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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惟心)

《유심惟心》은 한용운이 주도한 유심사惟心社에서 불교계의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한 수양잡지修養雜誌로서, 이 잡지의 편집 겸 발행자는 한용운이었다. 이 잡지는 1918년 9월에 창간된 이래 동년 10월에는 2호가, 12월에는 3호가 나왔다.
《유심》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용운의 행적 및 사상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기에 《유심》 발간 이전의 활동을 중심으로 그를 요약하고자 한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하자 그 이전부터 일본불교에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거나 혹은 일본세력을 이용하여 불교계를 주도하려는 불교계의 일부 인사들은 새로운 변화에 처하였다. 이에 그 대처로 나타난 결과가 이회광이 주도하였던 원종圓宗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체결한 ‘맹약盟約’이었다. 그 맹약은 요컨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게 매종한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기에 전불교계에서 그 반대 움직임인 임제종臨濟宗 운동이 일어났다.
그 운동은 전라도・경상도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그는 한용운・박한영 등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 운동은 1912년 6월경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탄압 등으로 인하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은 그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거점으로 임제종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그는 조선불교회朝鮮佛敎會 및 불교동맹회佛敎同盟會의 결성이었다. 이 조직은 사찰령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당시 주지들을 배제하고, 불교청년들의 기반하에 자주 적인 불교의 발전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조직의 결성을 통한 노력도 끝내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정상화되지 못하였다. 위와 같이 자주적인 불교 발전을 기하려다 좌절당한 한용운은 그의 정신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강구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유심》 간행을 통한 불교청년의 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간행된 유심은 자연 청년들의 의식 계몽과 당시 사회의 정황 그리고 불교교리 등이 그 편집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유심》에 기고한 집필진을 보면 한용운을 비롯하여 박한영, 김남전, 백용성, 권상로, 강도봉, 이능화 등 당시 불교계에서 불교의 포교 및 대중화에 일익을 담당한 주역들이 대거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3・1운동에 참여한 이광수와 최린도 기고하였음을 유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