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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제목정보
대표서명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발행정보
발행기관 조선불교월보사
발행자 권상로


제1호

제목정보
제호 제1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2. 02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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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2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2. 03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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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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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1912. 04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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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4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2. 05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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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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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1912. 06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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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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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1912. 07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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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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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1912. 08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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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8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2. 09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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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9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2. 10


제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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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0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2. 11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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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1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2. 12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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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2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3. 01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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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3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3. 02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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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4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3. 03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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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5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3. 04


제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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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6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3. 05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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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7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3. 06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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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제18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3. 07


제19호

제목정보
제호 제19호
발행정보
발행년 1913. 08

[서지해제]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는 원종圓宗 종무원宗務院에서 운영하였던 조선불교월보사朝鮮佛敎月報社가 발행소가 되어, 1912년 2월 25일에 창간호를 펴낸 이후 매달 1회씩 1913년 8월호인 통권 19호까지 발간한 불교 종합잡지이다. 이 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은 권상로權相老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잡지는 1912년 6월, 원종 종무원이 조선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朝鮮禪敎兩宗各本山住持會議院으로 그 명칭이 전환됨에 따라 그 운영 주체의 명칭도 바뀌었다.
1908년 3월, 각 도 사찰대표 52인은 원흥사元興寺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원종 총무원을 설립시킴과 동시에 이회광李晦光을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이회광은 원종을 일제 당국에게 승인받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당하자 1910년 가을 이회광은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이른바 매종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게 매종한 성격을 갖고 있는 조동종 맹약은 그 내용이 불교계에 알려지면서 한용운 등이 주동한 임제종臨濟宗 운동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임제종 운동으로 당시 불교계는 남당南黨과 북당北黨이 대립하였다고 표현될 정도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이 《조선불교월보》는 바로 그 북당이라 지칭된 이회광이 주도한 원종 측에서 불교의 중흥을 내세우면서 만든 잡지이다.
그런데 원종 종무원은 1910년에 이미 불교계 최초의 잡지인 《원종圓宗》(김지순金之淳 주간主幹)을 2호까지 펴냈으나 그는 내용과 형식이 미비하였다고 한다. 이에 《조선불교월보》는 그 《원종》의 부족한 점을 극복하여 만든 불교 종합잡지이기에 다음과 같은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당시 불교계의 현실인식을 살펴볼 수 있을 뿐아니라 불교계의 제반 정황을 전하고 있어, 1910년대 불교사를 연구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측면의 자료적 가치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로는 당시 풍미하고 있었던 사회 진화론이 불교계에 수용된 사정이 나타나고 있다. 개항기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계열에서는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민족운동의 이론적 근간으로 활용하였지만, 불교계에서는 그를 수용하여 불교를 중흥, 발전시키겠다는 의식은 나타나면서도 민족운동에 대한 의식은 박약하였다. 바로 이 측면이 조선불교월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기조인 것이다.
둘째로는 당시 불교계의 일제에 대한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일제는 한국을 강탈한 직후 사찰령을 시행하여 불교계를 식민통치에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계는 그 사찰령으로 인하여 불교가 중흥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등 인식의 한계를 노정하였다. 이 잡지에는 바로 그 사찰령에 대한 당시 불교인의 의식과 함께 사찰령 제정 이후의 사정을 전하는 다수의 사료가 있다.
셋째로는 당시 불교인들의 다양한 현실인식과 함께 사상적 편린 등을 살필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성격을 갖고 있는 《조선불교월보》는 1911년 가을부터 ‘월보月報’간행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어, 원종 측의 우월성을 과시하면서 불교의 중흥을 꾀하기 위한 목적도 개재된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불교월보》의 내용구성을 그 목차로 이해하면 창간호부터 12호까지는 논설論說, 강단講壇, 문원文苑, 교사敎史, 전기傳記, 기서奇書, 학해學海, 사림詞林, 잡저雜著, 소설小說, 관보官報, 잡보雜報, 별보別報 등으로 되어 있다. 13호부터는 광장설廣長舌, 정법안正法眼, 무봉탑無縫塔, 대원경大圓鏡, 한갈등閑葛藤, 무공적無孔笛, 언문부, 관보초官報抄, 잡화포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언문부가 포함된 것은 부녀자들이 한문을 잘 모르는 사정이기에 부녀자들에게 잡지를 보급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불교인들의 다양한 의식을 개진할 수 있는 종합지로서 그리고 불교계의 동향을 알 수 있도록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불교월보》는 편집자 스스로 그 잡지를 승려계의 모범模範, 학생계의 양사良師, 수증가修證家의 보잠寶箴, 종교가의 명감明鑑, 한묵가翰墨家의 호우好友, 광고력이 탁월卓越하였다고 평한 바에서 그 성격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잡지는 편집의 규칙에서 ‘단순單純한 종교 성질宗敎 性質’만을 취급한다고 하면서 정치에 관련된 내용은 게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였다. 이 잡지를 간행하는 불교월보사의 사무직원은 사장 1인, 편집 1인, 서기 1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