마음을 죽이어 목석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참으로 제일 큰 병인 것이다. 심량心量이 광대하여 법계를 온통 머금어 있는 것이다. 쓸 때는 요요분명了了分明하여 일체를 역력히 아는 것이니 일체가 곧 하나이고, 하나가 곧 일체인 것이다. 거래去來가 자유自由로워 걸리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지혜智慧(般若, prajñā)라고 하는 것이다.
일체 지혜가 우리의 자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하나가 진실하면 일체가 진실한 것이다. 시시념념時時念念에 항상 지혜를 행行하여 어리석지 아니하면 이것이 지혜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바라밀波羅蜜(pāramitā)은 우리말로 하면 ‘저 언덕에 올라가다’는 뜻이니, 생멸심生滅心이 있으면 삼계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어서 헤매는 것이니, 이것은 범부가 생사의 바다에 빠져 고초를 받는 생사의 언덕이 되는 것이다. 생멸의 번뇌심이 공하면 물이 항상 걸림 없이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성인의 낙원에 오름을 얻은 것이다.
닦지 아니하면 범부이고, 닦으면 자신이 대각과 같은 것이다. 범부가 곧 각覺이고 번뇌가 곧 보리이니, 미혹하면 곧 범부이고 깨치면 곧 각인 것이다. 이 법문으로부터 팔만사천의 지혜가 나는 것이니, 세상 사람이 팔만사천 번뇌가 있는 까닭이다.
만일 번뇌가 없으면 지혜가 항상 나타나 자성을 여의지 아니할 것이다. 이 법을 깨친 자는 밝은 거울이 만상萬象을 비치는 것과 같아 일부러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기억하여 생각하지 아니하며, 집착심이 없어 광망심狂妄心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진여자성眞如自性에 어둡지(昧) 아니하여 지혜로 일체법을 관조함에 대원경大圓鏡과 같아 취사가 없으니 이것이 곧 대각인 것이다.이 가운데 법문은 거듭 반복되므로 풀이에서 삭제한다.
만일 지혜로 관조觀照하면 내외가 명철(內外明徹)하여 본심을 알 것이니, 곧 해탈이고 반야며, 무념無念이다.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일체 법에 염착심이 없으며, 쓰는 곳마다 분명하여 어디에나 두루하되(周遍) 무심하며, 다만 본심이 청정하여 육식이 육근六根의 문두門頭로부터 육진六塵의 경계境界를 대하지만, 물들어 집착함이 없으며, 잡란치 아니하여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으며(自在無礙), 호응하여 쓰는 곳마다 반야삼매般若三昧가 현전하여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저 외도들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죽이는 것과 다른 것이다. 곧 만법을 통달하고, 모든 대각의 경계를 보며, 대각의 지위에 이르러 가는 것이다.”
게송을 읊어 말하기를,
“종통宗通과 설통說通55)이 구족하면
태양이 허공에 처한 것과 같도다.
견성법見性法을 전하는 것은
삿된 종법을 타파하는 것이로다.
법에는 곧 돈점頓漸이 없건만
미오迷悟로 인하여 더딤과 빠름(遲速)이 있도다.
이 견성見性의 법문은
어리석은 사람(愚人) 알지 못하나니
말로 설명하자면 만 가지나 되지만
이치에 계합한다면 하나로 돌아가나니
어두운 번뇌의 집에
항상 지혜의 광명이 비출 것이니라.
사심이 날 때에는 곧 번뇌마가 온 것이요
정견이 날 때에는 곧 보리법왕이 나타나도다.
사심과 정견이 모두 공하면
청정한 무여열반에 도달하도다.
마음을 일으켜 없애고자 하면 곧 망령된 것이니
다만 정직하기만 하면 세 가지 장애가 없도다.
항상 나의 몸에서 허물을 본다면
도와 더불어 상응하도다.
중생의 무리(色類)에 모두 도가 있으니
각각 서로 방해하지 아니하도다.
도를 여의고 따로 도를 찾으려고 하면
종신토록 도를 보지 못할 것이다.
파파波波히 일생을 분주히 뛰어다니며 지내면
끝내는 스스로 괴로워할 따름인 것이다.
참다운 도를 보고자 한다면
정견을 행함이 곧 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참다운 도를 닦는 사람이라면
세간 사람의 허물을 보지 말아야 하니라.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두 다리 쭉 펴고 자리에 누웠을 것이다.
대각의 법은 원래 세간에 있는 것이라
세간을 여의지 아니함이니
세간을 여의고 보리의 도를 찾으면
흡사 토끼 머리에서 뿔을 구하는 것 같도다.
사견과 정견을 다 쳐서 물리치면
하염없는 도를 이루리라.”
라고 하시니, 이때에 대중이 법을 듣고 도심을 일으켜 널리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고(廣濟蒼生) 온 세상을 덕으로 베풀(布德天下) 원력을 발하여 각각 말하기를,
“우리가 무슨 선근 인연으로 영남에 성인이 출세함을 얻어 만나는가?”
라고 하여 무수히 즐거워하였다.
제4. 공덕과 복덕이 다름을 설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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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94_a_01L다른 날(他日)에 소주韶州의 자사刺史 위거韋據가 관료官僚와 사서士庶와 함께 공경히 예배하고 여쭈기를,
“제자 등이 의심이 있사오니 자비로 가르쳐 주옵소서.”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의심이 있거든 곧 물으라.”
위공이 말하기를,
“성사의 말씀이 달마 조사의 종지가 아니옵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니라.”
위공이 말하기를,
“양무제가 달마 대사에게 묻기를, ‘짐이 일생에 가람과 탑묘塔廟를 많이 조성하여 부처님께 공양(聖供)과 보시를 많이 하였으니,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달마 대사가 대답하기를, ‘털끝만큼도 공덕은 없는 것이다’라고 하시니 이것이 의심입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양무제가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하고, 일생에 복 짓기만을 힘쓰니 복은 내생에 받을지라도 무루의 공덕은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다. 공덕과 복덕이 다른 것을 자세히 들어 보아라.
공덕은 법신 자성을 깨치는 데에 있고, 복 짓는 데 있지 않은 것이다. 나의 본성을 보는 것이 공이 되고, 평등심을 행하는 것이 덕이 됨이니, 생각생각이 걸림 없어 항상 본성의 진심묘용眞心妙用을 보는 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다. 내심으로는 겸양하고 하심하는 것이 공이 되고, 밖으로 예를 행하는 것이 덕이 되며, 자성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 공이 되고, 심체心體가 걸림 없는 것이 덕이 되며,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는 것이 공이 되고, 쓰는 데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덕이 되는 것이다. 만일 공덕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이와 같이 닦으면 참다운 공덕이 되는 것이다.
참다운 공덕을 닦는 사람은 경만심輕慢心이 없어서 널리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생각하는데, 만일 경만심이 있어 아상을 끊지 아니하면 공이 없는 것이고, 자성이 진실치 못하면 덕이 없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아상이 있어 항상 일체 모든 사람을 가볍게 업신여기는 까닭인 것이다.
생각생각이 자성에 어둡지(昧) 아니하여 끊임이 없는 것이 공이 되고, 평등이 곧은 것을 행하는 것이 덕이 되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 되고, 스스로 수신修身하는 것이 덕이 되는 것이다. 공덕은 자성을 보고 수련하는 데 있는 것이고, 보시와 공양으로 구할 바가 아닌 것이다. 공덕과 복덕이 다르거든 양무제가 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묻는 것이니, 달마 대사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제5. 안락세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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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94_b_01L위공이 묻기를,
“제자가 항상 보니, 모든 사람들이 대각 미타성존彌陀聖尊을 생각하여 서방의 안락국토에 나기를 원하니, 참으로 극락국토가 있는 것이옵니까? 이것이 의심입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사군아! 자세히 들어라. 대각성존께서 왕사성에 계시면서 경을 설하시니 그 경의 뜻을 관찰하여 보면, 하근기를 위하여 극락이 멀다고 하시고, 상근기를 위하여 극락이 가깝다고 하시니 모든 경문에 이치가 분명한 것이다. 사람은 미오迷悟가 있어서 지속遲速이 있거니와 법은 두 가지가 없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성호聖號를 부르며 생각하여 가지고 극락세계에 나기를 구하거니와 깨달은 사람은 그 마음만 청정히 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정함을 따라 국토가 청정하다’고 하셨느니라. 만일 방위를 정하여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동방 사람은 무량수각을 생각하여 서방에 나기를 원하겠지만, 서방 사람은 어떤 곳에 가서 나기를 원하겠는가? 동방 사람도 마음이 청정하면 죄가 없고, 서방 사람도 마음이 부정하면 죄가 있는 것이다. 동방 사람은 서방에 나기를 원하려니와 서방 사람은 어떤 국토에 나기를 원하겠는가? 범부는 자성을 깨닫지 못하므로 자기의 마음 가운데에 안락국토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서방극락을 따로 구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있는 곳마다 극락세계이니, 그러하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머물러 있는 곳마다 항상 안락하다’고 하신 것이다. 마음의 진뇌망상塵惱妄想과 모든 악심이 없으면 서방극락이 멀지 아니하고, 모든 악심이 가득히 있고는 비록 무량수각을 생각하여도 극락이 멀고도 먼 것이다.”
성사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당장 이 자리(卽今)에 서방의 극락세계를 옮겨다가 잠깐 사이에 너희들에게 보게 할 것이니 다 보기를 원하는가?”
라고 물었다. 대중이 다 갈망하여 공경하게 예배하고 보여 주시기를 간청하였는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중은 따로 구하지 말라. 너희들의 색신色身은 극락국토의 성城이 되고, 눈과 귀와 코와 혀는 극락국의 사대문이 되며, 안으로 뜻(意)은 극락국의 대궐문이 되고, 마음은 땅이 되며, 성품은 왕이 되어 심지 땅에 좌정하여 만반의 정사를 다스리는 것이다. 성품의 왕이 명철하면 마음의 국토가 안락하여 극락세계를 성취하는 것이다. 성품이 있으면 왕이 있고, 성품이 가면 왕이 없는 것이다. 성품이 있으면 몸과 마음이 있고, 성품이 가면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정각을 성취하는 것은 성품을 향向하여 지을지언정 마음 밖의 것을 향하여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성을 미혹하면 중생이고, 자성을 깨치면 대각이니, 자비慈悲는 관음觀音이고 희사喜捨는 대세지大勢至이며, 청정淸淨은 석가釋迦이시고 평등平等은 미타彌陀이시니, 이것이 다 자성으로 지은 것이다.이상은 각覺의 공능功能이다.
인人·아상我相은 수미산이고 사심邪心은 바닷물이며, 번뇌는 파랑이고 독해毒害는 악룡惡龍이며, 허망虛妄은 귀신이고 진노塵勞는 어별魚鱉이며, 탐진貪瞋은 지옥이고 우치愚癡는 축생인 것이다.이상은 무명이 망령되게 지은 것(無名妄造)이다.
십선을 행하면 천당이 스스로 오고, 인아를 없애면 수미산이 꺼꾸러지며, 사심이 없으면 해수가 말라지고, 번뇌가 없으면 파랑이 멸하며, 독해를 없애면 악룡이 끊어지는 것이다.이상은 마음이 공하면 마음이 안락해지는 것(心空心樂)이다.
자성여래가 대광명을 놓아 밖으로 비치면 육문六門이 청정하여, 육욕제천六欲諸天을 파괴할 수 있고, 안으로 비치면 삼독이 곧 없어져서 지옥 등의 죄가 일시에 소멸하는 것이다.이상은 천당과 지옥이 모두 다 몽환夢幻인 것이다. 내외內外가 명철하면 곧 극락세계인 것이다.”
이때에 대중이 법을 듣고 각각 자기의 본연각성이 원명적조圓明寂照하여 자체가 천지 세계와 허공 만물을 다 머금어 가득하여서 가고 올 것이 없는 것을 깨닫고, 성사에게 법은法恩을 사례하며, 각각 대원을 세워 말하기를,
“법계의 중생이 대정각을 성취하여지이다.”
라고 하였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수행하면 안락세계에 왕생하여 무위의 쾌락을 받을 것이다.”
위공이 묻기를,
“세속 사람이 집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수행하겠습니까? 가르쳐 주옵소서.”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는 머리털을 깎고 아니 깎는 데에는 상관이 없으니, 나의 게송을 들으라.
마음이 평등하면 계행을 따로 지닐 것 없으며
행실이 곧으면 선을 닦을 것이 없도다.
은혜로 말하면 친히 부모를 봉양하고
의리로 말하면 상하가 서로 어여삐 여기며
겸양으로 말하면 존비가 화목하고
참음으로 말하면 온갖 악의 시비가 없도다.
만일 선정을 닦아 삼매화三昧火를 얻을 수 있으면
더러운 진흙땅에서 청정한 연꽃이 피는 것이다.
입에 쓴 것은 좋은 약이요
귀에 거슬린 것은 충직한 말인 것이다.
허물을 고치면 지혜가 생겨나고
남의 단점 말하기 좋아하면 자기 내심이 불량하니라.
일용日用에 항상 요익饒益을 행하면
성도成道는 돈으로 보시하는 데 있지 아니하니라.
달도達道는 명심明心하는 데 있는 것이라
어찌 밖으로 향하여 현묘함을 구하리오?”
성사께서 게송을 모두 설하시고 나서는,
“내가 조계로 돌아갈 것이니 의심이 있거든 각각 와서 물으라.”
라고 하셨다.
제6. 정과 혜가 일체(定慧一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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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이 말하기를,
“심지가 일정하고 부동不動하여 산란심이 없는 것을 정定이라고 하고, 심지가 어리석지 아니하여 지혜가 원명圓明한 것을 혜慧라고 하나니 후래의 학자는 이와 같이 미루어 보아야 할 것이다.”)
성사께서 대중에게 보이시기를,
“정과 혜는 하나이고 둘이 아니니, 정은 지혜의 체가 되고, 지혜는 정의 용이 되는 것이다. 지혜에 나아가 체이고, 정에 나아가 지혜이니, 이 뜻을 알면 정혜가 선후의 차별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 닦는 자는 선후를 다투지 아니하는 것이다. 한결같이 행하는 삼매는 시시염념時時念念에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유마경(淨名經)』에 말씀하시기를, ‘곧은 마음(直心)이 도량’56)이며, 보살의 정토라고 하시니,57) 그릇되게 아첨하는 마음(諂曲心)을 행하지 말고, 다만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여 일체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법상法相에 집착하며,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집착하여 말하기를, ‘앉아서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마음도 일으키지 아니하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정과 같은 것이니 도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도는 통通하여 막힌 곳이 없으니 만일 마음이 법에 머무르면 스스로 법에 얽히어 매인 것이 되는 것이다. 정혜를 등불에 비유하자면, 등잔은 광명의 체가 되고, 광명은 등잔의 용이 되는 것이니, 이름은 둘이 있으나 체는 하나인 것과 같아서 정혜도 이와 같아서 둘이 없는 것이다.
나의 법문은 무념無念으로 종지를 삼는 것이니, 무념자無念者는 저 생각에서 생각이 없는 것이고, 무상자無相者는 저 상相에서 상을 여의는 것이며, 무주자無住者는 사람의 근본 성품이니 세간의 선과 악 등의 모든 세계(善惡諸趣)와 원친怨親 등에까지 일체 미워하고 사랑하는 경계가 허공과 같아 털끝만큼도 물들어 집착함이 없으며, 삼세의 일체 경계에 돈연무심頓然無心하니라.
만일 일체법에 머물러 있으면 곧 계박繫縛이 되는 것이 것이다. 머묾(住)이 없는 심체心體가 영지불매靈知不昧하여 모든 계박을 해탈한 것이니 이것이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는 것이고, 상이 없다는 것(無相)은 일체의 상을 여의는 것이니 상을 여의면 법의 체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무상으로 체를 삼는 것이며, 무념無念은 모든 경계에 호응하되 물들지 아니하기 때문에 무념이라 하는 것이고, 생각을 다 끊어 목석과 같이 하는 것을 무념이라고 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학도인學道人은 생각하여 보아라. 자기의 잘못된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거니와 타인을 그르치게 해 주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하므로 무념을 세워 종지를 삼는 것이니, 미혹한 사람은 경계마다 생각이 있으며, 생각마다 사견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일체 진노塵勞 망상妄想이 이 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자성은 본래 한 법도 없으니 만일 얻을 것이 있다면, 망령되이 화복禍福을 말할 것이니, 이것이 진노塵勞 사견邪見인 것이다. 그러하므로 무념으로 종을 삼는 것이니, 없다는 말은 두 상相이 없다는 것이며, 또 진노심塵勞心이 없다는 말인 것이다.
염念은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인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생각하는 것이니, 진여는 생각의 체體가 되고, 생각은 진여본성의 용이 되는 것이니, 그 실은 체와 용이 하나인 것이다. 신심心身이 일여一如하여 둘이 없는 것이다.”
제7. 마음공부하는 데 용심用心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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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식아! 어떤 것이 좌선坐禪하는 것인가? 이 법은 장애가 없는 것이니, 밖으로 일체 선악의 경계를 접촉하여도 심념心念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 좌坐가 되고, 안으로 자성이 움직이지 아니한 것이 선禪이 되는 것이다.
선지식아! 선과 정을 합하여 말한다면, 밖으로 상을 여의고 안으로 산란이 없기 때문에 선정이라고 한다. 만일 밖으로 상에 집착하면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만일 밖으로 상을 여의면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이다.
『유마경(淨名經)』에 말씀하시기를, ‘곧 때에 활연豁然하면 본심으로 돌아옴을 얻는다’58)고 하시며, 계경戒經에 말씀 하시기를, ‘나의 본성이 원래로 청정하다’59)고 하시니 생각생각마다(念念) 본성에 어둡지(昧) 아니하면 대각의 도를 성취할 것이다.
마음이니, 청정이니, 부동이니 할 것 없어 모두 집착할 것 없는 것이다. 마음이 스스로 ‘내가 마음이다’라고 하지 아니하는데, 청정하다는 마음을 일으켜 집착하면 도리어 망妄이 되는 것이다. 성품이 본래 청정한데도, 청정하다는 마음을 일으켜 집착하면 도리어 망이 되는 것이다. 망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면 다 망상이 되는 것이다. 참다운 부동심不動心을 얻은 자는 일체의 시비와 선악에 탄연坦然하여 무심한데, 이것이 곧 자성이 부동不動인 것이다.”
제8.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을 전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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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97_a_01L그때에 성사께서 사방四方에 사서士庶가 좌하座下에 모인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옴이여! 이 일은 자성으로부터 온 것이니, 일체시에 생각생각마다(念念) 마음을 청정히 하여 스스로 닦고 행해야 할 것이다. 자기의 법신진성法身眞性을 보아 자기를 스스로 경계하며 제도하여야만 옳다.
이미 먼 곳으로부터 왔다면 다 한가지 인연이 있는 것이니, 각각 꿇어앉아라. 먼저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을 전할 것이다.
첫째는 계향戒香이니, 탐진치와 일체의 악심과 남을 겁박하여 해롭게 할 마음과 질투심과 일체의 그릇된 마음을 쓰지 아니할 것이다.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모든 선악경계를 보고 심지心地가 요동하여 산란치 않는 것이다.
셋째는 혜향慧香이니, 마음이 걸림 없으며 항상 지혜로 자성을 관조하여 모든 악을 짓지 아니하며, 비록 모든 선행을 행하여도 집착심이 없으며, 윗사람을 공경히 하고 아랫사람은 생각하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貧窮), 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서 자식 없는(鰥寡孤獨) 사람들을 잘 감싸고 보호(斗護)하여 줄 것이다.
넷째는 자심이 일체의 선악에 반연한 바 없어 걸림이 없고 자재한 것이다.
다섯째는 자심이 이미 반연한 바가 없을 것이라면, 다만 공적空寂한 것만 집착하여 지키지 말고 곧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서(廣學多聞) 자기의 본심을 알며, 대각의 진리를 통달하여 깨달음의 빛을 동화시켜 중생을 대접하되(和光接物) 인상·아상이 없으면 끝까지 진성이 변치 아니하는데, 이것이 오분법신향인 것이다. 각각의 마음에서 훈습薰習할 것이지, 마음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니라.”
제9. 무상참회無相懺悔를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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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97_b_01L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에게 무상참회를 주어 삼세죄업을 소멸하고, 삼업三業이 청정케 할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선창先昌하는 소리를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일시에 동창同唱하라.
‘제자들이 무시겁래無始劫來로 어리석어(愚癡) 미혹한 마음으로 지은 일체의 악업 등의 죄를 모두 참회하노니, 원컨대 일시에 소멸하여 영원히 일어나지 아니하여지이다.
또 앞 생각(前念)과 이제 생각(今念)과 뒷생각(後念)으로부터 생각생각마다(念念) 어리석고 미혹(愚迷)한 것에 물들지 아니하리다.
제자들이 무시겁으로부터 교만하고 속임(憍誑)으로 지은 악업 등의 죄를 일시에 소멸하여 영원히 나타나지 아니하여지이다. 앞 생각과 이제 생각과 뒷생각으로부터 교만하고 속임에 물들지 아니하리다.
제자들이 무시겁으로부터 질투로 지은 일체 악업 등의 죄를 다 참회하노니, 일시에 소멸하여 영원히 생겨나지 아니하여지이다. 앞 생각과 이제 생각과 뒷생각으로부터 질투에 물들지 아니하오리다.’
이것이 무상참회이니라. 선지식아! 어떤 것을 참회懺悔라고 하는가?
앞의 죄업을 뉘우쳐 다시는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이 ‘참懺’이 되고, 뒤의 죄업을 미리 잘못을 뉘우쳐(悔過) 다시는 생겨나지 아니하게 하는 것을 ‘회悔’라고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범부(凡愚)는 전에 지은 죄과만 ‘참’할 줄만 알고, 뒤에 죄과를 회개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전과前過도 멸하지 아니하고, 후과가 또 생겨나니 어찌 참회가 될 것인가?”
제10. 네 가지 큰 서원을 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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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98_a_01L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참회하여 마쳤으니 각각 마음을 써서 자세히 들어라.
사람사람마다 자기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중생이 수가 없으니, 서원코 제도하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이 자심중생自心衆生인가? 사미심邪迷心과 광망심誑妄心과 불선심不善心과 질투심嫉妬心과 악독심惡毒心과 이와 같은 등의 마음(如是等心)이 다 나의 마음으로 일어나는 중생이니, 사람마다 자기의 본성에 있는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자심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밖으로 선지식이 제도하는 것이 많으니라. 선각자는 후진에게 밝은 등불이 되어 인도하여 줄 뿐인 것이다. 어떤 것이 자성을 자기가 제도하는 것인가? 자심 가운데에 사견과 번뇌와 우치한 중생이 일어나거든 정견을 가져 제도해야 할 것이다. 이미 정견이 있다고 한다면, 각각 반야지혜를 행하면 어리석고 미망한 중생이 화하여 대각을 성취할 것이다.
선지식아, 삿된 것(邪)이 오거든 바른 것(正)으로 제도하고, 미혹한 것(迷)이 오거든 깨침(悟)으로써 제도하며, 우치한 것이 오거든 지혜로써 제도하고, 악한 것이 오거든 선으로써 제도할 것이니 이것이 참으로 제도하는 것이다.
번뇌가 끝이 없으니 서원코 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 반야지혜로 모든 허망한 사량심을 제도하는 것이고, 또 법문이 다함이 없으니 서원코 배우겠다는 것은 모름지기 자성을 깨워 항상 정법을 행하는 것이다. 또 위없는 참다운 도를 서원코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항상 하심하여 진정한 도를 행하여 미오迷悟를 여읠 수 있으며, 항상 큰 지혜를 일으켜 진망眞妄을 타파하고 곧 본연각성을 깨달아 항상 수행하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홍서원四弘誓願이 되는 것이다.”
제11. 삼신이 일체임을 설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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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98_b_01L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청정법신은 우리의 본연성本然性이니 만법이 이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일체의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악한 행이 일어나고, 일체의 선한 일을 생각하면 곧 선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만법이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청명한 하늘에 해와 달이 밝고 환함(明朗)에 우주의 만상이 다 해와 달의 광명으로 말미암아 역력히 분명하다가, 구름이 덮임에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다가, 홀연히 바람이 불어 구름이 흩어지면 위아래가 일시에 밝고 환해 만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성품도 그러하여 밝은 지혜의 태양이 항상 밝고 환하지만 망념의 구름이 덮이면 자성이 밝고 환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성인의 진정한 법을 듣고 미혹한 구름이 흩어지면 자성이 청정하여 만법이 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름이 청정법신淸淨法身이니, 자기의 심성 밖에 다른 것에 귀의하는 것은 다 외도의 지견인 것이다. 항상 자기의 심성 가운데에 불선심과 질투심과 교만심60)과 오아심吾我心과 광망심誑妄心과 경만심輕慢心61)과 사견심邪見心과 공고심貢高心과 일체의 시간 동안 불선행을 제거하여 나의 허물을 항상 살피고, 타인의 좋아함과 싫어함(好惡), 장점과 단점, 옳고 그름을 의논치 말아야 할 것이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한 물건도 없으며, 없고 없는 것도 공하여 식識과 지혜가 미치지 못한 것을 거짓 이름(假名)하여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신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면, 허공에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 악한 일을 생각(思量)하면 변화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일을 생각하면 변화하여 천당이 되며, 독해심毒害心은 변화하여 용사가 되고, 자비심은 변화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화하여 상계上界가 되고, 우치는 변화하여 하방下方이 되는 것이니, 그 허다한 종류를 모두 다 말할 수 없다.
자성에 변화가 매우 많은데, 미혹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생각마다 악심을 내어 항상 악도를 행하는데, 그것이 중생의 용심用心인 것이다.
대개 대용大用이 눈앞에 나타나(現前) 항상 악념惡念이 다하고 만선萬善을 행하는 것은 자성의 화신이고, 생각생각마다 지혜가 원명하여 세간과 출세간, 선과 악의 제법이 둘 없음을 통달하여 큰 지혜 광명이 낭연朗然하게 독존獨存한 것을 원만보신圓滿報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간략히 말한다면,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성품의 근본이 허공 같으니 이 이름이 법신이고, 또 법신으로부터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心用)을 화신化身이라고 하며,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가 둘이 없어 내외內外가 한 지혜광명으로 변화한 것이 원만보신인 것이다.”
성사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기를,
“미혹한 이는 복만 닦고 도를 닦지 아니하고
다만 복 닦는 것이 문득 도라고 말하니,
보시와 공양하는 것은 복이 끝없이 많아
마음에 삼악은 원래元來로 지었도다.
복 닦는 것을 가지고 죄를 멸하고자 하지만
후세에 복은 얻어도 죄가 도리어 있도다.
다만 자기 마음에 죄연罪緣을 없애고자 한다면
각각 자성을 향하여 참으로 참회해야 할 것이다.
만일 당래에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모든 법상法相을 여의면 마음이 청정하니라.”
이때에 대중이 법을 듣고 기뻐하여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제12. 모든 근숙정사根熟正士들이 참청參請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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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099_b_01L성사께서 소주韶州의 조후촌曹侯村으로 돌아오시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오직 유지략劉志略이라는 사람이 예로써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 사람의 고모가 있어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름이 무진장無盡藏이었다. 항상 『대열반경』을 독송하였는데, 성사께서 잠깐 들으시고 오묘한 뜻을 통달하시어 깊은 취지를 강설하시니, 비구니가 책을 펴서 글자를 물었는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니 경의 뜻이나 물어라.”
비구니가 대답하기를,
“문자도 모르는데 어찌 뜻을 알겠는가?”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대각의 진리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비구니가 크게 놀라서 경의 뜻을 물으니 간략하고 분명하였다. 비구니가 각 촌락에 다니며 두루 거룩한 도덕을 찬송하니, 그 지역 주민들이 다투어 서로 와서 예배하고 도를 물었다.
이때에 보림도량寶林道場이 있었는데, 수隋나라 말년에 병화로 폐지된 것이었다. 이 보찰寶刹을 다시 건축하고, 성사께서 9개월을 계셨는데, 또 북방의 신수의 문도들이 성사를 해하고자 왔는데, 성사께서 항거하지 아니하시고 안산으로 가서 은신하셨다. 그 악인들이 온 산에다 불을 놓아서 수천 년 동안 묵어 있었던 산림이 불이 붙어서 불빛이 하늘에 가득 차 벼락같이 불이 몰아왔는데, 성사께서 신통으로 큰 바위를 밀고 들어가서 결가부좌하고 엄연히 앉으셨다. 지금까지도 큰 바위 속에 성사의 전신의 인상이 박혀서 의복의 문양까지도 완연하므로 세인이 이 바위를 이름하여 피난석避難石이라고 하였다. 성사께서 오직 5조 홍인 대사의 말씀에 의지하여 회懷땅과 회會 땅 두 고을로 옮겨 가서 은신하셨다.
법해法海는 소주韶州의 곡강曲江 땅 사람이다. 처음으로 성사에게 참배參拜하고 곧 물어 말하기를,
“마음(心)에 상즉(卽)한 것이 곧 각覺이라고 하시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뜻이 있습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앞 생각(前念)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이 곧 마음(心)이고, 뒷생각(後念)이 멸滅하지 아니하는 것이 곧 각覺이며, 일체상一切相을 이루는 것이 곧 마음이고, 일체상을 여의는 것이 곧 각인 것이다. 내가 만일 모두 갖추어 설한다면, 궁겁窮劫이라도 다 할 수 없으니 나의 게송을 들어 보아라.
마음에 상즉한 것이 혜慧이고
각覺에 상즉한 것이 정定이니
정과 혜를 등등等等이 지니면
뜻이 청정해지는 것이니라.
이 법문을 깨친 것은
다생에 네가 많이 익혔던 성품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본래 무생無生을 쓰면
쌍으로 이 정혜를 닦는 것이라네.”
(용성이 말하기를,
“앞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모든 법의 당처가 공적하여 일정하게 요동치 아니한 것이고, 뒷생각이 멸하지 아니하면 각혜원명覺慧圓明한 것이니, 이것은 정定에 상즉한 혜慧라는 말이다. 또 일체상을 이룬 것이 마음이라는 말은 앞 구절을 뒤집어 놓은 것이고, 또 일체상을 여의는 것이 곧 각覺이라는 말은 둘째 구절을 뒤집어 놓은 말이니, 이것은 혜에 상즉한 정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것은 정혜로써 분석하였거니와 또다시 다른 한 뜻이 있는데, 물은 곧 젖는 것이니, 마음 전체가 곧 각이라는 말이고, 젖는 것이 곧 물이니, 이것은 각의 전체가 곧 마음이라는 말이다. 이 비유를 깨치면 범부와 성인을 물론하고 둘 없는 것을 요달할 것이다.”)
법달法達은 홍주洪州 사람이다. 7세에 출가하여 『법화경』을 독송하였다. 성사에게 예배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 않거늘 성사께서 법달의 마음을 알고 묻기를,
“너의 마음 가운데에 필연코 한 물건이 있도다.”
법달이 여쭈기를,
“『법화경』을 삼천 독이나 넘게 하였나이다.”
성사께서 송頌하여 말씀하기를,
“예는 본래 아만의 당幢이 끊어졌는데
머리가 어찌 땅에 닿지 아니하는가?
아가 있으면 곧 죄가 생겨나는 것이니
공덕 되는 것을 잊어버리면 복을 견줄 데 없는 것이다.”
다시 송하여 말씀하기를,
“너의 이름이 법달이라
부지런히 지송하여 쉬지 아니하였으나
공연히 음성만 쫓았도다.
마음을 밝힌(明心) 사람을 정사正士라 하는 것이다.
네가 이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너를 위해 설명할 것이다.
다만 대각께서 말없는 것을 믿으면
연꽃이 입으로부터 피어나리라.”
법달이 지성으로 참회하여 말하기를,
“이 뒤에는 일체 사람에게 공경하고 하심을 하올 것이니, 불쌍하게(哀愍) 여기소서.”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글을 배우지 아니하였으니, 경문 일편을 외우라.”
법달이 「비유품」까지 외웠는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만 그치라. 이 경은 원래 대각께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하여 출세出世하셨다’ 하시니 일대사는 곧 대각의 지견이다. 세상 사람이 밖으로 미혹하여 상相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여 공空에 집착하는데, 만일 저 상에서 상을 여의고, 공에서 공을 여의면, 곧 내외를 미혹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을 깨친 자는 각覺의 지견知見이 열린 것이니 네 가지로 분석할 것이다.
각覺의 지견知見을 여는 것(開)과 각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각의 지견을 깨친 것(悟)과 각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니, 만일 열어 보임(開示)을 듣고 문득 깨치면 곧 각의 지견이어서 본래 참된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삼가하여 경의 뜻을 그릇되게 알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각의 지견을 열어 보임(開示)을 듣고, 이것이 대각의 지견이어서 우리는 알 길이 없다고 하는 자는 경전과 각을 비방하는 것이다. 대각은 이미 깨치셨는데, 어찌 다시 열어 보일 것이 있겠는가? 네가 마땅히 믿는다면, 다만 너의 마음이어서 다시 다른 법이 없는 것이다.
대개 일체의 중생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진경塵境을 탐하여 밖으로 반연하고, 안으로 분주하여 달게 고뇌苦惱를 받으므로 대각께서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입이 쓰도록 권하여 모든 고통을 침식케 하시니, 간절하게 밖으로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도 또한 사람에게 권하여 자심 가운데 각의 지견知見을 열게 하되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삿되고 어리석고 미혹하여(愚迷) 죄를 지으며, 입은 착하고 마음은 악하여 탐진과 질투와 첨곡과 아만으로 사람을 침노하고, 물건을 해롭게 하여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만일 마음을 바르게 하여 항상 지혜를 일으켜 자심을 관조觀照하여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할 수 있다면, 이것이 각의 지견知見을 여는 것이다.
너는 항상 각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라. 각의 지견은 곧 출세간이고, 중생의 지견은 곧 세간인 것이다. 네가 경을 외우기만 하여 한갓 공과功課를 삼는 것은 물소가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는 것은 곧 경을 굴리는 것이고,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곧 경의 굴림을 입는 것이다.”
송하여 말씀하기를,
“마음을 미혹하면 『법화경』에 굴림이 되고
마음을 깨치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다.
경을 외우되 오랫동안 밝지 못하면
뜻과 더불어 원수 집을 짓는도다
생각이 없으면 생각이 바르고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사邪를 이루는도다.
있고 없는 것을 헤아리지 아니하면
길이 백우거白牛車를 몰게 될 것이다.”
법달이 법을 듣고 크게 깨닫고 다시 묻기를,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성문聲聞에서부터 정사正士들까지 다 한결같이 생각하여 헤아리더라도 대각의 지혜를 측량치 못한다’62)고 하시니 오직 원컨대 성사는 가르쳐 주소서.”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대각의 본연성품은 일체一切의 계교사량計較思量으로 헤아려도 알 수 없으니, 그 허물이 재고 헤아리는(度量) 데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다 생각하여 아무리 측량側量하여도 전전輾轉히 도로 더불어 멀어지는 것이다. 만약 이 이치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곧 이 자리에서 물러갈 것이다. 백우거白牛車를 타고 앉아서 다시 문밖을 향하여 세 수레를 찾는 것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一乘만 있고, 나머지 수레(乘)가 이승(二)도 없고, 삼승(三)도 없다’63)고 하시며, 내지는 ‘수없는 방편方便과 언설言說이 다 일승一乘을 위함이다’64)라고 하였다. 삼거三車는 거짓된 것이니 옛적에 미혹할 때를 말씀한 것이고, 일승은 깨쳤을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거짓된 것을 버리고, 진실한 데로 돌아오면 진실한 이름도 없는 것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칠보진재七寶珍財를 너에게 부촉해 줄 것이니 오직 네가 쓸 것이다. 다시 아비와 자식 생각이 없으며, 또한 쓰는 생각도 없으니, 이것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것이다. 이 이치를 깨치면 겁으로부터 겁에 이르도록 『법화경』을 잠시라도 놓지 아니할 것이며,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는 것이다.”
법달이 크게 기뻐하여 게송을 지어 찬탄하였다.
“『법화경』 삼천 번 독송한 것이
조계曹溪의 한 말씀으로 없어졌도다.
세간에 출현하신 뜻을 밝히지 못하면
어찌 다생에 얽힌 소견을 쉬리오?
양거·녹거·우거는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처음·중간·나중도 잘 드날렸도다.
누가 화택 가운데에 원래로
법왕이 있음을 알았으리오?”
지통智通은 수주壽州의 안풍安豐 사람이다. 처음에는 『능가경楞伽經』을 천 번이나 보며 그 깊은 뜻을 궁구하였으나 오묘한 진리를 알지 못하여 매우 답답하게 지냈었다. 그런데 성사께서 세간에 출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와서 예배하고 경의 뜻을 물었는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청정법신淸淨法身은 너의 성품이고, 원만보신圓滿報身은 너의 지혜이며,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은 너의 행이니, 만일 본성을 여의고 따로 삼신三身이 있음을 말하면 곧 삼신이 있고, 사지四智는 없는 것이며, 만일 삼신이 자성 없음을 알면 곧 이름이 사지보리四智菩堤인 것이다.
나의 게송을 들어라.
자성에 삼신을 갖추었으니
발명發明하면 사지四智를 성취하는도다.
보고 듣는 것을 여의지 않고
초연超然히 각지覺地에 오르는도다.”
지통이 다시 여쭈기를,
“사지四智의 뜻을 듣고자 합니다.”
성사가 대답하기를,
“이미 삼신三身을 알았다면, 문득 사지를 밝게 알 것이니, 어찌 다시 묻는가? 만일 사지를 여의고 따로 사지를 말하면, 이 이름이 사지는 있고, 삼신은 없는 것이니, 곧 사지가 있으나 도리어 사지가 없는 것이다. 다시 나의 게송을 들어라.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성품이 청정하고
평등성지平等性智는 마음이 병病 없고
묘관찰지妙觀察智는 견見이 공功 아니며,
성소작지成所作智는 대원경지(圓鏡智)와 같도다.
전오식과 제8식은 과상果上에서 굴리고(轉) 육식과 칠식은 인중因中에서 굴리니
다만 이름과 언설言說만 있을지언정 모두 진실한 성품 없도다.
만일 굴리는 곳에 망정만 없으면
번거로이 일어나되 항상 내가 정定에 처하도다.”
(용성이 말하기를,
“팔식을 굴리어 법신法身을 발명發明하고, 제7식을 굴리어 보신報身을 발명하며, 제6식을 굴리어 화신化身을 발명하는 것이다. 전오식前五識을 굴리어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룬 것은 제8식第八識과 동체同體이기 때문에 따로 떨어져 갈라설(各立) 것이 없는 것이다.
삼신三身을 발명하면 사지四智가 되는 것이니, 따로 분석할 것이 없다. 제8식 자체自體가 허공과 같으며, 세계 천지의 만유萬有를 머금어 있는 것이니, 이 팔식을 굴리면 온전히 법신이 독로獨露하는 것이고, 칠식의 자체(七識自體)는 항심사량恒審思量하는 것이다. 이것을 굴리어 보신報身을 성취하는 것이며, 육식은 판사식辦事識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굴리어 화신을 성취한 것이고, 제8식이 오근문두五根門頭에 비친 것이 전오식前五識이니 이 오식은 제8식과 동체(五識與八識同體)이기 때문에 따로 분석할 것이 없는 것이다.”)
지통이 삼신과 사지를 깨닫고 게송을 바쳐 말하기를,
“삼신이 원래부터 나의 체이고,
사지가 본마음에 밝았도다.
삼신사지三身四智가 융통融通하면
응應함을 따라 자유自由롭도다
닦을 마음을 내면 다 망상妄想이고
공적을 지키는 것은 진정이 아니로다.
사師를 인하여 묘지妙旨를 깨달으니
마침내 자성을 염오染汚치 아니하도다.”
지상智常은 신주信州 귀계貴谿 사람이다. 일찍이 대통 선각大通先覺에게 도를 묻기를,
“어떤 것이 나의 본마음이며 본 성품입니까?”
대통이 대답하기를,
“네가 허공을 보느냐?”
대답하기를,
“보나이다.”
“허공이 무슨 생김새(相貌)가 있느냐?”
대답하기를,
“생김새가 없습니다.”
대통이 말하기를,
“너의 본성도 허공과 같아 한 물건도 볼 것이 없는 것이 정견正見이고, 한 물건도 알 것 없는 것이 참다운 지견智見인 것이다. 청황적백장단靑黃赤白長短이 없으니, 다만 본원本源이 청정淸淨하고 각체가 원명(覺體圓明)한 것이 정각正覺을 성취한 것이라고 하셨지만, 오히려 알지 못하오니 성사께서는 자비로 가르치어 주옵소서.”
성사께서 곧 게송으로서 보이시기를,
“한 법도 볼 것 없다는 것은 그 병이 볼 것 없는 소견所見을 둔 것이니
비유하자면 크게 뜬 구름이 태양 광명을 가리는 것과 같이
한 법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비었다는 알음을 지키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큰 허공에 번개가 생生하는 것 같도다.
이와 같이 지견知見이 문득 일어나면
그릇 아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방편을 해득하리오?
네가 마땅히 그릇됨을 알면
자기의 영광靈光이 항상 현전現前하리라.”
지상은 뜻이 활연豁然하여 게송을 지어 말하기를,
“무단無端히 지견知見을 내어
상에 집착하여 보리를 구하였도다.
정견情見 둔 것을 한 생각 깨달으니
어찌 미혹한 때와 다르리오.
자성각 근원의 본체(自性覺源體)는
알음을 따라 그릇 윤회하는도다.
조사의 집에 들지 않았다면
두 머리에 나아가 망연할 뻔하였도다.”
지도智道는 광주廣州 남해南海 사람이다. 『열반경涅槃經』을 10여 년이나 궁구하여도 대의를 알지 못하여 성사에게 경의 대의大意를 묻는데, 성사께서 대답하기를,
“네가 어느 대문大文을 알지 못하는가?”
지도가 말하기를,
“경에 말씀하시길,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으므로(無常) 일어나고 멸하는 법이니,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멸하여 마치면 적멸寂滅이어서 낙樂이 된다’65)고 하시니 이 대문大文에 의심이 있나이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떻게 의심하는가?”
지도가 말하기를,
“일체중생이 색신과 법신이 있으니, 색신은 멸함이 없어 생멸이 있는 것이고, 법신은 떳떳하여 지각知覺이 없는데, 경의 말씀이 ‘생멸生滅이 멸하여 마치면 적멸寂滅이 낙이 된다’고 하시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몸이 적멸하고 어떤 몸이 낙을 받는 것인가요?
만일 색신色身이 낙을 받는다고 한다면, 색신은 멸할 때에 지·수·화·풍 사대가 흩어질 때에 온전히 고통뿐이므로 그 고통을 낙이라고 할 수 없고, 만일 법신이 낙을 받는다고 하면 법신은 적멸하여 목석과 같을 것이니 누가 낙을 받을까요?
또 법성法性은 이 생멸生滅의 체가 되고 오온五蘊은 생멸의 용이 된 것이니, 체體는 하나인데 용用은 다섯이라 생멸이 떳떳할 것이니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생겨나는 것은 체體로부터 용用이 일어나는 것이니, (마치 물로부터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고) 멸하는 것은 용을 거두어서(攝) 체로 돌아가는 것이니 마치 파도가 멸하여 물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나는 것은 용을 거두어서 체로 돌아갔다가, 다시 용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파도가 물로부터 멸하였다가 다시 물로부터 일어나는 것과 같고, 사람이 태어났다가 다시 죽는 것은 체로부터 용이 생겨났다가 다시 용을 거두어서 체로 돌아가는 것이니, 파도가 일어났다가 다시 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태어나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니,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생멸이 떳떳한 것이다.
유정의 무리와 같이 생사가 상속相續되어 단멸斷滅이 없을 것이다. 만일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영원히 적멸에 돌아가 무정의 물체와 같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일체 모든 법이 열반에 금복禁伏한 바를 입어 오히려 생겨날 수도 없으니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성사께서 말하기를,
“네가 대각의 제자로서 어찌 외도外道의 단멸斷滅과 상견常見 두 가지 사견을 익혀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의론하고자 하는가? 네 말과 같다고 한다면 색신 밖에 따로 법신이 있고, 생멸을 여의고 따로 적멸을 구하는구나. 또 열반의 상락常樂은 몸이 있어 수용함을 말하니, 이것은 생사를 집착하며 세락世樂을 탐착한 것이다.
네가 마땅히 알라. 대각께서 일체 미혹한 사람들이 오온의 화합함을 그릇 알아 자신상自身相으로 삼으며, 일체법을 분별하여 외진상外塵相을 삼아 살기는 좋아하고, 죽기는 싫어하여 생각생각이 천류遷流하되, 헛된 것을 알지 못하여 그릇 윤회를 받아 상락열반常樂涅槃으로써 도리어 고상苦相을 삼아 날이 마치도록 치구馳求함을 불쌍히 생각하신 까닭으로 대각께서 열반진락涅槃眞樂을 보이신 것이다.
이것은 찰나刹那라도 생겨나는 상相이 없으며 찰나라도 멸하는 상이 없어서 다시 생멸生滅을 가히 멸滅할 것이 없는 것이 곧 적멸寂滅이 현전現前한 것이다. 현전할 때를 당하여 또한 현전한 상량商量이 없어 이것이 떳떳한 낙이다. 이 낙樂은 받는 자도 없으며 또한 아니 받는 자도 없는데, 어찌 일체오용一體五用의 이름이 있겠는가? 하물며 다시 말하기를, ‘열반이 모든 법을 금복禁伏하여 영원히 생겨나지 못하게 하리오?’ 이것은 대각을 비방하고 법을 파괴하는 것이니, 나의 게송을 들어라.
위없는 큰 열반이
뚜렷이 밝아 항상 고요히 빛나거늘
어리석은 범부(凡愚)는 죽는다고 하고
외도外道는 단견과 상견에 집착하네.
모든 이승二乘이 구하는 것은
천진무작天眞無作이라고 명목하는데,
다 망정妄情으로 헤아린 것이며
육십이견六十二見이 근본이라네.
망령되이 허망한 이름을 세운 것이니
어찌 진실한 뜻이 되리오?
즉 정량情量에 뛰어난 사람이라서
취사取捨 없음을 통달하여야
오온법五蘊法을 아는 것과
오온 가운데에 나와
밖으로 여러 가지 상相을 나타내는 것과
낱낱 음성의 상이
평등하여 몽환 같아
범부나 성인의 소견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열반의 지혜를 일으키지 아니하여
이변과 삼제가 끊어졌으며
항상 육근을 응하여 쓰되
쓰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일체법을 분별하되
분별한다는 생각 일으키지 아니하니라.
겁화劫火가 바다 밑을 불태우며
바람북이 수미산왕을 치더라도
진상眞常의 적멸락과
열반상이 이와 같으니라.
내가 이제 강연히 말하는 것은
너로 하여금 사견을 버리게 하노니
네가 너의 말만 따라 견해를 일으키지 아니하면
네가 조금이나마 안다고 허락할 것이다.”
지도智道는 게송을 듣고 크게 깨달아 환희용약하며 예배하고 물러갔다.
행사行思는 성이 유劉씨이고 길주吉州의 안성安城 사람이다. 성사에게 묻기를,
“마땅히 무엇을 하여야만 계급階級에 떨어지지 아니하오리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슨 계급에 떨어졌는가?”
행사行思가 말하기를,
“성제聖諦도 하지 아니하거니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성사께서 법기法器로 여기시고 대중의 상수로 삼으셨다. 성사께서 어느 날에 일러 말씀하시기를,
“네가 마땅히 일방에 분화分化하여 나의 법을 끊이지 않게 하라.”
행사가 드디어 길주吉州의 청원산靑原山에 가서 도를 폈다.
회양懷讓은 금주金州의 두씨杜氏 아들이다. 성사에게 예배하니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고?”
대답하기를,
“숭산嵩山으로부터 왔습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말고 다시 대답하여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대답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하여도 곧 맞지 아니합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닦고 증득함을 할 수 있다고 하는가?”
대답하기를,
“닦고 증득하는 것은 곧 없지는 아니하지만, 물들어 더럽혀짐은 얻지 못하나이다.”
성사께서 크게 인가認可하여 말씀하시기를,
“단지 이 오염汚染치 아니하는 것이 모든 대각께서 호념護念하신 것이니 너도 이와 같고 나도 이와 같은 것이다. 서천西天의 반야다라般若多羅(Prajñātāra)께서 미리 예언을 하시기를, ‘너의 족하足下에서 한 송아지가 태어나서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하시니 (이것은 회양의 문하에 마조가 나서 설법으로 도생度生하되 그 법을 쓰는 것이 매우 고준高峻하다는 말인 것이다.) 너의 마음에 갈무리해 두고 속히 설하지 말라.”
라고 하시니 회양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성사를 좌우에 모시고 15년을 지내시니 도가 날로 더욱 깊어 갔다. 뒤에 남악산南岳山에 가서 도를 크게 천양하였다.
영가 현각永嘉玄覺은 젊어서 경론經論을 익히고, 또 천태지관 법문을 정밀히 닦아 가다가 『유마경維摩經』을 보고 심지心地가 밝아졌다. 성사의 제자 현책玄策이 천하에 두루 노닐다가 영가와 서로 담론談論하여 보니 말마다 조사의 도에 계합되었는데 현책이 묻기를,
“그대(仁者)의 선생은 누구이신가요?”
영가가 대답하기를,
“나는 선생이 없고 다만 『유마경』을 보다가 도를 깨쳤으나, 아직 증명할 선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현책이 말하기를,
“위음왕威音王이 출세하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위음왕이 출세하신 뒤에는 선생 없이 스스로 깨친 자는 다 천연외도天然外道이다.”
영가가 말하기를,
“그러면 그대가 나를 위하여 증명하소서.”
현책이 말하기를,
“나의 말은 오히려 가볍거니와(輕) 조계에 육조 성사가 계셔서 천하의 수도인이 운집하여 다 도를 받으니 그대도 뜻이 있으면, 나와 같이 가서 법을 받는 것이 어떠한가?”
영가가 기뻐하여 현책과 같이 가서 성사를 뵈올 때 위로 성사의 주위를 세 번 돌고(三匝) 석장錫杖을 떨치고 엄연히 서 있었는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대개 도를 닦은 자는 삼천 가지의 위의威儀와 팔만 가지의 세행細行이 구족하였는데, 대덕은 어디로부터 왔기에 큰 아만을 일으키는가?”
영가가 말하기를,
“생사의 일이 크고(生死事大) 무상이 매우 빠릅니다(無常迅速).”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무생無生이 마침내 빠름(速)이 없는 것을 체달體達하여 취取하지 아니하는가?”
영가가 말하기를,
“체體는 곧 무생無生이므로 근본을 요달了達하면 빠름(速)이 없습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옳고, 옳다!”
라고 하시니, 영가가 다시 위의威儀를 갖추어 예배하고 조금 있다가 하직하였는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가장 빠르지만, 본래 움직임(動)이 아닌데, 어찌 빠름이 있겠는가? 누가 움직(動)이지 아니하는 것을 아는가?”
영가가 말하기를,
“성사가 스스로 분별分別을 내나이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깊이 무생無生한 뜻을 얻었도다.”
영가가 말하기를,
“무생이 어찌 뜻에 있으리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뜻이 없다면 누가 마땅히 분별分別하는가?”
“분별도 또한 뜻이 아닙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훌륭하구나! 하룻밤 머물고 가라.”
라고 하시니, 세상이 일숙각一宿覺이라고 부르더라.
지황智隍은 20년을 장좌長坐하여 선정(定)에 들었는데, 성사의 제자 현책이 하삭河朔 땅에 이르러 지황의 세상에 알려진 명성(聲華)을 듣고 처소에 나아가 묻기를,
“네가 이곳에 있어서 무엇을 하는가?”
지황이 대답하기를,
“나는 항상 선정(定)에 드노라.”
“네가 선정에 든다고 하니 있는 마음(有心)으로 드는가? 없는 마음(無心)으로 드는가? 만약 없는 마음(無心)으로 선정에 든다고 한다면, 일체의 무정無情한 풀과 나무와 기왓장과 조약돌(草木瓦礫)이라도 다 선정을 얻을 것이고, 있는 마음(有心)으로 선정에 든다고 한다면, 일체의 유정함식有情含識의 무리라도 다 선정을 얻을 것이다.”
지황이 대답하기를,
“내가 바르게 선정(定)에 들 때에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현책이 말하기를,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을 보지 아니하면 곧 항상 선정일 것인데, 어찌 출입出入이 있겠는가? 만약 출입出入이 있으면 대정大定이 아니니라.”
지황이 대답하지 못하고 오래 있다가 묻기를,
“그대의 선생은 누구이십니까?”
현책이 말하기를,
“나의 선생은 조계 육조曹溪六祖 성사입니다.”
“육조께서는 무엇으로 선정禪定을 삼던가요?”
현책이 말하기를,
“성사께서 말씀하신 것은 오묘하고 맑으며 둥글고 고요하며(妙湛圓寂), 체와 용이 여여如如하며, 오음이 본래 공本來空하며, 육진六塵이 있는 것이 아니며, 출입出入이 없으며, 고요함과 어지러움(靜亂)이 없으며, 선의 성품(禪性)은 머문 것이 없으므로(無住) 선적禪寂에 머무는 것을 여의었으며, 선의 성품은 생겨남이 없으므로(無生) 선상禪相을 여의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지만, 또한 허공과 같다는 것이 없는 것이다.”
지황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성사에게 예배禮拜하고, 지황과 대담하던 말을 낱낱이 고하자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현책이 말한 것과 같아서, 네가 다만 마음이 허공과 같지만, 빈 소견(空見)에 집착하지 말고, 응하여 쓰는 데 걸림이 없으며, 움직임과 고요함에 무심無心하여 범부이다, 성현이다 하는 뜻을 잊으며, 능소能所가 함께 없으면 성상性相이 여여하여 선정定이 아닌 때가 없는 것이다.”
지황이 크게 깨쳐 20년간 얻은 것이 모두 영향도 없더라. 그날 밤에 하북 하남에서 민중民衆들이 들으니 공중에서 크게 외쳐 말하기를,
“지황이 금일에서야 도를 얻었다.”
라고 하였다. 어느 날에 신수가 지성志誠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는 지혜가 많고 총명하니 남방의 조계에 가서 육조가 법을 설하거든, 네 마음을 다하여 자세히 기록한 뒤에 속히 돌아와 내게 이르라.”
지성이 분부를 받고(稟命) 조계에 와서 법좌 아래에 참례參禮하였다. 성사께서 대중에게 고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법을 도적질하러 온 사람이 회중에 숨어 있도다.”
지성이 곧 나와 예배하고 있는 대로 그 일을 아뢰니,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스승이 어떻게 대중에게 보이던가?”
지성이 여쭈기를,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하되 장좌불와長坐不臥하라고 하였습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하는 것이 병이 되는 것이고 선이 아니며, 장좌는 몸을 구속하는 것이므로 저 이치에 이익이 없는 것이다. 나의 게송을 들으라.
살아서 늘 앉고 눕지 아니하면
죽어서는 눕고 앉지 아니하도다.
한낱 냄새나는 백골白骨을 갖추어
어찌 공과工課를 세우리오.”
지성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제가 신수에게 아홉 해나 도를 배웠지만, 조금도 계합한 것이 없다가 이제 성사에게 한 말씀을 듣고 본심에 계합합니다. 제자 생사의 문제가 크니 다시 대자비로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선생은 어떻게 계戒·정定·혜慧를 말하던가?”
지성이 대답하기를,
“신수神秀께서 말씀하되 ‘모든 악을 짓지 아니하는 것이 계戒가 되고, 모든 선善을 행하는 것이 혜慧가 되며, 뜻을 청정히 하는 것이 정定이 된다’고 하더이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스승이 말한 계·정·혜는 사의思議하기 어려우나 내가 설한 계·정·혜와는 다르니라.”
지성이 말하기를,
“계·정·혜는 한가지인데, 어찌 다른 것입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스승에게 계·정·혜는 소승인小乘人을 제접提接하는 것이고, 나의 계·정·혜는 대승인大乘人을 제접하는 것이니66) 자세히 들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설한 법은 자성을 여의지 아니한 것이니, 심체心體를 여의고 법을 설하면 이름을 상설相說이라고 하니 자성을 미혹한 것이다. 일체 만법이 자성으로부터 일어남을 깨치면 참다운 계·정·혜법을 알 것이다. 나의 게송을 들어라.
심지가 그릇됨 없는 것이 자성계自性戒이고,
심지가 어리석지 아니한 것이 자성혜自性慧이며,
심지가 어지럽지 아니한 것이 자성정自性定이고,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 자성금강自性金剛이며,
몸이 가고 오나 본래 삼매이니라.”
지성이 뉘우쳐 사례하고 글귀를 바쳐 말하기를,
“오온으로 된 허깨비 몸뚱아리
환이 어찌 구경究竟 되오리까?
돌이켜 진여로 나가려 한다면
법이 오히려 부정不淨합니다.”
성사께서 그렇게 여기시어 다시 말씀하시기를,
“만일 자성을 깨치면 또한 보리 열반과 해탈지견을 세우지 아니하는데, 한 법도 없음이 없어야만 바야흐로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다. 만일 뜻을 알면 또한 이름이 각신覺身이고 보리菩堤와 열반涅槃이며 해탈지견解脫智見이니, 견성見性한 사람은 세워도 옳고 세우지 아니하여도 옳은 것이다. 가고 오는 데 자유로워 거리끼거나 막힘(礙滯)이 없으며, 용에 호응하여 따라 지으며, 말에 호응하여 따라 대답하며, 여래화신이 자성을 여의지 아니함을 보아 곧 자재신통自在神通과 유희삼매遊戲三昧를 얻는 것이니 이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지성이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세우지 아니한 것입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성이 그름 없고 어지러움 없고 어리석음 없어서 생각생각마다(念念) 반야를 관조觀照하여 항상 법상을 여의며, 자유자재하여 이러나저러나 다 이것이어서 무엇을 가히 세울 것인가? 자성을 깨치되, 단박에 깨치고(頓悟) 단박에 닦아(頓修) 점차漸次가 없기 때문에 그런 까닭에 세우지 아니하노라. 일체 제법이 항상 적멸한데 무슨 차제가 있으리오?”
지성이 예배하고 시자가 되기를 원하여 조석으로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때에 신수의 문도들이 신수를 세워서 6조를 삼고자 하였으나, 5조 성사께서 법과 의발을 혜능에게 전하였다는 소문이 천하에 널리 퍼짐을 꺼리어 협객 장행창張行昌이라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네가 가서 혜능을 찔러 죽이고 의발을 빼앗아 오라.”
라고 하니 이 장행창은 본래 검술을 배워 칼 쓰는 법이 매우 뛰어났었다. 비수검을 싸 가지고 갔는데, 이때에 성사께서 숙명통으로 보시니, 과거 몇 생 전에 장행창의 금전 열 냥을 갚지 아니하였었다. 그 혐의가 있어 행창이 ‘내가 가서 죽이겠다’고 편을 들어 동의한(左袒) 것이며, 또 타심통으로 역력하게 그 간사함을 아시고, 미리 금전 열 냥을 구하여 좌복 사이에 갈무리하여 두고 행창을 기다렸다.
밤이 이슥해지자 행창이 비수검을 끼고 들어왔는데, 성사께서 머리를 늘이고 앞으로 나아가며,
“네 마음대로 베어 가라.”
라고 하셨다. 행창이 비수를 날리어 세 번이나 쳤지만, 털끝만큼도 머리가 상하지 아니하였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올바른 칼(正劍)은 삿되지 않고 삿된 칼은 올바르지 못하는데, 내가 전세에 너에게 금전 열 냥을 빚지고 갚지 못한 일은 있어도 내가 너의 목숨을 죽인 일은 없노라.”
라고 하시고, 금전 열 냥을 내어 주며 어서 가져가라고 하시니 행창이 크게 놀라서 땅에 꺼꾸러졌다가 다시 깨어나서 슬퍼하고 잘못을 뉘우쳤다. 성사께서 금전을 집어 주어 말씀하시기를,
“어서 가지고 가라. 만약 나의 문도가 알면 너를 해칠 것이다. 네가 다른 날에 얼굴을 고쳐 오면 내가 마땅히 거두어들일 것이다.”
행창이 그날 밤에 멀리 도망하였다. 뒤에 얼굴을 고쳐 출가하여 성사에게 예배하였는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생각한 지 오래되었는데, 네가 어찌 늦었는가?”
행창이 말하기를,
“성사께서 죄를 용서하심을 입어 출가出家하였지만, 오직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일찍이 『열반경』을 보았으나 상常과 무상無常의 뜻을 알 수 없으니 성사께서 자비로 설하여 주옵소서.”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떳떳함이 없는(無常) 것은 곧 각성覺性이고, 떳떳한 것은 곧 일체의 선악제법이 분별심인 것이다.”
행창이 말하기를,
“성사의 말씀이 크게 경문과 어긋납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대각의 심인心印을 받았는데, 어찌 감히 경전을 어기겠는가?”
행창이 말하기를,
“경에는 ‘각성이 떳떳하다(佛性是常)’ 하셨는데, 성사의 말씀은 도리어 떳떳함이 없다 하고 선악제법과 보리심까지도 다 무상하다고 하셨는데, 성사는 도리어 떳떳하다고 하시니, 이것이 경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므로, 학인學人으로 하여금 의심만 더하여 줄 뿐입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알지 못하겠는가? 참된 성품이 매우 깊고 미묘하여 인연을 따라 일체의 사법事法을 성취하였는데, 네 말과 같이 각성이 떳떳하여 변치 아니한다면, 다시 무슨 선악제법을 설할 수 있겠는가? 성인은 영원히 성인이 되고, 범부는 영원히 범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겁을 다 지내기까지 하여도 한 사람도 보리심을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하므로 내가 무상을 설한 것이 대각께서 올바르게 이 진상眞常의 도를 설하신 것이다.
또 일체 제법이 만일 무상하다고 한다면, 곧 물물이 자성이 있어서 생사를 포용하여 받아들일 것이니(容受) 무상한 모든 법과 떳떳한 참 성품이 서로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떳떳하여 변치 아니하는 성품이 일체의 선악 모든 법에 원만히 두루 주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체법이 떳떳함을 설하는 것은 대각께서 올바르게 참으로 무상한 뜻을 설하신 것이다.”
(용성이 말하기를,
“내가 이 대문이 대단히 어려워서 알기는 지극히 어려우므로, 여러 말을 많이 보태어 번역하였으니 그리 알고 보시오.
비유하자면 대해 바다가 변치 않고 움직이지 아니한다면 파도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또 바닷물이 전체가 파도이며, 파도가 전체로 물이고, 또 바닷물도 전체가 젖고 파도도 전체가 젖는 것이다. 파도는 제법에 비유하고, 바닷물은 각성에 비유한 것이다. 바닷물이 떳떳함이 없어서 무량한 파도를 일으키고, 또 파도마다 전체의 바닷물이며, 전체가 젖는 것이다. 참되고 떳떳한 성품이 일체 제법에 두루한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대각께서 범부와 외도는 삿되게 항상함(邪常)을 집착하고, 모든 이승은 저 상常에서 무상無常을 헤아려 한 가지 팔전도八顚倒를 이루기 때문에 저 열반 요의교了義敎 가운데에 저들이 치우친 소견을 타파하고 진상眞常·진락眞樂·진아眞我·진정眞淨을 설하셨는데, 네가 이제 말만 듣고 뜻을 배반하니 천 편을 본다고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행창이 활연 대오하여 게송을 바쳐 말하기를,
“무상심을 지킴으로 인하여
떳떳함이 있는 성품을 설하였도다.
방편을 알지 못한 자는
봄 못에 자갈을 주는 것과 같도다.
내가 이제 공을 들이지 아니하고도
각성이 눈앞에 나타나도다.
성사께서 서로 주는 것도 아니고,
나도 또한 얻은 것도 없도다.”
성사께서 게송을 보시고,
“네가 이제 뜻에 사무쳤으니 너의 이름을 지철志撤이라고 하라.”
지철이 예배하고 물러갔다.
신회神會 동자는 이때가 나이가 13세였는데, 옥천玉泉으로부터 와서 성사에게 예배하였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본래면목을 가져 왔느냐? 만일 근본이 있다고 한다면 합당하게 주인을 알 것이다.”
“신회로 근본을 삼으니 보는 것이 곧 주인입니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이 동자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하며 주장자로 세 번을 쳤는데, 신회가 묻기를,
“성사가 마음공부(心功)를 하심에 도리어 보십니까?”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치니 아픈가, 아프지 않은가?”
신회가 말하기를,
“또한 아프기도 하고, 또한 아프지 아니하기도 합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또한 보기도 하고, 또한 보지 아니하기도 하노라.”
신회가 묻기를,
“어떤 것이 보기도 하고, 또한 보이지 아니하기도 합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보는 것은 항상 내 마음의 허물을 보고, 타인의 시비와 선악을 보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것으로써 또한 보기도 하고, 아니 보기도 하는 것이지만,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는 말이 어찌 그러한 것인가?
네가 만일 아프지 아니하면 목석과 같을 것이고, 만일 아프다고 한다면 곧 범부와 같아서 성내는 마음(瞋心)을 낼 것이니, ‘네가 보느냐, 아니 보느냐?’라고 하는 것이 이변二邊이고, 아프고 아프지 아니한 것이 생멸生滅이니, 네가 자성도 보지 못하고 감히 논하는가?”
신회는 백배 사례하고 부지런히 좌우에서 모시고서 잠시라도 떠나지 아니하였다.
성사가 어느 날에 대중에게 보이시기를,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지만 천지를 버티는 큰 기둥이 되고, 해와 달같이 밝으며 칠흑같이 검어 항상 동용動用 가운데에 있지만, 거두어 찾아본다면 얻어 볼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모든 사람은 알겠느냐?”
신회가 나와 말하기를,
“모든 대각의 본원이고, 신회의 각성입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름이 없고 글자도 없다고 하는데, 너는 본원각성이라고 이름하니 네가 이 뒤에 종사관을 쓰고 중생을 제도할지라도 다만 지해종도知解宗徒가 될 것이다.”
신회가 훗날에 경락京洛에 들어가 조계종曹溪宗을 크게 천양하였다.
당나라 중종中宗 황제가 조서를 내리시어 내시 설간薛簡을 보내어 성사를 청하였는데, 성사가 병으로써 사표辭表를 올리어 굳이 사면辭免하셨는데, 경성京城의 선덕들이 말하기를,
“도를 얻고자 한다면 좌선하여야만 성취한다고 하니 성사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성사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도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어찌 앉는 데 있겠는가? 경에 말씀하시길, ‘대각이 만일 앉고 눕는다고 하면 이는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다’67)라고 하였으니, 가고 오는 것이 없으며, 나고 멸하는 것이 없는 것이 여래의 청정선淸淨禪이며, 모든 법이 공적한 것이 대각의 청정좌淸淨坐이니, 어찌 앉는 것으로 도를 삼겠는가?”
설간이 말하기를,
“제자가 서울로 돌아가면, 황상이 반드시 물을 것이니, 성사는 자비로 심요법을 가르쳐 주소서. 경성의 도학자에게 전하여 한 등불이 전함에 백천 등불로 옮겨져 어두운 자가 밝을 것입니다. 함이 없는 것과 같이 하겠습니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는 밝고 어두운 것이 없는 것이다. 밝은 것이 있으면 어두운 것이 오나니, 밝고 밝음이 끝이 없음(明明無盡)도 또한 다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마경(淨名經)』에 말씀하시기를, ‘법은 견줄 데가 없으니 서로 상대가 끊어졌기 때문이다’68)라고 하신 것이다.”
설간이 말하기를,
“밝은 것은 지혜에 비유하고, 어두운 것은 번뇌에 비유합니다. 수도인이 지혜로써 번뇌煩惱를 비추어 파괴하지 아니하면, 무시의 생사를 어떻게 해탈하겠습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번뇌가 곧바로 보리이고, 무명이 곧바로 지혜이어서 둘이 없으니, 만일 지혜로 번뇌를 비추어 파괴코자 하는 자는 이승의 견해인 것이다.”
설간이 말하기를,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입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밝고 밝지 못한 것을 범부는 둘로 보겠지만, 지혜가 있는 자는 그 성품이 둘이 없음을 요달하니, 둘 없는 성품이 곧 진실한 성품(實性)인 것이다. 이 진실한 성품은 범부에게 있다고 하여서 덜하지 않고, 현성賢聖에 있다고 하여도 고요하지 아니하며, 번뇌에 머물러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선정禪定에 거居하여도 고요하지 아니하며, 단상斷常과 거래去來와 중간中間과 내외內外와 생멸生滅이 없어 성상性相이 여여하여 항상 머물러 옮기지 아니하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하여 도라고 하니라.”
설간이 말하기를,
“성사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말씀하시는 것이 어찌 외도와 다르리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외도의 불생불멸을 말하는 것은 멸滅을 가지고서 생生을 그치고, 생으로써 멸을 나타내니 불멸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불멸이 아니고, 불생이라고 하지만 불생이 아닌 것이다.
내가 불생불멸을 말하는 것은 본래 스스로 무생無生이므로 이제 또한 멸이 아니다. 그러한 까닭에 외도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네가 심요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일체의 선악을 도무지 사량하지 말라. 자연히 청정한 심체에 들어가 담연히 항상 고요하면, 묘용妙用이 항사恒沙와 같다고 할 것이다.”
설간이 활연대오하여 예로써 사례하고 황궐皇闕에 돌아가 성사의 말씀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또 그해 구월 초삼일에 조서詔書를 내려 성사를 장려하여 말하기를,
“성사가 늙고 병듦(老疾)으로 사례하고 짐朕을 위하여 도를 닦으라고 하니 나라의 큰 복전福田이로다. 성사는 마침 정명淨明(유마힐) 거사가 비야리毘耶離성에서 병을 핑계를 대어서(稱託) 대승을 천양하여 모든 대각의 마음을 전하며, 불이법不二法을 말하는 것과 같도다. 설간에게 성사가 전하여 주신 대각의 지견을 받으니, 짐朕이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후대에 전할 경사가 있음(積善餘慶)과 전생이 심은 선근(宿種善根)으로 성사가 세상에 출세함을 만나 최상승법을 들으니 성사의 은혜를 감하感荷하여 마지아니합니다.”
하고 마랍법의(磨衲袈裟)와 수정법기(水晶鉢)를 올리며 소주자사를 조칙하여 성전도량聖殿道場을 새롭게 보수하고(一新修補) 이름을 국은정사(國恩寺)라고 하였다.
제13. 성사께서 열반하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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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_0109_b_01L성사께서 태극 원년太極元年, 712년 임자壬子 7월 일에 역사를 속히 마치라고 하시니, 그 역사가 겨우 그 이듬해 유월에 낙성하게 되었다. 그 7월 초7일에 성사가 모든 문도를 회집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는 팔월에는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이 의심이 있거든 일찍이 물으라. 내가 간 뒤에는 너희를 가르칠 사람이 없으리라.”
문도들이 듣고 눈물이 비 오듯 하였지만 오직 신회가 탄연坦然 무심하였다.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신회가 오직 비방과 칭찬(毁譽)에 움직이지 아니하며, 슬픔과 즐거움(哀樂)을 일으키지 않는구나.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나는 스스로 갈 곳을 아나니 만일 내가 갈 곳을 알지 못하면, 너희들에게 예언하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들이 만일 나의 갈 곳을 안다면 슬피 울지 아니할 것이다. 법성은 본래 생멸生滅과 거래去來가 없으니, 내 게송을 들어라.
일체가 참됨이 없으니
참된 것을 보려고 애쓰지 말지어다.
만일 참된 것을 보는 자는
이 보는 것이 다 참이 아니니라.
만일 스스로 참됨이 있다면
거짓을 여의어야만 곧 마음이 참되리라.
자심의 거짓을 여의지 아니하면
참됨이 없는데 어디서 참됨을 구하리오?
유정은 곧 움직임을 알고
무정은 곧 움직이지 아니하는데,
만일 부동행을 닦는다면
무정이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네.
만일 참으로 움직이지 아니하고자 한다면
움직이는 데서 움직이지 아니함이 있느니라.
무정은 깨칠 종자가 없으니
상相을 잘 분별할 수 있으며
제일의에 움직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이 보면
곧바로 진여의 작용인 것이다.
모든 학도인에게 고하노니
저 대승문에 도리어
생사를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종지에는 본래 다툼이 없으니
다툰다면 곧 도를 잃게 되리라.”
이상 생략하여 번역하였다.
그때에 도중이 게송을 듣고 각각 도를 닦고 다시 다투지 아니하였다. 성사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법의法衣는 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신근信根이 순숙淳熟하여 큰일을 맡김에 결정코 의심이 없지만, 선조이신 달마 선사의 게송 뜻이 법의를 전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 게송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본래 이 나라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을 구원코자 함이니
한 꽃에 다섯 잎이 피었으니
열매 맺고 자연히 이루었도다.’”
성사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종지種智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요달了達해야 할 것이다. 일체의 처소에서 상에 머무르지 아니하면(不住相) 저 상 가운데에 미워함이나 사랑함(憎愛)을 일으키지 말며,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없으며, 이득과 해로움 등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편안하고 비어서 무르녹여 담박하면, 이것이 일상삼매이다.
일체의 처소와 행行·주住·좌坐·와臥에 곧은 마음이 순일하면, 도량道場에 움직이지 아니하여 참다운 정토를 성취하리니, 이것이 일행삼매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두 가지 삼매를 갖추면 땅에 종자가 있는 것과 같이 스스로 살아날 것이니 일상일행一相一行도 이와 같으니라.
내가 이제 법을 설하는 것은 때를 맞추어 오는 비와 같고, 너희들의 각성은 모든 종자와 같아서 다 보리의 묘과를 증득할 것이다. 게송을 읊어 말하기를,
마음 땅이 모든 종자를 머금었으니
널리 비를 내리니 다 움이 트도다.
꽃핀 뜻을 돈오하여 마치면
보리의 과보를 자연히 이루리라.”
또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법도 둘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도 그러하며, 그 도가 청정하여 또한 모든 상이 없으니 너희들이 고요함을 관하여 마음을 비우되 고석古石같이 말라.”
라고 하셨다. 성사께서 7월 8일에 문인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신주新州로 돌아가고자 하노라. 너희들은 속히 행장을 다스리라.”
대중이 슬픈 마음으로 만류하기를 마지아니하였는데,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대각께서도 다 열반을 보이셨으니, 세상에 오면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나의 육체는 버리고 갈 곳이 있는 것이다.”
대중이 묻기를,
“지금으로부터 가시면 조만간에 돌아오십니까?”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면 올 때에는 잎이 없는 것이다.”
성사께서 개원 원년改元元年, 713년 계축癸丑 8월 3일에 국은정사에서 문도에게 고하시기를,
“너희들은 다 차례로 앉아라. 내가 너희들과 더불어 이별할 것이다.”
법해法海가 묻기를,
“성사께서 최후에 법에 머물러 후래後來 사람을 깨치게 하소서.”
성사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들은 자세히 들어라. 후대에 미혹한 사람이 만일 중생을 알면 곧 각覺이고, 만일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에 각을 찾아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이제 너희로 하여금 자심중생自心衆生을 알리며, 자심각自心覺을 보게 할 것이다.
각을 보고자 한다면, 다만 중생을 알아야 할 것이니 다만 중생이 각을 미혹한 것이고, 각이 중생을 미혹한 것이 아닌 것이다. 자성을 깨치면 중생이 곧 각이고, 자성을 미혹하면 각이 곧 중생인 것이다. 자성이 평등하면 중생이 평등하며 중생이 각이고, 자성이 사험邪險하면 각이 중생인 것이다. 너희들의 마음이 험악하고 사곡邪曲하면 곧 각이 중생 가운데 있고, 한 생각이 평등하면 곧 중생이 각을 이루는 것이다. 나의 마음에 스스로 각이 있는 것이니 자심각自心覺이 참된 각인 것이다.
자기에게 각심이 없으면 어느 곳에 참다운 각을 구하겠는가? 너희들의 자심이 각이므로 다시 지나치게 의심(狐疑)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밖으로는 한 물건도 자기가 건립한 것이 없는 것이다. 모두 본심이 만 가지 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 말씀하되, ‘마음이 생겨나면 가지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가지가지 법이 멸한다’69)고 하신 것이다.
내가 이제 한 게문만을 남기고, 너희들과는 이별할 것이니 이 게문 뜻을 알면 자기의 본심을 보아 스스로 각을 이룰 것이다.
진여자성이 참다운 각이요
사견삼독은 마왕이니라.
삿되어 미혹할 때에 마왕이 자기의 집 안에 있고
소견이 반듯할 때에 각이 자심당自心堂에 있도다.
자성 가운데 삿된 소견은 삼독이 나는 것이니
곧 마왕이 와서 자심의 집에 머무를 것이다.
바른 소견으로 삼독심을 없애면
마가 각을 성취하여 참되고 거짓이 없을 것이다.
법신과 보신과 아울러 화신
삼신이 본래 한 몸인 것이다.
만일 자성 가운데에서 스스로 볼 수 있다면
즉시 등정각을 이루는 근본이 될 것이다.
본래 화신을 쫓아 청정한 성품이 나는 것이니
청정한 성품이 항상 화신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성품이 화신으로 곧 올바른 도를 행하면
당래에 원만하여 참으로 다함이 없는 것이다.
음탕한 성품이 본래 청정한 성품 인因이니
음탕함을 없애면 곧 청정한 성품이며
성품 가운데 각각 오욕을 여의면
성품을 본 찰라 사이에 곧 진眞인 것이다.
금생에 만일 돈교문을 만나면
문득 자성을 깨달아 대각을 보리라.
만일 수행하여 각을 찾는다면
알지 못하니라, 어느 곳에서 참을 구하고자 하는고?
만약 자심 가운데에서 참된 것을 보면
참이 있으므로 곧 정각을 성취하리라.
자성을 보지 못하고 밖에서 각을 구하면
마음 내는 것이 크게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돈교의 법문을 이 세상에 머물게 하였으니
세상 사람을 구원하려면 내가 닦아야 할 것이다.
당래에 도 배우는 사람에게 고하노니
이 소견을 지어 크게 유유히 말아야 할 것이다.”
성사께서 최후 법문을 설하여 마치시고, 또 부촉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잘 있어라. 내가 간 뒤에 세간의 정리로 울며 타인에게 조문을 받고 몸에 상복을 입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고, 또한 정법이 아니다. 다만 본래 심정이 동정動靜과 생멸生滅과 거래去來와 시비是非에 머묾이 없음을 알 것이다.
너의 마음이 미혹하여 내 뜻을 알지 못할까 하여 다시 부촉하노니, 내가 간 뒤에 내 말대로 수행하면 내가 있는 날과 같고, 만일 나의 가르침을 어기면 내가 세상에 있어도 이익이 없는 것이다.”
다시 게송을 설하여 말하기를,
“우뚝우뚝하여 선을 닦지 않고
뛰놀고 뛰놀아 악을 짓지 아니하는도다.
적적하여 견문이 끊어졌고
탕탕하여 마음에 집착함이 없도다.”
성사께서 임종게를 설하시고 단정히 앉으셨는데, 삼경이 됨에 문도에게 고하여 말씀하기를,
“나는 지금 가노라.”
라고 하시고 고요하시니, 이때에 기이한 향기가 집 안에 가득하고 흰 무지개가 땅으로부터 일어나며, 별안간에 산림이 희어 백설과 같으며, 금수가 슬피 우는 소리에 산악이 진동하더라. 이 아래는 생략하고 번역하지 아니하노라.
- 대각 응세大覺應世 2956년(1929) 기사己巳 11월 일
- 1)唐天竺沙門 般剌蜜帝 譯,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2(『大正新脩大藏經』 19, p.111b09). “諸可還者自然非汝, 不汝還者非汝而誰? 則知汝心本妙明淨.”
- 2)眞鑑 述, 『大佛頂首楞嚴經正脉疏』 권1(X12, No.275, p.207a07). “問環師此處亦云, 金拳擧處, 直下要識本明塵相, 未除依舊認賊爲子, 豈不徹了此意.”; 戒環 解,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要解』 권2(X11, No.270, p.784a04). “金拳擧處. 直下要識本明.”
- 3)佛陀多羅 譯,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大正新脩大藏經』 17, p.914c13). “爾時, 便得無方淸淨, 無邊虛空覺所顯發”
- 4)佛陀多羅 譯,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大正新脩大藏經』 17, p.917b09). “善男子! 但諸菩薩及末世衆生, 居一切時, 不起妄念, 於諸妄心亦不息滅, 住妄想境, 不加了知, 於無了知, 不辨眞實.”
- 5)般剌蜜帝 譯,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9(『大正新脩大藏經』 19, p.147b08). “當知, 虛空生汝心內, 猶如片雲, 點太淸裏, 世界在虛空耶?”
- 6)般剌蜜帝 譯,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2(『大正新脩大藏經』 19, p.112c27). “當知, 如是精覺妙明, 非因非緣, 亦非自然, 非不自然, 無非不非, 無是非是, 離一切相, 卽一切法.”을 참고하라.
- 7)般剌蜜帝 譯,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6(『大正新脩大藏經』 19, p.130a17). “覺海性澄圓, 圓澄覺元妙; 元明照生所, 所立照性亡.……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 有漏微塵國, 皆從空所生; 漚滅空本無, 況復諸三有?”
- 8)『大慧普覺禪師語錄』 권25(『大正新脩大藏經』 47, p.918c17). “眞如不守自性, 隨緣成就一切事法.”
- 9)육합六合 : 동東, 서西, 남南, 북北, 하늘(天), 땅(地) 등을 합한 이름이다.
- 10)僧肇, 『肇論』, 「涅槃無名論」 제4(『大正新脩大藏經』 45, p.159b). “현묘한 열반의 도는 오묘한 깨달음에 있고, 오묘한 깨달음은 진실에 나아가는 데 있다. 진실에 나아가면 곧 유·무를 평등하게 관찰하게 되고, 유무를 평등하게 관찰하면 너와 내가 둘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는 나와 더불어 같은 뿌리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玄道在於妙悟, 妙悟在於卽眞. 卽眞卽有無齊觀, 齊觀卽彼已莫二. 所以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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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방저蚌渚 : 인도의 술사들이 달의 정기인 물을 구하기 위하여 달빛에 비추는 도구이다. 『수능엄경』에는 방저方諸라고 하였다.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3(『大正新脩大藏經』 19, p.118a03), “아난아! 물의 성품이 일정하지 아니하여 흐르고 그침이 항상하지 않다. 저 실라벌성에 가비라선迦毘羅仙과 삭가라선斫迦羅仙과 발두마鉢頭摩와 가살다訶薩多 등 여러 대환사大幻師들이 달의 정기(太陰精)를 구하여 환술의 약을 만들려고 할 때에 이 환술사幻術師들이 보름날(白月)의 한밤중에 손에 방저方諸(구슬)를 들고 달 속의 물을 받는다. 그런데 이 물이 방저에서 나온 것이냐, 허공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냐, 달에서 온 것이냐?(阿難! 水性不定, 流息無恒. 如室羅城迦毘羅仙, 斫迦羅仙及鉢頭摩訶薩多等諸大幻師, 求太陰精用和幻藥, 是諸師等, 於白月晝手執方諸承月中水. 此水爲復從珠中出?)” - 12)『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9(『大正新脩大藏經』 19, p.147b08), “當知虛空生汝心內, 猶如片雲點太淸裏, 況諸世界在虛空耶?”
- 13)『大乘集菩薩學論』 권25(『大正新脩大藏經』 32, No.1636, p.145a27). “諸法從緣生, 緣謝法卽滅.”
- 14)유주流注 : 유위법有爲法이 찰나마다 생멸生滅을 반복하면서 계속 존재하는 것을 물의 흐름에 비유한 말이다.
- 15)이는 음양오행 사상으로 세계의 성립을 설명한 것이다. 동양에서 음陰과 양陽의 소멸·성장·변화와 음양에서 파생된 오행五行, 즉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움직임으로 우주와 인간생활의 모든 현상과 생성소멸을 해석한다. 오행간의 상생은 목이 화를 생함(木生火), 화가 토를 생함(火生土), 토가 금을 생함(土生金), 금이 수를 생함(金生水), 수가 목을 생함(水生木)의 순환과정이 있다. 반대로 오행간의 상극은 목이 토를 이김(木剋土), 수가 화를 이김(水剋火), 화가 금을 이김(火剋金), 금이 목을 이김(金剋木)의 이치가 있다.
- 16)세계가 성립된 원리를 불교적 인연화합의 입장에서 음양오행의 이치를 받아들여 설명하고 있다. 오행을 상징하는 숫자로는 수水는 1과 6번, 목木은 3과 8번, 화火는 2와 7번, 흙(土)은 5와 10번, 쇠(金)는 4와 9번에 대응한다. 이를 토대로 오행의 기본적인 요소의 성립과 우주의 생성을 밝히고 있다.
- 17)『妙法蓮華經』 권1(『大正新脩大藏經』 9, p.5c01). “吾從成佛已來, 種種因緣, 種種譬喩, 廣演言敎, 無數方便, 引導衆生, 令離諸著.”
- 18)공자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려운 때를 진채지액陳蔡之厄이라 한다. 여행 중 어려움을 당하거나 인생의 어려운 때를 일컫는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이 말은 기원전 489년 주유열국周遊列國하던 공자가 섭葉나라와 채蔡나라를 거쳐 진陳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당한 고통에서 유래한다. 진陳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따르던 제자들이 영양실조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을 당한 적도 있었다. 후인들이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공자가 포위돼 거문고를 타며 노래했던 곳을 현가대弦歌臺라 이름하였다.
- 19)질애質礙 : 색色(rūpa)은 형체를 가지고 공간을 점유하는 성질과 질량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물질을 장애한다는 뜻에서 질애라고 한다.
- 20)원문에는 “그 몸이 장대하기는 팔세 동자에 지내며”라고 되어 있지만, 『대보적경大寶積經』 권110(『大正新脩大藏經』 11, p.616c10), “우유가 끓는 강물(乳湯河) 지옥에 태어나는 사람은 몸에 갖가지 빛깔로 된 얼룩덜룩한 점이 박혀 있다. 그리고 그 몸은 지극히 연하고 부드러워서 귀엽게 생긴 어린아이의 몸과 같고, 키는 커서 8주肘가 넘으며, 수염과 머리카락과 몸에 난 털은 모두 다 길어서 질질 끌리고, 손과 발과 얼굴의 생김새는 모두 삐뚤어져서 온전치 못하므로 염부제閻浮提 사람은 멀리서 보기만 하여도 즉사한다.(生乳湯河者, 身點斑雜作種種色. 體極軟脆, 猶如貴樂孾孩之身, 其身長大過八肘量, 鬚髮身毛並長垂曳, 手足面目虧曲不全, 閻浮提人遙見便死.)”를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 21)『本事經』 권6(『大正新脩大藏經』 17, p.689c03). “所謂無明, 未永斷故, 愛未棄故, 業未息故, 由是因緣, 能感後有. 所以者何, 業爲良田, 識爲種子, 愛爲漑灌, 無明無智, 無了無見之所覆蔽, 識便安住, 欲有色有, 無色有處.”
- 22)『瑜伽師地論』 권1(『大正新脩大藏經』 30, p.283a01). “爾時, 父母貪愛俱極, 最後決定各出一滴濃厚精血. 二滴和合住母胎中合爲一段, 猶如熟乳凝結之時, 當於此處, 一切種子異熟所攝, 執受所依阿賴耶識和合依託.”
- 23)『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4(『大正新脩大藏經』 19, p.120a29). “流愛爲種 納想爲胎”
- 24)『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新脩大藏經』 8, p.752a17).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25)『장자』 「외편」 ≺ 열어구列禦寇≻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정나라 사람 완緩이 구씨裘氏의 땅에서 책을 읽어 3년 만에 유자儒者가 되었다. 그 아우를 묵자墨者로 만들어 토론을 벌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묵자의 편을 들자 10년 만에 완은 자살하고 만다. 그의 아버지 꿈에 나타난 완이 자신의 무덤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무덤가에 심은 잣나무는 벌써 열매가 열게 되었다고 비난한다. 이는 자기가 동생에게 한 일이 남보다 달랐다고 해서 자기 부모까지 업신여긴 것이다. 즉 스스로 덕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덕을 지닌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26)중국의 병서인 『삼략三略』을 일반적으로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이라 한다. 태공망太空望의 병법서였지만, 진시황 때 ‘이교’라는 다리 위에서 황석공이라는 이인이 한고조 유방의 모신謨臣이었던 장량張良에게 전해 준 것이라 한다.
- 27)육정육갑六丁六甲 : 도교에서 받들고 있는 천제天帝가 부리는 신으로 바람과 우레를 일으킬 수 있고 귀신을 제압할 수 있다. 육정은 정묘丁卯, 정사丁巳, 정미丁未, 정유丁酉, 정해丁亥, 정축丁丑으로 음신陰神, 즉 여신이고, 육갑은 갑자甲子, 갑술甲戌, 갑신甲申, 갑오甲午, 갑신甲辰, 갑인甲寅으로 양신陽神, 즉 남신이다.
- 28)『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7(『大正新脩大藏經』 19, p.139a10). “如土梟等附塊爲兒, 及破鏡鳥以毒樹果抱爲其子, 子成, 父母皆遭其食, 其類充塞. 是名衆生十二種類.”
- 29)『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大正新脩大藏經』 17, p.921b12). “善男子! 若諸衆生修於禪那, 先取數門, 心中了知生住滅念, 分齊頭數, 如是周遍四威儀中, 分別念數無不了知, 漸次增進乃至得知百千世界一滴之雨, 猶如目覩所受用物;非彼所聞一切境界終不可取, 是名三觀初首方便.” 참고.
- 30)『永嘉證道歌』(『大正新脩大藏經』 48, p.395c22).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 31)『永嘉證道歌』(『大正新脩大藏經』 48, p.395c29). “三身四智體中圓, 八解六通心地印.”
- 32)『大慧普覺禪師住徑山能仁禪院語錄』 권3(『大正新脩大藏經』 47, p.822a28). “上堂, 祖師道, 眼若不睡諸夢自除, 心若不異萬法一如.”
- 33)『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新脩大藏經』 8, p.752b27). “不取於相, 如如不動.”
- 34)『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新脩大藏經』 8, p.752a17).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35)『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新脩大藏經』 8, p.752b28).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36)『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新脩大藏經』 8, p.751b27).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 37)『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新脩大藏經』 8, p.749b13).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 38)『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2(『大正新脩大藏經』 19, p.111b09). “諸可還者自然非汝, 不汝還者非汝而誰?”
- 39)『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2(『大正新脩大藏經』 19, p.112c27). “如是精覺妙明, 非因非緣, 亦非自然, 非不自然, 無非不非, 無是非是, 離一切相, 卽一切法.”
- 40)『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大正新脩大藏經』 17, p.914a20). “知幻卽離, 不作方便;離幻卽覺, 亦無漸次.”
- 41)『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大正新脩大藏經』 17, p.913c03). “如來因地修圓覺者, 知是空花, 卽無輪轉, 亦無身心受生死, 非作故無, 本性無故.”
- 42)『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大正新脩大藏經』 17, p.913c07). “是則名爲淨覺隨順. 何以故? 虛空性故, 常不動故, 如來藏中無起滅故, 無知見故, 如法界性究竟圓滿遍十方故.”
- 43)『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大正新脩大藏經』 17, p.917b09). “居一切時不起妄念, 於諸妄心亦不息滅, 住妄想境不加了知, 於無了知不辨眞實.”
- 44)아가니타천阿迦尼陀天 : 색계십팔천色界十八天의 맨 위의 하늘, 색구경천, 유정천이라고 번역한다.
- 45)『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大正新脩大藏經』 47, p.511a05). “有一物, 上拄天下拄地,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且道過在甚麽處,”
- 46)『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新脩大藏經』 48, p.357b19). “懷讓禪師, 金州杜氏子也. 初謁嵩山安國師, 安發之曹溪參扣. 讓至禮拜, 師曰: 「甚處來?」 曰: 「嵩山.」 師曰: 「什麽物? 恁麽來?」 曰: 「說似一物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 47)大慧宗杲, 「答汪內翰(彦章)」, 『大慧普覺禪師法語』 권27(『大正新脩大藏經』 47, No.1998A, p.928c5), “但看,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
- 48)원문에는 ‘코로 냄새 맡고 아는 것’ 다음에 ‘뜻 뿌리로 분별하여 아는 것’이 나오지만, 육식六識의 순서에 따라 수정하였다.
- 49)『妙法蓮華經』 권1, 「方便品」(『大正新脩大藏經』 9, p.6c19), “止止不須說, 我法妙難思.”
- 50)『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9(『大正新脩大藏經』 19, p.147b12). “十方菩薩及諸無漏大阿羅漢, 心精通當處湛然; 一切魔王及與鬼神諸凡夫天, 見其宮殿無故崩裂, 大地振坼水陸飛騰無不驚慴. 凡夫昏暗不覺遷訛. 彼等咸得五種神通唯除漏盡, 戀此塵勞, 如何令汝摧裂其處? 是故神鬼及諸天魔魍魎妖精, 於三昧時僉來惱汝.”
- 51)『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9(『大正新脩大藏經』 19, p.147b18). “然彼諸魔雖有大怒, 彼塵勞內, 汝妙覺中, 如風吹光如刀斷水了不相觸, 汝如沸浪彼如堅氷, 煖氣漸隣不日銷殞, 徒恃神力但爲其客, 成就破亂由汝心中五陰主人, 主人若迷客得其便; 當處禪那覺悟無惑, 則彼魔事無奈汝何.” 참고.
- 52)『大慧普覺禪師語錄』 권25(『大正新脩大藏經』 47, p.918b14), “瞎眼漢, 錯指示人, 皆是認魚目作明殊.”
- 53)고령사古靈寺는 현재 경기도京畿道 파주시坡州市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理 13번지에 위치한 고령산古靈山 보광사普光寺이다.
- 54)원문에는 “포땅”이라고 되어 있지만, 『육조단경』을 참고하여 “원袁 땅”으로 바로잡는다. 『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新脩大藏經』 48, p.349c03). “惠能曰: 逢袁則止, 遇蒙則居.”
- 55)『육조단경』에는 설통과 심통이라고 하였다. 『六祖壇經』(『大正新脩大藏經』 48, p.351b14). “說通及心通”
- 56)『維摩詰所說經』 권상(『大正新脩大藏經』 14, p.542c15). “直心是道場”
- 57)『維摩詰所說經』 권상(『大正新脩大藏經』 14, p.538b01). “直心是菩薩淨土”
- 58)『維摩詰所說經』 권상(『大正新脩大藏經』 14, p.541a08). “卽時豁然, 還得本心.”
- 59)『大般若波羅蜜多經』 권455(『大正新脩大藏經』 7, p.299b26). “諸法, 本來自性淸淨.”
- 60)『육조단경』(『大正新脩大藏經』 48, p.354c03)에는 “첨곡심諂曲心”이라고 하였다.
- 61)『육조단경』(『大正新脩大藏經』 48, p.354c04)에는 “경인심輕人心과 만타심慢他心”이라고 하였다.
- 62)『妙法蓮華經』 권1(『大正新脩大藏經』 09, p.5c28). “諸佛弟子衆 曾供養諸佛 一切漏已盡 住是最後身 如是諸人等 其力所不堪 假使滿世間 皆如舍利弗 盡思共度量 不能測佛智” 참고.
- 63)『妙法蓮華經』 권1(『大正新脩大藏經』 09, p.8a17). “十方佛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 64)『妙法蓮華經』 권1(『大正新脩大藏經』 09, p.8c04). “如是諸世尊 種種緣譬喩 無數方便力 演說諸法相 是諸世尊等 皆說一乘法 化無量衆生 令入於佛道” 참고.
- 65)『大般涅槃經』 권하(『大正新脩大藏經』 01, No.7, p.204c23).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 66)『육조단경』(『大正新脩大藏經』 48, p.358c7)에는 “너의 스승에게 계·정·혜는 대승인을 제접하는 것이고, 나의 계·정·혜는 최상승인을 제접하는 것이니(汝師戒定慧接大乘人, 吾戒定慧接最上乘人.)”라고 하였다.
- 67)『金剛般若波羅蜜經』(『大正新脩大藏經』 8, p.752b03). “須菩提! 若有人言; ‘如來若來若去, 若坐若臥.’ 是人不解我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참고.
- 68)『維摩詰所說經』 권상(『大正新脩大藏經』 14, p.540a10). “法無有比, 無相待故.”
- 69)『占察善惡業報經』 권하(『大正新脩大藏經』 17, p.907b29). “所謂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種種法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