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산보림鷲山寶林》은 통도사通度寺 내에 있었던 취산보림사鷲山寶林社에서 발행한 교양잡지이다. 1920년 1월 25일에 창간되어 1920년 10월호인 통권 6호까지 간행되었다. 취산보림사의 사장은 통도사가 이 잡지 경영의 주체이기에 통도사 주지인 김구하金九河가, 편집 겸 발행인은 이종천李鍾天이, 주필은 박병호朴秉鎬가, 기자는 강성찬姜性璨과 강정룡姜正龍이 담당하였다.
취산보림이 간행된 목적은 그 간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당시는 문명의 시대인 데에도 불구하고 신문 및 잡지가 희소하여 사회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을 간행의 동기動機로, 지식과 학문이 경쟁하는 당시 사회에서 바른 정신을 고취시켜 사회를 혁신하려는 것을 간행의 목적으로 표방하였다. 따라서 사회와 불교교리와의 상호 관계를 중심내용으로, 그를 통하여 불교발전을 기하면서 사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이 잡지 편집의 원칙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게재내용은 주로 논문(교육, 경제, 풍속 등), 문예물(시, 소설)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한편, 이 잡지는 스스로 조선 최고의 학술 잡지, 최상의 지식보급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예물의 경우 당시 문예의 수준이 난해하고 통속과의 조화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보다 평범한 기조를 유지하였다는 것에서는 일반 대중들을 독자로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잡지는 1920년 8월호인 5호부터는 간행소가 통도사 불교청년회로 전환되었다. 그는 통도사 불교청년회가 창립되는 것을 계기로 그를 기념, 협찬하기 위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그 간행의 주체를 통도사에서 통도사 불교청년회(회장 황기우黃基瑀, 총무 박원찬朴圓讚)로 양도시키면서 운영의 자금으로 1,500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도후 5・6호가 나온 이후 간행이 중단된 것을 보면 재정상황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이 잡지도 시사 관련내용은 불가하다는 편집의 원칙을 정하였지만, 일부 내용은 일제 당국이 삭제를 하는 등 출판에 제재를 가해 간행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이 잡지는 당시 지성사의 단면을 보여주면서도 당시 통도사 및 통도사 불교청년회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