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BC_Y0004_0001_R_001
修心論
[표지]
白龍城先生肖像
[속표지]
- 수심론修心論
대각교大覺敎 관정사灌頂師 용성龍城 백상규白相奎 지음
범준*
✽
옮김
목차
-
1. 본종편本宗篇
2. 병을 간택함
3. 무자화두병無字話頭病
4. 화두에 의심이 나지 않는 병
5. 화두에 의심을 내더라도 지견에 빠지면 병이 됨
6. 마음공부 하는 바른길
7. 대각교 취지
부록 : 대각교의 취지(大覺敎旨趣)
1. 본종편本宗篇
-
0001_0005_b_01L제자가 묻기를,
“스님께서는 본래 어떻게 공부를 하셨습니까? 듣고자 합니다.”
용성이 답하기를,
“나는 본래 스승이 있어서 공부하는 법을 받은 것이 아니다. 내가 홀연히 한 생각을 일으켜서 의심하기를, ‘이 천지와 세계는 무엇으로 근본根本이 되었는가?’ 또다시 의심하기를 ‘천지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데, 천지의 근본을 알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먼 일이다. 그러면 나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의 근본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와 같은 의심이 번쩍 일어났다. 또다시 한 생각이 일어나기를, ‘그러한 의심은 그만두고 지금 이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이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의심하여 찾으니, 생각이 본래 공空하여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더라.
이와 같이 엿새 동안 살피고 다시 의심(疑情)하니, 홀연히 통桶의 밑바닥이 빠진 것과 같이 밖으로 천지의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안으로 나의 몸과 분별하는 마음 전체가 본래 공空하여 한 물건도 없더라.
나는 이때까지 선지식善知識도 만나 보지 못했으며, 모든 경전과 어록語錄도 열람하지 못하였다. 다만 스승님께 일과로 배운 것은 ‘천수진언千手眞言’과 ‘육자주六字呪’뿐이었다. 9개월 동안 남북으로 다니며 틈틈이 지송하다가, 대각응세大覺應世 2910년(1883) 가을 8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다시 공부에 매진했는데, ‘은산철벽銀山鐵壁’1)에 갇혀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대각응세大覺應世 2911년(1884) 봄 3월에, 다시 경기도 양주군 보광사 도솔암兜率庵에 와서 홀연히 마음의 경계(心境)가 공空하여 능견소견能見所見과 능각소각能覺所覺이 없어지더라. 이후에는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과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과 백만아승지百萬阿僧祇의 모든 법이 하나도 이곳에 얼쩡거릴 수 없게 되었다.
대각응세大覺應世 2912년(1885) 가을 9월에, 전라도 순천군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다시 깨달았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2) 화두’와 ‘무자화두無字話頭’가 명확하게 빛나고 명백(煥然明白)하여 의심이 없어지더라.
그 후 대각응세大覺應世 2913년(1886) 가을 8월에, 낙동강을 건너갈 때 게송 한 수首를 지었다.
금오산의 천년 달이요 金烏千秋月
낙동강에 만 리 파도로다. 洛東萬里波
고깃배는 어디로 갔는고? 漁舟何處去
예와 같이 갈대꽃 속에서 잠자더라! 依舊宿蘆花
그 후 대각응세大覺應世 2914년(1887) 봄 3월에, 전라도 금구군 용안대에 가서 홀연히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 보았다.”
내가 스스로 묻기를,
“‘세상 사람이 능소能所가 끊어져서 아무 재미도 없고, 찾을 수도 없이(無滋味沒莫索), 한곳에 앉아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다 마쳤다고 하여 몽둥이질하기를 비 오듯이 하며, 호령하기를 우레같이 하여도 도道의 근원을 모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또는 이곳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어서 각각 있는 그대로다(水水山山各完然)’3)라고 하는 이와 같은 평상시 문답(平常答話)을 좋아하지만, 그들은 다분히 가장 오묘한 골자骨子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깨쳤는가?
요즘 내가 보니 공부하는 사람은 격외소리(格外談)를 좋아하여, 서로 모이면 방棒도 주고 할喝도 하고 격외소리(格談)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점검해 보면 자신의 말이 서로 어긋나는 것도 있으며, 격외소리를 해 놓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도 허다하다. 소위 격외담格外談이라는 것이 큰 폐단이 되었다. 그대는 격외소리 하지 말고, 뜻과 이치에 맞게(義理分際) 분명히 말하여라.
입으로 불을 말하여도 입은 불타지 않는다.(道火不曾燒却口) 능소能所가 끊어진 곳이 그대의 본성인가? 능소가 끊어진 곳을 타파하고 뿌리조차 뽑아내어, 참된 자취(眞蹟)가 없는 것이 그대의 본성인가? 능소가 끊어져 말할 수 없는 것과 이 존귀한 두각(尊貴頭角)을 타파하고 다시 한 걸음을 나아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속에 가장 묘한 골자를 그대는 어떻게 깨쳤는가? 격외소리(格談) 하지 말고 말로써 분명히 표시하라.”
이와 같은 것을 스스로 물었다.
내가 스스로 대답하기를,
“나의 본성은 능소能所가 끊어진 것으로 알 수도 없고, 대용이 숨김없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없다(大用全彰). 비유로써 말하면 바닷물 전체가 짜지만, 그 짠맛 자체가 화장찰해미진수華藏刹海微塵數와 같은 갖가지 이름과 모양(種種名相)이 없으니 보고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名相)이 없다고 짠맛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본연각성本然覺性도 그 깨달음(覺) 자체가 세계해미진수世界海微塵數와 같은 이름과 모양이 없어서 마음도 아니고, 각覺도 아니며, 성품性品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이름과 모양이 없다고 각覺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름과 모양이 없지만 억지로 이름과 모양을 붙여서 말한다면, 각覺이 곧 나의 본성이다. 그 각覺 자체가 갖가지 모양이 없는 까닭에, 본래 공空한 것이라 하지만 공空한 것도 아니다. 또한 공空한 것이 아니라 하지만, 일체 갖가지 이름과 모양(種種名相)이 없는 까닭에 공空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양을 붙여서 말한다면 각覺이 곧 나의 본성이다.
바닷물이 고요할 때에도 전체는 짠맛이 나고, 천파만파千波萬波가 도도하게 물결칠 때도 바닷물 전체는 짠맛이 나며, 바닷물이 흐릴(濁) 때도 전체는 짠맛이 나고, 바닷물이 청정할 때도 전체는 짠맛이 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각의 성품(覺性)은 성인에게 있어도 더하지 않고, 범부에게 있어도 덜하지 않으며, 번뇌 속에 있어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禪定 속에 있어도 고요하지 않으니 이것이 본연한 각의 성품(覺性)이다.
각覺인 진공眞空과 각인 묘유妙有가 원융무애圓融無礙하니, 각은 스스로 각이 아닌 까닭에 각도 아니다. 또한 진공은 스스로 진공이 아니기 때문에 진공도 아니며, 묘유는 스스로 묘유가 아니기 때문에 묘유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인 진공이고, 진공인 각이며, 각인 묘유이고, 묘유인 각이니, 세 가지가 원융하여 함께 한 기틀(機)이다.”
제자가 묻기를,
“금방 스님께서 ‘각이 본성이다’라고 하시니, 이것은 확정한 것으로 정해진 법(定法)이 아닙니까? 그러면 대각(世尊)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정한 법이 있음이 없는 것이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阿耨菩提)4)이다’라고 하신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자세히 일러주십시오.”
용성이 답하기를,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능엄경楞嚴經』에 말씀하시기를, ‘허공이 대각大覺 가운데서 생겨나는 것이, 마치 바다에서 하나의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5)고 하시니 이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다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진성(眞)을 발하여 근원에 돌아가면, 시방허공이 다 녹아 없어진다’6)고 한다. 그 근원성은 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닷물의 짠맛은 갖가지 이름과 모양(種種名相)이 없으나, 억지로 이름 붙여서, ‘바닷물의 짠맛’이라고 한 것처럼, ‘각覺’이라는 것도 억지로 이름 지어 표시한 것이다.
이 각은 지혜로도 알 수 없고, 사량하는 알음알이(識)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닷물의 짠맛이 맑고, 흐리고, 움직이고, 고요함(淸濁動靜)에 관계없이 전체가 짠 것과 같아서 삼계만법三界萬法도 오직 각覺이다.”
제자가 묻기를,
“‘삼계만법이 오직 각覺’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풀과 나무와 숲(草木叢林)과 산하대지(大地山河)는 아는 것이 없습니까?”
스님이 대답하기를,
“전기의 기운(電氣性品)이 허공에 가득해 있는데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와 풀과 나무와 숲(草木叢林)과 사람과 축생과 동물(人畜動物)들은 뜨거움을 느끼지 않으며, 또 불타지 않는가?
그대는 상견常見에 집착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곧 단견斷見에 집착한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내가 보니 요즘 견성見性한 무리들이 무수히 많지만, 공적空寂한 것으로 성性을 삼는 자도 있으며, 모든 공적한 견해見解를 버리고 흔적(朕跡)이 없는 것과 작용作用하는 것으로 도道를 삼는 자도 있으니, 다만 이것만으로는 ‘견성’이라고 할 수 없다.
참으로 본각本覺을 깨달아야 분명히 견성見性이라 할 것이다. 참으로 본각을 깨달은 자는 새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아서 사유상하四維上下에 마음대로 왕래하여도 모두 허공虛空이고, 전단향栴檀香을 낱낱이 쪼개어도 조각조각이 모두 전단향이다.
이렇게 해도 옳고 저렇게 해도 옳다. 각覺을 깨닫지 못하고, 공적空寂하니, 흔적이 없으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니, 마음길이 끊어졌느니, 존귀두각尊貴頭角을 타파하였느니, 대용전창大用全彰이니, 평상平常이니, 무심無心이니, 종문향상宗門向上이니, 최초구最初句니, 삼현삼요三玄三要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空然) 말일 뿐이다.
육조 혜능 성사六祖慧能聖師께서 단지 본래 한 물건이 없는 것으로만 깨달았다면, 5조께서는 ‘천인사 대장부天人師大丈夫’라고 인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육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성自性은 본래 동요動搖가 없으며, 생멸生滅이 없으며, 청정하여 구족하며, 능히 만법을 낸다’7)고 하니 5조께서 즉시 인가하신 것이다. 자성이 그와 같음을 말씀하시니, 무엇을 표시하여 자성이라 하는가? 이것이 곧 ‘허공이 대각 가운데서 생겨난다(空生大覺中)’8)는 그 대각大覺의 자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름과 모양(名相)으로 표시하자면 각覺이 곧 나의 본명원신本命元辰9)진공眞空이고, 묘유妙有라 하는 것이다.
세계미진수世界微塵數와 같이 갖가지 이름과 모양을 지어도 그른 것이 아니고, 미진수와 같은 이름과 모양을 모두 쳐부수어 버려도 그른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허공은 갖가지 형상(種種相)은 아니지만,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종경宗鏡께서 말씀하시길, ‘만일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10)을 취하여 증득하고자 하는 자는, 곧 실제 바다에 빠져 신령스러운 깨달음(靈覺)의 근원을 등지는 것이며, 본성품本性品을 잃고 공空을 좇는 것이다’11)라고 하니 이것은 각覺을 말한 것이 아닌가?
이 각覺은 체體와 용用을 함께 놓아 버릴(雙放) 때에도 오직 각覺이요, 체體와 용用을 함께 받아들일(雙收) 때에도 오직 각覺이다. 용用은 파도가 요동치고 바다가 들끓는 것이다. 오직 체體로서 운행하는 것이다. 체體는 거울이 깨끗하고 물이 맑은 것이다. 오직 인연(緣)을 따라 고요하다고 하니, 이것은 체體를 떠나서 용用이 없는 것이고, 용用을 떠나서 체體가 없는 것이다. 통틀어 말하면 둘이 아니다. 각覺은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불(火)로 태울 수 없고, 물로 씻을 수 없고, 바람으로도 움직일(搖動) 수 없고, 모든 티끌과 깨끗하지 못한 것(不淨之物)으로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허공이 스스로 ‘내가 허공이다’라고 하지 않고, 각覺이 스스로 ‘내가 각覺이다’라고 하지 않으니 이름에 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제자가 묻기를,
“어떻게 마음을 닦아 가야 합니까?”
용성이 답하기를,
“‘닦는다’, ‘닦지 않는다’ 하는 것은 두 가지 극단적인(兩邊) 말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면 허공에 걸린 것이며, 청정하게 하면 청정에 걸린 것이다. 어디든지 마음이 머물(住)면 걸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다만 뜻을 모양(相)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본래 성품과 같이 행하면 이것이 근본삼매根本三昧가 되어, 점차 백천삼매百千三昧를 얻게 된다. 저 각覺은 하나나 둘이 없지만, 그 사용함에 따라 깊고 얕음이 있으니 각覺은 모든 차별이 없다. 묘각성인妙覺聖人은 항상 고요히 빛나고, 등각성인等覺聖人은 비춰서 항상 고요하니 대각大覺은 형상도 없고 본체도 없어서(無形無體) 모든 이름과 모양(名相)이 없다.
시각始覺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깨달아 살피는 것으로, 마치 잠을 자다 꿈을 깨는 것과 같다. 사람이 도적을 아는 것과 같아서, 도적을 만나도 도적이 어떻게 할 수 없다. 둘째는 깨달아 빛나는 것으로, 곧 이치와 일(理事)이 서로 비추는 것이 마치 연꽃잎이 벌어지는 것과 같다. 자기 마음의 일진법계(自心一眞法界)에 항하사와 같은 성품의 덕(恒沙性德)이 구족함을 비추어 보아, 모든 법을 깨닫는 것이다. 셋째는 묘각妙覺이니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각覺에 나아가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을 여읜 까닭에 묘각이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성품이 각覺이 없음을 깨닫는 것을 근본지根本智라 하고, 각覺이 역력하고 분명(歷歷分明)한 것을 깨닫는 것을 후득지後得智라 한다. 또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합하여 통칭해서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대각大覺은 본래 세 가지 깨달음에 흔적(朕跡)이 없으나 다만 세 가지 깨달음을 구족하여 원만무애圓滿無礙하다. 또다시 분석해 보면 범부와 성현의 묘명진심妙明眞心은 본래 같은 것이다. 본각묘명本覺妙明은 일체 번뇌를 해탈한 진여(出纏眞如)요, 무분별지혜無分別智慧로 무시망념無始妄念을 깨달았다는 것은 구경각이다. 시각은 곧 본래각本來覺을 깨달은 것으로, 시각은 곧 본각의 각覺을 깨달은 것으로, 시각이 곧 본각이라 할 것이다.
또다시 말하면 성각性覺을 미혹함으로 인해 망령되게 반연(妄緣)하는 것이니, 만약 망령된 생각(妄念)이 없어지면, 곧 본각이다. 성각은 능소能所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닦아 증득함을 의지해서 있는 것도 아니다. 본래 묘하고 항상 밝기 때문에 성각묘명性覺妙明이라 하고, 시각반야始覺般若로써 성각의 묘한 것을 밝히는 까닭에 본각묘명本覺妙明이라 한다. 또다시 말하면 진여眞如의 성품(性)이 스스로 밝기 때문에 성각명묘性覺明妙라 하고, 시각始覺의 지혜로 본성을 요달了達하는 까닭에 본각명묘本覺明妙라 한다.
또 네 가지 각覺이 있다.
첫째는 청정본각淸淨本覺, 둘째는 염정본각染淨本覺, 셋째는 청정시각淸淨始覺, 넷째는 염정시각染淨始覺이다.
만일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밝고 어둠(明暗)을 말한다면, 모두 염정각染淨覺을 의지하여 이름이 있는 것이다. 청정한 깨달음의 근원(淸淨覺源)은 어리석고 지혜로움이 모두 없는 것이며, 미혹하고 깨닫는 것이 아닌데 어찌 언어문자言語文字로 알겠는가?
본성이 청정한 것은 성각性覺의 뜻이 된다. 다만 성품性品 가운데 본각本覺을 쓰는 것은, 마치 나무 가운데 있는 불의 성품(火性品)을 쓰는 것과 같아서, 인연因緣을 갖추지 못하면 있어도 쓰지 못하는 것과 같다. 깨달을 때에 본각本覺이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만, 본각本覺을 깨달은 뒤에는 다시 미혹하지 않는다. 또 반야般若는 알음알이가 없으나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 ‘알음알이가 없다’는 말은 능소能所가 없다는 것이다. ‘알지 못함이 없다’는 말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시방법계에 두루하다는 뜻이다. 또 성인은 오직 무심한 마음으로, 보는 것 없이 보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마음이 있고, 보는 것이 있는 것이, 모두 분별로 인해 능소能所로 생겨나는 것과는 다르다. 성인은 다섯 가지 눈(五眼), 세 가지 지혜(三慧), 네 가지 변재辨才, 여섯 가지 신통神通,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중도제中道諦가 모두 구족하다. 만일 공空과 공空하지 아니한 것과, 공空도 아니고 공空 아닌 것도 아닌 것을 보면, 조금이나마 실상實相과 일치할 것이다.”
2. 병을 간택함(要登覺路決擇眞妄)
-
0001_0012_a_01L제자가 묻기를,
“마음 닦는 공부(心工)를 하는데 먼저 병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용성이 답하기를,
“백이십 가지 병통이 있다. 대각성존께서 오십 가지 마장(五十種魔)을 가려서 분별(決擇)하신 것과, 화두의 열 가지 병에 대해 자세히 말하겠다.
백이십 가지 병12)은,
(1) 신령神靈함과 화합和合하여 기운을 길러 자연을 보전하는 것.
(2) 몸을 괴롭게 하여 고행하는 것으로 도道를 삼는 것.
(3) ‘집착하지 않는 것(無着)’에 집착하여 경계를 세우는 것.
(4) 생각을 고요히 하여 망령된 마음(妄心)을 억지로 누르는 것.
(5) 뜻을 비우고 법을 멸滅하여 정신을 공空한 데 집착하는 것.
(6) 육진의 그림자(六塵緣影)로 자기의 마음을 삼는 것.
(7) 신령神靈한 근원에 참다운 관조(眞照)를 상실하는 것.
(8) 각의 종자(覺種)의 바른 인연(正因)을 죽이는 것.
(9) 순전히 알음알이(識)로만 정신精神을 집착하여 과보果報를 무정無情한 지경에서 받는 것.
(10) 마음을 밝히며 색色을 없게 하여 팔난천八難天에 태어나는 과보를 얻는 것.
(11) 있다는 것에 집착執着하여 건달바성乾達婆城13)을 지키는 것.
(12) 인과因果를 무시하여 토끼 뿔(兎角)과 같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
(13) 보는 것을 끊고 어두운 집(暗室)에 머무는 것.
(14) 조금 밝아짐을 내세워 아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15) 각覺이 있음을 잘못 알아 진각眞覺의 형상으로 삼는 것.
(16) 알음알이가 없음을 목석木石과 같이 하는 것.
(17) 망령됨에 집착執着하여 구경과究竟果를 취하는 것이, 마치 진흙을 떡(餠)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
(18) 망령된 인연으로 해탈문解脫門에 나아가는 것이, 마치 물결을 버리고 물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
(19) 밖으로 치달려서(馳驅) 망령되게 몽환夢幻을 일으키는 것.
(20) 안으로 다만 지키기만 하여 어리석은 것.
(21) 하나를 근본(宗) 삼아 대상(物相)을 동일하게 하는 것.
(22) 다른 차별을 보아 각각 법계를 세우는 것.
(23) 어리석음(愚癡)을 지켜서 무분별無分別로 대도大道를 삼는 것.
(24) 공견空見을 숭상하여 선악善惡을 배척하고 참다운 닦음을 짓는 것.
(25) 뜻으로 생각할 수 없고, 입으로 의론할 수 없다 하여 공에 집착하는 것(頑空).
(26) 진선묘색眞善妙色의 이치를 통달(體達)하여 실다움을 삼는 것.
(27) 기틀을 고요하게 하여 생각을 끊어서 유루천有漏天과 같이 하는 것.
(28) 각관사유覺觀思惟를 배워 개인의 표준적 견해(情量)에 떨어지는 것.
(29) 망령된 성품(妄性)을 다하지 못하고 혼돈하여 영원히 어둡다는 알음알이를 내는 것.
(30) 환체幻體에 어두워서(昧) 텅 비어 없다는 것을 으뜸(宗)으로 세운 것.
(31) 그림자(影像)를 잘못 알아 참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
(32) 허망을 버리고 실다움을 구하는 것.
(33)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見聞覺知)으로 살아 있는 것(活物)으로 삼는 것.
(34) 환의 경계(幻境)를 가리켜 무정無情으로 삼는 것.
(35) 본래 뜻을 잃어서 본래 적적한 지혜(本寂智)를 어기는 것.
(36) 생각을 끊어 각성覺性의 작용(用)에 결점缺點이 되게 하는 것.
(37) 성품의 공덕(性功德)에 어두워(味) 색신色身과 소견所見을 일으키는 것.
(38) 마침내 공空에 집착하여 단멸심斷滅心을 내는 것.
(39) 다만 이치만을 집착하여 장엄藏嚴을 버리는 것.
(40) 점수漸修설은 미혹하다 하여 한결같이(一向) 조작하는 것.
(41) 성품의 체(性體)가 인연을 여읜 것만 집착하여 아집을 굳게 하는 것.
(42) 일체를 모두 잊어 아주 없애 버리고 다만 어리석게 지키는 것.
(43) 사람과 법이 자연自然이라 하여 인연이 없는 데 떨어지는 것.
(44) 경계와 지혜가 화합함에 집착하여 같은 소견을 내는 것.
(45) 마음과 경계가 혼잡함에 집착하여 능能과 소所가 어지럽게 뒤엉키는 것.
(46)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분별하여 지혜를 장애하는 것.
(47) 진성眞性이 한결같이 변하지 않음을 지켜서 확실히 상견에 떨어지는 것(死常).14)(48) 사상四相이 천변遷變함에 고정되어 단견斷見에 빠지는 것.
(49) 닦을 것이 없는 것에 집착하여 성인의 지위(聖位)를 버리는 것.
(50) 증득할 대상에 집착하여 천진天眞을 등지는 것.
(51)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를 탐착하여 세상을 따라 윤회하는 것.
(52) 생사를 싫어하여 진해탈眞解脫을 상실하는 것.
(53) 진공眞空을 미혹하고 인과에 집착하는 것.
(54) 실상實相의 본분에 어두워서(昧却) 각覺은 좋아하고 마장魔障은 싫어하는 것.
(55) 자기가 말한 것에 집착하여 그 말을 지키는 것이 참되다고 주장하는 것.
(56) 음성音聲의 실상實相을 잃고 고요히 잠잠한 것을 구하는 것.
(57) 교종(敎乘)을 으뜸으로 삼고, 자성의 선정(自性定)을 허물어 버리는 것.
(58) 선관禪觀만 힘쓰고 요의진경了義眞經을 배척하는 것.
(59) 기특奇特하기를 희망하며, 경계를 벗어나기(出身)를 원하지만 알음알이의 바다(識海)에 빠지는 것.
(60) 정결히 수행하여 현밀玄密을 구하지만 도리어 음성音聲에 떨어지는 것.
(61) 수승하게 지혜(知解)를 잃어 모두 공연히 헛되게 만드는 것.
(62) 청정한 본성에만 머무는(住) 까닭에 좋은 약이 도리어 병이 되는 것.
(63) 문자를 더듬어 뜻을 궁구하다가 오히려 요긴하지 않은 것만(客水) 알게 되는 것.
(64) 고요하고 한가함을 지키다가 법진法塵에만 머무르는 것.
(65) 얻어야 할 참된 마음은 잃고, 항상 무상대승無上大乘만을 말하는 것.
(66) 사량하고 계교하는 마음(思量卜度心)으로 격외의 현묘(玄玄)한 도리를 더듬는 것.
(67) 법설法說을 전폐하고 말을 끊은 것(言語道斷)으로 참다운 견해(眞所見)를 일으키는 것.
(68) 경전만을 믿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는 것.
(69) 움직이는 용(動用)을 잘못 알아(認着) 생멸근원에만 머무는 것.
(70) 온전히 기억에 의존하여 분별상(識相)의 주위에 머무는 것.
(71) 의식적으로 계교(安排)하여 원각의 성품(圓覺性)을 잃는 것.
(72) 마음대로 하는 것이 병이 되어서 깨달음(道)에 들어가는 문에 결점이 되는 것.
(73) 정진하는 마음(精進心)을 잃고 모두 유위有爲에 걸리는 것.
(74) 천진무위天眞無爲에 맡겨 지혜의 속박(慧縛)에 잠기는 것.
(75) 온전히 생각에만 얽매여 부지런히 사량하여 바른 정정삼매正定三昧를 잃는 것.
(76) 무애자재無碍自在만 본받아 수행을 놓아 버리는 것.
(77) 모든 무명 번뇌(無明惑業)를 따르면서도 본 성품이 공空함을 믿는 것.
(78) 열 가지, 다섯 가지 번뇌(十纏五蓋)에 집착하여 망령되게 끊어 없애려고 집착하는 것.
(79) 법에 대한 애착(法愛)에 집착하는 것.
(80) 가볍고 교만한 마음(輕慢心)을 내어서 깨달음의 원인(覺因)을 훼방하는 것.
(81) 내달리는 마음(馳驅心)을 쉬지 못하고 구할수록 본심에서 더욱 멀어지는 것.
(82) 물러나 그만두려는 마음(退墮心)을 일으켜 방일放逸해지는 것.
(83) 자신의 증득한 바와 언어가 서로 어긋나 실제實際가 없는 것.
(84) 체體와 용用에 각각 의거하여 불승(覺乘)을 어기는 것.
(85) 고요함을 즐겨 하여 공空에만 머물러 대비심大悲心이 없는 것.
(86) 반연攀緣을 끊어 법 아닌 법(假法)을 싫어하고, 법과 같이 자재문自在門을 어기는 것.
(87) 아견我見에 집착하여 인공人空임을 알지 못 하는 것.
(88) 현량現量에 미혹하여 법에 대한 집착(法執)을 굳게 가지는 것.
(89) 이해하여 증득함(解得)은 있으나, 믿음을 갖추지 못하여 사견邪見을 부르는 것.
(90) 신심(信)은 있으나 바른 이해(解)를 겸하지 못해 무명無明만 기르는 것.
(91) 사람(人)은 옳고 법法은 그르다고 하는 것.人은 마음에 비유하고, 法은 경계에 비유함
(92) 경계는 깊고 지혜는 얕다고 하는 것.
(93) 집착하고 탐착(集取)하여 법성法性에 미혹하는 것.
(94) 버려서 진眞을 어기는 것.
(95) 여여如如한 인因을 어기는 것.
(96) 인因에 즉卽한 과(果報)가 없다고 하는 것.
(97) 거짓된 것에 집착하여 실상實相을 비방하는 것.
(98) 실상實相에 집착하여 방편(權)을 훼방하는 것.
(99) 무명無明을 미워하여 부동의 문(不動之門)에 집착하는 것.
(100) 다른 경계를 미워하여 법성삼매法性三昧를 파괴하는 것.
(101) 같은 이치理致에만 의거하여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는 것.
(102) 별상別相을 따져서(評) 방편문方便門을 파괴하는 것.
(103) 보리菩提에 집착하여 정법륜正法輪을 비방하는 것.
(104) 중생을 그릇되다 생각하여 참다운 각의 본체(眞覺體)를 파괴하는 것.
(105) 근본지(本智)에 집착하여 방편지(權慧)를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
(106) 올바른 근본(正宗)에 미혹하여 교화문(化門)을 집착하는 것.
(107) 이성理性에 걸려 무위無爲의 구덩이에 빠지는 것.
(108) 사상事相을 집착하여 허환虛幻의 그물에 걸리는 것.
(109) 양 극단(二邊)을 끊고 중도中道의 자취를 없애, 서로 비추어 원융한 문(雙照門)을 어기는 것.
(110) 깨달음의 자리(正位)만을 보전(安保)하고 중도中道로 인하여 방편의 뜻을 잃는 것.
(111) 정혜定慧만을 깨우쳐 익혀서 도의 싹(道芽)을 썩게 하는 것.
(112) 행원行願만을 오로지 일으켜 진리의 도(覺道)를 매몰시키는 것.
(113) 무작행無作行을 지어 유위有爲의 보리를 닦는 것.
(114) 집착함이 없는 마음(無着心)에 집착해서 유사한 반야(相似般若)를 배우는 것.
(115) 청정한 데 나아가 미혹하여 참된 성품(實性)을 더럽게 하는 것.
(116) 바른 지위(正位)에만 머물러 속제俗諦와 본공本空을 잃는 것.
(117) 무상관無常觀만 세워 진여眞如를 장애하는 것.
(118) 요지심了知心만을 내어 법성法性에 위배되는 것.
(119) 참다운 의지(眞志)만을 지키고 견해를 일으켜, 감로법문甘露法門이 도리어 독약이 되게 하는 것.
(120) 원교圓敎에 집착하여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도리어 독약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백이십 가지 병통이다.
다시 오십여 가지 마장魔障15)을 말하면 너무 장황하지만, 중요한 부분만 취하여 분명히 밝히겠다. 무릇 우리의 신묘하게 밝은 진심(妙明眞心)은 본래 청정하여 명암과 색공(明暗色空)이 없다. 그러나 오음번뇌五陰煩惱에 덮인 바가 되어 자유해탈을 잃은 것이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이 오음五陰이 녹아 신묘하고 밝은 진심眞心이 되는 것이다. 마치 태양의 기운(陽氣)이 아니면 얼음이 녹지 아니하고, 수행이 아니면 오음五陰을 소멸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야 걸림 없이 흘러가고, 오음五陰이 녹아 신묘하고 밝은 진심(妙明眞心)이 되어야 걸림 없이 해탈하게 된다. 넓고 큰 바다를 건너가자면 배를 타야 하듯이 오음五陰을 녹여 버리자면 마음공부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될 수 없다. 격외선의 전등록(格外禪傳)에는 천칠백 화두법話頭法이 있고, 교가敎家에는 대소승관법大小乘觀法이 있다. 공부를 일심지성으로 정밀精密하게 하면, 오음五陰 가운데 색음色陰부터 먼저 소멸되어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열 가지 경계가 나타난다.
(1) 부모와 나의 인연으로 견고하게 성취된 색음色陰이 소멸되니, 겁탁을 벗어나게 된다(劫濁超越). 신묘하게 밝은 참다운 성품(妙明眞性)을 정밀하게 단련하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조밀稠密하게 짜 놓은 나의 몸이 산하석벽山河石壁 속으로 자유롭게 왕래하여 걸림이 없다. 이곳에서 정진하되 더욱 단련하여 일심으로 공부해야 한다. 만일 ‘내가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있으면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될 것이다.
(2) 색신色身이 걸림 없는 경지에서 다시 공부해 나가면, 자신의 몸이 유리와 같이 사무쳐 내외 전체가 환하게 보이게 된다. 다시 오장육부五臟六腑 가운데에 있는 벌레를 집어내는 것과 같고, 물속에 손을 넣는 것과 같아서 다치거나 아픈 것이 없게 된다. 이때에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내지 말고 일심으로 정진해라. 만일 내가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있으면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된다.
(3) 다시 이 경지에서 일심으로 공부해 나가 내외內外를 정밀하게 단련하면, 안과 밖이 텅 비어 사무친 까닭에 혼魂과 백魄, 의意와 지志, 정신이 서로 주인과 손님(賓主)이 되어 혼魂이 주인이 될 때는 백魄, 의意, 지志, 정신精神은 손님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백魄이 주인이 될 때는 나머지 것들이 모두 손님이 된다. 또한 혼魂이 본래 자리(本位)를 여의어 백魄에 합하기도 하며, 백魄이 본래 자리를 여의어 정精에 합하기도 하나니 나머지 것들도 모두 다 그러하다. 색色이 공空한 까닭에 오장육부에 의지하고 있던 혼魂, 백魄, 의意, 지志, 정신精神이 의지할 곳을 잃게 되고, 서로서로 합해져서 숙세宿世에 진리를 듣고 훈습했던 종자(聞熏種子)가 나타나게 된다. 그때 홀연히 허공중에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니 성인이 된 것은 아니다. 이때 일심으로 관법觀法이나 화두話頭나 이전에 공부해 오던 대로 더욱 정진해야 한다. 만일 ‘성인이 되었다’고 방심하면 모든 천마귀신에 떨어지게 된다.
(4) 다시 일심으로 공부한 것을 말미암아 몸 안에서 광명이 발생하게 된다. 그때는 시방세계가 자금색紫金色을 지으며, 일체 종류가 변화하여 대각(世尊)님이 된다. 그리고 비로자나성존毘盧遮那聖尊이 하늘에서 빛나는 거대한 법상(天光大床)에 걸터앉으니 하늘의 성인(天聖)들이 주위를 둘러싸며(圍繞) 백억국토百億國土에 무수한 연꽃이 나타난다. 이것은 자신의 심혼心魂을 신령神靈하게 깨달은 까닭으로 마음광명이 모든 세계에 비치는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 일심으로 공부하지 아니하면 모든 천마외도天魔外道에 떨어지게 된다.
(5) 다시 관법觀法으로 신묘하게 밝은 진성(妙明眞性)을 정밀하게 단련하면, 홀연히 시방의 허공이 칠보색七寶色이나 백보색百寶色을 이루어 한 순간에 가득하여 서로 걸림이 없게 된다. 만일 여기에서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모든 마군魔群에 떨어지게 된다.
(6) 다시 관법觀法으로 묘명진심妙明眞心을 정밀하게 단련하면, 홀연히 칠흑같이 어두운 삼경(漆夜三更)의 한밤중에 모든 물건을 보아도 밝은 대낮과 같을 것이다. 만일 여기에서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모든 마군魔群에 떨어지게 된다.
(7) 다시 관법觀法으로 뚜렷하게 텅 빈 곳에 들어가면, 이 몸이 무정한 초목과 같아서 불로 태우고, 칼로 베어도 아픔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만일 ‘내가 성인이 되었다’ 하여 일심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모든 마군魔群에 떨어지게 된다.
(8) 다시 관법觀法으로 지극히 정밀하게 닦으면, 홀연히 시방대지산하十方大地山河가 대각성존의 나라가 되어 칠보가 구족하게 된다. 또한 광명이 가득하며 항하수와 같은 많은 성인(恒沙諸聖)이 허공에 두루하여 가득(遍滿)하고 보배궁전이 화려華麗하며, 아래로 지옥地獄을 꿰뚫어 보고, 위로는 하늘 궁전(天宮)을 보더라도 장애가 없다. 만일 여기에서 ‘내가 성인이 되었다’고 하면 모든 마군魔群에 떨어지게 된다.
(9) 다시 관법觀法으로써 신묘하고 밝은 진심(妙明眞心)을 단련하면, 홀연히 칠흑같이 어두운 삼경(漆夜三更)에 만 리萬里 밖을 밝게 보아서 모든 것을 다 보고 듣게 된다. 만일 이곳에서 ‘내가 성인이 되었다’고 하면 모든 마군魔群에 떨어지게 된다.
(10) 다시 관법觀法으로써 정밀하게 신묘하고 밝은 진심(妙明眞心)을 단련하면, 홀연히 선지식이 있어 잠깐 사이에 한량없는 몸을 변화하게 된다. 이것은 혹 도깨비들(魑魅魍魎)이나 천마파순天魔波旬이 그 사람의 심장心臟에 들어가 변재辯才로 한량없이 무량묘법無量妙法을 설하게 한다. 만일 이곳에서 ‘내가 성인이다’라는 소견을 두면 모든 마군에 떨어지게 된다.
이상의 열 가지는 모두 색음色陰이 소멸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후의 수상행식受想行識 네 가지가 모두 소멸되어야 완전히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된다. 중생이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성인이 되었다’라고 하여 큰 거짓말(大妄語)을 하다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된다.
(11) 수음受陰이 공空하면 마음이 육체를 떠나서 출입을 자유롭게 하니 이것은 견탁見濁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근본이 되는 이유(根由)를 관觀하건대 허명망상虛明妄想으로 근본이 되었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 색음色陰을 공空의 한가운데에서 마장을 초월하여 일심으로 관법을 닦으면 큰 광명이 빛남을 얻게 된다. 그 사람이 홀연히 한없이 슬픈 마음을 내어 모기나 날파리(蚊蝱)를 보아도 적자赤子와 같은 생각을 내며, 눈물을 흘려 말하기를, ‘불쌍하다! 저 중생을 내가 다 제도濟度하리라’라고 하니 이것은 과도한 슬픔과 연민의 장애(悲魔)에 빠진 까닭이다.
(12) 다시 일심으로 선정禪定을 수행하면 색음色陰은 이미 소멸하고, 수음受陰이 명백하게 되어 빛난 성품이 밝게 나타나게 된다. 이때 감격하는 마음(感激心)이 과도(過憤)하여 솟아오르는 기쁜 마음(歡喜心)이 지극해진다. 홀연히 한량없는 용맹한 마음(勇猛)이 일어나서 자신이 삼세대각성존三世大覺聖尊과 동등하다는 생각을 내게 된다. 이것은 미친 마군魔群의 심장에 들어간 것이니, 깨달아 일심으로 닦지 않으면 사마邪魔의 권속이 된다.
(13) 다시 정진하는 노력(精力) 가운데서 색음色陰은 소멸되고, 수음受陰이 분명하게 드러남을 보게 되니 앞으로는 새로 증득할 것은 없다. 이미 색음色陰에 머물렀던(居) 것은 잃어버렸으나 지혜智慧의 힘이 쇠퇴하고 미약(衰微)하여, 그 중간에 머물러 있게 되어 아득하여 보는 바가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홀연히 간단한 생각을 내어, 일체시에 아편阿片 먹은 사람같이 생각이 침잠하여 흩어지지 않게 된다. 만일 깨달으면 허물이 없지만 만약 ‘내가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내면 사마외도邪魔外道에 떨어지게 된다.
(14) 또 이 정定16) 가운데서 색음色陰이 소멸하고, 수음受陰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지혜의 힘(智慧力)이 선정禪定의 힘보다 지나치게 뛰어난 것이다. 나아가 굳세고 예리(猛銳)하여 수승한 성품이 마음 가운데 자리해서 스스로 곧 ‘노사나성존盧舍那聖尊이 된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한다. 이것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만족하는 장애(知足魔)가 마음속(心府)에 들어간 것이다. 만일 깨닫지 못하면 사마邪魔에 떨어지게 된다.
(15) 또 이 정定 가운데서 색음色陰이 소멸되고, 수음受陰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색음色陰은 이미 소멸되고, 새로 증득할 것은 없어 스스로 괴롭고 힘들어 하는(艱難) 마음을 내면, 홀연히 한없는 근심이 생겨나게 된다. 마치 독약毒藥을 마신 것과 같아서 세상에 살고 싶은 생각은 없고, 항상 죽고 싶어 한다. 이것은 근심하는 장애가 그 마음속(心府)에 들어간 것이니, 만일 깨닫지 못하면 사마邪魔에 떨어지게 된다.
(16) 또 이 정定 가운데서 색음色陰이 소멸되고, 수음受陰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청정한 가운데에 머물러 마음이 편안하면, 홀연히 한없는 기쁜 생각이 일어나서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만일 깨닫지 못하면 사마邪魔에 떨어지며 삼도三途 고해의 바다에 윤회하게 된다.
(17) 또 이 정定 가운데서 색음色陰이 소멸되고, 수음受陰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만족(自足)한 생각을 내며, 큰 아만我慢을 일으켜, 시방삼세 대각성존을 가벼이 업신여기게 되나니(輕慢), 연각緣覺과 성문聲聞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큰 아만의 마귀(大我慢魔鬼)가 마음속에 들어간 것이다. 성인의 형상(聖像)과 경전을 훼손하기도 하며, 신심 있는 단월(信心檀越)을 향하여 말하기를, ‘저것은 우상偶像이다. 금은동철金銀銅鐵과 토목土木으로 만든 것이니, 그곳에 예배공양禮拜供養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하고 모두 파괴하여 땅속에 묻어 버린다. 그러나 누가 금은동철과 토목으로 조성한 원인을 알지 못하겠는가! 죄라는 것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니, 마음이 일어나는 경중輕重을 따라 죄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중생을 잘못 인도하여 크게 어긋나게 해서 진리가 아닌 것(大逆不道)을 감히 실행(敢行)하는 까닭에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된다.
(18) 또 이 정定 가운데서 정밀하고 명철함으로 이 이치를 확연하게 깨달아 수순하게 되면, 한량없이 가볍고 평온(輕安)한 생각을 일으켜 ‘내가 큰 성인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볍게 ‘성인이 되어 마음이 고요해지고 이치가 밝게 알아졌다는 장애(輕淸魔)’가 그 마음속에 들어간 것이다. 만일 깨닫지 못하면 사마邪魔에 떨어질 것이며,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들어가게 된다.
(19) 또 이 정定 가운데서 색음色陰이 소멸되고, 수음受陰이 명백함을 보고, 정밀하게 밝혀 두렷하게 깨달은 가운데에 허명성虛明性을 얻으면, 홀연히 단멸斷滅을 집착하여 인과因果가 없다하며, 한결같이 공空한 곳으로만 들어가 단멸공斷滅空을 주장한다. 이것은 일체를 공하게 보는 장애(空魔)가 들린 것이다. 계戒를 잘 지키는 사람을 소승小乘이라고 배척하고, 음주식육飮酒食肉하며, 온갖 음욕행淫慾行을 행하니,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권속이므로 마땅히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지게 된다.
(20) 또 이 정定 가운데서 허명성虛明性을 얻어 깊이 애착할 때, 홀연히 한없이 애착이 깊어져서 사랑이 극도로 긴장함에 문득 탐욕貪慾으로 변하나니, 이것은 애욕의 장애(慾魔)가 그 사람의 심장에 들어가 미혹되어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마장의 힘(魔力)으로 인하여 큰 선지식이 되어서 모든 중생에게 음욕淫慾을 행하도록 가르치니 그 마군의 무리들(徒衆)이 일백 이백으로부터 천만 명이 된다. 만일 마장魔障에 빠진 것을 깨닫지 못하면 사마邪魔의 권속이 되고, 사후死後에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된다.
위의 열 가지 경계는 수음受陰이 다 소멸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열 가지 경계에 떨어지지 않고 일심으로 공부하여 나아가라. 이와 같은 수음受陰이 다 소멸된 자는, 이 육체의 몸을 떠나 시방세계에 원근遠近이 없이 왕래하게 된다.
만일 마음이 움직이는 생각(動念)이 다하여, 떠다니는 생각(浮想)이 모두 소멸되면, 상음想陰이 제거된 것이다. 이 사람은 곧 번뇌화택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살펴보면 망상으로 자유자재한 것(融通妄想)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니라. 무릇 상음想陰이라는 것은 제8식第八識 가운데에 육식종자六識種子를 포함하여 있는 것이니, 미세하게 항상 움직이는 까닭에 ‘움직이는 생각(動念)’이라 하고, 움직이면 반드시 생각이 되기 때문에 ‘상음想陰’이라 한다. 상음想陰은 팔식八識의 근본에서 미세하게 움직여서 생각이 되는 것이다. 이 생각이 일어나서 떠다니는 생각(浮想)이 어지럽게 발동(亂動)하기 때문에 거친 생각(麤想)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두 상음想陰이라 한다. 이 상음想陰이 공空하면 밝게 깨닫는 마음(覺明)이 텅 비어 고요하니, 이것을 팔식八識의 본체라 한다. 이 팔식八識의 본체가 미세하게 흘러 다녀서(流注) 허망하게 밝음(妄明)으로 삼는 까닭에, 신묘하게 밝은 진심(妙明眞心)이라고 하지 못한다.
(21) 상음想陰이 소멸되면 번뇌가 공空한 까닭에 번뇌탁煩惱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상음想陰이 소멸 할 때에 열 가지 마장魔障이 공부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어지럽게(惱亂) 한다. 어떤 경우에는 원만 자재한 묘한 선정(圓通妙定) 가운데, 신통 변화를 얻으면 뚜렷이 밝은 가운데에 애착심愛着心을 내어 그 뜻을 정밀하게 해서 변화를 구하며, 더욱 선교禪敎를 구하고자 한다. 천마天魔가 이 틈을 타고 정기精氣를 보내어 본인의 육체에 붙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게 붙기도 하여 대각께서 설법하신 것과 거의 유사(彷彿)하게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제석의 몸(帝釋)과, 부녀婦女의 몸과, 비구니比丘尼의 몸이 되기도 하여, 만 가지로 괴이하고 미혹(妖惑)되게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잠자는 방 안에서 몸에서 광명이 나기도 하며, 또는 아름다운 얼굴과 소리로 그 마음을 방탕하게 하여 음욕심을 일으켜 대각의 계율戒律을 파괴하게 한다. 이것은 괴상한 귀신(怪鬼)이 매우 늙어서 마구니가 되어 공부를 파괴하려고 수없이 괴롭히고 어지럽게(惱亂) 하다가 공부를 영원히 파괴시키고 떠나가는 것이다. 마귀의 힘으로 신통 변화와 아는 것이 있다가, 마귀가 떠나간 후에는 신통과 아는 것이 없어져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 하여, 스승과 제자가 큰 재난(王難)을 당하여 죽게 되며 사후에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된다.
(22) 상음想陰이 소멸할 때에 천마天魔가 정기精氣를 보내어 공부하는 사람에게 붙게 되면, 이 사람이 모든 신남신녀信男信女의 처소에 와서 법을 설하게 된다. 이 설법을 듣는 제자들의 몸이 연화대蓮華台에 앉아서 부처님의 형상처럼 자마금색紫摩金色으로 황홀恍惚하게 보이게 된다. 이 때 대중이 참 성인을 만날 줄 알고 그 마구니의 지도에 따라 계율戒律을 파괴하고 탐욕을 행하게 된다. 만일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마침내 큰 재난(王難)을 당하고 사후에는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이 상음想陰이 소멸함에 따라 마장의 경계(魔境)가 더욱 증가하고 넘치게(增勝) 되나니, 그 다음 여러 가지는 대략 비슷하다. 『능엄경楞嚴經』에 충분히 밝혀 놓으셨으니 그것은 그만두고, 행行과 식識의 음마陰魔를 밝히면서 겸하여 이십 가지 외도外道의 행상을 설명하려고 하니 자세히 들어라.
색음色陰이 소멸하면 산하석벽山河石壁에 육체의 걸림이 없이 왕래한다. 수음受陰이 소멸하면 아는 놈이 육체를 떠나서 자유로이 왕래한다. 상음想陰이 소멸하면 몽상夢想이 제거되어 자나 깨나 한결같이 밝게 깨닫는 마음(覺明)이 텅 비어 고요하다. 행음行陰이 소멸하면 맑고 맑아서 변화(遷流)하는 모습이 없다. 식음識陰이 소멸하면 대각大覺을 이루게 된다.
행음行陰이 소멸할 때에 그릇된 알음알이를 일으키면 외도外道가 된다.
(1) 행음行陰의 근원이 밝게 드러나면 행行과 원願이 허망하며, 팔식八識이 생명의 근본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모두 깨달은 것으로 알아 외도外道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살아가는 기틀이 이미 깨어지고, 육근六根의 구속을 여읜 까닭에 안근眼根이 청정하여 모든 중생이 업력業力으로, 이곳에서 죽어서 저곳에 태어나는 것을 모두 분명하게 안다. 그러나 팔만 겁八萬劫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체중생이 팔만 겁 전에는 아무것도 없다가 홀연히 생겨난 것이라 하여, 본래 생겨난 원인(因)은 없고, 자연히 생겨났다는 자연론自然論을 세우게 된다. 이것은 바른 지견(正智見)을 잃고, 어떤 원인도 없다고 주장하는 외도(無因外道)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까마귀는 원래 검고, 따오기는 원래 흰 것이며, 인간과 천상의 존재(人天)들은 원래 서서 다니고, 축생畜生은 원래 가로로 다니며, 청황적백靑黃赤白이 모두 자연히 된 것이다. 팔만 겁 중에는 모든 것이 다 변역變易함이 없다. 종말終末에 원인(因)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니, 이것은 팔만 겁이 끝난 뒤에는 원인(因)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연외도自然外道가 되는 것이다.
(2) 또는 생멸生滅을 버리고도 떳떳하다는 것이니, 마음과 경계境界가 다하면 원인(因)이 없는 것이라 한다.
(3) 또는 생멸生滅을 두고 떳떳하다는 것이니, 모든 중생이 지수화풍을 의지하여 생멸이 있을지언정 사대의 근본 성질(元性)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법이 생멸하는 자체가 다 떳떳하다는 것이다.사대의 근원을 의지하여 닦기 때문에 사만 겁의 일을 안다.
(4) 또는 팔식八識을 잘못 알아 떳떳함을 삼는 것이니, 팔식이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5) 행음行陰에 집착하여 떳떳함을 삼아 망령되이 말하기를, ‘생멸生滅이 다 상음想陰에 속한 것이다. 이제 상음想陰이 영원히 소멸하면, 불생멸不生滅도 자연히 행음行陰에 속한 것이다’라고 하니 이것은 행음行陰이 생멸의 근원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원상론圓常論17)을 세우게 된 것이다.이상은 모두 상견常見이다.
(6) 또는 ‘나의 담담하고 고요한 성품(湛性) 가운데서 일체중생이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은 떳떳한 것으로 알고, 다른 사람은 무상無常한 것으로 안다.
(7) 또는 팔식의 담성(八識湛性)에 앉아 일체 국토를 관觀하고, 겁劫이 무너진 곳을 구경무상성究竟無常性이라 하고, 겁劫이 무너지지 않은 곳을 구경상성究竟常性이라 한다.
(8) 또는 일에 따로 관觀하되 나의 마음은 미세하여 시방국토에 유전流轉하되, 성품은 개혁改革함이 없다 하여 무너지지 아니한 것으로 떳떳한 성품을 삼고, 일체 생사가 나에게서부터 일어난 것이라 하여 무상無常을 삼는다.
(9) 또는 행음行陰이 항상 바뀌고 변화함(遷流)으로 떳떳함을 삼고, 색수상色受想이 이미 소멸함으로 무상無常을 삼나니, 이것은 외도의 일분상무상론一分常無常論18)을 세우는 것이다.
(10) 또는 삼제三際를 의지하여 변론邊論을 세운다.
(11) 또는 견문見聞을 의지하여 변론邊論을 세운다.
(12) 또는 피아彼我를 의지하여 변론邊論을 세운다.
(13) 또는 생멸生滅을 의지하여 변론邊論도 세우니, 이것이 외도의 유변有邊이 된다.
(14) 또는 만물이 변화한 것을 보고 헤아리되, ‘일체법이 또한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며, 또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또한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한다’고 하여 교란矯亂시킨다.
(15) 또는 없는 것을 집착하여 단지 ‘없다(無)’고 한다.
(16) 또는 있는 것을 집착하여 단지 ‘있다(有)’고 한다.
(17) 또는 유무有無를 함께 보며 경계가 서로 많이 어긋나게 되어 무슨 법담이든지, 있는 것이 또한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또한 있는 것이라 하여 모두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도들의 네 가지로 교란시키는 논법이다.
(18) 또는 색신色身을 굳게 집착하여 색色을 자신(我)으로 생각한다.
(19) 또는 나의 원만한 성품(圓性)이 세계를 두루 머금었으니, 색色을 내가 만든 것이라 하며, 또는 색色이 나에게 예속된 것이라 한다.
(20) 또는 헤아리기를, 내가 행음行陰을 의지하여 상속하는 것이니 내가 색色에 있고, 색色이 나에게 있는 것이라 하여, 색수상행色受想行에 각각 사구四句를 헤아리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가 되니, 이것이 육십이견六十二見의 근본이다. 또는 ‘유위무위有爲無爲를 헤아려 서로 능멸하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은 외도의 심전도론心顚倒論이 되는 것이다.
(21) 또는 ‘색수상행色受想行이 소멸하면 곧 불에 탄 나무가 재가 되는 것과 같으니, 죽은 뒤에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것은 사후死後에 무상無常이라 하는 단멸외도斷滅外道이다.
(22) 또는 색수상행色受想行이 소멸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바뀌고 변화하는 것(遷流)이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라고 집착한다. 또 유무有無가 아니라 하여 허虛와 실實에 둘 바를 잃어버리나니 이것은 사후에 모두 없다는 심전도론心顚倒論을 세운 것이다.
(23) 또는 ‘몸과 욕망(欲)과 고苦와 지극히 기쁜 것과, 지극히 버리는 것이 소멸하여 지·수·화·풍·공·견·식(地水火風空見識)이 다 소멸하니, 무엇이 다시 생겨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것은 외도의 사후단멸死後斷滅이라 하는 심전도론心顚倒論이다.
(24) 또는 욕계의 선정(欲界禪定)과 초선천의 선정(初禪天禪定)과 이선천의 선정(二禪天禪定)과 삼선천의 선정(三禪天禪定)과 사선천의 선정(四禪天禪定)으로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삼는다. 이것은 유루有漏를 잘못 알아 구경열반을 삼는 외도의 심전도론心顚倒論이다.
(25) 또는 제팔담식第八湛識으로 명제冥諦를 삼아 구경법究竟法을 삼는다. 이것은 외도의 명제론冥諦論이 되는 것이다.명제冥諦는 흔연하게 분별할 수 없는 뜻이다.
(26) 또는 팔식신아八識神我를 집착하여 ‘내가 능히 천지 만물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것은 외도의 신아론神我論19)이다.
(27) 또는 ‘제팔담식第八湛識이 능히 나와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담식으로써 떳떳한 성품을 삼고 현전생멸現前生滅로 무상無常을 삼는다. 이것은 자재천自在天 외도의 무리이다.
(28) 또는 ‘식체識體는 분별해 아는 지혜가 있어서, 일체법이 모두 분별해 아는 지혜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하여, 괴상한 소견을 내어 말하기를, ‘일체 초목무정草木無情의 사물이 모두 사람과 다름이 없다. 초목이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이 죽어서 초목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바타와 선니(婆吒霰尼)20) 등 외도의 무리이다.
(29) 또는 물과 불을 섬기나니 삼가섭三迦葉과 같은 모든 외도의 무리이다.
(30) 또는 단멸공斷滅空에 집착하니, 이것은 무상천無想天 외도의 무리이다.
(31) 또는 식음識陰에 의지하여 원만하고 항상한 곳(圓常)을 관하며, 또는 인식근원(識元)에 집착하여 원만하고 정미로운 성품(圓精)으로 삼아, 그 몸을 견고히 보전하고자 한다. 이것은 장수천長壽天 외도의 무리이다.
(32) 또는 ‘식음識陰으로서 수명의 근원(命元)을 삼아 서로 삼제三際에 통하는 것이니, 만일 식음識陰이 다하면 나의 수명이 다하는 것이다. 누가 진상眞常을 증득하겠는가?’라고 한다. 그러한 것으로 마음(情) 가운데에 모든 욕망의 경계(欲境)를 변화시켜, 굳게 번뇌(塵惱)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삿된 생각으로 인하여 천마파순천天魔波旬天에 태어나는 것이다.
(33) 또는 치우친 지혜(偏眞)를 증득하여 공空에 얽혀, 고요함(寂)에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외도의 치우친 지혜(偏眞)에 집착하는 무리이다.
(34) 또는 자기가 원융청정圓融淸淨하다고 하나, ‘분별식(情識)을 여의지 못한 것 뿐이다’라고 하고, 이것이 지극히 깊고 오묘(深妙)하다고 하여 깨달음(果證)을 삼는 자가 많다. 이것은 정성성문定性聲聞과 연각緣覺의 무리이다.
이상의 서른네 가지 종류는 모두 분별식(情識)으로, 대각의 원묘함을 잘못 알아 스스로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했다고 하지만, 모두 사마외도邪魔外道와 천마파순天魔波旬의 무리이다.”
3. 무자화두병無字話頭病
-
0001_0025_b_01L제자가 묻기를,
“화두를 참구하면서 생기는 병통病通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무자無字를 참구하고 있으니 특히 무자無字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용성이 답하기를,
“선가禪家에서는 다음의 열 가지를 병통이라 말한다. 그러나 교가敎家에서는 이것을 부사의법계무장애법문不思議法界無障碍法門이라 한다. 다만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하리라.
(1) 만약 어떤 사람이 화두를 참구할 때에 다만 의심하되 ‘조주趙州가 무슨 이유로 없다(無)고 하는가?’라고 하든지, ‘어찌 없는가(無)?’라고 하든지, ‘어찌 없다(無)고 하는가?’라고 하든지, ‘어찌 무無라 하는가?’라고 해야 한다. 그리하여 밀밀密密하게 생각하며 관찰하여 살피고 다시 살피다가 홀연히 깨달아 허허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자성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무루無漏한 지혜 성품이 항상 밝으며 무진묘용無盡妙用이 인연을 따라 자재하도다. 바람나무와 달빛이 비친 물가는 참마음을 현로現露하고, 푸른 대나무(綠竹)와 노란 꽃(黃花)은 묘한 법을 선명宣明하는도다. 미진 속에 대법륜大法輪을 굴리고 한 털끝에 보왕찰寶王刹을 나투는도다.”
라고 하니 교가敎家에서 보면 법계무장애지法界無障碍智를 증득한 것이 되고, 조사의 활구(祖師活口)에서 보면 참의사구參意死句의 병통病通이 되는 것이다. 자세히 살피고 헤아려(歷量) 교가敎家의 언구言句에 얽매이지 말라.
(2) 만약 어떤 사람이 화두를 참구하다가 홀연히 깨달아 말하기를, ‘조주의 무자無字가 다른 것이 아니다. 각성覺性이 있다는 데 대하여 없다는 말이다. 있다는 말은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낱낱이 신령한 각성(靈覺性)이 있어, 법계에 두루하여(法界周遍) 홀로 드러나도 당당堂堂하고, 몸과 마음(身心)에 모자람(累)이 없는 까닭에, 한 방울의 물이 일천 강물에 혼합混合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또 ‘조주의 없다는 말은 모든 법의 성품이 공空하여 하나의 법法도 본래 없다. 각覺이니, 마음이니, 성품이니 하는 것을 어찌 의논하겠는가? 한 방망이질로 여러 구멍을 터 버린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꾸짖어 말하기를, ‘조주의 무자無字는 있는 것에 상대하여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3) ‘조주의 무자無字 뜻은 마음과 경계가 본래 공空하여 염착染着할 것이 없다. 비유하면 어린아이가 사람을 보면 공연히 방긋방긋 웃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니 이것은 천진무심天眞無心이라는 견해見解에 집착한 것이기 때문에 무심無心도 아니라고 한다.
(4) 또 헤아려(商量) 말하기를, ‘조주의 무자無字 뜻은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다. 주장자柱杖子는 다만 주장자요, 무無는 다만 무無라 한다’고 하니 이것은 평상平常이 도道라는 것을 잘못 알아 집착하는 것이다.
(5) 또 ‘조주 무자無字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유무有無를 떠나 참다운 없는 것도 아니니 참으로 묘하다. 언사言辭와 분별分別로 알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리기(思議) 어렵다’고 하는 까닭에 꾸짖어 말하기를, ‘신묘한 이치로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6) 또 이미 유무有無로 알려고 하지 말며, 유무有無가 끊어진 곳이 진실로 없다(眞無)고 하지 말며, 참다운 언사言辭와 분별分別이 끊어진 곳이 미묘微妙하다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조주의 무자無字 뜻이 무엇인가?’라고 하여 천사만사千思萬思로 더듬어 알려고 한다. 의근意根으로 짐짓 헤아리려(卜度) 하지 말라.
(7) 또 일체 도리로 헤아림(道理卜度)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가장 현묘한 근기(玄機)이다. 은밀隱密하게 작용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여, 눈썹도 찡긋찡긋, 눈도 깜빡깜빡하는 것으로 능사能事를 삼는다. 이러한 까닭에 꾸짖어 말하기를, ‘눈썹을 찡긋하고, 눈을 깜빡이는 곳에 무겁의 집을 짓지 말라’라고 한다.
(8) 또 할 것이 없어 아무 일도 없는 곳에 집착하기 때문에 안일 무사에 있지 말라 한다. 또 주먹도 내밀며, 선상禪床도 치며, 주장자柱杖子도 들며, 고인古人의 공안公案을 내가 안다고 한다.
(9) 또 고인古人의 문자를 종종 인용한다.
(10) 또 미혹함을 잡아 깨닫기를 구한다.
이와 같은 병통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단지 투절하게 의심疑情만 하고 별도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4. 화두에 의심이 나지 않는 병(要參話頭切忌知解)
-
0001_0027_b_01L제자가 묻기를,
“참선參禪을 하여도 화두에 의심이 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용성이 답하기를,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 경전과 어록語錄 가운데에 현묘玄妙한 글귀를 사량으로 분별한 지혜를 자기가 아는 것으로 삼는 것.
(2) 옛 선인의 공안公案을 총명한 의식으로 헤아려 아는 바를 법담하기를 일삼는 것.
(3) 주먹을 내밀고 방망이로 때리기도 하는 것.
(4) 게송을 읊기도 하는 것.
(5)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분주한 것을 싫어하는 것.
(6) 망상妄想을 억제하여 돌로 풀을 눌러 놓듯 하는 것.
(7) 마음에 번뇌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여 순일順一한 청정함으로 공부를 삼는 것.
(8) 일체가 다 공空하다 하여 아득하게 증득함이 없는 것으로 공부를 삼는 것.
(9) 옛 선인의 공안公案에 천착하여 ‘이것은 전제全提다, 저것은 반제半提다, 이것은 향상向上이다, 저것은 향하向下다, 이것은 군신君臣이다, 저것은 겸대어兼帶語다, 이것은 평실어平實語다, 저것은 최초구最初句다, 이것은 삼요구三要句다’라고 한다. 이것은 낱낱이 총명한 의식(聰明意識)과 계교사량計較思量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마음의 하찮은 일(識心邊事)로 참다운 공부가 아니다.
(10) 세계와 신심을 모두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고 파악(看破)하였으나, 그중에 한 물건이 있어 왕래하기도 하며, 동작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지만, 형상이 없으며, 육근문두六根門頭에 방광동지放光動地하며, 놓아 버리면 항하사 같은 번뇌세계(塵沙世界)에 두루하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도 없다. 이 사람이 이 자리에서 스스로 대오大悟함을 인증하고, 화두를 참구하여 의심하기를 투철하게 하지 않으니, 이것은 식심으로 생멸(識心生滅)하는 것으로서 공부가 아니다. 생사심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식심識心을 희롱戱弄하다가, 하루아침에 목숨을 마쳐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 업식業識을 따라 끌려 다니며, 업業을 좇아 과보를 받으니, 만일 선업善業이 많아 사람과 천상세계(人天上)에 태어나서 복을 받아도 마침내 육도에 떨어진다.
(11) 견문각지見聞覺知와 시위운동施爲運動21)에 집착하여 자기의 참다운 성품(眞性)이라 하여 눈을 깜빡이며, 손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도를 삼는다. 이것은 모두 생멸심으로 공부가 아니다. 마치 간질병이 든 사람과 비슷하며, 귀신의 눈동자와 비슷하게 희롱하다가 사대四大가 흩어짐에 희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얕은 소견으로 기특함을 삼아 서로 전수傳受하니 참으로 불쌍하다.
(12) 사람을 만나면 호령도 하며, 깔깔대고 웃기도 하나니, 이 사람은 비록 선업善業을 짓더라도 마업魔業에 떨어진다.
(13) 해탈解脫하고자 갖가지 수행을 하여 온갖 고행苦行을 다 수행한다. 엄동嚴冬에도 불을 때지 않고 거처하고, 삼복에도 뜨거운 태양을 쬐며, 걸인乞人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굶주려 죽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몸도 불에 태우고, 팔도 불에 태운다. 통틀어 말하면 고준한 마음과, 활발한 마음과, 탈속한 마음과, 고행하는 마음이 있어 항상하는 도(常道) 속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것 같으나 원래 한 물건이 마음에 있어 고행을 하는 것이다. 마음 밖에서 조작造作하여 도道를 삼는 것은 외도外道가 된다.
(14) 활발하고 자유스러워 스스로 노래도 하고 춤추며 기뻐하여 물가와 나무 아래(水邊林下)에서 자재하게 읊으며, 어촌과 주막(漁村酒肆)에서 한가로이 자유스러움에 집착하니 이것은 임병任病21)이 된다. 또는 선지식이 총림叢林을 건설하고 법규法規를 세우며, 좌선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크게 비웃으며 가볍게 여기는 마음(輕慢心)을 가지게 된다. 이 사람은 임병任病에 떨어진 것이다.
(15) 선지식이 힐난하여 물으면 한 글귀나 많은 글귀로 대답하며, 크게 호령도 하며, 방棒도 주며 말하기를, ‘타인은 이 도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나니 모두 마구니가 되는 것이다.
(16)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심산구곡이나 한적한 방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 공부하여도 별로 소득이 없음으로 방일放逸하여 글도 보고, 시부詩賦도 지으며, 혹은 일없이 졸며 위의도 나투며, 인과因果도 모르고, 염치廉恥도 없으며, 탐욕貪慾을 행한다. 이것은 모두 외도의 무리이다. 무릇 공부에 장애障碍 되는 것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통이며, 아는 것이 큰 병통이며, 간절한 마음이 없는 것이 큰 병통이다. 다만 화두를 의심하는 것 말고는 터럭 끝(毫末)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을 두지 말라.”
5. 화두에 의심을 내더라도 지견知見에 빠지면 병이 됨(發起疑情要須勝進)
-
0001_0029_b_01L제자가 묻기를,
“화두에 의심(疑情)만 있으면, 다른 병통病痛은 없습니까?”
용성이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다시 화두에 의심을 큰 불구덩이와 같이 해서, 끊이지 않고 참구하여 가면, 병통이 될 것이 없지만, 의심(疑情)이 될수록 경계가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정도에 따라 병이 생겨나는 것이다.
(1) 화두에 의심(疑情)이 잘 되어 가는 중에 홀연히 온 대지(盡大地)가 광명으로 변화하여 조그만 터럭(些毫)만큼도 장애障碍가 없다. 이것에 집착하여 크게 깨달은 것으로 인증하고 법신변량法身邊量에 앉아 있다. 이것은 언어를 초월했다는 말에 집착하는(隔身句) 병이다.
(2) 화두에 의심(疑情)이 잘 되는 중에 홀연히 법신法身의 이치와 더불어 상응하여 굳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 마치 가난한 사람이 황금산에 앉아 분명히 황금인 줄 알지만,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병통病痛이요, 도道가 아니다.
(3) 또한 의심(疑情)이 잘 되어 홀연히 법신法身에 합일合一하게 되면, 다만 본분本分만 집착하기 때문에 옛 선인이 말하기를, ‘앉아서 흰 구름을 보는 것이 묘한 것이 아니다. 무생無生만으로 어찌 종취宗趣를 요달하겠는가?’라고 했다.
(4) 또한 의심(疑情)이 잘 되는 가운데에 홀연히 법신法身과 더불어 상응相應하여 한결같이 공空에 잠기고, 고요한 데 머물러 있어서 쉬기만 한다. 이것은 병통病痛이요, 도道가 아니다. 그러므로 옛 선인이 말하기를, ‘앉아서 시방十方을 끊어도 오히려 용문龍門에 이마를 점친 고기니, 은밀隱密하게 한 걸음을 옮기어 비룡飛龍을 이루라’고 한다.
(5) 또는 담연湛然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며, 정라라 적쇄쇄淨裸裸赤洒洒하여 가히 도저히 잡지 못할 곳에 몸을 놓아 위位를 전轉하고 기機를 돌이킬 줄 알지 못한다. 이것은 병통病痛이요, 도道가 아니다.
(6) 또는 면전面前에 은은隱隱한 한 물건이 있는 것과 비슷하니 이것을 가져 의심하다가 한 경계를 정하여 스스로 법신이치에 들어 법계성품을 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병통病痛이요, 도道가 아니다.
(7) 또는 옛 선인이 말하기를, ‘온 대지(盡大地)가 사문沙門의 한쪽 눈이며, 한 점 영광靈光이며, 자기의 영광靈光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티끌 가운데에 한량없는 법계진리法界眞理를 함유했다’고 하는 것들로 깨달음을 삼아 다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병통病痛이요, 도道가 아니다.
(8) 또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햇빛 속과 등불 그림자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담담하여 아무런 맛도 없으며(湛湛無味), 또는 온 몸을 놓아 물이 맑고 구슬이 빛나는 곳과, 바람이 맑고 달이 밝은 때에 앉아 구경究竟을 삼고, 몸을 굴리고 기운을 토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병통病痛이요, 도道가 아니다.
(9) 또는 법신法身과 합일되어 저 법신 가운데에 기특상을 내어, 종종 이상한 경계를 보고 문득 성인聖人이 되었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이것은 병통病痛이요, 도道가 아니다.”
6. 마음공부 하는 바른 길(要修心工先擇正路)
-
0001_0030_b_01L제자가 묻기를,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데에 병통病痛은 대강 알았습니다. 쉽게 성취하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용성이 답하기를,
“무릇 도를 닦는 사람은 화두에 의심(疑情)을 일으키되, 큰 불구덩이와 같이 의심하고 의심해야 한다. 마치 한 명의 대장(一員大將)이 맨손에 홀로(赤手單獨) 보검寶劍을 빼어 들고 백만 군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용맹勇猛하게 분투하여야 한다. 그와 같이 하여야 사대四大가 공空한 것을 성취하나니, 마음공부(心工) 하는 사람도 이와 같다.
또한 마음공부 하는 데는 아는 것이 큰 병病이니, 모든 아는 것을 버리고 단지 화두에 의심만 낼 것이다. 또한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단지 화두에 의심(疑情)만 하고, 고요하고 분주한 것에 마음을 관계하지 말아야 한다.
또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화두로 망상을 제거하려 하지 말며, 화두에 생각을 붙들어 매려고도 하지 말고, 다만 화두만 잡아 의심(疑情)만 해야 한다.
또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고요하게 하여 의심하되,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무릇 공부하는 사람이 고요한 곳에 앉아 정신이 혼혼무기昏昏無氣하며, 맑고 적적寂寂한 데에 빠져서 공부를 삼으면 이것은 큰 병통病痛으로 공부가 아니다.
무릇 마음공부 하는 법은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에 천언만언千言萬言을 물론하고, 단지 화두만 의심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큰 장애물障碍物이 된다. 또 옛 선인의 말을 인증認證하여 마음공부 하는 데 참고參考가 되게 한다.
옛 선인이 말하기를, ‘마음공부에 세 가지 요점要點이 있다. 첫째 크게 믿는 마음(大信心)과, 둘째 크게 격분하는 마음(大憤心)과, 셋째 크게 의심하는 마음(大疑心)이다. 그 가운데에 하나가 빠지면, 다리가 부러진 솥과 같아서 마침내 깨어진 그릇(破器)이 된다.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은, 모기(蚊蝱)가 쇠로 된 소의 등(鐵牛背)에 올라앉아, 이것저것 묻지 말고 입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 작정하고 한번 뚫으면 몸조차 뚫어 들어가는 것처럼 해야 한다.
또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은 거문고 타는 법과 같아서, 줄이 팽팽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줄이 늘어져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 같다. 공부도 이와 같이 급하게 하면 육단심肉團心이 동요하여 상기병上氣病이 나고, 한가하게(閒漫) 하면 혼침昏沈에 떨어지게 되니,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해야 한다.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은 단지 화두에 의심을 내어 정신을 집중하기 때문에, 일체의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에 짓는 바와 하는 바에 자연히 무심하게 된다. 이때를 당하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육근문六根門에 있어서 알음알이를 내는 대로 따라가서 일러 주게 된다. 그러나 다만 화두만 의심하고 다른 마음을 내지 아니하면 마군이가 어찌 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을 일으키면 천마天魔요, 일으키지 않으면 음마陰魔요, 혹 일으키기도 하며, 일으키지 아니하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煩惱魔가 되는 것이니, 정법正法 가운데는 본래 그런 일이 없다.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은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노리고 있듯이 하며, 굶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이 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이 하며, 어린아이가 엄마 생각하듯이 간절하게 하면 반드시 투철할 때가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해 나가며 오묘奧妙한 것은 마음을 잘 쓰는 데 있으니, 만일 화두를 급하게 잡으면 육단심肉團心이 동요하여 상기上氣가 되어, 혹 두통頭痛도 나며, 토혈병吐血病도 나게 된다.
공부를 해 나가며 시작할 때로부터 마치기까지 고요하고 깨끗한 것을 여의지 말고 화두를 궁구할 것이다. 고요함이 지극하면 문득 깨치고, 깨끗함이 지극하면 광명을 통달하게 되니 기운이 엄숙嚴肅하고 바람이 맑아, 동정의 경계(動靜境界)가 맑은 가을 하늘 같을 때가 첫번째 정절程節이다.
이때에 화두를 잘 잡아 앞으로 나아가면 맑은 가을 물과 같으며, 옛 사당에 향로香爐와 같아서 적적성성寂寂惺惺하여 마음이 행하는 길이 끊어질 때에 육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고 다만 화두에 의심(疑情)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점점 수승해져서 티끌이 녹아지고 광명이 장차 발현發現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정절이다.23)
만일 이곳에서 지각知覺을 내면 순일하게 잘 되는 것이 끊어질 것이니, 크게 해로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허물 없이 공부를 해서 앞으로 나아가면 동정動靜이 한결같고, 자나 깨나 성성惺惺하여, 단지 화두만 나타나는 것이다. 비유하면 물속에 비치는 달이 파도에 흔들려도 흩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아서 중심中心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며, 천만 경계가 어지러이 흔들려도(紛擾) 동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 번째 정절이다. 이와 같은 때가 되면 크게 깨달을 때가 가까운 것이다.
공부를 해 나가며 알음알이로 헤아리지 말라.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으로 얻을 수 없으며, 언어言語로 표현할 수 없으며 고요하고 묵묵함(寂默)으로 통하지 못한다. 오직 정신을 통일統一하고 의심(疑情)을 홀로 드러내고자(獨露) 한다면 알음알이로 아는 지혜(知解)를 두지 말라.”
7. 대각교 취지(大覺敎旨趣)
-
0001_0033_b_01L제자가 묻기를,
“스승님께서는 어찌하여 오늘날 대각교大覺敎를 제창하셨습니까?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용성이 답하기를,
“너희들은 어찌 미혹함이 그렇게도 심한가? ‘대각大覺’이라는 말은 온 천하의 경전에 가득 차 있으니 묻고 의심할 것이 없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며, 이름을 묘각妙覺이라 하셨다. 또 삼현三賢, 십지十地, 등각等覺을 초월하셨으니 ‘묘각妙覺’이라 하셨다. 대각大覺의 말씀을 자세히 들어라. ‘성존이 정각을 이루어 묘각을 성취한 뒤에, 자신 스스로 생각해 보니 자신의 도道가 원만히 깨닫지 못함을 아시고, 스승을 찾아 수십 일을 지내다가 대설산에 당도하였다. 그때 마침 진귀조사眞歸祖師는 칠불조사七佛祖師의 으뜸이 되신 분이셨다. 그러므로 옛 선인이 말하기를,
‘진귀조사가 설산에 계시며 眞歸祖師在雪山
총목방叢木房 가운데서 석가를 기다렸도다. 叢木房中待釋迦
조사의 심인을 석가에게 전하실 그때는 마침 임오년이더라. 傳持祖印壬午歲
석가께서 동시에 조사와 종사祖宗의 심인을 얻으셨다.’ 心得同時祖宗旨
라고 하셨다. 이것은 석가 대성이 비로소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진귀조사에게 받으신 것이니 이렇게 하여 대각大覺이 되신 것이다.24) 대각大覺께서 진귀조사에게 법을 받으신 뒤에, 자신의 제자 인천人天 백만억 대중을 모으시고 자신이 받으신 법, 즉 대각심인大覺心印을 설하시니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때 마침 가섭존자가 빙긋이 웃었다. 대각大覺께서는 가섭이 깨달은 줄 아시고, 세 곳에서 법을 전하시니 이것이 곧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 곳에서 전하신 법을 말하면, 첫째는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시고, 둘째는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드시고, 셋째는 사라쌍수 사이의 곽 안에서 두 발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것이 곧 대각大覺의 뜻이다. 그러하므로 내가 ‘대각교大覺敎’라 한다.”
부록 : 대각교의 취지(大覺敎旨趣)
-
0001_0034_a_01L제자가 묻기를,
“묘각妙覺과 대각大覺의 뜻은 어떤 것입니까?”
용성이 답하기를,
“너희들은 듣지 못했는가?
세존께서 설산에 들어가서 世尊當入雪山中
한번 자리에 앉아 육 년이 지난 것도 알지 못했다. 一坐不知經六年
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달으시니 因見明星云悟道
그 말씀과 소식 삼천세계에 가득하다. 言詮消息遍三千
라고 하셨다. 이때 석가釋迦 대성大聖이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고 널리 인간과 천상을 제도하시니 이것이 ‘묘각妙覺’이다. 또 석가 대성이 스스로 자신의 깨달음(道)이 참으로 궁극적인 깨달음(眞極)이 아닌 것을 아시고, 수십 일을 유행遊行하다가 스승을 찾아 설산雪山에 들어가셨다. 이때 진귀조사眞歸祖師가 설산에 계시면서 총목방叢木房 가운데서 석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사의 심인心印을 전하신 임오년壬午年에 석가께서 마음으로 동시에 조사의 종지宗旨를 얻으셨다고 하셨다. 이것이 석가 대성이 진귀조사에게 법을 얻으신 것이라고 하니, 이것을 ‘대각大覺’이라 한다. 대각성존大覺聖尊이 법을 얻은 후에, 인간과 천상의 백만억 대중 가운데서 조사의 심인을 설법하시니, 한 사람도 대각심인大覺心印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가섭迦葉만이 알아듣고 미소를 지으니,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시고,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드시고, 사라쌍수 사이의 곽 안에서 두 발을 나타내셨다. 조사의 심인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으로 이것이 ‘대각교大覺敎’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제자가 묻기를,
“그러면 스승님께서는 가섭을 교조敎祖로 삼는 것입니까?”
용성이 답하기를,
“나는 대각성존을 교조로 삼는다.”
제자가 묻기를,
“어찌하여 대각성존을 교조로 삼는 것입니까?”
용성이 답하기를,
“내가 처음 출가할 때에 한 사람도 나에게 도道를 증명證明해 준 사람이 없었다. 이후 내가 스스로 대각大覺의 성전聖典을 보고 명확(廓然)함을 믿고, 환연換然하고 명백해졌으니, 도의 근원은 ‘깨달음(覺)’에서 나온 것이다. ‘깨달음(覺)’이라는 것은 본각本覺, 시각始覺, 구경각究竟覺이 원만하여 둘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기를,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걷으면서 문수를 찾다가 排雲擭霧尋文殊터니
비로소 문수에 이르니 넓고 텅 빈 듯이 공하구나! 始到文殊廓然空이로다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여, 다시 공으로 돌아가고 色色空空이 還復空이오
공은 공이고 색은 색이여, 거듭하여 무진하구나!” 空空色色이 重無盡이로다
또 게송으로 말하기를,
“우뚝 솟은 기암은 비늘처럼 포개어져 있고 矗矗奇岩은 疊鱗高하고
빽빽한 잣나무는 서로 이어져 푸르구나. 密密栢樹는 相連靑이로다
무한한 흰 구름은 골짜기마다 가득하고 無限白雲은 滿洞鎖한대
크게 울리는 범종 소리는 푸른 하늘에 사무친다. 洪鐘이 轟轟碧空衝이로다
고개 돌려 산을 보니 저녁노을에 취하고 回首看山醉流霞하야
나무에 기대어 깊이 졸다 보니 해는 벌써 기울었네!” 倚樹沈眠日己斜라
제자가 묻기를,
“본분종사本分宗師께서 특별히 전하신 뜻을 스승님께서 한 말씀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용성이 답하기를,
“게송으로 말하겠다.
금오산의 천 년 달이요 金烏千秋月
낙동강에 만 리 파도로다. 洛東萬里波
고깃배는 어디로 갔는고? 漁舟何處去
예와 같이 갈대꽃 속에서 잠자더라!” 依舊宿蘆花
그때 제자들이 묻기를,
“저희들을 위하여 본분本分 진리를 설하여 주십시오.”
용성이 답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게송으로 설법할 것이니 자세히 들어라.”
단암檀庵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기를,
“밝고 밝은 온갖 풀잎이 明明百草頭에
밝고 밝은 조사의 뜻이다. 明明祖師意로다25)
물 든 논에는 백로가 날아들고 水田에 飛白鷺하고
여름 나무에는 꾀꼬리가 운다.” 夏木에 囀黃鸝로다26)
덕운德雲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기를,
“운문의 마른 똥탑이여, 雲門乾屎橛이여
법신 보신 화신 완전히 초월하였네. 全迢法報化로다
일없이 산을 돌아다니니 無事出遊山하니
백 푼이 석장 끝에 걸려 있다.” 百錢을 杖頭掛라27)
보광普光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기를,
“부처님은 일체법을 설하시어 覺說一切法이
일체 마음을 제도하셨지만 爲度一切心이라
나에게는 일체 마음이 없는데 我無一切心어니
일체법을 어찌 사용하겠는가.” 何用一切法이리요28)
회암檜庵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기를,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고 초롱을 좋아하며 好山好水好燈籠이오
삼월에 봄바람 부니 제비가 난다. 三月東風에 燕子飛로다
삼현이나 삼요는 나는 모르겠다. 三玄三了29)를 吾不知라
진양성 안에는 물이 동쪽으로 흐른다.” 晋陽城裏에 水東流라
도암道庵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기를,
“성인과 조사도 원래 터득하지 못했고 聖祖元不會요
나 또한 얻은 것이 없다. 我亦無所得이로다
운문의 호떡은 둥글고 雲門胡餠團이요
진주의 무는 길다.” 鎭州蘿葍長이라
동헌東軒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기를,
“산수와 주장자는 山水與柱杖를
고인들께서 일찍이 점검하여 얻으셨다. 古人이 曾點得이로다
나 또한 하품하며 조는데 我也打合睡하니
청풍이 빈 뜰을 지나간다.” 淸風이 過虛庭이로다
뇌묵雷默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기를,
“부처와 조사가 법을 전한 일은 覺祖傳法事를
머리를 가로저어 거부하고 나는 알려고 하지 않겠다. 掉頭吾不知라
낮잠이 한창 깊어지는데 午睡方正濃하니
산새가 또한 운다.” 山鳥又一聲이라
봉암鳳庵을 위하여 게송으로 말하기를,
“산 정상에는 바위가 높이 솟아 삐죽삐죽하고 山頭에 石矗矗이요
바위 아래에는 물이 맑고 깨끗하게 흐른다. 岩下에 水澄澄이라
독서하다가 잠을 자니 讀書又睡眠하니
꽃가지에서 새소리가 어지럽다.” 花枝에 鳥聲亂이라
용성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게송의 뜻을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풍월을 읊조리는 것과 같은 것(吟風弄月)이 아니다. 본분종사本分宗師의 본래(本分)의 뜻이다.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대각의 종지宗旨로 삼아 널리 중생을 구제하여라. 대각의 마음 도장(大覺心印)을 허공에 찍으면 그 도장의 모습이 완전히 없고 이 도장을 물에 찍으면 흔적은 있지만 그 모습은 볼 수 없고, 이 도장을 진흙에 찍으면 그 꿰맨 흔적이 완전히 드러난다. 너희들도 이와 같이 일구一句 이구二句 삼구三句로 널리 중생을 제도해라. 우리의 대각성존이 이와 같은 법으로서 중생을 제도하셨으니, 나의 가르침의 이름을 ‘대각교大覺敎’라 한다.”
제자가 묻기를,
“어떤 것이 대각大覺께서 최초에 말씀하신 수행의 근본입니까?”
용성이 답하기를,
“‘조사의 심인心印을 전하신 임오년壬午年에, 마음으로 동시에 조사의 종지宗旨를 얻으셨다’고 하시니 이것이 조사의 종지이다. 이와 같이 의심하여 갈 것이며,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셨다’고 하시니 ‘무슨 뜻으로 자리를 반으로 나누셨을까?’를 의심할 것이며, 또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다’고 하시니 ‘무슨 뜻으로 꽃을 들어 보이셨을까?’라고 의심할 것이며, 또한 ‘사라쌍수 사이에서 두 발을 보이셨다’고 하시니 ‘두 발을 보이신 뜻이 무엇인가?’ 하고 이와 같이 의심해야 한다. 대각大覺이 말씀하시기를, ‘인간과 천상의 백만억 대중이 모두 가리킨 바를 알지 못하고(罔指) 오직 가섭만이 그것을 능히 알았다’고 하시니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대각大覺의 진리를 깊이 의심하고 참구하여 보아라. 이것이 대각교大覺敎의 종지宗旨이다.”
- 1) 은산철벽銀山鐵壁 : 은銀과 철鐵은 뚫기 어렵고, 산과 벽壁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손도 대어 볼 수 없고, 이도 안 들어간다는 뜻이다. 화두를 들 때 마치 은산철벽 앞에 선 것과 같이 어떻게 해 볼 수단도 전혀 없는 경계까지 가야 비로소 선어禪語로서의 화두가 그 효용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봉 스님은 『선요禪要』에서 “바로 이러할 때는 은산과 철벽을 마주한 것과 같아서 앞으로 나아가자니 문이 없고 물러서면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했다. 『高峰原妙禪師語錄』, 『大正藏』 70권, p.679b. “正恁麼時。 銀山鐵壁。進則無門。退之則失。”
- 2)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 『碧巖錄』 제3칙, 『大正藏』 48권 p.142c. “馬大師不安. 院主問, 和尙近日, 尊候如何. 日面佛月面佛.”(마조 도일馬祖道一이 몸이 편치 못하자, 원주院主가 물었다. ‘스님, 요즈음 몸이 어떠하십니까?’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지.’) 『佛名經』 7권, “日面佛壽長一千八百歲, 月面佛壽仅一日夜.”(일면불의 수명은 1천8백 세이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룻낮, 하룻밤이다.) 마조 도일은 ‘일면불 월면불’의 말을 빌려 수명의 길고 짧음과 생멸거래生滅去來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 3) 산산수수각완연山山水水各完然 : 『碧巖錄』에 “山山水水各完然 白日靑天莫瞞人.(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어서 각각 있는 그대로가 진리인데, 밝은 대낮에 사람 속이는 말 하지 말라.)”에서 인용한 듯하다.
- 4) 『金剛般若波羅密經』, 「第7 無得無說分」, 『大正藏』 8권, p.749b. “須菩提言:「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不可說·非法·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而有差別.」”
- 5) 『首楞嚴經』, 6권, 『大正藏』 19권, p.130a. “文殊師利法王子奉佛慈旨, 卽從座起頂禮佛足, 承佛威神說偈對佛:覺海性澄圓, 圓澄覺元妙;元明照生所, 所立照性亡. 迷妄有虛空, 依空立世界, 想澄成國土, 知覺乃衆生. 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 有漏微塵國, 皆從空所生;漚滅空本無, 況復諸三有?”
- 6) 『楞嚴經正脈疏』, 『大正藏』 12권, p.363c. “長水曰, 漚滅下, 如云一人, 發眞歸元, 十方虛空, 悉皆消殞.”
- 7) 『六祖大師法寶壇經』, 『大正藏』 48권, p.349a. “何期自性, 本自淸淨;何期自性, 本不生滅;何期自性, 本自具足;何期自性, 本無動搖;何期自性, 能生萬法.”
- 8)『首楞嚴經』, 주 5 참조.
- 9)이며,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이 각覺의 체성體性은 공적한 것이고, 흔적(朕跡)이 없는 것이며, 말(言語道)이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한 것이며, 본명원신本命元辰 : 본명本命은 사람마다 태어난 해의 간지干支에 해당하는 별. 그것이 본명성本命星으로서 일생의 길흉화복이 그 별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 원신元辰은 본명성을 기초로 하고 양陽 8, 음陰 6의 추보推步에 의하여 찾아내는 것. 일종의 운명관運命觀.
- 10) 삼해탈문三解脫門 :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문 또는 방법. 이를 삼공문三空門, 삼삼매三三昧라고도 한다. (1) 공空-일체 만유萬有가 공하다고 관함. (2) 무상無相-상대적 차별이 없다고 관함. (3) 무작無作, 무원無願-일체가 구할 것이 없다고 관함.
- 11) 『宗鏡錄』 94권, 『大正藏』 48권, p.927a. “若取三解脫門作證者。 卽是溺實際之海。 背靈覺之原。 遺性徇空。 何成大道。”
- 12) 『永明智覺禪師唯心訣』, 『大正藏』 48권, ≺一百二十種 邪宗見解≻ 참고.
- 13) 건달바성乾達婆城 : 건달바乾達婆는 본래 인도 음악의 신으로 ‘신기루’를 ‘건달바성’이라고도 부른다. 향기와 음악은 모두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신기루 역시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건달바’란 범어梵語로는 ‘변화무쌍하다’는 뜻이고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뜻도 있다.
- 14) 사상死常 : 작용이 없음. 『六祖大師法寶壇經』, 『大正藏』 48권, p.359a. “汝知否? 佛性若常, 更說什麼善惡諸法, 乃至窮劫無有一人發菩提心者;故吾說無常, 正是佛說眞常之道也. 又, 一切諸法若無常者, 卽物物皆有自性, 容受生死, 而眞常性有不遍之處. 故吾說常者, 正是佛說眞無常義. 佛比爲凡夫·外道執於邪常, 諸二乘人於常計無常, 共成八倒, 故於《涅槃》了義敎中, 破彼偏見, 而顯說眞常·眞樂·眞我·眞淨. 汝今依言背義, 以斷滅無常及確定死常, 而錯解佛之圓妙最後微言. 縱覽千遍, 有何所益?”
- 15) 오십여 가지 마장魔障 : 『首楞嚴經』 9권, 10권. 『大正藏』 19권, p.147c부터 ≺五十辨魔≻ 참고.
- 16) 정定은 『首楞嚴經』에 의거하면 수음受陰을 닦는 정定이다. (14)~(20)에서도 같다.
- 17) 원상론圓常論 : 『首楞嚴經』 10권 행음行陰의 마장魔障에 등장하는 말로 “本質과 本性은 常住不變하여 항상한 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 18) 일분상무상론一分常無常論 : 『首楞嚴經』 10권 행음行陰의 마장魔障에 등장하는 말로 “모든 일어나는 현상은 항상하고 ‘나’라는 것도 언제나 변함이 없다.”라는 이론을 말한다.
- 19) 신아론神我論 : 『首楞嚴經』 10권 행음識陰의 마장魔障에서 “불교 이외의 외도에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실체적인 자아론自我論”을 말한다.
- 20) 바타와 선니(婆吒霰尼) : 둘 다 외도이다. 일체가 다 깨달음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모든 것에 아는(知)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만한 지知를 잘못 집착한 것으로 결과도 마침내 잘못되는 것이다.
- 21) 시위운동施爲運動 : 『達磨大師血脈論』, 『大正藏』 63권, p.4c. “若自心動. 乃至語言施爲運動. 見聞覺知. 皆是動心動用”(마음이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하고 견문각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음이 움직여서 작용하는 움직임이다.)
- 21) 임병任病 : 『圓覺經』 「普覺菩薩章」에서 수행의 네 가지 병통을 말한다. 임任은 인연 따라 마음 가는 대로 맡겨 두는 것이다. “나는 지금 생사를 끊지도 않고 열반을 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인연 그대로 맡겨 두고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고 하면 즉시 병통이 되는 경우이다.
- 23) 『蒙山和尙法語略錄』, 「示聰上人」, [中宗31년(1536), 智異山神興寺重刊本], pp.24~25. “趁逐工夫始終 不離靜淨二字 靜極便覺 淨極光通達 氣肅風淸動靜境界 如秋天相似時 是第一箇程節 便宜乘時進步 如澄秋野水 如古廟裏香爐相似 寂寂惺惺 心路不行時 亦不知有幻身在人間 但見箇話頭綿綿不絶 到這裏塵將息而光將發 是第二箇程節 於斯若生知覺心 則斷純一之妙大害也 無此過者 動靜一如 寤寐惺惺 話頭現前 如透水月華 在灘浪中 活潑潑 觸不散蕩不失時 中寂不搖外撼不動矣 是第三箇程節 疑團破正眼開近矣”
-
24) 진귀조사가 석가모니에게 조사선을 전했다는 설(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말한다.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전해진다. 고려 때 진정(1206~?)이 지은 『선문보장록』에는 『달마밀록』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혔고, 조선 중기 휴정(1520~1604)은 『선교석』을 저술할 때 『범일국사집』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진성여왕이 선禪과 교敎의 뜻을 범일에게 물었을 때 대답한 말이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뒤에 진귀조사를 만나 무상정등각을 얻은 조사선 경지가 참된 깨우침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오랫동안 진위의 논쟁이 되어 왔다.
『禪門寶藏錄』, 『大正藏』 64권 p.807c. “唐土第二祖惠可大師。問達磨。今付正法卽不問。釋祖傳何人。得何處。慈悲曲說。後來成規。達磨曰。我卽五天竺。諸祖傳說有篇。而今爲汝說示。頌曰。眞歸祖師在雪山。叢木房中待釋迦。傳持祖印壬午歲。心得同時祖宗旨。達磨密錄。” - 25) 1, 2구는 『龐居士語錄』에서 인용. 『大正藏』 69권 p.134b. “居士一日坐次。問靈照曰。古人道。明明百草頭。明明祖師意。如何會。照曰。老老大大。作這箇語話。士曰。你作麼生。照曰。明明百草頭。明明祖師意。士乃笑。”
- 26) 3, 4구는 왕유王維의 ≺적우망천장작積雨輞川莊作≻에서 인용. “積雨空林煙火遲, 蒸藜炊黍餉東菑. 漠漠水田飛白鷺, 陰陰夏木囀黃鸝. 山中習靜觀朝槿, 松下淸齋折露葵. 野老與人爭席罷, 海鷗何事更相疑?”
- 27) 『古尊宿語錄』 『大正藏』 68권 p.330a. “雲門乾屎橛。全超法報化。無事出山遊。百錢杖頭掛。”에서 인용.
- 28) 『大慧普覺禪師語錄』, 『大正藏』 47권 p.890c. “佛說一切法。爲度一切心。我無一切心。何用一切法。”에서 인용.
- 29) 삼현三玄 : 체중현體中玄이니, 삼세三世가 곧 일념一念이란 것이다.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이니 길고 오랜 시간을 가리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