章疏書名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개요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는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 617~686)가 저술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범]Mahāyānaśraddhotpada śāstra)』(이하 『기신론』)의 여러 주석서 가운데에서, 『기신론』의 대의(大義)를 논한 2권 1책의 주석서이다.
체제와 내용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는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 617~686)가 저술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범] Mahāyānaśraddhotpada śāstra)』(이하 『기신론』)의 여러 주석서 가운데에서, 『기신론』의 대의(大義)를 논한 2권 1책의 주석서이다. "인도의 마명(馬鳴, [범] Aśvaghoṣa, 80~150년 경)이 찬술한 『대승기신론』은 대승불교의 교의(教義)를 요약한 논서(論書)이다. 마명의 생애는 『마명보살전(馬鳴菩薩傳)』, 『부법장인연전(付法蔵因緣傳)』 등에 상세히 전한다. 바라문 출신인 마명은 불교로 개종한 후 화씨성(華氏城, 파탈리푸트라)에서 대중교화를 위해 천부적인 시재(詩才)를 살려 석가의 제자 중의 한 명인 뇌타화라(頼咤和羅, Rāstrapāla)를 모델로 한 희곡을 써서 공연하였다. 왕자를 포함한 500여 명이 그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깨달은 후 한꺼번에 출가하자 왕은 그 공연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후에 마명은 쿠샨왕조의 카니쉬카왕에 의해 북인도로 옮겨 활동하며 ‘태양과 같은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공덕일(功德日)로 불렸다. 저서로는 붓다의 생애를 시로 서술한 『불소행찬(佛所行讚)』([범] Buddhacarita, 담무참 譯)과 『대승기신론』이 대표적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와 『대승기신론별기』에서, 화쟁의 방법에 의해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사상을 나타내려 하였다. 대승불교 후기의 가장 뛰어난 논서인 『기신론』은 중관과 유식의 양대 사상을 지양하고 화합시켜, 진과 속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원효의 구도적 학문과 삶의 자세와 일치하였기에, 그는 여러 권의 『기신론』연구서를 내었고, 그것들은 당시 중국 등, 동아시아사상계에서 최고의 논서로 인정받았다.
원효는 『기신론』에서 특히 관심 있는 부분인 입의분·해석분만 연구하여 『대승기신론별기』를 찬술하였다. 그의 관심은 바로 ‘일심이문’의 해명에 있었으므로 입의분에서는 이 논의 대의인 일심, 이문, 삼대를 제시하였다. 해석분은 이 논서의 핵심으로 현시정의(顯示正義)·대치사집(對治邪執)·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은 입의분에서 제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논술하고 있다. 현시정의에서는 정의를 드러냄에 있어서 일심(一心, 즉 衆生心)을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구분하였다. 심진여문에서는 마음의 청정한 면을 여실공(如實空), 여실불공(如實不空) 등으로 묘사하였으며, 심생멸문에서는 아뢰야식의 이의(二義, 즉 覺과 不覺)와 훈습(薰習)등으로 마음의 염정연기(染淨緣起)를 밝혔다. 대치사집에서는 인(人)과 법(法) 이집(二執)의 대치를 말한다. 분별발취도상에서는 발심 수행하여 도에 나아감을 분별하는데,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해행발심(解行發心)·증발심(證發心)을 설한다. 신성취발심에서는 부정취중생 중의 열인(劣人)을 위하여 사신(四信), 오행(五行) 및 타력염불(他力念佛)을 설한다.
또한 『대승기신론별기』에는 『이장의(二障義)』에서 전개되는 현료문(顯了門)과 은밀문(隱密門)의 회통이 결론지어져 있어, 화쟁사상과 같은 원효 특유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원효는 이 책은 자신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구태여 세상에 유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그가 다른 저서에서 그것을 종종 인용한 점이나 책의 내용으로 보아 원효 사상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다루어져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원효가 화쟁의 방법으로 진속불이의 사상을 나타낸 『대승기신론별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서분(序分)은 귀경술의(歸敬述意)라 하여 붓다를 기리는 두 줄의 게송으로 되어 있다.
2) 정종분(正宗分)인 정립론체(正立論體)는 기신론 본문을 풀이한 핵심에 해당된다.
3) 원효는 유통분(流通分)을 총결회향(總結廻向)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그가 이제 까지 공부한 것을 모든 중생에게 되돌려 준다는 노래이다.
원효는 『기신론』을 풀이하기 전에 우선 그것의 전반적인 뜻(宗體)과 제목(題名)을 풀이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본문에 대한 해석을 현의(顯義)라 했다. 그는 정종분인 정립론체를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째, 『기신론』을 지은 인연을 쓴 인연분(因緣分), 둘째, 풀이할 뜻을 간단히 세운 입의분(立義分), 셋째, 입의분 내용을 넓게 풀이한 해석분(解釋分), 넷째, 신심을 닦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다섯째, 닦음의 이익을 권하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 그것이다.
해석분(解釋分)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이 논의 핵심부분으로, 바른 뜻(正義)을 나타내 보이는 현시정의(顯示正義)이다. 그것을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눈 뒤, 생멸문에서는 깨침과 못 깨침(覺不覺), 염과 정의 배어듦(染淨薰習)을 풀이한다.
둘째는 나쁜 집착(邪執)을 대응해 다스리는 대치사집(對治邪執)으로,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이 있다.
셋째는 발취도상(發就道相)으로, 도에 나아가는(발취), 즉 수행과정을 3단계로 보여 준다.
원효의 『대승기신론별기』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보다 약 10년 정도 먼저 저술한 것으로, 소(疏)의 초고본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자신의 깨달음에 비추어 『기신론』에 깊이 공감하고, 그것을 자신의 저술에 있어 논리의 기초로 하였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해동소(海東疏)』라고도 하는데, 혜원의 『대승기신론의소(大乘起信論義疏)』, 현수 법장의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와 함께 『대승기신론』의 3소로 불린다. 『대승기신론소』는 『대승기신론별기』와 달리 『기신론』전반에 대한 주석서인데, 특히 「수행신심분」 중의 지관행의 수법과 정토원생에 대해서는 그의 수행체험을 바탕으로 전개하였다. 그런데 원효가 『대승기신론소』의 곳곳에서 『대승기신론별기』를 참조하라고 한 표현으로 보아 『별기』가 비록 『해동소』의 초고에 해당되지만, 그 내용에 스스로 만족하는 자신감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기신론』에 깊이 공감하였기에, 그 내용에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가미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마명의 『기신론』은 원효의 『별기』와 『소』에 의해 마침내 그 진가가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별기』와 『소』의 예리한 주석이 세상의 이목을 끈 것 못지않게 이 책에는 원효의 뛰어난 문장구성력이나 탁월한 학문과 수행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연구소 정영식>
장소찬자
원효(元曉, 617~686)의 행적은 『삼국사기』·『삼국유사(三國遺事)』·『송고승전(宋高僧傳)』·「서당화상탑비」 등에 전한다.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에 태어나 31대 신문왕 6년(686) 음력 3월 30일 70세로 입적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이고, 압량군(押梁郡, 현 경산 자인면) 불지촌(佛地村)에서 담날내말(談捺乃末)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말(乃末)은 내마(柰麻)로 신라 17관등 중 11번째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고,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한편 설(薛)씨 족보에 의하면 원효는 아버지 내옥(乃玉)과 어머니 갈산 용씨(葛山 龍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사(思)이다.
원효는 16세이던 632년(善德王 원년)에 출가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정한 스승 없이 홀로 공부하였다. 31세(647년)에는 낭지(郎智)를 찾아가 배웠으며 34세(650년)에는 의상과 함께 요동을 거쳐 중국으로 유학가려다 실패하였다. 그리고 661년(文武王1, 45세)의 두 번째 도당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중국 유학의 필요성이 없어져 발걸음을 돌렸다. 667년(文武王7, 51세)에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을 낳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며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르면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펼쳤다. 668년(文武王8, 52세)에는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그려 보낸 난독화(鸞犢畵,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그림)를 풀이하여 즉시 회군하라는 뜻임을 간파하였다.
고선사(高仙寺)에 머물던 672년에 사복(蛇福)을 만났고, 이때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686년(神文王6, 70세)에 분황사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제40 「회향품(廻向品)」까지 쓰고 절필하였다. 그 해 경주 3월 30일에 남산(南山)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를 마명보살이나 용수보살의 수준으로 보아 ‘성사(聖師)’, ‘대성(大聖)’이라 칭송하였으며, 『화쟁론(和諍論)』을 지어 원효를 기렸다. 화쟁사상은 원효 불교 사상의 핵심으로, ‘화쟁은 백 가지 논쟁을 아우르지 못할 것이 없다.(百家之諍無所不和)’ 는 뜻이다. 즉 대승·소승, 성·상, 돈·점의 상호 대립적인 모든 논쟁을 화합하고 아울러,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화해시킨다.’(『열반경종요』)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의천은 또 분황사에 가서 원효를 위해 제문(「祭芬皇寺曉聖文」)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서도 ‘해동교주 원효보살에 짝할 이는 없다.’며 화쟁사상을 극찬하고 있다. 또한 의천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도 원효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의해동소강금강경경이유작(依海東疏講金剛經慶而有作)」·「독해동교적(讀海東敎迹)」·「화쟁론(和諍論)」·「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등이 전한다.
<고려대장경연구소 정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