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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불보(海東佛報)

《해동불보海東佛報》는 1913년 11월 20일에 창간되어 1914년 6월호인 통권 8호까지 간행되었다.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는 1913년 8월호인 19호를 내고, 2개월 동안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불교월보사의 ‘소분小分(내부 갈등)’으로 인하여 《조선불교월보》의 명칭을 변경하여 계속 발행하고 社名도 개정한다는 사정하에서 나온 것이 《해동불보》이다. 그러므로 발행의 주체와 잡지의 성격은 《조선불교월보》와 거의 같다고 하겠다.
즉, 발행처는 조선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소)朝鮮禪敎兩宗各本山住持會議院(所)이었으며 잡지의 성향으로는 진화론의 일정한 수용 및 그 영향과 일제의 사찰정책을 수용하고 있는 당시 불교계의 의식 등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잡지에서도 당시 불교계의 제반 동향 그리고 당시 불교계의 현실인식 등을 살필 수 있는 기본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해동불보》의 규약規約에 불교佛敎의 종지宗旨를 천화闡化한다든가, 순수학리 및 덕성을 공구攻究・계도啓導하며, 정치 및 시사득실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불교사상의 중흥을 목적으로 간행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잡지명을 ‘해동불보’라 칭한 것에서도 해동海東, 즉 한국에 불교를 중흥・발전시켜야 하겠다는 의식이 개재된 것임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이 《해동불보》는 ‘해동불교海東佛敎’로 칭하여지기도 하였는데, 어떤 연유로 그렇게 불리워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예컨대 한용운이 《불교佛敎》신新1집輯(1937. 3)에 기고한〈불교속간佛敎續刊에 대對하야〉에서도 ‘해동불교’로 칭하였고, 《불교시보佛敎時報》 55호號(1940. 2. 1)의 〈불교속간재속간佛敎續刊再續刊에 대對하여〉에서도 그러하였으며 1976년 보련각에서 이 잡지를 영인하였을 때에도 그리 칭하였던 것이다.
《해동불보》의 내용목차를 보면 광장설廣長舌, 사자후獅子吼, 무봉탑無縫塔, 대원경大圓鏡, 유성신流星身, 한갈등閑葛藤, 무공적無孔笛, 언문부, 관보초官報抄, 잡화포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광장설과 사자후는 논설적인 내용을, 무봉탑은 학술적인 내용을, 대원경은 전기적傳記的인 내용을, 기타내용은 사림적詞林的인 소재를 담고 있다. 그 내용 중에서 특기할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이 3호에 기고한 〈불교진화佛敎進化의 요령要領〉은 당시 불교계의 진화론 수용에 대한 현실인식을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4호에 게재된 〈조선선교양종이본산주지회의소제삼회총회록朝鮮禪敎兩宗二本山住持會議所第三回總會錄〉은 당시 주지회의소의 운영 및 그 성격 그리고 일제 사찰정책을 인식하는 불교계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글이다. 6호에 예운산인猊雲散人(본명 최동식崔東植, 필명 최취허崔就墟)이 기고한 교육발전敎育發展의 사의私議)는 비록 한 개인이 서술한 것이지마는 그 글에는 당시 불교계 교육의 내용, 방법, 제도 등에 대한 구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러한 《해동불보》의 간행은 해동불보사海東佛報社에서 담당하였는데 그 사장겸무社長兼務에는 박한영朴漢永, 편집에는 최예운崔猊雲, 서기 겸 회계에는 김인해金印海 등이었다. 한편 이 《해동불보》의 전체적인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 대부분이 주로 박한영이 주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한영은 이 잡지의 간행사의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그 내용의 다수를 박한영朴漢永, 귀산사문龜山沙門, 영호생暎湖生, 석전산인石顚山人 등의 여러 이름으로 기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잡지의 기고문에는 선암사仙巖寺 주지인 장기림張基林과 보림사寶林寺 주지인 김학산의 글이 나와 있다. 이들은 1911년경 원종의 조동종 맹약의 반대로 시작된 임제종 운동의 핵심인물들이었다. 물론 박한영도 그 중심인물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임제종 운동은 1912년 6월 일제의 강압으로 그 문패를 내리는 등 운동이 종료되고, 한용운만 그 운동을 지속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도자들은 이 회광이 주도하는 선교양종주지회의원에 합류하였다. 이에 장기림과 김학산의 글이 이 잡지에 전하고 잡지의 총괄 간행을 박한영이 담당하였다는 것은 바로 그 정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